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 濟

백강(白江 或云伎伐浦), 炭峴(或云沈峴)은 국가의 요충이라

吾心竹--오심죽-- 2010. 1. 30. 21:09

백제 최후의 전장, 군사요충지 - 기벌포 (上) 내고향 군산

2004/05/29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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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벌포 (백강)은 어디인가? ]  (당,소정방군의 상륙작전)

 

. 서 론

 

기벌포는 어디인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일부 백제사 전문학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기벌포라는 단어의 생소함에서 오는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백제사에 관심을 갖고 있는 학자들에게 있어 탄현, 주류성과 함께 기벌포(백강)는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 지명이기 때문에 그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고자 하는 노력이 오래도록 있어 왔다.

 백제의 마지막 전쟁에 대한 기록은「삼국사기」「삼국유사」「구당서」「신당서」「자치통감「일본서기」등 한·중·일의 대표적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고 그 중요 전투나 전투장소 등의 지명이 기록되어 있으나 1300여 년의 시간이 흐르는 사이 백제 멸망 당시의 지명이 지금도 그대로 사용되는 경우가 거의 없고 그 지명에 대한 기록조차도 역사책들마다 차이가 심하였다. 기벌포(백강)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아서 그 정확한 위치가 밝혀지지 않았는데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후세학자들이 추측과 가정으로 그 현장을 단정하는 바람에 끝없는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기벌포라는 곳이 어떤 곳이기에 수많은 주장과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기벌포는 어떤 곳이었나?>


 기벌포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살펴보면, 기벌포는 나당연합군의 백제침공 때 당나라의 13만 대군이 백제의 사비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최초로 상륙하여 전투를 벌인 지역으로 역사에 처음 등장한다. 당나라 군대의 상륙작전시 백제수비군의 저항이 거세어 고전 끝에 당나라군이 겨우 승리를 거둔 곳이 기벌포이다. 또한 백제의 충신인 좌평 성충과 흥수가 똑같은 내용으로 적의 공격에 대비하여 기필코 지켜내야만 하는 백제의 중요 장소로 꼽은 지역이 기벌포이다.


 기벌포는 당나라 13만 대군의 상륙작전 이외에도 백제·왜 연합군과 나당연합군이 백제 부흥운동의 전세를 가늠하는 해전을 벌린 곳이며 고구려, 백제 멸망 후 신라군이 한반도 지배를 고착화하려던 당나라군을 이 땅에서 축출하여 삼국통일을 완수하는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 역사의 획을 긋는 전쟁터였다. 이와 같이 우리민족 역사에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기벌포가 이렇듯 그 장소를 못 찾아 논쟁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 있겠지만 그 근본적인 원인은 전쟁에서 패망한 나라인 백제와 연관된 땅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거의 모든 유물유적이 파괴되고 왜곡된 백제의 비극이 그 원인인 것이다.

 백제 멸망 후 1300여 년이 지나 산천과 언어가 바뀐 상황에서 더욱이 학계의 논쟁이 끊이지 않는 기벌포의 위치에 대한 나름대로의 의견을 밝힌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더욱이 군산지역 향토사를 공부하는 필자로서는 분명히 제기될 지역이기주의라는 비난을 감수하더라도 선학들의 주장 중에서 인정하기 어려운 의문점과 함께 군산이 기벌포(백강)라는 확신을 지니고 있기에 단재 신채호 선생님이 말씀하신 "나의 주장이 항상 옳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내 주장에 대한 자신감이 있기에 발표할 수 있다."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이 글이 '기벌포(백강)는 어디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그곳은 바로 금강하구 군산지역임을 확인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Ⅱ. 기벌포(백강)은 어디인가?

 

1.  기벌포 백강의 위치 논쟁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백강의 위치에 대한 학계의 다양한 주장들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백강의 위치에 대한 학계의 논쟁은 대략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데

 

그 첫째로 금강하구지역이 백강이라는 주장은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에 의해 제기된 후 이병도 박사가 「한국사」 고대편에서 주장함으로써 통설처럼 되었다. 그 외에도 민세 안재홍과 전영래 교수의 동진강 백강설과 충남 연기군의 향토사학자 김재붕 선생의 안성천 하구에 있는 백석포 백강설 등이 백강 위치 논쟁의 중심이 되고 있다.


이러한 백강의 위치논쟁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유는 아마도 주류성의 위치가 확인되지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백제부흥군의 중심지였던 주류성은 아직 그 위치가 확인되지 않은 역사의 수수께끼인데 바로 이 주류성의 근처에 백강이 흘렀다는 옛 기록들 때문에 주류성과 백강의 위치는 서로에 의해서 그 정당성의 증거로 제시되어지는 양상을 띠어왔다. 즉 충남 연기군이 주류성이 확실하다고 생각되면 그 주장의 마지막을 연기군의 주변에 있는 안성천 하구의 백석포가 백강이라는 물증을 찾아냄으로써 연기군이 주류성이라는 확실한 이론적 보완을 하는 형태이다.


 이러한 예는 부안 주류성설과 연결된 동진강 백강설도 같은 경우이다. 이와는 반대로 한산설 같은 경우는 먼저 웅진강구인 금강하구를 백강으로 규정한 후 이미 정해진 금강하구 근처에서 주류성을 찾으려다보니 서천군 건지산성을 주류성으로 단정하게 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이렇듯 특정지역이 주류성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 근처에 백강이 필요하고 반대로 어떤 강이 백강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주위에 주류성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수많은 반론과 주장이 있어왔다고 본다. 과연 주류성과 백강은 서로 증거로 제시될 만큼 가까운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을까? 결국 문제의 숨겨진 답은 주류성과 백강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존재했느냐 하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명확해질 수 있다.


「삼국사기」문무왕조- '백제의 정예기병이 강가(백강)에서 왜선 일천 척을 수비하고 있었다.
 「구당서」열전 백제전- '인궤가 백강구에서 부여풍의 무리를 만났다.'
  「구당서」유인궤전- '웅진강으로부터 백강으로 가 육군과 만나 함께 주류성으로 향했다.'
  「일본서기」- '신라군은 주류성을 포위하였고 당군은 백강에 병선 170척을 배치하였다.'


위의 내용들로 인하여 선학들은 백강과 주류성이 적어도 서울과 한강처럼 근거리에 있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결론 때문에 논쟁의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듯하다. 위의 예문을 보는 사람의 견해차가 있기는 하지만 필자는 위의 백강과 주류성의 위치에 대한 예문들과 그 외의 예문들을 볼 때 백강에서의 해전을 포함한 신라 백제 기병대의 전투와 주류성에서의 전투는 내용상으로는 백제부흥군의 사활을 건 전투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으나 거리상으로는 어느 정도 떨어져서 벌어진 전혀 별개의 전투로 생각된다.

   때문에 필자는 백강에서 주류성까지의 거리가 금강에서 전주처럼 멀리 떨어진 거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으나 군산에서 부안 정도는 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필자의 주장은 뒤에 살펴보기로 하고 이 글에서는 백강 동진강설과 백석포 백강설의 주내용을 먼저 알아보겠다.

 

1)    기벌포 동진강설

 

 고다쇼코(小田省吾)에 의해 부안 주류성설이 예견된 후에 민세 안재홍과 이마니 시류(今西龍)가 부안 주류성을 주장하였고 현재는 전영래 교수가 우금산성 주류성설과 동진강 백강설을 주장하여 학계의 관심과 함께 정설로서의 인정을 가장 많이 받고 있다.

 먼저 우금산성 주류성의 경우 필자도 우금산성 성곽의 총 둘레가 3960m로서 그 크기로 보아 왕성의 규모이고 「일본서기」에서 밝힌 주류성의 지세에 맞게 논밭과는 떨어져있고 메마른 자갈밭으로 농사에는 적당치 않고 전쟁에 적당한 터전이라는 내용과 복신이 죽음을 당한 굴신의 존재 그리고 피성(避城)으로 전해지는 김제와의 지리적 관계 등으로 볼 때 부안 주류성설이 인정을 받는 이유는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동진강 백강설은 어떠한가?

 우금산성 주류산성설과, 동진강 백강설을 주장하는 전영래 교수는 동진강이 백강이라는 주장의 근거로 몇 가지 예를 들고 있는데

 

첫째 「당서」열전 소정방전의 '정방은 동쪽 강기슭에 올라'라는 내용을 당군 상륙지의 지리적 특징으로 규정하였다. 즉 소정방군이 동쪽강 기슭에 오르려면 기벌포는 방위상 정동쪽이 육지여야 하는데 금강하류의 물줄기가 거의 동에서 서로 흐르기 때문에 금강은 백강이 될 수 없으며 동진강은 강의 입구가 남에서 북으로 트여 있기 때문에 방위상 동쪽이 육지이므로 당서의 내용과 일치하는 지명으로써 동진강이 소정방군의 첫 상륙지인 기벌포이며 당 수군과 일본 수군의 격전지인 백촌강이라 주장한다.

 

 둘째 동진강은 본래 백제의 요로이며 험애한 지형이고,

 셋째로 6월 21일 덕물도에 도착하여 신라 태자 김법민과 만나 7월 10일 백제 남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당나라군이 7월 9일 기벌포에 상륙하는데 6월 21일에서 7월 9일까지 약 20 여일 간의 공백기간에 13만 대군을 실은 당나라 전함들이 바다에 계속 떠있기에는 식수 및 식량의 부족과 함께 6∼7월이 태풍이 부는 계절이므로 분명히 웅진강구 이전의 어느 지역에 상륙하여 휴식을 취했을 것인데 그곳이 바로 동진강구라는 것이다.

 

또한 넷째로 「일본서기」의 내용 중 백촌강 해전의 패전 이유로 "불관기상(不觀氣象)"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뜻을 동진강의 지리적 환경과 연관시켜서 일본 수군이 동진강의 조수간만의 시간을 고려하지 않고 공격하다가 갑자기 조수가 빠지자 동진강의 망망대해가 진흙 바닥의 갯벌로 변하여 배가 빠지는 바람에 뱃머리를 돌릴 겨를도 없이 배는 불타고 물에 익사하는 자가 많았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구당서」의 '自熊津 往白江 會陸軍 同趨周留城'-웅진강으로부터 백강으로 가서 육군과 만나 함께 주류성으로 향했다.-라는 기록을 동진강 백강설의 근거로 삼고 있다. 이 문장을 증거로 전영래 교수님은 백강이 금강하류지역이 아닌 웅진강 즉 금강을 벗어난 다른 지역에 있고 그곳이 바로 동진강이라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들에 대하여 필자의 생각은 뒤에서 밝히겠지만 먼저 짧게 적어보자면

 

첫째, 동진강은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강이기 때문에 백강이고 금강은 동에서 서로 흐르기 때문에 백강이 아니라는 내용은 너무 단순한 발상으로 사료된다. 금강은 굽이굽이 천리길을 흐르는 큰 강으로 금강하구의 군산지역만 보더라도 흐르는 굽이 때문에 방위상 동쪽으로 상륙할 곳은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둘째, 동진강이 백제의 요로이며 험애한 지형이기 때문에 백제의 성충 흥수가 꼭 지켜야 하는 백강이라 주장하는데 '백제의 요로'라면 과연 백제의 도성이며 중심지인 사비성과 웅진성에 이르는 강인 금강과 동진강 중에서 어느 강이 군사전략적으로 중요한 강일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동진강보다는 금강이 백제의 요로라 볼 수 있다.

  셋째, 당군이 20여 일간 바다에 떠있을 수 없으므로 휴식을 취하기 위해 동진강에 들어서서 변산반도에 상륙했을 것이라는 내용인데 전영래 교수는 왜! 소정방의 첫 도착지인 덕물도가 섬의 크기로 보아 13만 대군이 휴식을 취하기에 적당한 곳이며 또한 덕물도는 당의 연합군인 신라의 지역으로 신라군으로부터 군수보급이 원활한데 이곳을 떠나 언제 기습을 당할지 모르는 백제지역의 변산반도에 들어서서 휴식을 취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당나라군은 6월 21일 덕물도에서 신라 태자와 만난 뒤 중국에서 후발부대로 출발한 보급함대를 기다리며 신라의 도움 속에 7월 9일 기벌포 상륙을 위하여 적어도 15일 정도는 덕물도에서 휴식을 취하였을 것이다.

  넷째로 당·왜 수군의 해전 내용에서의 '불관기상(기상을 살피지 않았다)'이란 뜻은 일본수군이 동진강의 갯벌에 빠졌다는 내용이라기보다는 썰물 때의 물살 때문으로 이해하면 적당하다. 서해안에서 바다에 합류되는 강(「구당서)조수를 만나 배들이 연이어 강에 들어섰다.)들은 거의 모두 동진강과 비슷한 갯벌의 환경조건을 지니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웅진강에서 백강으로 나아갔다"는 이야기는 과거에는 웅진성(공주) 지역인 금강의 상류를 웅진강으로 불렀고 사비성(부여) 이하의 금강하류는 기벌포, 사비하, 백강 등으로 불리웠음을 알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웅진강과 백강을 별개의 다른 지역에 있는 강으로 보는 시각은 강이 금강처럼 클(大) 때에는 강의 명칭도 강이 지나는 곳에 따라 여러 가지임을 이해하지 못한 내용으로 보인다. 때문에 필자는 동진강 백강설은 변산반도에 있는 우금산성 주류성설 때문에 존재하는 내용으로 생각하며 그 사실성에 의문을 갖는다.

 

2)    기벌포 안성천 백석포설

 

충남 연기군의 향토사학자이신 김재붕 선생은 주류성은 충남 연기군이고 백강은 안성천으로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백촌강은 안성천 하구에 위치한 백석포라고 주장한다. 김재붕 선생은 백석포는 「일본서기」에 백촌강으로 표기하고 <ハクスキのエ>로 읽는데 이것은 백석포를 일본어의 음으로 읽고 뜻을 붙인 것이라 생각한다.

즉 백석에 대한 일본인들의 발음은 <ハクスキ>이지만 <スキ>는 일본고어에서 <村>이었으며 <エ>은 江이나 浦를 의미하는 말이었으므로 일본어 <ハクスキのエ>가 백석포라는 뜻으로 생각한다. 또한 오늘날에도 백석포 근처를 <흰들>이라 하고 안성천을 <흰들강>이라고 불러 백강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내용 또한 단재 신채호 선생이 「조선상고사」에서 주류성을 연기군으로 비정한 후 연기군 주류성설에 대한 증거로써 만들어진 백석포 백강설이 아닌가 생각한다. 백석포가 백촌강이라는 주장에 대해 전영래 교수의 반론의 글을 옮겨보면 백석포라는 지명은 김정호의 「대동지지」에 처음 등장하는 포구명이다.

이전 고서인 「동국여지승람」이나 「문헌비고」에는 나타나지 않는 이름으로 「일본서기」에서 백촌강을 <ハクスキのエ>라고 훈독한 것을 백석포의 백석을 일본말로 음독하여 <ハクスキ>라고 읽고 거기에 浦의 일본말 새김 <エ>를 합성한 모양이나 白村의 원뜻과는 거리가 먼 착상이다. 백촌이란 적어도 「삼국사기」지리지에 등장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또한 663년 주류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나당연합군이 7월 17일 웅진을 출발하였는데 당군과 신라군의 육군은 8월 13일 주류성 아래 도착하였고 유인궤의 수군은 웅진강을 나아가 백강에 가서 육군과 함께 주류성으로 향했다 하였다.

 이때 만약 연기군이 주류성이고 백석포가 백강이라면 웅진을 출발한 육군은 웅진에서 북방 12㎞지점에 있는 연기군의 주류성까지 27일이나 걸려서 도착한 것이고 수군은 웅진강을 빠져 나와서 충남 해안지방을 북상하여 아산만에 들어가서 안성천 즉 백강에 도착했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전개된다고 말하며 반론을 펴고 있다. 이러한 전영래 교수의 반론은 상당한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백강에 대한 동진강설과 백석포설을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웅진강구 즉 금강하구 백강설이 남아있는데 이 내용은 필자가 뒷장에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2. 기벌포, 혹은 백강, 웅진강 지명 연구

 

역사서에는 나당연합군의 백제침략 시 당나라군의 첫 상륙지점에 대하여 그 지명의 명칭이 서로 다름을 알 수 있다. 「당서」「구당서」「자치통감」등 중국 역사서에는 첫 상륙지점을 한결같이 '웅진구' '웅진강구'라고 적고 있다.


