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 濟

백제 문화---대백제 자료관

吾心竹--오심죽-- 2009. 4. 2. 11:59

Baekje Culture

의식주생활FOOD, CLOTHING AND SHELTER

  • 의복생활
  • 식생활
  • 주거생활
백제의 생활

개요

백제인들의 사회생활를 알기 위해서는 다각적인 관찰과 연구가 필요하다. 그러나 백제사회에 관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자료가 거의 없는 지금 「삼국사기」나 「北史(북사)」, 「魏志(위지)」, 「後漢書(후한서)」 따위의 역사서에 단편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다. 백제는 일찍부터 활발한 무역활동을 했다.
백제인의 무역은 세가지 형태로 이루어 졌는데 하나는 개인의 단위로 또 하나는 지방행정단위, 즉 군현단위로 마지막 하나는 중앙의 국가사절 단위로 이루어졌다.
이처럼 교류가 다양하고 빈번했던 백제인들의 성명은 두자, 석자, 넉자 등 다양하게 되었다.그 밖에 예절을 중시한 백제인들은 관·혼·상·제례 등의 의식을 비롯하여 사회 생활의 기본이 되는 예절을 중시하였다. 그 중 인사법과 길거리 예절이 엄격했으며 관례에 해당되는 성년식은 매우 혹독한 과정을 치루게 하였다. 또 일찍이 干支(간지)를 사용했던 백제시대에는 오늘날 세시풍속과 유사한 점이 많았다. 즉, 백제인들은 설날, 중추절 이외에는 伏日(복일), 臘日(납일)을 지켰다.
또 소와 말, 닭은 물론 매를 길러서 농사와 사냥에 이용했는가 하면 명절등 농한기 때에는 여러 가지 놀이와 게임등을 즐기었다.

백제의 의생활

백제의 복식

백제시대의 의생활은 고구려나 신라와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馬韓시기의 사정을《後漢書》를 통해서 살펴보면 귀금속을 중히 여기지 않았으며, 화려한 구슬 장식을 하였다.
또한 상투를 틀고 베로 만든 도포와 짚신을 착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당시에 벌써 직조기술이 발달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며, 특히 가죽옷을 그대로 입는 원시적 복식단계는 이미 끝나고 본격적인 길쌈활동과 함께 복식문화가 정착했음을 알 수 있다.
마한의 토착사회에서 직조와 양잠을 통한 복식문화가 어느 정도 발달한 단계에서 온조집단이 내려옴으로써, 새로운 복식형태도 유입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夫餘條를 볼 경우 흰베로 만든 큰 소매가 달린 도포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고, 외국에 나갈때는 비단옷과 수놓은 옷, 그리고 화려한 모직옷을 입는다는 기록으로 볼 때 옷감에 다양한 치장과 繡를 놓은 화려한 옷을 입었다고 한다. 그러나 백제의 복식은 그 흔적을 확실시켜줄 만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고구려의 고분벽화나 梁 職貢圖를 참고할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 먼저 왕족의 복식을 보면《三國史記》의 古爾王條에 나오는 기사가 참고 된다.

이 기록에 의하면 자색의 옷은 왕이하 6품이상만이 입을 수 있으며, 또한 금꽃으로 장식한 오라관과 흰 가죽띠, 그리고 검정 가죽신을 신고 정사를 담당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으로 백제의 정식복장을 엿볼 수 있다.
官人階級의 복식으로는 古爾王 27년에 령을 내려 정한 것이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은 옷의 색만을 규정한 것이라는 점에서 전체적인 면을 알기는 어렵다. 그 기록을 보면 6품이상은 자색옷을 입고 은관을 장식하며, 11품이상은 붉은 옷을, 16품이상은 푸른옷을 입게 하였다.
이러한 기록은 백제가 국가적인 체제를 완전히 갖추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신라에 비해 약 2세기 정도나 앞서 이러한 公服制度를 정비하였다는 것이라는 점에서 백제문화의 선진적인 면을 엿볼 수 있다. 한편 평민에게는 帶의 착용을 금지하고, 緋紫色을 평민의 복색으로 사용할 수 없게 하는 금계로 보아 官人과 平民의 차이를 두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上衣

