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 濟

정약용 다산문집...백제론/고구려론/신라론 외

吾心竹--오심죽-- 2008. 12. 24.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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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론(百濟論)


백제(百濟)는 삼국(三國) 중에서 제일 강성했지만 가장 먼저 망한 나라이다. 어떤 사람은,
"신라(新羅)는 남쪽으로 간사한 왜국(倭國)과 이웃해 있고 고구려는 서쪽으로 요동(遼東)과 접해 있으므로 항상 무비(武備)를 철저히 했었다. 백제는 그 사이에 끼어 있어 외환(外患)이 미치지 않았으므로 병력(兵力)이 해이(解弛)하고 약해져서 쉽사리 망했다."
하고, 어떤 사람은,
"그 풍속이 교만하고 간사하여 이웃 나라와 화목하지 않았던 까닭으로 쉽사리 망했다."
한다. 그러나 이는 모두 백제의 단점일 뿐, 이 때문에 망한 것은 아니다.
국운이 장구히 이어가는 것은 도읍을 정하는 데 달린 경우가 많다. 반드시 요새지(要塞地)에 웅거하여 위력(威力)으로 제압할 수 있는 세력을 길러서, 견고하여 요지부동(搖之不動)하게 민심(民心)을 잡아매어야 한다. 그래야만이 일단 유사시에는 명령이 행해져서 모든 힘을 한 곳에 집중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백제가 처음에는 위례(慰禮)에 도읍을 정했었다. 위례는 지금 한양(漢陽 서울)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른바 하남위례(河南慰禮)란 곳은 지금 광주(廣州)의 고읍(古邑)이다. 《동국지리고(東國地理考)》에 상세히 보인다. 북으로는 도봉산(道峯山)과 삼각산(三角山)이 막혀 있고 남으로는 한강(漢江)을 띠고 있다. 그리고 비옥한 들이 천 리에 뻗쳐 있고 남해(南海)의 이익을 독점하고 있으니, 이야말로 천연적인 요새라 할 수 있는 땅이다.
그런 까닭에 이곳에서 나라를 누린 것이 4백 94년이나 되었다. 북으로는 대방군(帶方郡)을 굴복시켰고 동으로는 예맥(濊貊)을 복종시켰으며, 고구려와 신라 사람도 모두 겁이 나서 숨을 죽였었다. 문주왕(文周王) 때에 이르러 비로소 웅천(熊川 공주(公州))으로 도읍을 옮겼고 또 이어 부여(扶餘)로 옮겼으나 옮긴 지 겨우 1백 85년 만에 망해버렸다. 이렇게 살펴본다면 지형적인 공고함만을 믿고서 방비를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부여는 넓은 들의 복판에 위치하고 있다. 때문에 1백 리 안에 의지할 만한 성벽이나 정장(亭障)이 없고 엄폐할 수 있는 울타리가 없는데다가 의자왕(義慈王)은 주색(酒色)에 빠진 임금으로 마음내키는 대로 노닐면서 경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창졸간에 적군이 대대적으로 들이닥치자 사방의 군현(郡縣)에서는 관망만 할 뿐 머뭇거리면서 나아와 구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신라가 배후를 공격할 수가 있었고 도성(都城)이 함락되었다.
그러므로 나라를 세우는 사람은 지세(地勢)를 잘 살펴 도읍을 정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계속해 옮기지 않는다면 이러한 침략은 받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은(殷) 나라는 자주 도읍을 옮김으로써 장구한 국운을 누렸다."
그러나 이는 옛 이야기다.

 

 

고구려론(高句麗論)


고구려(高句麗)는 졸본(卒本)에 도읍을 정한 지 40년 만에 졸본(卒本)은 곧 흘승골성(紇升骨城)이다. 불이성(不而城)곧 위나암성(尉那巖城)이다. 으로 옮겼고 여기서 4백 25년 동안 나라를 누렸다. 이때는 군사력이 매우 강성하여 국토를 널리 개척하였다. 한(漢) 나라와 위(魏) 나라 때 중국이 여러 번 군사를 내어 침략해 왔으나 이길 수 없었다. 장수왕(長壽王) 15년(427)에 평양(平壤)으로 도읍을 옮겼고 여기서 나라를 누린 지 2백 39년 만에 멸망하였다. 비록 백성과 물자가 풍부하고 성곽(城郭)이 견고했으나 마침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압록강(鴨綠江) 북쪽은 기후(氣候)가 일찍 추워지고 땅이 몽고(蒙古)와 맞닿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굳세고 용감하다. 또 강한 오랑캐와 섞여 살기 때문에 사면(四面)으로 적국의 침입을 받게 되므로 방비가 매우 튼튼했었다. 이것이 나라를 장구히 누릴 수 있었던 까닭이다.
평양(平壤)은 압록강(鴨綠江)과 청천강(淸川江)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산천이 수려(秀麗)하고 풍속이 유연(柔軟)하다. 그리고 밖으로 견고한 성(城)과 큰 진(鎭)이 겹겹으로 방호(防護)하고 있는바, 백암성(白巖城)ㆍ개모성(蓋牟城)ㆍ황성(黃城)ㆍ은성(銀城) ㆍ안시성(安市城) 등의 성이 앞뒤로 잇달아 바라보이고 있다. 이러니 평양 사람들이 어찌 두려움이 있었겠는가. 고연수(高延壽)와 고혜진(高惠眞)이 적(敵)에게 성(城)을 내어주고 항복했으나 이를 문죄하지 않았고, 개소문(蓋蘇文)이 군사를 동원하여 난리를 일으켰으나 이를 금지하지 않았고, 안시성(安市城)의 성주(城主)가 탄환만한 작은 성으로 당(唐) 나라의 백만 대군을 막았으나 이를 상주지 않았다. 그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평양을 믿은 때문이다.
아, 평양은 믿을 수 있는 곳인가? 요동성(遼東城)이 함락되면 백암성이 위태하고, 백암성이 함락되면 안시성이 위태하고, 안시성이 함락되면 애주(愛州)가 위태하고, 애주가 함락되면 살수(薩水)가 위태하다. 살수는 평양의 울타리인바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고 가죽이 벗겨지면 뼈가 드러나게 된다. 이런데도 평양을 믿을 수 있겠는가.
진(晉) 나라와 송(宋) 나라는 남쪽으로 양자강(揚子江)을 건넌 뒤 천하를 잃었으니 이는 거울삼아 경계해야 될 중국의 전례(前例)이고, 고구려는 남쪽으로 압록강을, 백제(百濟)는 남쪽으로 한강(漢江)을 건넌 뒤 나라를 잃었으니 이는 귀감으로 삼아야 할 우리나라의 전례이다.
경전(經傳)에는,
"적국(敵國)으로 인한 외환(外患)이 없는 나라는 망한다."
했고, 병법(兵法)에는 이렇게 말했다.
"죽을 곳에 처해야만 살게 된다."


 

[주D-001]불이성(不而城) : 불내성(不耐城)으로 곧 국내성(國內城)을 가리킨다.

 

 

 

 

신라론(新羅論)


