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 濟

백제 역사---대백제 자료관

吾心竹--오심죽-- 2009. 4. 2. 11:24

Baekje history

 

백제의 건국NATIONAL FOUNDATION OF BAEK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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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제인의 고향
  • 건국과정/주민구성
  • 건국시기

백제는 우리나라 고대에 한반도의 서남쪽에 위치하며 고구려(高句麗), 신라(新羅)와 함께 이른바 삼국시대(三國時代)를 형성하다가 서기 660년 신라에 의해 멸망한 나라의 이름입니다. 백제는 나라의 이름, 곧 국호(國號)를 몇 차례 바꾸었으며, 또 기록에 따라 여러가지 별명으로 소개되기도 하였는데 시대를 떠나서 가장 일반적인 이름은 역시 백제(百濟) 입니다. 백제라는 국호의 의미에 대해서는 기록에 따라 설명이 조금씩 다릅니다. 먼저, 한국고대사 연구의 기초자료인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이 그의 형인 비류(沸流)가 다스리던 백성을 합쳐 더 큰 나라를 만들때 비류의 백성들이 모두 즐거워 하여서 나라 이름을 백제로 고쳤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한편, 중국측의 역사서인 수서(隋書)에는 백제를 간략하게 소개한 [백제전(百濟傳)]이 있는데, 거기에는 처음에 백여 호(戶)가 바다를 건너[百家濟海] 남하하여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백제라고 하였다고 쓰여 있습니다. 백제의 국호에 대한 삼국사기와 수서의 설명 가운데 어느 쪽이 맞는 것인지는 아직 가려내기 어렵습니다. 양쪽 모두 설화에 입각한 설명이기에, 어쩌면 양쪽 모두 잘못된 설명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백제가 처음부터 백제(百濟)라는 국호를 사용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처음 나오는 백제의 국호는 십제(十濟)입니다. 조금 길긴 하지만, 백제의 건국과 관련된 삼국사기의 기록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백제 시조 온조왕(溫祚王)의 아버지는 추모(鄒牟)로서 주몽(朱蒙)이라고도 하는데, 북부여(北扶餘)로부터 난을 피해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졸본부여의 왕에게는 아들이 없고 단지 딸만 셋이 있었다. 왕이 주몽을 보더니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둘째 딸을 시집보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졸본부여의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잇고 두 아들을 낳았다. 맏아들을 비류라 하고 둘째 아들을 온조라고 하였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매,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하다가 마침내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10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가니 백성 가운데 따르는 자가 많았다.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살만한 땅을 바라보았는데, 비류는 바닷가에서 살고 싶어 하였다. 10명의 신하가 간언하기를 "생각컨대 이곳 하남(河南)의 땅은 북쪽으로 한수(漢水)를 끼고, 동쪽으로 높은 산악에 의지하며, 남쪽으로 기름진 들을 바라보고, 서쪽으로 큰 바다에 막혀있으니, 그 천혜의 험준함과 땅의 이로움은 좀체로 얻기 어려운 지세입니다. 이곳에 도읍을 만드는 것이 좋겠습니다"고 하였다. 그러나 비류는 신하들의 간언을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로 가서 살았다. 온조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하였다. 10명의 신하로 하여금 돕게 하고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고 하니,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의 홍가(鴻嘉) 3년이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히 살 수 없었는데, 위례성으로 돌아와 보니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편안하였다. 마침내 비류가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 죽으니, 그 신하와 백성이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백성들이 올 때 즐거이 따라왔다 하여 나중에 국호를 백제(百濟)로 바꾸었다. 그 세계(世系)가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부여(扶餘)를 성씨로 삼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百濟本紀)] 온조왕 즉위년조. 위의 기록은 내용상 백제의 건국설화라고 하여도 무방한데, 고구려·신라의 그것과 비교한다면, 매우 특이하다고 할 만합니다. 즉, 백제의 건국설화-온조설화(溫祚說話)에는 묘하게도 신비라든가 기적과 관련된 부분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매우 사실적이고 소탈한 방법으로 백제 건국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백제의 건국 설화가 뒤늦게 채록되었거나 중국화된 합리주의적 시각에서 채록되었기 때문인 듯합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백제의 건국설화가 고구려, 신라의 그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욱 사실에 가깝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여하튼, 위의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백제의 국호는 애초 십제(十濟)였으며, 나중에 국력이 더욱 커지자 백제(百濟)로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십(十)에서 백(百)으로' 바뀌었다는 것인데, 이와 같은 설명이야말로 중국화된 시각, 곧 한자(漢字)에 입각한 해석이자 설명이라고 하겠습니다.

또, 그렇기에 인위적인 분위기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즉, 나라가 성장함에 따라 '십(十)'에서 '백(百)'으로 나라 이름을 바꾸었다는 설명은 마치 '백'을 염두에 두고 숫자논리에 입각하여 '십'을 지어낸 듯한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는 기록은 중국에서 진수(陳壽)라는 이가 3세기 후반에 편찬한 역사서 삼국지(三國志)입니다. 중국 삼국시대의 역사를 정리한 삼국지에는 [한전(韓傳)]이라 하여 우리의 삼한(三韓)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한 부분이 있는데, 그중 마한(馬韓)에 속한 54개 소국의 이름을 열거하던 가운데 백제국(伯濟國)이라는 국호를 적어놓은 대목이 있어 우리의 눈길을 끕니다. 백제(伯濟)와 백제(百濟)는 한자만 약간 다를 뿐 같은 음(音)으로 된 글자이며, 또 백제국의 위치가 한강유역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여러모로 백제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상당수의 학자들은 보통 백제국을 백제의 초기 단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즉, 백제국이 국력을 신장한 결과 국호를 한자 뜻이 더 좋고 세련된 백제(百濟)로 바꾸었다는 것이지요. 한편, 일본 정부에 의해 서기 720년에 편찬된 역사서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위례국(慰禮國)'이라는 명칭이 나오는데, 이는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한 백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고대에는 도시의 명칭을 그대로 나라 이름으로 사용한 예가 적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위례국이라는 이름도 그다지 어색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만약 일본서기의 위례국이라는 표현이 어떤 근거를 가진 것임을 인정할 경우, 그것이 백제라는 국호보다는 앞선 시기의 국호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아도 될 듯합니다. 다만, 그것이 정식의 국호였는지, 아니면 별명과 같은 것이었는지는 아직 가리기 어렵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는 성왕(聖王) 16년(538)에 도읍을 웅진(熊津) 곧 지금의 공주지방에서 사비(泗비) 곧 지금의 부여지방으로 옮기면서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다시 한번 바꾸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남부여'라는 국호는 다른 기록에 별반 남아있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보아, 국제사회에서는 물론 백제 내부에서도 그리 오래 사용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도읍을 옮길 때 국가 분위기를 새롭게 한다는 뜻에서 국호도 바꾸었지만, 백제라는 국호가 지니는 전통적 이미지가 이미 국내·외에 널리 퍼져있어 오래지 않아 환원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지금까지 소개한 국호들처럼 널리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매우 특징적인 명칭도 있었습니다. 바로 응준(鷹準)과 나투(羅鬪)라는 이름입니다. 고려시대의 저작인 제왕운기(帝王韻紀) 에는 "후대의 왕 때에 국호를 남부여라고 한 적이 있으며, 또 응준 혹은 나투라고 칭하기도 하였다"라는 대목이 있는데, 응준과 나투는 모두 조류(鳥類)의 일종인 '매'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응준과 나투는 정식 국호라기 보다는 다른 나라에서 백제를 지칭할 때 사용한 일종의 별명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마침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신라가 선덕왕(善德王) 14년(645)에 건립한 황룡사(皇龍寺) 9층탑의 제5층에 신라의 경계해야 할 적대국으로서 응유(鷹遊)를 적어놓았다는 기록이 있는바, 여기의 응유를 앞서의 응준과 같은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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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소개한 백제의 건국설화에서 주목되는 것은 고구려의 건국 시조인 주몽(朱蒙)을 백제에서도 역시 건국시조화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고구려와 백제가 상당히 치열하게 다투던 경쟁상대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에서는 자존심 상하게 고구려의 건국시조를 백제 건국시조의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아마도 백제의 건국집단이 고구려지역에서 남하한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날 남아있는 백제 초기의 유적을 통해서도 입증됩니다.

지금의 서울시 송파구 석촌동(石村洞)에는 대규모의 적석총 유적이 있습니다. 적석총은 고구려의 특징적 묘제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백제의 수도, 특히 지배계급의 공동묘지로 추정되는 곳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1∼2기(基)가 아닙니다. 그 사이 도시개발 등으로 많은 고분이 파괴되어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원래는 수십기의 적석총이 석촌동 일대에 조영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중 어떤 것은 왕릉(王陵)일 개연성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백제는 고구려에서 나왔다고 확정적으로 말해도 좋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위의 설화에 의하면 주몽은 어디까지나 북부여 출신의 졸본부여 사람이었습니다. 백제 왕의 성(姓)도 부여(扶餘)씨입니다. 그래서인지 백제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백제는 부여 계승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서기 538년에 백제의 성왕(聖王)이 사비(泗비)로 도읍을 옮긴 뒤 남부여(南扶餘)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도 부여계승의식의 강렬한 표출이라고 하겠습니다. 실제로 백제 초기의 무덤 양식 가운데 하나인 토광묘(土壙墓)는 부여인들이 조영하였던 토광묘와 축조방식 등이 매우 흡사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자료에 의하면, 백제에서 고구려식의 적석총이 축조되는 시기는 아무리 빨라도 3세기 이후로서, 토광묘보다 늦습니다. 그런데, 주몽을 부여 출신의 고구려 건국자로 설명하지 않고 졸본부여의 계승자로 소개한 백제의 온조설화가 어떤 면에서는 고구려의 건국신화보다 주몽의 입지에 대해 더 정확하게 묘사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한가지 예로서, 고구려의 유리왕(琉璃王)에 대한 설화를 들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소개된 유리왕 설화에 따르면, 유리는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얻은 부인이 주몽의 독신 남하 후에 낳은 아들입니다. 부여에서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멸시를 당하던 유리는 아버지가 낸 수수께끼를 풀어 주춧돌 아래 숨겨진 칼 조각을 찾아낸 뒤 남녘에서 왕이 된 아버지 주몽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아버지 주몽과 마찬가지로 유리도 옥지(屋智)·구추(句鄒)·도조(都祖) 3명과 함께 남하하였으며, 주몽을 만나 태자에 책봉된 뒤 왕위를 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규보(李奎報)의 동명왕편(東明王篇)에 실린 고구려의 건국신화에는 한 대목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칼을 맞대어본 주몽이 "너는 진짜 내 아들이다. 무슨 신성한 것이 있느냐?"하고 물었더니, 유리가 몸을 날려 공중에 솟아서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을 타는 재주를 보였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주몽의 능력에 육박하는 실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삼국사기보다는 동명왕편에 인용된 설화가 원형에 더 가깝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실제 고구려의 건국신화는 주몽의 건국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유리명왕의 출현과 즉위로 종결되는 셈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구려의 건국은 유리명왕의 즉위를 통해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백제의 온조왕은 건국하자마자 동명왕묘(東明王廟)부터 세웠다고 합니다. 위패(位牌)를 모셔두고 제사지내는 곳을 묘(廟)라고 합니다. 여기의 동명왕이 부여의 건국자를 말하는지, 아니면 고구려의 주몽을 지칭한 것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온조왕이 주몽의 아들을 자처하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마도 주몽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백제인들은 왜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을 제사지냈을까요? 주몽은 졸본부여의 계승자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백제인에게 주몽은 고구려의 시조가 아닌 졸본부여의 계승자로서만 인식되었기 때문에 동명왕묘를 세우게 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하여 '유리왕의 고구려'와 경쟁적인 계승의식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고 하겠습니다.

여하튼, 온조설화에서는 백제와 고구려가 이복형제의 국가로 묘사되는 친밀감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백제에는 온조설화 이외에 또다른 건국설화가 있습니다. 이른바 비류설화라고 하는 것인데, 내용상 온조설화와 약간의 차이를 보입니다. 삼국사기에 조그맣게 실린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백제의 시조는 비류왕(沸流王)으로서, 그의 아버지인 우태(優台)는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庶孫)이며, 어머니인 소서노(召西奴)는 졸본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이다. 소서노가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을 낳으니, 맏아들이 비류이고 둘째 아들이 온조이다. 우태가 죽자 소서노는 과부가 되어 졸본에서 살았다. 나중에 주몽이 부여에서 용납되지 않자 전한(前漢) 건소(建昭) 2년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고구려라고 불렀다. 주몽이 소서노에게 장가들어 왕비로 삼았는데, 소서노가 국가의 기틀을 열고 다지는 데에 자못 내조가 컸으므로, 주몽이 소서노를 특히 두텁게 총애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 아들처럼 대하였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에게서 낳은 아들인 유유(孺留)가 오자 그를 세워 태자로 삼고 왕위를 잇게 하였다. 이에 비류가 아우인 온조에게 이르기를 "처음에 대왕께서 부여의 난을 피해 이곳으로 도망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집안의 재산을 기울여가며 도와 방업(邦業)을 이루니, 그 노고가 많았다. 그런데 대왕께서 돌아가시자 국가가 유유의 소유로 되었으니 우리가 이곳에서는 한낱 혹과 같아서 답답할 뿐이다.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택하여 따로 국도(國都)를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다. 드디어 아우와 함께 무리를 이끌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를 건너 미추홀(彌鄒忽)에 이르러 살았다.

