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 濟

백제와 동아시아---대백제 자료관

吾心竹--오심죽-- 2009. 4. 2. 12:22

Baekje eastAsia

백제의 교류EXCHANGE OF BAEKJE

백제는 한반도의 서남부에 위치하여 서해와 남해에 인접하였다. 이러한 지정학적 요건은 백제가 일찍부터 바다를 매개로 하여 주변 나라들과 활발한 교역 활동을 벌이게 된 배경으로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백제가 지상으로 인접하였던 고구려 및 신라와는 정치 · 군사적으로 경쟁 관계에 있었으며, 중국 측 기록에서 대개 한결같이 표현하기를 ‘그 언어와 풍속이 대략 비슷하다’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일정한 민족적 동질성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따로이 ‘교류’라고 할 만한 것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반면 각각 서해와 남해 바다를 사이에 두고 격해 있었던, 중국대륙의 나라들이나 일본열도의 왜국과는 활발한 문물 교류가 행해졌다.
흔히 백제는 중국대륙의 왕조로부터 선진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고 이야기된다. 백제가 문물 유입의 대상으로 삼은 중국의 왕조는 대개 남북조 시대의 남조 정권이었다. 근초고왕 대에 최초로 동진과 통교한 이래로 수에 의해 중국대륙이 통일되기 전까지 백제는 주로 남조 정권과 교류하였으며, 그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중국 남조와의 교류를 통해 발달된 문화를 이룩하여 갔던 백제는 그것을 다시 일본열도에 전하였다. 또 백제는 항해술의 발달과 함께 적극적으로 남방항로를 개척하면서, 심지어 동아시아를 벗어난 먼 지역에까지 교역 대상을 확대해 간 것으로 보인다. 성왕 대에 승려 겸익이 인도에 가서 구법 활동을 한 것이라든지 유물과 문헌에 파편적으로나마 남아 있는 동남아시아 지역과의 교류 흔적은, 바다를 매개로 하여 드넓은 세계와 소통하고 호흡하였던 백제인의 개방성과 진취성을 보여주고 있다.

 

 

 

 

백제와 고구려Baekje & Goguryeo

초기 관계 : 온조왕 ~ 고이왕

백제의 건국설화에는 백제의 시조인 비류와 온조가 고구려 시조인 추모왕의 아들로서 남하하여 나라를 세웠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백제 초기 지배층의 무덤으로 생각되는 서울 석촌동 일대의 적석총들은 고구려와 백제의 지배층의 동질성을 보여주는 유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을 제쳐놓더라도, 이 시기 아직 국경을 맞대지 않아 이해관계가 상충되지 않았던 양국은 별다른 충돌이나 갈등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고구려가 현도 등 중국세력과의 전투에 ‘마한’을 동원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띄며, 비록 그 진위가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동천왕 벽비’의 기록에서는 3세기 당시 고구려와 백제가 우호적인 관계였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 문구가 보이고 있기도 하다.

긴장 : 책계왕 ~ 계왕

별다른 갈등이 없었던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긴장이 감돌게 된 계기로 볼 수 있는 것은, 대방군과 혼인동맹을 맺은 백제의 책계왕이 고구려의 공격을 받은 대방군을 구원한 사건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책계왕이 고구려의 침략을 받은 대방군에 군사를 보내 구원하니 고구려가 이를 원망하였고, 왕은 고구려의 공격을 두려워하여 아단성과 사성을 쌓았다고 한다.
그러나 여전히 양국 사이에는 낙랑군과 대방군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국의 직접적인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4세기로 접어들면서 낙랑군과 대방군이 소멸되자 양국은 국경을 맞대게 되었고, 상황은 급변하게 되었다.