신라(新羅)의 세대(世代)는 박(朴)ㆍ석(昔)ㆍ김(金) 세 성(姓)이 번갈아 왕 노릇을 하여 바둑돌처럼 서로 뒤섞여졌다. 그런데도 서로 주멸(誅滅)하지 않은 채 수백 년이 되도록 나라가 쇠진(衰盡)하지 않았다. 논(論)하는 사람은, 제왕(帝王)의 자리를 어진 사람에게 선위(禪位)하는 뜻이 있기 때문으로 이는 백대의 제왕 가운데 월등히 뛰어난 일이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정자(丁子 정약용(丁若鏞)이 자신을 일컫는 말)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그렇지 않다. 이는 오량캐의 비루한 습속(習俗)이다. 대체로 나라를 전해 주는 것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즉 어진 사람에게 전해주는 것과 아들에게 전해주는 것뿐이다. 그러나 어진 사람에게 전해줌에 있어 요(堯)ㆍ순(舜) 같은 성인(聖人)으로서 이를 전해주고 순(舜)ㆍ우(禹) 같은 성인으로서 이를 전해 받는 경우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요ㆍ순에 앞서서는 이를 전해준 사람이 없었고 순ㆍ우 뒤에는 이를 전해 받은 사람이 없었으니 어진 사람에게 전해주는 것은 본디 논할 것이 없다. 하(夏) 나라와 은(殷) 나라 이후로는 한 성(姓)이 서로 계승하는 것이 천지(天地)의 변함없는 이치로 되어 왔으므로 더 부연할 것이 없다.
선대(先代)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되면 곧 부자(父子) 관계가 성립된다. 비록 형이 죽은 뒤 아우가 계승하더라도 부자 관계인 것이고 아우가 죽은 뒤 형이 계승하더라도 부자 관계인 것이다. 때문에 노(魯) 나라의 태묘(太廟)에 희공(僖公)의 신주(神主)를 올려놓자 《춘추(春秋)》에서 이를 비난한 것이다. 따라서 아버지는 소위(昭位)에 앉히고 아들은 목위(穆位)에 앉혀 질서 정연하여 옮기거나 바꿀 수가 없는 것이다. 이는 자연스런 천리(天理)를 따라서 떳떳한 인도(人道)를 확립한 것으로, 만세의 대법(大法)인 것이다. 저 보잘것없는 계림(鷄林) 사람들이 어찌 이 뜻을 알 수 있겠는가. 그들은 임금의 자리를 백성을 다스리는 영장(令長)같이 여길 뿐이었다. 그런 까닭에 박씨(朴氏)가 앉아있던 자리를 석시(昔氏)가 차지해도 시기하지 않았고, 석씨(昔氏)가 앉아있던 자리를 김씨(金氏)가 차지해도 시기하지 않았다. 다만 한때 타고난 능력이 뛰어나면 이 자리를 얻을 수 있고 권력을 쥐면 이 자리를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일찍이 종묘(宗廟)의 소목(昭穆) 제도를 마음에 두고 논의하지 않았었다. 그러니 어찌 오랑캐의 비루한 습속이 아니겠는가.
나는 잘 모르겠지만, 박씨(朴氏)의 세대(世代)에 오묘(五廟)를 세웠던가? 그렇다면 석씨(昔氏)의 세대에 와서 이를 어떻게 했을까? 이를 부수어 버렸을까? 그렇다면 박씨는 벌써 혁명(革命)을 당한 셈이다. 그대로 두었을까? 그렇다면 석씨는 나라를 차지하지 못한 것이 된다. 아니면 두 성(姓)의 종묘를 다 세웠을까? 그렇다면 박씨의 제사는 누가 주관했겠는가? 석씨가 주관했다면 두 성을 다 높이는 혐의가 있고, 박씨가 주관했다면 박씨는 손님이다. 따라서 손님이라면 벌써 혁명을 당한 것이다. 아니면 두 성의 종묘를 다 안 세웠을까? 그렇다면 종묘도 세우지 않은 것을 어떻게 나라를 차지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혹시 종묘를 같이 세워 제사하였을까? 왕자(王者)의 예(禮)에 시조(始祖)에게는 체제(禘祭)를 지내고 천지(天地)에는 교제(郊祭)를 지내고 가까운 육친(肉親)에게는 종묘(宗廟)에서 제사하고 조부와 아버지는 차례대로 협제(祫祭)도 하고 부제(祔祭)도 하는데, 두 성(姓)이 종묘를 같이하면 그 귀신들이 이를 흠향하겠는가.
이에 대한 것을 분명히 밝히지 않은 채 임금 노릇하면서 백성을 통치, 국명을 고치지 않았으니 이 점이 이른바 오랑캐의 비루한 습속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왕위를 전해주고 물려받을 적에 임금을 시해(弑害)하고 찬탈한 경우가 반이 넘고, 여후(女后)의 세력을 끼고 은밀히 나라를 도모한 경우가 세 사람이나 된다. 이렇게 하지 않은 경우는 신하들이 받들어 세운 것이 상례다. 이런데 임금의 자리를 어진 사람에게 전해주고 어진 사람이 물려받는다는 뜻을 어디서 볼 수 있는가.
주야존욱(朱邪存勖)은 이사원(李嗣源 후당(後唐)의 명종(明宗))을 양자(養子)로 삼고, 이사원은 왕종가(王從珂 후당(後唐)의 노왕(潞王))를 양자로 삼아 이들에게 나라를 전하면서 이를 당(唐) 나라라고 하고, 곽위(郭威 오대(五代) 후주(後周)의 태조(太祖))는 시영(柴榮 후주(後周)의 세종(世宗))을 양자로 삼아 나라를 전하면서 이를 주(周) 나라라고 했었다. 박씨ㆍ석씨ㆍ김씨가 서로 나라를 전하면서 신라(新羅)라고 한 것이 이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들이 서로 주멸하지 않은 것은 형세이고 습속이지, 성대한 덕과 큰 도량으로 능란하게 포용하여 목숨을 보전시킨 것은 아니다. 이런데 어떻게 백대(百代)의 왕 가운데 뛰어났다고 할 수 있겠는가.


 

[주D-001]주야존욱(朱邪存勗) : 오대(五代) 때 후당(後唐)의 장종(莊宗)으로 주야(朱邪)가 본성인데 뒤에 당(唐) 나라에 와서 성(姓)을 이(李)로 고쳤다.

 

 

 

요동론(遼東論)


고구려(高句麗) 때는 강토를 널리 개척하였다. 그래서 북부(北部)는 실위(室韋) 지금의 만주(滿洲)로서 또한 북부에 들어있다. 와 맞닿았고, 남부(南部)는 개모(蓋牟) 지금 산해관(山海關) 동쪽이 모두 남부이다. 에 이르렀다.
고려(高麗) 이후 북부와 남부는 모두 거란(契丹)에게 점령당하였고, 금(金) 나라와 원(元) 나라 이후는 다시 우리 소유가 되지 않은 채 압록강(鴨綠江) 일대가 마침내 천연적인 경계선이 되고 말았다.
우리 세종(世宗)과 세조(世祖) 때에 와서 마천령(摩天嶺) 이북으로 천 리나 개척하여 육진(六鎭)을 바둑돌처럼 설치했고, 밖으로 창해(滄海)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요동은 끝내 수복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래서 논(論)하는 사람은 이를 유감으로 여기고 있다.
나는 요동을 수복하지 못한 것은 나라를 위해 다행한 일이라 생각한다. 요동은 중국과 오랑캐가 왕래하는 요충지이다. 여진(女眞)은 요동을 거치지 않고는 중국에 갈 수 없고, 선비(鮮卑)와 거란(契丹)도 요동을 차지하지 못하면 적(敵)을 제어할 수 없고, 몽고(蒙古) 또한 요동을 거치지 않고는 여진과 통할 수가 없다. 진실로 성실하고 온순하여 무력(武力)을 숭상하지 않는 나라로써 요동을 차지하고 있게 되면 그 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요동을 차지하고 있을 경우, 서로 화친한다면 사신(使臣)의 접대에 드는 비용과 병정(兵丁)을 징발하여 부역시키는 일 때문에 온 나라의 힘이 고갈되어 지탱할 수 없게 될 것이고, 또 서로 사이가 좋지 않게 된다면 사면에서 적의 침략을 받아 전쟁이 그칠 때가 없을 것이므로 온 나라의 힘이 고갈되어 지탱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세종(世宗)과 세조(世祖) 때에는 명(明) 나라가 이미 북경(北京)에 도읍을 정하여 요동(遼東)과 심양(瀋陽)의 사람들이 기내(畿內)의 백성이 되었으니, 이를 엿보아도 진실로 차지할 수가 없을 것이다. 설령 요동과 심양이 아직 오랑캐들에게 소속되었더라도 세종과 세조께서는 이를 빼앗지 않았을 것이다. 어째서인가. 척박하여 아무런 이익도 거둘 수 없는 땅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적국(敵國)을 증가시키는 일은 영명(英明)한 임금은 하지 않는 법이기 때문이다. 한(漢) 나라와 당(唐) 나라 때에도 오히려 주(周) 나라와 진(秦) 나라의 옛일을 살펴 관중(關中)에 도읍을 정한 뒤에 위력으로 천하를 제어할 수 있었다. 때문에 중국의 지략가들이 논한 것은 동경(東京 낙양(洛陽))과 서경(西京 관중(關中))의 우열일 뿐이었다.
명(明) 나라 성조 문황제(成祖文皇帝)는 세상을 뒤덮을 뛰어난 지략이 있었지만 강성한 몽고(蒙古)와 여진(女眞)을 멀리서는 제어할 수가 없음을 알았으므로, 마침내 대명부(大名府 북경(北京))에 귀속시켰다. 그 뒤 중국을 통치한 임금들이 이를 변경하지 않았고, 대명부(大名府)는 끝내 중국의 수도(首都)가 되었다. 이러니 요동에 대해 다시 말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리고 우리나라의 지세(地勢)는 북으로는 두 강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滿江)이다. 을 경계로 삼고 나머지 삼면(三面)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서 국경의 형세가 그대로 자연적인 요새를 이루고 있으므로 요동을 얻는 것이 도리어 군더더기를 붙이는 격이 된다. 이러니 유감으로 여길 게 뭐 있겠는가.
그러나 진실로 나라가 부유하고 군사가 강성하여 하루아침에 천하를 다툴 뜻이 있어 한 걸음이라도 중원(中原)을 엿보려 할 경우에는 먼저 요동을 차지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어쨌든 서쪽으로 요동을 획득하고 동쪽으로 여진을 평정, 북쪽으로는 국경을 넓혀 위로 흑룡강(黑龍江)의 근원까지 올라가고 오른쪽으로 몽고와 버틴다면, 충분히 큰 나라가 될 수 있으니, 이 또한 하나의 통쾌한 일이라 하겠다.


