慰禮城 地名由來

고구려ㆍ백제ㆍ신라 언어연구

吾心竹--오심죽-- 2009. 11. 3. 16:38

고구려ㆍ백제ㆍ신라 언어연구


 



Ⅰ. 고구려말이 신라말과 다른 언어였다고 하는데 대하여, 다시 말하여 세 나라 시기 고구려, 백제, 신라의 언어관계 문제에 대하여


1. 세 나라 말이 단일하였다고 보는 것은 <선입견>인가


● 삼국시대 언어에 대하여 남한 이기문 학자의 견해:

-현대 또는 중세 조선어가 단일어어라는 데로부터 고대 삼국의 언어도 단일했으리라고 보는 것은 하나의 선입견, 편견, 선험적 전제다.

-고구려어는 신라어와 다른 언어였다고 보아야 한다.

-비록 다른 언어였기는 하지만 고구려어는 신라어와 상당히 가까운, 친족관계에 있었다.

-우리 나라에 있어서의 언어는 단일성은 통일 신라이후에 성취되기 시작하였다.


반론: 고구려와 신라 말이 달랐다면 고구려 신라 사람들이 서로 다른 민족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민족이 같은 언어를 사용할 수는 있으나 같은 민족이 다른 언어를 사용할 수는 없기 때문.


2. 고대 역사서적들의 증언


● 이기문 교수가 다루고 있는 서적: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조선반도와 만주에 숙신계, 부여계, 韓계 삼대 어군이 있었다. 숙신계 제어(읍루, 물길, 말갈, 여진)에는 남아 있는 자료가 없다. 부여계 제어는 부여어, 옥저어, 예어도 소멸되었고 한계 제어는 진한, 마한, 변한의 언어 등이 있었다. 핵심은 부여계 제어와 한계 제어와의 관계가 밝혀져야 하는데 중국측 역사서와 『삼국사기』에는 언급이 없다. 따라서 구체적인 언어자료로 통해서만 추론할 수밖에 없다.


반론: 周書 異域傳 백제조에 <王姓夫余氏 號於羅瑕 民呼爲鞬吉支 夏言竝王也 妻號於陸 夏言妃也>-지배족의 언어는 왕을 ‘於羅瑕’, 왕비를 ‘於陸’이라 했는데 피지배족들의 언어로는 왕을 ‘鞬吉支’라고 했다. 이 기록에 따라 고구려, 백제, 신라의 언어는 대체로 같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남한의 이숭녕 교수는 삼국이 가까운 언어라고 하고 강길운 교수는 백제어는 지배층인 몽골계 고구려족의 언어와 피지배층인 토이기계의 한족의 언어와 이원적인 언어사회를 형성하였다고 함. 그러나 한 사회안에서 상류지배층이 일반 국민과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일이 없지는 않으나 그것은 단순히 어휘면에서 그것도 전체 어휘에서 1%도 안 되는 특수어휘에서만 차이가 날뿐이고 절대다수의 어휘, 그리고 음운체계와 문법구조에서는 일반 국민의 언어와 차이가 없는 것이 원칙이다.

조선 시대에도 궁중용서로 쓰인 ‘마마’, ‘수라’, ‘매화틀’, ‘안수’, ‘이부’ 등의 단어들도 바로 계급적 방언의 한 실례다. 이 계급적 방언과 통용어를 자립적인 언어로 간주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첫째, 계급적 방언과 통용어는 그 자체의 문법구조와 기본어휘를 가지지 않고 그것을 민족어로부터 빌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그것들은 어떤 한 계급의 상층부라는 좁은 유통범위를 가졌을 뿐 사람들의 교제수단으로서 사회전체에 사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於羅瑕’가 고구려어라는 증거가 없다. 궁중어로서 다른 나라의 궁중용어를 빌려 쓴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 고대역사 서적의 기록들 사이의 내용상 차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

『삼국지』-고구려: 동방 사람들의 옛 이야기로서 부여의 곁갈래라고 한다. 언어와 기타의                      일이 많이 부여와 같다.(東夷舊語以爲夫餘別種 言語諸事多與夫餘同)

            동옥저: 그 언어는 고구려와 대부분 같으나 가끔 조금씩 틀린다.(其言語與高句                      麗同, 時時小異)

