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 濟

고구려는 중국을 지배한 흉노의 선우

吾心竹--오심죽-- 2010. 1. 30. 12:46

고구려는 중국을 지배한 '흉노의 선우',초기영토 북경주변 난하 [3]

  • hydi95 yudi**** hydi95님프로필이미지
    • 번호 132981 | 09.11.14 04:15
    • 조회 434 주소복사
    고구려는 중국을 지배한 '흉노의 선우'



























    오나라 손권이 '흉노의 선우'라 칭할 만큼 고구려는 유목민족의 맹주
     

    문화부

     

    라시아 대륙은 고대부터 지금까지 초원길과 비단길을 통하여 수많은 인종과 문화가 교류되는 개방적인 공간이였다는 점을 전제로
    스키타이족인 흉노의 기원에 대해서 [한단고기]에는 "갑진 6년, 열양의 욕살(관직명) 색정을 약수(몽골고원 중부에 있는 고비사막
    인근을 흐르는 강)에 유배시켰다. 뒤에 이를 용서하고 그 땅의 제후로서 봉하니 이가 흉노의 조상이 되었다"라고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 스키타이(훈.흉노.돌궐.몽골) 발원지(만주와 몽골)와 이동루트로써  초원 스텝루트    




    사료를 통해 본 중국의 고구려사 편입 주장의 오류



    중국이 고구려를 자국 변방의 소수정권이라 주장하며 ‘고구려 훔치기’에 나섰으나, 고구려는
    중국을 위협하며 동북아시아를 호령한 북방 기마민족의 후예다. 중국의 황제가 고구려의 왕을 중국이 그토록 경계했던 타자(他者)인
    ‘흉노의 왕’으로 여긴다는 중국 문헌이 발견됐다. 이로써 중국의 터무니없는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할 근거가 마련된 셈이다.  



















     





     













    [고구려 수도문제]▲  고구려 전성기 때의 영토. 대륙 동부 평야지대까지 다 고구려의 영토였다.
    구려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고리국에서 기원한다. 고리국의 위치는 바로 북경지역에 위치한 난하다. 따라서 고구려는 초기에
    수도를 티벳.서안 피라미드들보다 연대가 빠르다고 볼 수 있는 배달국과 단군조선의 피라미드 무덤들로 추정되는 동이족의 성지,
    압록강 부근의 집안의 홀본성에 잡고 세력을 확장한 후에 차츰 단군조선의 고토를 회복하는 다물정신에 따라 중국침략을 방어하고
    서토를 공략하는 차원에서도 조상들의 시원지인 난하지역에 수도를 잡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고로 만리장성 넘어 하북성 난하지역은 중국 황하문명의 뿌리가 되는 홍산문명의 유적지가 발굴된 지역이기도 하다. 바로 고구려
    조상들의 발원지인 이 지역은 고구려의 성지이자,  동이족 문명의  젖줄로써 고구려도 보존해야만 하는 땅이였을 것이다.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 만 천하에 드러나지 않을까 추정해 본다.


    중국은 고구려가 중국의 변방사에 포함되어야 한다면서 고구려사(高句麗史)가 자신들의 역사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중국 옌볜대
    류쯔민(劉子敏) 교수는 ‘중화천하질서(中華天下秩序)의 고구려’라는 논문에서 고구려는 중국의 군현 중에서 갈라져나간 할거정권이며,
    북방 소수민족(흉노와 그 후예를 뜻함)의 궐기로 형성된 분열국면의 틈을 타서 중원의 광대한 관할지구를 탈취하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후 한반도 지배권을 둘러싸고 백제, 신라와 각축전을 벌였다고 했다. 중국이 남북조
    시대에 들어선 후 고구려가 중국과는 독립된 국가로 나아갔지만, 남북조와 신속(臣屬) 관계를 유지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고구려는 중국의 변방사에 포함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설명이다.



    중국은 왜 고구려사를 노리는 것일까? 그 계기는 1997년 북한이 ‘조선전사’를 발간하면서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특별히
    강조했던 데서 찾을 수 있다. 중국은 이에 대한 반발로 우선 중국 동북지방(요령성·길림성·흑룡강성)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고구려사를 상세하게 연구하기 시작, 지금까지 무려 1000편이 넘는 논문을 발표했다.




    고구려 벽화 유네스코 등재로 이슈화



    집착이라 할 만큼 활발한 연구에도 고구려사는 큰 이슈가 되지 못했다. 그러다 2001년 북한이 고구려 벽화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하면서 고구려사는 다시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다. 고분벽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
    ‘고구려=중국사’라는 중국의 시각에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중국은 북한에 유적을 공동으로 등재하자고 권유했다. 그러나 북한은 중국의 제안을 일거에 거절했고, 이에 중국도 독자적으로 고구려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했다.


     


     


      


     


     


     


     


     


     


     


     


     


     



     
















    [중국문명의 젖줄]▲ 단군조선의 제후국 고리국(고구려)이 위치했던 난하지역에 중국의 황하문명의 뿌리가 되는 홍산문명이 위치하고 있다. 이 요서.요동지역은 전통적으로 동이족의 터전이였다. 이 요서지역에서 중국의 용문화의 기원이 되는 거대한 유적이 발굴되기도 했다. 즉, 중국대륙의 문명은 동이문명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 것이다. 그리고 북방유목민족과 고구려의  상징인 삼족오 문양은 황하문명의 유적지에서 발굴되었는데, 이것은 고대 아시아 문명의 주역이 바로 북방과 남방 등 아시아 전역에 분포되어 있던 동이족들이라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옥문화를 상징으로 하는 모계사회였던 홍산문명은 환국의 천산에서 동진해 온 수련.명상족인 한웅의 배달족과 만주지역의 토착민들인
    곰족들 간의 융합적 문명이라 추정되며, 청동기 문명의 주역은 서방의 접경지역인 알타이 지역에서 동진해 온 단군족이 곰족.한웅족과
    융합하여 형성한 문명이라 추정된다. 한웅과 단군은 모두 하늘에서 강림했다고 기록된 이유다.  하늘이란 그들이 떠나온 땅, 중앙 아시아와 알타이 지역을 의미한다. 따라서 일본천황이 강림했다는 하늘도 한반도일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삼족오는 바로 태양을 광명의 상징으로 숭상해온 9환족으로 상징되는 유라시아 전역의 동이족의 근원적 정신을 의미하고 북방
    초원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까마귀를 의미하는 것으로 한웅.단군족 등 북방 유목민족을 상징하고, 천부경에 명시되어 있는 3숫자
    또한 유라시아 전역에 분포된 동이족들의 근원적인 우주사상으로 현대 물리학에서도 물질의 최소 단위가 한국의 3태극 문양이라는 것을
    증명된 바 있다. 고구려사를 왜곡하려는 근본적인 배경은 바로 황하문명의 근원인 동이족의 홍산문명을 중국역사로 편입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홍산문명의 근원으로 올라 갈수록 동이족이 위대성만 드러날 뿐이다. 역사란 왜곡조작될 수 없으며, 땅속에서 토해내는 유물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진실을 증명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지 난해 봄까지만 해도 북한 단독 등재가 확실한 것으로 예측됐지만 막판에 심의가 보류되었다. 이때부터 고구려 문제는 중국의 국가적 과제로 급부상했다.


















     









    ▲   서안에 있는 정체불명의 피라미드. 중국정부는 발굴 3일만에 이 피라미드는 동이족(고조선 또는 고구려)의 것으로 결론짓고 발굴을 중지하고 피라미드에 나무를 심어 은폐하기 시작했다.


     

    중국은 중국사회과학원을 중심으로 하여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대형 프로젝트를 발족시켰다. 5년간 약 200억위안(약 3조원)을 투입할 이 프로젝트의 주요 목표는 고구려가 중국 변방의 소수정권임을 공고히 하는 것이다.


    중국이 이처럼 고구려의 영토였던
    중국 동북방을 중시하게 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중국이 개혁·개방정책을 실시하면서 동북지역의 전략적 가치가 높아진 건
    분명하다. 따라서 중국은 조선족이 살고 있는 동북지역에 대한 연고권을 재확인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북한 지역에까지 개입할 수 있는
    역사적 명분을 축적하겠다는 고도의 전략을 구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의 이러한 역사 왜곡은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고구려 영토 대부분이 현재 중국 땅에 속한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때문에 중국의 고구려사 ‘탈취’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시도가 얼마나 모순에 차 있는지를 적극적인 대처
    논리를 가지고 밝혀야 한다.  



    과거사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시대의 사건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나 타임머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료와 유물을 참조해 우리 역사를 재구성해야 한다.



    그러나 한민족에 대한 자료가 국내에 미흡해 다분히 인근 국가들의 사료들을 인용하는 것이 현실인데, 이 역시 단편적인 데다가 나라마다 편찬자의 이해득실이 엇갈려 사실과 다르게 왜곡되거나 가필되었을 가능성 또한 도사리고 있다.


















     



    고구려 평양성은 하북성에서 찾아야 한다

    동이족에 대한 열등감으로 역사를 곡필하기도 했던 고대 쥐나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문헌에서 자백하고 있다. 기존 사학자들은 눈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즉,  [구당서 열전 제 149 “동이(東夷) 고구려”]편을 보면
    高麗者,出自扶余之別種也。其國都於平壤城,即漢樂浪郡之故地,在京師東五千一百裡 고려자,출자부여지별종야。기국도어평양성,즉한낙랑군지고지,재경사동오천일백리


    “고(구)려는 부여로부터 나온 별종이다.고구려의 도읍은 평양성이다.한나라때 낙랑군의 땅이며 경사(장안)의 동쪽 5천백리에 있다“
    고 기록하고 있다. [구당서]는 당(唐)의 건국(618)에서 멸망(907)에 이르는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후진(後晉)
    개운(開運) 2년(945) 국사(國史)를 감수한 재상 유후(劉煦)가 이끄는 학자들이 편찬했다. 총 200권으로 본기 20권, 지
    30권, 열전 150권으로 되어 있다. 원래 이름은 〈당서 唐書〉였지만, 송대 구양수(歐陽修) 등이 편찬한 〈신당서〉와 구별하기
    위해 〈구당서〉라고 했다. 당조의 국사실록은 당대 말엽의 전란을 거치면서 산실되어 완전하지 못했다. 오대(五代)의 양(梁)·당
    두 왕조 때 여러 방면으로 사료를 찾아 모았고 후진에 와서야 비로소 이 책을 완성했다.