 

 

일본론(日本論) 1


지금은 일본(日本)에 대해 걱정할 것이 없다. 내가 이른바 고학 선생(古學先生 고학은 이등유정(伊藤維楨)의 시호) 이등유정(伊藤維楨)씨가 지은 글과 적 선생(荻先生)이름이 쌍송(雙松)인 적생조래(荻生徂徠)임)ㆍ태재 순(太宰純) 등이 논한 경의(經義)를 읽어보니 모두 찬란한 문채가 있었다. 이 때문에 지금은 일본에 대해서 걱정할 것이 없음을 알겠다. 비록 그들의 의론이 간혹 오활한 점이 있기는 하나, 그 문채가 질(質)보다 나은 면은 대단한 바 있다. 대체로 오랑캐를 방어하기가 어려운 것은 문물(文物)이 없기 때문이다. 문물이 없으면, 예의염치로 사나운 마음 분발함을 부끄러워하게 할 수 없고, 원대한 계책으로 무턱대고 뺏으려는 욕심을 중지시킬 수 없다. 그리하여 표범과 시랑(豺狼) 같은 사나운 짐승처럼 성나면 물어뜯고 탐나면 먹어치우게 되니, 어떻게 옳고 그름을 헤아릴 수가 있겠는가. 이것이 방어하기 어려운 이유이다.
옛날 우리나라에 문물(文物)이 없을 적에는 수 양제(隋煬帝)가 백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왔었지만 한 치의 땅도 못 얻었고, 당 태종(唐太宗)은 온 나라의 군사력을 총동원하였으나 한쪽 눈이 먼 채 되돌아갔고, 고려 때에는 여진(女眞)을 굴복시켰고 유구국(琉球國)을 위력으로 제재했었다. 문물이 점차 성해지고 예의(禮義)를 숭상함으로부터는 외적(外敵)이 침입해오면 두 손을 마주잡고 공물을 바칠 줄만 알 뿐이었다. 이것이 명백한 증거다.
일본의 풍속은 불교(佛敎)를 좋아하고 무력(武力)을 숭상하기 때문에 연해(沿海)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여 보화(寶貨)와 식량과 포백(布帛)을 약탈, 눈앞의 욕심만 채웠다. 때문에 우리나라의 근심거리가 되어온 바 신라 때부터 일찍이 사고없이 몇 십 년을 지낸 적이 없었고, 중국은 강소성(江蘇省)과 절강성(浙江省) 지방이 해마다 노략질 당하여온 바 명(明) 나라 말기에 이르기까지도 노략질의 걱정이 그치지 않았었다.
지금은 우리나라의 주현(州縣)이 일본과 싸우지 않은 지가 이미 2백여 년이나 되었고, 중국도 서로 물화(物貨)를 매매하는 배[舟航]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고 있다. 진실로 예의와 문물이 그들의 천박하고 탐욕스러운 풍속을 대폭 혁신시키지 않았다면, 어떻게 수천백 년 동안 고칠 수 없었던 것을 이렇게 하루아침에 거부 반응도 없어 그치게 할 수 있었겠는가.
노략질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려는 자가 있으면 그 측근의 신하가 간하기를,
"그 땅은 얻어도 지킬 수가 없고 재물을 노략질하면 도적이란 이름만 남을 뿐입니다."
하고, 싸우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려는 자가 있으면 그 측근의 신하가 간하기를,
"아무 때 군대를 동원하여 공격했다가 단 한 사람의 군졸도 돌아오지 못했고, 아무 때에는 군대를 동원하여 공격했다가 그 여파로 나라도 따라서 망했습니다.”
하니, 이에 중지하게 되었다. 이는 모두 문채(文彩)가 실질(實質)보다 나은 효과이다. 문채가 실질보다 나아지면 무사(武事)를 힘쓰지 않기 때문에 망령되이 이익을 노려 움직이지 않는 법이다. 위에 열거한 몇 사람들이 경의(經義)와 예의(禮義)를 말한 것이 이러니 그 나라는 반드시 예의를 숭상하고 나라의 원대한 장래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때문에 지금은 일본에 대해서 걱정할 것이 없다고 한 것이다.


일본론 2


평수길(平秀吉)이 백만 대군을 동원하고 십주(十州)의 재력을 다 기울여 두 번이나 큰 전쟁을 일으켰지만 화살 한 개도 돌아가지 못했음은 물론 나라도 따라서 망했다. 그래서 백성들이 지금까지 원망하고 있으니, 그들이 다시 전철(前轍)을 밟지 않을 것이 명백하다. 이것이 일본에 대해 걱정할 것이 없다는 첫째 이유이다.
영남(嶺南)에서 해마다 쌀 수만 곡(數萬斛)을 운반하여 1주(州)의 생명을 살리고 있다. 지금 그들이 대대적인 약탈을 감행하더라도 반드시 이 쌀의 이익과 맞먹을 수가 없음은 물론 맹약(盟約)만 깨질 것이니, 그들이 흔단을 유발시키려 하지 않을 것이 명백하다. 이것이 일본에 대해 걱정할 것이 없다는 둘째 이유이다.
청(淸) 나라 사람은 우리나라를 왼팔로 여기고 있고, 우리나라의 북쪽 경계가 또 그들의 근거지와 아주 가까이 서로 맞붙어 있다. 따라서 청 나라 사람이 결단코 싸움에 익숙한 사나운 오랑캐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왼팔을 점거하게 하지 않을 것이거니와, 일본도 우리나라를 얻어봤자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명백히 알고 있다. 이것이 일본에 대해 걱정할 것이 없다는 셋째 이유이다.
일본이 옛날에는 여러 주(州)를 통합하지 못했기 때문에 교활한 무리들이 각기 제 뜻대로 군사를 일으켜 노략질을 자행했었다. 때문에 신라(新羅)와 고려(高麗) 때에는 침략이 빈번하였었으나, 지금은 섬 하나라도 임금에게 통할되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감히 멋대로 병화(兵禍)를 일으키지 않을 것은 명백하다. 이것이 일본에 대해 걱정할 것이 없다는 넷째 이유이다.
일본이 중국과 교통(交通)하지 못할 적에는 중국의 비단과 보물들을 모두 우리에게서 얻어갔고, 또 고루한 우리나라 사람의 시문(詩文)과 서화(書畫)를 얻어도 귀중한 보물로 여겼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의 배가 바로 강소성(江蘇省)과 절강성(浙江省)까지 교통하여 중국의 물건만 얻어갈 뿐 아니라, 여러 물건을 제조하는 방법가지도 배워가지고 돌아가서 스스로 제조하여 넉넉하게 사용하고 있다. 이런데 어찌 이웃 나라를 약탈하여 도적질했다는 명칭을 얻어가면서 겨우 거칠고 나쁜 물건을 얻으려 하겠는가. 이것이 일본에 대해 걱정할 것이 없다는 다섯째 이유이다.
대저 국력(國力)의 허실(虛實)과 무비(武備)의 소밀(疏密)을 살펴 승패(勝敗)의 형세를 헤아린 다음 도모해 왔다면, 저들이 이미 백 번 왔을 것이고 우리는 이미 백 번 패하여 씨도 없어졌을 것이다. 어떻게 지금까지 무사히 편안할 수 있겠는가.