앞에서 본 온조설화와 달리 비류를 중심으로 한 비류설화는 주몽과의 연계가 매우 약합니다. 비류설화에서 주몽은 단순히 비류 형제를 예뻐해 준 의붓아버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비류 형제의 친아버지는 주몽과 마찬가지로 북부여 출신의 졸본사람 우태입니다. 우태 역시 남하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주몽에 대한 비류 형제의 감정은 매우 우호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강하진 않으나 주몽과 백제의 연계는 비류설화에서도 여전히 인정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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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류설화에서는 비류와 온조가 함께 나라를 세운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미추홀이 수도로 등장합니다. 이러한 차이점은 온조설화와 비류설화가 각기 다른 경로로 전승되어 왔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즉, 온조설화는 하남위례성 지역에서, 비류설화는 미추홀지역에서 각각 전승되어 온 설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설화 모두 온조와 비류를 형제로 설정한 점은 똑같습니다. 우리는 이쯤에서 신화속의 개인은 집단을 상징한다는 학계의 연구결과를 상기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온조집단과 비류집단은 형제라는 말이 됩니다. 집단과 집단간의 형제관계? 다소 어색한 이 말은 집단과 집단 사이의 연맹관계라는 말로 바꿀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느 시기 온조집단과 비류집단 사이의 연맹관계를 이야기로 만든 것이 바로 온조설화와 비류설화라고 하겠습니다. 설화에 따르면, 비류는 미추홀,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자리잡았습니다. 미추홀의 위치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세간에서는 흔히 지금의 인천(仁川)이라고 이해하지만, 그 증거는 매우 미약합니다. 오히려 각종 자료를 분석해보면, 지금의 경기도 양주(楊州)·파주(坡州)·연천(漣川)을 잇는 임진강 연안의 지역일 개연성이 높습니다.

반면, 하남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생각이 어느 정도 일치되고 있습니다. 지금의 서울시 송파구 일대, 특히 풍납토성(風納土城)과 몽촌토성(夢村土城)을 포함하는 지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설화에서는 비류가 형이며, 온조가 동생입니다. 왕위를 계승하는 원칙에 따른다면 형이 우선입니다. 그러나 백제에서는 동생인 온조가 시조로 존숭되었습니다. 비류의 현명하지 못한 판단 때문이라는 것이 설화의 설명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형이란 먼저 태어난 사람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비류집단이 먼저 한강유역에 자리잡은 사실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뒤이어 온조집단이 남하하여 한강유역에 정착하였는데, 온조집단의 경제·군사력이 비류집단을 압도한 결과 나중에는 비류집단의 구성원까지 흡수하게 되었다는 것이 온조설화에 숨은 속뜻이 아닐까요?

지금까지의 간략한 분석을 종합하면, 부여에서 고구려방면으로의 주민 이동과 부여·고구려방면에서 한강유역으로의 주민 이동이 여러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는 사실, 그리고 한강유역에 여러 집단이 공존하다가 하나의 정치체제 속으로 통합된 역사적 사실이 백제의 건국설화에 반영되었다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한편, 백제의 건국설화로는 도모(都慕)라는 사람이 백제를 세웠다는 이야기와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백제의 시조라는 이야기가 각각 일본과 중국측의 역사서에 전하기도 하는데, 그만큼 백제를 건국하고 발전시키는 데 참여한 집단이 다양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중국의 역사서 가운데 수서(隋書)에는 백제인의 출신이 잡다하여 신라·고구려·왜(倭)로부터 온 사람들 뿐 아니라 중국인도 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기록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일단 당시 백제의 주민 구성이 매우 복잡다단하였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는 있겠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백제의 국가 형성과 발전 과정을 그에 맞추어 이해할 수도 있을 듯합니다. 즉, 앞에서도 이미 밝혔듯이, 백제를 건국한 세력으로는 우선 부여·고구려 방면으로부터 남하하여온 사람들을 거론할 수 있는데, 이들의 활동 무대가 기본적으로 마한(馬韓)의 그것과 별개일 수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른바 백제인 중에는 마한 혹은 한(韓)계통의 토착민이 다수 포함되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또 4세기 초 낙랑(樂浪)·대방군(帶方郡)이 멸망한 후의 주민이동이라든가 백제와 왜(倭) 사이의 긴밀한 교류 등에 주목할 때, 중국·왜 계통 주민들의 존재 역시 인정할 수 있겠습니다.

 

 

 

백제의 건국NATIONAL FOUNDATION OF BAEK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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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가 건국한 해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 전한(前漢) 성제(成帝)의 홍가(鴻嘉) 3년, 곧 서기전 18년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 중에는 나중에 지어낸 듯한 부분이 없지 않아서 그대로 믿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다른 자료를 통해 검증할 필요가 있는데, 중국측의 당시 자료와 남아있는 유적·유물을 검토해보면, 한강유역에서 백제가 건국한 시기는 아무래도 기록보다는 늦은 시기였을 개연성이 높습니다. 백제의 건국 및 성장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유적으로는 춘천시 중도(中島)의 적석총, 가평군 마장리(馬場里)의 주거지, 양평군 대심리(大心里)의 취락지, 양평군 문호리(汶湖里)의 적석총, 하남시 미사리(渼沙里)의 주거지와 밭 유적, 서울시 송파구의 석촌동·가락동 백제고분군, 풍납동토성, 몽촌토성 등이 대표적입니다.

백제의 주민으로는 왕실을 차지하고 귀족층의 주류를 이룬 부여·고구려계 남하민과 마한(馬韓)의 구성원이던 토착민, 그리고 낙랑·대방군이 멸망하면서 백제에 흡수된 중국계와 교류를 통해 이주해온 일본계 백제인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부여·고구려계 남하민이 백제의 왕실과 귀족층의 주류를 차지하였다는 해석은, 앞에서 이미 간단히 소개한 바와 같이, 건국설화를 비롯한 몇몇 문헌자료와 한강유역 소재 각종 유적에 대한 지금까지의 발굴 조사 결과에 따른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해석이 크게 틀리지 않았다면, 부여·고구려 방면으로부터 주민들이 언제 이동하여 왔는지를 밝혀내는 것이 백제의 건국 시기를 조금 더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백제의 유적 가운데 부여·고구려 방면으로부터의 문화적 영향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으로는 한강유역의 고분군을 들 수 있습니다. 특히 석촌동·가락동일대의 토광묘와 적석총들은 백제의 건국자 집단과 깊이 관련된 것으로 알려지는데, 대부분 서기 2-3세기 이후에 조영된 것들입니다. 따라서 일단 온조 집단으로 대표되는 고구려계통 백제 왕실의 개창은 석촌동일대에 조영된 적석총 등에 근거하여 3세기 이후의 일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소개한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 <한전(韓傳)>의 백제국(伯濟國)이 정말로 백제(百濟)의 전신(前身)이라면, 이른바 연맹왕국단계의 백제에 앞선 성읍국가(城邑國家)단계의 백제는 늦어도 3세기에는 성립되어 있었다고 하겠으며, 더 나아가서 석촌동·가락동일대의 고분군과 연계지어 볼 때, 2세기 무렵에는 이미 백제국의 기반이 된 정치체가 한강유역에서 출현하였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백제의 변천THE CHANGES OF BAEK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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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왕실과 왕위계승에 관한 가장 상세한 기록은 역시 삼국사기 [백제본기]입니다. 그에 따르면, 백제는 시조 온조왕을 포함하여 모두 31명의 왕이 즉위하였으며, 그들의 성(姓)은 예외없이 부여(扶餘)씨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5대 초고왕(肖古王)부터 제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까지의 기간에 이루어진 일부 형제상속의 특별한 예를 제외하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부자상속이 유지되었다는 것이 백제 왕실에 대한 기록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록을 그대로 믿는 학자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다수의 백제사 연구자들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초기 기사의 정확도를 의심하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왕위의 부자상속에 대한 부분을 믿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실린 왕실계보를 그대로 믿지 못하는 학자들 중에는 이른바 왕실교대론(王室交代論)이라 하여 제8대 고이왕(古爾王) 때라든가 제11대 비류왕(比流王) 또는 제12대 근초고왕 때 왕실이 교체되었다고 보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즉, 삼국사기의 기록에서와 같이 부여씨가 대대로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은 비교적 후대의 일이며, 그 전에는 다른 성씨(姓氏)의 왕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왕실교대론의 입장에서 해석 가능한 기사가 있어 주목됩니다. 즉, [남부여 전백제(南扶餘 前百濟)]조에 의하면, 백제의 왕실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해씨(解氏)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이를 앞서의 삼국사기 기록과 맞추어 보면, 삼국유사쪽의 잘못된 기술 탓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백제의 왕실 성이 해씨에서 부여씨로 바뀐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편이 더 자연스러운 듯합니다. 중국측의 백제 관련 기록을 참고할 때, 백제의 왕 중에서 부여씨임이 비교적 분명하게 입증되는 최초의 왕은 근초고왕입니다. 따라서 적어도 근초고왕 이후는 부여씨의 왕실 독점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 앞선 비류왕 때까지의 왕실에 대해서는 기록이 매우 적을 뿐 아니라 신빙성마저 그리 높지 않기에 왕실의 성격을 분명하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제5대 초고왕의 이름이 제13대 근초고왕과 같다는 점에 주목하여 초고왕 이하는 모두 부여씨로 간주하고, 그에 앞선 제4대 개루왕까지는 부여계통의 해씨로 해석하는 견해라든가, 제8대 고이왕과 그의 자손인 제9대 책계왕(責稽王), 제10대 분서왕(汾西王), 제12대 계왕(契王) 등을 우씨(優氏)로 해석한 다음 일정기간만 부여씨 대신 우씨가 왕실을 차지하였다고 보는 견해 등 다양한 시각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여하튼, 삼국사기 등의 각종 기록을 참조하여 백제의 왕위계승도와 재위기간 등을 작성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왕위계승도

왕위계승도

재위기간

순번 왕명 재위연대 이름 [諱] 전 왕과의 관계 비고
1 온조왕 B.C.18 ~ A.D.28 온조(溫祚), 은조(殷祚) 건국자  
2 다루왕 A.D.28 ~ A.D.77 다루(多婁) 맏아들  
3 기루왕 A.D.77 ~ A.D.128 기루(己婁) 맏아들  
4 개루왕 A.D.128 ~ A.D.166 개루(蓋婁) 아들  
5 초고왕 A.D.166 ~ A.D.214 초고(肖古), 소고(素古) 아들 소고왕(素古王)
6 구수왕 A.D.214 ~ A.D.234 구수(仇首), 귀수(貴須) 맏아들 귀수왕(貴須王)
7 사반왕 A.D.234 사반(沙伴), 사비(沙沸) 맏아들 사이왕(沙伊王)
8 고이왕 A.D.234 ~ A.D.286 고이(古爾), 구이(久爾) 개루왕의 둘째아들 구이군(久爾君)
9 책계왕 A.D.286 ~ A.D.298 책계(責稽), 청계(靑稽) 아들 청계왕(靑稽王)
10 분서왕 A.D.298 ~ A.D.304 분서(汾西) 맏아들  
11 비류왕 A.D.304 ~ A.D.344 비류(比流) 구수왕의 둘째아들, 사반의 아우  
12 계왕 A.D.344 ~ A.D.346 계(契) 분서왕의 맏아들  
13 근초고왕 A.D.346 ~ A.D.375 근초고(近肖古), 초고(肖古), 속고(速古), 조고(照古), 구(句) 비류왕의 둘째아들 일본측 사료에는 초고왕, 속고왕, 조고왕으로 전함
14 근구수왕 A.D.375 ~ A.D.384 근구수(近仇首), 구수(仇首), 귀수(貴須), 수(須) 아들, 태자 귀수왕(貴首王)
15 침류왕 A.D.384 ~ A.D.385 침류(枕流) 맏아들  
16 진사왕 A.D.385 ~ A.D.392 진사(辰斯) 아우 부여휘(扶餘暉)
17 아신왕 A.D.392 ~ A.D.405 아신(阿莘), 아화(阿華), 아방(阿芳), 아화(阿花) 조카, 침류왕의 맏아들 아화왕(阿華王)
18 전지왕 A.D.405 ~ A.D.420 전지(전支), 직지(直支), 영(映), 전(전) 맏아들 직지왕(直支王), 진지왕(眞支王)
19 구이신왕 A.D.420 ~ A.D.427 구이신(久爾辛) 맏아들  
20 비유왕 A.D.427 ~ A.D.455 비유(毗有), 비(毗) 맏아들, 전지왕의 서자 여비(餘毗)
21 개로왕 A.D.455 ~ A.D.475 경사(慶司), 경(慶) 맏아들 여경(餘慶)
22 문주왕 A.D.475 ~ A.D.477 모도(牟都), 도(都) 아들(삼국사기), 아우(일본서기) 문주(文周·文洲·汶洲)
23 삼근왕 A.D.477 ~ A.D.479 삼근(三斤), 임걸(壬乞), 삼걸(三乞) 맏아들 문근왕(文斤王)
24 동성왕 A.D.479 ~ A.D.501 모대(牟大), 마모(摩牟) 사촌 아우  
25 무령왕 A.D.501 ~ A.D.523 사마(斯麻), 사마(斯摩), 융(隆) 둘째아들(삼국사기), 배다른형(일본서기) 사마왕(斯麻王),도왕(嶋王),호령왕(虎寧王)
26 성왕 A.D.523 ~ A.D.554 명농(明 ), 명(明) 아들 명왕(明王), 성명왕(聖明王)
27 위덕왕 A.D.554 ~ A.D.598 창(昌) 맏아들 창왕(昌王)
28 혜왕 A.D.598 ~ A.D.599 계(季) 아우 헌왕(獻王)
29 법왕 A.D.599 ~ A.D.600 선(宣), 효순(孝順) 맏아들  
30 무왕 A.D.600 ~ A.D.641 장(璋), 서동(薯童) 아들 무강왕(武康王), 무광왕(武廣王)
31 의자왕 A.D.641 ~ A.D.660 의자(義慈) 맏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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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변천THE CHANGES OF BAEKJE