전쟁 : 근초고왕 ~ 아신왕

근초고왕 대에 이르러 백제가 한반도 남부의 패권을 장악하였고, 선비족과의 전쟁에서 패한 고구려는 남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마침내 고구려 고국원왕의 침공으로 양국 간 첫 충돌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이후 돌이킬 수 없는 적대와 원한 관계의 시작이었다.
첫 충돌은 백제의 완승이었다. 백제는 치양과 패하에서 고구려군의 침공을 격퇴한 후 3만 병력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반격을 가해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백제는 고구려의 원한을 사게 되었고, 고구려에 뛰어난 정복군주 광개토왕이 출현하면서 상황은 급반전되었다. 광개토왕이 이끄는 고구려군 4만의 노도와 같은 공세 앞에 백제는 힘없이 붕괴되었다. 고구려의 공격에 무기력한 진사왕을 몰아내고 아신왕이 즉위한 후 의욕적으로 고구려와의 전쟁을 수행하였으나 역시 연전연패하였고, 광개토대왕릉비문에 의하면 광개토왕에게 패한 아신왕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영원히 노객이 되겠다’고 맹세하는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고 한다. 아신왕은 이후 가야와 왜국을 끌어들여, 고구려에 협력하는 신라를 응징하고자 했으나 이 역시 광개토왕의 남정으로 철저히 분쇄되고 백제는 한반도 남부 지역의 패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소강상태 : 전지왕 ~ 비유왕

한성백제의 말기에 해당하는 이 시기는 백제에 대한 고구려의 우위가 확립된 가운데 대체적으로 평화가 유지되던 시기이다. 놀랍게도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는 이 기간 동안 단 한 건의 전쟁 기사도 없다. 이는 광개토대왕릉비문에 나오는 아신왕의 항복 기사와 고구려의 천하관 등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전란의 시대로 기억되는 삼국시대지만 이러한 시기도 있었던 것이다.

전쟁 : 개로왕 ~ 성왕

한성백제의 마지막 왕 개로왕은 고구려를 공격하고 북방의 방비를 강화하는 등 고구려에 눌려 있는 상황의 반전을 시도하고자 하였다. 그러면서 그 동안 소원하였던 중국 북조의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공격을 요청하고 아우 곤지를 왜국에 파견하는 등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쳐내려온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 앞에 위례성은 함락되고 개로왕도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백제는 남쪽의 웅진으로 천도할 수 밖에 없었고, 이후 고구려는 한층 적극적인 남진정책을 폈다. 백제는 강력한 고구려의 남진을 막기 위해 신라, 가야, 왜국을 한데 묶어 반 고구려 연합을 결성하여 대응하였다. 이후 고구려와 백제 간에는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계속되었고, 이러한 양상은 성왕 말의 전쟁중에 신라가 연합에서 이탈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소강상태 : 위덕왕 ~ 무왕

관산성전투에서 백제가 패한 직후 고구려가 웅천성까지 쳐들어오기도 하였고 무왕이 수나라 황제에게 고구려 공격을 요청한 것에 대해 고구려가 보복 공격을 하는 일도 있었으나, 신라의 한강유역 점거로 인해 다시 국경을 접하지 않게 된 양국의 관계는 대체로 소강상태가 되었다. 중국의 통일제국 수 · 당과 고구려 사이의 갈등과 전쟁 상황에서 백제 무왕은 이른바 ‘양단책’을 취하였고 이는 백제가 고구려와 화친하였다는 식의 기록으로도 나타나게 되었다.

동맹관계 : 의자왕

세계정복의 야욕을 가진 이세민이 당의 황제로 즉위하고 고구려에 연개소문의 강경파 정권이 들어서면서 고구려와 당은 전면전 상황으로 돌입하였다. 이로 인해 고구려는 남방의 안정을 위해 백제와 신라 둘 중 하나와 손을 잡을 필요가 있었다. 한편 백제의 의자왕은 즉위 직후부터 적극적인 대 신라 공세를 폈으므로, 이러한 양국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면서 오랜 세월 계속된 원한관계를 청산하는 전격 화친이 이루어졌다. 652년경 의자왕이 당과의 관계를 단절하기로 결단을 내리면서 양국은 더욱 밀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655년에는 여·제연합군이 신라를 공격하는 모습도 나타났다.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침공으로 멸망하고, 나라를 되찾기 위한 부흥운동이 전개됨에 이르러 고구려는 당과의 전쟁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백제의 부흥운동을 측면지원하였다. 이는 백제가 사라지면 고구려는 고립되어 나·당연합군의 협공을 받게 된다는 전략적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끝내 부흥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후 풍왕과 지수신 등이 고구려로 달아난 것은 이러한 양국의 관계를 보여주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백제와 신라Baekje & Silla