상의로는 두루마기(袍)와 저고리로 나누어진다. 이 두루마기는 기록상으로 소매가 넓었다고 하는데, 고구려 고분벽화를 참고로 할 경우 그 형태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백제는 고구려의 복식과 같다는 기록을 참고로 할 때 큰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저고리는 남녀가 공동으로 착용했다고 보는데, 삼국시대에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것처럼 길며 소매는 筒袖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저고리에는 선이 깃과 여밈, 袖口, 端 등에 둘려져 있었다.

下衣

하의는 바지와 치마로 나눌 수 있다. 이것도 역시 고구려의 복식과 같았다고 하는《隋書》의 기록으로 볼 때 고구려의 고분벽화에 나오는 복장을 참고로 할 수 밖에 없다.
먼저 梁職貢圖를 보면 大口袴를 착용한 것으로 생각되며,《唐書》에는 靑錦袴의 표현이 있다. 대구고는 바지단에이 돌려져 있는 것으로 통은 넓지만 길이가 짧은 형태이다.
치마는 裳과 裙이 있었다고 하는데,《北史》의 高句麗條를 보면‘夫人裙 加 '이라고 하고 있어, 여자들만이 裙을 입고 남자는 裳을 입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구려의 고분벽화에 나온 것을 보면 여자들은 치마 뿐만 아니라, 바지도 병행해서 착용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쌍영총에 나오는 세여인의 경우 주름이 치마 밑까지 길게 내려오는 긴치마를 입고 있다. 고신라 출토 여자 토우의 경우에도 주름모양의 긴치마를 입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어 삼국시대 여성들이 입었던 일상복으로 생각된다.

裝身具

먼저 문헌에 나타나고 있는 백제의 관련기사는『周書』,『新唐書』,『三國史記』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이 외에도《北史》·《梁書》·《魏書》·《南史》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이들 기사는 귀족이나 六品에 해당되는 奈率 이상의 관리들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관식의 쓰임새를 확인하기 어렵다.
그런데《隋書》의 高句麗條를 보면 백제의 일반인들의 관식은 가죽으로 만든 관을 사용했다는 점과 귀족층들만이 금은으로 만든관을 사용했다고 해석된다. 특히 붉은 비단으로 관을 만들어 금은으로 장식했다는 견해는 현재 출토된 武寧王陵의 왕과 왕비의 관식으로 볼 때 그 쓰임새를 어느 정도 짐작할수 있다. 이러한 관식과 달리 羅州 瀋南面 新村里에서 출토된 금동관을 보면 透刻草花形立飾이 있어 고구려의 기록처럼 붉은 비단으로 관을 만들어 사용했다는 것과는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이외에도 금제뒤꽂이이나 銀簪, 耳飾, 頸飾, 釧, 指環, 帶金具, 腰佩, 飾履 등이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바 있다. 이중에서도 귀걸이는 宋山里 8號墳과 牛禁里 1號墳, 公州 熊津洞 8號墳 등에서도 출토되었다. 팔찌로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記銘팔찌가 주목되는데, 내면에‘庚子年二月多利作大夫人分二百州主主耳'라고 음각되어 多利라는 장인이 팔찌를 제작하여 왕비에게 받쳤다는 기록을 확인하였다.
한편 가죽관 등과 같은 방한용 관모도 착용했을 것으로 생각되며, 도 많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주로 고구려 관원들이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백제사신도에서 사신의 머리에 쓴 것도 책의 형태로 추정되고 있어 백제에서도 유행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의식주생활FOOD, CLOTHING AND SHELTER