     

     

    그러나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고 볼 수 있다. 한민족의 위대한 역사를 기록한
    [환단고기][규원사화] 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리의 문헌들을 기반으로  중국이 왜곡하고 있는 역사에 대해 중국측이
    작성한 사료를 통해 적절하게 대응한다면, 중국측에서 더 이상 시시비비를 따질 수 없도록 만들 수 있다. 중국과의 과거사 논쟁에서
    첫 단추를 잘 끼느냐 잘못 끼느냐는 중국보다 한국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 로마와 유럽의 공포대상 훈족의 왕 - 아틸라


    중국 ‘밖의’ 나라, 흉노제국



    중국인들은 소위 중국인이 아닌
    민족을 모두 오랑캐라 불렀다. 특히 한민족과 관련되는 민족은 동이(東夷)라고 불렀다. 동이란 ‘동쪽 오랑캐’란 의미로, 고대
    중국인들은 중국이 세계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는 이른바 중화사상(中華思想)에 기초하여 그들의 동방에 있는 민족들을 모두 ‘동이’라
    불렀던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이 중국인이 아닌 민족이라고 부른 동이와 중국인이 서로 어떻게 다른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훈족(흉노(匈奴))의 이동경로에서 발견된 유물과 사료 등을 통해 ‘게르만 민족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과 한민족의 친연성의 문제는
    375년 서유럽을 공격, 게르만족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과 한반도 남반지역에 정착했던 훈족(흉노)이다. 중국과 끊임없이 경쟁을
    벌였던 흉노 중 한 부류가 서천(西遷)하여 훈족으로 성장하고, 또 한 부류가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동천(東遷)하여 소위,
    가야·신라 등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중국은 적어도 북방 기마민족인 흉노가 중국인이 아니라고 인식하고 이들을 중국에 적대적인 세력으로 간주했다
    . 그런데 가야·신라가
    흉노의 일파인 훈족과 친연성이 있다면 가야·신라보다 흉노와 가까운 지역에 있던 고구려는 흉노와 어떤 관계였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 역사에서 흉노가 나타나기 전까지 주로 동이(東夷)들이 살고 있던 동북 지역은 한민족의 원류가 정착한 지역이자, 부여와
    고구려의 근거지였다.
    따라서 흉노와 고구려의 연계를 명확히 밝히는 작업은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근본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이 될 수 있다.


















     









    ▲  스키타이(흉노.훈)족은 한반도 남부지역까지 이동해 왔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먼저 ‘흉노’란 중국 북방에서 처음으로 유목민 국가를 건설한 제국의 명칭이지, 결코 단일한 민족이나 부족의 명칭은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흉노는 몽골-투르크족의 혼합으로 추정
    되며, 기원전 600년경부터 실크로드를 통해 철기를 받아
    들이면서 점점 강성해졌다. 그러다 기원전 4세기부터 비로소 여러 유목민 부족들을 망라하여 하나의 포괄적인 기마민족 집합체를
    구성하게 된다.



    그러나 대다수 한국인들은 ‘흉노’라는 이름에 거부 반응을 일으킨다. ‘흉(匈)’은 오랑캐를 뜻하고, ‘노(奴)’는 한자에서
    비어(卑語)인 ‘종’이나 ‘노예’란 뜻으로 그들을 멸시하는 의도에서 ‘흉노’로 불렀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흉노에서
    흉(匈)자를, 선비(鮮卑)에서도 비(卑)자를 떼어내고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을 정도다.




    그러나 ‘흉(匈)’자는 ‘훈(Hun 혹은 Qun)’에서 따온 음사이며, ‘훈’은 퉁구스어로 ‘사람’이란 뜻이다. 또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흉노가 ‘노예 같은 오랑캐’란 뜻이었다면 흉노 제국이 이런 이름을 용납했을 리 없다. 특히 진나라의 뒤를 이어 들어선
    한(漢)이 흉노에게 조공하는 입장에서 상대를 비하하는 뜻으로 ‘흉노’라 칭할 수 없었을 것이다.



    흉노에 대한 보다 설득력 있는 해석은 고구려 초기에 ‘나(那)’나 ‘국(國)’으로 표기되는 집단이 상당수 있었다는 점에서 유추할
    수 있다. ‘나(那)’는 노(奴) 내(內) 양(壤) 등과 동의어로, 토지(土地) 혹은 수변(水邊)의 토지를 의미했다. 고구려의
    5대 부족인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貫那部) 소노부(消奴部, 涓奴部)에도 흉노와 마찬가지로 노(奴)자가
    들어 있다. 이들은 고구려 성립 이전 압록강 중류지역 부근에 자리잡은 토착세력으로 고구려에 정복, 융합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원대(元代)의 극 ‘공작담(孔雀膽)’ 대사에 등장하는 ‘노(奴)’나 ‘아노(阿奴)’의 어의를 살펴보면, 이는 남편을
    지칭하는 ‘낭(郎)’이나 ‘낭자(郎子: 그대, 그이, 낭군)’의 뜻이다. 즉, ‘노(奴)’자가 사람에 대한 호칭으로 쓰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흉노의 어감과 이미지가 좋지 않다는 선입견은 버려도 좋지 않을까.

















    기후변화와 식량부족으로 유럽에 갑자기 출몰하여 게르만족을 밀어내고 유럽을 지배한 아틸라 훈족의 판도    




    漢에게서 조공 받은 흉노



    흉노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려면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기원전 3세기경으로 내려오지 않을 수 없다. 중국과 흉노 간 본격적인 대립의
    역사는 진시황이 기원전 221년 중국을 통일한 후 흉노를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다는 기록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한 지 10여년 만인 기원전 210년 사망한다. 후임자인 호해가 등극했지만 곧 항우에게 패하고
    진나라는 멸망한다. 항우와 유방이 천하를 놓고 싸운 결과 유방이 승리하고 통일 중국인 한(漢)을 세운다. 당시 북쪽에 있는
    흉노는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강대국이었다. 한나라는 멸망할 때까지 북쪽 흉노와 때로는 가깝게, 때로는 원수처럼
    으르렁거리며 지냈다.




    흉노는 몽골 중앙부인 상원(上原; 현재의 산서성 북부, 운중(雲中)에 상당하는 위치) 지역에 본영을 설치하여
    선우(터키-몽골어에서 ‘하늘의 아들’, 즉 흉노의 왕을 뜻한다)가 직접 통치하고 좌현왕과 우현왕으로 나누어 각기 동서지역을
    통치하게 했다. 상원 지역은 광활하면서도 비옥한 초원지역이자 동서남북 교통의 요충지다. 흉노를 비롯해 칭기즈칸, 돌궐, 위구르
    등이 모두 이 지역에 본영을 설치했다.



    유방은 기원전 202년 재위 5년에 비로소 황제라 칭하고 노관을 연(燕)왕으로 봉한다. 그런데 기원전 201년 노관이 흉노에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유방은 흉노가 갓 탄생한 한나라에 큰 골칫거리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40만 명의 대군을 동원, 흉노의
    시조인 묵특선우((冒頓單于, 기원전 209∼174)를 공격한다. 그러나 기원전 200년 유방은 백등산에서 일주일 동안이나
    포위되었다가 가까스로 구출되는 등 온갖 수모를 겪고 난 뒤 흉노와 화친을 맺는다.




    당시 흉노와 한이 맺은 화친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그에 의하면 한은 거의 흉노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다.




    첫째, 한의 공주를 흉노 선우에게 의무적으로 출가시킨다(이 관례는 문제(文帝, 기원전 179∼157) 때까지 계속되었다).



    둘째, 한이 매년 술,비단 ,곡물을 포함한 일정량의 조공을 한다.




    셋째, 한과 흉노가 형제맹약(兄弟盟約)을 맺어 동등한 지위를 가진다.




    넷째, 만리장성을 경계로 양국이 서로 상대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




    이 합의는 기원전 198년 가을, 중국 종실의 공주가 흉노에 도착함으로써 발효되었다. 특기할 사항은 양 조정(朝廷)에 왕위
    변동이 있을 때마다 새로운 혼인으로 동맹을 갱신했다는 점이다. 또 중국이 흉노에 내는 조공 액수도 한과 흉노 사이의 역학 관계에
    따라 수시로 바뀌었는데, 대체로 한의 조공액은 매년 늘어났다. 기원전 192년부터 135년까지 적어도 아홉 차례에 걸쳐 한이
    흉노에 대한 조공액을 인상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한이 흉노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위에서 시계방향으로 한반도 남부 김해.경주지역 고분과 유사한 북방민족의 쿠르간(상), 훈족의 동복(하단 오른쪽), 김해 대성동에서 출토된 동복(하단 가운데), 훈족의 편두(하단 왼쪽)-스키타이족(흉노.훈)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한을 흉노의 속국으로 만든 묵특선우는 흉노의 전성시대를
    열었으며 우리 한민족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당시 동호
    (東胡; ‘동쪽 오랑캐’를 의미하는 한자어. 고조선 외에 부여,
    예맥, 진번, 임둔, 진국 등 다양한 국가가 있었다고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가 매우 강성하였는데, 동호는 흉노를 경멸하며 묵특의
    천리마와 연지(흉노의 후비(后妃)의 칭호)를 요구했다
    . 부하들이 동호의 무례함을 나무라며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라고 하자 묵특은
    ‘인접한 나라 사이에 어찌 말 한 마리와 여자를 아끼겠는가’라며 순순히 동호의 의견을 따랐다. 당시 두 나라 사이에는
    1000여리의 황무지가 펼쳐 있었는데, 동호가 이를 갖겠다고 나섰다. 신하들은 버려진 땅이므로 주어도 괜찮다고 했지만 묵특은
    ‘땅은 나라의 근본이다’라며 동호를 습격하여 왕을 살해하고 백성과 가축을 노획했다.



