慰禮城 地名由來

경기도 화성시 역사문화

吾心竹--오심죽-- 2009. 12. 23. 12:52

선사시대~고려시대 조선시대 조선말기/일제강점기/현대

제1절 선사시대~고려시대
현 행정구역상 화성시 지역은 조선시대 말까지 행정적으로 분리되어 있던 수원부(군)와 남양부(군) 지역이 일제 강점 초기인 1914년 4월 1일의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통합되었던 수원군에 포함되는 지역이다. 지난날의 ‘수원군"은 흔히 일반적으로 지칭되는 ‘수원지방"이란 개념과 일치되는 것으로서 현재의 행정구역상 수원시ㆍ오산시ㆍ화성시 전역과 평택시ㆍ안산시ㆍ의왕시ㆍ군포시 일부가 포함되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일찍이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고, 신석기시대를 경유하여 청동기시대 내지 초기 철기시대에는 마한(馬韓) 54국에 속하는 몇 개의 소국(小國)들이 터잡아왔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과 『후한서』 동이전 한(韓) 조에 전하는 마한 54국 가운데 수원지방과 관련 있는 소국은 원양국(爰襄國)ㆍ상외국(桑外國)ㆍ모수국(牟水國) 등이다. 이병도(李丙燾)의 『한국고대사연구』에 의하면 원양국은 현 화성군 남양면과 비봉면 지역, 모수국은 현 수원시 지역, 상외국은 현 화성시 우정면ㆍ장안면 일대의 지역으로 비정한 바 있다. 또한 옛 수원군 안룡면 고색리(古索里, 현 수원시 고색동)에서 발견된 고대시기의 대형 고분(古墳)은 이곳의 전래 지명과 관련되어 이곳이 삼한시대의 석색국(石索國)일 가능성도 유추해볼 수 있게 한다.
삼국시대의 이 고장은 백제ㆍ고구려ㆍ신라의 순으로 고대국가의 영역이 되었으나 백제 영역하의 지명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삼국사기』 「지리지」에 옛 수원군 지명은 고구려 지배하의 매홀(買忽) 또는 매홀군(買忽郡 : 郡이 아닌 城이 맞을 듯하다)이었음이 처음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서 ‘매홀(買忽)"은 고구려식 지명으로 ‘물골ㆍ수곡(水谷)"의 의미를 갖는 명칭이다. 그 뒤 통일신라시대인 757년(경덕왕(景德王) 16)에 이르러 수성군(水城郡)으로 개칭, 비로소 군현제(郡縣制)가 처음 실시된 이후의 한자식 지명을 갖게 되었다. 한편 옛 남양군 지역은 고구려 지배기에 당성(唐城) 또는 당성군(唐城郡 : 이 또한 郡이 아닌 城이 맞을 듯하다)이었는데, 통일신라시대의 군현제 시행과 더불어 경덕왕 때 당은군(唐恩郡)으로 개명되었다. 이 당은군은 차성현(車城縣, 고구려 때 상홀현(上忽縣)을 경덕왕 때 차성으로 개명, 뒤의 龍城縣)과 진위현(振威縣, 고구려 때 부산현(釜山縣)을 경덕왕 때 진위로 개명)의 두 영현(領縣)을 거느렸다.
고려사. 지리지의 수원부분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940년(태조 23) 수성군은 수주(水州)로 승격되었으며, 지방행정구역이 승격된 데에는 김칠(金七)ㆍ최승규(崔承珪) 등 이 고장 호족세력이 2백여 명의 무리를 끌고 귀부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983년(성종 2) 12목이 설치될 때 처음으로 외관이 파견되었고 양주(楊洲)가 목(牧)으로 승격되면서 수주도 그 관할하에 들어갔다. 991년(성종 10) 수주는 한남(漢南)ㆍ수성(隋城) 등 별호로 불려졌고, 995년(성종 14) 지방제도의 대개편 때 관내도(關內道)에 배속되고, 최초의 외관인 도단련사(都團練使)가 파견되었다.
그 뒤 1018년(현종 9) 지방관제의 정비를 통해 지방관이 부임하는 지수주사(知水州事)로 됨과 동시에 안산현(安山縣)ㆍ영신현(永新縣)ㆍ쌍부현(雙阜縣)ㆍ용성현(龍城縣)ㆍ정송현(貞松縣)ㆍ진위현(振威縣)ㆍ양성현(陽城縣) 등 7개의 속현을 거느렸다. 1067년(문종 29) 양주가 남경유수관(南京留守官)으로 승격되면서 남경 관할 하에 영군으로 속했으나 다른 주와는 달리 지수주사가 설치되어 계속해서 앞의 7개의 속현을 거느렸다.1018년(현종 9) 경기제(京畿制)가 성립된 후 1069년(문종 23) 경기가 52개 주현으로 크게 확장될 때 양광도에 소속된 수주는 일시 경기에 속했으나 1106년(예종 1) 양광충청주도(楊廣忠淸州道)에 내속되고 1171년(명종 1) 다시 양광주도(楊廣州道)에 속하게 되었다.
대몽항쟁기인 1271년(원종 12)에는 착량(窄梁)을 지키고 있던 몽고군이 대부도(大阜島)에 들어와 주민들을 약탈하자 섬사람들이 격분하여 몽고병을 죽이고 난을 일으켰다. 이 때 부사(副使) 안열(安悅)이 군사를 거느리고 난을 평정한 공로로 수주를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로 승격시켰다. 그 뒤에 또 수주목(水州牧)으로 승격되었으나 1310년(충선왕 2) 전국의 목(牧)이 폐지됨에 따라 수주목은 수원부로 강등되고 양광도(楊廣道)에 내속되었다. 그 후 1362년(공민왕 11)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그 선봉을 보내어 양광도 주ㆍ군에 항복을 권유하자 수원부가 가장 먼저 적군을 맞아들여 항복했다는 이유로 군(郡)으로 강등되었다. 그러나 수원군 사람들이 재상 김용(金鏞)에게 뇌물을 주어 다시 부(府)가 되었다.
경기도가 도(道)로서 확립된 것은 고려 말 1390년(공양왕 2)에 이르러서였다. 경기를 좌ㆍ우도로 나누었는데, 이때 양광도에 속해 있던 남양부는 경기좌도에 새로 편입되었고, 수원부는 1309년(충선왕 1) 이래 양광도에 그대로 내속해서 존속되고 있었다. 한편 남양부(군) 지역은 940년(고려 태조 23)에 당성군(唐城郡)으로 변경되어, 1018년(현종 9) 수주의 속군이 되었다가 후에 인주(仁州)의 속군으로 이속되었으며, 1172년(명종 2)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1290년(충렬왕 16) 고을 사람 홍다구(洪茶丘)가 정동행성우승(征東行省右丞)이 되었으므로 지익주사(知益州事)로 승격되었다가 다시 강녕도호부(江寧都護府)ㆍ익주목(益州牧)으로 승격을 거듭하였다. 그 후 1310년(충선왕 2) 전국의 모든 목을 혁파할 때 다시 남양부로 읍호가 강등되었다.

 

물에서 비롯된 이름
牟→買→梅 (水)
삼국사기 지리지에 보이는 매홀군이라는 지명 앞서 매화리(梅花里)나 수화리(水花里)란 이름이 이 지역의 지명유래 및 어원을 푸는 열쇠가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매화는 말 그대로 꽃나무 이름인 매화(梅花)가 아니라 ‘물"〔水〕과 ‘고지"〔串〕를 뜻하는 말임을 지적하였다. 서해안으로 삐죽이 그 머리를 내민 이 지역의 지형상의 특징을 잘 반영한 이름이라 할 수 있다. 먼저 매화의 ‘매"에 관해서 그 쓰임을 알아보기로 한다.

매화라고 할 때의 ‘매(梅)"란 표기는 고구려 때의 이름 매골의 ‘매(買)"와 함께 그 이전 삼한의 모수국의 ‘모(牟)"로 소급되는 것으로 이들은 모두 동일어의 다른 표기라 할 수 있다. 아득한 옛날 마한(馬韓)에 모수국(牟水國)이 있었다고 사서(史書)는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모수국이 지금의 어디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만약 고구려의 매골〔買忽〕이 우리가 추정하는 대로 이 모수국의 계승이라면 그 곳은 아마 화성시에서도 바다에 연한 남양면이나 송산면, 또는 서신면이나 매송면 그 어디가 될 것이라 생각된다.
모수국(牟水國)에 대한 당시의 호칭도 자세히는 알 수가 없다. 혹자는 이를 ‘벌믈" 또는 ‘물벌", ‘물골"의 발음으로추정하기도 하나 그러나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 다만 모수(牟水)에 접미한 국(國)만은 오늘날의 국가 개념으로서의 ‘나라"가 아니라 단순히 ‘온누리"라고 할 때의 ‘누리"〔世〕와 같은 말이라고 짐작된다.
‘모(牟)"의 한자음은 ‘모"이지만 속음(俗音)으로는 ‘무"로도 읽힌다(정확한 고대 한자음은 mou/mau/mu). 자전(字典)에 의하면 모(牟)는 ‘클ㆍ모", 또는 ‘땅이름ㆍ모"로 적고 있으나 차자표기법에서는 훈(訓)이 아닌 음(音)으로 읽히는 차자이다. 모(牟)가 차음으로 쓰인 또 다른 용례를 보면 모지현(牟支縣), 모산정(牟山亭)과 같은 신라 지명과 모대왕(牟大王), 모도(牟都), 모태(牟太) 등과 같은 백제 인명을 들 수 있다. 지금의 고창의 삼국시대 이름이 모량부리(毛良夫里)였는데 이는 삼한시대의 모로비리(牟盧卑離)의 계승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모로(牟盧)와 모량(毛良)이 같은 어형의 다른 표기〔동일어 이양표기(同一語 異樣表記)〕로서 모(牟)나 모(毛)는 다같이 ‘모/무"의 차음자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모" 혹은 ‘무"가 지금의 물〔水〕이란 말의 어형과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 물의 중세어는 ‘믈"로서 이 믈이 어두에 놓여 다른 말을 수식할 때는 받침 ‘ㄹ"이 떨어져나가 ‘무/모", 혹은 ‘미"로 쓰일 경우가 있다. 무자이〔水尺〕, 무자위〔小車〕, 무삼〔水蔘〕, 무소〔水牛〕, 무살미(‘물꼬"의 옛말), 무삶이, 무넘이/ 무너미/ 무네미, 무솔, 무좀 따위의 ‘무-"와, 미나리〔芹葉, 물+나리〕, 미장이〔泥水匠〕 등에서 보는 ‘미-"가 바로 그런 예이다. 따라서 모수(牟水)의 모(牟)는 ‘ㄹ"이 탈락한 ‘모" 또는 ‘무"의 차음표기로서 제 2음절에 붙은 수(水)는 이를 재확인하는 표기라 여겨진다. 결론적으로 말하여 모수국(牟水國)은 물로 둘러싸인 고장, 즉 물이 많은 ‘물나라", ‘물누리" 정도로 불리었다고 볼 수 있다.
모수국(牟水國)의 모(牟)가 중국 측의 표기라면 매홀군(買忽郡)의 매(買)는 우리 측의 표기라 할 수 있다. 매(買)의 중국 한자음 (7C 초 中古音)은 ‘마이"(mai)이며, 우리나라의 전통 한자음은 ‘"라고 추정된다. 앞서 물(믈)이 어두에 놓여 수식어로 쓰일 때는 받침 ‘ㄹ"이 탈락하여 ‘무/모",또는 ‘미" 등으로 쓰인다고 했다. 『삼국사기』지리지에 수록된 고구려 지명 중에 (買)가 ‘미"(米 또는 彌)와 동일한 차음자로 쓰인 예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內乙買 一云內爾米(지리 4) 買召忽 一云彌鄒忽(지리 4)
미(米)와 미(彌)는 중국의 중고음(中古音)이 ‘미에"(miei, 또는 myie)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미"로 읽는다. 물나리를 미나리라고 하고 물장이를 미장이라 부르는 것도 이와 같은 현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원적으로 볼 때 중세어 ‘믈"은 ‘므리"의 어형으로 재구(再構)할 수 있다. 우리 국어가 본래 개음절어(開音節語)였음을 감안하면 믈 역시 받침이 없는 두 음절의 어형이라고 추정되기 때문이다. 한편 기원형 ‘므리"는 그 말이 놓이는 위치나 여건에 따라 다음과 같은 어형변화를 거쳤으리라 짐작된다.