  이에 반하여 우리측 사료인 「삼국사기」「삼국유사」에서는 「당서」소열전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삼국사기」백제기 의자왕조의 '웅진구'라는 명칭을 사용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첫 상륙지점을 전부 '기벌포'와 '백강'이라 표기한다.

또한 일본의 「일본서기」에서는 자신들이 참가한 전투인 나당연합군과 백제 왜 연합군의 백강 해전을 기록하며 백강을 '백촌강'이라고 적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삼국역사서의 서로 다른 표기를 한,중,일 삼국이 서로 자신들과 관련한 동일사건이 발생한 동일 지역에 대한 표기를 서로 명칭만 다르게 표기한 것이 분명함을 삼국의 역사서를 비교 검토해 봄으로써 알 수 있다.

 이러한 확인의 결과 웅진강구 혹은 웅진구와 기벌포, 백강 혹은 백촌강이 명칭만 다른 동일지역임이 확인되면 적어도 웅진강구 혹은 웅진구가 금강의 옛 지명임은 확실하므로 기벌포에 대한 위치 확인은 쉽게 할 수 있다. 또한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백강은 백마강의 준말이고 일본사에서는 백촌강(白村江)이라 일컬었는데 촌(村)은 뜻이 "말"이니 백촌강은 곧 백마강(금강)의 별역(別譯)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 또한 학계에서는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웅진강구와 백강은 금강입구라고 할 수 있으나 그러면 기벌포(지화포, 장암, 손량) 등의 명칭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필자는 이러한 동일장소에 대한 삼국의 서로 다른 지명표기는 아마도 세 가지 이유에서 발생한다고 생각된다.

첫째, 백제멸망이라는 사건이 발생한 후 삼국(신라, 중국, 일본)이 역사를 정리한 연대가 서로 다른 까닭에 시간의 흐름에 의한 지명의 변화와 언어, 기록상의 차이점 때문이며

 

둘째, 우리가 중국식 한자문화에 깊이 빠질수록 우리 고유의 지명에 대한 우리식 표현을 한자식으로 기록하다보니(그 예로 통일신라 경덕왕  6년 757년의 고유지명의 한자식 개명이 있다)나타난 결과이며

 

셋째로 하나의 큰 강을 외국인들은 그들이 그 강을 처음 알게 되었던 명칭으로 고유명사화 하여 부르지만 그 강과 같이 살아가는 내국인들은 편의에 따라 혹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강의 이름이 다르며 또한 그 강이 큰(大) 경우 강이 지나는 지역에 따라 전혀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데서 오는 문제들이라고 생각한다.

이 장에서는 이러한 기벌포의 복잡한 명칭들에 대한 정확한 이해의 방법으로 먼저 각각의 명칭에 대한 어학적 확인과 다음으로 옛 역사서에 등장하는 기벌포, 백강, 웅진강구에 대한 내용 확인을 통하여 그 정확한 위치를 확인해 보겠다

 

1) 어학적 확인

 

기벌포, 백강, 웅진강구, 백촌강 등의 각기 다른 명칭들이 어떤 관계에 의하여 동일사건이 일어난 하나의 지명으로 사용되었나 하는 의문은 먼저 고대 백제어에 대한 어학적 접근 방법으로 단어 하나하나를 확인하는 작업이 선결되어야 한다고 본다.

 백제 고대어 연구는 충남대 도수희 교수의 학설을 주내용으로 하겠다. 도수희 교수는 백강(白江)의 백(白)에 대한 고대 백제어의 뜻이 백(伯)자와 같이 통용되었다고 추정하였다.

때문에 백(伯)자는 그 속뜻이 장(長)자와 대(大)자이므로 백강의 다른 명칭인 기벌포, 장암에 결부시켜 긴∼긴벌개로 해석했다. 그 증거로 백강의 백(白)자를 풀어보면 《강희자전(康熙字典)》에 白=伯=長으로 나오는데 이 뜻은 백이 크거나 길다는 伯, 長, 大와 그 뜻을 같이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여기에 덛붙여 백강의 옛 명칭인 웅진강이 고마(  )>곰(나루)>금(강)으로 변화한 것은 웅진강 즉 곰(熊)의 본래 의미가 무엇이든 그것이 현실적으로 곰이라 불리우고 그 강이 大江이고 보니 큰 강이라는 의미로 금강이라 음을 빌린 한자어 표기일 것으로 본다. 즉 금강을 깁  ~긴벌=긴(長江)의 크고 긴 강의 뜻으로 설명하며 백강의 백(白)이라는 단어가 내포한 뜻은 熊=白=伯=錦=長(大) 등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결국 웅진강과 백강과, 금강은 그 명칭은 다르지만 그 뜻은 모두 고대어의 큰(大)강 긴(長)강이라는 뜻으로 같은 하나의 강(江)임을 확인해 준다.

위와 같이 白을 伯, 長, 大로 해석하여 이것을 기벌포(伎伐浦)에 대응시켜보면 기벌은 기블-긴벌로 나오며 지벌포(只伐浦) 또한 지불-진벌로서 모두 장(長)의 길다는 뜻이 나온다. 이 내용은 「삼국유사」에서 기벌포의 위치를 적음에 있어 '기벌포는 즉 장암 혹은 손량 또는 지벌포 또는 백강이라 한다.(卽長岩, 又孫梁一作只伐浦又白江)'는 기벌포에 대한 명칭 중에서 손량을 제외한 나머지 명칭이 긴 강 혹은 큰 강이라는 동일한 뜻임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도수희 교수는 강(江)의 명칭을 백촌강과 백마강은 백강에서 파생된 후대의 명칭으로 보며 지리적으로는 현재의 금강 중에서 공주를 중심으로 하는 상류지역의 호칭이 예전에 웅진강이었다면 그 하류인 부여에서 서해까지는 백강으로 보았다. 이러한 웅진강과 백강의 명칭구분은 사료를 통하면 더욱 확연해 짐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도수희 교수는 백강을 금강하류로 보고 백강의 의미를 큰 강, 긴 강으로 해석하였다.

 

2)    사료를 통한 확인

 

이 글에서는 기벌포의 위치를 확인 방법으로 역사서에 기벌포, 웅진강구, 백강, 백촌강이 어떤 내용으로 기술되어 있는지를 확인해보면 그 지명이 갖는 지리적 특징을 확인할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그 위치를 가정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아래 역사서에 등장하는 기벌포 기술 내용을 알아보겠다.

 

    성충, 흥수의 기벌포(백강)

 

백제 의자왕 16년 3월 왕의 실정을 직언하다가 간신 임자의 무고로 옥에 가두어진 후 단식 28일만에 죽은 백제의 지략가이며 英雄인 좌평 성충은 옥중에서 글을 올려 말하기를 "충신은 죽을지라도 임금을 잊지 못하니 신이 한 말씀 올리고 죽고자 합니다. 신이 천시와 인사를 살피건대 오래지 않아 전화가 있을 것입니다. 무릇 군사를 씀에는 지세를 택하여 위쪽에 처해서 적에게 대응해야한 만전(萬全) 합니다. 만일 적병이 침입하거든 육로로는 탄현에서 막고 수로로는 기벌포지안에서 막아 험한 곳에 웅거해 싸워야 합니다"라고 말했다.(「삼국사기)의자왕16년조)


 이후 백제 의자왕 20년 나당 연합군의 침략소식에 작전회의를 하였으나 결론이 나지 않자 일찍이 성충의 무리로 지목되어 고마미지현에 유배된 흥수에게 사람을 보내어 계책을 물으니 흥수는 "백강(白江 或云伎伐浦), 炭峴(或云沈峴)은 국가의 요충이라 한 사람이 칼을 들고 막으면 만 사람이 덤비지 못할 곳이니 수륙의 정예 병력을 뽑아 당의 군사는 백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군사는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고 대왕께서는 왕성을 지키다가 저네들이 양식이 떨어지고 군사가 피곤해진 다음에 맹렬히 공격하면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삼국사기)의자왕 20년조) 위의「삼국사기」백제본기 좌평 성충과 흥수의 내용은 기벌포 혹은 백강을 찾는데 있어 의미하는 바가 크다 할 수 있다. 성충과 흥수의 내용에는

 첫째 위의 두 사람은 모두 백제 최고의 전략가들로서 적의 침입시 그 공격로를 두 사람이 일관되게 육로로는 탄현을 해로로는 기벌포 혹은 백강을 들고 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위치를 알 수 없지만 기벌포 혹은 백강의 군사적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말은 역으로 생각하면 백제에 있어서 해로로서 가장 중요한 방어지역을 찾으면 기벌포를 찾을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이러한 뜻에서 본다면 금강은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에 이르는 단 하나의 해로(海路)이므로 성충과 흥수가 강조한 수로를 통한 적의 침입시 핵심방어시설이 되므로 성충과 흥수의 내용을 보면 당연히 기벌포와 백강은 금강임을 확인할 수 있다.

둘째 성충의 기벌포지안(伎伐浦之岸)과 흥수의 백강(白江) 혹은 기벌포(或云伎伐浦)의 표기로 인하여 두 지명이 명칭만 다른 동일한 지역임을 확인 할 수 있다. 또한 앞장의 어학적 확인내용을 볼 때 성충의 기벌포와 흥수의 백강은 모두 긴 강(長,) 큰 강(大)이란 뜻을 내포한 현재의 금강을 나타낸 서로 다른 명칭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측사료

 

 당의 역사서 내용을 보면 백제 침입시 당군의 첫 상륙지를 우리의 기벌포, 백강이라는 지명을 사용하지 않고 웅진강구 혹은 웅진구라는 명칭만 사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단어만 다를 뿐 내용을 보면 기벌포나 웅진강구나 같은 장소임은 앞에서 이미 확인하였다.
「구당서」열전 소정방전을 보면

'현경 5년 백제를 정벌하려고 정방은 성산(城山)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웅진강구에 이르렀다. 적병이 강을 따라 진을 치고 있으니 정방은 동쪽 강기슭으로 올라(定方升東岸) 산위에 진을 치고 적과 싸워 크게 이겼다. 돛을 달고 바다를 덮으며 들이닥치니 적병은 무너지고 수천이 죽고 흩어졌다. 조수를 만나 배들은 연이어 강에 들어섰고 정방은 안산(岸山)에서 이를 감싸면서 수륙이 함께 진격하였다. 백제의 도성 밖 20여 리를 남기고 적은 온힘을 기울여 막았으나 크게 이겨 만여 명을 사로잡았다.'

「신당서」열전 소열전에는
'신구대도총관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하려고 성산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웅진구에 이르러 적이 강에 둔병하고 있어 정방은 그 좌측 벼랑에 나아가 산위에 진을 치고 적과 싸워 크게 이겼다.'라고 적고 있다.


이 내용은 기벌포에서의 첫 상륙작전을 묘사한 내용으로 두 내용이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삼국사기」신라본기 태종무열왕 7년의 우리측 기록을 보면 기록을 보면 '기벌포에 이르러 백제군을 만나 뒤로 돌아 공격하여 크게 이겼다.'와 이외에「삼국사기」김유신전을 보면 당의 기록인 웅진강구, 웅진구와 우리의 기록인 기벌포, 백강이 지명만 다른 동일한 내용의 사건임을 확인 할 수 있다.

또한 「구당서」의 내용 중 '돛을 달고 바다를 덮으며 들이닥치니 적병은 무너지고 수천이 죽고 흩어졌다. 조수를 만나 배들은 연이어 들어섰다.'라는 표현은 첫 전투지역인 웅진강구가 웅진강과 서해 바다가 만나는 현재의 금강하구지역임을 나타내는 문장이다. 그러하기에 바다로부터 강으로 공격할 수 있으며 조수를 만나 강에 들어설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웅진강은 「신동국여지승람」에 금강에 대한 기록 중 "공주를 금강 또는 웅진강이라 한다.

 

 至公州爲錦江爲熊津江云云"한 것으로 보아 현재 금강의 옛 표기임이 분명하나 이렇게 역사서에 나오는 지명의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을 찾음으로서 우리는 성충과 흥수가 전략적으로 중요하다 강조한 기벌포와 백강 그리고 중국 역사서에 기록된 웅진강구와 웅진구가 금강하구의 군산지역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③ 삼국유사조 기벌포(장암, 손량, 지벌포, 백강)

 

앞에서 기벌포가 백강, 웅진강구, 웅진구 등으로 표현되지만 그 장소는 동일한 지역임을 확인했다. 또한 이러한 확인 아래 기벌포가 금강의 하구일대임을 알 수 있었다.

이번에는 「삼국유사」태종 춘추공조에 나와있는 기벌포 명칭에 대하여 알아보겠다. 「삼국유사」춘추공조에서 저자인 일연 스님은 기벌포에 대한 후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기벌포의 또 다른 명칭을 네 곳이나 기록하고 있다. '伎伐浦 卽長岩又孫梁一作只伐浦又白江(기벌포는 장암 또는 손량 한편 지벌포 또는 백강)'이라고 여기에서는 중국에서 부르는 웅진강구와 일본의 백촌강이라는 명칭을 제외한 기벌포와 관련된 모든 지명이 나온다. 우리는 여기에서 기벌포에 대한 명칭의 혼재로 인하여 두 가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하나는 기벌포가 하나의 강이 아닌 다섯 개의 지명이 혼재하는 넓은 곳인가 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기벌포라는 한 지명에 대한 세월의 흐름에 따른 명칭의 변화인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白이 고대어에서 길거나 크다는 뜻의 伯, 大, 長의 의미로 사용되면 백강은 긴 강이라는 뜻임을 확인했다. 또한 기벌포는 기블-긴벌로 지벌포는 지블-진벌로 장암은 긴-의 뜻으로 모두 긴(長)의 뜻이 내포된 기벌포(지벌포)>백강>장암의 순서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단어가 변천한 것으로 확인했다.

그러나 이것은 국어학적 해석으로 본인의 생각으로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서로 다른 단어일지라도 과거의 지명은 사라지지 않고 과거의 지명과 새로운 현재의 지명이 같이 공존하며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즉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집필한 고려시대에 동시대의 고려인들에게 확실하게 알려주고자 노력한 기벌포는 하나의 포구가 아닌 본래 웅진강으로 불리우던 곳으로 고려시대 당시에도 백강 혹은 기벌포로 고서에 나와있으나 일반인들이 알지 못하거나 혹시 백강, 기벌포가 당시 사용되는 지명이었다 할지라도 기벌포를 정확히 규정 하는데는 부족하다 느껴 기벌포라는 의미를 지닌 주변 강가의 지명을 적어 이해를 돕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이 명칭 중 손량은 속칭 강변이라는 뜻과 겨울에는 몹시 춥다는 뜻이 있으며 장암은 현재 금강의 하구인 서천군 장항읍 장암동의 명칭으로 길고 큰 바위가 있다고 해서 장암이라 불렀으며 고려시대부터 부른 명칭으로 백제 때부터 마을이 형성된 곳이라고 한다. 이러한 명칭 조사를 통하여 우리는 기벌포, 백강, 지벌포, 장암, 손량이 모두 금강의 지류 중 부여지역 아래인 하류지역을 나타내는 단어들임을 확인할 수 있다. 기벌포(긴벌개), 즉 긴갯벌이 있는 강가와 장암 등의 명칭으로 인하여 금강의 하류 중에서도 금강이 서해와 합류하는 군산인근지역이 그 현장임을 말할 수 있겠다.

 

3. 기벌포 상륙작전

 

우리는 앞에서 기벌포를 찾는 방법으로 주로 옛 지명연구 및 역사서에 나온 내용을 중심으로 기벌포의 위치를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 본 글에서는 앞의 내용과는 다르게 기벌포의 위치를 찾아보고자 한다. 즉 나당연합군의 백제공략을 군사전략적 시각에서 보는 것이다. 전쟁의 시작에서 끝날 때까지의 상황을 알면 나당연합군이 어떤 방법으로 백제를 침공했는가 하는 내용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나당연합군의 전략을 파악하면 당나라군대의 공격루트 또한 확인이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당군이 백제전쟁에 임하는 본심을 알기 위해 당나라 장군 유인궤의 말을 빌리면 "고구려를 멸망시키려면 먼저 백제를 공략하고 힘을 남겨 군대를 주둔시켜 그 심장부를 제압해야한다."고 했다.