    패전한 동호를 대신하여 흉노는 유목기마민족의 패자로 떠올랐고, 묵특은 자신의 치세 동안 대대적인 정복활동을 벌여 아시아 초원에
    있는 거의 모든 민족을 복속시켰다. 그의 영토는 동으로 한반도 북부(예맥조선을 뜻하며 사마천은 동호를 예맥조선이라 적었다),
    북으로 바이칼호와 이르티슈 강변, 서로는 아랄해, 남으로는 중국의 위수(渭水)와 티베트 고원에 이르렀다.



    한족이 이른바 ‘흉노 공포증’에서 벗어난 것은 기원전 141년 한나라 무제(武帝)가 즉위하면서부터다. 괄괄한 성미의 무제는 고조
    유방 이후 60 년간 지속된 굴욕적인 대(對)흉노 유화정책을 버리고 강경 대응에 나섰다. 무제는 기원전 129년부터 기원전
    119년까지 10년 동안 여섯 차례에 걸쳐 위청과 곽거병 등으로 하여금 기병대를 이끌고 흉노를 공격하게 했다.



    10년간의 한·흉노 전쟁으로 한나라도 막대한 손실을 입었지만 흉노의 피해는 더욱 컸다. 무제가 죽은 후 한나라와 흉노는 대략
    300년에 걸쳐 공존하며 평화롭게 지낸다. 그후 두 나라는 모두 해체의 길을 걷게 된다. 우선 흉노는 기원전 57년에 동서로
    나누어지고, 동흉노는 다시 남북으로 갈라진다. 이후 중국과 계속 대립하다 350년 한족과의 전투에서 북흉노가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흉노는 중국의 역사에서 사라진다.

















     









    ▲  모본왕의 진출로. 서남으로 산서성의 성도 태원까지 갔다. 덕흥리 고분에도 태원태수가 하례드리는 벽화가 있다.


    흉노 편을 든 고구려



    한국사는 북만주 지역에 존속했던 예맥족계(濊貊族系)의 국가로 인정받는 부여(夫餘)에서
    동부여가 나오고, 동부여에서 고구려의 지배층이 된 주몽집단(계루부, 桂婁部)이 나왔다고 추정한다
    . 고구려의 기원과 성립과정에
    대한 기록은 문헌마다 약간씩 차이는 있으나, 주몽(동명)의 건국내용(남하 및 정착)에 관해서는 대동 소이하다(‘광개토태왕비’에
    추모(鄒牟)로 되어 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흉노와 동이에 속하는 예맥(부여)의 국경이 서로 맞닿아 있는 데도 두 나라가 교전한 기록이 단 한군데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흉노는 유목 생활을 하면서 기후나 식량공급에 문제가 생기면 곧장 약탈에 나섰다고 추정할 수 있는데,
    서로 이웃한 종족간에 충돌이 없었다는 점은 다소 이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흉노가 동호를 격파한 후 부여가 흉노의 세력권 안에 속해 있었다면 이들간에 전쟁이 없었다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정황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도 발견됐다. 진(秦)나라 복생(伏生)이 쓴 ‘상서대서’에 ‘해동의 모든 이족(夷族)들은
    부여의 족속이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이다.




    부여와 흉노처럼 고구려와 흉노의 관계 또한 특별했음을 유추할 수 있는 사건이 있다. 왕망이 중국 전한(前漢) 왕조를 파하고
    신(新, 8∼23)을 세운 후 흉노를 정복하겠다며 고구려에 병력을 요청하자 고구려는 이에 응하기는커녕 거꾸로 요하(遼河)를 넘어
    신(新)을 공격해 요서태수 전담을 전사시키고 지속적으로 왕망의 영토를 유린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왕망은 흉노의 일족인 휴도왕의 후손으로 중국을 멸망시키고 신(新)을 세웠으므로 흉노도 자신의 세력 밑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흉노는 동·서 흉노로 갈라졌는데, 여기서는 동흉노로 볼 수 있다. 왕망은 동흉노가 그의 지배를
    거부하자 흉노의 다른 일파이자 고구려의 별종인 소수맥으로 하여금 동흉노를 공격하도록 명령했는데, 소수맥은 동흉노를 공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왕망을 공격한 것이다.




    한편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흉노 휴도왕의 후손이라는 것이 문무왕의 능비문에도 적혀 있다. 여기에는 김알지가 흉노의 후예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내용이 적혀 있다.




    남만주 및 시라무렌(Siramuren) 유역에서 목축, 수렵 및 조방경작(粗放耕作)을 하던 선비(鮮卑)는 고구려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민족이다. 선비는 동호가 흉노에게 격파된 후 선비와 오환으로 분리된 다음 북중국을 통일하여 최초의 왕조를 건설한
    북방 기마민족이다. 선비가 건립한 왕조는 전연, 후연, 남연, 남량, 북위, 동위, 서위, 북제, 북주 등이며 선비의 문화가
    당대까지 존재했던 점 등을 미루어보아 선비가 중국 역사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중국에서는 북방 기마민족이 할거하며 중원을
    지배하던 시대를 5호16국(五胡十六國)시대라 부른다. 이러한 선비가 고구려와 특별한 유연 관계가 있는 것이다.




    역사에서 선비와 고구려의 특별한 관계는 여러 차례 발견된다. 우선 고구려 유리왕 11년(기원전 9년)에 고구려가 선비를 격파하고
    속국으로 삼은 일이 있다. 또 후한 광무제가 요동태수 채동으로 하여금 고구려가 부용(附庸)세력화하여 지배하고 있던 선비족 일부를
    책동, 고구려로부터 이탈하게 한 일도 있다(48년). 이에 고구려는 모본왕 2년(49년) 후한제국이 대흉노 소극정책에 따라
    북쪽방어선을 화북 산서선으로 후퇴시킨 것을 틈타 후한 영역 깊숙한 북평 어양 상곡 태원 등지를 공격하는 등 적극적 공세를
    펼쳤다. 이에 당황한 후한은 고구려에게 철수의 대가로 상당한 물질적 급부를 제공하는 동시에, 선비족 일부를 책동하여 고구려로부터
    이탈하도록 사주한다.




    고구려의 태조 대왕은 더 이상의 선비족 이탈을 막기 위해 동왕 3년(55)에 ‘축요서십성(築遼西十城)’이라는 군사적 대응 조치를
    취하였고 동왕 69년(121)에는 선비세력과 합세, 한제국의 요동거점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군사행동 폭을 확대시켰다
    .


















     


     









    ▲ 사학계가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으로 비정한 현 집안 지도. 대제국의 수도(국내성)의 크기가 겨우 15Km2?


     

    선비(鮮卑)는 고구려의 부용세력




    부용(附庸)이란 원래 소국(小國) 그 자체를 의미하지만, 동시에 대국(大國)에 복속되어
    있는 상황을 나타내기도 한다. 로마제국이 당시 해방 노예가 그들의 옛 주인인 자유민을 보호자(patronus)로 삼는 대신 노역
    및 군역에 봉사하는 부용민(clientes) 제도를 제국의 피정복지 통치방식으로 채용했는데, 고구려와 선비의 관계도 이러한
    보호-종속관계라는 것이다.



    고구려의 지배집단은 전쟁을 주체적인 생존방식으로 인식하고 군사역량을 제고하는 데 주력하여 전사국가(戰士國家)화했다.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세력에 대한 군사적 팽창정책을 관철시켜 나가면서 내부적인 통합으로 정치사회적 중앙집권화정책을 견지해갔던
    것이다.



    고구려는 이런 내외 정비를 통해 후대에 들어서 ‘전제적
    군사국가’에서 탈피, 동북아시아 일대에서 독자적 생존권을 확보한 하나의 제국(empire)을 성립한다. 고구려가 선비 등
    흉노(흉노가 동서 및 남북으로 나뉘기 전의 흉노를 의미)에서 파생된 유목국들을 자신이 의도하는 작전에 수시로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와 피정복민이 부용 관계였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말갈 선비 거란 지두우(地豆于) 같은 이종족(異種族)에게 그들 본래의
    공동체적 질서와 생산양식을 보장해주는 대가로 세금을 받고, 특히 노역과 군역을 확보했다. 이를 공납적 수취관계(貢納的收取關係)에
    기반한 속민제도(屬民制度) 또는 이종노예제(異種奴隸制)라고도 한다.




    고구려 제국은 복속된 기마민족들을 유효 적절하게 구사하였으므로 새롭게 탄생한
    한족의 국가 수·당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수·당이 고구려와 혈투를 벌인 것은 고구려가 중국의 북방에 산재한 흉노의 후예들과
    연합하여 자신들을 공격할 경우 치명상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당시 수·당은 고구려와의 전투를 한-흉노간 전투로
    인식했다고 볼 수 있다.