*므리[水]---수식어로 쓰일 경우 : 므리 > / 매 / 모 /미
---피수식어로 쓰일 경우 : 므리 > 믈 > 물
우정면 매향리 포구 옛 지명 표기에서도 물은 ‘/미" 형과 ‘믈/물"의 두 어형으로 나타난다. 이를 두고 학계에서는 ‘/미" 형이 북방계의 고구려어 계통이고, ‘믈/물" (勿로 표기) 형은 남방계의 한어(韓語) 계통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현대어의 예에서 보듯 그 말이 놓이는 환경에 따른 변이음이지 계통상 다른 말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어떻든 여기에서의 (買)는 그것이 시냇물이거나 우물이거나 간에 일반적인 물을 지칭한다.
고지명에서 매(買)는 수(水) 또는 천(川)이나 정(井)으로도 대응표기 되었으니 다음 예에서 그 사실은 분명해 진다.
伊珍買 > 伊川(지리 2), 內乙買 > 沙川(지리 2)
薩買 > 淸川(지리 2), 伏斯買 = 深川(지리 4)
省知買 = 述川(지리 4), 於斯買 = 橫川(지리 4)
於乙買 = 泉井(지리 4), 於乙買串 > 泉井口 (지리 4)
水, 泉, 川, 井, 海
포구(浦口)
장안면 석포리 돌소지
고포리(古浦里, 송산면)
자연부락인 고잔(古棧)과 포막동의 첫머리 글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이처럼 합성지명에서는 지명 본래의 의미를 찾기는 어렵다.
구포리(鳩浦里)ㆍ굿개(비봉면)
구한말 이 포구에 갈매기가 많이 서식하여 이런 이름을 붙였다는 설이 있다. 퍽 문학적인 해석이나 구(鳩)는 갈매기가 아닌 비둘기를 뜻하며, 그것보다는 한자어 구미(鳩尾)는 명치, 곧 인체의 급소를 지칭하는 말로서 땅이름에서는 지형상의 요처를 일컬을 수 있다.
구포리(鳩浦里)ㆍ굿개(비봉면)
구한말 이 포구에 갈매기가 많이 서식하여 이런 이름을 붙였다는 설이 있다. 퍽 문학적인 해석이나 구(鳩)는 갈매기가 아닌 비둘기를 뜻하며, 그것보다는 한자어 구미(鳩尾)는 명치, 곧 인체의 급소를 지칭하는 말로서 땅이름에서는 지형상의 요처를 일컬을 수 있다. 또한 ‘구미"는 고유어로서 굽이진 지형을 뜻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 확실하지 않다.
낭포(浪浦)ㆍ낭개(우정면 석천리)
"낭개"또는 한자어 그대로 ‘낭포"로 불린다. 예전 바닷물이 마을 앞까지 몰려왔을 때 특히 이곳에서 물결이 거세었다 하여 붙인 이름으로 생성 당시부터 한역(漢譯)으로 출발했던 듯하다.
마산포(馬山浦)ㆍ고잔 (송산면 고포리)
송산면 유일한 포구로서 곶(串)으로 형성되어 있어 ‘고지의 안"이라는 뜻으로 ‘고잔"으로 불리었다. 마산포(馬山浦)란 이름은 본래 ‘마루개"〔宗浦의 의미〕라 불리었던 듯하다. 지명에 쓰이는 ‘마(馬)"는 대개 말과는 직접 관련이 없고 대신 ‘으뜸"을 뜻하는 ‘마루>말"〔宗, 首〕의 훈음차(訓音借)한 표기가 대부분이다. 흔히 말하길 조선 중엽에 말이 바다를 건너와 이 포구가 마포(馬浦)로 불려지다가 이후에는 이곳 산세가 말의 형상을 닮아 마산포(馬山浦)로 개칭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지명에 쓰인 한자의 뜻[訓]에 구애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기록에 의하면 구한말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청나라 장수 원세개(袁世凱)가 이 포구로 군대를 이끌고 상륙했으며, 대원군이 청나라로 끌려갈 때도 이 포구에서 배를 탔다고 전한다. 인근에 있는 마산리(馬山里)와 우정면의 마산동(馬山洞, 말미)도 같은 뜻의 이름으로 이 역시 ‘마루뫼", ‘마루미", ‘말미" 정도로 ?恬?었으리라 짐작된다. 이 마을이 전래지명에서 ‘고잔"으로 불린 것은 포구 남쪽에 있는 화량진(花梁鎭)의 화량(花梁)이란 표기에서도 잘 드러난다. 화량(花梁)은 ‘고지들(돌)", ‘곶돌"의 표기로서 ‘곶에 형성된 마을[串邑]"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배머리ㆍ녹사리(송산면 고정리)
‘배머리"란 이름은 배가 정박하는 포구의 머리 부분이라는 뜻일 수도 있고 혹은 산의 형국이 배의 머리와 같다고 하여 얻은 이름일 수도 있다. 어떻든 배머리는 고잔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또한 녹사리의 ‘녹"은 배의 닻줄을 일컫는 방언이며 ‘녹사리"란 말은 배 닻줄을 감는다는 뜻으로 이 곳이 포구로서 배가 많이 드나든 데서 유래한 이름이라 한다. 고정리는 본래 남양면 세곶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고잔(고지의 안쪽이란 뜻)의 ‘고"(古)와 먼우물[遠井]의 ‘정"(井)을 합하여 고정동이 되었다.
석포리(石浦里)ㆍ돌소지(장안면)
현지에서는 ‘돌소지" 또는 그냥 ‘석포"라 불리기도 한다. 예로부터 돌이 많은 포구여서 그렇게 불렀다는데 이 역시 석(石)의 훈에 구애된 것이 아닌가 한다. ‘돌"이라면 바닷가에 있는 마을을 일컫는 고유어로서 대개 ‘량(梁, 울돌목의 명양(鳴梁), 노들나루의 노량진(鷺梁津)과 같이)"으로 표기되었으나 여기서는 ‘돌ㆍ석(石)" 자를 이 어형의 표기에 사용하였다.
마산포(馬山浦)ㆍ고잔 (송산면 고포리)
송산면 유일한 포구로서 곶(串)으로 형성되어 있어 ‘고지의 안"이라는 뜻으로 ‘고잔"으로 불리었다. 마산포(馬山浦)란 이름은 본래 ‘마루개"〔宗浦의 의미〕라 불리었던 듯하다. 지명에 쓰이는 ‘마(馬)"는 대개 말과는 직접 관련이 없고 대신 ‘으뜸"을 뜻하는 ‘마루>말"〔宗, 首〕의 훈음차(訓音借)한 표기가 대부분이다. 흔히 말하길 조선 중엽에 말이 바다를 건너와 이 포구가 마포(馬浦)로 불려지다가 이후에는 이곳 산세가 말의 형상을 닮아 마산포(馬山浦)로 개칭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지명에 쓰인 한자의 뜻[訓]에 구애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기록에 의하면 구한말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청나라 장수 원세개(袁世凱)가 이 포구로 군대를 이끌고 상륙했으며, 대원군이 청나라로 끌려갈 때도 이 포구에서 배를 탔다고 전한다. 인근에 있는 마산리(馬山里)와 우정면의 마산동(馬山洞, 말미)도 같은 뜻의 이름으로 이 역시 ‘마루뫼", ‘마루미", ‘말미" 정도로 ?恬?었으리라 짐작된다. 이 마을이 전래지명에서 ‘고잔"으로 불린 것은 포구 남쪽에 있는 화량진(花梁鎭)의 화량(花梁)이란 표기에서도 잘 드러난다. 화량(花梁)은 ‘고지들(돌)", ‘곶돌"의 표기로서 ‘곶에 형성된 마을[串邑]"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손포(孫浦)ㆍ손개(향남면 상신리)
마산포(馬山浦)가 크고 으뜸가는 포구임에 반해 손포(孫浦)는 작고 좁은 포구로서 현지에서 ‘손개"로 불린다. 손개는 ‘좁고 가늘다"라는 뜻의 ‘솔다(細, 狹)"의 관형사형 ‘손-"이 접두한 것으로 한자 ‘손(孫)"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강화도의 손돌〔孫梁〕과 같은 유형의 지명인데 이를 두고 손(孫)씨가 많이 모여 사는 갯벌마을이란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외포동(外浦洞)ㆍ밖개(시동)
‘수리"또는 ‘시리"의 밖에 있는 포구란 뜻으로 ‘밧(밖)개"라 불린다. 본 마을은 그 지형이 숟가락을 닮았다 하여 ‘숟가락 시(匙)"를 써서 ‘시리"라 일컫게 되었다. 또한 시리 서쪽에 행촌(杏村)이란 마을이 있는데 이는 마을 주변에 몇 그루의 살구나무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밖개가 고유어 이름인 반면 시리와 행촌은 처음부터 한자어 이름으로 지어진 것 같다.
유포리(柳浦里)ㆍ버들개, 버들무지(비봉면)
이전에는 마을 어귀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포구에 어촌이 형성되어 포촌동(浦村洞)이라 불렀다. 지금은 ‘버들개" 또는 ‘버들무지"라 부르는데 이는 포구에 버드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한자 ‘류(柳)"는 버드나무를 뜻하지만 이 차자가 지명에 쓰일 때는 ‘길게 뻗은" 지형을 가리킨다. 이 곳 유포(柳浦)도 포구가 바다 쪽으로 길게 뻗어 있다는 뜻으로 쓰인 말이다.
해문리(海門里, 마도면)
조선조 중엽에는 동네 어귀 산간지대를 배편으로 출입했다고 한다. 해문구화역(海門仇火驛)이 있었던 곳으로 그로 인해 붙은 이름이 많다. 해문(동), 역말, 역골, 역곡, 구화, 굿벌 등이 그런 예이다. 해문(海門)에서 보듯 처음부터 한자어로 지어진 이름이다.
해평동(海坪洞)ㆍ바다들, 바닷들(서신면 매화리)
매골 남쪽 바닷가에 있는 마을, 매화리(梅花里)에 딸린 곳으로 간척사업으로 형성된 들(坪)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매화리는 본래 남양군 신리면 지역으로 맷골, 매골, 매곡, 매동, 또는 나라의 양을 길렀다 하여 목양동이라고도 호칭되었다. 그런데 단지 매골이라면 매곡(梅谷), 또는 매동(梅洞)이 되겠으나 매화(梅花)가 된 것을 보면 ‘고지>곶"(串이 맞지만 대개 花로 훈음차 표기함)이란 또 다른 이름이 첨가된 합성지명이라 생각된다(‘곶"에서 비롯된 이름"의 다음 장 참조)
방축(防築)
향남면 방축리
물의 범람을 막기 위해 쌓은 둑(堤防)이 방축인데 이를 흔히 방죽이라 부른다. 바다에 면해 물이 많은 화성 지역에는 이 방죽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바닷물을 막아 농경지를 넓히고 여기에 주거지를 닦은 데서 비롯된 이름들로서 그 일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방축리(防築里)ㆍ방죽머리(향남면, 마도면 석교리, 송산면 지화리 등)
방죽리는 한자로 쓸 경우 행정상의 법정지명이요, 전래지명(구전되는 이름)으로는 방죽 머리라 한다. 방죽의 윗 쪽 즉 머리 부분에 마을이 형성될 때 붙이는 이름이다.
방축리(防築里)ㆍ방축말(장안면 수촌리 등)
수촌(水村)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방축말, 배다리, 감나무골, 기장말, 꽃밭, 향골, 용당골을 병합하여 물이 많이 모이는 곳 즉 물골이란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서 ‘꽃밭"이란 말은 화전(花田)의 뜻이 아니라 ‘고지밧" 즉 곶밖〔串外〕이란 의미를 갖는다. 고지의 안을 뜻하는 ‘고잔"과는 상대적인 이름이다.
방축동(防築洞) (우정면 멱우리, 봉담면 수기리 등)
이 곳은 밀물 때 바닷물이 마을 앞까지 밀려와 농경지가 침수되므로 방죽을 쌓아 수문을 만들었는데 그 문을 열고 닫는다고 하여 그렇게 부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개(開)는 포구를 뜻하는 고유어 ‘개"(浦)를 차음하여 개(開)로 표기한 것이다. 따라서 수문개는 수문이 있는 포구의 뜻으로 보아야 한다.
수문개(水門開) (서신면 궁평리)
이 곳은 방조제를 설치했으나 만조 때가 되면 바닷물이 유수(溜水)된다 하여 붙인 이름으로 혹은 수루지(水樓池)로도 표기한다.
선창(船倉)
사창(社倉) (향남면 하길리)
사창(社倉)의 ‘사(社)"는 본래 여러 민가가 모여 한 부락을 이루는 촌락공동체를 뜻하며 ‘창(倉)"은 가뭄이나 홍수 따위의 비상시를 대비하여 곡물을 저장하는 곳간으로 조선시대에는 각 고을마다 이런 사창을 두었다. 하길리(下吉里)는 ‘한절이"의 하동(下洞)과 ‘안길이"(安吉)를 병합할 때 생긴 합성지명이다.
사창리(社倉里) (양감면)
고려 때 쟁홀부곡(爭忽部曲)이 있었던 곳으로 ‘쟁홀" 혹은 ‘쟁골"이라 불렀는데 조선조 에 와서 사창이 건립되면서 이름이 바뀌었다. 예전 곡식 창고가 있던 자리에서 지금도 기왓장 따위의 흔적이 출토된다고 한다.
선창(船艙) (우정면 주곡리)
장작원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이 곳에 선창이 있었다고 한다. 오래 전에 이 곳 해변에 포구가 생겨 배가 닿을 수 있는 잔교가 가설되었다. 이 때부터 사람들이 여기서 배를 타고 짐을 싣고 부리게 되면서 자연 어촌을 형성하게 되었다. 주곡리(珠谷里)는 그 지형이 ‘구슬"(珠)처럼 생겼으므로 구슬, 구실, 구술 등으로 불리던 것을 차훈하여 지금의 주곡이 되었다.
짐대울, 짐촌, 김대울 (향남면 발안리)
예전에는 이 지역 일대가 온통 갯벌이었는데 그 벌의 안(內)쪽에 있다고 하여 ‘벌안〔原 內, 坪內〕", 또는 ‘발안"이라 불렀다. 발안리의 옛날 이름인 짐대울, 또는 김대울은 선창(船倉)에 해당하는 고유어로서 배에 짐을 싣고 부리던 곳이어서 붙은 이름일 것이다.
창촌(倉村)ㆍ창말 (우정면 멱우리)
조선 영조 때 백산(柏山) 아래 있던 쌍고창(雙皐倉)이 이 곳으로 옮겨옴에 따라 곳집이 있던 마을이라 하여 ‘창말"이란 이름을 얻었다. 멱우리는 그 지형이 마치 ‘머구리"(개구리의 옛말)처럼 생겼기에 머구리, 또는 머구니로 불리던 것을 음이 비슷한 한자로 차음 표기하였다.
해창리(海倉里) (팔탄면)
고려 때 공이향(工以鄕)이 있었으므로 공이향, 공향이라 했고 조선조에 수원부의 해창(海倉)이 있었으므로 해창 또는 창(倉)말, 창촌이라고 부르고 있다. 구한말까지 서해를 통하여 서울과 연결되어 조운(漕運)이 번성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기타 물과 관련된 이름
팔탄면 건달산 아래 기천리 전경
느지지 (양감면 요당리(蓼塘里))
이 곳은 조선조 말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던 해변 마을로서 장승배기를 대만촌(大晩村)이라 한 반면 그 북쪽에 있는 작은 마을을 소만촌(小晩村)이라 하여 이를 ‘느지지"라 불렀다. ‘느지지"란 바닷물이 다른 곳에 비해 늦게 들어오고 늦게 빠진다는 뜻에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으로 보인다. 한편 느지지가 속해 있는 요당리는 현지에서 ‘요댕이"라고 부르는데 『화성지(華城誌, 1831)』에도 요당리(蓼塘里)라 기록되어 있다. 요(蓼)는 ‘여뀌ㆍ료"자이며, 당(塘)은 못이나 방축을 뜻하는데 당지(塘地)라 하면 둑을 쌓아서 물이 괴게 한 못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이 고을에 여뀌가 자생하는 못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느지지 (양감면 요당리(蓼塘里))
이 곳은 조선조 말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던 해변 마을로서 장승배기를 대만촌(大晩村)이라 한 반면 그 북쪽에 있는 작은 마을을 소만촌(小晩村)이라 하여 이를 ‘느지지"라 불렀다. ‘느지지"란 바닷물이 다른 곳에 비해 늦게 들어오고 늦게 빠진다는 뜻에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으로 보인다. 한편 느지지가 속해 있는 요당리는 현지에서 ‘요댕이"라고 부르는데 『화성지(華城誌, 1831)』에도 요당리(蓼塘里)라 기록되어 있다. 요(蓼)는 ‘여뀌ㆍ료"자이며, 당(塘)은 못이나 방축을 뜻하는데 당지(塘地)라 하면 둑을 쌓아서 물이 괴게 한 못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이 고을에 여뀌가 자생하는 못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사랑리(沙浪里)ㆍ새랭이 (장안면)
본래 수원부 초장면에 속한 곳으로 ‘새랭이" 또는 ‘사랑동"이라 칭해 왔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사랑리(沙浪里)라고 한 것은 이 지역이 바닷물이 밀려오는 맨 끝 지역으로 모래사장이 형성되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나 확인하기는 어렵다. 사랑리는 본래 쇠파니를 비롯한 몇 개의 자연부락이 병합할 때 작명된 합성지명으로 사(沙)는 쇠파니의 ‘쇠"에서 연유한 말이 아닌가 싶다.
어은리(漁隱里)ㆍ언골, 은골, 어은골 (장안면)
『화성지(華城誌, 1831)』에 나오는 초장면 노은동(魯隱洞)에 해당하는 곳이다. 바뀐 어은(漁隱)이란 이름을 두고 바다의 물고기가 이 곳으로 몰려 와 숨던 곳 또는 출어했다가 풍랑을 만나면 이 곳으로 와서 피난했던 곳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물이 ‘어울(아울)리는" 곳을 어운내[竝川], 그 주변 마을이나 골짜기를 어운골이라 하는 바 어은리 역시 이 같은 이름의 차음 표기가 아닌가 한다.
수영리(水營里) (봉담읍)
‘수영말"로 불리던 이 마을은 고려 말 군사들이 이 곳에 진을 치고 주둔했던 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청요리(靑蓼里) (비봉면)
앞서 소개한 양감면의 요당리(蓼塘里)와 같은 ‘여뀌 요"자를 쓰는 지명이다. 흔히 말하길 이곳에 푸른 갈대〔청요(靑蓼)〕가 많이 자생하여 주민들이 갈대로 살구지를 만들어 고기를 잡았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러나 청요리(靑蓼里)는 ‘요골동(蓼谷洞)"과 ‘청용동(靑龍洞)"이 병합할 때 두 지명의 첫 머리글자를 따서 붙인 합성지명으로 ‘푸른 갈대" 설은 한낱 한자 풀이에 구애된 해석이다.
남양동(南陽洞)
화성ㆍ수원지역에서 매골〔買忽〕과 함께 역사가 오랜 고을로서 일찍부터 국제 무역항으로서의 역할을 다해 왔다. 삼국시대 중국 당나라로 가는 길목이란 뜻에서 당성(唐城), 또는 당항성(唐(黨)項城)으로 호칭되고, 신라 경덕왕 때 당은(唐恩)으로, 흥덕왕 때는 당성진(唐城鎭)으로 불리기도 했다. 남양(南陽)이란 이름은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량(諸葛亮)의 고향 지명에서 따온 것이라고도 하나 믿기 어렵다. 왜냐하면 남양은 물을 경계로 하는 방위 지명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전국적으로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개묵동(開默洞)ㆍ개묵, 해묵 (원천동)
원천리는 원막동과 천곡동을 병합한 합성지명이며 이 마을에 속한 개묵은 원막 서북쪽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여기서 개묵은 본래 ‘깻묵"을 차음(借音)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곳은 예로부터 바닷물이 드나들던 곳으로 그곳의 모래가 검어서 땅을 파면 그 색깔이 깻묵처럼 검었다고 한다.
갈천(葛川)ㆍ가리내, 갈곡(葛谷)ㆍ가래울, 가리울 (향남면)
물이 ‘갈라진다"(分岐)라고 할 때의 ‘가르>갈"을 한자 ‘갈(葛)"로 차음 표기한 것이다. 내(川)가 갈라진 곳에 위치한 마을을 흔히 ‘가래울"이라 하여 이 곳 뿐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많은 분포를 보인다. 흔히 말하길, 생활이 어려울 때 그 지역 주민들이 칡(葛)으로 연명했기에 이런 지명이 생겼다고 하지만 실은 칡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울"은 골짜기(谷)를 뜻하는 ‘골"이란 말의 ‘ㄱ" 탈락형이다.
구문천리(求文川里) (향남면)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구미리〔求蜜〕와 물언이〔文彦〕, 돌내〔石川〕의 세 마을을 합하여 그 첫머리 글자를 딴 합성지명이다. 위의 세 지명은 모두 순수 고유어로서 ‘물언"의 경우는 물(시내)의 안쪽이며 구미리는 굽이진 골짜기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한우물 (향남면 방축리)
방죽머리 마을 앞에 큰 우물이 있어 본래의 뜻 그대로 ‘한우물"(한역한다면 ‘대정(大井)"이 될 것이다)이라 명하게 되었다. 행정구역 개편 때 한우물은 방죽머리(또는 방죽안), 대밭말과 함께 방축리가 되었다.
수직리(水直里)ㆍ우뭇골 (향남면)
역시 이 마을에 좋은 우물이 있으며 마을 앞으로 흐르는 시내가 ‘곧게" (똑바로) 흐른다고 하여 수직(水直)이라 하고 여기서 윗마을을 상수직(上水直), 아랫마을을 하수직(下水直)이라 부르게 되었다.
불천(佛川)ㆍ부처내 (향남면 수직리, 양감면 송산리)
시주를 요청하는 스님에게 오물을 퍼준 부자 주인이 그 벌로 돌이 되었다는 소위 말하는 ‘장자못 설화"가 깃든 시내이다. 지금도 마을 앞에 그전설의 돌부처가 남아 있다고 한다. 한편 양감면 송산리(松山里, 솔미)에도 불천동(佛川洞)이라 표기되는 ‘부처내"가 있는데 여기서는 마을 앞 냇가에서 불상이 여러 점 나왔다 하여 이런 이름을 얻었다는 것이다.
신왕리(新旺里)ㆍ샘골(양감면)
마을에 좋은 샘이 있었으므로 새미, 생이, 샘골 등으로 불리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면사무소가 이곳으로 옮겨옴에 따라 더욱 발전하라는 의미에서 신왕리(新旺里)라 이름했다고 한다. 이 마을에 딸린 사양동(砂陽洞)도 마을 앞 시내에 모래, 자갈이 많은 데서 유래했다지만 윗마을을 ‘윗생이"(上砂陽)라 하고 아랫마을을 ‘아랫생이"(下砂陽)라 부르는 것을 보면 신양(新陽)이나 사양(砂陽)이란 한자말 이름은 실은 샘의 변이형 ‘생이"에서 비롯된 표기일 것이다.
용소리(龍沼里) (양감면 등)
지명 특히 못이나 우물의 이름에‘용(龍)"자가 들어가는 곳은 전국적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이들은 풍수지리상 명당으로 손꼽히는 곳으로서 대개는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원적으로 본다면 용은 그 자체가 물과 관련이 깊다. 곧 용(龍)의 고유어가 ‘미르"여서 ‘므리"라는 ‘물"의 고대 어형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기천리(箕川里) (팔탄면)
건달산(乾達山)을 끼고 흐르는 시내를 기천(箕川), 그 시냇가에 자리 잡은 세 개의 자연부락을 기천리라 한다. 기천은 ‘아래키울" 즉 하기동(下箕洞)의 ‘箕"와 ‘사내" 즉 사천(沙川)의 ‘川"을 합성한 지명이다. 기(箕)가 곡식을 까불 때 쓰는 기구를 뜻하기에 이 곳 시내의 형상이 키를 닮았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상사천(上沙川)ㆍ윗사내 (팔탄면 기천리)
건달산 자락의 윗마을을 ‘윗사내"라 하고 아랫마을을 ‘아랫사내"라 하는데 여기서 사내(沙川)는 그 뜻이 ‘모래내"일 수도 있고 또는 새내(新川) 즉 “새로 생긴 시내”를 지칭할 수도 있다.
금천(金泉)ㆍ쇠내 (팔탄면 율암리)
율암리는 ‘밤디"의 율북(栗北)의 ‘栗"과 ‘선돌"의 입암(立岩)의 ‘岩"을 따온 합성지명이다. 금천(金泉)은 율암리에 딸린 마을로 현지에서는 ‘쇠내"라 부른다. 지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금(金)"은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인다. 실제로 그 곳에 금(金)이 나기 때문에 이를 지명에 넣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매우 드문 현상이다. 대부분의 경우 금(金), 즉 쇠/새는 사이(間)의 준말인 ‘새"와 또 새로 생겼다는 ‘새"(新)의 뜻으로 쓰였다. 남양 삼괴 반도의 중간지점에 있는 이 시내는 이런 세 가지 중 어떤 뜻으로 쓰였는지는 지금으로서는 단언할 수 없다.
마정동(馬井洞)ㆍ말우물, 마루머리(장안면 금의리)
‘말우물"은 큰 우물을 뜻하며 그 우물 머리에 있는 마을을 흔히 ‘마루머리"라 한다. 앞서 마산포의 ‘마루개"란 이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마(馬)는 동물인 말과는 상관 없이 ‘마루"〔宗ㆍ首〕란 고유어를 훈음차한 것이다. 이는 전국에 흩어져 있는 ‘마(馬)"자계 지명의 공통된 현상이다. 한편 말우물이 속해 있는 금의리는 그 지형이 거미를 닮아 생긴 이름이라 하나 이 역시 확실하지 않다.
노정(蘆井)ㆍ갈우물 (장안면 노진리)
예로부터 이 마을 앞 벌판에 갈대가 우거지고 좋은 우물이 있어 ‘갈우물"이라 불렀다 한다. 조선조 말 행정명으로 대유정리(大有井里)라 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갈우물〔蘆井洞〕의 ‘蘆"와 참남기〔眞木洞〕의 ‘眞"을 따서 노진리가 되었다.
구천(龜川)ㆍ구래 (장안면 덕다리)
이 마을 앞 냇가에 거북이가 놀았다 하여 거북내, 이를 한자말로 옮겨 구내〔龜川〕라 했는데 이 구내가 변음이 되어 ‘구래"가 되었다는 것이다.
흥천(興川) (장안면 사곡리)
모래골, 또는 모새골로 불리던 사곡리(沙谷里)에 딸린 지역으로 큰 내란 의미의 홍천(洪川)이 변질되어 지금처럼 흥천(興川)이 되었다.
구동(口洞)ㆍ물구리 (장안면 장안리)
마을 앞 산기슭을 칭하는 이름으로 항상 물이 마르지 않아 물골〔水谷〕로 불리었다는 설과, 옛날에 이 곳 마을 앞까지 밀물이 들어 왔기에 ‘물구리"로 불렀다는 설이 있다. 둘 다 맞는 해석으로 ‘구리"나 ‘골"은 같은 말로서 사람이 사는 마을을 뜻한다.
온수곡(溫水谷)ㆍ온수골 (장안면 장안리)
장안리에 속한 이 마을은 이 곳의 샘물이 다른 곳보다 유독 따뜻하다 하여 처음부터 ‘온수골"이란 한자이름으로 불리었던 듯하다.
놋우물 (우정면 매향리)
수식어로 쓰인 ‘놋-"의 뜻이 애매하나 일설에 의하면 일제 말 놋그릇 공출을 피하기 위해 마을 앞 공동우물 속에 그것을 감추었다는 설이 참고가 된다.
운정동(雲井洞)ㆍ구름울 (우정면 운평리)
산이 구름처럼 둘러쳐져 있고 마을 한가운데 우물이 있어 이렇게 ‘구름울"이라는 멋진 이름을 얻었다. 구름울이 속한 운평리는 운정리와 평전리의 합성지명이다.
널우물 (우정면 원안리)
흔히 널판지를 우물 위에 깔았다고 하여 ‘널우물"이 되었다고 하나 그 본 뜻은 규모가 큰 곧 널따란 우물을 뜻하는 말이다.
박우물 (우정면 주곡리)
이 우물은 그리 깊지 않아 바가지로 물을 뜰 수 있다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여수동(麗水洞)ㆍ여술, 새터 (우정면 화수리)
전래지명이 ‘여술"인데 그 본뜻은 확실하지 않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이 고을에 두 개의 큰 우물이 있었는데 한 곳에서는 뛰어난 장수가 나오고 다른 한 곳에서는 용마가 나왔다고 한다. 이 두 샘은 수량이 풍부하고 물 맛 또한 빼어나다 하여 이런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화수리는 본래 수원부 사정면의 지역으로 새로 터를 잡고 꽃나무를 많이 심었으므로 새터, 신기(新基), 또는 화수라 불렀다 한다.
분천리(汾川里) (봉담읍)
마을의 지형이 동이(盆)처럼 생겼다 하여 고려 때부터 분촌향(盆村鄕)으로 일컬어지다가 조선조 말에 분화촌(盆化村)으로 개칭되고 다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 곳에 샘이 많다고 하여 분천리라 하여 ‘분"의 한자가 바뀌게 되었다.
수기리(水機里)ㆍ수틀 (봉담읍)
흔히 말하길 정조 대왕이 선친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으로 정할 때 이 곳에 있는 금릉바위에서 잠시 쉬어갔으므로 쉬틀, 수틀, 또는 수기란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한낱 민간 어원설에 불과하고 이 이름은 ‘수틀"이란 기구를 만들던 데서 유래한 지명으로 보아야 한다.
빈정(濱汀) (매송면 야목리)
이곳은 조선조 말부터 부락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마을이 바다를 끼고 있어 물가를 뜻하는 빈(濱)과 정(汀)이란 어려운 한자를 써서 지명으로 삼았다. 한편 야목은 본래 광주군 송동면 지역으로 들의 목〔項〕이 되므로 ‘들목"이라 부르던 곳을 차자 표기하였다.
현천(玄川)ㆍ거무내 (매송면 야목리)
들목〔野牧〕의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서 흐르는 시내의 이름을 따서 동명으로 삼았다. ‘거무내 >검내"는 비록 ‘검을ㆍ현(玄)"으로 차훈되고 있으나 냇물이 검은 게 아니라 마을 ‘뒤편으로 흐르는 시내"란 뜻인 ‘고마내/거무내 > 곰내/검내"(北川 또는 後川)의 뜻으로 쓰인 말이다.
어천리(漁川里)ㆍ어랑내 (매송면)
본래 매곡면에 속했던 곳으로 어랑내, 어량내(천)라 부른다. 한자로는 어랑천(於良川)으로 표기했는데 ‘於"를 ‘어"로 읽어 고기잡을ㆍ어(漁)로 바꿔 놓았다. 지명에 쓰이는 "어(於)‘자는 늘어지다란 뜻의 ‘느리-"로 읽혀지기 때문에 이 곳의 본래 명칭은 ‘느리내", 또는 ‘늣내"정도로 불려졌을 것이다.
천천리(泉川里)ㆍ샘내, 샘내골 (매송면)
칠보산(七寶山) 기슭에 자리 잡은 이 마을은 항상 맑은 시냇물이 흐를 뿐 아니라 어디서나 샘이 솟는다 하여 샘내, 샘내골로 불렀는데 이를 그대로 한역(차훈)하여 천천리(泉川里)가 된 것이다.
문호동(文湖洞)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문구리〔文起洞〕와 서호동(西湖洞)을 합병하여 문호리라 이름하였다. 서호는 ‘새미" 서쪽에 있는 마을인데 처음에는 몇 가호에 불과하던 곳이 바닷가에 언(뚝)을 쌓고 갯벌을 개간하면서 큰 마을이 형성되었다.
수화동(水花洞)
밀물이 드나들었다는 수충동(水充洞)과 ‘매고지"라 불리던 산화동(山花洞)이 병합하여 수화리가 되었다. 앞서 수차 언급한 매화리의 매화(梅花)와 더불어 물과 고지>곶이 결합한 화성을 대표할 수 있는 지명이다.
원천동(遠泉洞)
‘원실"이라 불리던 원막동(遠幕洞)의 원(遠)과 ‘샘실"이라 불리던 천곡동(泉谷洞)의 천(泉)을 따서 원천리가 되었다. 먼 곳에 있는 막(幕)과 샘이 합하여 결과적으로 ‘먼 샘"이 되어버린 것이다.
우정(雨井)ㆍ비우물 (서신면 상안리)
고려 때부터 이 지역에 뽕나무가 많았기에 상림원(桑林園)이라 칭했으나 이후 상림동(尙林洞)으로 바뀌고 다시 인근의 대안동(代安洞)과 병합하여 상안리(尙安里)가 되었다. 이 마을에는 두 개의 우물에서 비롯된 지명이 있는데 ‘비우물"과 ‘개물"〔蓋井〕이 바로 그것이다. 비우물(雨井)은 때로 비정촌(碑井村)이라 하여 비석을 뜻하는 ‘비(碑)"자를 쓰기도 한다. 이는 우물을 팔 때 비석이 나왔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또한 개물의 개정(蓋井)은 이 곳이 명당 터라 하여 우물을 메우고 집을 지었다는 전설에서 ‘덮을ㆍ개"(蓋)를 쓴다는 설이 있다.
영지(靈池) (서신면 용두리)
신령스런 못이란 뜻으로 붙인 이름이라는데 확실치는 않다. 또한 이 못이 있는 마을을 영지촌이라 부른다.
운천동(雲川洞)ㆍ구름내 (서신면 전곡리)
구봉산 앞 골짜기에 있는 앞실〔前谷〕에 딸린 마을인데 ‘구름내"란 멋진 시내의 이름을 동명으로 삼았다.
고정리(古井里) (송산면)
‘고지의 안"(串內)이란 뜻의 고잔(古棧)동의 ‘古"와 “멀리 떨어져 있는 우물”이란 뜻의 원정(遠井)동의 ‘정(井)"을 따서 고정리가 되었다.
사강리(沙江里) (송산면)
본래 남양군 수산면 지역으로 전에는 이 곳까지 조수가 드나들어 강처럼 변했으므로 사강(沙江)이라 이름 한 것 같다. 안사강(內沙江)과 바깥사강(外沙江 또는 新外洞)으로 나 뉜다.
수산동(水山洞)ㆍ물미 (송산면 삼존리)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한 면이 산이어서 ‘물뫼", ‘물미"라 불렀는데 이를 수산(水山)으로 한역하였다. ‘뫼/미"는 산을 뜻하기도 하지만 물을 뜻하는 고유어이기도 하다.
쌍정리(雙井里) (송산면)
본래 남양군 세곶면에 속한 곳으로 ‘한우물"(大井)과 ‘덕우물"(德井, 또는 石井)의 두 우물에서 비롯되어 쌍정리(雙井里)라 이름하였다. 덕우물의 ‘덕" 역시 큰 것을 뜻하는 고유어이다.
용수동(龍水洞)ㆍ용숫골ㆍ영개 (송산면 용포리)
용수(龍水)는 옛날 이 포구에서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용숫골과 신당이 있어 ‘당미"라 불리던 고포(羔浦)가 병합되어 지금의 용포리(龍浦里)가 되었다.
 