이 말로써 우리는 당나라가 수세에 몰린 신라를 도와주려고 전쟁에 참가한 것이 아니라 세계제국을 만들려 하는 중국의 자존심을 번번이 꺾은 동북아시아의 강자인 고구려를 무너뜨리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참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당태종 이세민의 고구려 침입과 패배의 교훈은 당 고종의 백제공략을 위한 기본전략을 세우는데 큰 영향을 끼친다. 특히 고구려 공략에 출전한 적이 있는 대장군 소정방은 고구려전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백제공격의 작전을 철저히 세웠을 것이다. 이러한 준비 끝에 만들어진 백제를 공격하는 당의 기본전략은 한마디로 육지와 바다를 이용한 백제 도성인 사비성에 대한 '기습작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작전은 옛부터 한민족과 중국의 전쟁사에 자주 등장한다. 중국이 우리민족을 공격할 때에는 육군과 해군이 함께 공격하는 양동작전을 사용하였는데 이때 육군은 국경을 정면 돌파하여 우리민족의 도성으로 향하고 수군은 고조선, 고구려, 백제 등의 우리고대 국가들이 도성 옆에 큰 강을 끼고 있는 점을 노려 수로로 단번에 왕이 있는 도성을 기습 점령하려 했다.

이렇게 수군의 기습으로 도성을 점령한 후에는 국가의 지휘체계를 무력화시켜 투항자를 극대화시키고 잔존한 저항세력은 육군을 이용하여 토벌하는 전술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예는 한과 위만조선의 전쟁, 수양제의 고구려 침입 등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중국의 수륙군을 이용한 기습 양동작전에 대항하여 우리 민족은 험한 지형을 이용한 산성에 의지하여 장기전을 펼쳐 적의 사기저하와 식량 및 부기의 보급 중단으로 적의 전투력이 떨어지면 나아가 공격하여 중국과의 전쟁에서 여러 번 대승을 거두었다.

 

이러한 우리민족의 작전을 "청야작전"이라 한다. 백제도 흥수의 계책대로 "당병은 백강을 넘지 못하게 하고 신라군은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한후 대왕은 성을 굳게 지켜 적군의 식량이 떨어져 병사들이 피곤해지기를 기다려 공격하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라는 "청야작전"만 썼다면 나라의 멸망은 없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어쨌든 나당연합군의 백제 침공 때 그 지휘권은 수적으로 병력이 많은 소정방에게 있었고 그에 의하여 기본 작전계획이 수립된 것으로 볼 때 나당연합군의 작전은 중국과 우리민족과의 전쟁 때 중국이 주로 사용한 육군은 국경을 돌파하여 도성으로 향하고 수군은 강(江)을 이용하여 상대의 도성을 불시에 공격하는 수륙양동 기습작전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육군이 당나라군사가 아닌 신라군이라는 것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수륙양동 기습작전]

 

이러한 기습작전에 의하여 나당연합군이 거쳐간 기벌포와 탄현이 백제좌평 성충과 흥수가 적의 침입시 굳게 방비해야 할 곳으로 지적한곳과 일치함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을 함에 있어서 적의 약한 곳을 공격하는 것은 병법의 기초이다. 특히나 기습공격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제까지 그 위치를 군산지역이라고만 추정한 기벌포라는 지역이 갖고 있는 전략적 성격을 알 수 있다. 즉 기벌포는 나당 연합군측이나 백제측이나 양측의 전략가들은 모두다 그 중요성을 인정하는 곳이며 또한 당시 전략적 중요성에 비하여 국가기강이 해이해진 백제의 수비가 약화된 곳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수로인 웅진강구는 중국의 한민족과의 전쟁시 기본작전대로 라면 수륙양동 작전 중 수군이 백제의 도성인 사비성에 이를 수 있는 강의 입구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기벌포와 탄현은 나당연합군이 이 백제의 도성을 향하여 기습작전을 하는데 요구되는 모든 것을 갖춘 곳이었다. 왜냐하면 신라와 당군이 덕물도에서 작전을 세운 후(6월 21일) 한 달여 만인 7월 18일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의자왕의 항복을 받았으니 「삼국사기」신라본기 문무왕 11년에 당나라 장군 행군총관 설인귀가 문무왕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들은(신라와 당) 기일을 달리하여 서로 응원하기로 하고 하루아침에 대규모 군사를 동원하여 바다와 육지에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라는 글귀가 보이는데 하루아침에 대규모 군사를 동원하였다는 말은 나당연합군이 기습공격을 했음을 뜻한다.

 또한「삼국사기」신라본기 태종무열왕 7년에 보면 7월 9일에는 신라군의 황산벌 전투와 당나라군의 기벌포 전투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유독 7월 9일에 이러한 전투가 집중되어 있는 것은 신라와 당군의 치밀한 기습작전이 그 요인이다. 당군은 7월 9일 기벌포를 통과하여 10일 계획대로 백제 남에 도착하였는데 신라군이 약속날짜보다 하루 늦은 11일 도착하자 신라의 독군 김문영을 목베려고 한 것도 당군이 기습작전에 있어 신속한 기동력을 중요시했다는 증거이다.

 

  이후 12일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을 포위 공격하니 백제는 그야말로 당황하여 있는 군사도 쓰지 못하였던 것이다. 의자왕이 웅진성으로 피하지만 7월 18일 항복함으로써 나당연합군의 속전속결의 기습작전은 성공적으로 끝이 난다.

 

[기밀유지]

 

 전술상 수당의 고구려 침략시 얻은 경험으로 수륙군의 사비성 기습작전에 의한 공격으로 의자왕의 항복을 받았다면 또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되는 나당연합군의 작전이 있는데 그것이 "기밀유지"이다.


적의 약점인 기벌포와 탄현을 알아내고 그 약점을 이용한 기습공격을 하기 위해서는 백제군이 알지 못하도록 기밀을 유지해야 하는데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서 당나라는 많은 노력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 예로 당나라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온 이키노무라지(伊吉連博德)라는 일본사자는 수기에서 "경신년(660) 8월 백제가 망하자 9월 12일 귀국이 허락되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전쟁 전에 당에 들어간 일본사자가 전쟁이 끝난 후에야 귀국을 허락 받았다는 이 짧은 문장 내용으로 당이 백제 공략을 위해 나라의 출입을 통제했으며 요즘처럼 통신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산둥반도 성산에서의 당의 공격준비는 백제로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준비되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동진강 기벌포설을 주장하는 전영래 교수님은 당군은 웅진강에 들어서기 전에 웅진강의밖에 있는 동진강의 변산반도에 먼저 상륙하였다고 말한다. 그 이유로 전교수님은 소정방이 태풍이 오는 시기인 6∼7월에 13만 대군을 배에 태워 20여 일간 바다에 띄어 놨을 리는 없다는 점과 20여 일간 13만 대군을 배에 태운 채 있을 정도로 전함의 비축식량과 식수가 충분치 못하며 군사들의 충분한 휴식을 위하여 7월 9일 기벌포 전투를 치르기 이전에 이미 동진강의 부안지역에 상륙해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대로라면 당군은 7월 9일 기벌포 전투 후 7월 10일의 신라군과의 약속 날짜를 맞추기 위하여 웅진강에 들어와 수륙이 병진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다.

 전교수님의 주장은 6월 21일 덕물도에서 소정방과 태자 법민이 만난 후 당나라군에 대한 환영행사만 하고 바로 헤어져 작전에 임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덕물도를 출발한 당나라군이 13만 대군을 20일 동안 바다에 방치할 수 없으므로 동진강변인 부안 즉 기벌포에 상륙하여 휴식을 취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중국의 성산만을 출발하여 덕물도에 도착한 후 피곤한 당나라군이 왜 덕물도라는 안전한 섬에서 휴식과 재정비를 할 수 있는데 굳이 곧바로 바다로 나아갔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필자는 이해할 수 없다. 당시의 자료에 의하면 당나라의 전선이 척당 85명의 전투병고 선원 12명을 태우므로 대략 1200척의 전선에 전투병 10만 명이 동원된 것으로 보면 맞는데 이 대병력을 바로 이동시킨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아마 덕물도에서 신라의 전선 100척과 병력을 지원 받아 10만 대군에 대한 병참함이 대략 400척이 필요하니 지원함의 도착을 기다리며 휴식을 취했다고 본다. 덕물도는 적은 섬이 아니며 또한 가까이 남양만의 당항성은 동맹군인 신라의 땅으로 보급면에서도 덕물도를 바로 떠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또한 전교수님의 주장은 당군이 백제공략의 기본전략으로 삼은 수군을 이용한 도성에 대한 기습작전 중 기밀유지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혹시 전교수님의 주장대로 당나라군이 동진강의 변산반도에 상륙하여 사비성 공략을 위하여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면 아마도 백제는 사비성 남에서 마지막 총력전을 펴기 이전에 백제의 주요 거점인 익산과 한산 등의 병력과 중앙군의 병력을 동원하여 부안에 상륙한 당나라군을 공격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추측은 의자왕 20년 나당연합군의 침입소식에 백제조정이 작전계획을 짜던 중 좌평 의직의 "당나라군은 오랜 항해로 지쳐있으니 배에서 내리자마자 공격하면 무찌를 수 있을 것이다."라는 주장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측 기록이나 우리기록 어디에도 당군의 상륙지인 기벌포 전투이후 사비성 이십 리 밖에서 나라의 온 힘을 기울여 공격하는 백제군과 싸울 때까지 사이에 어떠한 전투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이러한 결과들은 당군이 기밀을 유지한 기습공격에 성공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습작전의 첫째 조건은 빠른 기동력인데 사비성에 들어설 수 있는 웅진강구 즉 군산을 놔두고 부안의 변산반도에 상륙하여 백제군에게 자신들의 모습을 드러낸 채 휴식을 취한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다.

 

[ 공격D-day ]

 

이러한 철저한 준비 끝에 산둥반도의 성산을 출발하여 덕물도에 도착한 소정방의 당군은 마중나온 신라태자 법민과 만나 양군의 구체적인 작전계획이 수립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태자 법민이 전선 100척을 거느리고 갔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백척의 신라전선은 단순히 당군에 대한 환영식을 위한 의전행사용 부대가 아닌 당군에게 필요한 보급물자 수송과 함께 백제지리에 어두운 당군을 위한 길잡이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덕물도에서 소정방과 신라태자 법민의 양군이 만나 세워진 작전계획은 태자 법민에 의해 신라왕과 김유신장군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전쟁의 과정을 볼 때 그 작전 내용은 7월 10일 백제 남에서 나당연합군이 만나 함께 의자왕이 있는 사비성을 공략한다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계획대로 양군이 백제 남에서 만나 사비성공략을 목전에 둔다면 기습공격은 성공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기록에는 6월 21일 덕물도에서 법민과 소정방이 만난 이후 7월 10일 백제 남에서 만나기로만 되어있을 뿐 실질적인 최초의 공격날짜는 빠져있다.  여기에서 최초의 공격일자는 당군의 기벌포 통과와 신라군의 탄현 통과를 말하는 것인데 양군이 기습의 효과를 누리고자 한다면 분명히 같은 날짜에 동시에 행동을 시작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최초의 공격 개시일이 중요한 것이다. 이른바 D-day인 공격 개시일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6월 21일 덕물도 작전 회의 후 7월 11일 나당연합군이 만난 날까지의 양군의 공격루트를 알아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양군의 상황이 신라군은 나와 있는데 당군은 확실히 나와 있지가 않다. 당군의 공격 개시일까지의 일정은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러하다.
6월 21일 신라 태자 법민과 만난 소정방군은 양군의 연합작전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이후 7월 9일 기벌포 상륙전투 때까지 20여 일간의 거취가 알 수 없는데, 7월 9일 황산벌 전투와 기벌포 전투가 끝났으므로 황산벌 및 기벌포 전투의 시작은 대략 2~3일전쯤인 7월 6일 전투가 시작되었으며,

 또한 당군의 덕물도 출발일은 덕물도에서 기벌포까지의 거리와 워낙 대군이 이동하는 것이므로 5일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고 보면 7월 1일 나당연합군이 기벌포와 탄현을 향해 출발하여 대략 7월 6일 첫 전투가 기벌포에서 있었으나 , 백제군의 해안 방어선이 강하여 고전하다가 뒤로 돌아 후방에서 공격하여 수천을 죽이고 7월 9일 조수를 만나 웅진강을 따라 수륙이 병진하여 백제 남에 7월 10일 도착하였다고 보면 대략 그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습작전의 결과물로써 백제는 왕성인 사비성과 웅진성은 함락되었으나 지방의 군세력이 그대로 남아있는 상태가 되어 이후 부흥운동이 거세게 일어났고 실제로 사비성과 웅진성 주변 지역을 제외한 전지역이 부흥군의 지배하에 놓여 나당연합군이 부흥군에게 포위되는 상황이 일어난다.    (다음 문서에  계속~)

 

 

 

백제 최후의 전장, 군사요충지 - 기벌포 (下) 내고향 군산

2004/05/29 14:32

복사 http://blog.naver.com/kilee951/80002790270

4. 기벌포(백강) 전투의 장소 및 상황

 

우리는 앞의 글에서 백강(기벌포)이라고 불리우는 장소가 금가하구의 군산지역임을 확인하였다. 이 글에서는 기벌포인 군산지역에서 벌어진 당군의 상륙작전 장소를 확인해 보도록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군산의 지리를 알아야 하는데 여기에서 군산의 지리는 백제 의자왕 때 군산의 모습을 말한다.

 

하지만 현재 남아있는 지도나 기록이 없는 관계로 당시의 군산의 모습은 고서가 전하는 전투내용 및 현재 남아있는 지명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660년 당시의 군산모습이 현재 우리가 살고있는 군산의 땅 모습과는 많이 다를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기습작전에 의하여 나당연합군이 거쳐간 기벌포와 탄현이 백제좌평 성충과 흥수가 적의 침입시 굳게 방비해야 할 곳으로 지적한곳과 일치함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을 함에 있어서 적의 약한 곳을 공격하는 것은 병법의 기초이다. 특히나 기습공격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제까지 그 위치를 군산지역이라고만 추정한 기벌포라는 지역이 갖고 있는 전략적 성격을 알 수 있다. 즉 기벌포는 나당 연합군측이나 백제측이나 양측의 전략가들은 모두다 그 중요성을 인정하는 곳이며 또한 당시 전략적 중요성에 비하여 국가기강이 해이해진 백제의 수비가 약화된 곳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수로인 웅진강구는 중국의 한민족과의 전쟁시 기본작전대로 라면 수륙양동 작전 중 수군이 백제의 도성인 사비성에 이를 수 있는 강의 입구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기벌포와 탄현은 나당연합군이 이 백제의 도성을 향하여 기습작전을 하는데 요구되는 모든 것을 갖춘 곳이었다. 왜냐하면 신라와 당군이 덕물도에서 작전을 세운 후(6월 21일) 한 달여 만인 7월 18일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의자왕의 항복을 받았으니

 

「삼국사기」신라본기 문무왕 11년에 당나라 장군 행군총관 설인귀가 문무왕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들은(신라와 당) 기일을 달리하여 서로 응원하기로 하고 하루아침에 대규모 군사를 동원하여 바다와 육지에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라는 글귀가 보이는데 하루아침에 대규모 군사를 동원하였다는 말은 나당연합군이 기습공격을 했음을 뜻한다. 



 또한「삼국사기」신라본기 태종무열왕 7년에 보면 7월 9일에는 신라군의 황산벌 전투와 당나라군의 기벌포 전투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유독 7월 9일에 이러한 전투가 집중되어 있는 것은 신라와 당군의 치밀한 기습작전이 그 요인이다.

 

 당군은 7월 9일 기벌포를 통과하여 10일 계획대로 백제 남에 도착하였는데 신라군이 약속날짜보다 하루 늦은 11일 도착하자 신라의 독군 김문영을 목베려고 한 것도 당군이 기습작전에 있어 신속한 기동력을 중요시했다는 증거이다. 이후 12일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을 포위 공격하니 백제는 그야말로 당황하여 있는 군사도 쓰지 못하였던 것이다.