 

 

폐사군론(廢四群論)


폐지된 사군(四郡)은 무창(茂昌)ㆍ여연(閭延)ㆍ우예(虞芮)ㆍ자성(慈城)이다. 폐지한 것이 당연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회복시켜야 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어 의논하는 사람들의 의견이 한결같지 않았다.
내가 삼가 살펴보건대, 압록강(鴨綠江)은 두 개의 큰 근원이 있다. 하나는 갑산(甲山)의 남쪽에 있는 향령(香嶺)의 물이고, 다른 하나는 함흥(咸興) 서쪽에 있는 황초령(黃草嶺)의 물이다. 이 두 물이 갈파(葛坡) 앞에서 합류, 서쪽으로 무창(茂昌)에 이르러 다시 후주(厚州)의 물과 합류한다. 이로부터 강물이 호대(浩大)해져서 드디어 천연적인 참호(塹壕)를 이루는데 이 강가에 있는 네 개의 고을이 바로 이른바 사군(四郡)이다.
사군으로부터 서쪽으로 강가에 자리잡고 있는 고을이 위원(渭原)ㆍ초산(楚山) 등 일곱 고을이고, 사군으로부터 동쪽으로 강을 거슬러 자리잡고 있는 고을이 삼수(三水)ㆍ갑산(甲山)이다. 그런데 압록강 물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여연(閭延)에 이르고 여기서 또 다시 꺾여져 남쪽으로 흐른다. 지금 북극(北極)을 기점으로 지대(地帶)를 논한다면 위원(渭原)과 갑산(甲山)은 같은 지대인 바 이 지역들은 직선[絃]에 해당되고 사군은 타원[弧]에 해당된다. 국경을 구분하는 데는 직선을 다투어야만 하고, 국경을 방비하는 데는 타원을 튼튼히 해야 하는데도 지금 사군을 폐지한 채 돌아보지 않으니, 이게 될 일인가.
솔연(率然) 뱀은 그 머리를 치면 꼬리로 반격(反擊)하고 꼬리를 치면 머리로 반격하고 몸통을 치면 머리와 꼬리가 함께 반격한다. 이는 병가(兵家)의 대국적 형세이다. 이제 솔연 뱀에 비유하자면 갑산(甲山)은 머리이고 위원(渭原)은 꼬리이고 사군(四郡)은 몸통에 해당되는데, 사군을 폐지했으니 몸통은 이미 썩어버린 격이다. 이러니, 머리와 꼬리가 서로 구원(救援)할 수 있겠는가.
전쟁에서 이기고 패하는 것과 보존되고 멸망하는 것은 형세에 의해 결정된다. 산에서 싸울 경우에는 험준한 봉우리를 점거하면 이기고 물에서 싸울 경우에는 상류를 점거하면 이기는데, 이것이 형세인 것이다. 강한 오랑캐 수천 명이 사군을 점거하고서, 북쪽으로 갈파(葛坡)의 길을 끊고 서쪽으로 건주(建州)의 곡식을 수송, 남쪽을 향하여 우리를 호령한다면, 위원 등 일곱 고을의 성벽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릴 것이다. 따라서 패수(浿水 대동강(大同江)) 이북의 땅은 다시 조선(朝鮮)의 소유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이를 근심하지 않고 사군을 폐지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방비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적에는 이를 넘어와도 해로울 게 없지만, 방비를 했는데도 이를 넘어온다면 이는 난(亂)의 근본이 된다. 《시경(詩經)》에 '버들가지를 꺾어 채소밭에 울을 막으니 미친 사람도 이를 보고 놀라 돌아본다.' 한 것은, 방비하면 넘어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압록강은 방어선의 역할을 하고 있는 바가 대단하다. 그런데 이제 아무 까닭 없이 사군을 헐어버림으로써 여진(女眞)의 간사한 백성들로 하여금 우리의 산림(山林) 속에 잠복하여 거처하게 하고 있는가 하면, 그들은 처자까지 이끌고 와 소굴(巢窟)을 만들고 있다. 그리고 나서 날마다 금(金)ㆍ은(銀)ㆍ동(銅)ㆍ철(鐵)을 캐어 돈을 주조하고, 동삼(童蔘)과 초서(貂鼠)의 가죽을 남획하여 스스로 윤택함을 누리는 반면 활과 화살, 큰 창과 작은 창, 화포(火砲) 등의 무기를 갖추어 스스로를 방위하고 있다. 그런데도 변방을 지키는 수령들은 이 사실을 알리지 않고 있고, 묘당(廟堂 조정(朝廷))의 신하들은 알고도 말하지 않고 있으니, 난리가 일어나면 어떻게 방어할 수 있겠는가.
옛날 우리 세종(世宗)과 세조(世祖)께서는 장수와 군사를 출동시켜 육진을 경영, 온 국력을 다 기울여 기필코 이를 얻고 나서야 만 것은 무슨 이유인가. 두만강(豆滿江)을 방어선으로 삼으려 한 때문이다. 긴요한 방어선이 남의 땅에 있을지라도 오히려 혹 이를 도모할 수 있는 것인데, 우리에게 있는 방어선을 어찌 스스로 헐어버릴 수 있겠는가. 나는 이런 때문에 폐지된 사군(四郡)은 당연히 회복시켜야 한다고 여긴다.


 

[주D-001]솔연(率然) 뱀 : 중국(中國)의 상산(常山)에 있다고 하는 뱀 이름이다.

 

 

척발위론(拓跋魏論)