곶[串]에서 비롯된 이름
고지 곶(串 또는 花)의 지명 용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화성ㆍ수원 지역의 지형상의 특징이 서해 바다에 연하여 시내, 못, 우물, 저수지 등과 같이 물과 관련된 지명이 많았음을 확인하였다. 이에 못지 않게 또 하나 중요한 특징은 이 곳의 지형이 바다 쪽으로 삐죽 나와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바다나 물 쪽으로 가늘고도 길게 뻗어 있는 육지의 끝 부분을 가리켜 ‘곶" (한자로는 岬, 또는 串)이라 부른다. 곶의 기원형은 어말모음을 보유한 ‘고지"로서 이 지역의 지명에도 자주 등장한다.
고지, 곧 곶은 주로 어떠한 ‘-곶"이라 하여 지명 접미사로 쓰이는 것이 통례지만 때로 수식어, 곧 접두사로 쓰이는 예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곶의 안쪽이라면 ‘곶+안"의 구조가 되어 ‘고잔"이라 부르고 반면 바깥쪽이라면 ‘곶밖"으로 불리는 경우이다. 고잔은 현지명에서 한자로 고잔(古棧, 高棧, 古盞, 高盞) 등 다양하게 표기되는데 이 중에는 강화도(불은명 고릉리)의 한 곳은 이를 차훈(한역)하여 관내동(串內洞)이라 적는다.

곶안>고잔의 상대어는 고지밖>곶밖이 되겠는데 이를 관외〔串外〕라 적지 않고 엉뚱하게도 화전(花田)으로 적은 용례를 앞서 확인한 바 있다. 이는 ‘곶밖"을 의식적으로 ‘꽃밭"으로 생각하여 차훈 표기(정확히 말하여 훈음차(訓音借) 표기)한 것이다.

이런 현상은 지명의 차자표기에서 이왕이면 뜻이 좋은 한자를 쓰고 싶은 표기법상의 일종의 아역(雅譯)이라고 말한 바 있다.

현대어의 꽃(花)은 중세어에서는 ‘곳" 또는 ‘곶"으로 표기되었으니 이는 ‘ㄱ"이 아직 경음화 현상을 거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고지의 준말 ‘곶"과 꽃의 옛말 ‘곶"이 어느 시기까지는 발음이 같았거나 유사한 데서 비롯된 현상이다. 화성ㆍ수원의 지명만 하더라도 이 지역이 온통 꽃으로 뒤덮인 것처럼 많은 ‘화(花)"자계 지명을 발견할 수 있다.

지형상의 특징으로 인하여 그만큼 이곳에 곶(串)이 많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실지로 전국 지명사전을 분석해 보면 화(花)자, 즉 ‘곶"계 지명의 70% 이상이 화성을 중심으로 한 서해안 일대에 분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곶"계 지명 예를 찾아 화성의 바닷가로 떠나보기로 한다.
남양
분지곶(粉知串)ㆍ분지고지, 분지곶 (문호동)
서호못 서쪽에 있는 작은 섬으로서 분지처럼 생겼기로 이를 분지섬이라 하고 그 섬에 있는 곶으로된 마을을 분지곶동이라 한다.
산화동(山花洞) (수화동)
수화(水花)는 수충(水充)과 산화(山花)의 합성 지명임은 앞서 밝힌 바 있다. 산화(山花)는 ‘뫼고지", ‘뫼곶"으로 불리던 곳으로 여기서는 산이 바다 쪽으로 삐죽 나와 있어 이런 이름을 얻었다.
고잔(古棧)ㆍ고잔 (신외리)
인천 옆에 있는 마을로서 곶의 안쪽이 된다.
장곶동(長串洞)ㆍ장고지, 장곶 (장덕리)
본래 남양군 둔지곶면 지역인데 행정구역 개편 때 장고지와 덕바위(매바위) 등을 병합하여 장덕리가 되었다.
살구지 (활초동)
지형이 화살촉처럼 뾰족 솟아 있는 고지임으로 ‘살구지"라 불렀다. 활초란 이 살구(고)지를 차자 표기한 것이다.
서신면
고잔(高棧)·고잔·꽃전 (궁평리)
궁평리의 바닷가에 위치한 마을로 이 곳 역시 고지의 안쪽이 된다. 마을 앞 모래밭에 해당화가 피고 집집마다 꽃밭을 가꾸었기에 꽃전(花村)이 되었다고 하나 이 역시 고지안>고잔의 변이음에 지나지 않는다.
매화리(梅花里)·맷골, 매곡
본래 남양군 신리면 지역으로 예전부터 ‘맷골"(梅谷 혹은 梅洞)이라 불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고지>곶 계 지명과 병합하여 매화(梅花)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 곳이 산골짜기이므로 여기서의 매(梅)는 산을 뜻하는 뫼(山)로 해석하기도 한다.
사곶리(仕串里)·벼슬고지(곶)
지형이 닭의 벼슬(鷄冠)을 닮아 ‘벼슬고지"라 불렀다 한다. 이 벼슬을 관직(官職)으로 생각하여 사곶(仕串)으로 차훈하였다. 벼슬>뱃은 또한 비스듬히 비탈진 지형을 일컫는 말로 쓰일 수도 있다.
전곶(箭串) ·살고지 (송교리)
남양면 활초리의 살구지와 같은 뜻의 지명인 듯하다. 일설에는 살〔箭〕을 많이 단 그물을 드리워 고기를 잡던 곳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당곶(唐串)·당고지 (전곡리)
삼국시대 당(唐)나라와의 무역선이 출입하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남양의 본이름 당성(唐城)과 같은 계통의 이름이다.
송산면
고잔동(古棧洞)·고잔 (고정리, 고포리, 삼존리)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거지동(居芝洞)·거지 (지화리)
‘거지"는 고지의 변이음으로 보인다. 지화리(芝花里)는 삼국시대부터 당항진 포구가 있던 곳으로 구한 말 거지(居芝)의 지(芝)와 화량(花梁)의 화(花)를 딴 합성지명이다.
화량진(花梁鎭) (지화리)
와룡산 남쪽으로 삼국시대부터 군대 주둔지로서 지금도 성터가 남아 있다. 화량(花梁)은 ‘고지들" 의 차자 표기로서 곶에 형성된 해변 마을을 뜻한다. 노량진(鷺梁津)이 노들나루로, 명량(鳴梁)이 울돌로 읽히는 것처럼 화량(花梁)의 량(梁)은 지명표기에서 ‘돌" 또는 ‘들"로 읽히는 차자이다.
비봉면
이화동(梨花洞)ㆍ배꾸지 「三花里」
배꼬지, 또는 배꾸지는 지형이 배(舟)처럼 생긴 곶이어서 붙은 이름인 것 같다. 배꼬지를 중심으로 ‘도팟골"이라 불리는 도화동(桃花洞)과 연화동(蓮花洞)의 세 ‘화(花)"자 계 지명을 합쳐 삼화리(三花里)가 되었다. 연화(蓮花)는 연꽃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 지형이 명당이라 일컫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 하여 붙인 이름일 것이다.
장안면
고잔(古棧) (노진리)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계룡곶(鷄龍串)ㆍ계룡고지 (사곡리)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관곡(管谷)ㆍ멱구지 (사곡리)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화전(花田)ㆍ꽃바테, 꽃밭 (수촌리)
‘숲말"(水村) 서쪽에 있는 마을로 화전(花田)이라는 한자어 그대로 꽃밭이 아니고 고지의 밖(串外)을 뜻하는 이름이다.
배향곡(拜向谷)ㆍ바람고지(곶) (어은리)
어은리에 딸린 거문들〔巨門坪〕의 남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일설에 의하면 옛날 수령이나 방백들의 행차가 있을 때 삼괴(三槐) 지방의 유생들이 이 곳 곶까지 따라와 배행(陪行)하였다고 해서 ‘배행고지"라 불리던 것이 ‘바람고지"로 변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지명에 쓰인 ‘바람"은 지형이 비스듬하거나 비탈진 곳에 붙이는 말이다. 바람고지 역시 비스듬히 기울어진 고지를 뜻할 것이다.
고잔(古棧) (장안리)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정남면
고지리(高支里)ㆍ고지물, 고주물
흔히 말하기를 이 마을에 큰 우물이 있어 ‘고지(주)물"이라 불렀다고 하나 고지(串)가 그대로 지명으로 굳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태안읍
돌고지 (安寧里)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팔탄면
고잔(高棧) (노하리)
노하리(路下里)에 딸린 마을로 이 곳 역시 고지의 안이었다. ‘안고잔"이라 불리는 내고잔(內高棧)과 가운데에 있는 ‘중고잔"(中高棧)으로 나뉜다.
화당리(花塘里)ㆍ꽃당산
본래 수원(화성)군 공향(貢鄕)면 지역으로 꽃당산 밑이 되므로 꽃당산 또는 화당촌이라 불렀다. 여기서 말하는 꽃 역시 곶의 의미로 쓰인 말이다.
우정면
고잔(古棧) (매향리)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이화리(梨花里)ㆍ배고지
마을 앞까지 배가 드나들어 주곡리(舟谷里)라 불렀는데 이 배(舟)란 말을 먹는 배(梨)로 훈음차하였다.
맹곶(孟串)ㆍ맹곶 (이화리)
이 고을에 맹씨(孟氏)가 처음 들어와 살았기에 ‘맹고지"라 불렀다는 설이 있다.
사두곶 (이화리)
이전에 ‘사두질"을 하여 고기잡이를 하던 곳이라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하나 확인하기는 어렵다.
꽃뫼(花山)의 전설
융릉이 자리잡은 화산의 모습

[사진-8. 융릉이 자리잡은 화산의 모습]

어떤 지명이든 그것이 지어진 유래가 있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 이름에 따른 재미 있고 유익한 전설이 만들어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다.

