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 濟

白江(或云 伎伐浦) 炭峴(或云 沈峴) 我國之要路也

吾心竹--오심죽-- 2010. 1. 30. 21:13

 
백제장군 의직,
뻘 헤치고 뭍에 오른 당나라군 수효 감당 못해

 

편집국 기자 newssc@newssc.co.kr

 

 


■ 심층취재
/ 금강의역사, 기벌포 바로알기<1>



백제가 멸망할 무렵 백제 수도 사비성의 관문이자 군사적 요새지 금강하구에서는 3차례의 큰 전투가 있었다. 당의 기벌포상륙작전과 당과, 신라, 백제, 왜와 고구려가 참여한 동아시아 최대의 국제 해전인 백강전투, 그리고 신라가 이 땅에서 당군을 마지막으로 축출한 기벌포 해전이 그것이다. 금강하구 장항을 무대로 펼쳐진 이 같은 전투를 3차례에 걸쳐 알아본다. <편집자>

   
▲ 영조 년간에 편찬한 ‘해동지도’에 나타난 장암진성. 전망산과 후망산 사이로 파고드는 만이 금강 입구를 지키는 천혜의 요새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이곳이 백제시대의 소부리주 기벌포이다.
당태종 이세민의 천하의 패자가 되려는 야심은 연개소문에 의해 좌절된 후 고구려와의 전면전에서는 승리할 수 없음을 알고 소규모 국지전을 벌이며 고구려를 피로하게 만들었다.
또한 백제와는 화친을 도모하며 전통적인 이이제이의 전략을 구사하려 하였다. 그러나 백제가 고구려와 동맹을 맺자 당은 신라를 적극 끌어들였다.

659년(태종 무열왕 6년) 신라가 당에 사신을 보내 또다시 원병을 청하자 당은 마침내 출병을 결정하였다. 이 때 당은 고종의 황후인 측천무후가 섭정하고 있었다.

660년 3월 당의 고종은 조서를 내려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아 좌위장군(左衛將軍) 유백영(劉伯英),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 풍사귀(馮士貴),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방효공(龐孝公)을 거느리고 군사 13만 명을 통솔하여 백제를 치게 하였다.


당군의 길라잡이 김춘추 아들 김인문

당고종이 당에 와있던 김춘추의 아들 김인문을 불러 도로의 험난한 사정과 행군의 편의에 대하여 묻자 김인문이 소상하게 대답하였다. 이에 김인문에게 신구도부대총관의 직위를 주어 길잡이를 하게 하였으며 신라 왕 김춘추(金春秋)를 우이도행군총관(  夷道行軍摠管)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당나라 군사와 합하게 하였다. 나당연합군이 결성된 것이다.

당의 최정예군사들인 이들은 산동성의 협주(莢州:오늘의 액현(掖縣))를 출발하여 1,900여 척의 병선에 나누어 타고 6월 21일에 덕물도(오늘의 덕적도. 덕적도의 소야(蘇爺)반도는 소정방이 진을 친 데서 생긴 이름이다)에 도착하였다. 5월 26일에 신라왕은 유신(庾信), 진주(眞珠), 천존(天存)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여 6월 18일에 남천정(南川停:이천)에 이르렀다. 신라왕은 태자 김법민(후일 문무왕)으로 하여금 병선 100여척을 거느리고 가서 소정방을 영접토록 하였다.

6월 21일 덕물도에 정박한 함상에서 소정방과 김법민이 백제를 칠 작전을 세웠다. 여기서 당과 신라는 동시에 백제를 협격하여 백제의 1차 방어를 물리친 뒤 합세하여 사비도성으로 진격키로 하였다. 즉 당의 수군은 기벌포로 상륙하고 신라는 탄현을 넘어 7월 10일에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신라왕 김춘추는 대장군 김유신과 장군 품일, 흠춘 등으로 정병 5만을 거느리고 백제로 진격토록 하고 자신은 금돌성(지금의 경북 상주 백화산)에 머물렀다.


둘로 나눌 수밖에 없었던 백제군

백제의 상좌평이었던 부여성충(扶餘成忠)은 옥중에서 죽을 때 신라와 당의 침입을 예견하고 “육로로 쳐들어오는 군사는 침현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 해안으로 들어서지 못하도록 하십시오(陸路不使過沈峴 水軍不使入伎伐浦之岸)”라고 하였는데 덕물도에서 휴식을 취한 당군은 해로로 남하하여 성충의 예언대로 기벌포로 향했고, 김유신, 김품일, 김흠순(김유신의 동생)등이 이끄는 5만의 신라군은 탄현으로 진격하였다. 의자왕은 신하들을 불러놓고 대책을 물었다. 그러나 의견은 둘로 나뉘었다.

좌평 의직이 “당병은 멀리서 바다를 건너왔으므로 물에 익숙치 못한 자는 배에서 반드시 피곤할 것이니, 처음 육지에 내려서 사기가 정정치 못할 때 급히 치면 가히 뜻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신라인은 대국의 도움을 믿는 까닭에 우리를 가벼이 여기는 마음이 있을 것이니, 만일 당인이 불리함을 보면 반드시 두려워하여 감히 날쌔게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인과 먼저 결전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달솔 상영 등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당병은 멀리서 와서 속전할 의욕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예봉을 당하지 못할 것이요, 신라인은 앞서 아군에게 여러 번 패하였으므로 지금은 우리 병세를 바라보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오늘의 계획은 당인의 길을 막아 그 군사의 피로함을 기다리고, 먼저 일부 군사로 하여금 신라군을 쳐서 그 예기를 꺾은 후에 적당한 때를 엿보아 합전(合戰)하면 군사를 온전히 하고 국가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당에 유리한 평원광야에서 벌인 전투

당과 신라가 수로와 육로로 협격해 들어오자 의자왕은 귀양가있던 흥수에게 계책을 물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흥수는, “당병은 수가 많고 군율이 엄명하고, 더구나 신라와 공모하여 기각의 세를 이루고 있으니 만일 평원광야에서 대적하면 승패를 알 수 없습니다.