    수나라 문제가 30만명을 동원하고도 참패했음에도 그의 아들 양제가 또 다시 고구려 침공에
    매달린 것은 고구려가 거란과 말갈족을 지배하고 있는 동북아의 패자이기 때문이었다
    . 특히 양제가 고구려 침공을 결심하게 된 것은
    607년 양제가 돌궐 가한의 막사를 방문했을 때 때마침 고구려 사자와 마주친 후 고구려와 돌궐이 연합하여 수나라를 공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고구려와 부용세력 간의 연합을 방해하는 것이 양제로서는 급선무였다. 마침
    고구려의 남하를 경계한 백제와 신라가 원조를 요청하는 등 침공 명분까지 만들어주자 수나라는 고구려에 대해 총력전을 펼친 것이다.



    그러나 수나라는 고구려와 말갈 연합 세력에게 패퇴했고 당 태종의 공격 또한 무위로 돌아갔다. 이후 역사는 당나라가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나 통일신라와의 항쟁에서 패배해 한반도의 주도권을 신라에 넘겨 주었음을 보여준다.


















     









    ▲ [고구려 수렵도] 모양을 본 떠 의미와 뜻을 나타내는 갑골문자(한
    자)  '동이'의 '이'는 그 본래 의미가 '오랑캐'를 의미하는게 아니라, "하늘과 사람을 이어준다"는 천손민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한 원리에서 나온  '큰 활'를 의미하기도 한다. 즉, 동이는 동방의 큰 활 민족이라는 [동방족]을 의미한다. 유효
    사거리가 강한 맥궁과 몸을 돌려 쫓아 오는 적에게 활을 쏘는 배사법은 오직 우리 동이족의 독창적인 전투기법으로 고대 한민족의
    코드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 왕을 흉노의 선우로 인정



    중국인들은 ‘북방 소수민족 세력의 궐기’였던 5호16국이 중국을 통치했다는 사실을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중국인이 아니라고 여기는 북방 기마민족이 중국을 통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 동북방에 위치한 기마민족 고구려는 흉노가 동북아시아를 지배했을 때는 흉노에 속했으나, 점차 독자적인 제국으로 발전해
    흉노가 멸망한 후에는 동북아의 패자로 군림했다. 이 같은 사실은 고구려가 5호16국을 건설한 주도 세력인 선비 등을
    부용세력화하여 속국으로 취급하면서 북방 기마민족의 맹주 중에서도 맹주 역할을 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 그런데 중국의 한
    사료가 이러한 정황을 확인해주고 있다.


    중국 중원이 오·촉·위 삼각 관계로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을
    때 ‘삼국지’의 주역인 오나라 황제 손권은 동천왕 7년(234), 당시 요동반도를 장악하면서 오나라와 고구려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보인 공손연을 협공하자며 사굉(謝宏)과 진순(陳恂)을 고구려에 파견한 일이 있다. 이때 손권은 고구려 동천왕을 흉노의
    수장을 의미하는 ‘선우(單于)’라 부르면서 의복과 보물을 함께 보냈다.
    이화여자대학교 신형식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상황은 다음과 같다.


    “233년 오(吳)의 손권이 사신 진단, 장위, 두덕
    등을 공손연에게 보냈다. 그러나 공손연이 이들을 죽이려 하자 진단과 황강 등이 달아나 고구려의 동천왕에게 가서 자기들은 원래
    손권의 밀명을 받아 고구려로 오던 중에 풍랑으로 요동해안에 표류해 공손연의 관헌들에게 문서와 방물을 모두 빼앗기고 간신히 살아서
    고구려로 들어왔다고 했다. 동천왕은 이들의 간계를 모르고 그들을 오나라로 돌려보내면서 예물을 보냈다. 이에 오의 손권이 234년
    사자 사굉, 중서, 진순을 고구려에 보내 동천왕을 선우에 책봉하고 예물을 보낸 것이다”(
    책봉이란 정식 수교(修交)의 외교적 관례로 왕위나 직위를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는 의미이지, 상하 주종관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삼국지’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견사자사굉(遣使者謝宏)
    중서진순(中書陳恂)배궁위선우(拜宮爲單于) 가사의복진보(加賜衣服珍寶)” 그러나 손권의 정략은 실패했다. 동천왕은 236년 오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 위(魏)로 보냈으며 238년 위의 태위 사마선왕이 요동지역의 공손연을 공격할 때 구원병 수천 명을 보내
    지원했다. 그러나 동천왕 16년(242), 고구려의 지원으로 요동의 공손연이 멸망했음에도 위가 요동지역 전체를 차지하자 동천왕은
    요동 서안평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그러자 246년 위의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했는데 동천왕은 보병과 기병 2만으로 비류수에서
    이들을 맞아 격파한다.
    그러나 관구검을 격파한 동천왕이 여세를 몰아 개마무사로 무장된 철기병 5000명으로 관구검을 계속
    공략했다가 크게 패하여 수도인 환도성이 함락되는 수모를 겪으며 고구려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된다.
























     ▲ 북방 유목민족 스키타이족(=흉노=훈=투르크=돌궐=터키=위그르=몽골)의 이동과 활동반경. [한단고기]기록에 따르면  "4대 오사구 단군은 동생 오사달을 몽고리의 칸으로 삼았다"라고 했는데, 이  몽골(몽고리)을 통일하고 인류역사상 유라시아 대륙이라는 세계 최대의 대제국을 건설하며 동서양 문명의 교류역할을 했던 징기즈칸을 배출한  보르키킨 부족의 경우, 몽골 지역은 역사시대 이래로 흉노가 거주(한단고기 내용과도 일치)했는데 이들은 쥐나와 치열한 패권 장악을 위해 싸우다가 중심부에서 세력을 떨친 보르치긴족으로 칭기스칸을 배출한 종족이다. 현재 몽골의 주력 주민들도 보르치긴족이다. 그런데 보르치긴족은 몽골로 이주해 가기 전 본래 북만주 어르구나하 유역에 거주했던 종족으로 고대 한민족의 터전인 북만주 지역은 본래 단군조선.고구려의 영토였으며 단군조선이 붕괴된 후에 동부여 영토가 되었다. 따라서 흉노족으로써 지금 몽골에 거주하는 주류 종족인 보르치긴족은 한민족의 한 갈래다.



    고구려는 변방 소수세력 아니었다



    구려가 아시아의 동북방에서 세계를 주름잡던 기마민족의 후예라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또 오나라 손권이 동천왕을 선우로
    인정했다는 것은 고구려의 위상과 특성을 설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흉노가 중국과 끊임없이 혈투를 벌여 흥망성쇠를
    겪는 동안 고구려는 중국과 당당히 맞서 싸우거나 친선 사절을 교환하는 등 평화를 유지하면서 제국의 위상을 지켜나갔다.



    중국의 천자를 자임하는 손권이 고구려 왕을 선우라 칭하며 협력하자고 사신을
    보냈다는 것은 고구려의 위상이 흉노의 수장급이란 것을 의미한다. 중국의 손권이 이미 인정하였듯, 고구려는 중국에 종속된 변방
    소수세력이 아니었다. 즉 중국이 고구려사를 중국의 변방사로 끼워넣으려는 시도에 원천적인 문제점이 있음을 바로 중국인이 기록한
    사료가 제시한 셈이다.




    고구려는 북방 기마민족으로 흉노의 몽골계에 속한다는 점에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특기할 것은 고구려가 흉노의 여러 습속을 모두 받아들이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우선 적석목곽분은 흉노 등 북방 유목민들의 전형적인 무덤 양식인데 고구려에서는 이런 형태의 무덤이 발견되지 않는다.
    적석목곽분이란 땅을 파고 안에 나무로 통나무집을 만들어 시체와 부장품을 안치한 후 많은 돌로 둘레를 쌓고 흙으로 커다란 봉분을
    만드는 것이다. 이는 고구려와 백제, 중국, 그리고 일본에는 없는 무덤 형태이다.



    북방 기마민족이 후대까지 견지했던 순장(殉葬)의 습속도 고구려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한반도 남부지역인 가야와 신라, 그리고 고구려의 전신인 부여에서는 발견되고 있다.



    광대한 영토에 속해 있던 한민족 원류들이 모두 똑같은 습속을 가질 수는 없는 일이다. 학자들은 그 이유를 간단히 설명한다. 고대
    중국 기록에서는 한민족의 원류가 거주한 지역의 민족이 예·맥·한·부여·옥저 등으로 구분되어 불렸지만, 이들은 모두 한민족이라는
    것이다
    . 같은 한국인이지만 전라도, 충청도, 함경도 사람으로 불리는 것과 다름아니며 같은 민족이라도 지역에 따라 풍습이 다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는 고구려가 흉노로 분류되던 거대한 제국 안에서 우월적인 독자제국을 형성했으며 습속도 독자적으로 유지했음을 의미한다.  

















     









    ▲  이런 차원에서 윤내현 교수팀의 [한자 대사전 편찬사업]은 우리 역사찾기에 있어 큰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시대에 따라 변경된 지명의 본적을 찾는 일이다.


    우리 고대사 연구 강화해야.....



    근래 언론들이 중국의 고구려사 ‘탈취’에 대응해 우리 정부가 고대사 관련 분야 연구자들을
    모아 대책을 세우고, 필요하다면 북한과도 적극적으로 공조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한국사 왜곡 문제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미 일본의 한국사 왜곡으로 우리가 얼마나 분개했던가. 그럼에도 우리는 또 다시 중국으로부터 허를 찔렸다.