화성·수원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각기 지명에 따른 나름대로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지만 특히 화성(華城)의 기원이 된 화산(花山)의 전설만은 여기서 언급해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전설이란 게 그렇듯 으레 허구(虛構)이기 마련인데 이 꽃뫼의 그것만은 훗날 역사적인 사건과 전혀 무관치 않아 후세인들이 이를 새겨둘 필요가 있을 듯 하기 때문이다.

해가 가까운 화성 땅은 예로부터 물이 많은 대신 산은 한결 같이 작고 나지막한 언덕으로 이어져 있다. ‘꽃뫼"라 불리는 화산도 해발 1백 미터에 불과한 야산으로 옛날 이 산 밑에 가난한 어부가 살았다고 한다.

일찍이 아내를 잃고 외롭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이 어부는 어느 날 고기잡이하러 바다에 나갔다가 물에 빠져 죽어가던 한 여인을 구출한다.
어부에 의해 목숨을 구한 이 여인은 놀랍게도 지상의 온갖 꽃을 주관하는 천상의 선녀라고 했다. 바닷가 벼랑 끝에 매달려 시들어가는 한 꽃나무를 살리려다 그만 실족하여 자신이 죽을 뻔한 것이었다.

빈집에 소가 들어왔다는 옛 말은 이를 두고 말함인가. 홀로 외롭게 살아가던 홀아비에게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가 오다니. 선녀는 자신을 구해준 은혜에 보답한다면서 일 년 간 어부와 동거하기로 언약하고 화산 중턱에 둘만의 보금자리를 마련한다. 홀아비와 선녀 신부의 신혼은 정말 꿈같은 세월이었다. 신부는 꽃을 관장하는 선녀답게 이들의 보금자리는 갖가지 기화요초(琪花瑤草)로 장식되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은 짧게 느껴지기 마련이며 여기다 선녀의 약속은 매정하리만치 철저하기만 했다. 부부의 연을 맺은 지 꼭 1년 만에 그녀는 자신을 쏙 빼어 닮은 딸 하나만을 남긴 채 미련 없이 지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딸의 이름은 화심(花心)이라고 했는데 선녀 어머니를 닮아 그녀 역시 이름 그대로 꽃처럼 아름다웠다고 한다. 생전 처음 행복의 의미를 일깨워준 선녀 아내가 떠나버린 이 공허한 세상 그러나 어찌하랴 비록 상심은 컸지만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어부는 오로지 딸 화심을 보는 것으로 대신하며 살았다.

세월은 흘러 화심이 성장하여 출가할 무렵에 이르러 아버지 어부는 깊은 병에 들고 말았다. 밖에서는 미모의 화심을 탐내는 구혼자들의 발길이 줄을 이었으나 그녀는 병든 아버지를 남겨 두고 저 혼자 시집갈 수는 없었다. 이럴 땐 으레 등장하는 힘 있는 권력자가 있기 마련인데 이들 구혼자 중에 변사또와 비슷한 타입의 이 고을 부사도 끼어 있었다. 막강한 권력 앞에 연약한 부녀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여기다 화심에게는 춘향이의 경우처럼 이도령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관가로 끌려가 참수를 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참으로 억울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화심의 처형 장면은 참으로 극적이었다. 망나니의 칼날이 화심의 목을 치는 순간 그녀의 몸은 하늘로 치솟음과 동시에 “아버지!”라는 외마디 비명소리가 허공에 메아리쳤다. 놀라운 일은 다음 순간에 벌어진다. 그녀의 절규는 마디마디 피가 되어 튀었고, 그 피가 순간적으로 새빨간 꽃비로 변하여 이내 땅위로 흩어지는 게 아닌가. 꽃비로 내려 지상에 흩어진 그 꽃은 옛날 아버지가 선녀 어머니를 구할 때 그녀의 머리에 꽂아 주었던 바로 그 꽃이라고 했다.

뒤늦게 형장으로 달려간 아버지는 딸의 시신 대신 그곳에 흩어진 꽃비를 수습하여 그들이 살던 산 밑 오두막집 곁에 묻었다. 꽃비가 쌓여서 이루어진 무덤, 그 ‘꽃뫼"를 후세 사람들은 화산(花山)이라 불러주게 되었고 훗날 이 화산 곁으로 성을 쌓게 되었으니 그 성을 화성(花城) 또는 화성(華城)이라 일컫게 되었다는 그런 얘기다.

아버지를 외치던 절규가 꽃비가 되고, 그 꽃비가 쌓여 꽃뫼 즉 화산이 되었는데 그 화산에 훗날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와 함께 나란히 묻혔음은 이 무슨 기연일까? 한낱 얘깃거리에 불과한 전설이 이렇게 역사적인 사실과 부합되다니. 수원에서 병점을 거쳐 발안으로 가는 화산 중턱에 두 왕릉이 나란히 누워 있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를 합장한 융릉(隆陵)과 그의 아들인 정조와 그 비를 합장한 건릉(健陵)이 바로 그 전설의 현장인 것이다.

주지하는 대로 오늘의 수원은 정조에 의해 건설된 계획도시로서 본래의 수원은 지금의 융·건릉과 그 원찰(願刹)인 용주사(龍珠寺)가 있는 화산 주변이었다. 열 한 살의 어린 나이로 뒤주 속에서 비참하게 죽어 가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최후를 본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선친의 묘를 양주 배봉산에서 이 곳 화산으로 옮기고 해마다 능행길에 오르곤 했음은 누구나 익히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선친의 묘를 굳이 이 곳 화산으로 옮긴 것은 정조가 꽃뫼의 전설을 알고 있었기에 그랬을까?

어떻든 정조는 아버지의 피맺힌 원혼을 달래기 위해 능역 주변을 온통 꽃으로 장식하고 관리에 심혈을 기울었다. 능행길에 꼭 넘어야 했던 지지대(遲遲臺) 고개의 지명유래나 고개 밑 노송지대에서의 일화는 아버지를 흠모하는 정조의 효심을 잘 대변해 준다.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한번은 소나무 숲에 송충이 떼가 들끓었을 때 정조는 그 중 한 마리를 잡아 입 속에 넣고 씹으면서 이렇게 진노했다는 것이다.

“네놈들이 아무리 미물이라고 하나 아버지를 위하는 과인의 충정을 이다지도 좀먹는단 말이냐!” 나라님의 효심에 하늘도 감동했음인지 이 일이 있고 난 뒤로 난데 없는 까마귀 떼가 몰려와 솔잎에 붙은 송충이를 모두 먹어치웠다던가. 어떻든 능행길은 눈물겨운 효행의 길이었고 그것을 임금은 만백성들에게 여실히 몸으로 보여주었다.

임금은 시흥을 지나 화산이 보이는 고개에 다다르면 “걸음이 왜 이렇게 더디냐”며 행군을 재촉했고, 참배가 끝나 환궁할 때면 “제발 좀 천천히 가자”면서 수 십 번이나 선친의 유택 쪽을 되돌아보곤 했다. 그래서 이름 붙어진 ‘지지대"(遲遲臺) 고개와 함께 선친의 내세 평안을 기원한다는 안양의 만안교(萬安橋)도 정조의 효행길이 남긴 유적이 되었다.



정조의 능행길 중 노송지대

[사진-9. 정조의 능행길 중 노송지대]

꽃뫼의 전설과 정조대왕의 효행 사적은 우연의 일치라고는 볼 수 없을 것 같다. 아버지를 주제로 한 이 전설과 사적은 후세인에게 좋은 교훈이 된다는 점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 세대가 그대로 믿고 싶은 이야기이다. 교육적인 견지에서도 학생들로 하여금 융·건릉이나 용주사 관람을 권장할 필요가 있으며 나아가 꽃뫼(화산)의 전설도 아울러 들려주었으면 좋을 듯하다. 그리하여 수원, 화성은 영원한 ‘효(孝)의 성곽 고을"로 우리의 가슴 속에 자리 매김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융·건릉을 품속에 안고 있는 꽃뫼〔花山〕말고도 바로 인근에 또 다른 꽃뫼가 있고, 여기에도 이와 비슷한 전설이 있다고 한다. 또 다른 꽃뫼 즉 화산(花山)은 수원시 화서 2동 391번지 일대의 ‘꼴미", ‘꽃미", ‘꼴뫼" 등으로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화서 전철역에서 서울 쪽으로 향해 바로 왼쪽에 아파트 숲이 펼쳐 있고 그 사이로 언덕 같은 작은 산이 오뚝 솟아 있는데 꽃뫼는 두 개의 작은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어 철로 쪽의 것을 ‘큰 봉재", 서쪽의 것을 ‘작은 봉재"라 부른다. 이 곳에 수년 전까지만 해도 경주 김씨를 비롯한 30여 호의 집들이 자연부락을 이루고 살았다는데 지금은 개발로 인해 원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이 곳의 꽃뫼 전설은 앞서 소개한 것보다 극적인 효과도 적고 재미도 훨씬 덜한 편이다. 병든 홀아버지를 모시고 살던 이 마을 처녀가 이웃집 총각한테 몸을 더럽히자 산에 올라가 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했고, 처녀의 시신이 묻힌 그 자리에 꽃이 피어났기에 이 산을 꽃뫼라 부르게 되었다는 그런 평범한 얘기일 뿐이다. 얼마 전에 이 곳에 대한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이 곳이 삼국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중요한 유적지임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화성이란 지명의 기원이 된 화산은 어디까지나 융·건릉을 안고 있는 화산이 되어야겠고, 또 정조의 효심(孝心)과 연결시키기 위해서라도 화심(花心) 처녀의 전설을 되새기는 편이 더 의미가 있을 듯 싶다.

 

 

 

‘솔"(松·細) 계 (系) 어사에서 비롯된 이름

앞서 언급한 물(水)과 곶(串) 이외에도 화성·수원 지역에는 유난히도 ‘송(松)"자계 지명이 많음이 눈에 뜨인다. 송(松)은 솔, 또는 소나무를 뜻하는 한자로서 우리나라 산야에 이 나무가 많고 또 이 나무를 좋아함으로 해서 지명에도 많이 반영되었음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하겠다. 일반적으로 송산(松山), 송정(松亭)이라면 소나무가 우거진 산이나 소나무 숲 속에 있는 정자를 떠올린다. 그러나 지명에 쓰이는 모든 ‘松"자가 소나무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우리말 ‘솔"은 소나무 이외에도 ‘솔다"(細)란 말의 ‘솔"과 꼭대기(頂·首)를 뜻하는 ‘소리/수리"의 준말인 ‘솔/술"과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의 관계에 있다. 따라서 지명 어원을 탐구할 때 이런 사정에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 예로 솔섬(松島)이란 섬 이름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한다. 이 말은 ‘솔+섬"의 구조로서 소나무가 많은 섬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솔-"은 “넓이나 폭이 좁다”(小, 細, 窄)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전국 각지에 퍼져 있는 작은 섬 곧 부산이나 인천의 송도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솔섬"의 한자 이름인 ‘송도"로부터 ‘솔"의 의미가 바로 유추될 것 같지만 사실 이러한 섬들은 소나무와는 별 관계가 없고 대개 매우 작은 섬이어서 무인도인 경우가 많음을 볼 수 있다.

강화도의 ‘손돌"〔孫梁〕이나 향남면 소재의 ‘손개"〔孫浦〕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솔섬(본래는 ‘손섬"이 맞다)의 ‘솔"은 “작고 가늘고 뾰족하다”는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전국의 모든 송도중에 소나무와 관련이 있는 섬이 하나도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대개는 ‘작은 섬"이란 의미로 명명된 솔섬이 송도로 와전된 것이라 하겠다.

또 하나의 어사 솔/ 술은 높은 곳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맨 꼭대기를 뜻하는 정수리라고 할 때의 ‘수리"와 꽃술, 입술이라고 할 때의 ‘-술"이 여기 해당된다. 또한 하늘을 나는 새 중에서 가장 높이 난다는 소리개> 솔개, 독수리의 소리/ 수리도 이와 어원이 같은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 지역의 솔(松)계 지명 용례를 찾아보기로 한다.

무송동(茂松洞)·수리재, 술재
본래 남양군 둔지곶면 지역인데 지금까지 나온 각종 지명 해설서에서 이 곳이 소나무가 무성한 고개 밑이 되므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전래지명이 ‘수리재" 또는 ‘술재"인 점을 고려할 때 이는 소나무가 아니라 단순히 높은 고개를 지칭함을 알 수 있다. 첫 음절의 ‘무(茂)-"는 무성하다는 뜻으로 해석하기 쉬우나 지명을 2자로 맞추는 과정에서 첨가되었거나, 아니면 또 다른 지명과의 병합에 의해 붙여진 말일 것이다.
쌍송교(雙松橋) (신남동)
신남리의 매호(梅湖) 앞에 있는 다리 이름이다. 여기서 쌍송(雙松)은 소나무가 쌍으로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지명들이 서로 병합될 때 ‘송(松)" 자형 지명이 서로 겹쳤거나 두 글자를 합치다 보니 이런 이름이 생기게 되었다.
송림동(松林洞), 반송(盤松)
본래 남양군 화척지면의 지역으로 소나무 숲이 우거진 곳이라 이런 이름을 얻었다. 한편 반송은 장전리에 있는 마을로서 키가 작고 가지가 옆으로 퍼진 반송(盤松)이란 소나무가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반송리(盤松里)·돌산머리 (동탄면)
수원(화성)군 동북면 지역으로 돌산머리에 반송이 있었으므로 남양의 경우와 같은 형식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송리(松里)·소아래, 소라리, 솔아래 (동탄면)
이 곳은 본래 어탄면 지역으로 소(못)의 아래쪽에 있었으므로 소아래, 소라리로 불리었던 것 같다.
송정리(松亭里) (마도면, 서신면 상안리)
본디 남양군 쌍수리면에 속한 곳으로 소나무 정자 또는 소나무 밑에 정자가 있었기에 붙은 이름이다.
쌍송리(雙松里) (마도면)
쌍봉동(雙峰洞)의 쌍(雙)과 ‘솔치"〔松峙〕의 송(松)을 합성하여 쌍송리가 되었다. 남양 신남리의 쌍송교는 여기서 따간 이름이다.
송라리(松蘿里)·소골, 솟골 (매송면)
매송면(梅松面)은 ‘매꼴"〔梅谷〕의 매(梅)와 ‘솔꼴"〔松洞〕의 송(松)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한편 송라(松蘿)를 ‘소(솟)골"이라 부르는 것을 보면 송탄면의 ‘소아래/소라리"란 이름과 마찬가지로 못 아래쪽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보인다.
송교리(松橋里)·솔다리 (서신면)
본래 남양군 서여제면 지역으로 소나무로 놓은 다리가 있어 붙은 이름이라 하나 그 본뜻은 ‘손다리" 즉 작고 좁은 다리를 지칭하는 말로 보인다.
송산동(松山洞)·솔뫼 (송산면 중송리)
면(面)의 이름이기도 한 송산은 말 그대로 소나무가 많은 산 즉 ‘솔뫼"의 한역 지명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송양동(松陽洞)·솔미 (양감면 대양리 (大陽里))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송산리(松山里)·솔말, 솔미 (양감면)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송내동(松內洞)[송내원(松內院)]·솔안 (양감면 용소리)
이 마을에 소(용소(龍沼)라 부르는)가 있었으므로 소의 안쪽이라는 뜻으로 ‘소안", 또는 ‘솔안"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솔안을 한자로 송소동(松沼洞)이라 적기도 한다.
송내동(松內洞)·솔안말 (장안면 금의리)
양감면 용소리의 송내〔松沼〕와 같은 뜻의 지명일 것이다.
송모롱이 (정남면 신리)
‘안바리미"(내발산, 신리)에 딸린 ‘솔모롱이"란 말은 소나무 모퉁이 밑일 수도 있고 또는 그냥 좁은 모퉁이를 지칭할 수도 있다.
간송곡(間松谷)·샛송골 (태안읍 능리)
고려 때 아기능이 있었던 ‘능골"에 딸린 곳으로 ‘송골"〔松谷〕과 ‘마당뫼"〔場山〕의 사이(줄여서 ‘새", 또는 ‘샛")에 있는 마을이다.
간송곡(間松谷)·샛송골 (태안읍 능리)
고려 때 아기능이 있었던 ‘능골"에 딸린 곳으로 ‘송골"〔松谷〕과 ‘마당뫼"〔場山〕의 사이(줄여서 ‘새", 또는 ‘샛")에 있는 마을이다. 여기서의 송골은 손골〔細谷〕 즉 좁은 골짜기를 뜻한다.
솔미 (태안 송산리·솔뫼·솔읍)
송산면과 양감면 소재의 송산(松山)과 같은 어형의 지명이다

 

 

행정구역 개편에서 비롯된 합성지명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듯이 지명도 세월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지명의 변천은 고유어로 된 전래지명보다는 행정구역의 개편에 따른 법정지명에서 더 현저하게 나타난다. 지명은 본래 보수성이 강하여 법정지명이 새로 생겨 이를 강요하더라도 전래지명만은 그 끈질긴 생명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개칭되는 법정지명의 특징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기존의 마을들을 통폐합할 때 본래 지명의 한 글자씩을 떼어 이를 합성지명으로 만드는 일이다. 대개 기존 지명의 첫 글자를 따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때때로 새 지명의 어형 및 의미를 고려하여 두 번 째 자를 취할 수도 있다.

이처럼 병합으로 이루어진 합성지명(合成地名)은 대개 행정 편의에 의한 것으로 두 곳의 지명을 균등히 합침으로써 양쪽 주민의 불만을 무마할 수 있는 이점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런 합성지명은 고유지명의 순수성을 외면하고 지명 본래의 특성을 무시한다는 점에서 반드시 바람직하지만은 않다.

서두에서도 강조했듯이 지명 속에는 그 곳 지형의 특성과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의 문화가 배어 있기에 이를 외면한다면 우리의 고유한 문화유산을 무시하는 것과 별반 다름이 없어 보인다. 두, 세 지명을 합했을 때 처음 얼마 동안은 사람들이 이를 알 수 있을지 몰라도 세월이 흘러 새 지명에 익숙해지다 보면 옛 지명 본래의 의미는 까맣게 잊어버릴 우려가 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말이 있듯이 옛것을 잃어버림이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 역사상 최초의 지리지인 『삼국사기』 지리지가 나온 이래 오늘날까지 수차례의 크고 작은 지명 개칭이 있었다. 그런 가운데 화성 및 수원지역의 지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일은 1914년 3월 13일에 공포되어(조선총독부령 제3호) 4월 1일부로 단행된 대대적인 지명 개편이 될 것이다. 일제는 경기도 소재 모든 면(面)의 명칭과 구역의 통폐합을 통한 일대 개편을 단행하였다.