백강(혹은 기벌포라고 함)과 탄현(혹은 침현이라고 함)은 아국의 요로입니다. 일부단창을 만인도 당할 수 없으니 마땅히 용사를 가려 가서 지키게 하여 당병으로 하여금 백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신라인으로 하여금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白江(或云 伎伐浦) 炭峴(或云 沈峴) 我國之要路也 一夫單槍 萬人莫當 宜簡勇士往守之 使唐兵不得入白江 羅人未得過炭峴)” 라고 말했다. 백제는 군사를 둘로 나눌 수밖에 없었다. 계백의 5천 군사는 황산벌에서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을 맞아 4차례를 이겼으나 마침내 힘이 다하여 전멸하고 말았다. 또한 좌평 충상, 상영 등 20여 명이 포로가 되었다.

한편 의직은 개펄을 헤치고 기벌포를 통과하여 뭍으로 올라온 당군을 맞아 용감히 싸웠지만 이미 지리적 요충지를 통과한 당군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이미 진흙뻘을 지나와 사기가 오른 당군의 수효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백제는 패한 군사를 수습하여 웅진강구(雄津江口)를 막고 강변에 군사를 둔수케 하였으나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은 좌편 해안으로 나와 산에 올라 진을 치니 아군이 싸워 대패하였다.(於是 合兵禦熊津江口 瀕江屯兵 定方出左涯 乘山而陣與之戰 我軍大敗 <삼국사기> 백제본기)

이상의 기록으로 보아 당시 정황을 살펴보면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은 오늘의 보령 이북의 산악지대를 피해 흥수가 예견했던 대로 수적인 우세함을 내세워 평원광야에서 전투를 치르기 위해 금강, 만경강, 동진강 하구를 통해 분산하여 상륙 했음을 알 수 있다. 상륙작전의 어려움을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장군 소정방, 김인문 등이 연해안을 따라 기벌포로 들어왔는데 해안이 진흙탕이어서 빠져다닐 수 없었으므로 버들자리를 펴 군사들을 나오게 하였다.”(將軍蘇定方 金仁問等沿海入依(依當作技)伐浦 海岸泥 陷不可行 乃布柳席以出師)

   
▲ 장암진성, 일제는 장암진성을 허물고 제련소를 들여앉혔으며 오늘 이 자리에 다이옥신을 내뿜는 폐차소각장을 들여앉히려 하고 있다.

기벌포와 백강은 어디인가

기벌포와 백강이 어디냐에 대해 이견이 있다. 부안의 ‘계화도=기벌포’ 설이 그것이다. 이에 대한 근거로 삼국시대에 부안은 개부리였는데 ‘개부리>개불>계발(戒發)>지벌(伎伐)>개화(皆火)’로 명칭이 변화했으며 오늘의 계화도(界火島)가 곧 기벌포라는 것이다. 그러나 1,900척의 대선단이 사비성과는 거리가 먼 부안의 해안을 통해 상륙을 했으리라는 추정에는 무리가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은 기벌포와 백강을 같은 장소로 하고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기벌포를 ‘장암 또는 손량, 다른 한편으로는 지화포 또는 백강(卽長巖 又孫梁 一作只火浦, 又白江)’이라고 하였으며, 백강을 기벌포(白江 卽伎伐浦)라고 하기도 하였다. 또한 <삼국사기> 문무왕조에도 ‘소부리주 기벌포(所夫里州 伎伐浦)’라는 기사가 있다. 소부리주는 사비성을 말하며 곧 오늘의 부여이다.

금강은 그 물줄기를 따라 구간마다 여러 이름으로 불리워 왔다. <택리지>에 따르면 금강의 상류지역을 적등강(赤登江)이라 하고, 공주 부근을 웅진강, 그 아래를 백마강이라 하였으며 또한 강경에서 오늘의 금강하구까지는 진강(鎭江)이라고도 불렀다. 옛날에는 강경을 지나 부여까지 조수가 드나들었으며 강폭이 넓어진 강경 아래로의 금강은 사실상 바다나 다를 바 없었다. 또한 백제의 수도 사비성의 관문이자 군사적 요충지인 금강 하구의 오늘의 장항에는 전망산과 후망산 사이에 천혜의 만이 형성되어 군사를 숨기기에 최적이었다.

당의 주력부대는 이곳을 공격하였으며 1,900척의 선단을 분산시켜 만경강, 동진강 하구까지 전선을 늘어뜨렸음을 쉽게 추정할 수 있다. 당군은 조수 간만의 차가 가장 적은 7월 7, 8일경 상륙작전을 펼쳐 뭍으로 올라와 백제군의 저지를 뚫고 7월 10일에 사비성에 신라군보다 먼저 당도하였다. 이같은 당시 상황을 추정해 보고 역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오늘의 서천은 당의 기벌포상륙작전의 현장이며 그 중심에 장항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글/ 허정균 프리랜서>

 

2007년 06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