  • 왕위계승
  • 도성/시대구분

백제의 초기 수도가 한강유역에 있었음은 비교적 분명합니다. 그것은 오늘날 서울시 송파구에 남아있는 풍납토성(風納土城)과 몽촌토성(夢村土城), 그리고 석촌동·가락동·방이동에 분포한 고분을 통해 충분히 입증됩니다. 백제가 지금의 천안 직산지역에서 건국하였다는 주장이 있기도 하지만, 설득력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합니다. 교통이 불편하던 고대에 수도는 지위가 높은 사람들의 거주지였습니다. 그렇기에 당시의 수도는 정치의 중심지인 동시에 경제·문화·예술 등 모든 분야의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수도에는 지배층이 생전에 거주했던 도시와 성곽이 있는가 하면, 죽어서 묻힌 호사스런 무덤이 있는게 당연합니다. 그리고 성곽에는 한사람만 살았던 것이 아니므로, 무덤도 무리를 이루는 게 당연합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서울과 공주, 부여지역에서 대규모 성곽과 무덤들이 시대적 연관성을 지니며 공존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하겠습니다.

삼국사기 등의 기록을 참조하면, 백제의 도성으로는 위례성(慰禮城), 한성(漢城), 웅진성(熊津城), 사비성(泗비城) 등의 이름을 찾을 수 있습니다. 즉, 앞에서 이미 간단히 살펴보았듯이 백제는 위례성 혹은 하남위례성에서 건국한 다음, 국력 증강에 따라 그것을 한성으로 확충하였으며, 서기 475년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한성이 함락된 뒤에는 도성을 급히 웅진으로 옮겼고, 서기 538년에는 국가 부흥을 꿈꾸며 수도를 다시 사비로 옮겼는데, 이에 따라 웅진으로 도읍을 옮기기까지를 흔히 한성시대(漢城時代)라 부르고, 그 뒤의 시기는 지명에 따라 각각 웅진시대(熊津時代), 사비시대(泗비時代)라고 부릅니다.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에 따르면, 위례성과 한성은 지금의 서울시 송파구 일대, 웅진성은 충남 공주, 사비성은 충남 부여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백제의 건국설화에 나오는 초기 도성, 곧 하남위례성이 정확히 지금의 어디에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관련 기록의 검토 결과와 현재 남아있는 유적 등을 종합할 때, 서울시 송파구 풍납동의 한강변에 위치한 이른바 풍납토성이 하남위례성의 유지일 개연성이 가장 높은 듯합니다. 풍납토성은 원래 전체 둘레 3.5km의 방형 내지 타원형 평지성으로서, 홍수와 도로·주택 건축공사로 인해 대부분이 파괴되어 지금은 동벽과 북벽의 극히 일부분만 남아있지만, 성벽의 높이는 대체로 10여m를 훨씬 넘으며, 성벽 가장 아랫부분의 현재 폭은 30∼40m에 달할 정도여서 백제 최대급의 토성이라고 할 만 합니다. 성의 내부에서는 과거 일제시기에 청동제 초두와 금반지, 유리구슬 등이 우연히 발견되기도 하였습니다.

백제가 하남위례성에서 건국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부터 백제의 도성으로서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 자주 나타나는 이름은 한성(漢城)입니다. 백제가 도읍을 옮긴 것인지, 아니면 도성의 이름만 중국식으로 바꾼 것인지는 관련 기록이 매우 부족하므로 분명하게 가릴 수 없지만, 풍납토성과 무관한 곳이었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듯합니다. 그런데, 한성은 남성(南城)과 북성(北城)을 합친 이름이었다는 것이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설명입니다. 또한, 적어도 5세기 후반의 개로왕 때, 왕이 거주하던 성은 남성이었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견해를 달리 하는 연구자가 없지는 않지만, 한성의 일부였던 북성을 지금의 풍납토성, 그리고 남성을 지금의 몽촌토성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근래 학계의 많은 지지를 얻고 있는 듯합니다.

지금의 올림픽공원 내에 있는 몽촌토성은 원래 남한산(南漢山)과 연결된 저산성 구릉을 이용한, 산성에 가까운 토성입니다. 자연구릉의 능선을 이용하여 쌓은 성벽의 길이는 2,285m이며, 내부의 면적은 67,000평이라고 합니다. 몇 차례의 발굴을 통해 성 안에서 건물지 등이 확인되었으나, 아직 그 성격이 명확하게 밝혀졌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만약 백제의 한성이 지금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합한 것임에 틀림없다면, 그곳 일대의 지형 조건을 감안할 때, 중심 시가지는 풍납토성의 내부 또는 그 동쪽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조건 하에서는, 백제의 수도 한성이 도시계획에 따라 정연하게 구획된 도성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한편, 개로왕 21년, 곧 서기 475년에 백제는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수도 한성이 함락되고 왕이 고구려군에게 잡혀 죽는 큰 일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단행한 것이 웅진(熊津)으로의 천도였습니다. 졸지에 옮기게 된 수도였으나, 선택의 기준이 전혀 달랐던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우선, 비록 지형상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는 해도, 굽이쳐 돌아가는 큰 강의 남쪽 한 곳에 터를 잡았다는 점에서, 한성과 웅진 사이의 공통 분모를 인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도로서의 웅진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아직 분명하게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공산성(公山城)에 대한 수 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우리는 공산성이 웅진시대 도성의 매우 중요한 일부였음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선, 공산성 안에서 확인된 백제 때의 유구는 왕이 항상 이곳에 거주하였는지와는 관계없이 공산성이 당시의 왕성(王城)이었을 개연성을 높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입지조건과 명칭에서 보듯이 공산성이 산성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음에 주목하면, 웅진으로 천도하던 무렵의 백제가 지향하였던 도성의 한가지 형태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도 있겠습니다.

공주지역에 도시를 감싼 나성(羅城)이 건설되었다는 견해도 제기되었지만, 그 분명한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윤곽이 분명하지 않은 만큼, 웅진시대의 도시가 어떤 형태였는지를 밝히는 작업은 여전히 추정의 수준을 크게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공산성의 바깥쪽 기슭, 특히 진남루(鎭南樓)의 인근지역과 그 남쪽으로 펼쳐진 평지를 대상으로 하여 당시의 도시를 상상해보는 것도 그리 무의미하지는 않을 듯합니다. 그리고 상상의 결과 중 하나로서, 일단 당시의 웅진 도성이 치밀한 사전 설계에 따라 이루어진 바둑판 형태의 정연한 도시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을 것임을 인정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위와 같은 내용은 백제의 웅진 천도가 졸지에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이미 충분히 예견된 것이었습니다. 전시체제 하에서 새로이 선택한 수도였던 만큼, 일반적 형태의 왕도와는 그 조건이 같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정치·경제·사회가 빠르게 안정됨에 따라, 백제는 협소한 공주지역의 한계를 절감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보다 짜임새 있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싶어졌을 것입니다.

서기 538년에 이루어진 사비(泗비)지역으로의 천도는 백제가 이미 예전의 자신감을 되찾았음을 나타내는 뚜렷한 징표라고 하겠습니다. 성왕(聖王) 16년, 곧 서기 538년에 백제의 새로운 수도가 된 사비는 지금의 충남 부여(扶餘)입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이곳에는 전체 길이 8km로서 도시 전체를 둘러싼 성곽, 곧 나성(羅城)이 축조되었는데, 이처럼 거대한 도시성곽을 건설한 것은 백제 역사상 초유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고대 도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직선 형태의 성곽과는 많이 달라서, 지형을 따라 이리 저리 굴곡이 있을 뿐 아니라 남쪽의 백마강(白馬江)과 접한 저습지대에서는 아예 성벽을 전혀 쌓지 않는 등, 그다지 정연하다고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지금까지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당시의 왕궁은 산성이 축조되어 있는 부소산(扶蘇山)의 남쪽 기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그 남쪽으로는 각종 도로와 건물들이 배치되었을 터인데, 중국측 역사서에 전하는 각종 기록과 근래 발견된 목간(木簡) 등의 자료를 참고하면, 부(部)와 항(巷)으로 불리어진 행정구역을 상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성의 내부 한가운데에 금성산(錦城山)처럼 산성을 쌓은 산이 위치한 점이라든지 대규모의 나성에서 성문은 동쪽과 서쪽에서만 각각 1개소씩 확인된 점 등을 감안하면, 중국과 일본에서 보듯이 방사선 형태의 정연하게 짜여진 도시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듯합니다. 한편, 한성·웅진·사비 이외에 백제의 도성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도시로서는 금마(金馬), 곧 지금의 익산(益山)을 들 수 있습니다. 백제 최대의 사찰인 미륵사(彌勒寺)가 있는 이곳에는 왕궁리(王宮里) 등의 전혀 평범하지 않은 지명도 아직 남아 전하는데, 이에 대해 백제의 무왕(武王) 때에 이곳 익산지역을 별도(別都), 곧 또 하나의 도성으로서 경영하였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제출되어 많은 연구자들의 지지를 얻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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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ekje history

 

인구/계급/경제POPULATION & ESTATE & ECONOMY

3세기 전반기의 한반도 정세를 전하는 삼국지 동이전에 의하면, 마한의 세력 가운데 큰 나라는 1만여 가(家), 작은 나라는 수천 가(家)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시의 백제는 대체로 큰 나라에 속하였을 것이므로, 1호(戶)당 5명 안팎으로 보는 계산법에 따라 당시의 백제 인구를 추산하여 보면, 대략 5∼6만명 정도가 됩니다.

한편, 백제 멸망시의 인구는 자료에 따라 달리 기재되어 다소 혼란스러운 편인데, 그중 비교적 주목되는 자료로서는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을 들 수 있습니다. 이 비명(碑銘)에는 당나라가 백제 땅에 5개의 도독부를 설치할 당시 37주(州), 250현(縣)에 모두 24만호(戶), 620만명이 살았다고 적혀 있는 것입니다. 다만, 당시의 사실을 적은 금석문(金石文)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이 비명에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어서, 약간의 수정은 불가피한 듯합니다. 즉, 앞서 사용한 계산법에 따르면, 24만호는 120만명에 해당하는 수치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5배가 넘는 620만명으로 기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침 육(六)자와 일(一)자는 글자 모양도 유사하기에 620만명은 120만명의 잘못일 개연성이 높은 듯합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백제의 전성기에 인구가 152,300호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예의 전성기가 과연 언제를 지칭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기에 위의 자료를 이용하는 데에는 어려운 점이 적지 않습니다만, 4세기 중·후반의 근초고왕대에 인구가 70∼80만명에 달하였을 것이라는 연구 결과를 참고하면, 영역 확장에 매진하였던 4∼5세기의 인구로 이해하여도 큰 문제는 없을 듯합니다. 4∼5세기에 70∼80만명, 7세기에 약 120만명에 달하였을 백제의 주민은 모두 당시의 신분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을 왕과 왕족, 귀족과 관료, 그리고 일반민과 노예 등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도 있는데, 관련된 문헌 자료가 많지 않아 자세히 살피기는 어렵습니다.