수원 및 화성도 예외는 아니어서 지명의 일원화란 명목으로 각 동리(洞里)의 명칭을 리(里)로 통일시켰다. 그 이후 화성군이 화성시로 승격된 오늘에 이르기까지 부분적인 개칭이 없지 않았으나 현재의 화성 지명의 근간은 이 때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개략적인 내용을 보면 당시 수원군은 20개 면(面)으로 통폐합되었고, 군내의 전체 마을은 170개의 리(里)로 고정되었다.

참고로 개편된 면(面) 이름만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수원면(水原面,6리), 일형면(日荊面,16리), 태장면(台章面,13리), 안룡면(安龍面,13리),
매송면(梅松面,9리), 봉담면(峰潭面,15리), 향남면(鄕南面,20리), 양감면(楊甘面,10리),
음덕면(陰德面,15리), 마도면(麻道面,10리), 송산면(松山面,14리), 서신면(西新面,13리),
비봉면(飛鳳面,9리), 팔탄면(八灘面,16리), 장안면(長安面,10리), 우정면(雨汀面,13리),
의왕면(儀旺面,9리), 정남면(正南面,19리), 성호면(城湖面,20리), 동탄면(東灘面,13리),
반월면(半月面,16리)

여기서 보면 지금의 그것과 다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곧 현재는 수원, 의왕, 성호, 반월, 일형, 음덕 등의 면이 다른 지역으로 분리되고, 태장과 안용이 합한 태안면, 그리고 봉담면이 읍으로 승격하고 시청이 들어선 남양동이 독립하는 등의 변동이 그것이다.

원래 지명은 한자로 써야 제 맛이 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한자로 표기되어야 그 의미도 분명해지고 또 다른 지명과의 변별도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다. 상기 기술에서 보듯 일제 때 개편된 면의 명칭을 한자로는 썼지만 지금 와서 보면 굳이 한자로 쓸 필요가 없을 듯이 보인다. 왜 그런가 하면 상기 면 명칭들이 유감스럽게도 대부분 합성지명으로 변질되어 지명 본래의 의미를 잃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들 한자어 이름만으로는 그 지역 고유의 특성을 알기 어렵다는 얘기다. 여러 문헌에 수록되어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이 기회에 다시 한 번 기존의 어떤 지명이 합하여 오늘의 면 이름(面名)을 형성하게 되었는지를 알아보기로 한다.

동탄면(東灘面) : 동북(東北)과 어탄(漁灘)의 각 제1음절과 2음절의 합성
매송면(梅松面) : 매곡(梅谷)과 송동(松洞)의 각각 제1음절의 합성
봉담읍(峰譚邑) : 삼봉(三峰)과 갈담(葛譚)의 각각 제2음절의 합성
서신면(西新面) : 서여제(西如堤)와 신리(新里)의 각각 제1음절의 합성
양감면(楊甘面) : 양간(楊澗)과 감미(甘味)의 각각 제1음절의 합성
우정면(雨汀面) : 우정(雨井)과 압정(鴨汀)의 각 제1음절과 2음절의 합성
정남면(正南面) : 정림(正林)과 남곡(南谷)의 각각 제1음절의 합성
태안읍(台安邑) : 태장(台章)과 안룡(安龍)의 각각 제1음절의 합성
향남면(鄕南面) : 공향(貢鄕)과 남곡(南谷)의 각 제2음절과 1음절의 합성
장안면(長安面) : 초장(草長)과 장안(長安)의 각각 제2음절과 1음절의 합성
송산면(松山面) : 송산(松山)과 수산(水山)의 각 제1음절과 2음절의 합성

이렇게 보면 화성의 면 이름 중에서 남양(南陽), 마도(麻道), 비봉(飛峰), 팔탄(八灘) 또는 송산(松山), 장안(長安) 정도가 합성을 면하고 본래의 제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 이중에서 남양(南陽)과 장안(長安)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지명으로 보이는데 특히 장안의 경우는 수원시의 장안구(長安區)와 같은 이름을 쓰고 있다.

장안(長安)은 중국의 주(周)나라 이래의 진(秦), 전한(前漢), 수(隋), 당(唐) 등의 수도명으로 삼았던 이름이다. 정조가 화성의 북문 이름을 장안문(長安門)이라 이름 한 것도 그 옛날 중국에서 태평성대를 구가했던 한(漢)·당(唐)의 수도 장안의 영화를 이 땅에서도 재현해보고자 했던 뜻이 있었을 것이다.

한편 비봉면(飛峰面)은 비봉산의 이름에서 팔탄면(八灘面)은 자안천과 발안천이 흐르는 모습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면의 명칭들이 이처럼 합성지명으로서 지명 고유의 의미를 잃었다 하여 이를 다시 돌이킬 수는 없다고 본다. 다만 이 이름에 대해 각 고을(面)마다 저마다의 개성을 살리고 그 이름에 걸맞는 이미지를 부각시킬 수 있도록 현지 주민들의 배려와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좋은 이름은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이 자기 고장을 아름답게 가꾸고자 하는 마음가짐에 달렸다고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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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관리담당 : 문화예술과 | 문화재담당 ☎ 031-369-2068 최종수정일 : 2009-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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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지정문화재

문화재는 그 형태와 역사적 배경, 조형미와 역사성 등 모든 면에서 으뜸가는 것을 국가에서 지정하여 국보, 보물, 사적 등으로 구분 보호하고 있으며, 각 지방의 우수한 문화재는 그 지방 단위로 유형 문화재, 기념물, 문화재 자료 등으로 지정 보존하고 있다.
우리 조상들이 남겨놓은 유형, 무형의 문화적인 유산을 문화재라고 할 때 화성시 관내에는 실로 다양하고도 다채로운 문화재가 가득함을 느낄 수 있다.

화성시 관내에는 국보, 보물, 지방 유형 문화재, 기념물, 문화재 자료 등은 물론 중요 민속자료와 천연 기념물, 무형문화재, 향토유적 등 다양한 방면의 문화재가 곳곳에 보존되어 있어 문화재의 보고(寶庫)임을 느끼게 한다.
종교적으로 볼 때에도 불교적인 유적, 유물, 유교적인 유적, 유물, 기독교적인 유적, 유물 등이 화성시 전역에 고루 자리 잡고 있다. 2002년 12월 현재, 화성시에 소재한 국가지정문화재의 목록을 정리해 보면 표-1과 같다.

지정번호 문화재명 위 치 지정일자 제작년대 비 고
국보 제120호 용주사 범종 송산동 188 1964.03.30. 고려시대
보물 제980호 봉림사 목아미타불 좌상 북양동 642 1984.04.10. 1362년
보물 제1095호 봉림사 목아미타불 좌상 복장전적 송산동 188 1991.09.30. 1378년
사적 제206호 융릉·건릉 안녕동 산 1-1 일원 1970.05.26. 조선 정조
사적 제217호 당성 서신면 상안리 산 32 일원 1971.04.15. 고구려
사적 제299호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 향남읍 제암리 322-4 일원 1982.12.21. 일제시대
천연기념물
제414호
화성 고정리공룡알화석지 송산면 고정리 산 5 일원 2000.03.22. 중생대
백악기
중요민속자료
제124호
화성 정용채가옥 서신면 궁평리 109 1984.01.10. 1700년경
중요민속자료
제125호
화성 정용래가옥 서신면 궁평리 108 1984.01.10. 19C말

천연기념물

제470호

전곡리물푸레나무

서신면 전곡리 149-2

1996.04.04.

17세기

식목추정

화성시에서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용주사의 범종(제120호)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신라시대 범종의 각부 양식을 잘 계승하면서 고려시대 양식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어 고려 초기 범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그 위상이 높게 평가되고 있다.

보물로는 북양동에 위치한 봉림사의 목조아미타불좌상(제980호)과 목조아미타불좌상복장전적일괄(제1095호)이 있는데 봉림사의 목조아미타불좌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려시대의 목조여래좌상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그 이전 시기에도 목불을 조성하기는 하였으나, 현재까지 고려시대 조성으로 판명된 것은 봉림사의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유일하다. 이와 함께 목불에서 복장 전적 8종이 발견, 조사되어 보물로 지정 보존되고 있는 바 이 또한 고려시대 희귀본으로 주목받고 있다.

국가지정 사적으로서는 당성(唐城, 제217호), 융릉·건릉(隆陵·健陵, 제206호), 제암리 3·1운동순국유적(堤巖里三一運動殉國遺蹟, 제299호)이 있다. 사적이란 글자 그대로 역사의 현장, 역사의 고장, 역사의 증언을 알려주는 역사적인 기념물이다. 삼국시대에 조성된 당성의 역사성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융릉과 건릉은 조선시대 능묘 양식을 연구하고 석조 유물을 살피며 석조 조각을 비교 검토할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인 점에서 주목을 끌고 있다.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은 최근의 것이기는 하지만 일제 침략기의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유적지로 그 역사성에 비추어 다시없는 유적지로 평가되고 있다. 제암리 교회에서의 참상은 일제의 잔악상이 그대로 드러난 현장으로 우리 후손에게 남길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도 잘 보존해야할 것이다.

천연 기념물에 있어서도 다른 고장 못지않게 귀중하게 여겨지는 문화재가 있다. 송산 공룡알화석지와 전곡리물푸레나무가 그것인데 특히 천연기념물 제470호로 지정되어 있는전곡리물푸레나무는수령 350년 추정으로 수목이 수려하고 아름답다.
중요 민속자료로는 정용채가옥(鄭用采家屋, 제124호)과 정용래가옥(鄭用來家屋, 제125호)이 지정 보존되어 있다. 가옥들의 역사성·구조·배치 등으로 보았을 때 우리나라의 민속자료로는 국가적 차원에서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어서 우리 고장의 또 하나의 자랑거리라 하겠다.

 

도지정문화재
지정번호 문화재명 위 치 지정일자 제작년대 비 고
도유형 제11호 금동향로 송산동 188 1972.05.04. 조선시대
도유형 제12호 청동향로 송산동 188 1972.05.04. 조선시대
도유형 제13호 용주사 상량문 송산동 188 1972.05.04. 조선 정조
도유형 제14호 전적 수사본 송산동 188 1972.05.04. 조선시대
도유형 제15호 용주사 병풍 송산동 188 1972.05.04. 조선 정조
도유형 제16호 용주사 대웅전 후불탱화 송산동 188 1972.05.04. 조선 정조
도유형 제17호 불설부모은중경 송산동 188 1972.05.04. 조선 정조
도유형 제85호 윤계선생순절비 남양동 산 29 일원 1979.09.30. 1636년
도무형 제2호 부의주(동동주) 향남읍 구문천리
540-4
1987.05.14. 미상 기능보유자:
권오수
도유형 제136호 서거정선생묘지석 봉담읍 왕림리 47 1989. 6. 1 1488년 세종시대
분실, 22쪽 중 19쪽 보존
도유형 제163호 박세채영정 동탄면 영천리 142 1996.12.24 조선(17세기말)
도기념물 제13호 남이장군묘 비봉면 남전리 산145 일원 1973.07.10. 1441년
도기념물 제86호 백천장 선생묘 기안동 140-1 일원 1985.09.20. 고려시대
도기념물 제93호 수원고읍성 기안동 산 1 일원 1986.07.10. 고려말
도기념물 제153호 신빈김씨묘역 남양동 산 131-17 일원 1994 12.24. 1464년
도기념물 제161호 만년제 안녕동 152 일원 1996.07.22. 1797년
도기념물 제168호 남양홍씨묘역 서신면 홍법리 산 30 일원 1999.04.23. 조선 중종 봉분11기
도민속자료 제6호 정원채고가 송림동 320 일원 1985.06.24. 1904년
문화재자료 제34호 남양향교 남양동 335 1983.09.19. 1397년
문화재자료 제35호 용주사 대웅보전 송산동 188 1983.09.19. 1790년
문화재자료 제36호 용주사 천보루 송산동 188 1983.09.19. 1790년
문화재자료 제74호 홍승인고가 정남면 문학리 628 일원 1983.09.19. 19세기 말
문화재자료
제112호
남양풍화당 남양동 651-6 일원 2002.09.16. 1852년

문화재자료

제121호

우성전,우하영묘역

매송면숙곡리 산79-1 일원

2003.04.21.

조선중기

우리 화성시에는 유형문화재로 박세채 영정·서거정선생 묘지석·용주사 금동향로·용주사의 대웅전 후불탱화를 비롯하여 용주사의 병풍·상량문·전적수사본·청동향로·불설부모은중경과 윤계선생 순절비 등이 지정 보존되어 있다. 용주사의 유물들이 대부분 차지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특히 대웅전의 후불탱화는 단원 김홍도의 그림으로 알려져 있는 귀중한 것으로 그 화법이나 채색, 사물의 배치 등 전체의 탱화 작성이 가히 보물급이라는 칭찬을 받고 있다. 또한 부모은중경도 높이 평가되고 있어 이 방면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박세채 영정은 채색과 구도로 주목받고 있으며 서거정 선생의 묘지석과 윤계선생 순절비는 두 분 선생의 발자취를 밝히는 데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기념물로는 남양홍씨묘역·남이장군묘·만년제·백천장선생묘·수원고읍성·신빈김씨묘 등이 지정되어 있다. 이 가운데에서 남양홍씨와 남이 장군의 묘역은 각기 묘소의 양식과 석물들의 배치 등이 주목을 끌고 있다. 수원 고읍성과 만년제 등은 이 고장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는 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경기도 민속자료로는 정원채 고가가 지정되어 있는데 건물의 구조뿐 아니라 방과 마루, 사랑채의 배치 등이 주의를 끌며 골기와 지붕이나 문틀 등의 세세한 부분까지도 주목받고 있다.

무형문화재로는 상여회다지소리가 지정되어 있다. 이것은 회다지를 진행할 때 읊는 소리이기 때문에 한 사람으로 재연할 수 없어 여러 인원이 필요하다. 또한 소리란 교과서식으로 학습하며 터득하는 것이 아니므로 잊혀지지 않도록 수시로 실연하고 맥을 이어가지 않으면 그 보존이 어렵다. 따라서 이에 대한 보존 대책이 있어야 할 것이다.

지방문화재에는 유형문화재·기념물 이외에 문화재자료가 있다. 문화재자료는 문화재로 보존할 가치는 있지만 유형문화재나 기념물 등으로 지정하는 데 다소 미흡한 점이 있어 설정한 문화재 종류이다. 그러나 실상 그 자료의 역사성이나 조형적인 면에서 좀 더 소상하게 알아보면 지정가치를 한 단계 높여 유형문화재 혹은 기념물로 승격시킬만한 자료가 상당수 있는 것으로 안다. 보물로 지정되었던 것이 그 자체는 물론 주변의 역사성에 비추어 국보로 승격되어 지정된 문화재가 여럿 있음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화성시에 지정되어 있는 문화재 자료로는 남양 향교·용주사 대웅보전·용주사 천보루·홍승인 고가 등이 있는데 이 가운데에서 용주사 대웅보전은 역사성이나 건축양식 등으로 보아 문화재 자료에서 승격시킬만한 건축물이 아닌가 한다. 남양 향교도 건축적인 면에서 다소 뒤진 점이 있다고 해도 역사적으로 보아 기념물 지정의 대상은 되지 않을까 하는 욕심이 생긴다. 홍승인 고가도 보수한 부분이 다소 있기는 하지만 규모와 배치면에서 드문 케이스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향토유적
지정번호 문화재명 위 치 지정일자 제작년대 비 고
향토유적 제1호 안곡서원 서신면 상안리 585 1986.5.20 1666년 도원제공,
송춘공,
인제공의
위패봉안
향토유적 제2호 최루백효자비각 봉담읍 분천리 165 1986.5.20 조선시대
향토유적 제3호 이곤선생 효자문 봉담읍 상리 산 97 1986.5.20 조선시대
향토유적 제4호 홍담 효자각 서신면 흥법리 산 32 1986.5.20 1539년
향토유적 제5호 한명윤·밀양박씨
충렬각
양감면 정문리 198-3 1986.5.20 1593년
향토유적 제6호 박장철효자각 동탄면 장지리 493-2 1986.5.20 1780년 1945중건
향토유적 제7호 금산사 팔탄면 창곡리 산 14 1986.5.20 1912년 김유신, 설총,
최치원 위패봉안
향토유적 제9호 수촌교회 장안면 수촌리 674-1 1986.5.20 1905년
향토유적 제10호 홍한 묘역 서신면 홍법리 산 70-1 1986.5.20 조선시대
향토유적 제11호 최운식 기념비 정남면 괘랑리 산 143-1 1999.10.18 1940년
향토유적 제12호 남양홍씨 열녀
정려문
송림동 산 125 1999.10.18 조선 정조
향토유적 제13호 반남박씨 묘역 동탄면 석우리 산 1-1 2001.9.14 조선시대
향토유적 제14호 노작 홍사용 묘역 동탄면 석우리 산 77 2002.12.3 1947년

화성시에는 향토유적이라는 명칭 하에 보존책을 강구하고 있는 문화유산들이 상당수 있다.
금산사·남양홍씨 열녀정려문·박장철 효자각·수촌 교회·안곡 서원·이곤선생 효자문·최루백 효자비각·최윤식기념비·한명윤·밀양박씨 충렬각·홍담 효자각·홍한 묘역 등이 향토 유적으로 지정, 보존되어 있는데 이들 문화유적은 문화재자료로도 지정할 수준이 아니어서 자료로 지정하지 않고 다만 향토문화재로만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향토유적으로 지정 보존하고 있으니 유적을 보존한다는 뜻에서는 별다른 문제가 없겠으나 무엇으로든지 지정되면 지정 종류에 따라 그 문화유산의 위상이 문제되고 또한 지정 종류에 따라서 보존상 국비지원·지방비 지원·자비부담 보존책이 따르기 때문에 이러한 지정 문제는 신중을 기해야 될 것이다. 향토유적에는 사찰문화재는 물론 유교 문화재·기독교 문화재 등 각 종교에 따른 문화유산들도 있는데 어떠한 종교에도 편중되지 않는 판단으로 유적 지정에 불평불만이 없도록 해야 한다. 옛 선학들의 말씀이 “지정하는 데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지정되면 여하튼 보존 된다.”고 하였다. 평범한 말이지만 오늘날 문화유산을 접할 때 다시금 떠오른다.

한편 화성시에 전해지는 많은 유적·유물들 중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한 것들을 시대별, 종류별 등으로 나누어 제6장에서 살펴볼 것이다. 그 중 용주사의 목어는 대단히 주목받는 목조 조각품이라 하겠다. 불가에서는 불구사물(四物)이라 하여 범종과 법고·운판·목어를 일컬어 대체적으로 종각이나 누마루전각에 이 사물(四物)들을 달아주어 행사 때마다 치고 있다. 범종은 사람을 제도하기 위한 종이어서 인경이라고도 말하고 법고는 네발 달린 짐승, 예컨대 소, 개, 돼지 등의 동물을 제도하기 위하여 치는 북을 일컬음이다. 하늘을 나는 새들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운판을 쳐서 창공에 땡땡 맑은 소리가 울리도록 하며, 헤엄쳐 다니는 물속의 고깃떼들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목어를 따다닥 쳐서 장단을 맞추는 것이다. 이 때 목어를 보면 길쭉한 나무를 깎아 고기모양으로 만들고 그 속을 모두 파내어 퉁퉁 소리가 나도록 한다. 그리고 표면에는 고기의 머리와 비늘, 지느러미까지 채색하여 물고기와 똑같은 형태를 만들어 공중에 매달아 치기 때문에 그 소리도 맑으면서 가라앉아 마치 물 속에서 들리는 소리인 듯 하다. 이 같은 면에서 용주사의 목어는 그 조성 양식이나 수법에 있어서 귀중하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불교적인 문화유산, 석조물 편을 별도로 ‘석탑과 부도"로 설정하여 관항리 3층 석탑, 문학리 부도, 문학리 5층 석탑, 선화대사 부도, 용주사 5층 석탑, 용주사 천보루 앞 5층 석탑을 다루고 있는데 이 가운데서 관항리 3층 석탑과 선화대사 부도 및 석비, 용주사의 5층 석탑과 천보루 앞 5층 석탑은 대단히 주목할만한 석조물들이라 하겠다.