 

의자왕이 웅진성으로 피하지만 7월 18일 항복함으로써 나당연합군의 속전속결의 기습작전은 성공적으로 끝이 난다.

 

1)백제시대 군산의 지형

 

군산의 해안선 변화는 1998년을 기준으로 볼 때 가까이는 외항국가공단사업으로 내초도와 오식도 등의 섬들이 육지화 하였고 일제식민지 시대에는 일인들의 간척사업으로 당시까지는 섬이었던 옥구군 옥봉리(무의인도) 일대의 어은리, 선연리, 사호촌, 칠호촌, 산북동 등이 바다였다가 새로운 경작지화 하였다.


또한 1923년 지형도에 따르면 나포면 옥곤리에서 서포리까지의 금강연안은 갈대밭과 뻘밭이었는데 이곳에 간척 사업을 하여 농사를 지었다. 이전에는 아마도 취성산 줄기와 불지산 줄기까지 금강물이 들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이 당시 간척된 땅들은 회현면 금광리와 학당리에서 대야면 지경리, 죽산리까지의 선을 경계로 만경강 하구까지 이르는 대야뜰과 영병산 줄기의 남쪽에 위치한 옥구읍 상평리에서 수산리, 이곡리와 회현면 월연리와 금광리에 걸치는 수산이곡뜰 등으로 일제의 쌀생산을 위한 일인들의 농업이민 속에서 총독부에 의한 계획적인 인위적 간척사업이 20세기 초에 이루어져 군산의 해안선 모습은 큰 변화를 겪었다.



때문에 1920년대 작성된 군산의 모습은 현재와는 무척 다름을 알 수 있다. 이렇듯이 80여 년의 시간 속에서도 지도의 변화가 놀라울 정도인데 하물며 1300년 전의 군산모습은 어떠했을까 상상이 가지 않는다. 백제 시대의 군산의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근대부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며 작은 단서라도 확인해보는 과정을 밟아 보겠다.



그래도 기록이 남아있는 일제 때에는 위에서 알아본 바와 같은 간척사업으로 인한 해안선의 변화가 심하였으며 1915년에 발행된 「군산안내(群山協贊會)」에 의하면 군산은 서쪽 및 남쪽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고 동쪽은 갈대밭으로 이루어진 협소한 곳으로 나와있다. 현재의 중동일대는 당시에는 갯뻘의 갈대밭 지대였으나 1929년 매립한 것으로 나와있다.



조선 철종 때 만들어진 「대동여지도(철종 12년-1863)」에 나온 군산은 임피와 옥구현 중심의 교통망과 함께 현재의 은파 저수지가 미제(米堤)방죽으로 표기된 모습이 특이하며 만경강 북안인 현재의 회현면에 고사포(古沙浦)가 표시되어있어 이병도 박사 등이 고사포를 백제의 고사비성으로 비정하여 주류성 한산설(건지산성)의 근거가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 이전인 조선왕조 숙종 27년(1701)에 만들어진 전라우도 군산진 지도에는 현재 군산시의 지명이 비교적 자세히 나와 있는데 군산진영을 중심으로 내영리(신흥동), 당정리(월명동, 금광동), 강변리, 구영리(영화동), 거석리(개복동, 중앙로), 죽성리, 경포리, 경장리 등의 명칭이 나오는데 군산의 산기슭을 중심으로 마을이 있고 현재의 평지는 거의 갯뻘이나 갈대밭으로 보인다.

 

특이한 점은 현재의 금성산에서 발원하는 경포천과 오성산에서 출발하는 둔덕천이 지도에 표시되어있고 경포천의 끝부분에는 대형다리가 그려져 있으며 경포천과 둔덕천이 만나는 현재의 구암동의 구암동산 지역이 섬으로 표시되고 있는 모습이다.

 

아마도 일제 때의 중동, 경암동, 경장동, 구암동 일원이 갯뻘과 갈대밭이었다면 약 백여년 전인 1701년에는 중동, 경암동 지역에 배가 정박해 있고 구암동산이 섬으로 표시되는 건 놀라운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또 하나의 지도인 수영지(水營誌)에 소장된 군산진 지도에는 뱃길과 함께 「성종실록」에 기록된 노인성(혹은 군산진성)의 성곽이 현재의 대명동, 창성동, 평화동 유역에 위치함을 볼 수 있다. 이 노인성은 세종 초기에 군산진을 고군산으로부터 옥구현 북쪽 진포로 옮겨오면서 쌓은 것으로 보이며 진의 명칭은 군산진으로 하였으나 진성은 노인성이라 호칭한 것으로 보인다.

 

18세기의 지도를 통해본 군산은 그야말로 해안의 갈대숲이 무성한 한적한 수군지영임을 알 수 있다. 안타깝게도 그 이전의 지도는 전하지 않는다. 하지만 군산지역 마을의 유래나 지명의 유래를 보면 그 지역의 모습이 추측 가능하다. 이러한 군산의 백제시대 모습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한가지 주목할만한 주장을 발견 할 수 있다. 백강이 동진강이라고 주장하는 일본인 학자 오오와라(大原利武)는 금강하구의 지형이 한때 큰 변화가 있었다는 색다른 주장을 하였다.



오오와라는 백제시대 금강하구는 현재의 모습처럼 북에서 서쪽으로 서류하지 않고 군산 및 옥구지방이 있는 동쪽으로 남향하여 현재의 만경강 하구에 유입하였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해안충적평야의 「지질주장도(조선총독부 1937년)」의 자료를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이 자료에서는 구암동에서 신시청, 미장들, 평사들, 석교들을 거쳐 칠다리를 지나 수산이곡평야의 만경강 하구에 이르는 해안 충적평야의 충적층 구조를 보여주는데 이 지역은 모두 1m이내의 표토층만 걷어내면 가는 모래의 세사층과 점토층이 지하 15m 이상 쌓여있어 이곳이 과거에 바닷물 또는 밀물썰물의 영향권내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증거는 1701년의 전라우도 군산진 지도에서 구암동에 있는 구암동산이 섬으로 표시됨을 보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또한 현재의 경포천이 만경강이 보이는 금성산 근처까지 이어져있고 평사들에 있는 쌍봉리의 봉서마을은 배가 돌아갔다는 유래에서 지금도 돌머리로 불리우고 있고 쌍봉리 평사마을은 기러기가 모래밭에 앉는다는 평사낙안형의 지명으로 지질조사에서 내륙인데도 불구하고 조개가 출토되는 지역으로 현재의 모습과는 달리 마을이 강가에 있었다는 명칭들이 많이 남아있다.

 

또한 석교들에 있는 석교, 옥교마을은 이 지역이 옛날에는 금강과 만경강의 합수지점이었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으며 마을명칭도 마을의 땅이 질어서 마을과 마을을 돌로 징검다리를 놓고 다녔다는 뜻에서 다리 교(橋)자를 사용하였다. 또한 금성리의 칠다리 근처의 내류마을에서는 패총지가 발견되었고 이 지역은 옛날에는 나루터로서 배가 닿았다고 전한다.



이러한 마을의 유래와 명칭들을 볼 때 현재 구암동 세풍합판이 있는 지역에서 군산시청의 남쪽에 위치한 만경강 너머 김제 망해사가 보이는 뻥뚫린 지역은 오밀조밀한 산이 유독 많은 군산에서는 보기 드믄 지형으로 여러 경황으로 보아 백제시대의 군산지역은 웅진사비를 흘러온 금강줄기가 그 하구인 군산지역에서는 구암동산 근처에서 두 갈래로 나뉘어져 본 줄기는

 

현재의 모습인 도선장 앞으로 흘렀고 그 지류가 구암동산을 지나 경장동, 미장들, 평사들, 석교들을 지나 당북리의 돛대산과 금성리의 박지산 사이로 난 줄기를 따라 만경강 하구똑으로 입수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결론하에 필자는 현재의 칠다리 동편산인 금성산 혹은 박지산이 소정방이 올랐다는 산으로 보고 있으며 이 박지산 위에 진을 치고 건너편에 보이는 옥구지역의 해안 방어선을 뒤에서 공격한 것으로 본다.

 

2) 동쪽 기슭에 올라

 

소정방의 기벌포 상륙 전투는 우리와 중국 양측의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들을 군산시 옥구군 지역과 비교 확인하면서  기벌포에서의 전투상황을 그려보겠다.

 「당서」열전 소정방전을 보면

 ㉠ '현경오년 소정방은 성산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웅진강구에 도착하였다.
 ㉡ 적이 강을 지키고 있으니
 ㉢ 정방은 동쪽기슭에 올라 산위에 진을 치고 적과 싸워 크게 이겼다.
 ㉣ 돛을 달고 바다를 덮으며 꼬리를 물고 들이닥치니 적병은 무너지고 수천이 죽고 나머지는 흩어졌다.
 ㉤ 조수를 만나 배들이 연이어 강에 들어섰고 정방은 안상에서 이를 감싸며 수륙이 함께 진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 글은 660년 7월 9일의 기벌포에서의 전투를 중국인 역사가가 담담하게 사건이 벌어진 시간 순서대로 적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문장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보면 ㉠은 소정방군이 웅진강구 즉 금강의 입구인 기벌포에 도착한 내용이고, ㉡은 백제 수비군의 저항을 나타내며, ㉢은 해안의 백제 수비군을 소정방군이 격파한 용병술을 나타낸다. ㉣은 ㉢의 첫 전투 후 바로 이어 벌어진 두 번째 전투를 나타내며, ㉤은 기벌포 즉 웅진강구에서의 전투를 마치고 웅진강을 거슬러 사비성을 향하는 모습이다. 이러한 이해 아래 이 글에서는 위의 「구당서」 내용을 순서대로 자세히 확인해 보겠다.

위의 내용에는 우리의 「삼국사기」의 내용과는 다르게 당군이 덕물도에 상륙한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고 성산을 출발한 후 바로 첫전투현장인 백제의 웅진강구에 도착한 것으로 적고 있다.


 ㉠ 웅진강구라는 명칭을 앞에서 누차 설명했듯이 우리측 자료에는 기벌포 백강이라 적고 있으나 중국의
「구당서」「신당서」「자치통감」 등의 자료에는 오직 웅진강구 혹은 웅진구라고 적어 중국인들이 금강을 처음 알았을때의 명칭인 "곰나루"를 한자로 웅진이라고 적은 이두식 표현으로 금강 즉 웅진강이라는 명칭이 중국에서는 금강을 가리키는 고유명사화하여 적으므로써 우리와 다른 명칭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다음으로 나오는 ㉡'적이 강에 진을 치고 있으니'라는 내용은 당시에는 현재의 군산시 지역이 만조시에는 섬이었던 것으로 보이므로 해안의 어느쪽에 진을 치고 있었느냐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이 문제를 알기 위하여 우리는 당시 군산지역에서 사람들이 살던 생활구역을 알아야 한다.

 

 이 의문의 실마리는 「한국사」고대편(진단학회)에 나와있는 마한 54개국 중에서 전북지방에 있는 국명을 알아봄으로써 찾을 수 있다. 이 내용은 본래 중국측 기록인 「삼국지」위지 마한조에 나온 내용으로 마한의 54개 국명 중 군산지역에는 대략 세 개의 국명[비리국(회현) 신흥국(임피) 산노국(옥구)]이 있는 것으로 연구되었다.

 

  전주, 정읍 등지에는 하나의 나라이름만이 존재하는데 유독 좁은 군산지역만 세 개의 국가명이 나오는 것 또한 현재의 군산시가 과거 옥구군이었던 육지와 가까이 있는 섬이었던 이유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군산지역의 마한 삼국 중 옥구지방은 마한시대에는 사노국(馬四盧國)으로 불리웠고 백제시대에는 마서량현(馬西良縣)으로 불리웠는데 마한 시대 당시 하나의 국가가 수천에서 만여명의 백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니 백제의 마서량현때에는 마한 시대보다 인구가 늘어 있었을 것이다.

 

 이 마서량현이 웅진강구의 요지에 자리하고 있어 강을 지킨 백제군은 마서량현(옥구)의 병사들이었을 것이며 해안 방어선은 현재의 옥구읍성과 대산산성 그리고 사자암 봉수대까지의 염병산 줄기에 해안 방책이 설치되고 당시 섬이었을 성산토성이 최전선이었으며 그 안쪽인 군산대 뒤 지역인 개삼마을, 신관마을로 이어지는 월명산의 줄기들에도 해안 방책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중에서 중심지역은 현재 상평중학교가 있는 옥구읍 읍내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옥구읍의 옥구읍성은 조선시대 문종원년(1451) 신축된 것으로 기록되었으나 읍성의 서쪽 성벽 아래로 백제 고유형태인 토단식 방책지를 확인할 수 있어 조선시대 읍성을 신축하기 이전에 이미 사용하지 않는 폐성의 형태로 남아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정방은 동쪽기슭에 올라(定方升東岸)'라는 문장은 소정방이 상륙한 지역인 기벌포 지역이 어떤 지리적 조건을 갖고 있는 곳인가 하는 단서를 제공해 준다.


 당서에는 이 문장을 '적이 강에 진을 치고 있으니 정방은 동쪽강기슭에 올라 산위에 진을 치고'라고 적고 있다. 이 내용은 기벌포라는 지역에 있었을 세 장소를 나타낸다. 즉 백제병이 진을 치고 있는 곳, 정방이 상륙한 동쪽기슭, 정방이 올라진을 친 산. 이 세곳중 한곳인 동쪽기슭은 어디인가?

 

이 내용을 「신당서」열전 소열전에서는 '정방이 좌측 벼랑에 나아가(定方出左涯)'라고 다르게 적고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의 차이는 고대의 방위개념인 사신도에서 청룡이 좌측을 가리키며 동쪽을 나타낸다는 의미를 이해하면 좌측과 동쪽은 같은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 가리키는 동쪽이 어디인지는 우리 역사서인 「삼국사기」를 보면 그 위치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나온다.

 

「삼국사기」신라본기 태종무열왕 7년조에는 '기벌포에서 백제병을 만나 뒤에서 공격하여 대패시켰다.(到 伎伐浦遇百濟兵逆擊大敗之)'라고 나오는데 이 내용을 「당서」의 내용과 연결시키면 당나라군이 바닷가를 지키는 백제군을 정면 돌파하지 못하고 뒤쪽으로 돌아 동쪽기슭에 상륙한 후 산에 진을 치고 적의 뒤에서 공격하였다는 내용이 되는데 그 백제군이 진을친 강의 뒤로돌아 상륙한 곳이 곧 동쪽(좌측)기슭이라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당시의 군산지형과 접합시키면 마서량현(옥구)을 중심으로한 해안방어선의 뒤쪽은 지금은 사라진 강줄기인 시청에서 칠다리 사이의 금강지류이며 당의 입장에서 방위상의 동안(東岸) 및 좌안(左涯)는 마서량쪽이 아닌 부부리현(夫夫里縣-회현)쪽 강변이었다. 13만 대군중 절반만 이지역에 상륙하여도 6만이라는 대부대이다.

 

  현재나 과거나 전쟁시 상륙작전은 큰 위험성을 감수해야 한다. 방어자는 자신의 지역에서 전투 준비를 끝낸 상태인데 배에서 육지로 뛰어나가는 상륙병은 방어자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으므로 소정방이 대군을 백제군이 전력이 집중된 마서량현의 남쪽이 아닌 뒤쪽인 강건너편 동쪽기슭에 상륙시킨 것은 백제군의 허를 찌른 것이라 볼 수 있다

 

3) 버드나무를 깔고

 

 「당서」의 '동쪽기슭에 올라'와 「삼국사기」의 '뒤로 돌아서 공격하여'라는 문장으로 인해 당나라군의 상륙지역이 금강하구의 군산지역 중에서도 성산면과 개정면, 회현면 지역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당군의 상륙지에 대한 더 명확한 증거는 없는 것일까?

 

필자는 「삼국사기」김유신전에서 소정방이 "기벌포에 도착하여 강을 지키는 백제군의 뒤로 돌아 동쪽에 상륙후 공격했다"는 내용의 상륙장소에 대한 지역적 특징을 알 수 있는 문장을 찾을 수 있었다. 