먼저, 왕과 왕족에 대해서는, 그들이 부여·고구려 방면으로부터 남하하여 온 사람들일 것이라고, 앞에서 이미 추정한 바 있습니다. 만약 중국측 역사서인 주서(周書) 백제전의 "왕을 어라하(於羅瑕)라고 부르는데, 백성들은 건길지(건吉支)라고 부른다"고 한 대목이 상류층과 하류층 사이의 언어 차이를 반영한 것이라면, 우리는 다시 한번 앞서의 추정이 옳았음을 확인하게 되는 셈입니다. 백제 초기부터 큰 세력을 형성한 대표적 귀족으로는 여러 대에 걸쳐 왕비를 배출하며 서로 경쟁하였던 해씨(解氏)와 진씨(眞氏)를 들 수 있습니다. 특히 해씨는 부여씨(扶餘氏)가 왕실을 차지하기 전의 옛 왕족이었을 것으로 짐작되기도 하는데, 이들 역시 부여·고구려계통이었던 듯합니다. 사비시대의 귀족세력으로는 사(沙)·연(燕)·협(협)·해(解)·진(眞)·국(國)·목(木)·백(백)씨 등 8개의 성씨가 통전(通典)을 비롯한 중국측 기록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백제에서 16개의 관등(官等)으로 관리를 서열화하였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제1위 좌평(佐平)부터 제6위 내솔(柰率)까지의 이른바 솔(率)계통 관료들은 정치·행정·군사분야의 지휘관으로 생각되며, 제7위 장덕(將德)부터 제11위 대덕(對德)까지의 덕(德)계통 관료들은 각 분야의 실무진이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또, 제12위부터 제16위까지의 문독(文督)·무독(武督)·좌군(左軍)·진무(振武)·극우(克虞) 등은 대부분 군사 행정과 관련된 하위 관리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들 각 계층의 사이에는 구분이 명확하여, 솔계통 관료들은 자주색 옷을 입었으며, 덕계통 관료들은 붉은색 옷을 입었고, 문독 이하의 관리는 파란색 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구당서(舊唐書) 등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일반 백성은 붉은색이나 자주색 계통의 옷을 입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앞서 소개한 솔·덕계통 관료들과 엄격히 구분하기 위해서인 듯한데, 파란색만 제외한 것을 보면 문독 이하의 하위관리는 일반 백성과 신분적으로 큰 차이가 있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일반 백성의 15세 이상은 성인으로 분류되어 매년 각종 세금을 내어야 했으며, 또한 병역과 부역에도 종사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세금은 그 집의 생활 정도에 따라 차등을 두었던 듯하며, 남자와 여자 사이에도 역시 내용상의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특히, 남자들의 경우에는 시대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체로 5∼6가구당 1명 정도가 군대에 징발되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물론 당시의 백성들에게는 대단한 부담이 되었을 터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전쟁 등에서의 공훈을 통해 사회·경제적 지위가 상승하는 발판이 되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삼국사기 [열전(列傳)]에 소개된 도미(都彌)전설에서 보듯이, 평범한 백성인 도미의 가정이 노비까지 둘 수 있었던 데에는 이같은 사정이 작용하였는지도 모릅니다.

백제는 기본적으로 삼국시대의 한 축을 형성하였던 국가이기에 한시도 전쟁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많은 백성을 전쟁터에서 잃기도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승리한 전쟁을 통해 적지 않은 수의 포로를 얻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 포로를 노예로 이용하였을 것입니다. 삼국사기에는 백제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뒤 포로를 장병들에게 나누어주었다는 기사가 몇 차례에 걸쳐 실려 있습니다. 또, 북사(北史)·구당서 등의 중국측 기록에 따르면

 

 

 

 

영역/전쟁TERRITORY &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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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백제는 온조왕 13년(B.C.6)에 영역을 확정하였는데, 북쪽으로는 패하(浿河), 남쪽으로는 웅천(熊川), 서쪽으로는 바다,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는 범위였다고 합니다. 이때의 패하를 지금의 예성강 또는 대동강에 비정하는 견해가 많으며, 웅천은 금강 또는 안성천, 주양은 지금의 춘천지방에 비정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백제가 기원 전후한 무렵에 이처럼 넓은 영토를 보유하였으리라고 믿는 연구자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백제에 대한 중국측의 기록과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연구 결과를 감안할 때, 위와 같은 범위의 영역은 아마도 4세기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가능하였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백제가 위와 같은 규모로 성장하기까지는 주변 세력과의 끊임없는 전쟁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우선, 백제가 마한지역에서 성장하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삼국지 한전(韓傳)에 기재된 마한의 50여개 소국 중 인접한 국가들과의 경쟁, 곧 통합전쟁을 상정할 수 있겠는데 앞에서 소개한 비류설화도 그러한 과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인 듯 합니다. 세력을 넓혀가던 백제는 필연적으로 낙랑·대방군 세력과 충돌하게 됩니다. 물론 처음에는 낙랑·대방군을 배후에서 조정하는 중국의 거대한 힘과 문화에 눌려 여러모로 열세를 면치 못하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한군현(漢郡縣)에 대한 백제의 도전은 거세졌습니다. 그러나 3세기경의 백제에게는 한군현이 아직도 상대하기 벅찼던 모양입니다. 경쟁 과정에서 백제의 책계왕(責稽王)과 분서왕(汾西王)이 차례로 목숨을 잃은 것은 그 증거라 하겠습니다.

4세기에 들어선지 얼마 안되어 백제는 한군현을 멸망시킨 고구려와 경계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서로 영역 팽창을 추진하던 중 만난 것인 만큼 군사적 긴장관계는 당연한 결과인지 모릅니다. 지금의 황해도지역을 가운데 두고 벌어진 백제와 고구려 사이의 전쟁은 일진일퇴의 호각세였지만, 근초고왕(近肖古王)·근구수왕(近仇首王)의 재위 무렵 곧 4세기 중·후반에는, 고구려 고국원왕(故國原王)의 전사 사실이 상징하듯, 백제쪽이 조금 우세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에 대한 백제쪽의 우세는 아주 짧은 기간에 불과하였습니다. 4세기 말엽에 이르자, 백제는 광개토왕(廣開土王)이 이끄는 고구려의 군대에 대패를 거듭하며 북방의 상당부분을 잃었을 뿐 아니라 도성의 함락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인질과 각종 재물을 고구려에 보내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5세기 후반의 475년에는 마침내 고구려의 장수왕(長壽王)이 이끄는 3만명의 군대에게 왕성을 함락당하고 개로왕(蓋鹵王)이 잡혀죽는 수모를 당하게 됩니다. 이로써 백제가 한성을 포기하고 웅진으로 천도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백제 역사상 개로왕대는 가장 주목할만한 시대 가운데 하나입니다. 비록 고구려군에게 도성까지 함락당하는 비운을 겪기도 하였으나, 그렇다고 그가 재위하던 무렵의 백제가 무기력했던 것은 아닙니다. 관련 기록을 해석하는 방법에 따라 학자들 사이의 세부 의견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개로왕의 재위 무렵에 백제의 영역이 확대되고 지방제도가 진전되었으며 왕권을 크게 신장하였다는 데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습니다. 특히, 영역 및 행정권의 확대와 관련하여서는 남방 개척이 두드러졌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고구려에게 한강유역을 빼앗긴 이후, 백제는 한동안 왕권 안정과 남방 경영에 전력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이 6세기말과 7세기초 곧 동성왕(東城王)과 무령왕(武寧王)의 재위 무렵에 어느 정도 효과를 얻자, 한강유역 탈환을 위해 고구려와의 전쟁을 적극적으로 재개하였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신라와의 관계 개선이라는 전제가 필요하였습니다.

백제의 한강유역 탈환 노력이 뚜렷한 결실을 거둔 것은 성왕(聖王)의 재위 기간이었습니다. 성왕 29년 곧 서기 551년에 백제는 신라와 동맹하여 때마침 내분에 휩싸인 고구려를 공격하였고, 드디어 한강 하류지역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불과 2년 뒤인 서기 553년에는 태도를 바꾼 신라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그 땅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로써 백제의 주된 전쟁 대상이 신라로 바뀌었음은 물론입니다. 격분한 성왕이 자기 나라의 군사는 물론 당시 백제의 영향권 아래 있었던 가야(加耶)의 군사까지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한 것은 서기 554년의 일입니다. 그러나 설욕을 다짐하고 벌인 관산성(管山城)전투에서 성왕은 도리어 자신의 목숨과 3만명에 가까운 장병만 잃었으니, 당시 백제가 받은 충격은 대단하였을 것입니다. 이후 백제가 예전의 국력을 회복하기까지는 수십년이 걸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백제는 국력을 어느 정도 회복하자 신라를 공격하는 일에 열중하였습니다. 그러나 동양 최대의 사찰 미륵사(彌勒寺)를 창건한 무왕(武王)대의 잦은 신라 공격, 그리고 즉위한 후 끊임없이 신라를 향해 군사를 움직인 의자왕(義慈王)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제관계를 적절히 이용하며 예봉을 피하는 신라를 압도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서기 660년 백제는 당(唐)나라를 끌어들인 신라의 공격을 받고 힘없이 무너졌으며, 2년여에 걸친 재건 노력도 끝내 허사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근초고왕과 한성시대King Geunchogo & Hanseong age

百濟를 만든 자, 근초고왕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온조에 의해 건국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머릿속에 ‘백제’라는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는 나라, 즉 한반도의 서남부를 주 영역으로 하는 고대국가가 완성된 것은 서기 4세기, 13대 근초고왕 때의 일이다.
만주 지역에서 남하해 온 유이민들에 의해 세워진 백제는, 오랜 옛날부터 한반도 남부에 존재해 왔던 연맹왕국 마한의 한 소국으로 출발하였다. 우리의 역사서 『삼국사기』에는 유이민인 초기 백제가 기존의 토착민인 마한에 복속하였던 모습이 보이고, 중국 측 역사서인 『삼국지』에는 마한을 이루는 50여 개 소국 중 하나로 ‘백제국(伯濟國)’이 등장한다. 마한의 소국 중 하나에 불과했던 백제국이 마한을 정복한 시기와 방법, 과정을 명확하고 자세하게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백제에 의한 마한 통합이 대체로 완료된 것은 근초고왕 때로 볼 수 있다.
‘백제(百濟)’라는 국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그 중 하나로 ‘백가(百家)가 바다를 경영(濟海)하다’라는 말이 줄어서 된 것이라는 설이 있다. 또 한자어 ‘百濟’를 뜻 그대로 풀면 ‘많은 나루터’가 된다. 이것은 백제라는 나라가 ‘백(百)’으로 일컬어질 만큼 많은 집단들의 집합체로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볼 때, 근초고왕 때에 이르러 ‘伯濟國’이 비로소 ‘百濟’가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세습 왕권을 확립하다

백제의 왕위계승은 얼핏 시조인 온조왕 이래 멸망에 이르기까지 한 가문에서 세습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초기에는 몇 차례의 왕실 교체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 건국설화의 두 시조가 각기 왕권을 가졌을 것으로 보아 ‘온조계’와 ‘비류계’가 있었을 것으로 이해되기도 하고, 왕위계승의 구조상으로 볼 때 각각 5대 초고왕과 8대 고이왕을 시조로 하는 ‘초고계’와 ‘고이계’가 있었다고도 이야기된다.
그렇게 다원화되어 있던 백제의 왕위계승은 근초고왕 이후 일원적인 세습제로 확립된다. ‘근(近)초고왕’이라는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초고계’의 계승자인 그는 ‘계왕(契王)’이라는 의미심장한 시호를 받은 12대 왕에 이어 즉위한 후, 독점적인 세습체제를 확보함으로써 전제왕권을 기반으로 하는 고대국가의 틀을 완성한 것이다.

