慰禮城 地名由來

소서노란 ‘사철의 들판’ 즉 ‘제철터’ 지칭하는 말

吾心竹--오심죽-- 2009. 11. 3. 15:49

[이영희 교수가 쓴 무쇠의 역사] (10)소서노 왕비

고구려·백제를 창건한 왕비
소서노란 ‘사철의 들판’ 즉 ‘제철터’ 지칭하는 말
고주몽 죽은 후 두 아들과 남쪽 땅에 백제 세워
2003년 09월 03일
 

고구려의 첫 번째 수도였던 해발 820m의 오녀산성(五女山城). 지금은 중국 요령성 환인시 동북쪽 7㎞에 위치하고 있다.

수수께끼의 여인이 있다.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 첫 페이지에서 만날 수 있는 이 여인의 이름은 소서노(召西奴).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 고주몽의 아내요, 백제 시조 온조왕의 어머니다.

한 여인이 이와 같이 두 나라의 시조와 관련이 있는 것은 매우 보기 드문 일이다. 무슨 곡절이 있는지 살펴보자.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백제의 시조 온조(溫祚)왕의 아버지는 주몽이다. 주몽은 북부여에서 도망하여 졸본부여로 왔는데, 그 나라 왕에게는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다. 주몽이 보통 인물이 아닌 것을 알고 둘째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얼마 후에 왕이 죽자 주몽이 임금 자리에 올랐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아들은 비류(沸流)요, 둘째 아들은 온조라 했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찾아오자 기뻐하여 태자로 삼았다.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열 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떠났는데 따라오는 백성이 많았다….’

온조의 어머니 소서노는 후처였다. 애초에 북부여에서 주몽이 도망쳐 왔을 때, 졸본부여왕의 딸 소서노는 고관이었던 남편을 여읜 과부였다. 둘은 곧 결혼해 두 아들을 낳았다. 그 후 고구려 왕이 된 주몽은 전처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을 불러들여 고구려 태자로 삼았다. 갈등 끝에 비류와 온조는 어머니 소서노와 함께 고국 땅을 떠나 지금의 서울로 온다. 백제는 이렇게 탄생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옥사한 사학자 신채호는 소서노를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창건한 왕비’로 보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나라를 둘씩이나 세운 왕비는 소서노 여대왕(女大王)뿐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졸본부여왕 공주였던 소서노의 주도가 아니고는, 맨주먹의 청년이 어찌 남의 나라에서 자신의 나라를 창건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당시 주몽은 22세, 소서노는 30세였다. 소서노는 졸본을 좀 더 발전된 제철국으로 키우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제철왕이었던 ‘해(개)모수’의 서자 주몽을 새 왕으로 내세운 것이다. 그 결과 졸본부여는 고구려라는 튼실한 나라로 발돋움할 수 있었지만, 훗날 왕위는 주몽과 전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에게 돌아가고 만다.

소서노는 ‘사철의 들판’이란 뜻의 이름이다. ‘소서(또는 소시)’는 ‘사철’(砂鐵), ‘노’는 ‘들판’의 고구려ㆍ부여 말이다. 사철이 건져지는 졸본천 일대에 드넓은 제철터가 펼쳐져 있었던 모양이다.

한편 소서노(召西奴)란 한자는 부스노라 읽히기도 한다. 이두 표기 읽음새다. ‘부’는 ‘불’, ‘스’는 ‘무쇠’, ‘노’는 ‘들판’으로, 부스노는 ‘불 무쇠의 들’을 뜻하는 말이다. 역시 무쇠의 들판, 즉 제철터를 가리키는 말임을 알 수 있다.

8세기 초에 나온 일본 역사책 일본서기에는 신라를 예찬하는 글이 보이는데, 여기에 ‘다쿠부스마(たくぶすま)의 신라국’이란 글귀가 보인다.

‘다쿠’란 ‘불 땐다’는 뜻의 일본말로 우리말 ‘달구(무쇠를 불로 달군다는 뜻)’에서 생긴 말이다. ‘부’는 ‘불’, ‘스’는 ‘무쇠’, ‘마’는 ‘공간’, ‘터’를 가리키는 우리말이다. 다쿠부스마란, 불 때어 무쇠를 달구는 제철소를 표현한 옛말이요, 동시에 고대 일본어인 것을 알 수 있다. 제철국인 신라를 부러워한 글발이다.