성인(聖人)의 법은, 중국(中國)이면서도 오랑캐와 같은 행동을 하면 오랑캐로 대우하고 오랑캐이면서도 중국과 같은 행동을 하면 중국으로 대우한다. 중국과 오랑캐의 구분은 도리와 정치의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지 지역의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주(周) 나라의 선대(先代)는 훈육(獯鬻)과 곤이(昆夷) 사이에 있었으니 오랑캐가 아닐 수 없으나, 하루아침에 태왕(太王)ㆍ왕계(王季) 같은 이들이 일어나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이 참신하여지자 중국으로 대우한 것이다. 진(秦) 나라의 선대는 백익(伯益)의 후손(後孫)이니 중국이라 아니할 수 없으나 비자(非子) 이후로 이익만 숭상한 채 의리를 외면하고, 중국의 화호(和好)에 참여하려 하지 않자 오랑캐로 대우했다. 성인이 오랑캐와 중국임을 결정짓는 것이 본디 이와 같다.
척발씨(拓跋氏)의 영역은, 동쪽은 예맥(濊貊 만주 지역(滿洲地域))과 연하고 서쪽은 낙나(落那) 아마 지금의 액나사(額那斯)일 것이다. 와 통하고 남쪽은 음산(陰山)에 닿았고 북쪽은 사막(沙漠)에까지 이르렀으며, 선비(鮮卑)라 일컬었다. 그들의 시조는 원래 오랑캐였다. 그러나 척발의로(拓跋猗盧)는 유곤(劉琨)을 도와 흉노를 정벌했으니 그 마음은 벌써 중국인 것이다. 그리고 예괴(翳槐 후위(後魏) 열제(烈帝)의 이름)와 십익건(什翼犍 후위 소성제(昭成帝)의 이름) 등은 모두 중국의 봉작을 받았고 그 나라도 중국에 위치하고 있다. 하물며 그 선대는 본디 황제(黃帝)의 후손인 데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도무제(道武帝) 척발규(拓跋珪)이다. 가 일어나 맨먼저 오경박사(五經博士)를 설치하고 문학을 대대적으로 흥기시켰다. 그리고 조야(朝野)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머리털을 묶고 관모(冠帽)를 쓰게 했다. 태무제(太武帝) 세조(世祖) 도(燾)이다. 는 최호(崔浩)의 의논에 따라 천하의 중을 다 없애버리고 불상(佛像)을 부수고 사탑(寺塔)을 무너뜨렸다. 불법(佛法)이 중국에 들어온 이후 이처럼 철저히 배척한 적이 없었다. 효문제(孝文帝) 고조(高祖) 굉(宏)이다. 는 궁궐의 사문(四門)에 소학(小學)을 세운 뒤 유실(遺失)된 서적을 구하고 유명한 선비와 친하고 오랑캐의 의복을 금지하고 오랑캐의 말을 바꾸게 했다.
이렇게 현철(賢哲)한 군주가 대대로 계승하여 정전법(井田法)을 회복하고 주관(周官)의 관직을 준수하여 교화(敎化)가 넘쳐 흘렀고 예악(禮樂)이 찬란히 빛났다. 또 공렬(功烈)로 말하면 연(燕) 나라와 하(夏) 나라와 양(涼) 나라를 섬멸, 장안(長安)을 뺏고 낙양(洛陽)을 함락시켰다. 그리하여 육군(六軍)이 가는 곳에 온 천하가 바람 앞에 풀이 쓰러지듯 했다. 역년(歷年)으로 말하면 14대(代)를 계승하였고 1백 72년 동안 나라를 누렸다.
척발위의 본말을 살펴본다면, 어찌 우금(牛金)의 아들 동진(東晉)은 실상 우씨(牛氏)였다. 이 한쪽 모퉁이에서 만족하고 있다가 마침내 강신(强臣)에게 나라를 빼앗긴 것만 못하겠는가? 그런데 어째서 척발위를 승진시켜 중국으로 대우하지 않고 기어코 배척하여 정통(正統)에 참여시키지 않고 있는가.
사가(史家)의 견해가 편협한 것이 이러한 까닭에 뒷날 외국(外國)으로서 들어가 중국을 통치한 임금들에게 권장(勸獎)되는 바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오랑캐의 의복을 입고 오랑캐의 말을 하면서 '너희들이 이미 우리를 중국으로 대우하여 하지 않을진대 우리도 너희들을 오랑캐로 대우하겠다.' 하고 요(堯)ㆍ순(舜)ㆍ우(禹)ㆍ탕(湯)의 유민(遺民)을 모두 오랑캐로 대우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중국을 사모하여 중국을 본받은 나라에 척발씨(拓跋氏) 같은 경우가 있었어도 사가(史家)는 오히려 그 나라를 중국으로 대우해 주지 않으려 한 때문이다.
아무리 사가가 그렇게 해도 척발씨는 스스로 중국이 된 것이다. 저 하찮은 사필(史筆)의 포폄(褒貶)이 척발씨에게 무슨 영향을 줄 수 있겠는가. 단 위(魏 척발씨를 가리킴) 나라는 두 가지 결점이 있었다. 바야흐로 송(宋) 나라를 칠 때에 어린아이를 창끝에 꿴 것과 세종(世宗) 때에 불법(佛法)을 다시 시행하게 한 일이 그것이다. 그러나 어느 나라엔들 이런 결점이 없겠는가.


 

[주C-001]척발위(拓跋魏) : 척발규(拓跋珪)가 3백 86년에 평성(平城)에 도읍을 정하고 세운 북위(北魏)를 말한다. 북조(北朝) 가운데 제일 처음으로 건국했다.

 

 

동호론(東胡論)


육상산(陸象山 상산은 육구연(陸九淵)의 호)은,
"동해(東海)와 서해(西海)의 사람은 마음도 같고 이치도 같다."
했는데, 이는 유학자(儒學者)의 말이다. 그러나 기후(氣候)에 따라 그 기질(氣質)이 현격하게 다른 점이 있다. 북방 사람은 대체적으로 강하고 사나운 까닭에 흉노ㆍ돌궐(突厥)ㆍ몽고(蒙古) 등속은 모두 사람 죽이기를 즐기고 잔포(殘暴)한 짓에 익숙하다. 서강(西羌) 또한 간사하고 변덕이 많다. 유독 동방에 있는 오랑캐[東狄]만은 모두 인후(仁厚)하고 성실하고 신중하여 칭찬할 만하다.
척발위(拓跋魏)는 선비족(鮮卑族)이다. 이들은 중국에 들어가서 예악(禮樂)을 숭상하고 문학을 장려하여 제작(制作)이 찬란했었다. 거란(契丹)은 동호(東胡)이다. 아보기(阿保機) 요(遼)의 태조(太祖)이다. 는 천륜(天倫)에 돈독하여 자갈(刺葛)이 세 번 반역을 일으켰으나 세 번 다 석방했으니, 이는 우(虞) 나라 순(舜) 임금 이후로는 없었던 일이다. 그 성대한 정치와 장구한 역년(歷年)은 2백여 년이다. 실로 중국으로 대우받는 나라로서도 드문 일이었다.
여진(女眞)은 두 번이나 중국에 들어가 임금 노릇을 했다. 그들이 금(金) 나라로 있을 적에 송(宋) 나라의 두 황제[二帝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임]를 사로잡았으나 끝내 살해하지 않았다. 장수와 정승이 서로 화합하여 규모(規模)가 크고도 원대했으니, 해릉왕(海陵王 금 나라 폐제(廢帝) 완안량(完顔亮)을 가리킴)이 그토록 광망하지만 않았다면 쉽사리 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청(淸) 나라는 천하를 통일할 때 군사가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았고 시장은 점포를 옮기지 않았었다. 그리고 귀영가(貴盈哥 금 목종(金穆宗) 완안영가(完顔盈歌)를 가리킨 듯함) 이후로 태백(泰伯)ㆍ중옹(仲雍)의 기풍을 지닌 사람이 여럿이었으니, 또한 훌륭하지 않은가. 역사에서 동이(東夷)를 인선(仁善)하다고 칭찬함은 진실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조선은 정동쪽 땅에 위치한 까닭으로 그 풍속이 예절을 좋아하고 무력을 천하게 여김은 물론 차라리 유약할지라도 난폭하지 않았으니 군자의 나라임에 틀림없다. 아, 이미 중국에 살 수 없을진댄 살 곳은 동이(東夷)뿐이다.


속유론(俗儒論)


한 선제(漢宣帝)가 태자(太子)를 책망하기를,
"속된 선비는 시의(時宜)를 모른다. 어떻게 일을 맡길 수 있겠는가."
했는데, 이 말을 그르다 할 수 없다. 공자(孔子)는 관중(管仲)이 어진 사람임을 인정하면서,
"관중이 없었다면 우리는 머리를 풀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야만이 되었을 것이다."
했고, 자산(子産)과 안평중(晏平仲) 등에 대해서도 일찍이 칭찬은 했어도 헐뜯지는 않았다. 제자들과 도(道)를 논할 적에도 전부(田賦)와 군려(軍旅)와 이웃 나라에 사신가는 일을 많이 논했다. 또 사구(司寇)가 되어서는 지체없이 소정묘(少正卯)의 목을 베었고, 협곡(夾谷)의 회맹(會盟)에서는 군대의 위세를 성대히 진설하였고, 진항(陳恒)에 대해서는 목욕한 다음 목베기를 청했다. 참된 선비의 학문은 본디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히 하고 오랑캐를 물리치고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하고 문식(文識)과 무략(武略) 등을 갖추는 데 대해 필요하지 않음이 없다. 어찌 옛사람의 글귀를 따서 글이나 짓고 벌레나 물고기 따위에 대한 주석이나 내고 소매 넓은 선비 옷을 입고서 예모(禮貌)만 익히는 것이 학문이겠는가.
옛날에는 아들을 낳으면 뽕나무로 만든 활로 쑥대 화살을 사방에 쏘아 공명 세우기를 기원하였고, 조금 자라면 상(象 음악 이름으로 무무(武舞))을 춤추고 작(勺 음악 이름으로 문무(文舞))을 춤추게 하여 무덕(武德)을 익히게 하였다. 장성하고 나서는 활쏘기와 말타기를 배우니, 이에서 사람을 가르치는 뜻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군사를 동원하거나 적의 머리를 바치는 일을 모두 학궁(學宮)에서 거행했다. 따라서 학궁은 경서(經書)나 사책(史冊)만 가르칠 뿐이 아니었다. 맹자(孟子)도 제(齊) 나라와 위(魏) 나라 임금이 오로지 싸움만 숭상하는 것을 근심하여, 말한 것은 모두 인(仁)과 의(義)였다. 이는 그 임금들의 잘못을 바로잡으려 한 것이다. 그런데 뒷세상의 선비들은 성현의 본뜻은 모르고 인의(仁義)와 이기(理氣) 이외에 한마디라도 다른 말을 입밖에 내면 이를 잡학(雜學)이라 지목한다. 그리하여 신불해(申不害)와 한비(韓非) 같은 자라고 하지 않으면 곧 손무(孫武)와 오기(吳起) 같은 자라고 비난한다. 이 때문에 힘써 이름을 높여 도통(道統)을 엿보려는 자들은, 차라리 케케묵은 의논과 고루한 학설을 주장하여 스스로 어리석게 될지언정 이 한계를 한 걸음이라도 넘어서려고 하지 않고 있다. 이리하여 선비의 도(道)는 다 없어지고 당시의 군주들은 날로 선비들을 천시하게 된 것이다.
한 선제의 말이 모두 다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근본을 따져본다면 잘못이 선비들에게 있다. 그런데 논하는 사람은, 이치의 옳고 그름은 헤아리지 않고 선제만을 공격하여 마지않고 있으니, 선제가 할 말이 없겠는가.