  • 의복생활
  • 식생활
  • 주거생활
백제의 식생활

백제의 식생활과 관련된 기록이나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때문에 백제 당시의 식생활을 복원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다른 국가와의 비교검토를 통해서 그 일면을 살필 수 있다. 백제를 건국한 이들은 고조선이라는 연맹체 국가의 일부로 구성하고 있었던 고구려와 함께, 오랫동안 만주 북쪽에서 패자로서 존재해 있었던 부여의 한 갈래로서, 이들은 냉혹한 북방 기후 조건에 순응해 살면서 각종 저장 음식으로 추운 겨울을 견디어 낸 저장과 가공 식품이 발달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백제 역시 저장 및 가공 식품이 발달하였는데 이러한 식생활의 모습이 백제멸망 후에도 우리민족에 반영되어 현재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오곡과 곡식

중국의 역사서인 『주서(周書)』, 백제전에는 ‘오곡과 각종 과일·채소 및 술·음식·반찬·의약품은 거의 중국과 같다’고 하였으며,『위서(魏書)』에는 백제의 음식은 고구려와 같고 오곡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오곡이란 기장, 차조, 보리, 메조, 콩의 다섯 가지를 일컫는데 쌀은 별개이다. 고대 삼국의 식생활에 이용된 곡식은 대략 동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 초기에는 메조와 콩 등을 주식으로 하였으나, 다루왕 6년(AD 33년)에 백제 남쪽의 주군(州郡)부터 도전(稻田)을 실시함으로써 쌀농사의 발달과 함께 쌀이 서서히 주곡식으로 대체되어갔다. 이러한 모습은 고고학적으로도 나타나는데 파주 주월리에서 출토된 조, 단양 애곡리 유적에서 출토된 밀·팥, 단양 수양개 유적 출토의 밀·녹두·팥·보리·콩 등은 한반도의 고대농업에서의 다양한 작물재배 모습을 잘 보여준다.

종류 이름
식물 곡물류

쌀, 보리, 밀, 기장, 조, 피, 메밀, 콩, 팥, 깨, 녹두, 마

나물·채소류

아욱, 고사리, 미나리, 참나물, 기름나물, 근대, 백합, 쑥, 달래, 냉이, 무, 박, 가지, 토란, 칡, 오이, 마늘, 부추, 파, 상추, 연근

과일류

감, 개암, 밤, 도토리, 호도, 대추, 복숭아, 살구, 가래, 참외, 배, 사과, 머루, 포도, 수박, 잣

동물 수류

개, 소, 말, 돼지, 맷돼지, 사슴, 노루, 토끼, 여우, 염소

조류

닭, 오리, 뀡, 참새, 기러기, 비둘기

어류

조기, 돔, 농어, 복어, 준치, 민어, 숭어, 정어리, 방어, 청어, 대구, 넙치, 가오리, 갈치, 멸치, 양태, 상어, 고래, 게, 잉어·미꾸라지를 비롯한 민물고기

패류

굴, 바지락, 고등, 우럭, 백합, 조개, 소라, 꼬막, 홍합, 전복, 대복


[백제인의 식재료 - 김기섭,「백제인의 식생활 시론」,『백제연구』37, 충남대 백제연구소, 2003 ]


조리

백제인들은 다양한 재료를 통하여 조리를 하였으나 일반적으로 동물류 보다는 식물류의 식재료를 더 많이 사용하였고, 불에 굽거나 푹 삶는 조리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곡물류를 가공함에 있어서는 대개 찜·죽·밥이 많았다. 찜은 시루를 이용하여 조리하는 것인데 백제에서 3~4세기 무렵에 심발형토기에서 장란형토기로 토기가 변화하는 모습이 보여진다. 장란형토기는 시루를 이용한 조리에 짝을 이루는 토기로 이 무렵 백제는 농업생산력의 증가 등으로 찜 요리가 증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백제의 상류층에 해당하는 조리였다. 평민은 주로 죽이나 밥을 지어먹었는데, 토기를 조리용기로 사용한 경우에는 흙냄새를 없애기 위해 향신료를 많이 사용해야 했으므로 4세기에 이르러 쇠솥이 등장하게 되었다.
6세기 중엽에는 백제 상류층의 식생활에 큰 변화가 일어나는데 불교의 영향으로 살생금지령이 선포되는 등 육식을 금하는 사회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때문에 채식이 널리 행하여졌는데 『수서(隨書)』에 “불을 쓰지 않는 음식이 많다.”는 기록은 이러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저장