우선 관항리 3층 석탑은 현 위치가 원위치인지는 알 수 없으나 기단부 구성이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찾아볼 수 없는 특수한 고려시대의 양식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즉 하대석은 석등 하대석과 같이 8각 연화문 대석으로 이루어졌고 그 위의 중대석은 8각 면석으로 조성되었다. 그리고 그 위의 갑석은 하면이 8각으로 8판의 앙련(仰蓮)이 조각되었으나 측면에 이르러는 정사각형의 갑석이다. 그리고 상면에 널찍한 정사각형의 괴임대를 마련하여 답신부를 받치고 있다.

이렇듯 기단부가 정사각형의 평면이 아니고 8각 복련의 연화대 하대석과 8각 면석, 정사각형의 갑석 하면이 8각 앙련으로 구성된 석탑은 고려시대 건립으로는 오직 이곳의 관항리 3층 석탑 뿐이다. 탑신부에 있어서 부재가 결실된 부분이 있으므로 국가지정에는 못 미치더라도 지방유형문화재로는 지정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되어진다.

선화대사의 부도와 석비도 선화대사의 역사적 위상, 조선시대의 불교사 연구상 그의 역할, 부도와 석비 자체의 양식과 수법 등으로 보아 지방문화재로 지정할 가치가 충분한 것으로 사료된다. 선화대사의 부도와 석비는 현재 옛 만의사 절터에 나란히 건립되어 있다. 부도는 조선시대 전형적인 양식인 1석 조성의 석종형 부도로 상단의 보주까지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석비는 바로 옆 동쪽에 건립되어 있는데 비신 상단에 이수가 마련되어 비신과 이수가 한 돌로 이루어져 있다. 비신의 전자와 해서 음각의 비문이 앞, 뒤에 잘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구름과 용으로 표현된 이수의 조각은 그 웅장함과 생동감이 돋보인다. 선화대사는 속성이 이씨이며 이름은 경림(敬淋)으로 1566년(명종 21)에 출생하여 16세에 출가해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로부터 수학하였다. 그리하여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의 법맥을 이어가며 높고 고결한 지행으로 법문을 듣는 이가 많았다는 고승대덕으로 유명한 역사적인 인물이라는 점에서도 그 유적은 주목해야 될 것이 아닌가 한다.

용주사의 5층 석탑과 천보루 앞 5층 석탑은 각각 탑신부에 있어 부재가 하나, 둘 결실 보강된 부분이 있으나 고려시대의 작품임을 잘 보여주는 석탑인 동시에 특히 기단부에 있어서 장식적인 지대석과 면석, 초층탑신석 등은 주목받는 석탑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찰문화재로서는 사찰과 옛 절터의 항목을 설정하여 고찰하였고, ‘서원과 사우"의 항목에서는 명고서원, 매곡서원, 충장공 권율 부조묘 등을 들고 있는데 이러한 것들을 살펴보면 유교적인 면에서도 우리 고장을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 고가옥과 주목되는 건축물에 있어서는 나씨 고가, 노창호 고가, 정용래 가옥, 남양 기로소 등을 거론하고 있는데 이들 고가들은 우리 고장의 전통적인 고가 연구에 귀중한 자료들이 되고 있다.
성과 성터는 길성리 토성을 비롯하여 12개소 등이 있는데 이것으로 보아 화성시 지역은 고대부터 역사적으로 성읍과 같은 작은 마을이 이곳저곳에 올망졸망 있었던 고장임을 알 수 있겠다.

 

 

각종 비·정려 현황

이 밖에도 옛 봉수지, 역참지 분묘와 석물, 무형문화재 등 광범위한 유형·무형의 문화유산들을 다음의 각 장, 절 등에서 자세히 풀어 우리 고장이 문화의 보고임을 느끼게 할 것이다.
한편 화성시에는 아직 자세한 조사가 이루어진 바는 없지만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많은 유물·유적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그 중 각종 비와 정려, 그리고 보호수의 현황을 간단하게 정리해 두고자 한다. 이에 대하여는 앞으로 학술적인 조사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명칭 소재지 건립년도
정석규·달성서씨 정려문
(鄭錫揆·達成徐氏 旌閭門)
신남동 26-4 1884년(고종 21)
홍술연 효자문 (정석규·달성서씨 정려문
(鄭錫揆·達成徐氏 旌閭門)洪述淵 孝子門)
서신면 전곡리 101 1887년(고종 24)
정추 효자문 (鄭推 孝子門) 매송면 어천리 1713년(숙종 39), 1740년(영조 16) 개립(改立)
안동권씨 효부문 (安東權氏 孝婦門) 봉담읍 상기리 1783년(정조 7)
최일황·우흥 정려문 (崔一晃·遇鴻 旌閭門) 장안면 수촌리 1832년(순조 32), 1872년(고종 9)
김연호 효자문·광주이씨 열녀문
(金淵浩 孝子門·廣州李氏 烈女門)
장안면 독정리 1827년(순조 27)
기계유씨 열녀문 (杞溪兪氏 烈女門) 장안면 독정리 산 149-1 1783년(정조 7)
우상대 효자문 (禹相大 孝子門) 정남면 망월리 1888년(고종 25)
김광서 효자문 (金光瑞 孝子門)
유몽룡 충렬문 (劉夢龍 忠烈門)

차운혁 충렬비 (車云革 忠烈碑)

지상규 효자정려 (池相奎 孝子旌閭)

서백호 효자비 (徐伯虎 孝子碑)

선정비군 (善政碑群)

강덕휘·강기환·부안장씨 정려문
(姜德輝·姜璣煥·扶安張氏 旌閭門)

남정유·남철 충효 정려문
(南挺?r·南撤 忠孝 旌閭門))·南撤 忠孝旌閭門

양감면 사창2리 691
정남면 망월리

정남면 괘랑리

서신면 상안리 87

남양동

남양동

정남면 괘랑3리 1078-1

매송면 송라리 산 122

1870년(고종 7)
1885년(고종 22)

1860년(철종 11)

1860년(철종 11)

1922년

1855년(고종 22)

1609년(광해군 1), 1694년(숙종 20)

 

 

 

보호수현황

이 밖에도 옛 봉수지, 역참지 분묘와 석물, 무형문화재 등 광범위한 유형·무형의 문화유산들을 다음의 각 장, 절 등에서 자세히 풀어 우리 고장이 문화의 보고임을 느끼게 할 것이다.
한편 화성시에는 아직 자세한 조사가 이루어진 바는 없지만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많은 유물·유적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그 중 각종 비와 정려, 그리고 보호수의 현황을 간단하게 정리해 두고자 한다. 이에 대하여는 앞으로 학술적인 조사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남양동]
내용
지정번호
수종 구분 소재지 형태
수령(년) 수고(m) 둘레(m) 수관직경(m) 지정일
경기-화성-68 회화
나무
정자목 남양1163
(남양초교
교정내)
370 11 3.6 11 1982.10.15
경기-화성-69 회화
나무
정자목 남양동 651-1
(남양초교
정문 앞)
370 9 3.2 10 1982.10.15
경기-화성-70 느티
나무
정자목 무송동 340번지 370 21 6.4 27 1982.10.15
경기-화성-71 느티
나무
당산목 신외동 515 380 15 5.8 32 1996.10.25
경기-화성-72 은행
나무
기념목 남양동 392
(남양 향교내)
150 20 3.7 24 1996.10.25
경기-화성-73 은행
나무
기념목 남양동 392
(남양 향교내)
150 25 3.6 25.6 1996.10.25
경기-화성-74 은행
나무
기념목 남양동 392
(남양 향교내)
150 17 3 12 1996.10.25

[동탄면]

내용
지정번호
수종 구분 소재지 형태
수령(년) 수고(m) 둘레(m) 수관직경(m) 지정일
경기-화성-51 은행나무 정자목 금곡리 486-3 520 30 9.2 11 1982.10.15
경기-화성-52 느티나무 정자목 장지리 635-1 500 18 6.15 11 1982.10.15
경기-화성-53 느티나무 정자목 청계리 211 420 18 6.1 24 1982.10.15
경기-화성-54 느티나무 당산목 신리 360 220 24 4.47 18 1982.10.15
경기-화성-55 느티나무 기념목 산척리 133 220 좌16
우16
좌3
우4
좌3
우4
1982.10.15

[마도면]

내용
지정번호
수종 구분 소재지 형태
수령(년) 수고(m) 둘레(m) 수관직경(m) 지정일
경기-화성-62 은행나무 정자목 금당2리 438 380 15 6.1 17 1982.10.15
경기-화성-63 은행나무 정자목 두곡리 191- 380 20 4.3 20 1982.10.15

[매송면]

내용
지정번호
수종 구분 소재지 형태
수령(년) 수고(m) 둘레(m) 수관직경(m) 지정일
경기-화성-16 은행나무 노거목 송라리 412 600 140 8.5 60.4 1982.10.15
경기-화성-17 회화나무 당산목 송라1리 624-5 650 좌18
우16
좌3.9
우2.9
좌20
우17
1982.10.15
경기-화성-18 향나무 노거목 어천리 49 420 9 4 12 1982.10.15
경기-화성-19 느티나무 정자목 어천리 394-2 420 18 4.15 12 1982.10.15
경기-화성-20 측백나무 정자목 숙곡리 365 320 15 2..3 12 1982.10.15
경기-화성-21 느티나무 정자목 송라리 453 320 13 3.2 21 1982.10.15
경기-화성-22 향나무 노거목 숙곡리 128-1 510 10 2.5 8 1982.10.15

[봉담면]

내용
지정번호
수종 구분 소재지 형태
수령(년) 수고(m) 둘레(m) 수관직경(m) 지정일
경기-화성-9 은행나무 정자목 분천리 447 520 14.5 4.9 11.6 1982.10.15
경기-화성-10 느티나무 당산목 분천리 256 720 16.5 7.1 22 1982.10.15
경기-화성-11 느티나무 당산목 내리 505-4 520 20 3.9 18.6 1982.10.15
경기-화성-12 느티나무 정자목 상리 486-9 420 16 3.65 20.8 1982.10.15
경기-화성-13 느티나무 정자목 마하리 290-1 500 14 9.1 20.4 1982.10.15
경기-화성-14 은행나무 정자목 상기리 118-1 600 10 4.8 24 1982.10.15
경기-화성-15 느티나무 정자목 상기리 66 270 16.5 4.3 22.2 1982.10.15

[비봉면]

내용
지정번호
수종 구분 소재지 형태
수령(년) 수고(m) 둘레(m) 수관직경(m) 지정일
경기-화성-56 회화나무 정자목 유포리
32-1
(재장골)
450 17 5.5 14 1982.10.15
경기-화성-57 느티나무 정자목 남천1리 34 370 17 3.7 24 1982.10.15
경기-화성-58 느티나무 정자목 청요2리 370 17 3.7 24 1997.7.31
경기-화성-59 측백나무 묘지조경목 청요1리
128-1
337 7 1.4 26 1997.7.31
경기-화성-60 느티나무 정자목 청요리 97 390 9 4.9 7 1982.10.15
경기-화성-61 느티나무 정자목 구포리 514 270 23 4.3 28 1982.10.15

[송산면]

내용
지정번호
수종 구분 소재지 형태
수령(년) 수고(m) 둘레(m) 수관직경(m) 지정일
경기-화성-79 소나무 풍치목 용포리 123) 300 13 3.6 20 1982.10.15

[서신면]

내용
지정번호
수종 구분 소재지 형태
수령(년) 수고(m) 둘레(m) 수관직경(m) 지정일
경기-화성-75 은행나무 정자목 상안리
568-1
450 26 9 50 1982.10.15
경기-화성-76 은행나무 궁평리 108 370 8.5 3.4 10.8 1982.10.15
경기-화성-77 물푸레나무 고목 전곡리 151 370 12.7 5.4 15 1982.10.15
경기-화성-78 느티나무 정자목 전곡리 225 370 13 4.2 15 1982.10.15

[양감면]

내용
지정번호
수종 구분 소재지 형태
수령(년) 수고(m) 둘레(m) 수관직경(m) 지정일
경기-화성-64 은행나무 정자목 요당리 160-1 380 25 5.8 11.8 1982.10.15
경기-화성-65 느티나무 정자목 정문리 346 380 14 6.9 20 1982.10.15
경기-화성-66 느티나무 정자목 사창2리 691 340 17 4.1 25 1982.10.15
경기-화성-67 느티나무 정자목 송산리 678-1 370 10 4.5 13.6 1982.10.15

[우정면]

내용
지정번호
수종 구분 소재지 형태
수령(년) 수고(m) 둘레(m) 수관직경(m) 지정일
경기-화성-29 은행나무 노거목 석천리 도로
(가재골)800
520 21 4.7 22.6 1982.10.15
경기-화성-30 은행나무 정자목 운평1리 539 670 16 7.2 19.4 1982.10.15
경기-화성-31 회화나무 정자목 화산리 504-1 570 17.5 4.4 15.4 1982.10.15
경기-화성-32 음나무 정자목 화산리 44-1 470 13 4 9.6 1982.10.15
경기-화성-33 느티나무 정자목 화산리 15-8 420 17 4.4 17 1982.10.15
경기-화성-34 은행나무 정자목 운평리 700 420 17 3.6 22.2 1982.10.15
경기-화성-35 소나부 정자목 조암1리 116-1 250 6 1.6 8 1982.10.15
경기-화성-36 음나무 정자목 조암리 24-1 280 14 2.8 17.4 1982.10.15

[장안면]

내용
지정번호
수종 구분 소재지 형태
수령(년) 수고(m) 둘레(m) 수관직경(m) 지정일
경기-화성-23 향나무 정자목 독정리 545 920 6 2.0 8 1982.10.15
경기-화성-24 느티나무 정자목 금의리 255-2 520 12 5.75 15.8 1982.10.15
경기-화성-25 느티나무 정자목 노진1리 97-2 520 13 5.7 26 1982.10.15
경기-화성-26 향나무 정자목 수촌3리 893 320 16 2.8 18 1982.10.15
경기-화성-27 느티나무 정자목 독정리 1148 320 15 6.1 11.3 1982.10.15
경기-화성-28 음나무 정자목 장안리 114-1 220 12 2.2 12 1982.10.15

[정남면]

내용
지정번호
수종 구분 소재지 형태
수령(년) 수고(m) 둘레(m) 수관직경(m) 지정일
경기-화성-45 느티나무 정자목 내리 88 580 15 6.2 16 1982.10.15
경기-화성-46 은행나무 정자목 제기리 244-1 350 13 3.22 12.4 1982.10.15
경기-화성-47 향나무 정자목 제기리 320 6 1.25 4 1982.10.15
경기-화성-48 느티나무 정자목 백리 390-5 300 18 5.6 28 1982.10.15
경기-화성-49 은행나무 정자목 신리 211 300 15 2.8 13 1982.10.15
경기-화성-50 느티나무 정자목 문학리 101 300 22 3.7 28 1982.10.15

[팔탄면]

내용
지정번호
수종 구분 소재지 형태
수령(년) 수고(m) 둘레(m) 수관직경(m) 지정일
경기-화성-1 느티나무 정자목 노하리 99 700 12 6.5 11 1982.10.15
경기-화성-2 팽나무 정자목 매곡리 108-3 520 9 3.8 16 1982.10.15
경기-화성-4 느티나무 정자목 구장리 791 470 16 5.6 19.6 1982.10.15
경기-화성-5 물푸레나무 정자목 해창리 214 420 14 4.7 16 1982.10.15
경기-화성-6 소나무 당산목 구장리
산71-2
250 13 3.3 22 1982.10.15
경기-화성-7 음나무 정자목 창곡리
산42-3
500 14 3.4 12 1982.10.15
경기-화성-8 느티나무 노거목 덕우리 220-1 200 17 4.5 21 1982.10.15

[향남면]

내용
지정번호
수종 구분 소재지 형태
수령(년) 수고(m) 둘레(m) 수관직경(m) 지정일
경기-화성-37 느티나무 정자목 증거리 105 1320 17 7.3 22 1982.10.15
경기-화성-38 느티나무 정자목 상두리 403 570 15 6.7 28 1982.10.15
경기-화성-39 은행나무 정자목 화리현리 356 420 16 4.8 22.6 1982.10.15
경기-화성-40 느티나무 정자목 송곡리 147-2 340 19.5 3.7 22.8 1982.10.15
경기-화성-41 느티나무 정자목 상두리 198 420 14.5 5.3 2 1982.10.15
경기-화성-42 팽나무 당산목 장짐리 159-2 220 15 2.5 20 1982.10.15
경기-화성-43 느티나무 정자목 백토리 154 240 14 4.2 18 1982.10.15
경기-화성-44 팽나무 노거목 평리 123-2 220 10 29 15 1982.10.15
 
화성 민속의 특징
매송면 숙곡리 전통혼례(1989)

화성민속은 한강 이남 서남부의 경기도적 색채를 가지면서 주변의 영향을 받되 한강 이북에 비해 서부 충남과의 교섭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남양반도 방면은 중국으로의 배가 닿을 수 있는 선착지로서의 입지조건, 서해안으로부터 들어오던 풍부한 물자, 말총, 건달산에서 나오는 주옥(珠玉)과 남양석, 소금생산과 어물 등으로 재력이 있던 곳인지라 독자적인 민요를 창출할 만큼 경제적, 사회적으로 세(勢)를 가졌었다.

생산민속에 있어서 화성지역은 논에 벼와 보리를 이모작하는 곳이 없기 때문에 이모작하는 남쪽지역보다 모내기가 약간 빠른 편이라 대개 소만 무렵이면 모내기를 시작한다.

예전에는 겨울철이면 농한기였지만 비닐하우스 재배방법이 나오면서부터 농한기가 농번기로 바뀌어 버렸다. 화성지역은 땅심이 좋고 깨끗한 지하수를 농업용수로 쓰며 일기조건이 적당하여 ‘햇살드리"라 하여 특화할 정도의 특상미를 생산한다. 특용작물로는 알타리 무와 참외, 느타리버섯 등이 있으며 특히 느타리버섯은 도시근교의 고소득 작물로 각광을 받고 있다.

또한 포도를 많이 재배하는데, 다른 곳보다 포도 껍질이 두껍기 때문에 그만큼 오래 저장할 수 있음이 특징이다. 화성지역의 근래 어업은 연근해 어업이 주를 이루는데 그리 활발한 편은 아니다. 주요 수산물은 꽃게, 능쟁이, 망둥이, 까나리, 멸치, 전복, 굴, 홍합 등의 어패류와 미역, 소금 등이다.