초기 관계 : 온조왕 ~ 계왕

1~2세기 백제와 신라의 세력권은 각각 한강 유역과 경주 일원에 머물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미 이때부터 백제와 신라는 심심치 않게 전쟁을 벌이고 있다. 이러한 초기의 백제 신라간 전쟁 기사에 대하여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믿을 수 없다 하여 부정하거나 후대의 사실이 소급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는 실제로는 백제와 신라가 아닌 다른 소국들간에 일어났던 전쟁이 후에 그들이 백제와 신라로 통합되면서 역사 기록 또한 뭉뚱그려졌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또는 기록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신라의 중심지가 처음부터 경주에 있던 것이 아니라 북에서 남으로 이동하였을 것이라는 식으로 시대상을 재구성하기도 한다.

복속 : 근초고왕 ~ 진사왕

『일본서기』에 의하면 근초고왕은 지금의 대구로 비정되는 탁순국에 이르러 신라를 굴복시켰다고 한다. 3세기 이후 급성장한 백제가 근초고왕 대에 이르러 한반도 남부의 패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신라도 그 영향권 하에 들게 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백제와 신라가 화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고, 백제에서 신라로 도망치는 사람이 생기는 등 백제가 신라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처럼 신라에 대한 백제의 영향력은 지극히 불안하였다.

전쟁 : 아신왕

고구려와의 전쟁에 패배한 아신왕은 고구려에 협력하는 신라를 응징하고자 가야와 왜국의 세력까지 동원하여 대대적인 침략을 단행한다. 한때 신라의 왕성이 함락되어 ‘왜구가 가득하였다’표현될 정도까지 이르렀으나, 결국 고구려 광개토왕이 5만 병력을 이끌고 전격 남하하여 전쟁에 개입하면서 상황은 급반전되어 오히려 백제 측에 가담하여 참전했던 금관가야가 고구려군에 의해 초토화되고 만다.

냉전 : 전지왕 ~ 개로왕

이 시기 백제와 신라 간에는 가끔 사절의 왕래 모습도 보이지만 대체로 별다른 일이 없는 듯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백제가 고구려의 압박에 눌려 있는 시기에 신라는 백제의 남동부 지역을 야금야금 잠식해 들어가고 있다. 삼년산성의 축성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또한 이 시기 왜의 신라 침공이 잦아지는데, 이것은 백제와 관련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백제의 비유왕과 신라의 눌지왕 사이에 화친이 맺어지고 있고, 이로부터 120년간의 이른바 ‘나제동맹’이 시작되었다고 보기도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정의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무리가 따른다.

역전 : 문주왕 ~ 삼근왕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에 당하여 백제는 신라에 구원을 청하였고, 이에 신라는 1만의 구원병을 파견하였다. 비록 신라의 구원병은 이미 위례성이 함락된 후 도착하여 때가 늦고 말았지만, 이는 고구려군이 성 함락 직후 철수하게 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또한 구원병을 이끌고 온 문주가 왕위에 오르는 데 일종의 힘으로서 작용하게 되었다는 해석도 있다. 『화랑세기』라는 기록에는 신라인이 이 때 백제가 신라에 ‘신하로서 의지하였다’고 말하는 부분이 나온다. 이는 신라가 백제에 대한 구원병 파견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또한 권력기반이 취약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는 문주왕의 즉위와 신라의 구원병이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비록 신라측의 일방적인 기록이기는 하지만, 이 때에 이르러 근초고왕 대의 우열 관계가 오히려 역전되는 모습이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동맹 : 동성왕 ~ 성왕