풍납토성 출토 가-3호 주거지에서는 직경 1.4m의 원형 저장구덩이가 발견되었는데, 이 저장구덩이의 내부에는 꼭지가 달린 뚜껑 7점이 출토되었다. 집안에 저장하기 위해서 집자리 바닥을 둥글게 구덩이를 판 다음, 큰 항아리를 묻고 그 속에 곡식을 보관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저장구덩이에서 발견된 지름 11.2cm, 17.6cm, 18.4cm, 20cm, 20.4cm, 25.5cm 등으로 구성된 뚜껑의 크기로 미루어 살펴보았을 때 대략 15cm에서 90cm정도의 높이를 지닌 항아리를 덮었던 뚜껑이다.
이 항아리에는 다양한 곡식을 저장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풍납토성의 주거지에서는 내부에 탄화된 곡물이 들어있는 항아리도 출토되고 있다. 곡식의 일부는 겉 껍질이 붙어있는 채로 살짝 태워서 저장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적으로 청동기 시대의 유적에서 발굴되는 쌀은 대부분 불에 탄 상태로 있었다. 쌀을 장기간 저장하기 위해서 벼에 불을 놓아 수증기를 탈취하고 건조상태를 유지하여 해충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백제와 같은 시기인 북위시기에 쓰여진 산동(山東)의 농서인 제민요술에는 저장 구덩이에 오곡을 저장할 때, 이삭을 태우는 ‘집맥법(集麥法)’을 실시하여 탈곡해서 수납하면 벌레가 들지 않는다고 기록하였다. 이와같이 당시의 곡식저장은 이삭을 살짝 태워저장하는 것이었다.

 

 

 

 

의식주생활FOOD, CLOTHING AND SHELTER

  • 의복생활
  • 식생활
  • 주거생활
백제의 주생활

서민주택

서민의 가옥에 대해서는 고고학적인 주거지에 대한 발굴성과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다만 주거기록이『後漢書』,『晋書』,『隋書』,『北史』등의 중국문헌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 기록에 의하면 마한시대에 서민들의 주거양상은 움집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주거지 발굴에서 보듯이 가운데의 화덕자리를 중심으로 기둥을 세웠던 흔적이 주위에 배열되어 있는 형태이다. 또한 출입문이 위쪽으로 나있다는 것은 움집의 형태를 그대로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움집의 주거형태는 백제시대에 들어와서도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다만《隋書》나《北史》등의 기사내용으로 볼 때 주거지의 선정에 특이성을 나타내고 있다. 즉 산에 거주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높은 산의 개념이 아니라, 구릉지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한 듯하다. 백제와 관련한 기사는 이런 내용으로 한정되지만, 고구려에 대해서는 좀더 자세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三國志》의 기록은 고구려에는 큰 창고보다는 작은 창고가 집집마다 있다고 하며, 혼인을 할 때 사위를 위한 壻屋을 본채의 뒤에 세워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京이라고 불리는 창고는 각 집마다 곡식창고 등으로 사용되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또한 서옥이라고 하는 같은 일종의 별채를 말하는 듯한데, 본채와 따로 사위가 기거할 작은 주거공간을 새로이 짓는다고 하는 관점에서 본다면 고구려의 주택은 독채이기보다는 여러채가 모여 하나의 주거공간을 형성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舊唐書》에 의하면 주거지의 선정은 산골짜기를 고르며, 일반 서민주택은 초가로 지붕을 잇고, 사찰과 조상묘, 그리고 왕궁과 관부 등만 기와를 얹는다고 하였다. 이러한 지붕의 차이는 관직에 따른 복식의 차이와 마찬가지로 계급간의 주거차이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특히 겨울철에는 구덩이를 길게 파고 밑에 숯불로 방을 덥게 한다는 기록은 현재의 온돌의 구조와 사용법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볼 때 백제의 서민주택은 움집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부분적으로 구조의 발전을 보여 온돌을 깔은 주택으로까지 변화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외에도 신라에 부뚜막의 존재를 알려주는 기사가《新唐書》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도 백제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예로 고구려에서 출토된 집모양토기나 화덕(운산 용호동 1호분) 등은 그 당시의 주거문화를 추정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궁궐

