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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 두 무덤의 유리 관옥 맞춰보니 딱 맞아

吾心竹--오심죽-- 2010. 1. 31. 17:28

역사 게시판

   (2007-11-09 09:16:34, Hit :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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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세기 두 무덤의 유리 관옥 맞춰보니 딱 맞아…

▲ 충남 공주 수촌리 고분군(사적 460호) 4호와 5호 무덤에서 각각 출토된 관옥. 서로 완벽하게 일치하는 부절이다. 4호와 5호 무덤에 묻힌 이는 부부로 추정된다.


5세기 두 무덤의 유리 관옥 맞춰보니 딱 맞아…
‘부부’ 간접증거

고대의 ‘신분증’ 부절(符節)

주민등록증도 없고, 홍채 인식 기술 같은 것도 없던 과거에는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할 방법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지방관으로 누군가 내려왔다. 한데 그가 중앙에서 파견한 진짜 지방관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런 때 쓰던 것이 부절(符節)이다. 돌이나 금속, 거울 같은 것에 글을 쓴 뒤 깨뜨려 양측이 각각 보관하고 있다가 나중에 맞춰 봄으로써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다. 영어로 부절을 뜻하는 ‘tally’가 있는 것으로 보아, 동서를 막론하고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부절은 이미 2000여 년 전 삼국사기 고구려 유리명왕편에 등장한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의 딸을 임신시켰다. 그러나 주몽은 부여의 왕자들에게 쫓겨 남으로 도망가 고구려를 세웠다. 주몽은 도망치기 전, 예씨 부인에게 “아들을 낳거든 내가 유물을 ‘모가 일곱 개 진 돌’ 위 소나무 밑에 숨겨 두었으니 그것을 찾아 오라”고 했다. 예씨가 낳은 아들 유리는 아버지의 말을 따라 방방곡곡을 뒤졌지만 찾지 못했다. 어느 날 마루 밑 주초석의 모가 일곱 개인 것을 발견했다. 주초석 위에 선 나무 기둥 밑을 뒤지니 부러진 칼 한 조각이 나왔다. 유리는 주몽을 찾아가 맞춰 보았다. 딱 맞았다. 유리는 곧 태자가 됐고, 결국 왕이 됐다.

부절이 발굴된 예는 많지 않다. 발굴되더라도 ‘반쪽’만 나온다. 한 사람이 부절 ‘두 쪽’을 다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부절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1980년 러시아 연해주 니콜라예프카 성터에서 나온 발해 장군의 부절도 그런 예이다. 길이 5.6㎝, 최대 너비 1.8㎝, 두께 0.5㎝짜리다. 청동으로 물고기 모양을 만든 뒤 머리에서 꼬리 방향으로 두 개로 정확히 나누고, 나눈 한쪽 면에 ‘좌효위장군 섭리계(左驍衛將軍 ?利計)’라고 장군의 직책과 이름을 새겼다. 나머지 반쪽은 발굴되지 않았다.

그러나 두 개로 나뉜 부절이 각각 발굴돼 기적적으로 합쳐지는 경우도 있다. 2003년 충남역사문화원 문화재센터(센터장 이훈)는 서기 5세기 전반기 무덤인 충남 공주 수촌리고분 4호분과 5호분을 발굴했다. 두 무덤의 시신 머리맡에는 부러진 유리 관옥 한 점씩이 놓여 있었다. 이훈 센터장은 “왜 부러진 관옥을 한 점씩 넣었는지 당시로서는 이해하지 못했다”고 했다. 2년 뒤 발굴조사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유물을 실측하던 직원들은 4호분과 5호분에서 나온 두 관옥의 크기나 모양이 너무나도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부러진 곳을 맞추어 보니, 딱 들어맞았다. 관옥은 전체 길이 5.4㎝, 지름 1.2㎝로, 칼이나 망치 등으로 자르지 않고 손으로 정확히 전체의 절반 크기인 2.7㎝로 뚝 잘라 무덤에 넣은 것이었다.

발굴단은 부부가 평생 소중히 지녔던 부절을 무덤에까지 가지고 간 것으로 보고 있다. 4호분에서는 금동관과 금동신발, 큰 칼이 나오는 등 남성의 무덤이 확실한 반면, 5호분에서는 17점의 장식용 구슬이나 최고급 자기 등이 나온다는 점에서 여성의 무덤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토기나 무덤 축조 양식 등을 통해서 볼 때 4호분에 묻힌 남자가 5호분 주인공보다 10~20년 정도 빨리 묻혔다는 점도 두 사람을 부부로 보는 ‘간접 증거’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