동성왕 즉위 초에 고구려는 대대적으로 신라를 공격하였다. 고구려군은 신라의 도성 코앞까지 진격하였고 위기에 몰린 신라는 백제와 가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백제와 가야가 이에 응하여 결국 3국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군은 격퇴되었다. 백제로서는 한성 함락 때의 빚을 갚은 셈이다. 이후 동성왕은 고구려의 남하에 대응하기 위해 신라와 혼인 동맹을 추진하였고,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공격에 철저하게 공동 대응하게 된다.
그러나 무령왕 대에 이르면 백제와 신라 간에 별다른 협력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성왕 대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싸우는 것을 틈타 신라가 두 나라의 성을 모두 빼앗는 등 동맹 관계로는 생각하기 어렵게 하는 모습들이 보인다. 고구려가 위기에 직면함에 이르러 백제와 신라는 다시 연합군을 구성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여 큰 성공을 거두지만, 신라가 고구려와 밀약을 맺고 백제를 배신하면서 양국의 관계는 다시 파국으로 치닫는다.

긴장 : 위덕왕 ~ 무왕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이 전사하면서 백제가 대패하였고, 이로 인해 백제가 크게 위축됨으로서 양국의 관계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지만, 이미 백제에게 있어 신라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 셈으로 이는 폭풍전야와도 같은 것이었다. 위덕왕 대에서 무왕 대로 넘어가면서 백제가 국력을 회복하고, 백제의 신라에 대한 공세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신라는 군사적 맞대응으로 이를 막아내기도 하고, 혹은 당을 이용한 교묘한 외교술로 백제의 공세를 모면하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무왕이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와 혼인하였다는 서동설화의 내용은 많은 의구심을 자아내었다. 원수지간인 양국 왕실간에 어찌 혼인관계가 가능하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이 시기에는 단지 신라에 대한 백제의 적개심만이 높았던 것이므로 백제 측에서만 태도를 바꾼다면 꼭 불가능하지만은 않은 일 같기도 하다.

전면전 : 의자왕

의자왕이 즉위 초에 행한 대야성 등 신라 40성의 공취는 양국을 돌이킬 수 없는 원수지간으로 만들어버린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전쟁에서 백제군에 의해 살해된 대야주 도독 김품석과 그 부인 고타소랑이 후에 신라의 태종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의 사위와 딸이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은 실제로 신라가 당을 끌어들여 백제를 공격한 이유가 일정 부분 김춘추 등의 원한에 기인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어쨌든 그것이 아니라도 이 시기 백제와 신라는 끊임없는 무한 전쟁의 양상으로 치닫고 있었다. 주로 백제의 신라 침공으로 인해 거의 해를 거르지 않을 정도로 계속해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양국의 원한 관계는 결국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면서 끝장을 보고야 말았다.

 

 

 

백제와 가야Baekje & Gaya

백제와 가야의 관계에 대해서는 워낙 기록이 적어 상세히 알기 어렵다. 다만 근초고왕이 ‘가라 7국’을 복속시킨 이후 가야는 백제의 영향권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파악된다. 이전에 낙랑과 왜국을 연결하는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던 가야는 이후로는 백제와 왜국을 연결하는 해양 거점의 역할을 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서기』에서 말하는 이른바 임나일본부는 사실 이러한 가야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가야 세력은 아신왕에 의해 신라 공격에 참가하였다가 대대적으로 남정을 개시한 고구려 광개토왕에게 짓밟혀 이전까지 연맹을 주도하였던 금관가야가 몰락하는 사태를 겪기도 하였다. 이후 백제가 주도하는 반 고구려 동맹의 일원이 되어 고구려에게 공격받는 신라를 구원하는데 참전하기도 하였다. 또 관산성 전투 때에는 백제 측에서 참전하였는데 그만 백제가 대패하면서 이후 가야는 점차 신라에 의해 흡수되어 갔다.