한반도 남부를 평정하다

일본의 역사서 『일본서기』에는 『삼국사기』나 중국측 역사서에는 나와 있지 않은, 고대 한반도의 역사상에 관한 이야기들이 있다. 근초고왕이 한반도 남부를 복속시키는 내용도 그 중 하나다.
백제는 근초고왕 이전에 이미 마한의 상당 부분을 점유하였으나, 여전히 지금의 전라도 지역에는 백제에 복속되지 않은 옛 마한의 소국들이 있었다. 또한 옛 변한과 진한 지역에서는 가야 여러 나라들과 신라가 발전하고 있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근초고왕은 이들을 지배하에 두기 위해 전격적인 남정(南征)을 감행했다. 먼저 ‘탁순국’이라는 곳에 이르러 신라를 굴복시키고 이어서 ‘가라 7국’을 복속시켰다. 그리고 옛 마한 지역으로 생각되는 여러 나라들과 ‘남만(南蠻) 침미다례’ 등을 정복함으로써 한반도 남부를 완전히 평정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 때 복속된 나라들에 대한 지배는 공납을 통한 간접지배 방식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신라의 경우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 시기에 백제와 화친을 맺은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르더라도 당시의 국력 상황을 비교해 볼 때 백제 신라간의 ‘화친’이 일반적인 대등한 의미에서의 평화조약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아마도 신라가 백제의 우위를 인정하는 한에서의 모종의 관계가 맺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근초고왕 대에 이르러 신라, 가야와 마한의 잔여세력 등 한반도 남부가 모두 백제의 영향권 하에 들게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고구려와의 대결에서 승리하다

근초고왕이 한반도 남부를 제패하던 시기 북방의 고구려는 당시 한창 강성하여 위세를 떨치던 선비족과의 대결에서 패배한 뒤 남쪽으로 눈을 돌리고 있었다.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백제가 계속 세력을 확장하여 새로운 위협 세력으로 등장하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마침내 고구려 고국원왕은 2만의 병력으로 백제를 공격해왔다.
이에 근초고왕은 태자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가서 막게 하였고, 태자가 이끄는 백제군은 치양(雉壤)이라는 곳에서 고구려군과 싸워 이기고,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수곡성(지금의 황해도 신계)서북에까지 이르렀다. 고구려는 패배에 굴하지 않고 2년 후 다시 공격해 왔다. 이에 근초고왕은 패하(浿河) 강변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공격하여 고구려군을 격파하였다. 근초고왕은 적을 막아낸 것으로만 만족하지 않았다. 마침내 3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공격, 평양성 전투에서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승리를 거두었다.
낙랑군과 대방군이 소멸되면서 고구려와 백제는 국경을 맞대게 되었고, 특히 경제적 · 문화적으로 가치가 높은 옛 대방 지역을 놓고 양국간의 세력 대결이 벌어졌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승리는 근초고왕의 백제에게 돌아갔다.

해상왕국을 건설하다

한반도 남부의 여러 나라들을 평정하고, 고구려와의 대결에서 승리하여 옛 대방 지역을 장악함으로써 백제는 서해와 남해의 항로를 모두 장악하게 되었다. 근초고왕은 이를 바탕으로 서로는 중국 강남의 동진(東晋)과, 남으로는 왜국과 통교하였다. 특히 왜국과의 관계는 단순한 통교 이상의 것이었다. 유명한 칠지도에 얽힌 이야기나, 백제가 왜국에 아직기와 왕인 등을 보내 문화를 전파하였다는 이야기는 이러한 시대상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이로부터 백제는 중국대륙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열도에 이르는 동아시아 해운의 주역으로 등장하였다.
또한 백제는 이러한 제해권의 장악을 바탕으로, 당시 요동 지방을 장악한 고구려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의 요서 지방을 경략하여 한때 2군(郡)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4세기 후반에 이르러 근초고왕의 업적에 힘입은 백제는 서해와 남해를 내해(內海)로 삼은 일대 해상왕국을 건설하였던 것이다.

 

 

 

무령왕과 웅진시대King Muryeong & Ungjin age

"다시 강국이 되었다"

근초고왕 대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던 백제는, 5세기로 접어들면서 고구려의 뛰어난 정복군주 광개토왕의 공격에 연전연패하면서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서해의 요충지 관미성을 고구려에 빼앗겼고, 고구려군이 수로를 통해 도성으로 공격해 오는 등 서해의 제해권을 상실해 갔다. 또 수 차례 벌어진 싸움에서 북방의 큰 영토를 고구려에 빼앗겼으며, 광개토왕의 남정으로 인해 신라와 가야 등에 대한 영향력이 붕괴되면서 국세가 크게 위축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서기 475년에 이르러, 광개토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의 대대적인 침략에 도읍인 위례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붙잡혀 죽음을 당하는 참패를 당하고 만다. 이는 백제의 멸망이나 다름없는 사태였다.
그러나 백제는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딛고 일어나 불과 수십 년 만에 세력을 회복하고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선언할 수 있었다. 백제의 중흥, 그 주역은 바로 그 무덤으로 잘 알려져 있는 25대 무령왕이다.

섬에서 태어난 아이, 패망의 아픔 속에 자라다

백제 21대 개로왕은 고구려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고심하였다. 그래서 왜국을 우군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아우이자 실력자이기도 한 '좌현왕(左賢王)' 곤지(昆支)를 왜국에 파견한다. 그리하여 곤지는 권속들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왜국으로 향하였는데, 이 때 곤지의 부인은 태기가 있었다. 그런데 부인은 그만 왜국 땅에 닿기도 전에 진통을 하여, 별 수 없이 어느 무인도에 배를 대고 출산을 하였다. 태어난 아이는 섬에서 태어났다 하여 이름을 섬 즉 '사마(斯摩)'라 하였다고 한다.
사마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아버지와 떨어져 백제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사마가 14세가 되던 해, 고구려 장수왕이 이끄는 3만의 군대가 백제로 쳐들어왔고, 고구려군의 맹렬한 공격에 백제의 도성은 함락되고 개로왕은 배신자들에 의해 붙잡혀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고구려군은 물러갔지만, 도성에 남은 것은 폐허뿐이었고 고구려군은 언제 또 쳐들어올지 몰랐다. 백제는 눈물을 머금고 5백년 도읍지 위례성을 버려야 했다. 폐허를 뒤로 하고 남쪽으로 향하는 천도 행렬 속에서, 소년 사마는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때를 기다리며 인망을 쌓다

패사한 개로왕의 뒤를 이어 그 아우 문주가 왕위에 올랐지만, 백제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혼돈의 나락으로 떨어져 갔다. 패전으로 왕실의 권위가 실추되자 권신인 해구(解仇)라는 자가 국정을 오로지하였다. 사마의 아버지 곤지는 패전의 비보를 듣고 급히 귀국하였지만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고, 이어서 문주왕도 해구에게 시해되고 말았다. 아들인 삼근왕이 뒤를 이었지만 그는 겨우 13세의 소년에 불과했다. 해씨와 진씨 등 귀족 가문들이 권력을 놓고 다투는 혼미한 정국 속에서 이 불운한 소년왕도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어느덧 18세의 청년이 된 사마는 이런 모습들을 지켜봐야만 했다.
이러한 때에, 왜국으로부터 누군가가 병력을 이끌고 백제로 들어왔다. 그는 죽은 곤지의 아들, 사마의 동생인 모대(牟大)였다. 그는 사마보다도 한두 살 아래인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담력과 과단성이 뛰어났다. 그가 의문사한 삼근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니 이는 24대 동성왕으로, 끝을 알 수 없었던 혼란을 평정하고 위기에 처한 백제를 구한 인물이다.
곤지의 장자로서 삼근왕 사후 제1의 왕위 계승권자라고 할 수 있는 사마의 입장에서는 왕위를 빼앗긴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사마는 서두르거나 무리하지 않았다. 동성왕의 입장에서 사마는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인물이므로, 만약 사마가 잘못 처신했다면 제거되고 말았을 것이다.『삼국사기』는 무령왕에 대해 ‘인자(仁慈), 관후(寬厚)하여 민심이 순종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이는 그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조용히 때를 기다리며 신중히 처신하면서 서서히 지지 기반을 넓혀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라의 내실을 다지다

동성왕은 남부의 마한 잔여세력과 탐라국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고, 신라와 혼인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침략을 잘 막아내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탄현에 책을 설치하는 등 과거부터 야금야금 백제의 동부지역를 잠식해 왔던 신라에 대비하기도 하였는데 그의 왕호가 '동성(東城)'인 이유가 동쪽 즉 신라와의 국경에 성을 많이 쌓았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또한 북중국의 북위(北魏)의 침략을 격퇴하기도 하는 등 군사·외교 방면의 뛰어난 능력으로 백제의 위기를 타개해 나갔다. 그러나 동성왕은 말년에 이르러 독단을 일삼는 전제군주가 되어 갔고, 사람들은 독재자로부터 등을 돌렸다. 결국 동성왕은 심복이었던 위사좌평(衛士佐平) 백가(白加)에 의해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사마는 마침내 오랜 기다림 끝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의 나이 40세. 백제 중흥의 영주 무령왕의 탄생이었다.
무령왕은 먼저 나라의 내실을 튼튼하게 다졌다.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자 나라의 창고를 열어 구제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앞서 동성왕이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제하자는 신하들의 요구를 거절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또 제방을 수리하고 유랑민을 정착시키는 등 농업의 진흥에 힘썼다.

남쪽 바다를 경영하다

근초고왕 이후로 백제는 서해와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했었지만, 광개토왕 이후 고구려의 남하로 인해 서해의 제해권을 빼앗겼으며, 이로 인해 중국의 남조로 가는 사신의 항로가 고구려 수군에 의해 차단당하기까지 하였다. 당시 한반도에서 중국대륙으로 가는 항로는 주로 요동반도를 거쳐 산동반도의 등주로 향하는 연안항로였는데, 고구려와의 세력다툼에서 밀리면서 고구려의 연안을 지나야 하는 항로를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아마도 백제는 이 시기를 전후하여 서해를 횡단하는 항로를 사용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경기만으로부터 산동반도로 직항하는 항로를 이용하였으며, 혹은 이마저도 고구려의 방해를 받게 되자 오늘날의 전라남도 지역인 서남해안으로부터 남서쪽으로 나아가 강회(江淮)지역에 다다르는 항로까지 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중국 남조 정권과의 부단하고 활발한 교섭 사실은 이를 증명하고 있다.
한편 왜국과의 교섭은 더욱 긴밀해졌고, 나아가 동남아시아 지역과 교류한 흔적도 남아 있다. 무령왕의 시대 백제는 고구려에 빼앗긴 북쪽 바다를 대신해 남쪽 바다를 경영하며 중흥의 시대를 열어갔다. 서해 제해권의 상실이라는 위기를 오히려 더욱 넓은 세상에서 호흡하는 계기로 바꾼, 백제인의 진취성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빼앗긴 땅을 되찾다

탄탄하게 다져진 국력을 바탕으로 무령왕은 고구려에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한 전쟁을 수행하였다. 광개토왕 이래로 고구려와 백제의 다툼은 고구려의 일방적인 공세로 일관하였지만, 무령왕이 즉위한 이후로는 점차 백제의 공세가 두드러진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무령왕 대 백제와 고구려는 한성, 수곡성, 고목성, 마수책, 위천 등지에서 수차례 공방전을 벌였다. 이들 지역은 대략 그 위치가 지금의 경기도에서 황해도에 이르는 지역이다. 특히 한성은 다름아닌 백제의 첫 수도 위례성 일원으로 여겨지며, 수곡성은 과거 근초고왕 대에 태자가 이끄는 백제군이 패주하는 고구려군을 추격해갔던 곳이다.
마침내 무령왕은 그 재위 말년에 이르러, 옛 수도가 있던 한성에 가서 머물며 한수 이북의 장정들을 징발하여 쌍현성을 쌓기에 이른다. 백제의 패망을 목도하며 남쪽으로 쫓겨갔던 14세의 소년이 62세의 노인이 되어 돌아와 백제의 중흥을 선포하였던 것이다. 무령왕은 중국 남조의 양나라에 보낸 국서에서도 "백제가 여러 해 동안 쇠약해 있었는데, 이제 고구려를 여러 번 격파하고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선언하였다.

그가 잠든 곳

백제의 중흥을 이룩한 무령왕은 옛 수도 한성에 다녀온 뒤, 마치 "다 이루었다"는 듯이 표연히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가 묻힌 무덤은 1500년의 세월을 건너 도굴되지 않은 채로 발견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잊혀진 나라 백제를 다시 떠올리게 하는 하나의 계기를 만들었다. 중국 남조 양식의 전축분 안에, 중국 일본 심지어 동남아시아 등 "물 건너온" 진귀한 보물들로 채워진 그의 무덤은, 백제적 전통에서 벗어난 하나의 예외이지만 오히려 그야말로 가장 백제적이라 할 만하다. 그는 살아서는 쇠약해졌던 백제를 중흥케 하였고, 죽은 후에도 시공을 초월하여 백제의 넋을 되살리고 있는 셈이다.

 

 

 

 

성왕과 사비시대King Seong & Sabi age

새나라 남부여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의 성왕은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로 옮기면서, 국호를 ‘남부여’로 하였다고 한다. 이는 백제의 기원이 부여로부터 왔음을 재차 강조하며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자 하는 의도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그 시점이 유명무실하게나마 명맥을 유지해오던 만주의 부여 왕국이 완전히 고구려에 병합된 뒤라는 점에서 성왕은 백제가 부여의 정통 계승자임을 표방한 셈이다. 다만 이후에도 다른 나라에서는 여전히 백제라는 국명으로 지칭하고 있기 때문에 ‘남부여’의 국호는 일종의 선언일 뿐으로 실질적인 국호 변경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고 볼 수도 있다.
백제의 사비성이 있었던 곳은 현재도 지명이 ‘부여’다. 그리고 성왕의 ‘남부여’선언은 단지 말로만 그친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백제를 새로운 나라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었다.