서얼론(庶孼論)


옛날 우리 영종대왕(英宗大王)께서는 서얼(庶孼)의 등용이 막힌 것을 민망히 여겨 이조(吏曹)에 하명, 그들 가운데 문예(文藝)가 있는 사람으로 성대중(成大中) 등을 위시하여 10명을 뽑아서 대간(臺諫)의 직(職)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나서 재보(宰輔)의 지위에 있는 신하들을 불러서 유시(諭示)했다.
"하늘은 지극히 높지만 하늘이라 부르지 않은 적이 없고, 임금 또한 지극히 높지만 임금이라 일컫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런데 서얼은 자기 부모를 부모라 부르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적모(嫡母)를 말하는 것이다.
신하들은 말문이 막혀서 아무도 감히 논란(論難)하지 못하였다. 그러고 나서 물러갔는데 조정의 관원에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백성들은 다같이 하늘[乾]을 아버지라 일컫고 땅[坤]을 어머니라 일컫는다. 그러나 감히 필부(匹夫)로서 하늘의 아들[天子]이라 일컫는 자가 있으면 육군(六軍)을 동원하여 쳐야 한다."
이에 사람들은 입을 모아 이 말을 명언이라 일컬었다.
군자(君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한다.
"이는 예에 맞는 말이 아니다. 역시 성고(聖考 영조(英祖))의 말이 정당하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고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는 것은 자식이면 누구나 다같이 일컫는 호칭이다. 감히 서자(庶子)이면서 종자(宗子)라 일컫는 사람은 구족(九族)이 이에 대해 의논하여 이미 인준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어째서 부모라고 부르는 것까지 금지하는가. 부모라고 부르는 것은 금지할 수 없는 것이다. 호적(戶籍)에 계통을 기록하자면 아버지라 써야 될 것이고, 봉미(封彌)에 계통을 기재하자면 아버지라 써야 될 것이고, 방목(榜目)을 간행하기 위해 계통을 기재하자면 아버지라 써야 될 것이고, 이조(吏曹)에 간직하기 위해 계통을 써야 한다면 아버지라 써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집안의 언어에서만 금하여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게 한단 말인가.
그리고 무엇 때문에 서얼의 등용을 막는단 말인가. 한 위공(韓魏公 위공은 한기(韓琦)의 봉호임)의 어머니는 청주(淸州)의 비첩(婢妾)이었고, 범 문정공(范文正公 문정은 범 중엄(范仲淹)의 시호임)은 시집간 어머니를 따라가서 계부(繼父)의 성(姓)을 사용했다가 한림(翰林)의 벼슬에 오른 위에야 비로소 표문(表文)을 올려 전의 성(姓)을 되찾았다. 송(宋) 나라에서 만일 이 두 사람의 등용을 막았더라면 홀(笏)을 잡고 정좌(正坐)하여 나라의 형세를 태산(泰山)처럼 안전하게 만들고 서적(西賊 서하(西夏)를 가리킴)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수 있었겠는가. 소 강절(邵康節 강절은 소옹(邵雍)의 시호임) 선생은 형제 3인이 모두 공숙목(公叔木)에게는 대공복(大功服)을 입었고 적의(狄儀)에게는 자최복(齊衰服)을 입었었다. 만일 송(宋) 나라 유자(儒者)들이 이런 것을 이유로 강절(康節)을 경멸하였다면 《황극경세(皇極經世)》의 글이 어찌 사문(斯文)에 공헌할 수 있었겠는가. 이렇게 본다면 성대중 등 서얼들에게 대간(臺諫)의 직을 제수한 것은 작은 것이다. 반드시 재상(宰相)에 임명해야 옳다."


 

[주D-001]봉미(封彌) : 과거(科擧) 시험에 공정(公正)을 기하기 위해 수험자의 이름을 기재한 부분을 풀로 봉한 다음 답안을 제출하게 한 것.

 

 

 

환상론(還上論)


법 가운데 환상법(還上法)보다 더 나쁜 것이 없다. 환상법은 비록 아버지와 아들 사이일지라도 시행할 수 없는 것이다.
예컨대 어떤 시골의 늙은 아버지가 자기 아들 열 사람에게 재산을 분배해 주고는 아침에 열 아들의 집을 돌아다니면서 그들에게,
"너희들은 재물 관리에 소홀하고 며느리들은 씀씀이가 크니 명년에는 너희가 굶주리게 될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의 양곡을 운반하여 나의 광[窖]에 저장해 두어라. 그러면 명년 봄에 내가 너희들에게 돌려주겠다."
했다 하자. 그러면 아들들은 자기 방에 들어가서 아내에게 말할 것이고 아내들은 눈썹을 찌푸리고 이맛살을 찡그리며 별 간섭을 다한다고 종알거리면서 그 명령을 괴롭게 여기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더구나 현관(縣官)과 백성 사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명년 봄에 아버지가 아침에 열 아들의 집을 돌아다니면서 그들에게,
"내가 오늘 너희들에게 양곡을 돌려줄 것이니 와서 받아가거라. 그러나 새가 틈으로 들어와서 먹고 쥐가 구멍을 내어 먹었으므로 모자라는 것이 10분의 2, 3은 될 것이니, 너희들은 그것을 알고 있으라."
했다 하자. 그러면 아들들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아내에게 알릴 것이고 아내들은 눈썹을 찌푸리고 이맛살을 찡그리며 그럴 걸 뭐하러 모아갔느냐고 종알거리면서 비방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더구나 현관과 백성 사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아침 사시(巳時 오전 9~11시 사이)에 아들들이 전대ㆍ자루와 말과 소를 이끌고 아버지의 광에 와서 양곡을 받아가려 할 적에 아버지는 또 광에 기대서서 아들들에게,
"너희들은 재산 관리에 소홀하고 며느리들은 씀씀이가 크니 지금 전부 주어버리면 내달에는 너희가 굶주릴 것이다. 그러니 오늘 몇 말 받아가고 10일 뒤에 몇 말 받아가고 또 10일 뒤에 몇 말 받아가거라. 그리하여 새 곡식이 날 때에 이르러 다 받아가도록 하라."
했다 하자. 그러면 아들들이 돌아가서 아내에게 알릴 것이고 아내들은 눈썹을 찌푸리고 이맛살을 찡그리며 괜히 번거롭게 만든다고 종알거리면서 괴로워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더구나 현관과 백성 사이야 말해 무엇 하는가.
이에 관솔불을 환히 켜놓고 자기 아내에게 말[斗]로 가져온 곡식을 되게 하니, 아내는 한 줌을 쥐고 불 앞에 가서 후후 분 다음 들여다 보면서,
"이 곡식이 전에 우리 집에서 실어 갔었던 것인가. 어째서 궂은 쌀과 변질된 쌀이 있고 또 싸라기는 이렇게 많은가. 이것은 시동생 집에서 실어다 두었던 것과 바뀐 것이 아닌가. 아니면 광을 관리하는 사람이 아버지와 공모하여 협잡한 것인가. 지난번에 우리가 굶주릴까 걱정한다고 한 것이 결과가 이 모양이란 말인가."
하고, 조금 뒤에 말[斗]로 되어 보고는,
"이 쌀이 3두(斗)란 말인가. 우리 말[斗]로는 15되[升]도 못 되는데……."
하면서, 눈썹을 찌푸리고 이맛살을 찡그리며 욕심도 많다고 종알거리면서 비방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더구나 현관과 백성 사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렇게 한 지 10여 년 뒤에는 열 아들 집의 재산은 모두 줄어들어 가난해졌는데도 아버지의 광은 가득 차서 큰 창고들을 짓게 되었다. 이에 아들들을 불러놓고는,
"지금 내가 저장해 둔 곡식이 곧 썩게 되었다. 너희가 이것을 받아갔다가 가을에 상환(償還)하되 다만 10분의 1을 가산해 상환하도록 하라. 이는 새와 쥐가 축내는 것을 충당하기 위한 것이다. 내가 지금 부자(富者)가 되어 내 창고를 관리하는 사람이 수십 명이나 되는데 이들에게 수고만 시킬 수 있겠느냐. 나머지가 있어야 이들에게 줄 수 있으니, 너희들은 이자를 생각하고 있거라."
하니, 아들들은 꿇어앉아 눈물을 흘리면서 그 곡식을 사양하기를,
"진실로 이렇게 하신다면 끝내 아버지 슬하(膝下)에서 목숨을 보전할 수가 없습니다."
하자, 아버지는 발끈 성을 내면서,
"아버지가 곡식을 주는데도 자식들이 원하지 않다니, 매우 못된 짓이다."
하고는 아들들의 등을 때리면서 억지로 곡식을 내주었다. 이해 가을에 흉년이 들어 열 아들이 모두 곤궁하여 상환할 곡식을 못 내게 되자, 아버지는 자기의 노복(奴僕)을 모두 출동시켜 열 아들 집에 가서 가마솥을 빼오고 송아지를 빼앗아 왔는데도 오히려 수량을 채우지 못하였다. 이렇게 되자 또 며느리의 형제의 집과 종형제(從兄弟)의 집에까지 가서 송아지를 빼앗고 가마솥을 빼오게 하였다. 이렇게 되면 울부짖는 소리가 하늘을 진동시키고 하늘도 무심하다고 원망하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현관과 백성 사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명년 봄에 큰 기근이 들어 곡식 한 섬에 7백 냥(兩)을 호가하게 되니, 아버지는 자기의 곡식 한 섬을 7백 냥에 판매하여 6백 냥은 자기가 차지하고 1백 냥만 아들에게 주면서,
"가을에 풍년이 들어 곡식 한 섬에 90냥이 되더라도 너희가 곡식으로 이 돈을 상환하라."
한다면, 아들들은 가슴을 치고 피를 토하면서 하늘을 우러러 자기의 심정을 호소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더구나 현관과 백성 사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러므로 '법은 환상법보다 더 나쁜 것이 없다. 환상법은 비록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일지라도 행할 수 없다.' 한 것이다.

