百 濟

백제 부흥의 꿈, 부안 주류성

吾心竹--오심죽-- 2010. 1. 30. 18:02
백제 부흥의 꿈, 부안 주류성| ☞여행추천명소
동문 조회 60 | 09.09.05 07:51 http://cafe.daum.net/GS75/5ODt/1749

▲ 주류성 복신굴이다. 큰 굴실에 작은 굴 두 개가 있는 구조다. 백제부흥군을 지휘했던 복신이
살았던 굴로 주류성 ‘부안설’의 가장 명확한 증거가 되는 공간이다.
ⓒ 김태성 기자

분명하다. 기록은 이긴 자의 것이다. 패자는 이미 사라졌으므로 말이 없다. 어떤 기록도 남기지 못하고 역사가 파놓은 함정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역사의 음모다.
660년 7월 백제는 패망한다. 알려진 대로라면 백제의 생명은 거기까지였다. 그러나 의문이 남는다. 당시 백제의 인구가 620만 명이었고 영토 안에 축조된 성이 200개였다. 사비성은 다만 백제의 수도일 뿐이다. 수도가 함락됐기 때문에 백제가 멸망했다는 공식은 성립되기 어렵다. 중심이 무너져도 주변이 남는다. 백제는 왕과 귀족들만의 나라가 아니었다.

과연 의자왕의 항복으로 백제의 목숨은 영원히 꺼져 버린 것일까. 간혹 백제 부흥군에 대한 언급이 나오기는 한다. 그러나 너무 단순하다. 수장이었던 몇몇의 이름만 언급될 뿐 싸움의 정황에 대해서는 함구령이 내려져 있다. 과거의 시간 속에서도 그랬고, 1300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렇다. 확실하다. 역사의 전면에 서 있는 사람들은 모두 승리자이다. 다른 건 필요 없다.

의자왕 즉위 후 백제는 강했고, 신라는 무력했다. 싸울 때마다 졌고, 대야성을 비롯해 20개의 성을 백제에게 빼앗겼다. 왕권 강화를 위한 의자왕의 전쟁은 지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승리자는 싸움의 판에 당을 끌어들인 신라의 무열왕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인간은 누구나 비열하다. 백제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무너졌다.

660년 7월 이후, 그러니까 의자왕이 당나라 장수 소정방에게 항복한 다음의 백제 역사가 부안에 있다. 주류성이다. 엄밀히 말해 백제는 그때 멸망한 게 아니었다. 이후로도 삼 년 동안 나라를 되살리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고, 거의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 싸움의 중심 거점이 바로 주류성이다. 《일본서기》에는 주유성으로 표기돼 있다.

▲ 울금바위를 품고 있는 주류성, 1300년이 넘게 지났지만 상곽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
다. 견고한 산성이다.
ⓒ 김태성 기자

싸움이 끝나는 순간 시작된 ‘진짜 싸움’

660년 여름 백제 땅에 전운이 감돈다. 당나라의 소정방이 13만 대군을 이끌고 덕물도에 상륙한다. 신라의 김유신은 5만의 병력으로 백제 동부전선을 넘었다. 합이 18만, 백제가 막아내기엔 버거운 숫자다.

의자왕 직위 후 계속 당하기만 했던 신라는 복수를 해야 했다. 그들은 백제를 무너뜨리고 반도의 패권을 쥐고 싶었다. 당의 노림수는 단순하지 않다. 다각도다. 당의 칼날은 궁극적으로 고구려를 겨누고 있었다. 백제가 사라지면 전쟁이 훨씬 쉽다. 신라와 함께 앞뒤에서 고구려를 공격할 수 있다.

어쨌거나 싸움은 너무 쉽게 끝났다. 황산벌의 패배는 사비성의 함락으로 이어졌고, 전쟁은 시작되자마자 끝났다. 7일이 걸렸다. 백제로 진군한 지 두 달도 안 돼 소정방은 의자왕과 귀족, 백제의 백성들을 당의 수도인 장안으로 압송했다. 나당연합군의 완벽한 승리였다. 그러나 싸움이 끝나는 순간 진짜 싸움이 시작됐다. 망한 나라 백제의 백성들은 끌려가는 왕 앞에서 눈물을 흘렸고, 곧바로 칼을 들었다. 백제부흥운동의 시작이었다. 역사가 기록한 것처럼 의자왕은 방탕한 왕도 아니었고, 삼천궁녀는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는 백제 백성의 존경을 받던 왕이었다.