관혼상제에 대하여는 정남면 괘랑 4리와 정남면 발산 1리의 관혼상제를 중심으로 다른 지역의 사례와 『사례편람』을 참고하여 출생에서 성년까지와 혼례, 상례, 제례로 나누어 기술하였다. 성년의례인 관례는 사라졌다. 삼색 과일과 종이 한 장을 가지고 수리산, 문수산 등 영험 한 산을 찾아가 정성을 드린다거나 아들을 많이 낳은 집 부녀자의 속옷을 훔쳐 입는다는 등의 기자(祈子) 의례가 있으며, 오리고기를 먹으면 아이의 발가락이 붙는다 하여 오리고기를 먹지 않는 등 임신부를 위한 금기는 어느 정도 지켜지고 있다. 예전엔 출산 때 출입제한을 위한 금줄을 쳤으나 요즈음은 치지 않는다.

혼례에 있어서는 가까운 친인척의 중매로 맞선을 보기 전에 부모가 궁합을 보아 미리 결정하였으며, 혼인 당사자의 결정권은 거의 없었다. 혼례일의 신랑 일행은 함과 신랑, 후항(신랑의 삼촌 등)으로 구성되며, 초례시간에 맞추어 신부집으로 향하면 신부 마을의 젊은이들이 재를 뿌리는 ‘동화"풍속이 있었다. 신부집 앞에 도착하여 왕겨가마니 위에 서면 하인이 재를 털어 주고 신랑은 대문 앞의 바가지를 밟아 깨고 들어갔다. 합근례가 끝나고 신부가 신랑집에 도착하여 소댕(솥뚜껑)을 밟고 마당으로 들어서면 빈 양푼을 준비해 두고 숟가락을 던지게 하였다.

가장 기초적인 사회조직인 가족제도에 대하여는 동탄면 석우리와 신리, 마도면 금당 2리 아랫말, 봉담읍 세곡리 가는골, 서신면 용두 2리, 송산면 고포 4리 어섬과 쌍정 1리, 안석동, 양감면 신왕 3리, 우정면 멱우 1리 방축말, 우정면 석천 3리 가래마을, 우정면 운평 1리 평밭마을, 우정면 원안 2리 원안이, 정남면 오일리, 장안면 석포 5리, 향남면 행정리 웃말, 향남면 방축리의 경우를 조사하였으며, 가족제도와 관련된 민속현상을 가족의 주기(週期), 가족의 일상생활과 가족사 및 가정신앙 등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가족의 주기로는 기자(祈子)민속(양감면 신왕 3리, 우정면 원안 2리), 출산에 관련된 민속과 속설(장안면 석포 5리,우정면 원안 2리), 성장과 놀이(송산면 고포 4리 어섬,우정면 원안 2리 원안이, 마도면 금당 2리 아랫말, 봉담읍 세곡리 가는골, 정남면 오일리의 8월 보름 거북놀이), 혼인과 분가(안석동, 송산면 쌍정1리, 우정면 원안 2리 원안이), 죽음과 장례(양감면 요당 1리 요당)를 기술하였다. 집안에서 모시는 신령의 신체로는 제석주머니와 성주대, 대감항아리가 있으며, 음력10월과 음력정월의 집안고사가 있다.

송산면 어도 배연신 굿 재현

씨종(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하인)이 한국전쟁 이후엔 떠났고, 그 이후론 머슴을 두어 농사짓기 위해 일년간 계약하였음도 언급하였다.
전통사회에서 공동체생활의 기초를 이룬 곳인 촌락의 구조에 관하여 마을은 자연발생적인 지리적 사회적 공간으로서의 자연촌을 가리킴과 조선후기에 이르러 보(洑), 언전(堰田) 등 농업시설의 개발·이앙법의 보급으로 생산력이 발전함으로 인해 두레, 촌계 및 동제 등 각종 경제 사회조직과 민속적 관행이 출현하였음을 언급하였다.

또한 18세기에 와서 시도된 이정법(里定法) 실시도 이러한 조선후기의 생산력 변화를 반영한 것임을 지적하였다.

정월 보름엔 곳곳에서 줄다리기를 했으며, 요즈음도 마을에서 자체적으로 줄을 다리는 곳들을 볼 수 있는 것은 화성지역의 세시풍속적 특색이다. 동탄면이나 마도면, 정남면 등 거북놀이를 했었다는 곳도 있으나 그것에 관련된 노래는 수집되지 않았다.

민간신앙과 관련하여 뱃고사, 산제사, 도당굿(당제사)을 마을사람들이 자체적으로 치룰 때는 유교식으로 지낸다. 매년 음력 10월 초나 9월 말께에 많이 지내지만 음정월(신외 2리)이나 음력 11월(버들무지 마을), 음력 2월초(송산면 고정리 우음도)에 지내는 곳도 있다. 7월엔 우물제(井祭)를 지내곤 했다.

무속에서는 화랭이집단에 소속되는 여자를 ‘미지"라 불렀고, 화랭이와 미지는 부부관계에 있었으며, 단골판이 조직되어 있었다. 마을민들은 봄·가을 햇곡식을 거두면 화랭이패에게 줄 곡식을 따로 정해주고 있다가 무당에게 내 주곤 하였다.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이러한 관습은 면면이 이어져 왔다. 화랭이패의 혈연적 후손은 아니지만 수원의 오수복과 함께 화랭이패 집단에서 무학습을 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는 조광현(1941년 매송면 원평 1리 출생)에 대하여 조광현이 무업을 하게 된 이력을 기술하였고, 현대적 차고사(車告祀) 및 화성무속의 은어를 조사하였다.

설화에는 신화, 전설, 민담 등이 있는데, 전설은 지역적 특성을 띠고 전승되는 설화인고로 화성지역의 특징을 알 수 있게 하기 위해 전설을 위주로 정리하였다. 기존 자료 이외에 동탄면 장지리와 방교 1리 노인정, 태안읍 안녕 1리 노인정, 서신면 제부리와 송교리, 비봉면 양노리, 마도면 석교리, 정남면 정남노인정과 고지리를 새로이 조사하였다. 1980년대에 비해 설화 전승이 많이 중단된 것으로 생각되는 바 TV나 화투 등의 보급으로 설화를 주고받는 현장이 줄어든 탓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이야기판에서는 대개 당제, 도깨비불과 같이 현실생활과 관련 있었던 이야기들이나 짧은 지명유래 등만이 채록되는 현실이다.

삼천병마굴 전설, 정조대왕 관련 전설이 많으며, 마고할미 관련 설화(송산면 독지리 형도 섬의 탑, 쌍봉산 전설) 등이 전한다. 무가는 주인공이 있고 사건을 진행하는 줄거리가 있는 서사무가와 그 밖의 일반무가로 나누었다. 화성지역에서 무업을 했던 이종만·심복순·김수희·김홍금·조순웅의 구송자료들이 공개되어 있는 바 서사무가로는 시루말·제석·손굿·바리공주가, 일반무가로는 부정굿·군웅청배·조상·안땅·선왕·계면·마당굿·재수굿·집가심·씨앗고사·산바래기·시루청배·대감굿·창부·서낭굿·지신·용궁·외양깐·걸립·텃굿 등이 수집되어 있다.

화랭이 중심의 무속인 화성지역 무가의 특성으로는

① 화성을 중심으로 한강 이남의 경기도지역에 주로 전승하는 성주무가의 존재를 들 수 있다. 화성지역 자료에서는 등장인물로 황우양과 그의 부인 및 ‘소진랑"이라는 세 인물이 등장한다.

② 바리공주에서는 ‘선행을 강조"하는 점이 특징적이다. 바리공주의 부모가 연이어 딸 여섯을 낳는 장면도 치밀한 설명이 이어지며, 표현이 고정되어 있는 관용구를 주로 사용하는 점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③ 당금애기 무가에서는 남자 주인공인 스님에 대해서도 그 일대기가 펼쳐지며, 잉태를 암시하는 내용이 있고 잉태가 밝혀진 당금애기가 추방당하고 스님을 찾아간다는 단락이 타 지역의 것과 다른 화성 무가의 특징이다.

④ 화성지역의 손님굿 무가는 손님네가 강남국에서 조선국으로 나와 강을 건너올 때 사공과 다투는 장면이 있고, 각지를 다니며 정성덕을 베푼다는 스토리일 뿐 복잡하게 전개되는 노구할미나 장자네 아들 얘기가 없다는 점에서 가장 엄숙하고 사제적 무당의 특성을 강하게 보여주는 구성이며, 화성이 강신무권의 중심지역임을 잘 반영한다.

⑤ 창세무가인 시루청배가 전승한다는 것은 화성지역의 무가가 그 연원이 오래됨을 시사한다.

⑥ 일반무가와 서사무가가 다양하게 전승함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경기도민속경연대회 구장터 면생이 공연

민요는 화성지역을 골고루 가장 많이 조사한 결과물이고, 또한 농요는 그 존재의 상한선이 기원전에까지 소급하는 전통문화인 만큼 민요, 특히 농요를 통해 알 수 있는 화성민속의 문화권적 특징이 주목된다. 화성지역의 전래민요는 논맴소리와 상부(喪夫)소리가 대종을 차지한다

배치기 등의 어로요와 염전 물퍼기소리가 발견된다. 동요와 길쌈노래 등은 적은 편이나 부르기 힘들어 사라진 긴방아와 문셍이(면셍이)가 건재한 채로 녹취되었음은 화성민요의 전체적 위상을 드높이는 일로 평가된다.

모찌는 소리와 벼타작 소리가 따로 없으며, 봉분 가래질 소리나 헛상여 소리의 예가 없고 집터 다질 때 지경류를 소리함은 경기도의 일반적 추세이다.

모심는 소리는 하나류이되 연백소리라고 일컬어지는 허나기로구나 형은 유입되지 않았다. 중부 경기도가 문화중심(cultural center)인 열소리형과 남부 경기도의 ‘여기도 하나"형, 화성시의 남양반도가 그 문화중심에 있는 나열형 및 이들의 혼합형이 수집된다. 열소리형은 매송면, 비봉면 등 북부 화성에 전파되어 있다.

‘여기도 하나"형은 팔탄면, 장안면 등 보다 남쪽의 화성지역에서 수집되는 경향이다. 논맴소리로는 두울레, 문셍이, 방아류(긴방아·느린방아·중거리방아·짜른방아·에키나 방아), 방게류, 상사류, 곤장네, 대허리 류, 얼카덩어리 류, 몬돌소리 및 위야호호 등이 불리운다. 논훔칠 때의 소리인 곤장네는 남양반도가 문화 중심에 있으며, 그 전파범위는 좁다. 화성시는 둘레소리와 몬돌의 문화 중심 지대에 위치한다.

남양반도에서 개고리타령이라고 이름하는 행상소리가 존재한다거나 두마디행상류의 달고소리가 있음은 그 지역적 특색으로 꼽힌다. 얼카덩어리 류가 널리 불리움과 문셍이의 존재 및 널액막음소리(복,톱질,중방)는 충남지방과의 교섭을 나타낸다. 열소리의 북부 화성지역으로의 전파, 방아타령 류의 파편적 존재와 우야소리의 흔적 등은 중부경기도 방면에서의 파장이 미약하나마 이 곳까지 미치고 있음을 표시한다.

대허리류는 충주시 방면으로부터 방게류나 에키나 방아 등은 평택 쪽으로부터 물결이 와 닿은 것이다. 정남면 계향리의 차류는 본디 경상도의 터다짐소리이던 것이 충남을 거쳐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달구질은 하되 달굿대 없이 다지며, 군방네를 1회만 찾는 점, 달구질 때 여러 가지 논맴소리들을 원용하는 경향이 원칙적으로 없는 점 등은 한강 이북과 구별되는 문화지대임을 확실히 해 준다.

방언에 관하여는 1982년 팔탄면에서 채집한 자료에 근거하여 지리적으로 근접한 충남방언의 영향을 제외하면 경기도 전역에 걸친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화성시를 포함한 경기도 일원은 우리말의 표준권이므로 음운체계와 말본체계의 규범에서 벗어난 것이 없다고 보았다.

속담·수수께끼에 관하여는, 현대 사람들은 생활이 복잡해짐에 따라 속담이나 수수께끼를 일상생활 속에서 별로 사용하지 않는 경향이며, 화성지역에서 수집되는 것도 대부분이 많이 알려진 내용들임을 언급하였다.
주거에 관하여 화성시에 있는 민가는 안채가 ‘ㄱ"자형 평면으로 된 것이 주류를 이룸과 이러한 평면형식은 경기도를 중심으로 나타나는 한국 중부지방 민간형식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음을 서술하였다. 화성시 민가의 ‘ㄱ"자형 안채는 ‘ㄱ"자로 꺾이는 회첨골 아래에 안방이 위치한다.

‘ㄱ"자형 안채의 가옥은 주로 ‘ㄴ"자형 문간채와 마주보며 전체적으로는 튼‘ㅁ"자형 배치를 하는데, 이러한 배치는 경기도 전역에 걸쳐 많이 보이는 형식이다. 가옥의 구조는 평사량이 두드러지게 많다. 20세기에 들어서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민가의 공간 확대와 연관하여 화성시를 포함한 경기도 민간에 많이 보이는 평사량 구조는 툇간이 민가 공간 구성에 적극적으로 도입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화성시에는 경기도 여러 지방 중에서 전통 민가가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문화재로 지정된 가옥으로는 남양면 송림 1리의 정원채 가옥, 서신면 궁평 2리의 정용채 가옥과 정용래 가옥, 정남면 문학리의 홍승인 가옥 등이 있다.

남양 송림 늠말마을 정원채 가옥 안채 전경

화성시의 의생활은 서울을 포함한 주변 경기지역과 비슷한 양상을 나타내는데 농업을 주업으로 하면서 광목 위주의 옷이 대부분이었다. 본서를 위한 새로운 조사는 마도면 청원리(양금희), 비봉면 삼화리(박복실), 서신면 매화리(김순이)와 전곡 2리(홍정후), 송산면 쌍정 2리(홍사억, 조영희), 양감면 신왕 3리(심재숙), 우정면 운평 2리(이분순), 장안면 서곡 1리(최재분, 이춘심), 정남면 계향리(이종순), 태안읍 안녕리(이정묵), 팔탄면 화당리(전봉순), 향남면 하길
4리(김병석)와 상신리(한영애)에서 실시되었다.

음식에 관련하여 농촌지역으로는 팔탄면, 장안면, 태안읍, 우정면에서 모두 다섯 가정, 어촌지역으로는 서신면의 3개 가정, 도시화 지역으로는 봉담읍 소재 아파트 5개 가정의 식생활 문화를 조사한 결과 농민들 대부분은 3대 이상 4대가 같이 사는 곳이 많았고,30 ~ 40년 이상씩 오랜 기간을?현 장소에서 거주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민들은 핵가족이기는 하지만 근처에 부모나 친척이 같이 살고 있었으며 거주 기간도 30년 이상 한 지역에 오래 머무르고 있었다. 반면 도시화 지역 주민은 3 ~ 6년 전에 안양, 수원 등지로부터 이주한 자들로서 자녀들은 공부하러 수원 등지에 나가고 식구는 부부만인 경우가 많았다. 농민들은 벼농사를 주로 하고 있으며 밭엔 파, 마늘, 아욱 등 일용할 채소들을 심어 반찬에 이용한다. 어민들은 근해에서 얻을 수 있는 해산물, 특히 조개, 꽃게, 김 등을 식생활에 많이 이용하고 있었다.

도시화된 지역은 특별한 산물이 없었으며 일부 주민이 텃밭을 이용해 채소를 재배하여 먹고 있는 정도였다. 일부 바빠서 식사를 제 때 못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은 식사를 규칙적으로 세끼 모두 먹는 편이다. 아무리 바빠도 아침은 꼭 먹는데 밥 외에 빵이나 다른 음식을 먹는 경우는 없었다. 상차림은 식탁을 이용하여 함께 먹는 두렛상 형태이다. 주식류는 쌀밥, 잡곡밥, 비빔밥, 생굴밥(어민) 등이다.

봉담읍 동화 3리 역말농악을 통하여 화성농악을 살펴볼 때 다른 지역에서 발견되는 복잡한 가락구성을 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스러운 안성일대의 농악과 접목되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경기도 북부 농악은 복색에 있어서 모두 고깔을 쓰고 판제가 없이 농사풀이를 하는 특징이 있다면, 경기도 남부농악은 복색을 다양하게 갖추고 있으며 농사풀이 대신에 판제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칠채가락과 같은 공통된 가락이 존재한다. 역말농악은 북부농악과 남부농악을 비교하는 데 있어서 요긴한 의의를 가진다.

광대문화에 있어서는 경기도지역의 광대문화와 관련하여 조선 전기까지만 하더라도 매년 있었던 궁궐의 나례희를 비롯한 중앙의 산대희, 과거급제 관련행사 등의 행사에 경기도지역의 광대들이 동원되었으며, 임·병란 이후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던 전라도 지역의 광대들이 주도하였지만 조선 후기인 충청, 경기, 전라 등 삼남의 광대들까지 동원되던 때에 이들 삼남의 광대들이 서울로 갈 때, 길목에 있었던 화성의 재인청이 주요한 역할을 했음을 주창하였다.

근세악사들 항에서는, 경기도 남부의 도당굿 잽이들은 단순히 반주자로서가 아니라 선학습자로서 여무와 함께 굿을 분담하여 나가는 역할을 하였음을 밝히고, 주로 화성군 출신으로서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지금은 작고한 근세 예인들에 대해 쓰고, 이덕만·오필순·이동안·이봉운·정팔봉·임선문·문상근·지수상·이용우·장만영의 가계와 활약상을 기록하였다.

화성지역의 민속놀이는 기존자료인 『화성군의 역사와 민속』 등을 참고하여 볼 때 풍물관련의 종목이 많다. 집단놀이에는 두레, 석전, 용줄다리기, 마당놀이, 새끼공치기(얼음장치기) 등이 나타나며 놀이 구성원은 최소한 20명 이상이 된다. 개인놀이에는 연띄우기, 윷놀이, 배치기, 배만들기, 활쏘기, 팽이치기, 널뛰기, 비사치기, 쥐불놀이, 풀각시놀이, 달맞이, 그네, 씨름, 춘향아씨놀이, 무구덩이 무서리, 새알 차장 구워먹기 등이 조사되었는데 내륙 쪽보다 서해안 쪽에 풍어와 관련된 생생력 관념이 남아 있으며, 도당굿, 화성재인청과 안성 남사당패의 뜬패 활동이 이 곳에까지 강력하게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줄다리기는 음정월 보름날에 세시풍속적으로 행하며, 풍년기원의 목적과 주민단합의 기능을 가지고 있고, 암줄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생각함이 일반형인데, 화성지역의 경우도 이 범주에 든다. 화성을 포함한 경기도의 줄다리기에는 별다른 줄멤소리가 없다. 태안읍 기안리 줄이나 매송면 원리 줄 같이 줄 운반시에 총각과 각시(여장 남자)를 각각 수줄과 암줄 위에 태우고 행진함은 화성줄을 포함한 경기지역 줄다리기의 특색이다. 이는 웃다리농악지대인 경기도에서 무동세우기가 발달한 것과 연관된다.