수도를 옮기다

백제가 5백년 도읍지 위례성을 버리고 웅진으로 천도한 것은 강성한 고구려의 세력에 밀려 부득이하고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웅진에서 사비로의 천도는 성격이 그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웅진은 애초부터 한 나라의 도읍으로는 비좁았다. 단지 지형이 험준하여 적을 막기에 좋고 기타 여러 가지 여건상 위례성 함락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선택되었던 일종의 임시수도였다. 실제로 일찍이 동성왕은 사비 지역에 자주 사냥을 나가며 사비 근방의 요지에 가림성을 축조하는 등 이미 사비로 천도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동성왕이 암살되면서 수포로 돌아갔던 천도 계획은 성왕 대에 이르러 다시 구체적으로 추진되었던 것이다.
사비성은 예정 하에 건설된 도읍이었던 만큼 바둑판처럼 잘 구획된 계획도시였다고 한다. 현재 부여군 읍내의 도로 구조는 조사 결과 백제 사비성 당시의 것과 거의 일치한다고 하니 사비성의 모습을 그려보는 데 참고가 될 만하다.

나라의 체제가 완성되다

성왕은 천도와 함께 나라의 체제를 일신하였다. 5방(方) 37군(郡) 200성(城)으로 표현되는 백제의 지방행정구역은 바로 성왕 시기에 이르러 사비 천도와 함께 정비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그 이전까지 행해졌던, ‘담로’라는 일종의 봉건적 지배구조로부터 벗어나, 정연한 행정질서에 의해 다스려지는 중앙집권국가로 탈바꿈하는 일대 혁신이었다. 백제의 관료제 구조로 이야기되는 16관등과 22부사 또한 이 시기에 이르러 완성되었을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보통이다.
성왕대의 백제 주변 정세는 심상치 않게 전개되고 있었다. 고구려는 여전히 강성하였으며, 특히 안장왕이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공격해오기도 했다. 이 싸움에서 백제는 패배하였고 아마도 많은 영토를 잃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작은 나라로만 여겼던 동쪽의 신라도 지증왕, 법흥왕 대를 거치며 날로 강력해지고 있었다. 아마도 성왕은, 날로 치열해지는 삼국 간 항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나라의 힘을 보다 효과적으로 끌어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정비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불법을 구하고 또 전파하다

성왕은 스스로 『비담신율서(毘曇新律書)』라는 경전을 지었다고 전해질 정도로, 불교에 대해서도 비상한 관심과 조예가 있었다. 그는 즉위 4년에 겸익이라는 승려를 인도에 파견하여 ‘율(律)’을 구하였다. 겸익은 인도의 ‘상가야대율사(常加耶大律寺)’에 머무르면서 율을 연구하고 산스크리트어로 적힌 『아담장오부율문(阿曇藏五部律文)』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구법을 위해 불교의 발상지 인도에 간 승려로는 흔히 당의 현장과 신라의 혜초를 떠올리지만, 그보다 200년이나 앞선 때에 이미 백제에는 겸익이 있었던 것이다. 겸익은 아마도 바닷길을 통해 인도로 갔을 것으로 생각되며, 이는 백제인의 뛰어난 항해술과 적극적인 남방항로 개척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일 것이다.
그리고 성왕 즉위 30년, 마침내 백제로부터 왜국으로 불교가 전해졌다. 성왕대의 백제는 바닷길을 통해 인도에서 불법을 구했고 다시 이를 바닷길을 통해 왜국으로 전파하였던 것이다.

하늘이 주신 기회

성왕 즉위 28년, 영원할 것만 같았던 북방의 강자 고구려가 흔들리고 있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이 시기 고구려에서 내란이 일어나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고 한다. 귀족간의 권력다툼이 격화되어 내전으로 비화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고구려의 서북방으로부터는 새롭게 흥기한 유목민족 돌궐이 무서운 기세로 몰려오고 있었다.
고구려가 내우외환으로 정신을 못 차리고 흔들리는 이때야말로 백제에게는 빼앗긴 땅을 되찾고 살해당한 개로왕의 보복을 하며 강국으로 발돋움할 절호의 기회였다. 성왕은 즉시 행동에 들어가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내란으로 흔들린데다 북방으로부터 돌궐족의 침략을 당한 고구려는 이를 제대로 방어할 수 없었고, 제·라 연합군은 파죽지세로 북진하였다. 백제는 한강 하류의 6군을, 신라는 한강 상류와 동해안 지역의 10군을 탈취하였다.
이때 고구려의 위기는 대단히 심각하였던 것 같다. 『일본서기』는 이 때 백제군이 한성을 탈환하고 평양까지 북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평양’은 고구려가 한강 유역에 설치한 ‘남평양’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일찍이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백제가 이때에 고구려의 수도를 점거하였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승리의 기쁨도 잠시......

백제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 하였으나, 워낙 강성한 고구려는 더 이상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는 않았다. 돌궐족의 침략은 고구려의 강력한 요동방어망에서 저지되었다. 그리고 고구려는 급박한 남부전선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신라에 접근하여 일종의 타협을 시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신라가 빼앗은 10군을 신라의 영토로 영구히 인정해 주는 대신, 신라는 고구려와 화친하고 대신 백제를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신라로서는 비록 시기를 잘 타 고구려로부터 많은 땅을 빼앗기는 했지만, 고구려가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을 해 온다면 지켜낼 수 있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었고, 또 이대로 전쟁이 승리로 종결된다 해도 한강 하류와 서해안을 백제가 차지한 상황에서는 신라는 여전히 삼국 중 최약체로 남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철저한 계산에 따라 고구려의 제안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신라는 동맹국이었던 백제를 배신하고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하류 지역을 기습 공격하여 점거하였다. 만약 이때 백제군이 평양 일대까지 진출하고 있었다면, 이는 그야말로 재앙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성왕은 배신을 당하고도 고구려 공격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신라가 백제의 점령지를 빼앗아 간 직후 왕녀를 신라로 시집보낸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를 시간을 벌기 위한 위계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신라를 다시 끌어들이기 위한 고육책으로 봄이 타당할 것 같다. 『삼국유사』에는 이 때에 신라 진흥왕이 고구려에 전했다는 말이 기록되어 있다.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하늘에 달렸으니 하늘이 고구려를 버리지 않는다면 내가 어찌 감히 고구려가 망하기를 바라겠느냐”라고 하였는데, 이는 고구려와 신라의 밀약을 보여주는 내용이며 동시에 당시 고구려가 ‘망할’수도 있는 위기였음을 추측할 수 있게 한다. 성왕으로서는 누대의 원수인 고구려에 복수할 수 있는 두 번 다시 없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의 반응은 냉정하였고, 고구려와 신라가 손잡음으로서 정세는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다. 이제 성왕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천추의 한을 품고 관산성에 지다

성왕은 여·라 연합에 맞서고 신라의 배신을 응징하기 위해 온 나라의 군대를 일으킴은 물론 백제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었던 가야와 왜국으로부터도 군사를 동원하는 등 총력전을 준비하였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이 때 백제의 귀족들 중 일부가 ‘지금 하늘이 우리 편이 아니다’라며 신라 공격에 반대했다고 한다. 성왕은 정치적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전쟁을 강행한 것인데, 이는 국력을 총동원해서라도 이 상황을 정면돌파하지 않으면 백제의 미래가 암담해질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던 것 같다.
마침내 여·라 연합에 맞선 백제의 운명을 건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후 상황을 고려할 때 백제의 전략 목표는 아마도 신라와 연합한 고구려군을 격퇴한 뒤 남한강 유역에서 신라군을 몰아내어 궁극적으로는 한강 유역 전체를 탈환하는 것이었던 듯하다. 태자 부여창이 이끄는 백제군은 먼저 백합야(百合野)라는 곳으로 진군하여 고구려군과 격돌하였다. 부여창의 활약에 힘입어 고구려군을 격퇴하고 회군한 백제군은 남한강 유역에 있는 신라 관산성으로 쳐들어갔다. 초전은 백제의 승리였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신라는 신주(新州) 즉 백제로부터 빼앗은 한강 하류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를 불러들여 총력전으로 맞섰다. 고구려와 연합한 상태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성왕은 태자가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소식에 고무되었는지, 전장에서 고생하는 것에 대해 격려를 해야겠다면서 몸소 관산성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것이 뜻밖의 재앙을 가져오고 말았다. 내부에 배신자가 있었는지, 신라의 첩보망이 우수해서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신라 측에서 성왕의 이동로를 간파하고 대병력을 동원, 매복 공격하여 성왕을 붙잡아 처형해버린 것이다. 성왕의 어이없는 죽음에 지휘관인 태자 부여창이 이성을 상실하였는지, 이는 백제군 전체의 붕괴로 이어지고 말았다. 백제군은 신라군에 포위되어 참패하였고 최고위 지휘관인 좌평 4명을 비롯하여 29600명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당시의 국가 규모에서 이는 나라 전체가 휘청거릴 만한 어마어마한 타격이었다.
국력을 기울인 결전은 결국 참담한 패배로 끝났고, 백제의 운명은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로 접어들고 말았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성왕은 신라군에 붙잡힌 후 죽기 직전에 “나는 매양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참으며 살아왔지만, 구차하게 살기는 싫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성명왕(聖明王)’이라 불린 군주의 이상형 성왕. 그가 일생 동안 치열하게 전개한 백제 중흥의 노력은 그의 마지막 말처럼 처절하고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계백장군과 마지막전투General GyeBaek & Last Combat

천지가 뒤집히는 대 전란의 시대

7세기는 동아시아 전체가 숨가쁜 전란에 휘말렸던 격동의 시대였다. 또한 이른바 동아시아적 질서가 확립되게 된 시기이기도 하며, 또 현대의 동양 삼국 즉 한·중·일의 원형이 만들어진 때라고도 할 수 있다. 민족사적 관점에서는 이른바 ‘중국화’의 길을 걷게 된 시발점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시대에 대해서 우리는 흔히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다분히 축소지향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단어로 기억하고 있다. 그에 따라 삼국 중 최후 승자가 된 신라의 입장에서 역사를 이해하게 되는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귀결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패배자에 불과한데도 하나의 낭만적인 애상으로서 승자에 버금가게 기억되고 있는 이름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단연 대표적인 것이 바로 황산벌의 무인 계백일 것이다.

궁지에 몰린 신라의 선택

관산성전투에서의 패전으로 백제는 크게 위축되었고, 반면 승리한 신라는 비약적으로 성장하였다. 이전까지 양국간 관계에서 백제가 쥐고 있었던 주도권은 여지없이 상실되었고, 오히려 백제는 그 영역이 신라에 의해 포위된 형국이 되어버렸다. 위덕왕 대에 백제는 암담하고 무기력한 상황에 처해 있었던 듯 보인다. 그러나 백제는 무왕 대에 이르러 국력을 회복하였고, 의자왕 대에 이르러서는 백제와 신라간의 힘의 우열은 완전히 재역전되었다.
의자왕은 즉위 직후, 관산성전투 이후 신라가 점거한 가야 지역의 40여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백제와 신라간의 전선은 소백산맥 선에서 낙동강 선까지 이동하였고, 신라는 백제의 공격에 큰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신라는 이에 다시 고구려와 연결하여 백제와 맞서려 시도했지만, 고구려는 이번에는 백제를 선택하였다. 당시 대당 강경파인 연개소문이 집권한 고구려는 당에 맞서기 위해 남부의 안정이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 현실적 힘의 우위를 보이고 있는 백제를 파트너로 선택한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의 의자왕 또한 신라에 대한 공세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자 누대의 원수였던 고구려와 전격 화친하였던 듯하다.
이로서 한반도에서 고립되어 위기에 몰린 신라는 마침내 세계정복을 꿈꾸는 당제국과 위험한 거래를 시도한다. 신라는 스스로 그때까지 사용해 왔던 독자적인 연호는 물론 나라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복식마저 버리고 당의 속국을 자처하며, 백제와 고구려에 대한 당의 개입을 요청하였다. 『일본서기』에 남아있는 기록에서는 이러한 신라의 행위에 대해 ‘국속과 의관을 버렸다’고 하며 비난하는 내용이 있으며, 왜국의 야마토 조정이 신라 사신이 당의 의관을 착용했다 하여 교섭을 거부하는 모습도 보인다. 후대의 유교적인 사관으로 덧칠된 『삼국사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야기이지만, 실제로 이것이 당대인들의 인식에 가까울 것이다.

당의 간섭과 의자왕의 결단

당의 입장에서도 신라의 접근은 매력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은 자국 중심의 질서에 복종하지 않는 고구려를 응징하고자 했던 645년의 1차 여 · 당 전쟁에서 참패하였기 때문에, 고구려를 정복하기 위한 새로운 전략이 모색되어야 했던 것이다. 고구려의 남쪽에 위치한 신라가 당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한다면, 고구려를 남북에서 협공하게 될 뿐만 아니라 당군의 고구려 공격에 있어 가장 큰 난관인 보급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백제였다. 백제가 틈만 나면 신라를 공격했기 때문에 신라의 군사력을 당의 입맛대로 동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645년 전쟁에서도 신라가 당에 호응하여 고구려를 공격한 틈을 노려 백제가 신라의 7개 성을 빼앗은 바 있었다. 백제는 무왕 이래로 중국의 통일 제국과 고구려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하는 ‘양단책’을 쓰고 있었는데, 당이 고구려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백제가 어떤 식으로든 정리되어야만 했다. 또한 신라는 백제가 고구려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집요하게 강조하며 당의 개입을 유도하였다.
그리하여 당은 백제에 신라 공격을 중지할 것을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는 백제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부당한 간섭이었다. 652년 당은 백제에 일종의 최후통첩을 보냈고, 이에 의자왕이 내린 결단은 당과의 결별, 그리고 그에 대비하기 위한 고구려 및 왜국과의 동맹 강화였다. 655년 여 · 제 연합군이 신라를 공격하여 33성을 함락시킨 사건은 이러한 결단의 산물이었다.