 

 

 

 

백제와 중국Baekje & China

초기 백제와 낙랑군·대방군

백제의 건국설화 중에는 백제가 ‘대방고지’에서 건국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일반적으로 낙랑과 대방의 군현 세력은 삼한의 토착세력에 대한 사여 등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였다고 이야기된다. 또 『삼국사기』에는 초기 백제와 낙랑의 갈등 양상을 묘사하고 있기도 하다.
백제와 낙랑·대방의 갈등이 정점에 다다르는 것은 ‘한의 수장’이 무리를 이끌고 쳐들어와 기리영이라는 곳에서 전투를 벌여 대방태수 궁준이란 자를 전사시킨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한의 수장’의 정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지만 전후 맥락을 고려할 때 역시 백제 고이왕으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고이왕은 기리영전투 직후 군현 세력과 타협하였고, 그 뒤를 이은 책계왕은 대방군과 혼인 관계를 맺고 고구려가 대방을 치자 대방을 구원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책계왕은 다시 낙랑과의 싸움에서 전사하고 그를 계승한 분서왕 역시 낙랑에서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는 등 백제와 군현 세력간의 갈등은 다시 증폭되어 갔다. 이러한 관게는 고구려의 남하로 군현 세력이 소멸되면서 비로소 자연히 사라지게 된다.

백제와 남북조

근초고왕 대 백제가 동진과 통교한 이래로 중국의 남조 정권은 백제의 가장 주된 외교 대상이 되었다. 백제는 남조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동진의 승려 마라난타에 의해 불교가 전래된 것을 비롯하여, 백제인이 유명한 서체를 얻기 위해 노력하였다는 일화라든지 성왕 대에 특별히 국서를 보내 모시박사(毛詩博士)와 공장(工匠), 화사(畵師)등을 청하였다는 기록 등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백제시대 고분에서는 도기·자기류를 중심으로 하여 중국에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이는 물건들이 자주 발견되는데, 이는 이처럼 활발했던 교류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백제는 한때 북위에 고구려 공격을 요청하는 사신을 보내기도 하는 등 북조와의 관계도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현재 남아있는 백제의 마애불상들은 대개 북조의 영향을 받은 양식으로 이야기된다. 하지만 주된 외교 대상은 어디까지나 남조였던 것으로 보이고, 동성왕 대에는 북위와 전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백제와 통일제국

수·당에 의해 중국대륙이 통일되었을 때에도 백제 외교의 기본 방침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백제는 이전에 남조 정권들과의 관계처럼 수·당에 자주 사신을 파견하였다.
그러던 것에 변화가 생긴 것은 동아시아 정세의 전체적인 변화에 맞물려 있다. 당은 고구려를 정복하기 위해 신라의 협조를 필요로 했고, 백제는 그 신라의 적대국이었다. 당은 백제에 신라와 화친할 것을 강요하였으나 백제로서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결국 652년 이후 백제는 당과 결별하게 된다. 이는 나·당연합군의 침공으로 인한 백제의 멸망으로 귀결되었다.

 

 

 

백제와 일본Baekje & Japan

백제와 왜국이 통교한 근초고왕 대 이후 백제와 왜국은 단순한 국가간의 외교를 넘어선 특별한 관계였다. 6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왜국은 외부 문물의 유입을 거의 전적으로 백제에 의존하였고, 백제는 그 반대급부로 다른 세력과의 전쟁에 왜국의 군사력을 동원하였다. 그 과정에서 백제는 왜국의 발전 과정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이는 지금도 일본 곳곳에 남아 있는 수많은 백제의 흔적들이 웅변하고 있다.