    한국사를 왜곡하는 사건이 계속 발생하는 데도 한국이 적절한
    대비책을 강구하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한민족사를 큰 틀에서 연구하고 분석하는 전문연구기관이 없는 데다, 남북한으로 갈라져
    있는 현실 탓에 통일된 역사조차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는 한민족사를 체계적으로 수집·분석하고 공백상태나 다름없는 우리 고대사 연구를
    강화해야 한다. 이를 통해 한민족사에 대한 어떠한 문제에도 즉각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힘 또한 길러야 한다. 북한과의 공조가
    필수적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또한 한민족사 연구에 과학을 접목시킬 필요가 있다. 고대사는 사료와 함께 발굴되는 유물에서 힘을 얻을 수 있다. 앞으로는 과학의 지원 없이 고대사 연구에서 정확한 사실을 규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유물 발굴과 고대사 연구를 ‘국립과학기술연구소’의 고대사 연구팀 주도로 진행하는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계 최대의 한자(漢字) 사전이 국내 완간을 눈앞에 두고 있다. 단국대 동양학연구소(소장 윤내현·尹乃鉉)는 30년 동안 계속돼
    왔던 '한한대사전(漢韓大辭典· 사진 )'의 편찬 작업을 오는 4월에 끝내고 5월까지 책을 모두 출간할 계획이다. 

    모두 15권(색인 제외) 분량의 '한한대사전'은 한국·중국·일본 등 한자문화권에서 사용되는 6만여 자의 한자와, 고유명사를
    포함한 50만여 개의 한자 단어를 수록한 200자 원고지 224만 장 분량의 대규모 자전(字典)이다. ▲한자 4만9000자,
    40만 단어를 수록한 일본 모로하시 데쓰지(諸橋轍次)의 '대한화사전(大漢和辭典)'(1960) ▲한자 5만 자, 40만 단어를
    수록한 대만의 '중문대사전(中文大辭典)'(1962) ▲한자 5만6000자, 37만 단어를 수록한 중국의
    '한어대사전(漢語大詞典)'(1994) 등 현재 동아시아 '3대 한자사전'을 모두 뛰어넘는 규모다.


    중국이 고구려사 연구를 위해 5년간 약 200억위안(약 3조원)을 투입하는 현실에 비춰볼 때, 우리가 단편적인 연구 결과로 중국측의 물량공세를 이겨낼 수는 없다.
    국도 중국에 상응하는 예산을 투입해 문헌학과 고고학과 인류문화학이 통합되는 차원에서 거시적인 관점으로 고대사를
    인식하는 전문가들이 민족사 연구에 앞장서도록 해야 한다. 보다 많은 정보를 축적해야 중국 등의 역사 왜곡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방안을 도출할 수 있다. 물론 이를 위해 우리 국민의 전폭적 지지를 이끌어내야 한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사건을 한민족사에 남겨진 퍼즐의 빈칸을 채우는 기회로 전환하는 지혜가 필요한 때다.

    2008/04/02 [19:05] ⓒ pluskorea

    6
    1
     
     
     
     
    단군조선의 제후국 흉노(곰족.편두.동복.투르크족의 수장)사 [2]
  • 윤복현 younbok**** 윤복현님프로필이미지
    • 번호 2095336 | 08.12.15 10:46
    • 조회 473 주소복사

     

    1. 흉노족,단군조선의 장자국 고구려(백제)에 대한 제후국 흉노족의 반란

     

    중국인들이 지들 나름대로 지역적으로 구분하기위해 사용하여 문헌에 기록한 예맥이니 동호니 흉노니 말갈이니 하는 용어는 별 의미가 없다. 굳이 구분하자면 유목생활을 한 북방 동이족, 그리고 농경생활을 한 남방동이족, 그리고 동이족과 백인들이 피가 섞인 투르크족(터키) 정도가 되겠다.

     

    그리고, 이들 종족은 모계사회인 마고성의 여성 지도자 마고할머니 시대를 계승한 한인의 한국-한웅 배달국-단군 조선의 계보를 잇는 부여와 고구려-대진국-고려-조선-대한민국을 장자국으로 삼는 범동이족으로 볼 수 있다. 고리(부여.고구려)족의 후예 징기즈칸이 유라시아 전역을 통일하여 단군민족의 통합을 이루어냈듯이 21세기 한국연방의 부활이 우리 민족의 사명이라 할 것이다.

     

    [한단고기]기록에 따르면 중국이 '소란한 오랑캐'로 비하한 흉노는 단군3조선 중 번한에 속한 제후국으로 내몽골 초원지역에서 발원한 북방동이족으로 중국과 유럽을 위협하고 지배한 단군조선.부여.고구려의 제후국이다. 또한 중앙아시아 투르크족을 지배한 투르크족의 선우였다.

     

    흉노족의 조상은 아시아 최초 유목민으로 기록된 스키타이족으로 내몽골 초원지역에서 일어나 서진하여 유라시아 초원지역을 지배하고 알타이산의 황금으로 세련된 샤머니즘을 반영한 황금문화를 이룩하였으며, 백인들과 피를 섞여 투르크족을 형성한 것 같다. 그래서 흉노족이였던 신라 김씨왕족들이 중앙 아시아 투르크족과 활발한 교역을 하고 중앙 아시아인들(투르크인들)이 경주에 많이 거주한 배경이기도 하겠다. 땅길수 밖에 없는 피는 못 속이는 법이니까!!

     

    중국을 통일하고 300만에 달하는 인해전술로 단군조선을 계승한 900년의 천자국 고구려에 대적한 수나라와 당나라는 선비족이다. 그런데, 선비족도 북방유목민들로 반이상이 흉노족이다. 그런데, 신라 김씨왕족의 혈통이 흉노족아닌가? 당나라와 협공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공멸시킬 수 밖에 없는 혈통적인 배경이 있는 것이다. 같은 동이계라고 하더라도 고구려.백제의 구성종족상 정통적으로 만주와 한반도를 기반으로 하는 오리지날 동방의 동이족이며, 백민들이 사는 지역이며 천자국이며 대인국다.

     

    흉노족(선비족)인 신라 김씨왕족과 수.당나라가 협공하여 고구려를 공멸시킨 역사적 사건은 단군민족사에서 심판하자면 단군조선의 제후국들이 장자국에 반역을 저지른 패륜적 사건이라 하겠다! 즉, 자식이 천륜을 저버리고 부모를 살해한 패륜적 사건과 동일하다 하겠다.

     

    2.단군조선의 제후국 흉노(곰족.편두.동복.투르크족의 수장)의 역사
     

    흉노족의 국가형태는 연제․호연(呼衍)․수복(須卜)․난(蘭)․구림(丘林) 등의 씨족으로 이루어진 노 부족을 지배층으로 하는 부족 연합체였으며, 선우의 지위는 연제씨족에게 세습되었고, 알씨(閼氏)라고 불린 황후는 원칙적으로 여타의 4씨족에서 나왔다. 국가를 구성하는 여러 부족의 족장은 1년에 세 번, 선우의 본거지에 모여 무속적(巫俗的)인 제천행사를 거행하였고, 동시에 국사를 의론하였다. 유목과 수렵생활로 양․말 등의 가축을 방목하고, 하영지(夏營地)와 동영지(冬營地) 사이를 이동하며 천막식 원형(圓形)가옥에 거주하였다. 또한 P.K.코즐로프 일행이 노인울라(Noinula)에서 발굴한 귀족분묘는 기원 전후의 것인 듯한데 그 곳에서 스키타이-시베리아계의 문물뿐만 아니라, 견직물․칠기․옥기 등의 중국제품, 이란계의 동식물 무늬와 인물상을 수놓은 모직물 등이 출토되어 흉노의 지배층에 대한 중국․서방문화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흉노의 기원과 시조에 대해서 한단고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백과사전]김일제(金日磾, 기원전 134년-기원전 86년)는 한나라흉노족 출신 관료이다. (字)는 옹숙(翁叔)으로, 본래 흉노 휴도왕(休屠王)의 태자였다. 한 무제(漢武帝)로부터 김씨 성을 받았다.
     
    곽거병(霍去病)의 흉노 정벌 때, 한나라에 포로로 끌려와 말 기르는 일을 맡던 중, 무제의 눈에 띄어 마감(馬監)으로 임명되었고, 이어 시중(侍中), 부마도위(附馬都衛),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올랐다. 키가 8척 2촌, 용모는 위엄이 있었다. 무제의 두터운 신임이 있었음에도 신중하여 과실이 없었고, 망하라(莽何羅)의 무제 암살 시도를 막아 그 공으로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이어 투후(秺侯)에 봉해졌다.
     
    흉노족을 배신한 김일제 세력은 이미 한나라의 충성스런 신하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이에 흉노족과 김일지 세력들은 원한관계일 수 밖에 없었으며, 왕망과 손잡고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나라를 개국한 김알지세력은 흉노족을 멸망시키고자 고구려에 원군을 요청하나 고구려는 거부했다.




    흉노 편을 든 고구려, 동족을 몰살시키려던 왕망과 김일제 흉노세력

     

    김수로.김알지.김유신 등 신라.가야의 김씨왕족들은 흉노족 감일제의 후예들로 김일제후손과 친척이던 김왕망세력과 손잡고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나라를 개국하여 동족이던 흉노족을 몰살시키려고 했다.이에 신나라 왕망이 고구려에 원병를 요청하는데, 고구려는 거부한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단군의 후예로써 피를 나눈 동족이기 때문이였다.


    중국 고대문헌에는 청동기문명의 주역은 예맥족이며, 이들이 부여와 고구려의 조상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한웅족과 곰족이 융합한 단군족을 예맥족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고, 부여.고구려의 선조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혈통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부여와 고구려가 단군조선을 계승한 적통국가일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자료]한국사는 북만주 지역에 존속했던 예맥족계(濊貊族系)의 국가로 인정받는 부여(夫餘)에서 동부여가 나오고, 동부여에서 고구려의 지배층이 된 주몽집단(계루부, 桂婁部)이 나왔다고 추정한다. 고구려의 기원과 성립과정에 대한 기록은 문헌마다 약간씩 차이는 있으나, 주몽(동명)의 건국내용(남하 및 정착)에 관해서는 대동 소이하다(‘광개토태왕비’에 추모(鄒牟)로 되어 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흉노와 동이에 속하는 예맥(부여)의 국경이 서로 맞닿아 있는 데도 두 나라가 교전한 기록이 단 한군데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흉노는 유목 생활을 하면서 기후나 식량공급에 문제가 생기면 곧장 약탈에 나섰다고 추정할 수 있는데, 서로 이웃한 종족간에 충돌이 없었다는 점은 다소 이상할 수밖에 없다.