 김유신전에서는 '기벌포에 이르자 해안이 진수렁(갯벌)이라 빠져서 나아갈 수 없었다. 이에 버드나무가지를 깔고 수렁을 건너 나아갈 수 있었다.(入伎伐浦海岸泥 不可行乃布柳席以師)'라는 문장이 나온다.

 

이내용으로 소정방이 상륙한 동쪽기슭은 갯벌이 있는 강가이며 또한 갯벌에 깔을 버드나무가 많은 지역임을 알 수 있다. 갯벌이 있다는 내용은 서해안의 큰 특징이 갯벌에 있음을 볼 때 특별한 내용은 아니다. 



 그러나 버드나무가 많은 지역이라는 특징은 군산지역중 한 지역에 관심을 갖게 한다. 군산시 옥산면 금성리 일대는 지금은 사라진 금강의 지류가 만경강과 합류되는 여울목에 자리잡고 있는데 금성리 주변에는 이 근처에서는 보기 드물게 버드나무와 관련된 마을 명칭이 확인된다. 금성산 기슭의 3개 마을인 외류(外柳)마을, 내류(內柳)마을, 유동(柳洞)마을이 그곳인데 마을주민들은 밧버들(외류), 안버듯(내류), 버들마을(유동)로 부르고 있다. 



 이 지역의 명칭은 옛부터 버드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인데 위의 세마을 주변의 명칭들도 백강에서의 전투와 관련하여 의미심장하다. 이 마을들이 자리잡고 있는 금성리의 금성산은 예전에는 박지산(朴只山)으로 불리웠고 이 산의 남쪽줄기에 자리한 마을인 배그매의 옛명칭이 박박리(朴朴里)고 이곳에 있는 저수지의 명칭이 박박제인 점으로 보아 박지산도 원명칭은 박박지산(朴朴只山)으로 보인다.

 

 이 박박지산이라는 명칭은 고어에서 박(朴)이 밝다<희다<온<아로 사용이 되었는데 온이나 아가 백제어에서 크다를 뜻하기도 하지만 박이 두 번 반복되는 박박이라는 뜻이 밝고 밝은 즉 흰(白)의 뜻을 지니고 있으며 박작지에서 지(只)라는 단어는 고대 백제어에서 己, 支와 함께 단어의 어미에 붙으면 산성(山城)을 의미하는 지명어미가 된다. 따라서 박박지산은 백제시대에 흰산성(白山城)혹은 큰산성이라 불리운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흰산성이라는 명칭은 97년 산성답사에서 금성산(박지산)에서 백제식계통인 테머리식 산성을 찾아냄으로서 확인 할 수 있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면 배그매의 옛명칭인 박박리도 흰마을(白村)이 되며 현재의 명칭인 배그매도 배그-매의 배그가 백의 파자로 보고 매자는 마을을 뜻하므로 배그-매<흰 <백촌(白村)이 됨으로서 그 뜻은 같은 내용임을 알 수 있다.

  
 또 한가지 놀라운 점은 박지산의 서편에 자리한 옥산면 당북리의 백석산은 박지산과 함께 금강의 지류가 만경강에 입수되는 여울의 양쪽을 지키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백석산의 기슭에 백석마을이 있는 것이다. 백석이라는 명칭은 백석(白石)마을 뒷산인 백석산에서 흰돌이 난다고 하여  부르게 되었는데 현재 주민들은 흔-돌마을이라 부르고 있다.



그런데 백석은 일본어로 백(白)이 ハク(白), 석(石)은 スソ(村) 즉 백촌을 뜻한다. 이밖에도 당북리의 북서쪽에 위치한 백토마을 은 옛명칭이 백뚝개로서 흰여울목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이지역에서 백강, 백촌강과 관련된 명칭들이 다수 발견됨을  볼 때 옛날에는 나루터가 있었다는 박지산의 버드나무와 관련되 세마을 주변지역이 당나라군의 기벌포 상륙작전시 상륙지점임을 확인할 수가 있고 더불어 박박지산이 흰산성(白山城)이고 배그매가 흰마을 즉 백촌, 그앞 백석마을 또한 백촌, 백뚝개가 흰여울로 이지역이 바로 성충과 흥수가 지켜야 한다는 백제의 요로 기벌포 백강 지역이며 「일본서기」에 기록된 백촌강 해전의 현장임을 확인할 수 있다.

 

4) 수륙이 함께 진격

 

이상의 내용에서 소정방의 상륙지를 군산시 옥산면의 금성리 일대로 확인하였다. 이렇게 보면 소정방이 진을 친 산은 당연히 박박지산이 되며 박박지산에 진을 치고 뒤에서 공격한 백제의 해안진지는 박박지산 정상에서 눈 앞에 보이는 현재의 옥구읍내리에 있는 옥구읍성 즉 마서량현의 중심지인 것이다.



여기에서 마서량(馬西良)이라는 명칭은 마(馬)가 서풍을 뜻하며 서(西)는 새 즉 억새를 뜻하고 량(良)은 나리(川)-(津)을 뜻하므로 바람이 심한 억새가 있는 강가라는 뜻이다.

이렇게하여 강가에 진을 친 백제군을 크게 이긴 당나라군은 다음으로 '돛을 달고 바다를 덮으며 꼬리를 물고 들이닥치니 적병은 무너지고 수천명이 죽고 나머지는 흩어졌다.'라는 「당서」의 내용으로 보아 기벌포(백강)에서 또 한 번의 전투를 치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당서」에서 이 문장 다음에 기록된 내용이 조수를 만나자 배들은 잇따라 강에 들어섰고라고 적음으로써 웅진강에 들어서기 전에 웅진강구(바다와 강의 접합부) 즉 바닷가에서 바다를 덮으며 공격하여 수천을 죽였다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 내용을 필자는 당시 백강의 입구를 지키는 섬이었던 마서량현(옥구읍 상평리의 백제때 지명)이 격파당하자 군산의 나머지 세력인 부부리현(마한 비리국, 현재 회현)과 시산현(마한 신흔국, 현재 임피)의 병력과 당시 큰 도시였던 익산의 증원군이 합류하여 기벌포에서 반격을 가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수적인 열세 때문에 패배하여 백제군 수천명이 죽고 나머지는 흩어지는 지경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군산시 성산면 오성산 정상에 있는 소정방과 관련된 오성인의 전설도 이 실패한 반격작전과 관련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후 사로잡힌 당시의 마서량현(옥구), 부부리현(회현), 시산현(임피), 익산의 지휘관 또는 마을의 장로들을 웅진강이 시작되는 오성산 정상의 오성산성에서 참수하고 '조수를 만나자 배들은 잇따라 강에 들어섰고 정방은 안상(岸山)에서 이를 감싸며 수륙이 함께 진격했다.'는 내용처럼 수군은 웅진강에 들어서고 육군은 취성산과 망해산의 줄기를 따라 사비성으로 공격한 것이다.

 

5. 백촌강해전

 

나당연합군의 기벌포 상륙작전후 백제는 실로 어이없게 도성을 함락당한다. 그러나 의자왕과 대신들의 항복으로 백제가 역사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곧바로 전국적인 부흥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나당연합군의 기습에 의한 도성의 함락과 부여씨 왕족의 몰락은 모든 백제인들을 놀라게 하였고 무력감에 빠지게 하였으나 사비성과 웅진성에서의 나당연합군의 살육과 약탈의 만행에 놀라 정신을 차린 백제인들은 각 지방의 토호인 성주들을 중심으로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오래지않아 나당연합군은 사비성과 웅진성만을 의지한채 백제의 전국토는 부흥군의 세력안에 들어가게 되어 도리어 나당연합군이 웅진과 사비성에 포위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부흥운동이 이렇듯 쉽게 부흥운동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요인은 나당연합군의 기습작전으로 사비성과 웅진성 지역 일부는 함락되었지만 이들지역을 제외한 거의 모든 백제 성곽들이 건재한 상태였다는 것이 그 원인으로 보인다.



백제가 망하기전 전체 성곽이 200여 성인 것에 비추어 볼 때 부흥군에 가담한 성이 200개 성이라 한다면 웅진사비의 도성지역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지역이 부흥군의 세력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와중에 부흥군의 내부에 분열이 일어나 귀실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병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귀실 복신마저 일본에서 귀국한 부여풍왕에게 죽음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 기벌포(백강)는 다시 역사에 등장한다.



기벌포(백강)에서 격돌한 양 진영의 당수군과 일본수군에 의한 백촌강 해전은 백제부흥군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 일대 사건으로 이 해전 이후 백제는 비로소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 싸움은 백제의 풍장왕이 부흥군의 실질적인 지도자인 복신장군을 죽임으로서 시작된다.



그 과정을 보면 백제부흥군에게 웅진성에 포위 당한채 고전을 하던 유인원의 당군은 본국에 구원을 요청한다. 이에 우위위장군 손인사가 웅진도행군총관이 되어 산둥반도의 군사 이만 칠천을 거느리고 웅진에 도착했다. 이후 663년 6월 복신장군이 풍장왕에게 피살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나당연합군은 부흥군의 분열을 틈타 전세를 뒤집으려는 계획을 세운다.



웅진성에서의 작전회의 내용을 보면 수륙의 요충인 가림성(성흥산성)을 먼저 치자는 계획이 나왔으나 유인궤가 이에 반대하여 말하기를 "가림성은 너무 험지에 위치하여 함락시키는데 시일이 많이 걸릴 것이니 부흥군의 중심지인 주류성을 공격하여 무너뜨리면 다른성들은 스스로 무너지리라" 주장하니 이에 주류성 공략을 결정한다.

 

나당연합군이 주류성 공격의 계획을 준비하고 있을 때 부흥군의 상황을 「일본서기」에서는 '백제 풍장왕은 적의 계획을 미리 알고 여러장군에게 말하기를 지금 일본구원장군 이호하라노기미오미가 만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오고 있는 중이다. 여러장군들은 미리 대비하기 바란다.나는 백촌에 나아가서 기다리려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복신장군을 살해한 후 고구려 일본에 이미 원병을 청한 풍장왕은 나당연합군의 주류성 공격계획을 미리 알고 있었다. 또한 바다를 건너오는 일본군과 합류하기 위해 본성인 주류성을 떠나 백촌강에 나간다.

"여러장군들은 미리 대비하기 바란다"는 말을 남긴채.

여기에서 필자는 한가지 의문에 빠진다.

 

적의 내습을 미리 간파한 백제왕이 왜 일본군과 합류하기 위해 백촌강에 나갔을까? 「구당서」열전 백제전에는 '인궤가 백강구에서 부여풍의 무리를 만났다.'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풍장왕이 백촌강해전때 일본수군과 함께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일본수군의 패전후 백제왕인 풍장왕이 부흥군의 도성인 주류성이 함락되기도 전에 배를 타고 고구려로 망명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일국의 왕이 적이 자신의 왕성을 목표로 공격해 오는데 왕성을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풍장왕의 목표는 주류성 방어가 아니라는 생각이든다. 그 이유는 주류성의 위치 확인시 주류성의 지리적 특징으로 알려진 내용에 의하면

 

 주류성은 산이 험하고 높으며 골짜기는 좁고 깊어 지키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렵다는 내용이 암시하듯 가림성에 못지않게 험난한 지형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이제껏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굳건히 버틸 수 있었으므로 풍장왕이 주류성에서 수성전을 벌이며 가림성이나 임존성 등에 있는 부흥군으로 하여금 나당연합군 후방공략을 유도하면 쉽게 물리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삼국사기」신라본기 문무왕조의 답설인귀서에는 '백제의 정예기병이 강기슭 언덕에 진을 치고 일본수군을 호위하고 있었다'는 내용처럼 주류성의 정예병력을 이끌고 백촌강에 나왔다는 말은 백제일본연합군의 공격 목표가 무엇이었나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여기에서 두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문제는 풍장왕의 백제정예군과 일본수군이 유인궤의 당수군을 만난 곳은 백강구로서 이 곳은 여러나라의 사서에 일명 백촌강, 백강, 기벌포, 웅진강구라 불리우는 곳으로 그 명칭은 다르지만 한 지명임에 분명하며 이제까지의 앞장에서의 확인작업으로 금강하류의 군산옥구지역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또 한가지 중요한 점은 백강은 군산과 금강이나 부안과 동진강처럼 바로 옆에 주류성과 붙어있는 모습이 아니었을 거라는 점이다. 가까운 거리이기는 하나 바로 옆에 붙어있는 모습은 아니리라는 추정은 백강과 주류성이 군산과 금강처럼 한 지역이었다면 당 소정방군의 기벌포(백강) 상륙작전의 전투내용을 담은 「구당서」 및 「삼국유사」 등의 사료에서 소정방의 기벌포(백강) 상륙작전시 도성규모의 큰성인 주류성 공략에 대한 내용은 왜 한 단어로 안나오느냐 하는 점 때문이다.

 

 당 소정방군의 첫상륙지인 백강(기벌포)는 전략상 당나라군의 백제공격의 교두보이며 본국인 당나라로부터의 보급물자를 수송받는 입구가 되는데 이곳에 도성규모(3,960m)의 포곡현 산성이 있는데 소정방의 당군이 그 성을 점령하지 않고 지나쳤다면 말이 되지 않는 내용이고 주류성을 점령했다면 그 산성을 점령한 전투내용이 중국의 역사서에 실려있어야 하는데 어떤 중국의 역사서에도 당군의 웅진강구 상륙시 주류성을 점령했다는 내용은 실려있지 않다. 



 또한 「구당서」유인궤전에 웅진강으로부터 백강으로 가서 육군과 합류하여 함께 주류성으로 갔다는 문장에서 보듯이 만약에 동진강과 우금산성이 백강과 주류성이라면 당의 수군은 백강에 도착함으로써 우금산성이 변산반도에 있음으로 목적지에 도착한 것과 같은데 다시 육군과 주류성으로 항해해서 갔다면 주류성은 백강에서 뱃길로도 갈 수 있는 곳이며 그 거리가 어느정도 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어느 정도 서로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명문제는 백강해전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 내용을 확인함으로서도 알 수 있다. 「구당서」유인궤전을 보면 "웅진강으로부터 백강으로 나아가 육군과 합류하여 함께 주류성으로 향했다(自熊津江, 往白江以會陸軍同 周留城)"는 내용이 있다.

 

이 내용은 백강의 위치를 확인하는 중요한 내용으로 취급되었는데 일부학자들은 위 문장중 전반부에 해당하는 내용을 웅진강이라는 하나의 강으로부터 백강이라는 또 하나의 강으로 향하였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백강이 웅진강 즉 금강하류의 군산이 아닌 다른 곳에 있다는 주장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해석 아래 백강을 금강과 멀지않은 곳에 있던 동진강에서 찾는 일들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내용 또한 앞장에서 충분히 설명하였지만 강이 길 경우 통상 강의 이름은 지나는 곳에 따라 달라지는데 옛곰나루 즉 웅진성 인근의 금강은 웅진강이라 불리웠지만,

 

 금강이 사비성을 지나면 금강의 하류는 백강혹은 기벌포라 이라 불리웠던 것은 이미 성충, 흥수의 충언에서 한 지명에 대하여 기벌포와 백강이라는 두지명을 사용한데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두가지 점이 명확해지면 풍장왕이 백제의 주력부대를 이끌고 주류성으로부터 백강구로 나아가 일본군과 함께 행동한 원인을  가정해 볼 수 있다. 풍장왕의 이러한 행동은 어떤 군사적 목적으로 주류성으로부터 나와 나당연합군과 대회전을 계획했다는 추정인데 이러했을 경우 왜 주류성으로부터 떨어진 백강구에서 전투가 있었느냐하는 의문이 남는다.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을 내려보면 풍장왕이 주변정세의 불리함을 반전시키고 복신장군의 처형으로 흔들리는 부흥군 왕의 자리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어떤 파격적인 전략적 성공이 있어야 했을 것이다. 이러한 요구 속에서 풍장왕은 적의 주류성 공략을 사전에 알고 여러 장군들은 미리 대비하라는 주류성 방위계획을 전한후 자신은 부흥군의 주력부대를 거느리고 일본군과 함께 백강구 즉 웅진강구로 나아가 당나라 수군 및 신라육군과 일대 혈전을 벌이는 것이다.