 

 

간리론(奸吏論)


아전(衙前)이 본디부터 간사한 것이 아니다. 그들을 간사하게 만드는 것은 법이다. 간사가 발생되는 요인은 이루 다 열거할 수 없다.
무릇 직책은 하찮은데도 재주가 넘치면 간사하게 되고, 지위는 낮은데도 지식이 많으면 간사하게 되고, 노력을 적게 들였는데도 효과가 신속하면 간사하게 되고, 나는 한 자리에 오래 있는데도 나를 감독(監督)하는 사람이 자주 교체되면 간사하게 되고, 나를 감독하는 사람의 행동 또한 정도(正道)에서 나온 것이 아니면 간사하게 되고, 아래에는 당여(黨與)가 많은데도 윗사람이 외롭고 우매하면 간사하게 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나보다 약한 탓으로 나를 두려워해서 고발하지 못하면 간사하게 되고, 내가 꺼리는 사람이 다같이 죄를 범했는데도 서로 버티고 고발하지 못하면 간사하게 되고, 형벌이 문란하여 염치가 확립되지 않으면 간사하게 된다. 간사한 탓으로 지위를 잃기도 하고 간사해도 지위를 잃지 않기도 하고, 간사한 짓을 하지 않았는데도 간사한 짓을 했다는 것으로 지위를 잃는다면 간사하게 된다. 간사함이 발생하기 쉬운 것이 이러하다. 지금 아전을 제어하는 방법은 전부가 간사함이 발생하게 되는 이유에 합치되지 않는 것이 없는데도 아전으로 하여금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는 술책은 없다. 이러니, 아전이 간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저 나라에서 공경(公卿)ㆍ대부(大夫)ㆍ사(士)의 관직을 설치하고 공경ㆍ대부ㆍ사의 봉록(俸祿)을 제정하여 공경ㆍ대부ㆍ사들을 우대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 직책이 이미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라면 재주를 시험하고 기예(技藝)를 선발하고 치적(治積)을 고과하고 관질(官秩)을 승진시킴에 있어서도 당연히 백성 다스리는 것으로 기준을 삼아야 하는 것이다.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시부(詩賦)로 시험하고 씨족(氏族)으로 선발하고 경력(經歷)의 청화(淸華 청관(淸官)과 화직(華職)임)로 고적(考績)하고 당론(黨論)의 준급(峻急)으로 관질(官秩)을 승진시킨다. 백성을 다스리는 데 이르러서는,
"이것은 비천한 일이다."
하면서, 아전에게 맡겨 그로 하여금 백성을 다스리게 한다. 그리고는 때때로 한 번씩 와서 엄한 위엄과 가혹한 형벌을 가하면서,
"간사한 아전은 마땅히 징계해야 된다."
하니, 이는 손[客]이 와서 주인(主人)에게 심한 모욕을 가하는 셈이다. 아전 또한 하늘을 쳐다보면서 갓끈이 끊어질 정도로 크게 웃으면서,
"우리가 너에게 무슨 관계가 있기에 호통이냐."
한다면, 아전들의 간사함을 징계할 수 있겠는가.
옛날 조광한(趙廣漢)은 하간(河間)의 옥리(獄吏)였고, 윤옹귀(尹翁歸)는 하동(河東)의 옥리였고, 장창(張敞)은 졸사(卒史)였고, 왕준(王尊)은 서좌(書佐)였다. 그런데도 모두 조정에 올라가 천자(天子)의 대신(大臣)이 되었고 그 공적과 재능이 찬란히 빛났다. 그리하여 가는 곳마다 백성이 두려워하여 복종하였고 군현(郡縣)이 크게 잘 다스려졌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을까. 이는 저들은 자신이 익힌 것을 그대로 시행하여 순리(順理)대로 따랐기 때문이었다.
흉년에 도적이 일어나서 북 치는 소리가 삼보(三輔 중국의 장안(長安)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서울의 뜻임)를 진동시킬 적에, 부(賦)를 잘 짓는 사마상여(司馬相如)를 시켜 이를 금지하게 한다 해도 금지할 수 있겠는가. 큰 옥사(獄事)가 일어나서 죄수들이 옥에 가득하여 해를 넘겨도 판결이 잘 안 될 적에, 송(頌)을 잘 짓는 왕자연(王子淵)을 시켜 이를 판결하게 한다면 판결할 수 있겠는가.
때문에 아전에게 간사한 짓을 못하게 하려면, 조정에서 사람을 뽑을 적에 오로지 시부(詩賦)에만 의거하여 뽑지 말고, 행정 사무(行政事務)에 익숙한 사람을 현관(縣官)에 오르게 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군현(郡縣)이 피폐(疲弊)해지고, 매우 교활하여 다스리기 어려운 아전이 있을 적마다 이들을 시켜 다스리게 하고 나서 진실로 성적(成績)이 있으면 의심 없이 공경(公卿)을 제수(除授)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아전의 간사함이 금지될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대대로 그 직책에 오랫동안 종사하였으므로 세력이 단단히 뿌리박혀 있기 때문에 비록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도 이를 걱정하게 된다. 이에 대해 방법이 있다. 모든 아전의 직책 가운데 중요하고 권한이 있는 자리는 한 고을에 10자리를 넘지 않는다. 그것은 파견(派遣)의 차송(差送)을 맡은 사람, 곡식 장부를 맡은 사람, 전지(田地)를 맡은 사람, 군사(軍事)에 관한 행정 사무를 맡은 사람이다. 아무리 큰 고을이라도 10인에 지나지 않는다. 이 10인을 지금 영리(營吏)를 뽑는 법처럼 매양 몇 백 리의 밖에서 뽑아오고 또 그 직임에 오래 있지 못하게 해야 한다. 오래 있다 해야 2년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1년으로 만기를 삼는다면 아전이 간사한 짓을 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무릇 간사한 짓은 오래 있는 데서 생기게 된다. 따라서 오래 있지 못하게 하면 간사함도 노련해지지 못하게 될 것이다. 저들이 모두 여러 군현(郡縣)으로 옮겨다님으로써 일정히 머물 곳이 없게 되면, 창고에 간사한 짓이 있을 경우 이를 감출 수 있겠는가. 군오(軍伍)의 일에 간사한 짓이 있을 경우 이를 숨길 수 있겠는가. 감출 수도 없고 숨길 수도 없으면 드디어 간사한 짓이 없어지게 될 것이다. 간사한 짓을 없애는 방법이 이같이 행하기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습(舊習)만을 답습하면서 이를 바로잡지 못하니 낸들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아전이 본디부터 간사한 것은 아니다. 그들을 간사하게 만드는 것은 법이다.' 한 것이다.