    부여와 흉노처럼 고구려와 흉노의 관계 또한 특별했음을 유추할 수 있는 사건이 있다. 왕망이 중국 전한(前漢) 왕조를 파하고 신(新, 8∼23)을 세운 후 흉노를 정복하겠다며 고구려에 병력을 요청하자 고구려는 이에 응하기는커녕 거꾸로 요하(遼河)를 넘어 신(新)을 공격해 요서태수 전담을 전사시키고 지속적으로 왕망의 영토를 유린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왕망은 흉노의 일족인 휴도왕의 후손으로 중국을 멸망시키고 신(新)을 세웠으므로 흉노도 자신의 세력 밑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흉노는 동·서 흉노로 갈라졌는데, 여기서는 동흉노로 볼 수 있다. 왕망은 동흉노가 그의 지배를 거부하자 흉노의 다른 일파이자 고구려의 별종인 소수맥으로 하여금 동흉노를 공격하도록 명령했는데, 소수맥은 동흉노를 공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왕망을 공격한 것이다.

    한편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흉노 휴도왕의 후손이라는 것이 문무왕의 능비문에도 적혀 있다. 여기에는 김알지가 흉노의 후예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내용이 적혀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고구려와 흉노의 친연성에 관한 연구’(‘백산학보’ 제67호)를 참조하기 바란다.

    남만주 및 시라무렌(Siramuren) 유역에서 목축, 수렵 및 조방경작(粗放耕作)을 하던 선비(鮮卑)는 고구려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민족이다. 선비는 동호가 흉노에게 격파된 후 선비와 오환으로 분리된 다음 북중국을 통일하여 최초의 왕조를 건설한 북방 기마민족이다. 선비가 건립한 왕조는 전연, 후연, 남연, 남량, 북위, 동위, 서위, 북제, 북주 등이며 선비의 문화가 당대까지 존재했던 점 등을 미루어보아 선비가 중국 역사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중국에서는 북방 기마민족이 할거하며 중원을 지배하던 시대를 5호16국(五胡十六國)시대라 부른다. 이러한 선비가 고구려와 특별한 유연 관계가 있는 것이다.

    역사에서 선비와 고구려의 특별한 관계는 여러 차례 발견된다. 우선 고구려 유리왕 11년(기원전 9년)에 고구려가 선비를 격파하고 속국으로 삼은 일이 있다. 또 후한 광무제가 요동태수 채동으로 하여금 고구려가 부용(附庸)세력화하여 지배하고 있던 선비족 일부를 책동, 고구려로부터 이탈하게 한 일도 있다(48년). 이에 고구려는 모본왕 2년(49년) 후한제국이 대흉노 소극정책에 따라 북쪽방어선을 화북 산서선으로 후퇴시킨 것을 틈타 후한 영역 깊숙한 북평 어양 상곡 태원 등지를 공격하는 등 적극적 공세를 펼쳤다. 이에 당황한 후한은 고구려에게 철수의 대가로 상당한 물질적 급부를 제공하는 동시에, 선비족 일부를 책동하여 고구려로부터 이탈하도록 사주한다.

    고구려의 태조 대왕은 더 이상의 선비족 이탈을 막기 위해 동왕 3년(55)에 ‘축요서십성(築遼西十城)’이라는 군사적 대응 조치를 취하였고 동왕 69년(121)에는 선비세력과 합세, 한제국의 요동거점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군사행동 폭을 확대시켰다.

    선비(鮮卑)는 고구려의 부용세력

    부용(附庸)이란 원래 소국(小國) 그 자체를 의미하지만, 동시에 대국(大國)에 복속되어 있는 상황을 나타내기도 한다. 로마제국이 당시 해방 노예가 그들의 옛 주인인 자유민을 보호자(patronus)로 삼는 대신 노역 및 군역에 봉사하는 부용민(clientes) 제도를 제국의 피정복지 통치방식으로 채용했는데, 고구려와 선비의 관계도 이러한 보호-종속관계라는 것이다.

    고구려의 지배집단은 전쟁을 주체적인 생존방식으로 인식하고 군사역량을 제고하는 데 주력하여 전사국가(戰士國家)화했다.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세력에 대한 군사적 팽창정책을 관철시켜 나가면서 내부적인 통합으로 정치사회적 중앙집권화정책을 견지해갔던 것이다.

    고구려는 이런 내외 정비를 통해 후대에 들어서 ‘전제적 군사국가’에서 탈피, 동북아시아 일대에서 독자적 생존권을 확보한 하나의 제국(empire)을 성립한다. 고구려가 선비 등 흉노(흉노가 동서 및 남북으로 나뉘기 전의 흉노를 의미)에서 파생된 유목국들을 자신이 의도하는 작전에 수시로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와 피정복민이 부용 관계였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말갈 선비 거란 지두우(地豆于) 같은 이종족(異種族)에게 그들 본래의 공동체적 질서와 생산양식을 보장해주는 대가로 세금을 받고, 특히 노역과 군역을 확보했다. 이를 공납적 수취관계(貢納的收取關係)에 기반한 속민제도(屬民制度) 또는 이종노예제(異種奴隸制)라고도 한다.

    고구려제국은 복속된 기마민족들을 유효 적절하게 구사하였으므로 새롭게 탄생한 한족의 국가 수·당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수·당이 고구려와 혈투를 벌인 것은 고구려가 중국의 북방에 산재한 흉노의 후예들과 연합하여 자신들을 공격할 경우 치명상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당시 수·당은 고구려와의 전투를 한-흉노간 전투로 인식했다고 볼 수 있다.

    수나라 문제가 30만명을 동원하고도 참패했음에도 그의 아들 양제가 또 다시 고구려 침공에 매달린 것은 고구려가 거란과 말갈족을 지배하고 있는 동북아의 패자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양제가 고구려 침공을 결심하게 된 것은 607년 양제가 돌궐 가한의 막사를 방문했을 때 때마침 고구려 사자와 마주친 후 고구려와 돌궐이 연합하여 수나라를 공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고구려와 부용세력 간의 연합을 방해하는 것이 양제로서는 급선무였다. 마침 고구려의 남하를 경계한 백제와 신라가 원조를 요청하는 등 침공 명분까지 만들어주자 수나라는 고구려에 대해 총력전을 펼친 것이다.

    그러나 수나라는 고구려와 말갈 연합 세력에게 패퇴했고 당 태종의 공격 또한 무위로 돌아갔다. 이후 역사는 당나라가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나 통일신라와의 항쟁에서 패배해 한반도의 주도권을 신라에 넘겨주었음을 보여준다.

    고구려 왕을 흉노의 선우로 인정

    중국인들은 ‘북방 소수민족 세력의 궐기’였던 5호16국이 중국을 통치했다는 사실을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중국인이 아니라고 여기는 북방 기마민족이 중국을 통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 동북방에 위치한 기마민족 고구려는 흉노가 동북아시아를 지배했을 때는 흉노에 속했으나, 점차 독자적인 제국으로 발전해 흉노가 멸망한 후에는 동북아의 패자로 군림했다. 이 같은 사실은 고구려가 5호16국을 건설한 주도 세력인 선비 등을 부용세력화하여 속국으로 취급하면서 북방 기마민족의 맹주 중에서도 맹주 역할을 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중국의 한 사료가 이러한 정황을 확인해주고 있다.

    중국 중원이 오·촉·위 삼각 관계로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을 때 ‘삼국지’의 주역인 오나라 황제 손권은 동천왕 7년(234), 당시 요동반도를 장악하면서 오나라와 고구려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보인 공손연을 협공하자며 사굉(謝宏)과 진순(陳恂)을 고구려에 파견한 일이 있다. 이때 손권은 고구려 동천왕을 흉노의 수장을 의미하는 ‘선우(單于)’라 부르면서 의복과 보물을 함께 보냈다. 이화여자대학교 신형식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상황은 다음과 같다.

    233년 오(吳)의 손권이 사신 진단, 장위, 두덕 등을 공손연에게 보냈다. 그러나 공손연이 이들을 죽이려 하자 진단과 황강 등이 달아나 고구려의 동천왕에게 가서 자기들은 원래 손권의 밀명을 받아 고구려로 오던 중에 풍랑으로 요동해안에 표류해 공손연의 관헌들에게 문서와 방물을 모두 빼앗기고 간신히 살아서 고구려로 들어왔다고 했다. 동천왕은 이들의 간계를 모르고 그들을 오나라로 돌려보내면서 예물을 보냈다. 이에 오의 손권이 234년 사자 사굉, 중서, 진순을 고구려에 보내 동천왕을 선우에 책봉하고 예물을 보낸 것이다(책봉이란 정식 수교(修交)의 외교적 관례로 주종 상하 관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삼국지’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견사자사굉(遣使者謝宏) 중서진순(中書陳恂)
    배궁위선우(拜宮爲單于) 가사의복진보(加賜衣服珍寶)

    그러나 손권의 정략은 실패했다. 동천왕은 236년 오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 위(魏)로 보냈으며 238년 위의 태위 사마선왕이 요동지역의 공손연을 공격할 때 구원병 수천 명을 보내 지원했다. 그러나 동천왕 16년(242), 고구려의 지원으로 요동의 공손연이 멸망했음에도 위가 요동지역 전체를 차지하자 동천왕은 요동 서안평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그러자 246년 위의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했는데 동천왕은 보병과 기병 2만으로 비류수에서 이들을 맞아 격파한다. 그러나 관구검을 격파한 동천왕이 여세를 몰아 개마무사로 무장된 철기병 5000명으로 관구검을 계속 공략했다가 크게 패하여 수도인 환도성이 함락되는 수모를 겪으며 고구려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된다.