백제부흥의 선봉은 흑치상지였다. 그는 임존성(충남 예산)으로 들어가 사람을 모았다. 채 열흘이 되지 않아 3만 명이 임존성으로 들어왔다. 부흥운동은 시작부터 백성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당연하다. 그 싸움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한 전쟁이었고, 백성들은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나라 안에서만 백성은 존재한다.

▲ 원효가 중건한 개암사, 멀리 울금바위가 보인다.
ⓒ 김태성 기자

그 해 8월부터 부흥의 깃발은 들불이었다. 무왕의 조카이며 의자왕과는 사촌이었던 복신이 흑치상지와 합류했고, 승려인 도침이 주류성에서 일어났다. 백제의 영토는 거의 다 회복됐다. 당과 신라 연합의 백제 지배는 영향력이 미미했으며 불완전했다. 사비성과 그 인근 정도만 연합군의 세력권 안에 있었다. 사비성에 주둔한 병력도 당군 1만2000명, 김인태가 지휘하는 신라군 7000명이 전부였다.

복신이 지휘하는 부흥군은 사비성 외곽에 설치된 목책들을 격파했다. 군량을 탈취하고 기세를 모아 성을 포위했다. 의자왕이 항복한 지 불과 두 달만의 일이다. 나당연합군은 고립됐다. 식량이 없어 밥도 먹지 못했다.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인육을 먹었다는 기록도 있다. 다급해진 신라의 무열왕이 몸소 군대를 이끌고 구원하지 않았다면 사비성을 함락할 수도 있었다.

무열왕은 이례성(충남 논산)을 공격해 9일 만에 다시 함락시킨다. 주변의 20개 성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곧바로 항복했다. 전세가 역전됐다. 이례성이 뚫리면서 오히려 부흥군의 후미가 차단됐다. 몇 차례의 전투에서 부흥군은 패배한다. 대패였다. 사비성 앞에서 펼쳐진 10월30일의 전투에서 1500명의 전사자가 발생했고, 11월5일 계탄전투에서도 700여 명의 희생자를 남겼다.

복신은 결국 도침이 웅거하고 있던 주류성으로 퇴각한다. 당군도 중심 거점을 싸움에 용이한 웅진성으로 옮긴다. 그때부터 3년 동안 주류성은 백제의 또 다른 수도였다.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도 주류성으로 건너와 백제 왕조의 마지막 임금 풍왕에 오른다. 전쟁의 새로운 국면이 시작된 것이다.

“백제의 멸망을 660년으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백제부흥군은 소규모 부대가 아니었다. 나라의 운명을 걸었으며 그들이 곧 백제였다. 부흥군의 중심 거점이 주류성이다. 망한 나라 백제를 다시 회생시키려는 재건의 꿈이 부안 땅 주류성에서 시작된 것이다.” 부안생태문화활력소 허철희 대표의 말이다.

▲ 시기적으로 660년 훨씬 이전에 만들어진 고인돌이다. 그러나 어
찌된 일인지 부안 사람들은 저 고인돌들을 ‘신라 28장군 무덤’이라
고 부른다.
ⓒ 김태성 기자

백제 재건의 꿈 키운 주류성은 어디인가?

부안에 간다. 거기 주류성으로 추측되는 성이 있다. 개암사 뒤 울금바위를 품고 있는 위금암산성이다. 확답은 없다. 여전히 주류성이 어디인가에 대한 논란은 끝나지 않았다. 부안설로 거의 굳어지고 있지만 아직 확증을 얻지는 못했다. 패망한 백제가 어떤 기록도 남겨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만한 성이 아니다. 요새다. 위에서 잠그면 아래에서 허물기 쉽지 않다. 지키기 쉽고 치기 어려운 성이다. 산성 정상엔 거대한 바위가 있고 가파른 능선을 따라 성은 3km를 이어진다. 견고하게 지어진 산성이다. 울금바위 부근은 1300년이 넘게 지났지만 성곽의 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외로운 시간이 한참을 지나고 주류성은 지금 평안하다.

주류성의 정확한 위치는 오랫동안 미궁이었다. 당대의 석학이었던 다산 선생도 주류성을 찾았지만 정확한 장소를 비정하지는 못했다. 한때 주류성의 위치에 대해 여러 설이 난무했다. 건지산성(충남 서천)설과 홍성군설, 연기군설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안의 위금암산성설이 있다.

사서에 기록된 주류성의 지형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서기》나 《구당서》에 의하면 주류성은 백강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농토와는 거리가 멀고 땅은 척박하다. 산이 험준하고 계곡이 좁아 지키기는 쉽고 공략은 어려운 난공불락의 요새다.