 이러한 앞 뒤 상황을 고려해보면 풍장왕이 백강구에 나아간 이유는 사비성 때문으로 보인다. 백제의 도성인 사비성을 함락시킴으로서 갖는 정치적 효과는 말로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부흥운동 초기부터 끊임없이 공략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한 사비성 수복이라는 도박을 하기 위해 백제의 정예 기병부대와 웅진강을 따라 배를 몰아 같이 진군할 수 있는 일본의 수군이 함께 웅진강구에 진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경우 나당연합군은 주류성을, 백제왜연합군은 사비성을 서로 목표로 하였기에 서로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 된 것이다.

 

 이전투는 백제 풍장왕의 입장에서는 백제부흥군의 모든 힘을 결집시킨 전투였기에 663년 8월 27일~28일의 전투에서 육군과 수군이 모두 패한 풍장왕은 주류성이 함락되기 10여일전인데도 본성으로 돌아가기 보다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구려로 망명하게 되었던 것이다.



 전투상황을 자세히 살펴보면 「구당서」유인궤전에 '손인사, 유인원과 신라왕 김법민 등은 육군을 이끌고 진격했고 유인궤 및 별수, 두삽, 부여륭은 수군과 양선(군량선)을 거느리고 웅진강으로부터 백강으로 나아가 육군과 합류하여 같이 주류성으로 향했다.'라고 기록되어있다.



이 내용을 근거로 백촌강 전투를 추정해보면 웅진강으로부터 백강으로 나아가 백강구(군산인근)에서 전투를 한 후에 수륙이 함께 주류성으로 향했다는 뜻이다. 이글은 「일본서기」의 내용과 날짜 진행상 서로 다른 면이 있다.

 

「일본서기」에는 '8월 17일 신라군은 주류성에 이르러 왕성을 포위하였고 대당군은 전선 170척으로 백촌강에 진열하였다.'라고 한다. 이 기록 때문에 주류성과 백강이 서로 붙어있을거라는 생각들을 해왔다고 본다.

 

필자는 백강구가 곧 웅진강구 현재의 군산지역으로 볼 때 「구당서」유인궤전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되며 「일본서기」의 내용 또한 나당연합군이 풍장왕의 백제정예부대와 일본수군의 동태를 파악하였다면 신라의 육군은 주류성을 공략하고 당수군은 사비로 가는 백강입구를 차단하고 있었으리라는 뜻으로 짐작된다.



전투상황을 보면 「일본서기」는 8월 27일 첫해전에서 일본수군이 불리해지자 물러났고 당수군은 굳게 진을 지켰다. 8월 28일 일본장수와 백제 풍장왕은 기상을 보지않고 말하기를 우리들이 앞다투어 돌진하면 당의 수군은 물러날 것이라 하면서 전열도 가다듬지 않고 당수군을 향해 공격하였다.

 

이에 대당군은 좌우에서 일본수군을 포위공격하여 잠깐사이에 일본수군은 패하고 말았다. 물에 뛰어들어 빠져 죽는 자가 수도 없이 많았고 뱃머리를 돌릴 겨를조차 없었다.

 

이 짧은 글에서 1300여년 전의 해전을 묘사함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의문시 되는 내용은 '기상을 살피지 않고(不觀氣象)'의 내용이다. 이 내용을 연기군의 김재붕 선생님은 날씨가 좋지 않은데 전투를 서둘렀다고 생각하고 부안 동진강설의 전영래 교수님은 이내용을 밀물과 써물의 시간을 고려치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하여 일본전선들은 썰물에 해수가 빠져나가자 갯벌에 빠졌고 당군은 좌우에서 일본전선을 에워싸고 공격하여 일본전선을 불태우자 일본수군들이 물에 뛰어들어 빠져죽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좀 다르다.

 

먼저 전영래 교수님의 밀물썰물의 시간을 고려치 않았다는 생각에는 공감하지만 썰물에 일본전선이 갯벌에 빠졌다는 내용에서는 다른 의견이다. 한두척의 배도 아니고 일본전함 400척, 당군의 전함 170척의 대격돌에서 어떻게 일본수군만 갯벌에 빠질 수 있을까?

 

기록에 의하면 당시 당나라의 전선은 일본 전선에 비하여 규모가 아주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물이 빠져서 강바닥에 배가 걸리는 상황에서는 적은 규모의 일본전선보다는 대형인 당의 수군이 더 불리해야 함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착오는 필자의 생각에서는 백강구를 강의 폭이 좁고 깊이가 얕은 동진강으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금강하구둑이 만들어지기 이전 군산과 장항 사이의 금강하구와 서해의 합류부분은 지금도 썰물 때면 상류에서 빠져나오는 물로 물소용돌이와 거품이 일어 배들의 항해가 쉽지 않다.

 

이러한 썰물 때의 세찬 물기둥 때문에 바다쪽에서 강구쪽으로 공격하던 소형의 일본전선은 배의 조종이 어려워 뱃머리도 돌릴 수 없었고 반면에 대형 전선인 당의 수군은 썰물의 영향을 최대한 적게 받는 강안의 좌우로 봍어 일본수군을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위의 내용으로 보아도 지형적으로 백촌강 전투는 그 위치가 금강하구임인 군산지역임이 분명하다.

 

6. 삼국통일의 획을 그은 세 번의 기벌포 전투

 

세번의 기벌포 전투

 

 앞에서 우리는 나당연합군의 전략을 알아보며 기벌포가 군산지역인 금강의 서해 합류지역 두 개의 지유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당군의 첫 상륙지로서의 기벌포 외에도 두 번에 걸쳐 기벌포, 백강에서 벌어진 대전투를 함께 알아봄으로써 군산지역이 기벌포, 백강의 현장임을 알아보겠다.



기벌포(백강)은 역사에 서로 명칭은 다르지만 동일지역인 금강하구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세 번의 대규모 전투와 관련하여 등장하는 지명이다. 그런데 기벌포(백강)이라는 역사의 무대는 공교롭게도 백제와 관련된 비극의 무대이며 백제 멸망후 삼국통일이 완성된 후 우리는 그 어느 자료에서도 기벌포, 백강이라는 지명을 찾을 수 없었다. 이후 고려말 최무선의 진포대첩의 현장으로 지역명칭이 변화된 후 재등장하는데 그 위치는 역시 금강하구 군산지역인 기벌포(백강)이다.

 

이러한 기벌포(백강)는 근세 민족주의 사학자인 단재 신채호 선생이 「조선상고사」를 통해 백강은 지금의 서천 유역으로 백마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어귀이며 흥수의 이른바 기벌포도 이와 같다.고하여 이미 그 위치를 금강유역으로 확인하였으나 그후 새로운 학설의 학자들이 많은 지역을 거론해 끝없는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는 앞의 조사로 군산지역이 기벌포(백강)의 현장임을 확인하였으나 이 글에서는 기벌포에서 이루어진 세 번의 전투의 연관성을 묶어 기벌포를 찾는 작업을 다시 해보겠다.

 

 그렇다면 세 번의 역사의 획을 긋는 전투지역 기벌포, 백강은 어디인가? 그 곳을 알기 위해 우리는 먼저 어떤 한 전투가 어느 특정지점에서 전개되었을 때 그지역 말고도 군사적으로 중요한 수많은 지역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백제지역에서 있었던 중요한 세 번의 전투가 기벌포, 백강이라는 지역에서만 있어야 했는가 하는 이유를 생각해야 한다.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위대한 장군은 전투장소를 먼저 선택하고 자신이 선택한 장소에서 적을 섬멸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왜 기벌포(백강)에서 한 번도 아닌 세 번의 전투가 있어야 했는가하는 기벌포 전투의 성격과 함께 전투의 승리를 통해 궁극적으로 양군이 얻고자 한 목표를 찾아보는 방법이 기벌포의 위치를 명확히 확인하는 하나의 방법이 된다. 



 기벌포에서의 세 번의 전투 즉 첫 번째 당나라 소정방군의 백제 기습 상륙작전과 두 번째 나당연합군의 당나라 수군과 백제왜연합군의 왜수군과의 백제부흥군 멸망이라는 결과를 낳은 해전, 그리고 세 번째로 신라의 당축출과정에서 삼국통일을 이루는 마지막 전투가 있었다.

 

 모든 결과는 원인에 기인한다. 기벌포( 백강)에서 삼국통일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전투가 있을 수밖에 없는 원인은 무엇일까? 아마도 기벌포가 중요한 전쟁터로서 이용된 원인은 지리적 요인과 전략적 요인, 그리고 정치적 요인이 복합되어있다고 본다.



먼저 각 전투를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 번째 전투인 당 13만 대군의 기벌포 상륙작전은 앞에서 그 내용을 설명하였으니 과정은 생략하고 결론을 볼 때 당군의 목표는 사비성이었고 기벌포 상륙작전은 백제왕이 있는 사비성에 가장 빠르게 진격할 수 있는 지리적 상황에서 기인한 것이다. 특히 기벌포는 금강의 하구로서 육군과 수군이 함께 수륙병진 함으로써 갖는 전략적 효과가 크다.

 

또한 당나라군의 백제땅에서의 첫 교두보 확보가 그 전투의 성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볼 때 전투 후 수륙이 사비성을 향하여 병진할 수 있는 곳은 금강하구인 군산지역뿐이다. 만약에 기벌포를 부안의 동진강으로 본다면 당나라 소정방 군대의 목숨을 좌우할 첫교두보이며 병랍기지가(모든 상륙작전에서 첫상륙지역은 교두보로써 최고의 방어시설을 유지한다.)

 

나당연합군의 사비성 함락직후 백제 부흥군의 중심역할을 하는 주류성즉 변산반도의 우금산성의 지척이 되는데 이것은 무언지 앞뒤가 맞지 않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다.



둘째 전투인 나당연합군과 백제왜연합군의 부흥군 멸망의 고비가 되는 해전이 벌어진 곳도 기벌포이다. 이 전투의 전개과정 또한 앞의 백촌강 해전에서 설명하였으므로 생략하고 기벌포가 전쟁터가 된 원인을 보겠다.

 

  먼저 나당연합군은 백제부흥군 토벌의 기치를 내걸고 작전을 세우는데 가림성(성흥산성)을 먼저 공략하려했으나 가림성이 너무 험지에 자리하여 공략이 어려울 것 같으므로 부흥군의 중심지인 주류성을 공격하기로 한다.
 
 즉 주류성이 나당연합군의 목표이다. 또한 주류성이 어느 곳에 있든 기벌포를 지나야 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백제와 왜연합군이 기벌포에서 해전을 치룬 원인은 어디에 있나. 필자가 보기에 그것은 앞의 백촌강 해전에서도 밝혔다시피 부흥군의 풍방왕 입장에서는 정치적, 심리적 효과가 큰 사비성 재탈환을 목표로 하였다는 것이다.

 

 백제부흥군이 왜의 수군과 함께 사비성에 이를 수 있는 곳은 금강뿐이며 당수군은 도독부가 있는 웅진을 떠나 백촌강 즉 금강하구에 170척의 배를 배치하였고 왜수군은 서해바다쪽에서 당군이 있는 금강하구로 공격해가는 모습을 상상하면 역시 사비성과 웅진성에 닿을 수 있는 금강하구 기벌포의 전략적 중요성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전투인 백제, 고구려 멸망 후 신라의 당세력 축출작전 때 당의 수군을 물리침으로써 삼국통일을 완성시키는 마지막 전투가 기벌포에서 있었다. 이 전투에서도 우리는 기벌포가 어디인가하는 답을 찾기위하여 나당 양측이 전투를 통하여 얻고자 하는 목표를 찾아야 한다.

 

 연합국이던 신라와 당은 백제 고구려 멸망후 서로 대립하는데 그 원인은 신라와 당이 군사동맹을 맺을 때 백제와 고구려를 멸한 뒤에 그 영토를 처리하는데 있어 일종의 약속이 있었다.



「삼국사기」신라본기 문무왕 11년 7월 당장 설인귀의 편지에 대한 문무왕의 답신에 의하면 "신라의 태종무열왕과 당의 태종간에 나눈 밀담이 실려있다. '내가(당 태종) 지금 고구려를 치려는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다. ∼ 내가(당 태종) 두나라를 평정하면 평양이남 백제의 토지는 전부 너희나라에게 주어 길이 편안토록하려 한다.'" 즉 적어도 평양이남의 땅은 신라가 차지하기로 하였으나 당은 선대의 이러한 약속을 무시하고 "

 

아아! 고구려와 백제가 평정되기전에는 사냥개처럼 심부름을 시키더니 들짐승이 없어진 지금에는 도리어 삶아먹히는 사냥개의 박해를 당하고 있도다."라는 신라 문무왕의 글처럼 당이 백제에 웅진도독부를 두어 직접 통치하려했으며 신라를 일방적으로 계림도독부라 칭하며 문무왕을 계림대도독에 임명하였다.(문무왕 3년 663) 또한 고구려를 멸한 뒤에는 평양에 안동도독부를 두어(668)한반도 전체를 직접 통치하려는 행동으로 인하여 양국이 서로 싸우게 되었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의 부흥군을 도와 당을 치게하는 한편 백제의 웅진도독부를 공격하여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여기에 소부리주(부여)를 설치하여(문무왕 11년 671) 백제땅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한다. 이후 당의 이근행이 20만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왔으나 신라군이 매초성에서 크게 격파하여 당군의 말을 삼만여필을 빼앗고 많은 무기도 노획했다고 한다.

 

 이 싸움으로 북에서 내려오는 당육군의 위협은 사라졌다. 다음해 해로를 통하여 설인귀의 군대가 소부리주 기벌포에 도착하자 신라장수 시득이 거느린 해군이 20여회의 전투 끝에 당군 사천여명의 머리를 베고 승리함으로써(672) 한반도 남부에서 당나라군을 완전히 축출하게 된다. 이상의 과정을 볼 때 육전에서 패한 당군은 설인귀의 해군으로 사비성 점령을 위하여 기벌포에 왔다고 볼 수 있다. 



 만약에 변산반도인 부안의 동진강이 기벌포, 백강이라면 주류성 함락후 주류성(내변산 우금산성)과 함께 신라군이 지키고 있을 동진강을 설인귀가 와야할 전략적 이유가 무엇일까? 그누가 당군의 장군이라도 아무런 지리적 의미가 없는 동진강으로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설인귀의 수군이 갈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

 

 역시 전략적, 정치적으로 신라군과의 전투 및 협상에서 유리한 사비성을 목표로 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곳 또한 사비성에 이르는 금강의 입구인 군산인근이 되는 것이다. 신라군의 입장에서도 나당연합군의 백제공략 때 당나라군의 전술을 파악한 시득 장군이 백제지역을 수비하기 위하여 당군의 예상 공격로인 백강 즉 기벌포에서 병력을 대기하고 있다가 공격하여 승리를 얻은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삼국사기」신라본기 문무왕 11년정월조에 그 근거되는 내용이 있다. 신라군이 웅진도 주부를 공격하는 내용에 "당나라 군사가와서 백제를 구원하여 한다는 말을 듣고 대아찬 진공과 아찬을 보내 웅포를 수비하게 하였다."라는 글이었다.

  이 글에서 보듯이 신라는 당이 웅진도독부에 원병을 파견하면서 웅진강구를 거슬러 와야 한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웅진강구 즉 군산과 경계 지점인 웅포에 강을 막는 수비군을 파견한 것이다. 



 또한 이 전투장소를 「삼국사기」문무왕 16년조에서는 당군을 소부리주 기벌포에서 격파했다고 기록하는데 여기에서의 소부리주라는 곳은 문무왕 11년 신라가 사비성 즉 부여를 점령한 후 여기에 소부리주를 설치하였는데 주(州)의 범위가 오늘날의 도(道)의 개념과 같으므로 소부리주의 기벌포는 사비성에 이르는 강에 기벌포가 있음을 뜻하며 기벌포가 강과 바다의 합류지점이라는 사료의 근거들을 볼 때 금강하구 군산지역이 기벌포임이 재삼 확인 된다.

 

  이렇듯 세 번의 전투를 거치며 통일이 이루어졌고 기벌포는 사비성의 관문이라는 이유 때문에 백제에게 있어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는데 이는 위의 세 전투가 모두 육군과 수군이 함께 참가한 전투로써 육군뿐만 아니라 수군도 백제의 도성인 사비성에 닿을 수 있는 지리적 위치에 기벌포가 있었다는 말이다. 사비성에서 서해로 난 유일한 해로는 금강으로 즉 웅진강의 입구 군산지역이 기벌포임이 분명하다.