소서노의 한자 이름을 이두로 풀면 일본서기에 나오는 이 ‘부스’란 낱말이 드러나 우리를 놀라게 한다. 고구려 시조의 왕비 소서노는 제철 관련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제철소의 여자 관리자인 ‘제철여왕’이었을까….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제2대왕 남해(남개)왕은 모두 제철 집안의 여인을 왕비로 삼아 정권의 기반을 튼튼히 했는데, 고구려 시조 주몽은 한술 더 떠서 제철집단을 지휘했을 듯싶은 연상의 여인을 후처로 맞은 듯하다. 게다가 왕이 된 후엔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불러들여 임금 자리까지 넘겨 주었으니, 빈틈 없고 셈에도 아주 밝은 청년이 아닌가.

삼국사기의 백제본기 온조왕 조에는 긴 주석이 별도로 달려 있다.

소서노는 비류ㆍ온조 두 아들을 주몽과의 사이에 낳은 것이 아니라, 전 남편인 우태와의 사이에서 얻은 소생이라는 것이다. 주몽은 북부여에서 도망쳐 나와 서기전 37년 2월 졸본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고구려라 했다. 소서노의 내조에 크게 힘입었으므로 그녀를 매우 사랑했고, 전남편 소생의 두 아들도 친아들처럼 여겼다. 그러나 주몽이 40세에 죽자 그의 친아들이 고구려의 임금 자리에 오르고, 소서노의 두 아들은 남쪽에 가서 살게 된다.

“처음 대왕이 난을 피해 여기로 도망오자, 우리 어머니께서는 집안 재산을 기울여 고구려를 세웠다. 그러나 대왕이 세상을 떠나자 나라는 대왕의 아들 유루의 것이 되었으니 우리는 혹과 같아서 답답할 뿐이다. 차라리 모친을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택하여 따로 나라를 세움만 같지 못하다.”

두 아들은 이같이 푸념하여 남쪽으로 가 미추홀(지금의 인천이라는 설이 있다)에서 나라를 세우고 살았다는 내용이다.

만약 이런 사연이 없었으면 대문화국 백제(서기전 18년~서기 660년)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갈등이 나라를 탄생시킨 보기 드문 경우라 할 수 있다. ‘고구려’의 ‘고’는 주몽의 성 고(高) 씨에서 따온 것이요, ‘구려’는 ‘고을’이라는 뜻의 고구려 말이다.

들판의 옛말 ‘‘노’와 ?일본말 ‘‘노(の·野)’

삼국사기 권제34 잡지(雜志) 지리(地理) 편은 소중한 역사ㆍ지리 자료다. 삼국시대의 원래 이름과 통일신라시대에 바꾼 이름, 그리고 고려 때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어서 우리나라 지명의 변천을 한눈에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한어(漢語)인 고려 때 지명과 삼국시대 고구려ㆍ백제ㆍ신라말의 지명을 서로 견주면 잃어버린 우리 옛말을 되찾을 수도 있어 무척 재미있다.

가령, 현재의 충북 진천군은 ‘원래 고구려의 금물노(今勿奴)군인데 신라 경덕왕이 흑양(黑壤)군으로 바꾸었고, 지금(고려 때를 말함)은 진주(鎭州)다’하는 식이다. 여기서 ‘금물노=흑양’이라는 등식이 드러난다. 흑(黑), 즉 ‘검은’이란 말의 고구려어가 ‘금물(그물이라 발음했음)’이었고, 양(壤), 즉 ‘들판’의 옛말이 ‘노’였음을 이 등식을 통해 알 수 있다.

더욱 희한한 것은 이 ‘노’라는 들판을 뜻하는 고구려말이, ‘들판’을 뜻하는 일본말 노(のㆍ野ㆍ옛말인 동시에 현대어)와 같다는 사실이다.

우리 옛말과 현대의 일본말이 같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 옛말이 일찍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말이 되어 지금껏 전해져 왔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