사학자 이병도가 주창한 건지산성설을 먼저 살핀다. 건지산성의 동쪽과 남쪽은 넓은 평야다. 험한 산세를 가지지도 않았다. 게다가 당군이 주둔하고 있는 사비성과 너무 가깝다. 일단 그곳을 주류성으로 보기는 어렵다. 홍성설은 고산자 김정호가 제기했다. 그의 《대동지지》에는 이런 말이 있다. <홍주목은 본래 백제 주류성인데, 당이 지심주로 고쳤다.> 하지만 주류성으로 지목된 홍성의 학성 주변에는 농지가 있고, 남쪽으로도 천수답이 모여 있다. 역시 문헌과 일치하지 않는다. 연기군설은 단재 신채호 선생이 언급했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당산성은 백제부흥군을 모두 수용하기에 규모가 너무 작다. 입지조건도 맞지 않아 처음부터 단재의 주장은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부안만 남았다. 위금암산성설은 일본의 사학자 아다 쇼코가 처음 언급했고 신민족주의 사학자 안재홍도 여기에 동의했다. 일단 지형의 생김이 기록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또한 문헌을 보면 주류성과 하룻밤 사이의 거리에 피성이 있다. 학계는 피성을 김제로 비정한다. 김제와 부안은 하룻밤에 걸어갈 수 있는 거리이다. 역시 일치한다.

무엇보다 《구당서》 백제전에는 부흥군의 내분과 관련하여 의미 있는 기록이 있다. <복신은 병권을 쥐고 흔들어 부여풍과의 사이에 시기가 생겼다. 복신은 거짓 병을 핑계로 굴실(窟室)에 숨고 부여풍이 병문안 오는 것을 기다려 기습, 왕을 살해하려 했다.> 그렇다면 주류성에는 무조건 굴이 있어야 한다. 위금암산성에는 세 개의 굴이 있다. 원효굴과 베틀굴, 복신굴이다.

《흑치상지 평전》의 저자 이도학은 “부실한 기록들 속에서 제대로 주류성의 위치를 가려내려면 주변 정황을 살펴야 한다. 주류성이 어디인가에 대한 여러 설들은 모두 나름의 설득력을 갖지만 완벽하게 정황이 들어맞는 곳은 부안밖에 없다. 기록들이 증명한다. 논쟁이 끝나지는 않았지만 가장 정통성을 갖는 곳은 위금암산성이다”고 말했다.

▲ 상서면 고잔리 목포마을에서 발견된 배맷돌, 지금은 논이지만 신라와 백제가 대립했던 때,
그곳은 바다였다.
ⓒ 김태성 기자

동아시아 4개국 운명을 건 사투 '백강구전투'

주류성에 거점을 둔 백제부흥군은 갈수록 그 세가 확장됐다. 662년 신라와 백제부흥군은 총력을 다해서 싸운다. 주류성과 별반 멀지 않은 두량이성에서였다. 신라는 대패한다. 이 패배로 무열왕은 아들인 문무왕에게 왕권을 넘겨준다. 부흥군은 기세를 몰아 사비성도 공격했다. 거의 승리를 눈앞에 뒀다. 다시 백제가 부활할 수 있는 기로에 선 것이다.

문제는 내분이었다. 역시 가장 큰 적은 자기 안에 있다. 부흥군을 이끈 세 지도자 복신과 도침, 부여풍이 서로를 믿지 못했다. 특히 복신의 힘이 날로 커졌다. 힘의 균형은 복신이 김흠순의 신라 군대를 고부에서 대파하는 순간 갈렸다. 《답설인규서》에는 그 승리 직후 <남방의 여러 성들이 일시에 모두 반란을 일으켜 복신에게 속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부흥운동에 별반 적극적이지 않던 노령산맥 이남 지역이 고부싸움을 계기로 모두 복신의 영역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복신은 결국 도침을 살해하고 그 예하의 병력까지 흡수한다. 그러나 왕권에 위협을 느낀 풍왕이 다시 복신을 제거한다. 663년 6월의 일이다. 내분과 그에 따른 숙청의 과정을 거치며 부흥군의 힘은 급속하게 약해졌다. 상대의 허를 미리 간파하면 싸움에서 이긴다. 나당연합군은 분열의 조짐을 놓치지 않았다.