기벌포와 탄현 그리고 황산벌

마침내 당은 나·당연합군에 의한 백제 공격을 결정하고, 양자강 중류의 내륙 지역인 사천성에서 비밀리에 많은 함선을 건조하였다. 그리고 운명의 해 660년, 소정방이 이끄는 13만의 당군이 1900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산동반도로부터 서해를 건너 백제로 향했고, 신라에서도 김유신이 이끄는 5만 병력이 백제로 출진하였다.
백제에서도 나·당연합군의 침략을 예견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흔히 백제의 마지막 충신으로 이야기되는 성충이 그 예이다. 성충은 의자왕에게 간언을 하다가 옥사하였는데 죽기 전에 말하기를 조만간 나·당연합군이 쳐들어올 것이며, 그러면 ‘일부단창으로 만인을 당할 수 있는’ 요충지인 기벌포와 탄현에서 그들을 막아야만 한다고 하였다. 실제로 전쟁이 벌어지자 의자왕은 귀양보낸 흥수에게 대책을 물었는데, 흥수 또한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그런데, 적이 대군이므로 정면승부를 피하고 요충지를 막고 버티며 시간을 벌라는 이 지극히 상식적이고 타당한 전략은 절반만 채택되었다. 백제는 군대를 보내 기벌포는 막았지만 탄현은 막지 않았고, 신라군을 막기 위해 달솔 계백으로 하여금 5천의 정예 병력을 거느리고 출격하게 하였다. 계백은 요충지 탄현이 아닌 황산벌이라는 벌판에서 10배의 적군을 상대하게 되었다. 백제가 탄현을 막지 못한 혹은 막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여러 가지 추측들이 구구하지만, 역시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이다.

“살아서 적의 노예가 되느니 죽어서 쾌하라”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계백은 출진하기 전에 이미 패배할 것을 예상하였는지, 처자식을 불러 놓고 “한 나라의 인력으로 나·당의 대병을 당하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다. 살아서 적의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죽어서 쾌(快)함만 같지 못하다.”라고 말하고는, 스스로 처자식을 죽이고 나서 전장으로 향했다고 한다.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는 계백의 이 행위에 대해서는 이미 조선시대의 유학자들로부터 구구한 평가와 논쟁이 있어 왔다. 조선 초의 권신 권근이 “이는 사람의 도리가 아니며 싸우기도 전에 패한 것”으로 혹평한 반면 조선 후기에 『동사강목』을 저술한 안정복은 “사사로움을 버림으로써 사기를 진작시키는 의로움”이라고 높게 평가하면서 권근에 대해 “계백을 몰랐을 뿐 아니라 병법도 몰랐다”고 비난하였다. 계백에 대해 흔히 비장한 충의의 표상이라고 칭송하지만 혹자는 잔혹하고 무능한 패장이라고 비난하기도 하는 것은 사실은 오래 전부터 있어 온 논쟁의 연장선상인 셈이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신라인에 의해 쓰여진 사료에 기록된 이 내용 자체의 신빙성을 의심하기도 한다. 신라인에 의해 쓰여졌기 때문에 마치 계백이 처음부터 패할 줄 알았다는 식으로 없는 사실을 지어내었고, 그러면서 계백의 가족들의 죽음도 마치 계백이 출전하기 전에 죽이고 온 것처럼 왜곡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5천 대 5만. 3영과 3도. 4전 4승

백제군 5천과 신라군 5만. 이러한 병력 차이가 발생한 원인은 신라는 오랜 기간 국력을 기울여 준비한 대대적인 원정인 반면 백제는 갑작스럽게 급히 동원한 병력이라는 것과, 백제는 당군이 진격해오는 기벌포 방면을 방어하기 위해 많은 병력을 투입해야 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어쨌든 숫자로 보면 그야말로 중과부적(衆寡不敵), 백제로서는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싸움이었다.
그런데 위의 계백에 대한 이야기와 관련하여 이에 대해서도 새로운 해석이 있다. 신라군은 당군에게 보급품을 대기 위한 보급부대의 성격이 강했을 것이고, 따라서 5만명 중 전투병력의 비율은 그리 높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반면 백제군 5천은 백제 영토 내에서 싸우는 것이고 또 긴급히 동원할 수 있었던 만큼 모두 정예 전투병으로 볼 수 있으므로 실제로 백제군과 신라군의 전력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혹은, 이때 계백과 함께 좌평 충상과 달솔 상영이라는 인물들이 출전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계백 이상의 관등을 가진 두 사람이 출전하였으므로 이들 역시 계백과 비등한 병력을 거느렸을 것으로 추측하여 황산벌 전투에 출전한 백제군 총 전력을 1만5천 명 이상으로 어림잡는 이야기도 있다. 만약 이런 이야기들에 따른다면 황산벌 전투는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싸우기도 전에 패배를 예감할 정도로 절망적인 전황은 아니었던 셈이다.
어쨌든 황산벌에 도착한 계백은 군사를 셋으로 나누어 험한 곳을 차지하고 영채를 세웠다. 이 ‘3영’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있지만, 어떤 것을 취하든 계백은 험한 산과 골짜기로부터 드넓은 평야로 진입하는 부분, 즉 수비하는 측에서 지형의 이점을 볼 수 있는 마지막 지점에서 진을 치고 신라군을 맞이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에 신라의 김유신은 역시 군사를 세 길 즉 ‘3도’로 나누어 3영의 백제군을 한꺼번에 공격하였다. 이는 백제의 사비성으로 직공하여 당군과 약속한 합류 기일을 지키기 위한 속전속결 작전이었다. 그러나 신라군의 이 전략은 실패로 돌아갔다. 네 차례에 걸쳐 백제군을 공격하였으나 모두 패배한 것이다. 일순간 전선은 정체되었고, 신라군은 다급해졌다. 계백이 위대한 장군으로 칭송받기도 하는 이유는 그 ‘충의’도 있지만 무엇보다 열 배의 적군을 상대로 ‘4전 4승’을 거두었다는 것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천년을 사는 이름이 되다

신라군이 전선의 정체를 타개한 방법으로 흔히 알려져 있는 것은 반굴과 관창 등 젊은 화랑들을 내몰아 죽게 함으로써 전군의 사기를 북돋아 총공격을 하여 이겼다는 것이다. 이것은 황산벌전투 이전에도 신라군이 흔히 썼던 전술이기도 하고 얼핏 그럴듯하기도 하다. 하지만 단지 사기의 차이만으로 네 차례나 패배하던 전황이 순식간에 뒤집어졌다는 이야기는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때문에 신라군이 화랑의 자살돌격으로 시선을 끌면서 백제군의 후미로 부대를 이동시키는 등의 속임수를 썼을 것이라는 식의 추측으로부터 초전 네 차례의 패배는 김유신이 일부러 시간을 끌어서 사비성 일대에서 있을 결전을 당군에게 미루기 위해 벌인 일종의 연극이었다는 식의 설명가지 온갖 이야기들이 있다.
어쨌든 관창은 죽었고 계백도 죽었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은 오늘날 삼척동자까지도 다 아는 바가 되었다. 관창과 계백은 황산벌에서 전사함으로써 천년을 사는 이름이 된 것이다. 16세의 꽃다운 나이에 ‘충효’를 다하기 위해 장렬히 산화한 화랑 관창! 망해가는 나라의 마지막을 ‘충의’로 장식하며 옥쇄한 ‘결사대’의 계백! 국가 이데올로기의 측면에서 보면 이러한 소재는 예나 지금이나 유용하며, 또 다른 측면에서는 비장미 넘치는 진홍빛의 낭만적 애상으로서 대중들의 가슴 속에 남아 왔을 것이다.
계백의 5천 결사대가 황산벌에서 패배하던 날 기벌포 방면에서 벌어진 당군과의 전투에서도 백제군은 패배하였다. 성충과 흥수의 진언처럼 기벌포가 ‘일부단창으로 만인을 막을 수 있는 곳’은 아니었던 셈이다. 다시 사비성 외곽 30리 지점에서 벌어진 당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개전 후 불과 3일만에 사비성이 함락되었고 또 9일만에 의자왕이 항복함으로써 백제는 멸망하게 된다. 이후 3년에 걸친 치열한 부흥운동이 전개되었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가면서 백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백제의 멸망은 그 과정에서 나타난 석연치 않은 의문점들과 함께, 이른바 ‘3천궁녀’로 이야기되는 의자왕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 그리고 그에 대비되는, 황산벌의 계백으로 대표되는 낭만적 애상의 이미지로 사람들의 의식 속에 자리매김하고 있다.

 

 

 

 

  • 관등과 관직
  • 5부제
  • 방군성제

개요

관등(官等)이란 벼슬의 등급을 의미하는 용어로서, 흔히 관품(官品) 혹은 품계(品階)·위계(位階)라고도 표현한다. 따라서 벼슬아치의 직무·직분을 일컫는 관직(官職)과는 엄밀히 구분되는 것이다. 그런데 고대의 국가, 특히 삼국시대의 초기 단계에는 관등인지 관직인지를 구분하기 매우 어려운 벼슬 이름이 사용되었다. 다시 말하면, 관등과 관직이 아직 분화되지 않은 상태였다는 것이다. 백제도 예외는 아니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온조왕 2년에 왕의 재당숙[族父]인 을음(乙音)을 우보(右輔)로 삼고 군사 업무를 맡겼으며, 다루왕 10년에는 우보였던 흘우(屹于)를 좌보(左輔)로 삼았다고 하는데, 백제의 벼슬 가운데 이들 우보와 좌보가 역사상 가장 먼저 출현한 이름인 듯하다. 다루왕 10년조 기사의 내용과 고구려의 좌·우보제를 감안할 때, 좌보는 우보보다 나중에 설치된 더 높은 벼슬인 듯하나, 무슨 일을 하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기본적으로 고대의 권력과 행정은 군사권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으므로 좌보 역시 군사업무와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될 뿐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고이왕대 기록에는 백제의 관등·관직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기사가 거의 망라되어 있다.
먼저, 고이왕 7년조의 "진충(眞忠)을 좌장(左將)으로 삼고 모든 군사업무를 맡겼다"는 기사를 통해 좌장이라는 군사 관련 벼슬이 새로이 생겼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4년조의 "진충을 우보로 삼고, 진물(眞勿)을 좌장으로 삼아 군사업무를 맡겼다"라고 한 기사를 통해 좌장이 우보보다 낮은 지위의 벼슬이었던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고이왕 27년조에는 "봄 정월에 내신좌평(內臣佐平)을 두어 왕명의 출납을 맡겼으며, 내두좌평(內頭佐平)은 창고와 재정에 관한 일, 내법좌평(內法佐平)은 예법과 의례에 관한 일, 위사좌평(衛士佐平)은 왕궁을 지키는 군사업무, 조정좌평(朝廷佐平)은 형벌과 감옥에 관한 일, 병관좌평(兵官佐平)은 일반 군사업무를 맡게 하였다. 또, 달솔(達率)·은솔(恩率)· 덕솔(德率)·한솔(한率)·나솔(奈率)과 장덕(將德)·시덕(施德)· 고덕(固德)· 계덕(季德)· 대덕(對德)·문독(文督)· 무독(武督)· 좌군(佐軍)·진무(振武)· 극우(克虞)를 두었다. 6좌평은 모두 1품(品), 달솔은 2품, 은솔은 3품, 덕솔은 4품, 한솔은 5품, 나솔은 6품, 장덕은 7품, 시덕은 8품, 고덕은 9품, 계덕은 10품, 대덕은 11품, 문독은 12품, 무독은 13품, 좌군은 14품, 진무는 15품, 극우는 16품이다.
2월에 명령을 내려 6품 이상은 자주색 옷을 입고 은꽃으로 관(冠)을 장식하게 하였으며, 11품 이상은 붉은색 옷을 입고, 16품 이상은 파란색 옷을 입게 하였다." 라는 기사가 있어, 백제의 6좌평(관직)제와 16관등제, 그리고 공복제(公服制)의 실시를 전하여준다. 위의 기사에 따르면, 백제의 관등에서 6품까지는 모두 '솔(率)'자로 끝나고 있어, 11품까지의 '덕(德)'자로 끝나는 관등이라든지 그 이하의 관등과도 분명히 구별되는데, 그것이 그들의 옷 색깔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음이 주목된다. 즉, 공복(公服)에 의거하여 구분할 때, 백제의 관등은 크게 보아 3개의 무리 내지 단계로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흔히 솔(率)계통 관등은 정치·행정·군사부문의 책임자 내지 지휘관이며, 덕(德)계통 관등은 외교·행정·기술분야의 실무진이었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그런데 백제의 16관등제가 고이왕대에 설치되었다는 위의 기사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의문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즉, 고대국가의 경우 관등은, 고구려의 예에서 보듯이, 서서히 단계적으로 형성·분화되어 가는 것이 보통인데, 백제는 너무도 이른 시기에 완성된 형태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마침 중국측의 역사서를 참고하면 6세기 중·후반을 서술 대상으로 삼은 {주서(周書)} [이역전(異域傳)] 단계에 와서야 비로소 백제의 16관등제가 소개되어, {삼국사기}와 많은 차이를 보인다. 더욱이 {주서}에서는 "좌평(左平) 5명은 1품, 달솔 30명은 2품, 은솔은 3품……. 은솔 이하는 관원의 수를 정하지 않는다"라고 하여 {삼국사기}의 기사와 유사하면서도 16관등제를 보다 현장감 있게 전하여주고 있다.
한편, 7세기 이후의 일을 대상으로 삼은 {구당서(舊唐書)} [동이전]에는 "내관(內官)을 두었는데, 내신좌평은 왕명의 출납을 맡았고……"라고 하여, {삼국사기}의 6좌평 관련 내용과 표현조차 똑같은 기사가 실려있어, {삼국사기} 고이왕 27년조 기사를 더욱 의심케 한다. {삼국사기}의 6좌평제와 16관등제는 {주서}와 {구당서}의 해당 기사를 합성한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현재 학계에서는, 백제의 6좌평제와 16관등제가 {삼국사기}의 내용대로 고이왕대에 성립하였다는 견해와 고이왕 무렵부터 6세기 중반의 성왕(聖王)무렵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분화·발전·정립되었다는 견해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군사제도SOLDIER SYSTEM