 

7. 전설의 숨은 뜻

 

 기벌포의 위치를 찾는 과정은 가장 객관적인 사료 중심이어야 함은 필자도 공감한다. 그러나 민간에 전해온 전설 또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준역사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전설이란 계통상 설화의 한분야로서 설화 중에서도 진실성을 지향하는 특징이 있다.



역사와 전설은 분명히 구분해야 하지만 역사가 일부지배계층의 기록에 근거를 둘 때 전설은 일반민중의 구전에 의지해 왔으므로 전설을 완전한 허구로 보는 것 또한 부당한 일이다. 지역향토사 연구에 있어 전설은 그 의미가 더욱 소중하다 할 수 있다. 전설은 간혹 의도적으로 내용이 첨삭되는 경우는 있지만 대부분 자연스럽게 생성되어 전해진다.



그 전설은 태동이 자신의 삶의 공간에서 몸으로 겪은 육체적 정신적 경험을 자신의 후손에게 전해주는 보편적인 인간심리의 표현으로 당사자가 개인이 아닌 일정 지역의 집단인 경우 동일 내용의 전설이 주민들의 묵시적 공인 아래 전승되는데 시대에 따라 변하기는 하지만 그 뼈대가 되는 내용은 단어나 전체 줄거리 안에 숨겨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군산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소정방에 대한 전설을 확인해 보겠다. 군산지역에는 소정방에 대한 네가지의 비슷한 전설이 있는데 그 속에는 이 지역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비밀이 담겨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1)오성산 오성인 전설

 

금강하구에 위치한 오성산은 227m의 높지 않은 산이지만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지에 자리하고 있어서 금강하구와 서해는 물론 서천까지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 전해오는 오성산 전설은 조선 영조 36년(1760)에 만들어진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전하는 전설이다. 이전설은 나머지 세가지 전설의 원류로 보이는데 이글에서는 편의상 전설을 문장 및 단어로 구분하여 그 의미하는 바를 확인해보겠다.
  
◇오성산전설


사건내용 1은 전설의 시대적배경 및 사건내용을 담고 있는데 「당서」소정방전 및 「삼국유사 김유신전에 나오는 기벌포 상륙작전과 내용이 유사하다.


① 읍지에 말하기를 : 이말은 오성산 전설이 영조36년(1760)의 조선후기에야 문자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그보다 앞서 이미 지방 읍지에 기록되어 있었음을 뜻한다.

 

일부 사람들은 오성산 전설이 조선 전기인 중종때의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지 않고 「여지도서」에 기록된 것을 보고 오성산 전설의 역사성이 희박하다고 주장하지만 「동국여지승람」 등은 중앙의 안목에서 펴낸 책이지만 「여지도서」는 나라안의 모든 읍지를 모아서 만들어진 책이라는 점에서 보면 자료에 따라서는 오랜 세월 중앙과는 관련없이 전해올 수 도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② 당(唐)장 소정방이 백제를 칠 때 : 전설의 시대배경을 나타낸다.


③ 이산 아래 주둔하였는데 : 사건 장소로 오성산이 등장한다. 소정방이 올랐다는 전설이 전하는 부안의 상소산과 함께 오성산도 소정방이 오른 산으로 전설은 전한다.


④ 누런 안개가 해를 가리어 : 백제군에게 당나라군이 고전하는 내용의 은유적 표현으로 당나라 군대를 천자의 군대 즉 해로 표현한 것은 「삼국사기」선덕왕 12년에 당의 황제가 신라 사신에게 백제와 고구려의 공격에 대응하는 계책으로 "우리나라(당나라)가 사용하는 옷과 붉은기 수천벌을 주고 두나라 병사가 처들어오면 붉은기를 펼쳐놓아 우리나라(당나라)으로 여 생각하여 도주하게 하라"는 말로서 당군이 붉은 해(日)로 표현됨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내용은 읍지에 전설을 기록한 기록자의 유교식 중화사상 때문으로 보인다.



누런 안개는 백제군을 의인화 한 것인데 누런색은 황색과 같은데 「삼국사기」근초고왕 24년(369) 11월 조에보면 한수남쪽에서 전군이 사열 하였는데 깃발은 모두 황색을 사용하였다라는 내용을 볼 때 누런 안개가 백제군의 황색깃발을 의미한다 볼 수 있다.



⑤ 헤매여도 길을 알 수 없었다 : 당군의 상륙작전의 고전을 알 수 있다. 즉 기벌포에서의 두 번의 격전을 은유화한 표현이다.

사건내용 2 : 소정방이 군산에서 백제군을 평정한 후 사비성을 향하기전의 내용으로 사건내용 1과 그 사이에는 백제군이 당군에게 패배하는 내용이 있어야 하지만 의도적으로 빠져있다. 아마도 다섯노인으로 지칭되는 백제인들의 죽음을 불사한 항거를 구전으로 전하며 당군에 대한 패배의 치욕보다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한 정신을 후손들에게 전해주려 했음을 알 수 있다.



⑥  다섯노인이 화서 진앞에 이르므로 : 당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백제의 지도층이 노인으로 표현된 것을 보면 장군 이라기 보다는 군산 인근지역의 토착 다섯집단의 최고 연장자인 원로들이 포로로 잡히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군산 지역은 백제의 전신인 마한의 50여개 국가중 3개의 국가가 현재의 임피, 옥구, 회현에 있었던 것으로 조사되어 그 가능성을 강하게 해준다.



⑦ 정방이 길을 물었는데 : 사비성에 이르는 길

사건내용 3 : 죽음으로 저항한 원로들을 신성시하는 내용이다. 또한 다섯무덤의 존재를 알리고 다섯 성인에 대한 당제가 이어져야하는 당위성을 암시하는 내용이다.

이 전설의 내용은 고서가 전하는 당시의 전투내용과 유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중국역사서등 에서 깊이 다루지 않는 백제군의 분투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지역 국민들의 저항의식과 패배한 후의 고통을 죽음으로 표현하는 내용이 담겨있는 귀중한 전설이다.



2) 천방사 전설


군산의 서쪽 끝에는 크고 작은 산들이 모여있다.
그 중 현 은적사가 자리하고 있는 산이 설림산으로 소정방과 관련된 천방사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천방사 전설은 조선 중종때의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군산지역에 있는 소정방관련 전설중 가장 오래전에 기록된 내용이지만 오성산 전설과 비교해볼 때 오성산 전설의 사건내용 1에 해당 하는 시대배경 및 사건내용과 당·백제군의 혼전양상은 같다할 수 있지만 내용의 은유적 표현이 미흡하다 볼 수 있다.



또한 오성산 전설의 사건내용 2에 해당하는 전투후 패배한 백제 주민들의 상황묘사가 없이 진행되는 것으로 보아 두전설이 본래는 하나이었으나 오성산 전설은 일반인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나라에 충성하는 유교적 내용이 가미되어 토속신앙의 마을 당제로서 자리잡은 원형의 전설로 보이고, 반면에 천방사 전설은 사찰의 창건신화들이 통상 불교의 신비함과 부처님의 공덕을 미화하여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본래 있던 소정방관련 전설에 부처님의 천지자연을 조화하는 신통력을 가미하여 그 결과 천방사가 창건되었다는 불교 연기설화가 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주목할 점은 오성산 전설의 외세 저항정신이 천방산 전설에서는 사라지며 더 나아가 소정방의 백제 공략을 큰나라를 거역한 백제의 사필귀정 이었다고 보고 부처님도 중국편이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중화사상이 깊이 담겨있다.

 

  이러한 사대주의 사상의 흐름은 통일신라이후 고려·조선에 이르며 더욱 고질화되어 거의 모든 역사서에 사대주의적 사관이 지배적인데 중앙정부에서 기록한 「동국 여지승람」에 오성산 전설이 아닌 천방사 전설이 기록된점을 이해하는 단서로 생각된다.

 

그러나 천방사 전설에서도 세월의 흐름속에 내용의 변화하였다고는 하지만 당나라군이 첫 전투중 고전하였다는 내용은 사라지지않고 은유적 표현으로 명확히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3)그외 소정방 관련 전설 

 

① 천방사 전설과 비슷한 전설


소정방의 군대가 백제로 들어갈 때 풍당이 일어 전진을 못하고 있는데 이것은 용신의 조화이니 천일제를 지내면 화를 면할수있다는 어느 도승의 가르침을 받고 소정방이 어떻게 천일제를 단번에 지낼수 있는 방법이 없겠냐고 묻자 도승은 천칸의 방을 만들어 일제히 한시각에 제사를 올리면 천일제가 아니겠냐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소정방은 그때서야 크게 깨우침을 얻고 그 도승의 말대로 했더니 풍랑이 잠잠해져서 대군이 뜻대로 전진할 수 있었다.



② 설림산 전설


소정방이 김유신과 함께 백제를 공략하려고 이곳을 지날 때 심한 풍랑과 짙은 안개로 진격을 할 수 없었는데 산신령의 도움으로 백제를 도모할 수 있었음으로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군사를 시켜 매화나무 수천그루를 은적사 뒷산에 심세하였다. 이후 매화나무가 꽃이 되면 산이 온통 눈이내린 것 같아서 설림산이라 했다.

이상의 전설들을 사펴볼 때 나라를 잃은 군산의 백제인들의 저항정신이 약간은 서로 다른 전설속에서 모두 남아있으며 당시의 기벌포에서의 전투상황을 알리려는 노력이 깃들여 있음을 알 수 있다.

 

Ⅲ. 결    론    

 

위의 글에서 기벌포(백강)이 어디인가에 대한 확인 작업을 통하여 우리는 이러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기벌포(백강)는 금강의 옛 명칭으로 금강의 줄기 중 사비성(부여) 이후에서 군산까지의 금강 지류 중 하류지역을 나타내며 중국과 우리 역사서에서는 당의 13만 대군이 서해안 전역에 상륙한 것이 아니고 분명하게 웅진강구 혹은 기벌포, 백강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웅진강구 혹은 기벌포(백강)에 13만 대군이 전부 상륙하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적어도 대장군 소정방과 그의 주력군이 상륙한 곳은 웅진강구, 기벌포의 강류에서도 제한된 한 지역인 군산지역이며, 그 중에서도 옥산면 금성리 일대인 박지산과 외류, 내류, 평류 마을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우리는 오성산 전설의 역사성을 새삼 확인할 수 있고, 3·1운동, 진포대첩 등에서 보이는 군산 사람들의 외세 저항의 정신의 뿌리가 기벌포 전투임을 알 수 있다.

 

  

. 백강과 관련된 사료 원문

 

  1. 나당 연합군의 百濟 침공

 

    1) 우리측 사료

 

①「삼국사기」태종 무열왕 7년
  七年 三月 唐高宗命左武衛大將軍蘇定方 爲神丘道行軍大摠管金仁問 爲副大摠管 帥左驍衛將軍劉伯英等水陸十三萬□□伐百濟 勅王爲 夷道行軍摠管何將兵爲之聲援 夏五月二十六日王與庾信·眞珠·天存等領兵出京 六月十八日 次南川停定方發自萊州   千里 隨流東下 二十一日 王遣太子法敏 領兵船一百  迎定方於德物島定方爲法敏曰 吾欲以七月十日至百濟南與大王兵會 屠破義慈都城 法敏曰 大王立待大軍如聞大將軍來 必 食而至 定方喜 還遣法敏 徵新羅兵馬 法敏至 言定方軍勢甚盛王喜不自勝 又命太子與大將軍庾信·將軍品日·欽春(春或作純)等 精兵五萬應之 王次今突城秋七月九日 庾信等進軍於黃山之原 百濟將軍階伯 擁兵而至 先據 設三營以待庾信等分軍爲三道 四戰不利 士卒方竭 百濟衆大敗 階伯死之 虜佐平忠常·常永等二十餘人

  十二日 唐羅軍□□□圍義慈都城進於所夫里之原 定方有所忌不能前庾信說之 二軍勇敢 四道齊振 百濟王子又使上佐平 致饔 豊(  ) 定方却之 王庶子躬與佐平六人詣前乞罪 又揮之 十三日義慈率左右夜遁走 保熊津城 義慈子隆與大佐平千福等出降
  百濟餘賊 據南岑貞峴□□□城 又佐平正武聚衆屯豆尸原獄抄掠唐羅人

二十六日攻任存大柵 兵多地  不能克 但攻破小柵 九月三日 郞將劉仁願以兵一萬人留鎭泗 城 王子仁泰與沙飡日原·級飡吉那, 以兵七千副之定方以百濟王及王族臣寮九十三人 百姓一萬二千人 自泗 乘船廻唐 二十三日百濟餘賊入泗  謀掠生降人 留守仁願出唐羅人 擊走之 賊退上泗 南嶺 竪四五柵 屯聚伺隙抄掠城邑 百濟人叛而應者十餘城 唐皇帝遣左衛中郞將王文度爲熊津都督, 二十八日至三年山城傳詔 文度面東立 大王面西立錫命後 聞度欲以宣物授王 忽疾作更死 從者攝位畢事十月九日 王率太子及諸軍攻 禮城 十八日取其城置官守 百濟李十餘城 震懼皆降三十日 攻泗 南嶺軍柵 斬首一千五百人 十一月五日 王行渡 灘 攻王興寺岑城 七日乃克斬首七百人

 

② 「삼국사기」 권28 의자왕
  二十年 高宗詔左衛大將軍蘇定方, 爲神丘道行軍大摠管·率左衛將軍劉伯英·右武衛將軍馮士貴·左驍衛將軍寵孝公統兵十三萬以
來征 兼以新羅王金春秋 爲 夷道行軍摠管 將其國兵與之合勢 蘇定方引軍 自城山濟海至國西德物島 新羅王遣將軍金庾信 領精兵五萬以赴之 王聞之 會群臣 問戰守之宜佐平義直進曰 「唐兵遠涉溟海, 不習水者, 在船必困. 當其初下陸, 士氣未平, 急擊之, 可以得志. 羅人恃大國支援. 故有輕我之心. 若見唐人失利. 則必疑懼而不敢銳進. 故知先與唐人決戰可也.」 達率常永等曰, 「不然, 唐兵遠來, 意慾速戰, 其鋒不可當也. 羅人前屢見敗於我軍, 今望我兵勢, 不得不恐. 今日之計 宜塞唐人之路, 以待其師老. 先使偏師擊羅軍. 折其銳氣. 然後伺其便而合戰. 則可得以全軍而保國矣」王猶豫不知所從 時佐平興首 得罪流竄古馬彌知之縣 遣人問之曰 「事急矣. 如之何而可乎.」 興首曰 唐兵旣衆 師律嚴命 況與新羅共謀 角 若對陣於平原廣野 勝敗未可知也白江(或云伎伐浦) 炭峴(或云沈峴) 我國之要路也 一夫單槍 萬人莫當宜簡勇士往守之 使唐兵不得入白江 羅人未得過炭峴 大王重閉固守 待其資粮盡 士卒疲 然後奮擊之破之必矣 於時大臣等 不信曰 「興首久在 累 之中 怨君而不愛國其言不可用也. 莫若使唐兵入白江, 沿流而不得方舟. 羅軍升炭峴 由徑而不得 馬. 當此之時 縱兵擊之. 譬如殺在籠之 , 籬網之魚也.」王然之 又聞唐羅兵已過白江·炭峴遣將軍階伯 帥死士五千出黃山 與羅兵戰 四合皆勝之 兵寡力屈竟敗 階伯死之

王知不免嘆曰 「悔不用成忠之言, 以至於此.」遂與太子孝走北鄙定方圍其城
  於時王及太子孝與諸城皆降 定方以王及太子孝 王子泰·隆·演及大臣將士八十八人百姓一萬二千八百七人 送京師 國本有五部 三十七郡 二百城七十六萬戶 至是析置熊津·馬韓·東明·金漣·德安五道督府

 

2. 당나라 소정방군의 백강 상륙


    1) 우리나라 史料
①「삼국사기」권5 태종무열왕
  是日定方與副摠管金人問等 到伎伐浦 遇百濟兵 逆擊大敗之庾信等至唐營 定方以庾信等後期 將斬新羅督軍金文穎(或作永) 於軍門