    고구려는 변방 소수세력 아니었다

    고구려가 아시아의 동북방에서 세계를 주름잡던 기마민족의 후예라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또 오나라 손권이 동천왕을 선우로 인정했다는 것은 고구려의 위상과 특성을 설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흉노가 중국과 끊임없이 혈투를 벌여 흥망성쇠를 겪는 동안 고구려는 중국과 당당히 맞서 싸우거나 친선 사절을 교환하는 등 평화를 유지하면서 제국의 위상을 지켜나갔다.

    중국의 천자를 자임하는 손권이 고구려 왕을 선우라 칭하며 협력하자고 사신을 보냈다는 것은 고구려의 위상이 흉노의 수장급이란 것을 의미한다. 중국의 손권이 이미 인정하였듯, 고구려는 중국에 종속된 변방 소수세력이 아니었다. 즉 중국이 고구려사를 중국의 변방사로 끼워넣으려는 시도에 원천적인 문제점이 있음을 바로 중국인이 기록한 사료가 제시한 셈이다.
     
    http://k.daum.net/qna/openknowledge/view.html?category_id=KL&qid=2eFBk&q=%C8%E4%B3%EB+%B0%F8%BC%D5%BF%AC&srchid=NKS2eFBk

     

    스키타이-스키타이는 아시아의 유목민으로 BC 8∼BC 7세기에 동방에서 서쪽으로 진출, 볼가강가에 출현하여 원주민 킴메르인을 내쫓고, 남러시아 초원에 강대한 스키타이국가를 건설했다. 그리고 BC 4세기에는 돈강 동쪽에서 온 사르마트인의 공격을 받아, 북카프카스의 쿠반지방을 포기하고 본거지를 서쪽으로 옮겼다. 스키타이의 세력권은 크림반도와 드네프르강·돈강 하류지역 등 흑해 북쪽 기슭 일대를 포함하여, 서쪽으로는 다뉴브강 남부, 동쪽으로는 카프카스지방을 넘어 소아시아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BC 3세기 중엽에는 사르마트의 압박을 받아 세력을 잃었다.

    훈(흉노) 제국-기원전 760년경 이탈리아 중부의 작은 언덕에서 출발하여 거대제국을 건설하고 천여 년에 걸쳐 세계를 지배하며 서구문명의 초석을 마련한 대로마제국, 어느 국가나 어느 기업도 이처럼 강대하면서도 장기간 존속한 조직은 인류역사상 그 전에도 없었고 그 후에도 없었다.
     
    이제 로마제국은 이전의 영토확장 만을 추구하던 공격적인 로마공화국이 아니었다. 사실 수백 년 동안 로마인들이 두려워할 만한 나라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근동지방의 페르시아 제국과 북쪽에 게르만족이 있었으나 군사적인 위협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이른바 태평성대의 시절이고 제국은 영원할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맑은 하늘에 검은 구름이 모이더니 성을 향해 몰려왔다.잠시 후 구름은 비를 뿌리는 대신에 화살을 쏟아냈다. 그 뒤에 흙먼지가 일었고 말발굽소리가 들린 이후에야 보초병들의 고함이 뒤를 따라 왔다. "너희는 도대체 누구냐" "우리는 신의 징벌자로 왔다"  

    작은 키에 떡 벌어진 체구, 큰 머리통, 노랗고 거무튀튀한 피부 그리고 찢어진 눈, 처음 그들을 본 로마사람들은 그들이 괴물인줄 알았다. 그들은 말을 탄 채 밥을 먹었고 그곳에서 용변을 보았으며 거기에서 잠도 잤다. 희한한 등자위에 서서 활을 쏘았으며 한 사람의 기병이 여러 마리의 말을 몰고 달렸다. 신화 속에서나 등장하는 반인반마半人半馬의 괴물조차도 그들만큼 사람과 말이 한 몸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훈족이었다
    . 제사용 청동가마솥인 &039;동복&039;을 말에 싣고 다니는 훈족은 검은 머리에 키가 작고 편두풍습을 가진 몽골리언들이였다. 편두풍습과 동복은 김해.경주지역 김알지.김수로세력의 고분에서도 발굴됨으로써 신라.가야 김씨왕족이 흉노족임을 고고학적으로 증명해 주었다.

     

    훈족의 아틸라


    훈족의 왕, 아틸라 상상도



    로마인들에 의해 묘사된 훈족의 왕, 아틸라는 검은 머리에 키가 작았으며, 왕관을 쓰지 않을 만큼 권위적이지 않고 부하들과 밥을 같이 먹고 동고동락하는 소박하고 검소한 사람이였다. 서구인들 스스로가 기록한 문서 중에는 아틸라를 무척 수수하고 소박하며 인자한 사람이라는 관찰이 많이 있다. 아틸라를 살해하려는 음모자가 발각되었을 때였다. 아틸라는 그를 용서하는 대신에 금자루를 목에 걸고 동로마제국의 황제를 알현하도록 지시하였다. 살해하는 대가로 동로마제국의 황제로부터 금을 받기로 했던 것이다.적국의 왕과 내통하여 자신을 시해하려했던 부하를 살려줄 수 있는 사람이 아틸라였다
     
    아틸라는 로마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만큼 리더쉽과 전략전술이 뛰어 났으며, 아틸라에 참패한 로마는 영토를 훈족에게 이양할 만큼 전쟁에 능했다.
    기동성이 뛰어난 기마민족의 훈족과 무거운 갑옷을 두른 로마군대와의 전쟁에서 당연히 기동성과 로마군단의 조직력을 무너뜨리는 훈족의 다양한 전술은 승리의 원천이였다. 즉, 질서유지를 위한 기본적인 조직시스템을 살리되, 리더들의 군림과 권위를 내세우기위한 지나친 통제와 간섭을 지양하고, 각자의 적극적인 기동성과 자율성을 보장하면 승리한다는 이치가 그것이다.
    이러한 기마술의 기동성은 이후 몽골족에 의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유럽의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고대 북방 유라시아 한국인들(동이족=맥궁)
    1. 스키타이(황금문화) ==> 2.흉노(훈)족 ==> 3.몽골족
    ▶훈족은 곰을 평화의 토템으로 숭배했었습니다!
    유목생활을 하던 북방동이족으로서 훈족은 곰족의 후예임을 알 수 있습니다.
     
    * 훈족은 머리모양을 길쭉하게 만드는 편두풍습을 가지고 있었다.그리스.이집트.인더스.로마 문명의 뿌리가 되는 슈메르 초기 유적지인 아모리 유적지에서 출토된 몽골리언 슈메르인들의 유골형태에서도 증명되었듯이 편두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아메리카 인디언들도 편두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이 편두풍습은 시기적으로 신시 배달국.단군조선.부여의 중심지역이였던 송화강지역에서 시작되었음이 고고학적으로 밝혀졌으며, 중국문헌에서도 조선의 오래된 풍습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편두풍습은 단군조선의 왕족과 귀족들이 두뇌를 좋게 하기위해 태어나자 마자 머리모양을 길게 만들었다. 이러한 두상은 가야인들의 무덤에서 출토된 유골에서도 증명되었다.

     



    신라 김씨왕족의 조상들인 소호금천씨의 뿌리를 찾아서 

    일제 식민사관과 중국 동북공정론자들이 자신들에게 불리하기때문에 정사로 인정하지 않는 한단고기는 우리 민족사와 인류사에 대해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고고학적으로 증명해 버리면 끝나는 문제다. 한단고기에 신라 김씨왕족의 조상들인 흉노족의 기원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본래 황금문화가 특징인 흉노족은 아시아 초원지역에서 발원한 스키타이족의 후손들이나, 서진하여 그리스까지 공략한 유라시아 초원의 최초 유목민족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스키타이족의 조상들의 땅인 초원지역인 내몽골 지역에 살고 있는데, 중국 한족들은 "소란스런 오랑캐"로 비하하는 의미로 &039;흉노&039;로 부른 것 같다. 그러니까 흉노라고 부르는 우리 스스로가 중국 한족들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흉노족 스스로 자신들을 무엇이라 불렀는지가 중요하다. 흉노족 스스로 자신들을 부른 이름을 불러 주어야 흉노족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다. 아무튼 이 스키타이 원족에 해당하는 흉노족이 사는 내몽골 약수에 단군조선의 신하였던 색정이 유배가서 결국 족장이 된 모양이다.그래서 한단고기에서는 색정을 흉노의 시조로 기록하고 있다. 마치 4대 단군 오사구의 동생 오사달이, 훗날 몽골제국의 푸른늑대를 상징하는 몽고리(몽골)의 족장이 된 것 처럼 말이다. 

    따라서 신라.가야의 김수로.김알지.김유신 등 흉노족 김알제 후손들은 혈통자체가 스키타이족이 아니라, 고대 만주에서 산동지역으로 이동하여 대문구 문명으로 중원문화를 꽃피운 소호금천씨의 후손들인데, 이들 소호금천씨족의 일부가 중국 북부지역으로 이동정착하여 스키타이족들과 피를 섞여 결국 흉노족이 된 것 같다. 김유신 비문을 보면 김유신은 소호금천씨 후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점이 이를 증명하고, 중국 산해경에 [소호금천씨의 나라는 동해밖에 있다]고 했으니 동해밖이면 중국방향기준이니 서해밖으로써 한반도를 의미한다. 한반도를 고대한자사전에는 한반도.한국.동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반도(중남부 지역) 땅이 군자불사지국.동방예의지국이라고도 기록하고 있다.
     
