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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화성에서 3세기 초기백제 제철유적 발견

吾心竹--오심죽-- 2010. 1. 31. 17:24

역사 게시판

   (2003-05-08 07:36:24, Hit :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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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화성에서 3세기 제철유적 발견



경기도 화성에서 3세기 제철유적 발견  
초기 백제시대 공방터…국내최고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초기백제시대 (3세기)의 대규모 제철공방터가 경기도 화성에서 발견됐다. 특히 이 공방터는 당시 도읍인 한성(서울)과 잇닿는 길목에 있는데다 철광석을 정제하는 제련, 두들겨 모양을 만드는 단조 등의 분업식 공정을 갖춘 고도의 생산유적임이 드러나 풍납토성과 함께 백제 고대국가 형성기의 정치, 경제, 사회상을 구체적으로 실증하는 단서로 평가되고 있다.

지난해 9월부터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기안리 457-83번지 아파트·학교 신축터 3만여 평을 조사해온 기전문화재연구원(원장 장경호)은 최근 이 곳 구릉의 북동·북서쪽 경사면 1만여 평에서 철을 만드는 노(가열로)와 단야시설 등을 갖춘 공방터와 유물들을 발굴했다고 6일 밝혔다. 연구원은 6개 구역으로 나눠 조사한 결과 동쪽 능선을 중심으로 노 10곳과 낙랑·원삼국 시대 토기조각들, 3~10cm의 철 조각과 찌꺼기(슬랙), 노에 공기를 불어넣는 송풍관 따위를 확인했다고 덧붙였다. 특히 항아리, 단지 등 낙랑계통의 토기조각들은 3세기 전반~중반부 시기로 추정되어 이 공방터는 현재 국내 대규모 제철유적 가운데 가장 이른 것으로 분석된다. 이전의 삼국시대 제철유적으로는 90년대에 발견된 충북 진천 석장리와 경주 황성동 공방터가 있으나 4세기 이후 것들이다.

확인된 유적, 유물은 주로 철생산 공정의 최종단계인 두들겨 철기를 만드는 단야·단조작업의 흔적들이다. 그러나 서쪽 구릉의 홍익대 새 교정터에서 제련 때 나오는 유출재와 철찌끼 등도 무수히 발견되어 제련시설도 근처에 있을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손명조 학예관은 “발굴지역 주변 구릉의 흙에서도 많은 슬랙이 섞여 나와 실제 공방터는 수만평에 달할 것”이라며 “포항제철에 비견될 대형 제철소가 화성에 있었던 셈”이라고 설명했다. 철문화연구회 회장인 이남규 한신대 교수도 “초기 백제가 고도의 생산력과 동원체제를 갖춘 고대국가였음을 입증하는 중요한 유적”이라며 “전면 학술조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편 연구원쪽은 9일 오전 이건무 국립중앙박물관장 등을 초청해 현장설명회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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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세기 철기유적 ‘철강 백제’ 짐작케



3세기 철기유적 ‘철강 백제’ 짐작케  


백제는 이미 초기부터 강력한 철강생산 국가였다! 기전문화재연구원이 발굴한 경기도 화성 기안리 제철유적은 철강왕국으로 불린 가야나 신라 못지 않게 백제 또한 이미 3세기께 고도의 산업 생산체제를 갖춘 나라였음을 입증하고 있다. 특히 초기 백제의 중심이었던 경기도 지역에서 국내 최고의 대규모 철 생산유적이 처음 발견되어 당시 도읍지 한성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 지역의 산업생산 및 유통경로를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경기도를 근거지로 한 초기 백제인들의 철기 생산 및 유통과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자료들이 별로 없었다. 지난 94년 충북 진천군 덕산면 석장리에서 대형 제철로 유적이 발견되었으나 변방의 시설이란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백제 중심부의 생산유적 발견은 더욱 의미가 크다.

1만여 평에 달하는 기안리 제철유적들은 일찍부터 철 생산이 여러 공정으로 분업화했음을 보여준다. 제철공정은 원광석에서 순수한 철을 뽑아내는 제련과 녹인 쇳물을 틀(용범)에 넣어 주조하는 용해, 달궈진 쇳덩어리를 두들겨 기물의 모양을 만드는 단야로 나뉘는데, 기안리 유적들은 그 최종단계인 단야 유적들 중심이다. 대장간 시설인 노와 주변의 배수로, 쇳덩어리를 두들겨 갈무리하는 모루가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광석과 제련 때 사용된 풍로관과 용광로의 벽조각, 철 찌꺼기 등도 나와 제련작업도 함께 이뤄졌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연구원은 제련폐기물(슬래그)이 무더기로 나오는 유적 서쪽 구릉의 홍대 교정 신축터에 훨씬 큰 규모의 별도제련시설이 있을 것으로 보고있다.

노, 철조각들과 함께 발견된 토기들의 절반 이상을 물레의 회전무늬가 뚜렷한 낙랑계 토기들이 차지했다는 점도 주목된다. 제철유적의 기술자나 인부들 가운데 상당수가 북방의 중국식민지인 낙랑 주민들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나 중국사서 등에는 백제가 낙랑과의 분쟁과정에서 포로나 유민들을 끌어들여 노역에 종사하게 했다는 기록도 있어 유적은 백제-낙랑간 교류관계에 얽힌 흥미로운 비밀들도 깃든 셈이다. 옛 문헌에 철광산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경기도에서 어떻게 제철 원광석을 조달했을까하는 점도 수수께끼다. 연구원의 김무중 학예사는 “철광이 있는 서해안섬에서 편리한 배편으로 들여왔을 가능성이 있다”며 “철 생산은 많은 원료와 연료가 필수적이므로 이를 동원할 강력한 정치권력이 존재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학계는 이번 발굴을 계기로 백제 유적 밀도가 높은 화성지역의 체계적인 문화유산 조사?보존계획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최근 백제초기의 대규모 마을터가 확인된 향남면 발안리를 비롯해 화산과 고금산, 마하리, 백곡리 등 유적을 둘러싼 주변 곳곳에 백제 옛무덤과 마을터 등이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들 유적은 지금도 지자체와 민간업자들의 마구잡이 택지개발로 계속 허물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