            濊: 그 늙은이들이 자기네끼리 말하기를 고구려와 같은 갈래라고 한다. 언어,                   예법 등 풍속이 대체로 고구려와 같다.(其耆老自謂與高句麗同種, 言語法俗                   大抵與高句麗同)

『삼국지』- 변진은 진한과 섞여 살고 있으면 또한 성곽이 있다. 의복과 거처는 진한과 같               고 언어와 풍속은 서로 비슷하다.(弁辰與辰韓雜居, 亦有城郭, 衣服居處與辰韓               同, 言語法俗相似)

『후한서』- 변진은 진한과 섞여 살고 있으며 성곽과 의복은 모두 같고 언어와 풍속은 다               르다.(弁辰與辰韓雜居, 城郭衣服皆同 言語風俗有異)


『삼국지』와 『후한서』가 거의 동일한 문장구조와 내용으로 서술되고 마지막 한 마디에서만 차이가 있는 만큼 그 중 어느 하나는 기록상 착오일 수 있다. 또한 『후한서』가 다른 점이 있다고 한 것은 그 나라들이 다 같이 삼한에 속하여 언어상 같은 점이 있으면서 방언적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의 말이 같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3. 어휘자료의 실태


●『삼국사기』지리지에 실려 있는 고구려 지명- 고구려시기 고유한 우리말식 지명(買忽, 斤戶波兮), 그에 대한 한자 번역식 지명(水城, 文蜆),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한문식으로 고친 지명(水城, 文登), 그리고 『삼국사기』 편찬당시인 고려시기의 지명(水州, 文登)등이 함께 기록되어 있음. (교과서28면 고구려말의 단어표.)

이기문 교수 입장: 비록 한 언어의 어휘로서 매우 빈약한 것이기는 하나 고구려어, 부여계 제어가 어떤 언어였음을 추정케 하는 소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고구려어가 신라어 또는 중세국어와 동일한 언어가 아니었음을 실증하여 준다.


⇒반론: 언어학의 일반원리는 언어비교에서 언어의 문법구조와 어음체계, 어휘구성의 측면을 아울러 고려해야 하는 것인데 단어 몇 십 개의 비교만으로 언어의 동일성 여부를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언어학자로서 자질 미달임. 또한 고구려 어휘자료가 전부 이두식 한자로 표기되어 있어 그것을 정확히 해독하는 문제가 단순하지 않는데 자기 식으로 해독한 한자지명의 대비만을 가지고 언어의 동일성 여부를 말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


고구려 어휘에 대한 자료가 고구려 남계(한산주, 牛首州, 何瑟羅州)지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구려어 자료로서는 옛 고구려 북계에 있는 압록강 이북의 옛 고구려 지명이 있으니 이는 고구려 멸망 직후의 것으로 년대가 확실한 최고의 지명군이다. 이 북계지명 남계지명을 비교하여 얻은 결과와 기타 역사적 사실로 미루어 보아 고구려어는 신라, 백제와 언어차가 별로 없는 언어를 공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1)


● 고구려 말 가운데 <波衣(巖)바희>, <首(牛)쇼>, <功木(熊)곰>, <斤戶(文)글>, <忽(谷,洞)골>, <加戶(犁)가래>, <今勿(黑)검->, <沙熱伊(淸, 凉)서늘->, <冬非(圓)등글->, <伐力(綠)푸르->, <首(新)새>, <於斯(橫)엇>등의 기초어휘가 중세국어와 일치한다는 것은 고구려말과 신라말이 동일한 언어였다는 증거가 됨. 어휘상 차이가 있는 것들이 있으나 그것은 처음부터 어휘가 달랐을 수도 있고 역사적 과정에서 다른 어휘로 바뀌었을 수도 있고, 아직 옳게 해독하지 못한 까닭도 있을 것이다. 단지 어휘상에 다소의 차이가 있다고 하여 두 언어가 다르다고 속단할 수 없는 것은 방언을 살펴봐도 알 수 있다. 방언을 보면 일부 모음이나 자음, 일부 접두사나 접미사다 다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어근부터 다른 어휘들이 많다(교과서38~39면 참조).