마지막 결전은 663년 8월에 있었다. 신라는 문무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었고 신라의 28장군이 호위했다, 당의 수장은 유인궤였다. 나당연합군은 주류성을 포위한다. 그러나 부흥군에게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왜의 지원군이 오고 있었다. 왜의 제명여왕은 멸망한 백제를 되살리기 위해 국력을 총동원한다. 그리고 663년 3월 군사 2만7000명, 전함 1000척에 이르는 대규모 군대를 파병했다. 왜의 전선이 상륙한 곳은 백강이었다. 지금의 동진강 하구다. 그러니까 백강에서 동아시아 4개국이 국가의 운명을 걸고 맞붙은 셈이다. 백강구(백강 하구)전투다. 당과 신라가 연합했고, 백제와 왜가 결합했다. 두 세력 다 수륙양면 작전을 펼쳤다.

군사의 세로 보면 오히려 백제와 왜가 더 유리했다. 왜의 전함은 1000척이었지만 백강구에 포진한 당의 전선은 170척에 불과했다. 그러나 백강구전투에서 풍왕과 왜군 장수들은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전선의 수를 너무 믿고 날씨를 제대로 살피지 않았다.

8월28일 전투가 시작됐다. 바람은 당에 유리했다. 《일본서기》는 전쟁의 시작을 이렇게 기록한다. <우리가 먼저 공격하면 저들은 스스로 물러갈 것이다.> 백제와 왜 연합군의 선제 공격이었다.
그러나 당은 진용을 굳건히 지킨 채 좌우에서 왜 전선의 선공을 되받아쳤다. 당의 가장 주효한 공격 무기는 불화살이었다. 바람이 당의 편이었다. 1000척의 왜 전함은 자기들끼리 부딪치면서 불에 탔다. 바람을 미리 살피지 않았기 때문에 뱃머리를 돌릴 수조차 없었다. 2만7000명의 왜군 부대는 일순간에 궤멸됐다. 한 번의 싸움으로 전선 400척이 불탔다. 백강은 온통 붉은빛이었다.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붉게 하고, 바닷물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백강구전투의 패배로 이미 승부는 갈렸다. 9월7일 결국 주류성도 함락됐다. 《일본서기》는 그 날을 이렇게 기록한다. <백제의 이름은 오늘로 끊어졌다.>
663년 백제가 완전히 멸망하고 1344년이 흘렀다. 바람 같은 시간이었다. 결코 강한 자가 이기는 게 아니다. 살아남은 자가 강하다. 이것이 전쟁의 논리다.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역사는 비정하다. 살아남은 자만 기억한다.

▲ 나라 잃은 백제 유민들을 다독이기 위해 676년 부안에 온 원효가 살았다고 전해지는 원효굴.
ⓒ 김태성 기자

원효는 왜 부안에 왔을까?
주류성의 원효굴

원효의 사상은 넓다. 그는 어느 한 학설을 고집하지도 않았고 또한 버리지도 않았다. 그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융화다. 백제가 완전히 멸망하고 13년이 지난 676년 원효는 부안에 온다. 부안의 개암사를 중건한 사람이 원효다. 그는 주류성의 굴에서 수행하고, 개암사에서 야단법석을 열었다. 백제의 유민들은 그의 설법을 듣기 위해 개암사로 몰려들었다.

주류성 정상부인 울금바위에는 세 개의 굴실이 있다. 복식굴과 베틀굴 그리고 원효굴이다. 다른 굴들은 쉽게 사람의 접근을 허락하지만 원효굴은 쉽지 않다. 20m의 암벽 정중앙에 굴이 버티고 있다. 벼랑 사이로 비좁은 길이 하나인데 밑이 아득하다.

이규보는 《남행월일기》에서 원효굴에 다녀온 이야기를 적고 있다. <원효방에 갔다. 나무 사다리가 있는데 높이가 수십 층이나 되어 다리를 후들후들 떨면서 찬찬히 올라가니, 정계(庭階)와 창호(窓戶)가 수풀 끝에 솟아나 있는 듯 했다.> 원효굴에 서서 먼 곳을 보면 눈이 맑아진다. 닫힌 세상이 새롭게 열리는 느낌을 받는다.

원효는 땅의 통일을 믿지 않았다. 삼국이 통일신라 하나로 통합됐지만 진정한 하나됨은 정서와 생활의 일체 속에서 온다고 생각했다. 그가 주류성에 온 까닭은 나라를 잃은 백제 유민들을 다독이기 위해서였다. 663년 그곳에서 백제는 완전하게 패망했다.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의 허정균씨는 “삼국통일을 바라보는 원효의 시선은 《법화경》 속에 있다. ‘부처님이 세 사람에게 각각 다르게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임시적인 방편에 지나지 않으며 그 셋은 모두 커다란 한 그릇에 담겨지는 것’이다. 그는 패망한 나라 백제의 유민들을 달래며 삼국이 한 그릇에 담기는 시간을 갈망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