    고로 소호금천씨는 한반도 사람들인데, 만주를 걸쳐 중국 산동지역으로 건너갔다는 의미가 된다.  

    결국 따지고 보면 중국 한족이 흉노라고 부른 종족도 유목생활을 하던 우리 북방 동이족이다. 흉노족도 단군조선의 풍습과 동일했다. 내몽골지역이면 단군3조선 중 번한에 속한다 하겠다. 한단고기에도 흉노족이 번한의 제후국이 되겠다고 공물을 바친 기록이 있다.
     
    중요한 역사적 사실은 유목생활을 하고 알타이산의 풍부한 황금을 이용하여 뛰어난 황금문화를 이루었던 스키타이(흉노=훈)족은 유라시아 초원지역을 지배했던 최초의 북방 동이족이며, 그 후손들인 흉노(훈족)또한 중국은 물론이고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단군조선-부여를 계승한 고구려에 대해서는 함부로 하지 못하고 단군조선을 계승한 적통국가임을 인정해 주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오나라 손권이 고구려왕에 보낸 편지에 고구려를 "흉노의 선우"라고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중요한 건 한반도-만주-일본-중국-유라시아 흩어져 있는 단군민족을 한국연방으로 대통합시키는 일이다. 따라서 지역과 민족을 분열시키고 미국의 개가 되어 동족을 대적하는 반민족 친일숭미 반민족 진보개혁세력들은 일거에 반드시 청산해야할 한민족 통합의 걸림돌들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윤복현)

     

    신라 김씨왕족과 선비족 당나라와의 혈통적인 친연성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당나라는 선비족이 세운 나라다. 흉노족인 신라 김씨왕족이 선비족인 당나라와 함께 만주와 한반도의 토착민들로서 동이족의 본류라고 할 수 있는 고구려.백제를 공멸시키고, 경주왕릉에 세워진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인들의 석상들이 세워진 친연성을 혈통적으로 알 수 있는 배경에는 신라 김씨왕족이 혈통적으로 고구려.백제인들보다는 흉노족이라고 할 수 있는 선비족에 훨씬 더 친연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선비족은 사실상 반은 흉노족이였다. 위진 남북조 시대의 선비족의 나라인 북위를 가르킴, 후한서에서는 기원 후 85~91년 사이, 鮮卑는 後漢조정의  부탁을 받고 南흉노, 丁零(정령:시베리아 예니세이강 유역에  살던 유목민족 국가)과 함께 北흉노 토벌에 나서  北흉노를 패퇴시켰다. 이때 10여만 落(락:한 가구를 뜻함)의 北흉노인들이 선비족으로 귀속됐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10여만 落이라면 매 落마다 5인 정도로 계산해도 50~60만명에 이르는 막대한 인구다. 이 인구는 당시 선비족의 인구보다 10만정도 많은 인구다. 즉 선비족의 반은 흉노족이었다는 결론이다.

     

    김왕망과 함께 전한을 무너뜨리고 개국한 신나라가 10년후 멸망하자 한나라의 멸족이 두려워 산동을 걸쳐 해양루트를 따라 한반도 남부 김해.경주지역으로 들어온 흉노족 김일제 후손들(가야.신라 왕족)은 만주와 한반도의 토착민들(동이족)로 구성된 고구려.백제인들의 무덤양식(고구려.백제:한반도 남방식 고인돌양식의 적석총/신라 김씨왕족:유라시아 유목민의 적석목곽분)이나 문화자체(신라는 고조선의 옛 부족 중의 하나인 흉노의 갈래이다. 신라 김씨왕족은 초기에는 스키타이 황금문화이고, 같은 혈족인 고구려.백제,일본은 부여계 어족이며 부여계 문화다)가 차이가 난다.  
     
    일례로 신라의 금관은 백제의 그것과 약간 다르다. 나갈 출자 문양을 쓰고 있는데 이것은 흉노의 스키타이 문명의 상징이다. 사슴뿔 문양인 것이다.신라 김씨왕족의 무덤인 황남대총의 유물들이 증명하듯 상이하게 중앙 아시아적인 요소가 강하였으며, 신라 김씨왕족의 경우 중앙 아시아 투르크인들과 활발한 교역을 하였다. 그러한 고고학적 증거자료는 경주 김씨왕족의 무덤들에서 출토된 유물들과 투르크인들의 석상들이 증명한다.

     




     

    사진자료처럼 투르크인들은 대부분 검은 머리를 가지고 있으나, 흰색깔의 얼굴색과 얼굴모양은 백인형태를 뛴다, 즉 황인종과 백인종의 혼혈족이다. 이들 투르크족들을 지배한 종족이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였던 흉노족이다.

     

    [자료]단군조선의 제후국 흉노에 종속된 투르크족
     
    백인종과 황인종의 혼혈족인 투르크인들은 현재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서아시아, 유럽 일부에 살며 터키어를 주요 언어로 하는 민족이다. 기원은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초원지대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민족으로 생각된다.
     
    기원전 3세기경 중국의 사서에는, 바이칼호 남쪽에 있으며 흉노에 종속된 집단으로서 ‘정령’으로 기술되어있다.
    그후 ‘철륵’, ‘칙륵’ 등의 한자음을 단 집단의 존재가 나타난다. 6세기 경에는 돌궐족이 알타이산맥을 중심으로 북아시아,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에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내분으로 인해 동서로 분열된 후 몽고고원의 셀렌가강 부근에서 터키계 위구르족이 대두하면서 멸망의 길을 걷는다.

     9세기에는 위구르족도 북방에서 남하한 키르기스족에 의해 붕괴되고 중앙아시아로 이동하여 오아시스지대에서 정주생활을 한다. 위구르의 서방 이동에 따라 그 때까지도 서서히 진행되어오던 중앙아시아의 투르크화가 결정적인 것으로 되었으며, 그 결과 중앙아시아는 투르키스탄(투르크인의 땅이라는 뜻)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와 거의 동시에 중앙아시아에는 상인에 의해 이슬람교가 전해져 많은 터키인들이 받아들이게 되었고 투르키스탄의 이슬람화도 진행되었다. 오늘날 중국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가 된 동투르키스탄의 주요 주민들은 후후 카라 키타이, 몽골의 지배를 거친 위구르인이다.  

     중앙아시아의 벨라사군을 중심으로한 지역에는 투르크족 최초의 이슬람 왕조인 카라한왕조(840~1212)가 성립했다. 이로써 중앙아시아의 터키화와 이슬람화는 더욱 결정적인 것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0세기 말부터 11세기까지 투르크인이 대규모로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부터 서쪽으로 이동한 것은 이슬람세계의 역사뿐 아니라 세계사의 흐름 전체를 바꾸어 놓았다. 중앙아시아는 ‘투르크인의 땅’이라는 뜻으로 투르키스탄이라고 불리고 있었는데 투르크인은 그 활동의 장을 더더욱 서쪽으로 넓혀나갔다.  

     서방에 이주한 투르크인 가운데 가장 강력했던 것은 셀주크라는 수장에 의해 인솔되었던 일족이었다. 1055년 셀주크의 손자 투그릴이 대군을 이끌고 바그다드에 쳐들어와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를 지배했다. 그는 오랜 역사를 가진 땅과 주민을 지배하기 위해서 칼리프의 권위를 빌어 칼리프로부터 ‘술탄’이라는 칭호를 받아 이슬람세계의 지배자가 되었다. 술탄이란 ‘권위를 지닌 자’라는 뜻으로 이후 투르크의 군주는 이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란, 이라크를 중심으로 하는 서아시아일대에 셀주크투르크제국이 성립되었다. 압바스왕조 칼리프는 술탄의 보호 아래 바그다드와 그 주변의 얼마 안되는 지역만을 지배하게 되었다.  

     아나톨리아에는 1071년 만지케르트전투에서 비잔틴군이 패배한 결과 중앙아시아로부터 많은 투르크계민족이 이주를 개시했다. 또 비잔틴군의 용병으로 참가한, 북쪽에서 흑해를 돌아온 것으로 추측되는 투르크인도 정주생활에 들어감으로써 피폐했던 아나톨리아는 급속히 투르크화되었다.  

     몽고의 서방원정으로 셀주크왕조가 쇠퇴하자 투르크인들의 지방세력은 자립하여 각지에 군주국을 세웠다. 그 가운데 가장 서쪽에 위치하여 비잔틴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던 오스만왕조가 기독교국가인 비잔틴제국으로의 영토확장 가능성을 이용하여 발칸반도로 영토를 확대하는데 성공했다. 이 힘을 배경으로 아나톨리아의 투르크 군주국을 병합한 오스만투르크는 한때 티무르에게 패배하여 단절되기도 했지만 다시 부흥하였고, 결국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비잔틴제국을 멸망시켰다.(1453)  이어 오스만투르크는 마물루크왕조를 멸망시키고 시리아와 이집트를 정복했으며, 칼리프의 지위까지 손에 넣고(술탄-칼리프제의 성립) 아시아․아프리카․유럽 세 대륙에 걸친 대제국을 완성하였다.  

     그후 이슬람세계는 16세기에 들어 이란 지방의 시아파 사파비조(1501~1732)와, 티무르의 후손 바부르가 인도에 건국한 무굴제국(1526~1856), 이스탄불의 오스만제국(1281~1924)으로 크게 3분되었다.

     슐레이만 1세(재위 1520~66) 치하에 극성기에 달한 오스만제국은 아시아․아프리카․유럽 3대륙에 걸친 영토를 확보했으며, 그 군대는 한때 빈까지 육박하였다. (1529) 또한 국내에서는 군사적 봉건제에 입각한 국가체제를 확립하고, 법류. 학예. 공예 등 각 분야에 걸쳐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으나, 17세기 이후로는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출처
    http://cafe.daum.net/minhamsa/8683/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