         한글

국명

고구려

 

 

 

백제

 

 

 

 

신라

那奈

 

 

이숭녕 교수가 위 표를 예를 들면서 ‘삼국어의 어음조직의 차이가 형태적인 차이를 상징함이 아닌가 한다.’고 하는데, → 이는 한자로 표기된 까닭에 고유어 자체가 아니라는 점, 역사서적 편찬 시에 한자표기법을 정리하였을 수도 있다는 사정 등으로 제약성을 많이 가진다고 봐야함.


북한의 류열교수는 그의 저서 『세나라 시기의 리두에 대한 연구-사람, 벼슬, 고장 이름의 표기를 통하여-』(평양, 1983)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인명, 관직명, 지명들에 쓰인 이두식 표기자료 800여 개를 해독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그 결과 고구려의 것 약 150개, 백제의 것 약 100개, 신라의 것 약 150개의 어휘자료를 얻어내고 있다. (교과서 45~54면 참조)


이 자료에 의하면 세 나라의 인명, 관직명, 지명들에 쓰인 어휘들은 세 나라 말의 단일어적 공통성을 잘 보여준다. 세 나라의 이두식 표기자료에는 세 나라 말 사이의 공통성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예들이 있는 반면 두 나라 말 사이에서의 공통성만을 보여주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명사 ‘구슬’의 옛 말에 해당하는 예가 고구려와 백제의 자료에는 각각 ‘古斯’와 ‘丘斯’로 되어 있으나 신라의 자료에는 그러한 예가 없으며 동사 ‘누르다’의 옛 말에 해당하는 예가 고구려와 신라의 자료에는 다 같이 ‘押’으로 되어 있으나 백제 자료에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결코 두 나라 자료에 나타나는 단어들만이 공통적이었고 그것이 보이지 않는 다른 한 나라에서는 그 어떤 다른 언어가 따로 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자료의 이두식 표기가 인명, 관직명, 지명의 일부를 반영한 것이고 그것이 원래부터 세 나라 어휘의 동일성 여부를 대비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자료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세 나라의 공통된 단어가 더 많다.


 

어휘총수

세나라 공통

            두 나라 공통

   모두(%)

        1

         2

고구려

약 150

약 30

약 20(고구려, 백제)

약 40(고구려, 신라)

약 90(60%)

백제

약 100

약 30

약 20(고구려, 백제)

약 10(백제, 신라)

약 60(60%)

신라

약 150

약 30

약 10(백제, 신라)

약 40(고구려, 신라)

약 80(53%)


‘아들’을 의미하고 ‘阿旦:子’로 표기되었던 단어가 고구려의 자료에만 보이고 백제와 신라의 자료에는 보이지 않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 단어가 백제와 신라에서는 쓰이지 않고 다른 단어가 쓰였다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은 중세국어를 거쳐 현대국어에도 ‘아들’의 형태로 그 말이 훌륭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보다 방언적 차이가 더 심했으리라 짐작된다.


● 삼국의 언어차를 지명의 접미사를 들어 설명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도 큰 차이가 없다.

* ~ 忽型(고구려어계)

買忽, 召尸忽, 내혜홀, 소복홀, 마홀, 마가홀, 잉홀, 복홀, 동비홀, 내미홀, 동음홀, 등

* ~夫里型(백제어계)

所夫里, 古良夫里, 古沙夫里, 夫夫里, 未冬夫里, 毛良夫里, 半奈夫里, 波夫里 등

* ~ 火型(신라어계)

音里火, 仇火, 柒圓火, 阿火, 居知火, 推火, 西火, 比自火, 推良火, 舌火, 奴斯火, 于火 등


이 예들은 통계상 차이일 뿐이지 확연하게 서로 구분되는 징표라고 하기는 어렵다.

지명의 접미사를 검토하는 것은 고대 국가일수록 그 지명을 나타내는 데 지형의 특색이나 촌락을 이룬 내력, 설화 등을 바탕으로 한 접미사를 붙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행정제도가 미비한 곳일수록 이런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는데 접미사의 유형이나 조어법상의 동질성 등으로 동일언어권 여부를 가리는데 도움이 된다.2)


이리하여 여러 학자들에 의하여 재구된 세 나라 시기의 어휘자료는 그 당시 세 나라 말이 동일한 언어였다는 것을 뚜렷이 증명하여 주면서 동시에 그 사이에 일정한 방언적 차이는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김수경, <<고구려.백제.신라 언어연구>>, 한국문화사,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