 

 

 

연 대 연 혁
1895. 05. 26 칙령 제89호(1895. 5. 26 공포)로 인천부 수원군이 됨
1936. 10. 01 일형, 의왕면을 일왕면으로 병합(1邑 19面)
1949. 08. 15 대통령령 제161호(1949.8.13 공포)로 수원읍이 市로 승격 됨에 따라 수원군을 화성군으로 개칭
1960. 01. 01 법률 제539호(1960. 1. 1.공포)로 오산면이 읍으로 승격
1963. 01. 01 법률 제1175호(1962 .11 .21공포)로 일왕면이 시흥군 및 수원시로 분할편입되고 태장면의 3개리와 안용면의 5개리를 수원시로 편입,태장면의 8개리,안용면의 6개리를 병합, 태안면을 신설 (1邑16面)
1970. 06. 10 오산읍 원리 232의2로 군청사 이전
1983. 02. 15 대통령령 제11027호(1983 . 1. 10공포)로 반월면 월암리, 초평리가 시흥군 의왕면에 편입되고, 비봉면 상기리를 봉담면에 편입
1985. 10. 01 대통령령 제11772호(1985. 9. 26공포)로 태안면을 태안읍 으로 승격
1986. 01. 01 법률 제3798호(1985.12.28 공포)로 반월면 일리, 이리, 사리, 본오리, 팔곡이리와 둔대리중 山98의1, 山101의1, 山101의2, 山101의3을 안산시로 편입
1987. 01. 01 대통령령 제12007호(1986.12.23 공포)로 서신면 칠곡리가 송산면에 편입되고, 팔탄면 지월리의 2개리를 향남면에 편입하여 장짐리로, 동탄면 금곡리의 1개리를 오산읍에 편입하여 은계리로 각각 신설되고, 매송면 금곡리, 호매실리를 수원시에,양감면 고염리를 평택군에 각각 편입
1989. 01. 01 대통령령 제44050호(1988.12.31 공포)로 오산읍을 오산시로 승격 분리(1邑 15面)
1993. 09. 14 군조례 제1488호(1993.9.14 공포)로 향남면사무소 소재지를 향남면 평리 124번지에서 향남면 행정리 山62의 1번지로 변경
1994. 12. 26 대통령령 제14434호(1994.12.12 공포)로 태안읍 영통리일원, 신리·망포리 일부, 반월면 당수·입북리를 수원시로 반월면 건건·사사·팔곡일리를 안산시로, 반월면 둔대·속달· 도마교·대야미리를 군포시로 각각 분할편입(1邑14面)
1995. 04. 20 대통령령 제14629호(1995.4.20 公布)로 태안읍 신·망포리를 수원시로 편입(1邑 14面)
1996. 11. 15 군조례 제1630호(1996. 11. 15 공포)로 송산면사무소 소재지를 송산면 사강리 687-8에서 송산면 삼존리 203-5로 변경
1997. 07. 01 군조례 제1664호(1997. 7. 1 공포)로 서신면사무소 소재지를 서신면 매화리 368-1에서 서신면 매화리 277로 변경
1998. 01. 17 군조례 제1692호(1997. 1. 17 공포)로 마도면사무소 소재지를 마도면 석교리 211에서 마도면 석교리 243-31로 변경
1998. 04. 01 군조례 제1698호(1998. 3. 25 공포)로 봉담면을 봉담읍으로 승격(2邑13面)
2000. 11. 01 군조례 제1848호(2000. 11. 1 공포)로 화성군청 소재지를 오산시 오산동 868에서 남양면 남양리 2000으로 변경
2000. 12. 09 군조례 제1854호(2000. 12. 9 공포)로 화성군 장안면 석포리의 일부를 우정면 주곡리에 편입하고, 우정면 주곡리의 일부를 장안면 석포리에 편입
2001. 03. 21 법률 제6280호(2000. 12. 20 공포)로 화성군을 화성시로 승격
2001. 03. 21 시조례 제35호(2001. 3. 21 공포)로 화성군 남양면을 폐지하고 화성시 남양동으로 전환 설치(2邑 12面 1洞)
2001. 03. 21 시조례 제31호(2001. 3. 21 공포)로 화성시 동부출장소 설치
2002. 02. 26 시조례 제184호(2002. 2. 26 公布)로 화성시 매송면 야목리 일부를 비봉면 구포리에 편입하고, 비봉면 구포리 일부를 매송면 야목리에 편입
2003. 01. 23 시조례 제219호(2003. 1. 23 공포)로 매송면사무소 소재지를 매송면 어천리 424-2에서 매송면 어천리 380로, 장안면사무소 소재지를 장안면 어은리 386-1에서 장안면 사랑리 138-14 로 변경
2003.02. 26 시조례 제223호(2003. 2. 26 공포)로 화성시 팔탄면 매 곡리 일부를 향남면 상신리에 편입하고, 향남면 상신리 일부 를 팔탄면 매곡리에 편입
2003. 06. 14 시조례 제235호(2003. 6. 4 공포)로 우정면을 우정읍으로 승격(3邑 11面 1洞)
2003. 07. 24 시조례 제245호(2003. 7. 24 공포)로 태안읍 기산리 일부를 병점리에 편입
2004. 03. 04 시조례 제265호(2004. 3. 4 공포)로 우정읍사무소 소재지를 우정읍 조암리 265-1에서 우정읍 조암리 411-1로 변경
2004. 07. 16 시조례 제279호(2004. 7. 16 공포)로 향남면 제암리 3필지 710㎡를 향남면 발안리에 편입
2005. 06. 21 시조례 제316호(2005. 6. 21 공포)로 향남면 구문천리 28필지 67,093㎡, 향남면 상신리 9필지 4,877㎡를 향남면 하길리에 편입, 향남면 상신리 85필지 56,536㎡를 향남면 구문천리에 편입
2006. 01.02 시조례 제353호(2005.12.02 공포)로 화성시 태안읍을 폐지하고 화성시 진안동, 병점1동, 병점2동, 반월동, 기배동 ,화산동 으로 전환 설치(2邑 11面 7洞)
2006.11. 30 시조례 제416호(2006.11.30 공포)로 장안면 석포리 15필지 50,906㎡, 수촌리 12필지 7,428㎡를 장안면 금의리에 편입, 동탄면 오산리 20필지 18,970㎡, 금곡리 101필지 312,635㎡를 동탄면 반송리에 편입, 동탄면 청계리 27필지 37,122㎡, 영천리 9필지 23,438㎡를 동탄면 석우리에 편입
2007. 01. 29 시조례 제430호(2006.12.29 공포)로 향남면을 향남읍으로 승격하고, 동탄면의 반송리와 석우리를 반송동과 석우동으로 승격. 반송동과 석우동,동탄택지개발지구내 반월동,능동을 관 할하는 동탄동 신설(3邑10面 8洞)
 

 

 

 

국화도 궁평리 낙조와 해송 입파도 홍암 제부도 바닷길

화성의 절경 | 국화도

국화도
국화도1 국화도2 국화도3 국화도4 국화도5 국화도6
국화도7
국화도
국화도 설명

국화도는 조선시대에 유배지였다. 이 섬의 원래 이름은 국화도가 아니라 만화도였으나 일제 때 경기도 수원군 우정면 만화리에서 화성군 국화리로 바뀌었다고 한다.

최근 십여 년 사이 섬에는 많은 변화와 발전이 있었으며, 현재 22가구에 6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장고항이나 왜목마을에서 바라보면 국화도와 형제처럼 나란히 토끼섬이 보인다. 500m쯤 되는 국화도와 토끼섬 사이에는 썰물 때에 갯바위와 모래밭이 드러나 걸어서 건너갈 수가 있다. 이 바닷길 주변에는 고동을 비롯한 각종 조개가 풍부하다.

국화도 선착장 마을에서 야트막한 언덕을 넘어서면 전혀 다른 풍경이 나타난다. 바위투성이인 동쪽 해안과는 달리 조개껍질과 모래가 적당히 어우러진 천혜의 해수욕장이 활처럼 동그랗

국화도

게펼쳐져 길게 이어진다. 해수욕장은 경사가 심하지 않아서 안전하게 물놀이를 즐길 수 있으며, 모래와 자잘한 자갈이 섞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다른 서해안지역과 달리 물이 매우 맑으나 해변에 그늘이 없는 점이 아쉽다. 이 해수욕장의 서쪽에는 매박섬이 있는데, 이 섬도 토끼섬과 마찬가지로 썰물 때에는 바닷길을 통해 건너갈 수 있다. 국화도 해수욕장의 동쪽 끝은 바위지대이고, 부근의 산자락엔 소나무가 자라고 있어서 운치를 더해 준다. 북쪽에 있는 해수욕장 앞에서는 바다 건너편에 무인도인 입화도와 풍도 사람들의 바지락 채취지인 도리도가 빤히 건너다 보인다. 이와 같이 해수욕뿐만 아니라 어선도 탈 수 있고, 갯벌체험도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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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용이용

대중교통

국화도 안내도

 

국화도 궁평리 낙조와 해송 입파도 홍암 제부도 바닷길

화성의 절경 | 궁평리 낙조와 해송

궁평리낙조와 해송
궁평리낙조와 해송1 궁평리낙조와 해송2 궁평리낙조와 해송3 궁평리낙조와 해송4 궁평리낙조와 해송5 궁평리낙조와 해송6
궁평리낙조와 해송7
궁평리낙조와 해송
궁평리낙조와 해송 설명

남양, 사강, 서신을 지나 궁평리 관광어촌 휴양지 노변에는 천일염전들이 곳곳에 산재하여 있으므로 전형적인 농·어촌의 전원풍경을 감상할 수 있어 어린이 교육에도 좋을 뿐만 아니라 가족 단위

의 1일 휴양코스나 드라이브코스로도 손색이 없다.

궁평리 해안유원지는 길이 2㎞, 폭 50m의 백사장과 수령이 100년이나 된 해송 5천여 그루가 한데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하며 서해안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경치를 자랑하고 있는 곳이다. 만조시에는 하루 2시간 이상 해수욕을 즐길 수 있고, 간조시에는 약 2km의 뻘이 형성되어 서해 특유의 갯벌 체험을 할 수 있다. 20㏊의 조개 채취장에 서는 직접 조개잡이와 바다낚시를 겸할 수 있어 일거양득의 관광을 즐길 수 있다. 궁평리낙조와 해송

또한 인근 어민들이 잡아온 고기들은 싱싱한 횟감으로 각광을 받고 있으며 특히 궁평 해안유원지에서 바라보는 낙조는 화성 8경 중 4경에 꼽히는 절경으로 바다와 해송이 함께 어우러진 장관은 보는 이의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궁평리해송숲/ 궁평리에서 열린 갯벌축제

궁평리 해수욕장은 낚시터, 해송숲, 넓은 운동장, 방갈로, 벤치, 식수대, 화장실 등 제반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을 뿐 아니라 완만한 경사의 모래사장이 있으므로 부담 없는 해수욕을 즐길 수 있고, 해수욕장을 따라 늘어서 있는 50년 이상 된 해송숲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어 즐거움을 더해 준다.

또한 낚시터 위에 있는 출렁다리를 건너면 놀이동산을 만날 수 있다. 이 놀이동산에서 시간을 즐기며, 밀물시간이 되면 선착장에서 농어, 우럭, 굴, 꽃게 등을 구하여 시원한 해물잡탕을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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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평리낙조와 해송 안내도

 

화성의 절경 | 입파도 홍암

입파도홍암
입파도홍암1 입파도홍암2 입파도홍암3 입파도홍암4
입파도 홍암
입파도 설명

중심부를 중심으로 동서의 완만한 능선과 해안의 모래 및 조약돌밭을 제외하면 섬 전체가 30% 이상의 급사면을 이루고 있으며, 남북해안은 절벽을 이루고 있다.

광활한 서해바다에 우뚝 솟아 있는 붉은 기암괴석과 파도와 갈매기가 어우러진 풍경은 한 폭의 산수화로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인근에 있는 국화도와 함께 낚시객과 피서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소재지- 화성시 우정읍 국화리

입파도 홍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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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파도 홍암 안내도

 

국화도 궁평리 낙조와 해송 입파도 홍암 제부도 바닷길

화성의 절경 | 제부도 바닷길

제부도 바닷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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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부도 바닷길7 제부도 바닷길8
제부도 바닷길
제부도 바닷길 설명

제부도는 면적이 1.0㎢, 해안선의 길이가 12km인 한가롭고 작은 섬이다. 섬 중앙에 있는 최고봉은 62.5m에 지나지 않으며 섬 전체에 약간의 구릉지가 있을 뿐 대부분의 지역이 평지이다. 서쪽과 북쪽에 농경지가 발달해 있고 육지와 연결되는 동

쪽 해안에 취락이 형성되어 있다.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과 어업을 겸하고 있으며 굴 양식이 활발하다. 서해안은 수심이 얕고 사빈이 발달하여 해수욕장으로 개발되었고 썰물 때에는 간석지를 통하여 동쪽 해안이 육지와 연결된다.
남양반도의 서쪽 끝에 있는 제부도는 수도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므로 교통이 편리하여 가족 단위의 1일 휴양코스의 여행지로 적당한 곳이다. 특히 제부도는 6시간마다 간조와 만조가 엇갈리면서 바다길이 열리는 이른바 ‘모세의 기적"이라 불리는 현상이 하루에 두 차례씩 나타나 색다른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썰물 때 4~5m깊이의 바닷물이 빠져 나가 바닷물이 갈라지면 육지와 섬을 연결하는 2.3km에 달하는 시멘트 포장길이 나타난다. 제부도 낙조
길 좌우에 펼쳐진 갯벌 사이의 시멘트 포장길을 건너는 묘미는 제부도 나들이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이 길 양쪽으로 폭이 500m가 넘는 갯벌이 펼쳐지는데 왼쪽은 진흙밭이고 오른쪽은 모래와 자갈이 섞여 있다.

제부도 매바위 섬으로 들어서면 바로 갈래길이 나오는데 왼쪽 길로 들어서면 그림과 같은 해안선과 기암괴석, 넓게 펼쳐지는 아름다운 풀밭을 만나게 되고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광어, 우럭, 꽃게 등의 싱싱한 해산물을 파는 포구를 만날 수 있다. 섬을 싸고 도는 왼쪽 길과 오른쪽 길이 마주치는 곳에서 1.4km 좁은 길을 달리면 모랫벌 남서쪽 끝에서 매바위를 만나게 된다. 이 매바위는 제부도의 명물로 오랜 기간의 해식작용에 의해 기이한 모양을 한 기암괴석으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더해 준다.

매바위 주변은 갯벌로 이루어져 있어 바지락이나 조개를 잡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섬의 서쪽에 1.6km에 달하는 곧게 펼쳐진 제부리 해수욕장은 백사장의 폭이 좁고 백사장 곳곳에 조개껍질이 깔려 있어서 맨발로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 그러나 수심이 얕고 고른 편이므로 밀물시간에 3시간 정도 바닷가에서 간이 해수욕을 즐길 수 있는 묘미가 있다. 원래 이 제부리 해수욕장은 모래가 고운 것이 특징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제부도 북쪽에 시화호가 건설되면서 서해 바다의 길이 바뀌어 제부리 해수욕장의 모래가 쓸려나가 지금과 같이 되었다고 한다. 시화호 건설로 인해 제부도는 서쪽 해안의 제부도 해수욕장

갈대밭이 없어지는 등 많은 환경 변화가 있었다고 하는데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제부도 갯벌

제부도 나들이의 즐거움 가운데 또 다른 하나로 물이 빠진 바위틈에서 석화를 캐먹는 즐거움을 빼 놓을 수 없다. 또한 제부도의 갯벌에서는 제철이면 바지락과 굴을 쉽게 볼 수 있는데, 11월 말까지가 바지락철이고 그 후는 굴이 제철이다. 많은 주민들이 굴양식을 하고 있으며, 관광객을 위한 산지 굴 판매도 하고 있다.
제부도는 조개류가 많을 뿐 아니라 맛 또한 매우 좋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식당에서 조개구이를 팔고 있고 이 바지락을 이용한 칼국수가 잘 알려져 있다. 제부도에서 조개를 잡으려면

호미와 맛소금을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맛소금은 조개의 미끼로 사용되는데, 갯벌의 조개 구멍에 맛소금을 조금 뿌리면 조개는 바닷물이 들어 온 것으로 알고 구멍에서 갯벌로 나온다고 한다. 제부도 해안에는 무분별한 조개 채취 때문에 출입이 금지된 곳이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제부도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 가운데 하나는 제부도의 낙조이다. 제부도에서 바라보는 서해의 낙조는 서해 지역에서 낙조가 가장 아름다운 대표적인 곳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교통안내
자가용이용

제부도 안내도

대중교통

 
자료관리담당 : 관광해양과 | 관광담당 ☎ 031-369-2069 최종수정일 : 2009-01-09

삼국시대의 산성으로 1971년 사적 제217호로 지정되었다.
소재지인 남양(南陽)은 처음에는 백제의 영역이었다가 한때 고구려가 점령하여 당성군(唐城郡)이라 하였으며, 신라에 편입된 이후로 당항성(黨項城)이라고 불렀다. 신라 경덕왕 때는 당은군이 되어 성을 축조하고 황해를 통하여 중국과 교류하는 출입구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신라 후기에는 당성진이 설치되어 청해진과 함께 신라 해군의 근거지로 중요시되어 왔다. 실제 성내에서는 각종 삼국시대 토기편과 자기편, 와편 등이 채집되어 왔으며 성내의 가장 낮은 평지에서는 1개의 추정저수지와 조선시대 건물지로 우물지 등이 조사되었다.
당성을 내려다 본 전경
당성 성벽 당성은 남북으로 길다란 장방형에 가까우며 작은 계곡을 두른 포곡식의 본성(本城)과 서남쪽에 낮은 능선 대지를 두른 부곽(副郭)이 이중으로 외성을 이룬다. 정상부 아래의 기슭에 남문터와 북문터가 있고 계곡쪽으로 동문터와 수구터가 있으며 수구터의 주변에 건물터가 있다. 외성은 성의 서남쪽 제일 높은 곳에서 한층 낮아진 평탄 대지를 주머니 모양으로 둘러서 본성의 남문을 보호하는 옹성처럼 축조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한편 이 외성에서 다시 능선을 따라 낮아지는 곳에도 보다 작은 제2의 외성이 축조되어 있어서 남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최소한 2개의 벽을 통과해야하는 특수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당성은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많이 훼손되어 지금은 과거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기는 어려우나 현재 산성의 일부가 복원되었고 연차적으로 복원사업이 진행될 예정이므로 앞으로 예전의 모습을 되찾는다면 좋은 역사교육의 자료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또 정상부까지 오르는 길은 온통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정상부에 오르면 서해의 여러 섬들을 포함한 이 근처 일대를 그림처럼 조망할 수 있어서 가벼운 산책로로 정비해도 좋을 것 이다. 당성 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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