칠지도 - 백제의 융성과 왜

일본 나라현(奈良縣) 덴리시(天理市)의 이소노가미 신궁(石上神宮) 에는 고대로부터 전해져 오는 경이로운 유물이 있다. 칠지도(七支刀). 7개의 가지를 가진 나무 모양의 이 철제 검에는 금으로 장식되어 섬세하게 새겨진 명문이 있다. 이것은 『일본서기』에 의하면 백제의 근초고왕이 다른 각종 보물들과 함께 왜국에 ‘바쳤다’고 하는 칼이다.
하지만 정작 칠지도 자체에 새겨져 있는 명문의 내용은, 비로소 ‘일본’이라는 국가가 성립되던 8세기 당시의 관점과 정치적 목적이 짙게 반영되어 왜곡이 많은 『일본서기』의 표현과는 전혀 다른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 백 번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으니, 모든 병해(兵害)를 물리칠 수 있고 순탄하게 후왕으로 나아가리라...... 선세 이래 이 칼이 없었는데, 백제왕 치세에 기묘하게 얻은 성스러운 소식이 생긴 고로, 왜왕을 위하여 만든 뜻을 후세여 전하여 보여라.”
한마디로, 백제왕이 공들여 만든 신성한 검을 왜왕에게 하사하니 황송히 여기고 소중히 간직하여 후세에 전하라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검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권위의 신표로 하사하는 의례적인 물건이다. 이는 동서양과 시대를 불문하는 세계적인 공통성이라고 할 수 있다. 칠지도의 명문이 말하고 있는 바 또한 여기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근초고왕 대, 한반도 남부를 평정하고 동아시아의 제해권을 장악하여 일대 해상왕국을 건설하였던 백제의 자부심과 천하관이 그대로 묻어나고 있다.
‘후세에 전하라’는 백제왕의 뜻을 왜왕과 그 후손들은 철저하게 지켰다. 그리하여 1700년이나 된 검이 놀랍게도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백제와 왜의 공식적인 관계는 그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아스카베 신사 - 백제의 풍운과 왜

일본의 신도(神道)는 온갖 다양한 신을 모신다. 그런데 그 성전인 신사(神社) 중 하나인 아스카베(飛鳥戶) 신사에서 모시는 신은 놀랍게도 백제 개로왕의 아우로 왜국으로 파견되었던 ‘좌현왕’ 곤지이다. 강성한 고구려에 맞서기 위한 조치로 바다를 건너 왜국에 정착하였고, 다시 조국의 위기를 듣고 급히 귀국하였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던 비운의 ‘좌현왕’은 일본에서 신이 된 것이다.
삼국 간 항쟁이 격화되면서 백제는 왜국을 배후세력으로 삼아 그 군사력을 동원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백제는 왜국에 선진문물을 전수하고, 왜국은 백제에 군사력을 제공하는 양국의 독특한 관계가 계속되었다. 아신왕의 태자 전지로부터 개로왕의 아우 곤지, 위덕왕의 태자 아좌와 백제의 마지막 왕이 된 풍왕에 이르기까지 백제의 태자나 왕제들이 왜국에 파견되어 체류하였던 것은 이와 연관된 일이다.

백강구전투 - 백제의 최후와 왜

660년 나·당연합군의 침공으로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이 당에 끌려가면서 백제는 멸망하였지만, 단지 도성과 왕만을 빼앗겼을 뿐 백제인들은 나·당연합군에 맞서 3년에 걸친 항쟁을 벌였는데, 이 또한 왜국과 무관하지 않았다.
왜국에 체류하던 부여풍이 5천의 왜군을 거느리고 귀국하여 끊어진 왕위를 이었고, 한때 영토의 대부분을 회복하는 등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결국 내분으로 인해 그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나·당연합군이 노도와 같이 공격해 오니, 왜국은 위기에 몰린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 다시 수많은 함선을 동원하여 2만 7천의 대병력을 보냈다. 왜국의 제명천황이 이를 위해 몸소 서쪽 해안에 머물며 함선 건조 등을 감독하다가 그곳에서 세상을 뜰 정도로, 왜국은 백제 구원에 온 국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663년 9월, 지금의 금강 또는 동진강 하구로 생각되는 백강구에서 제·왜연합군과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운명을 건 일대 해전을 벌였다. 나·당연합군의 함선은 170척, 제·왜연합군의 함선은 1000척. 규모면에선 제·왜연합군이 우세하였으나 전략적 위치는 불리하였고, 나·당연합군의 견고한 수비를 뚫지 못하던 제·왜연합군은 결국 기상을 고려하지 않은 무모한 공격을 감행하다가 적의 화공에 당해 전함 400척이 불타는 큰 피해를 입고 패배하고 말았다.
이로서 백제는 완전히 멸망하게 되는데, 이때 많은 백제인들이 대거 왜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운 국가 ‘일본’을 건설하는 주역이 되었다. 이처럼 백제와 왜의 긴밀한 관계는 마지막까지 지속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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