 

감사론(監司論)


밤에 담구멍을 뚫고 문고리를 따고 들어가서 주머니를 뒤지고 상자를 열어 의복ㆍ이불ㆍ제기(祭器)ㆍ술그릇 등을 훔치기도 하고 가마솥을 떼어 메고 도망하는 자가 도적인가? 아니다. 이는 굶주린 자가 배고픈 나머지 저지른 것이다. 칼과 몽둥이를 품에 품고 길목에 기다리고 있다가 길가는 사람을 가로막고 소ㆍ말과 돈을 빼앗은 다음 그 사람을 찔러 죽임으로써 증거를 없앤 자가 도적인가? 아니다. 이는 단지 본성(本性)을 잃은 어리석은 자의 소행일 뿐이다. 수놓은 언치를 깐 준마를 타고 하인 수십 명을 데리고 가서 횃불을 벌여 세우고 창과 칼을 벌여 세운 다음 부잣집을 골라 곧장 마루로 올라가 주인을 포박, 재물이 들어 있는 창고를 전부 털고 나서는 창고를 불사른 다음 감히 말하지 못하도록 거듭 다짐을 받는 자가 도적인가? 아니다. 이는 단지 배우지 못한 오만한 자일 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도적인가? 부신(符信) 주머니를 차고 인수(印綬)를 띠고서 한 성(城)이나 한 보(堡)를 독차지하고 온갖 형구(形具)를 진열해 놓고 날마다 춥고 배고파 지칠대로 지친 백성들을 매질하면서, 피를 빨고 기름을 핥는 자가 도적인가? 아니다. 이는 비슷할 뿐이요 역시 작은 도적이다.
큰 도적이 있다. 큰 깃발을 세우고 큰 양산을 받치고 큰 북을 치고 큰 나팔을 불면서 쌍 말의 교자(轎子)를 타고 옥로(玉鷺)가 달린 모자를 쓰고 있다. 그리고 종자(從者)는 부(府) 2인, 사(史) 2인, 서(胥) 6인, 보졸(步卒)이 수십 인, 하인과 심부름꾼과 졸복의 무리가 수십 수백 명이다. 여러 현(縣)과 역(驛)에 안부를 묻고 영접하는 아전과 하인이 수십 수백 명, 기마(騎馬)가 1백 필, 복마(卜馬)가 1백 필, 아름다운 의복을 입고 예쁘게 화장한 부인이 수십 명, 동개에 넣은 화살을 짊어지고 행렬의 맨 앞에 서서 가는 비장(裨將)이 2인, 맨 뒤에 가는 사람이 3인, 따라가는 역관이 1인, 말 타고 따라가는 향정관(鄕亭官)이 3인, 부신(符信) 주머니를 차고 끈을 늘어뜨린 채 숨을 죽이면서 말 타고 따라가는 사람이 4, 5인, 붉기도 하고 희기도 한 족가(足枷)와 뭉둥이를 포개어 싣고 가는 자가 4인, 등에는 횃불을 지고 손에는 청사초롱을 들고 대기하고 있는 사람이 수백 인, 손에는 채찍을 쥐고서 백성들을 호소하지 못하게 하는 사람이 8인, 길가에서 보고 탄식하고 부러워하는 사람이 수천 명이다. 이르는 곳마다 화포(火礮)를 쏘아 사람들을 놀라게 하여 태뢰(太牢)를 갖추어 올리는 사람이 넘어지고, 한번의 식사에 혹시라도 간을 잘못 맞추었거나 음식이 식었거나 하면 담당자를 곤장치게 하니, 곤장치는 사람이 모두 10여 인이나 된다. 일일이 죄를 들어 다음과 같이 책망한다.
"길에 돌이 있어서 내 말이 넘어졌다."
"떠드는 것을 금지시키지 않았다."
"영접하는 부인이 적었다."
"병풍과 대자리와 돗자리가 볼품없었다."
"횃불이 밝지 않고 구들이 따뜻하지 않았다."
좌정하고 나서는 서리(胥吏)와 졸사(卒史)를 불러서 여러 군현(郡縣)에 공문을 보내어 바칠 곡식을 돈으로 환산하여 바치도록 명하고 나서, 1곡(斛)의 값으로 1백 50냥을 바치면 노하여 꾸짖으면서 2백 냥까지 값을 올리게 한다. 그래서 곡식으로 짊어지고 오는 백성이 있으면 곡식은 받지 않고 돈으로 2백 냥을 물도록 한다. 다음해 봄에 2백 냥을 셋으로 나누어 그 중 하나를 백성에게 주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1곡(斛)의 곡식 값이다."
바닷가에는 부상(富商)과 대고(大賈)가 많아서 곡식 값이 폭등하면 광[窖]에 저장했던 곡식을 모두 내어다 팔아 돈을 만들고, 산 고을에는 곡식이 많아 썩으면 이를 싸게 사서 창고에 저장하고 노적(露積)도 하게 된다. 이에 곡식이 다리가 생겨서 하루동안에 백 리를 달리게 되고 7일이면 7백 리를 달려가서 바닷가에까지 가게 된다. 바닷가에 사는 주려서 지친 백성들은 고달픔을 견디다 못해 아내와 자식을 팔면서 피거품을 토하다가 잇달아 쓰러져 죽게 된다. 그러고 나서 남은 돈을 계산해보면 수천 수만 냥에 달한다.
묘지(墓地)에 대해 송사하는 사람은 유배시킨다. 영장(令長)이 가혹한 정치를 한다고 호소하면 유배시키고, 그 벌금(罰金)은 40냥에서 1백 냥까지다. 병든 소를 도살한 사람은 유배시키고 그 벌금은 30냥에서 1백 냥까지다. 이렇게 해서 남은 돈을 계산해 보니 수백 수만 냥에 달한다.
토호(土豪)와 간리(姦吏)들이 도장을 새겨 위조 문서를 만들고 법률 조문을 멋대로 해석하여 법을 남용하면,
"이것은 못 속의 물고기이니 살필 것이 못 된다."
하면서, 감싸 숨겨준다. 효도하지 않고 우애하지 않고 아내를 박대하고 음란한 짓을 하여 인륜을 문란시킨 사람이 있으면,
"이것은 말을 전하는 사람이 잘못 전한 것이다."
하면서, 전연 모르는 듯이 지나쳐 버린다. 부신(符信) 주머니를 차고 인끈을 늘어뜨린 사람이 곡식을 판매하고 부세(賦稅)를 도적질한 것이 이상과 같은데도 이를 용서하여 보존시킴은 물론, 등급을 정할 적에도 제일로 매겨 임금을 속인다. 이런 사람이 어찌 큰 도적이 아니겠는가. 큰 도적인 것이다.
이 도적은 야경(夜警) 도는 사람도 감히 따지지 못하고, 의금부(義禁府)에서도 감히 체포하지 못하고, 어사(御使)도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재상(宰相)도 감히 말하지 못한다. 그래서 멋대로 난폭한 짓을 해도 아무도 감히 힐문하지 못하고, 전장(田庄)을 설치하고 많은 전지를 소유한 채 종신토록 안락하게 지내지만 아무도 이러쿵저러쿵 헐뜯지도 못한다. 이런 사람이 어찌 큰 도적이 아니겠는가. 큰 도적인 것이다. 그래서 군자(君子)는 이렇게 말한다.
"큰 도적을 제거하지 않으면 백성이 다 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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