  • 군사조직
  • 방어체제와 무기

개요

백제의 병력이 얼마였는지를 알려주는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또, 군인을 어떤 식으로 충원하였고, 군대를 어떤 모습으로 편재하였는지에 대한 자료도 없다. 다만,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초기에 왕이 직접 병사 5천명을 이끌고 전투를 벌인 기사라든지 날쌘 기병 200명을 보내 침입한 외적을 격퇴하였다는 기사가 있어, 병력의 대체적인 규모, 기병의 존재 등을 어설프게나마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의 예를 감안하면, 백제도 역시 수군(水軍)을 따로 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백성 가운데 15세 이상인 자들을 징발하여 노역케 하였다는 몇몇 기사를 통해 군역의 대상자가 15세 이상의 남자였음을 알 수 있는데, 군역 복무 기간은 대략 3년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국사기}를 조금 더 살펴보면, 4세기 중·후반의 근초고왕 재위 무렵에는 왕이 태자와 함께 정병 3만을 이끌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였다는 기사가 있으며, 의자왕 2년(642)에는 장군 윤충(允忠)으로 하여금 군사 1만명을 이끌고 신라의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게 했다는 기사도 있다. 이들 기록이 사실이라면, 늦어도 4세기에는 백제가 수만명에 달하는 대규모의 군사력을 갖추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며, 7세기 중엽 역시 한 사람의 장군이 1만명을 거느릴 정도로 군대의 규모가 거대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또한,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백제의 5방은 각각 700∼1,200명의 군사를 거느렸으며, 그 아래에 다시 30여개의 군과 200개에 달하는 성이 편재되었으니, 어림잡아도 대략 3∼4만명의 군사를 상정할 수 있다. 서기 660년, 신라가 백제를 공격할 때 정예군 5만명을 보냈다고 한 기사를 참고하면, 7세기 무렵의 백제 역시 비슷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그것이 평상시의 군사 규모였는지, 아니면 유사시에 특별히 군사를 모은 결과인지는 분명치 않다.
한편, 군사권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좌장이라는 관직이 설치된 이후로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왕이 직접 군사를 통솔하기보다 대체로 위임하는 방식을 택했으리라 짐작된다. 특히, 관등이 정비되고 병관좌평이 설치된 뒤에는 군사관련 업무가 분화되어 왕은 더욱 초월적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다만, 의자왕이 재위 2년에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여 40여개의 성을 빼앗았다는 기사에서 보듯이, 왕이 군대의 최고 지휘관이라는 상징성은 여전히 뚜렷이 남아있었는데, 그것은 삼국의 정립이라는 상황과 관계 깊을 것이다. 그리고, 방-군-성 체제가 상징하듯 행정조직 자체가 군사조직과 일치하였던 만큼, 행정 책임자가 곧 군사지휘관을 겸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을 것이다.

 

 

 

 

 

법률·교육제도LAW & EDUCATION SYSTEM

  • 법률제도
  • 교육제도

개요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왕 29년조에는 "명령을 내려 관리로서 뇌물을 받은 자와 도둑질한 자는 3배를 배상하게 하고 종신토록 금고형에 처하게 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명령을 내려'라든지 '금고형에 처한다'는 표현은 율령제의 실시를 연상시키므로, 고이왕대인 3세기 중반에 이미 백제가 율령을 공포하였다는 주장도 있지만, 똑같은 내용이 중국측 사서 중에는 {구당서}에 실려있어, {삼국사기}의 기사를 액면 그대로 믿어서는 곤란한 듯하다.
백제가 율령제를 언제 실시하였는지는 자료 부족으로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고구려의 예를 참조하고 백제의 국력과 문화적 역량 등을 감안하면, 늦어도 4세기대에는 율령을 공포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율령의 내용에 대해서도 역시 자료 부족으로 복원이 불가능하지만, 중국측 사서에 간단하게 소개된 일부의 율법을 통해 한 단면을 볼 수는 있다.
{주서} [이역전]에 의하면, 백제에서는 반역자와 도망한 군인, 그리고 살인한 자는 모두 죽였으며, 도둑질한 자는 유배를 보내는 한편, 훔친 물건의 2배를 물게 하였다. 또, 간통한 부인은 남편 집의 노예로 삼게 하였다고 한다. 간통의 경우, 상대편 남자에 대한 조항은 없었는데, 이는 백제가 심한 가부장제 사회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구당서} [동이전]에서는, 반역자는 죽이고 그 가족의 호적을 없애 노예로 삼으며, 살인한 자는 노비 3명을 주어 변상케 하고, 관리로서 뇌물을 받은 자와 도둑질한 자는 3배를 배상하게 하고 종신토록 금고형에 처하였다고 적고 있다. 앞서의 {주서}와 비교하면, {구당서}에서는 살인한 사람에 대한 조항이 크게 바뀌었으며, 도둑질한 사람의 경우에도 2배 배상에서 3배 배상으로, '유배'에서 '금고'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학계에서는 이러한 차이를 대체로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로 해석하고 있다.

 

 

 

 

 

토지·조세제도LAND & TAXES SYSTEM

  • 토지제도
  • 조세제도

개요

백제의 토지제도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기록은 거의 전하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실린 몇몇 관련 기사를 통해 유추해볼 수는 있다. 다만, {삼국사기} 초기 기사의 신빙성은 아직 장담하기가 어려우므로, 해당기사의 연대 등은 그대로 믿기보다 따로 생각하는 것이 보다 신중한 태도라고 본다.
먼저,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38년조에는 "사신을 보내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고 급하지 않은 일로 백성을 괴롭히는 것은 모두 없애도록 하였다"고 한 기사가 있으며, 다루왕 11년조에는 "왕이 동부와 서부를 순행하면서 백성들을 어루만져주었는데, 가난해서 제 힘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곡식 2섬[石]씩 나누어주었다"고 한 기사가 있다. 또, 기루왕 40년조에는 장마로 한강이 범람하여 수재민이 생기자 "유사(有司)에게 명령을 내려 수해를 입은 농토를 보수하게 하였다"는 기사도 있다. 이밖에도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농사와 관련된 기사를 곳곳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농업이 백제의 기반산업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위에서 소개한 기사를 참조하면, 마치 일반 농민의 대다수는 개인 소유의 농토를 지녔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백제는 물론 고구려·신라의 경우에도 왕을 중심으로 통치조직을 정비하고 철제 농기구의 광범위한 보급·사용을 통해 농업생산력이 증대되는 4∼6세기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토지의 사유화(私有化)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토지를 공유하였다는 뜻이 되는데, 권리의 평등화에 입각한 토지의 공동체적 소유라기보다는 해당지역의 권력자에게 예속된 상태에서의 공동 경작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더 적당할 것이다.
백제에서의 공동 경작 내지 집단 경작은 근래 발굴 조사된 경기도 하남시의 미사리 밭 유구를 통해서도 시사받을 수 있다. 즉, 4∼5세기경으로 추정되는 백제문화층에서 여러 건물지와 함께 확인된 최소 1,700여평 크기의 밭 유구는, 전체가 하나의 단위를 이룰 뿐 아니라 고랑·이랑의 선과 폭이 매우 정연하다는 점에서, 감독자의 통제하에 실시된 노예노동이나 그에 준하는 공동 경작의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가 제시되었던 것이다.
한편, 백제의 토지제도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으로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17년(657)조의 "왕의 서자(庶子) 41명을 좌평으로 삼고 각각 식읍(食邑)을 주었다"는 기사를 들 수 있다. 식읍이란 어느 한 개인에게 일정지역의 토지 및 주민에 대한 각종 세금을 징수할 수 있도록 지배의 권한을 위임하는 것으로서, 대체로 그 규모가 컸던 만큼 소수의 상류층을 대상으로 한 포상의 한가지 형태였다. 그런데 식읍은 국가의 세금 수입원으로 책정된 토지 및 주민에 한하여 인정되었으며, 해당지역 지방관의 협력이 필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백제에서의 식읍제 실시는 그 자체로 왕권 내지 중앙행정력의 강화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 농업
  • 수공업

개요

백제의 토지제도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기록은 거의 전하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실린 몇몇 관련 기사를 통해 유추해볼 수는 있다. 다만, {삼국사기} 초기 기사의 신빙성은 아직 장담하기가 어려우므로, 해당기사의 연대 등은 그대로 믿기보다 따로 생각하는 것이 보다 신중한 태도라고 본다.
먼저,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38년조에는 "사신을 보내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고 급하지 않은 일로 백성을 괴롭히는 것은 모두 없애도록 하였다"고 한 기사가 있으며, 다루왕 11년조에는 "왕이 동부와 서부를 순행하면서 백성들을 어루만져주었는데, 가난해서 제 힘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곡식 2섬[石]씩 나누어주었다"고 한 기사가 있다. 또, 기루왕 40년조에는 장마로 한강이 범람하여 수재민이 생기자 "유사(有司)에게 명령을 내려 수해를 입은 농토를 보수하게 하였다"는 기사도 있다. 이밖에도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농사와 관련된 기사를 곳곳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농업이 백제의 기반산업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위에서 소개한 기사를 참조하면, 마치 일반 농민의 대다수는 개인 소유의 농토를 지녔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백제는 물론 고구려·신라의 경우에도 왕을 중심으로 통치조직을 정비하고 철제 농기구의 광범위한 보급·사용을 통해 농업생산력이 증대되는 4∼6세기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토지의 사유화(私有化)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토지를 공유하였다는 뜻이 되는데, 권리의 평등화에 입각한 토지의 공동체적 소유라기보다는 해당지역의 권력자에게 예속된 상태에서의 공동 경작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더 적당할 것이다.
백제에서의 공동 경작 내지 집단 경작은 근래 발굴 조사된 경기도 하남시의 미사리 밭 유구를 통해서도 시사받을 수 있다. 즉, 4∼5세기경으로 추정되는 백제문화층에서 여러 건물지와 함께 확인된 최소 1,700여평 크기의 밭 유구는, 전체가 하나의 단위를 이룰 뿐 아니라 고랑·이랑의 선과 폭이 매우 정연하다는 점에서, 감독자의 통제하에 실시된 노예노동이나 그에 준하는 공동 경작의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가 제시되었던 것이다.
한편, 백제의 토지제도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으로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17년(657)조의 "왕의 서자(庶子) 41명을 좌평으로 삼고 각각 식읍(食邑)을 주었다"는 기사를 들 수 있다. 식읍이란 어느 한 개인에게 일정지역의 토지 및 주민에 대한 각종 세금을 징수할 수 있도록 지배의 권한을 위임하는 것으로서, 대체로 그 규모가 컸던 만큼 소수의 상류층을 대상으로 한 포상의 한가지 형태였다. 그런데 식읍은 국가의 세금 수입원으로 책정된 토지 및 주민에 한하여 인정되었으며, 해당지역 지방관의 협력이 필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백제에서의 식읍제 실시는 그 자체로 왕권 내지 중앙행정력의 강화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