②「삼국사기」권28 의자왕
  於是合兵禦熊津口 瀕江屯兵 定方出左涯 乘山而陣 與之戰我軍大敗 王師乘潮   銜尾進 鼓而  定方將步騎直趨眞都城一舍止 我軍悉衆拒之又敗死者萬餘人 唐兵乘勝簿城

③「삼국사기」권42 김유신
  太宗大王七年庚申夏六月 大王與太子法敏 將伐百濟 大發兵至南川而營 時入唐請師波珍飡金仁問 與唐大將軍蘇定方·劉伯英 領兵十三萬 過海到德物島先遣從者文泉來告 王命太子與將軍庾信·眞珠·天存等 以大舶一百  載兵士會之太子見將軍蘇定方 定方謂太子曰 五由海路 太子等陸行 以七月十日 會于百濟王都泗 之城太子來告 大王率將士 行至沙羅之停 將軍蘇定方 金仁問等 沿海入伎伐浦 海岸泥 陷不可行 乃布柳席以出師 唐羅合擊百濟滅之

    2) 중국 史料


① 「구당서」 열전 소정방
  定方自城山濟海 至熊津江口 賊屯兵據江 定方升東岸 乘山而陣與之大戰 揚帆蓋海 相續而之 賊師敗績 死者數千人 自餘奔散 遇潮且上 連 入江定方於岸上擁陣 水陸齊進 飛(  )鼓  直趣眞都 去城二十里 賊傾國來拒大戰破之 殺虜萬餘人

 

② 「당서」 열전 소열
  一百十一列傳第三十六蘇烈 (蘇烈)出爲神丘道大摠管 率師討百濟自城山濟海至熊津口 賊瀕江屯兵定方出左涯 乘山而陣與之戰 賊敗死者數千王師乘潮而上   銜尾 鼓 而進 定方將步騎 來引直趨眞都城 賊傾國來  戰破之 殺虜萬人乘勝入其郭 王義慈及太子隆北走 定方進圍其城… 定方使士登城 建唐旗幟於是泰開門請命 其將 植與義慈降

 

③ 「당서」 동이전 백제
  二百二十列傳第一百四十五東夷百濟 顯慶五年 乃詔左衛大將軍蘇定方爲神丘道行軍大摠管…… 發新羅兵討之 自城山濟海 百濟守熊津口 定方縱擊虜大敗 王師乘潮帆以進 趨眞都城一舍止 虜悉衆拒 復破之 斬首萬餘級

 

④ 「자치통감」 고종 上之下
八月蘇定方引兵自成山濟海 百濟據熊津江口以拒之 定方進擊破之 百濟死者數千人餘皆潰走 定方水陸齊進 直趣其都城 北史百濟都俱拔城 亦曰固麻城 其外更有五方 中方曰古沙城東方曰得安城 南方曰久知下城 西方曰刀先城 北方曰熊津城 未至二十餘里百濟傾國來戰 大破之 殺萬餘人 追奔入其郭 百濟王義慈及太子隆逃于北境 定方進圍其城

 

3. 성충과 흥수


    1)좌평 성충
① 「삼국사기」백제기 의자왕 16년
  十六年三月… 王與宮人 淫荒耽樂飮酒不止 佐平成忠(或云淨忠)極諫王怒囚人獄中 出是無敢言者 成忠搜死 臨終上書曰 「忠臣不忘君 願一言而死臣常觀時察變 必有兵革之事 凡用兵必審擇其地 處上流以延敵 然後可以保全 若異國兵來陸路不使過 峴 水軍不使伎伐浦之岸 據其險隘以禦之 然後可也」 王不省焉

 

② 「삼국유사」 太宗 春秋公
  佐平成忠…書曰 「忠臣死不忘君 願一言而死 臣嘗觀時變必有兵革之事 凡用兵審擇其地 處上流以迎敵 可以保全 若異國兵來 陸路不使過炭峴(一云沈峴百濟要害之地) 水軍不使入伎伐浦(卽 長  又孫梁 一作只火浦 又白江) 據其險隘以禦之 然後可也」 王不省

 

    2) 흥수
  興首曰 「唐兵旣衆 師律嚴明 況與新羅共謀 角 若對陣於平原廣野勝敗未可知也 白江(或云伎伐浦) 炭峴(或云 峴) 我國要路也 一夫單槍萬人莫當 宜簡勇士往守之 使唐兵不得入白江 羅人未得過炭峴 大王重閉固守 待其資粮盡 士卒疲然後奮擊之 破之必矣」
  於時大臣等不信曰 「興首久在 累 之中 怨君而不愛國其言不可用也. 莫若使唐兵入白江, 沿流而不得方舟. 羅軍升炭峴 由徑而不得 馬. 當此之時 縱兵擊之. 譬如殺在籠之 , 離網之魚也.」王然之 又聞唐羅兵已過白江·炭峴遣將軍階伯帥士五千出黃山 與羅兵戰 四合皆勝之 兵寡力屈竟敗 階伯死之

 

4. 白江戰


    1) 복신 장군의 죽음
① 「구당서」 동이전 백제
  卷一百九十九上列傳第一百四十九東夷百濟 龍朔二年七月仁願·仁軌等率留鎭之兵 大破福信餘衆於熊津之東 拔其支羅城及尹城·大山·沙井等柵殺獲甚衆 仍令分兵以鎭守之 福信等以眞峴城臨江高險 又當衝要 加兵守之 仁軌引新羅之兵乘夜薄城 四面攀堞而上 比明而入據其城 斬首八百級 遂通新羅運糧之路 仁願乃奏請益兵詔發淄靑萊海之兵七千人 遣左威衛將軍孫仁師 統衆浮海赴熊津 以益仁願之衆 時福信旣專其兵權與扶餘豊漸相猜貳 福信稱疾臥於窟室 將候扶餘豊問疾 謀襲殺之 扶餘豊覺而率其親信 掩殺福信 又遣使往高麗及倭國 請兵以拒官軍

 

② 「구당서」 열전 유인궤
  卷八十四列傳第三十四劉仁軌 扶餘豊及福信等 以眞峴城臨江高險又當衝要 加兵守之 仁軌引新羅之兵 乘夜薄城 四面攀草而上 比明而入據其城遂通新羅運糧之路 俄而餘豊襲殺福信 又遣使往高麗及倭國 請兵以拒官軍 詔右威衛將軍孫仁師率兵浮海 以爲之援

③「일본서기」 天智天皇
  ○ 六月 前將軍上毛野君稚子等 取新羅沙鼻岐·奴江二城百濟王豊璋 嫌福信有謀反心 以革穿掌而縛 時難自決 不知所爲 乃問諸臣曰 福信之罪旣如此焉 可斬以不 於是 達率德執得曰 此惡逆人 不合放捨 福信卽睡於執得曰腐狗癡奴 王勒健兒 斬而해首

 

    2) 백촌강 해전


①「일본서기」 天智天皇
  ○ 秋八月壬午朔甲午 新羅 以百濟王斬己良將 謀直入國先取州柔於是 百濟知賊所計 謂諸將曰 今聞 大日本之救將廬原君臣 設健兒萬餘 正當越海而至 願諸將軍等 應預圖之 我欲自往待饗白村
  戊戌 賊將至於州柔 繞其王城 大唐軍將 率戰船一百七十소 陣烈於白村江
  戌申 日本船師初至者 與大唐船師合戰 日本不利而退 大唐堅陣而守
  己酉 日本諸將 與百濟王 不觀氣象 而相謂之曰 我等爭先彼應自退 更率日本亂伍中軍之卒 進打大唐堅陣之軍 大唐便自左右夾船繞戰 須臾之際官軍敗績 赴水溺死者衆 로축不得廻旋 朴市田來津 仰天而誓 切齒而진 殺數十人於焉戰死 是時 百濟王豊璋 與數人乘船 逃去高麗

 

② 「구당서」 열전 유인궤
  卷八十四列傳第三十四劉仁軌 仁師旣與仁軌等相合 兵士大振於是諸將會議 或曰 加林城水陸之衝 請先擊之 仁軌曰 加林險固 急攻則傷損戰士固守則用日持久 不如先攻周留城 周留賊之巢穴 群兇所聚 除惡無本 須拔其源 若剋周留則諸城自下於是仁師·仁願及新羅王金法敏 帥陸軍以進 仁軌乃別率杜爽·扶餘隆率水軍及糧船 自熊津江往白江 會陸軍 同趣周留城 仁軌遇倭兵於白江之口 四戰捷 焚其舟四百소 煙焰漲天海水皆赤 賊衆大潰 餘豊脫身而走 獲其寶劒僞王子扶餘忠勝·忠志等率士女及倭衆幷耽羅國使一時竝降百濟諸城復歸順

 

③「당서」 열전 유인궤
  一百八列傳第三十三劉仁軌 詔遣右威衛將軍孫仁師 率軍浮海而至士氣振 於是諸將議所向 或曰 加林城水陸之衝 합先擊之 仁軌曰 兵法避實擊虛加林險而固 攻則傷士 守則曠日 周留城賊巢穴 群凶聚 焉 若克之 諸城自下 於是仁師·仁願及法敏帥陸軍以進 仁軌與杜爽·扶餘隆繇熊津白江會之 遇倭人白江口 四戰皆克焚四百소 海水爲丹 扶餘豊脫身走 獲其寶劒 僞王子扶餘忠勝·忠志等 率其衆與倭人降 獨酋帥遲受信據任存城末下

 

④「당서」 열전 유인궤
  二百二十列傳第一百四十五東夷百濟 仁願已得齊兵 士氣振乃與新羅王金法敏 率步騎而遣 劉仁軌率舟師 自熊津江偕進 趨周留城 豊衆屯白江口四遇皆克 火四百소 豊走不知所在 僞王子扶餘忠勝·忠志 率殘衆及倭人請命 諸城皆復仁願勒軍還留仁軌代守

⑤「삼국사기」권28 의자왕
  遣左威衛將軍孫仁師 統衆浮海 以益仁願之衆 時福信旣專權與扶餘豊寢相猜忌 福信稱疾臥於窟室 欲候豊問疾執殺之 豊知之 帥親信掩殺福信遣使高句麗倭國乞師 以拒唐兵 孫仁師中路迎擊破之 遂與仁願之衆相合 士氣大振 於是諸將議所向或曰 加林城水陸之衝 合先擊之 仁軌曰 兵法避實擊虛 加林險而固攻則傷士 守則曠日 周留城百濟巢穴 群聚焉 若克之 諸城自下 於是仁師 仁願及羅王金法敏 帥陸軍進劉仁軌及別帥杜爽 扶餘隆 帥水軍及糧船 自熊津江往白江 以會陸軍同趨周留城 遇倭人白江口 四戰皆克 焚其舟四百소 煙炎灼天 海水爲丹 王扶餘豊脫身而走 不知所在

 

⑥「삼국사기」권42 김유신전
  龍朔三年癸亥 百濟諸城潛圖興復 其渠帥據豆率城 乞師於倭爲援助大王親率庾信·仁問·天存·竹旨等將軍 以七月十七日征討 次熊津州 與鎭守劉仁願合兵八月十三日 至于豆率城 百濟人與倭人出陣 我軍力戰大敗之 百濟與倭人皆降

 

5. 백제 부흥군의 동정


① 「자치통감」고종 上之下
  卷二百唐紀十六高宗上之下 龍朔元年… ○三月…… 初蘇定方旣平百濟留郞將劉仁願鎭守百濟府城 又以左衛中郞將王文度爲熊津都督 撫其餘衆文度濟海而卒 百濟僧道琛·故將福信聚衆據周留城 迎故王子豊於倭國而立之 引兵圍仁願於府城 詔起劉仁軌檢校帶方州刺史將王文度之衆 便道發新羅兵 以救仁願…… 仁  軌御軍嚴整 轉鬪而前 所向皆下 百濟立兩柵於熊津江口 仁軌與新羅兵合擊破之 殺溺死者萬餘人 道琛等乃釋府城之圍退保任存城(任存城在百濟西部任存山) 新羅糧盡引還 道琛自稱領軍將軍 福信自稱霜岑將軍 招集徒衆 其勢益張 仁軌衆少 與仁願合軍 休息士卒 上表詔新羅出兵 新羅王春秋奉詔遣其將金欽 將兵救仁軌等至古泗 福信邀擊敗之 欽自葛嶺道遁還 新羅不敢復出 福信尋殺道琛 專總

 

② 「구당서」열전 동이전 백제조
  卷一百九十九上列溥第一百四十九東夷百濟 文度濟海而卒百濟僧道琛 舊將福信率衆據周留城以叛 遣使往倭國 迎故王子扶餘豊立爲王其西部 北部竝번城應之時郞將劉仁願鎭於百濟府城 道琛等引兵圍之 帶方州刺史劉仁軌代文度統衆便道發新羅兵合契 以救仁願 轉鬪而前 所向皆下 道琛等於熊津江口立兩柵 以拒官軍 仁軌與新羅兵四面夾擊之賊衆退走 立柵阻水 橋狹墮水及戰死萬餘人 道琛等乃釋仁願之圍退保任存城

 

6. 大王報書


「삼국사기」권7 문무왕下
  大王報書云…… 至顯慶五年 聖上感先志之末終 成낭日之遺緖泛舟命將 大發船兵 先王年衰力弱 不堪行軍 追感前恩 勉强至於界首 遣某領兵應接大軍 東西唱和 水陸俱進 船兵재入江口 陸軍已破大賊 兩軍俱到王都 共平一國 平定已後先王遂共蘇大摠管平章 留漢兵一萬 新羅亦遣第仁泰 領兵七千 同鎭熊津大軍廻後 賊臣福信 起於江西 取集餘燼 圍逼府城 先破外柵 摠奪軍資 復攻府城 幾將陷沒 又於府城側近四處作城圍守 於此府城不得出入 某領兵往赴解圍 四面賊城竝皆打破 先救其危 復運糧食 遂使一萬漢兵 免虎吻之危難 留鎭我軍   無易子而相食

至六年 福信徒黨漸多侵取江東之地 熊津漢兵一千 往打賊徒 被賊催破 一人不歸自敗已來 熊津請兵 日夕相繼 新羅多有疫病 不可徵發兵焉 苦請難違 遂發兵衆 往圍周留城 賊知兵小 遂卽來打大損兵馬 失利而歸 南方諸城一時摠叛 竝屬福信 福信乘勝復圍府城 因卽熊津道斷 絶於鹽시 卽募健兒 偸道送鹽 救其乏困
  至龍朔三年摠管孫仁師領兵來救府城 新羅兵馬 亦發同征 行至周留城下 此時倭國船兵 來助百濟 倭船千소 停在白沙 百濟精騎 岸上守船 新羅驍騎爲漢前鋒 先破岸陣 周留失膽 遂卽降下南方已定 廻軍北伐 任存一城 執迷不降 兩軍倂力 共打一城 固守拒한 不能打得新羅卽欲廻還

 

6. 군산지역의 전설


    1) 오성산전설 「여지도서」영조26년(1760)
  五聖山 邑誌有曰 唐將蘇定方 伐百濟時 住兵于此山下黃霧日塞 迷不知路 忽有五老人 來到陳前 定方問路 老人曰 汝欲伐吾國 何爲指路乎定方怒殺五老而去 班師之日 悔以爲神人 葬于此山 仍名五聖山 云山之上峰 今有五聖墓

 

    2) 천방사전설 「동국여지승람」옥구현 佛宇條 조선 중종
  千房寺 在于房山 有李膺挺重修記 諺傳新羅將金庾信 欲攻百濟請兵于唐 唐使蘇定方 將舟公卒十二萬 來泊于山下 烟霧蔽暗 天地晦瞑 禱于山靈若使開霽 當建千寺 以奉佛卽日天地淸明 因登山周覽 勢甚窄狹 不可建千寺 只排十石以象寺形 建一寺 號千房 後改稱禪林 高麗肅宗時 遣近臣 重修安佛象 今復號千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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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전국문화원연합회'와 '국사편찬위원회'가 공동 주최한 향토사 논문 연구대회에서   국사편찬 위원장상을 받은 논문입니다.

 

<< 본 논문은 군산사랑 홈페이지에서 퍼 온 글입니다. 저는 아주 재미있고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좋은 글을 써주신 저자에게 깊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