백제의 궁궐은 기록상으로 漢城과 熊津, 그리고 泗 에 각각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三國史記』에 의하면 백제시대의 왕들 중에서도 동성왕과 무왕, 그리고 의자왕이 궁궐의 증개축에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온조왕 이외에 이들의 궁궐 축조는 화려함이 극에 달하였는데, 이것은 일종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蓋鹵王은 고구려의 장수왕이 꾸민 계략에 속아 道琳이라는 중의 말을 따라 궁궐과 성을 증축하여 국고를 탕진하게 된다.
궁의 남쪽에 연못을 만들고 물길을 이십여리나 끌어와 섬을 만들고 方丈仙山에 비기었다고 한 무왕의 대목에 이르러선 연못의 치장을 통해 神仙의 世界를 재현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백제의 궁궐건축은 매우 화려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건축술도 뛰어났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외에도 귀족계급이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벼루(陶硯)와 虎子, 便器 등도 궁궐건축과 관련한 가구의 일종으로 주목된다. 현재까지 호자와 변기는 부여 군수리에서 출토된 예가 유일한다.

 

 

 

  • 농경생활
  • 어로생활
  • 수렵생활
백제의 농경생활

백제지역은 광활한 평야지대를 끼고 있어 벼농사가 다른 지역에 비해 발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철기를 바탕으로 한 농기구의 보급은 농업의 생산력을 증대시키는 결과를 야기하였으며, 가축의 이용을 통해서 보다 확대된 농토의 경작도 가능했다.
무엇보다도 백제지역은 하천이 발달하였기 때문에 관개수리 시설을 개발하는데 보다 효율적 이었던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김제의 벽골제를 들 수 있다.
백제의 농경생활에 대한 기록은 중국문헌과『三國史記』에 나오고 있다. 이들 기록에 의하면 삼한시대부터 농사를 시작하였으며, 오곡과 채소 등이 나온다는 것을 보아 이 당시에는 주로 밭농사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가축으로 소와 돼지 닭을 길렀다는 것도《隋書》에 나온다. 이런 사실들을 통해 마한시대에 벌써 농경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시대에 들어와 다루왕 때 도전을 시작하였다는 기록과 구수왕 때 제방을 고치고 농사를 권장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시기에 논농사가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백제시기에 灌漑와 治水를 위한 공사가 자주 기록되고 있다는 점은 제방을 축조할 수 있는 토목기술이 어느 정도 수준에 올라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백제의 농사형태를 실제로 접할 수 있는 자료는 철제 농기구를 들 수 있다. 연산 지방의 유적에서는 철제공구가 출토되었고, 扶餘 扶蘇山城에서는 쇠낫(鐵鎌) 등이 출토된 바 있다.
이러한 철기시대의 철제 농구는 삼국시대에 들어와 보다 개량되고 농사에 효율적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형태적인 변이도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소를 이용한 보습의 사용은 괭이를 이용하는 것보다 몇 배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점차 농업 생산력의 확대를 이루게 되었다.
따라서 철제농구가 고대국가의 초기에 국가통제권 하에서 생산되고 사용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몽촌토성이나 구의동유적에서 출토된 예에서 처럼 무기와 함께 농구가 함께 나온다는 점은 個人私物적인 의미보다는 官이나 공동관리 하에서 사용되었음을 추정하는데 도움을 준다.

 

 

 

 

생산활동PRODUCTION ACTIVITY

  • 농경생활
  • 어로생활
  • 수렵생활
백제의 어로생활

백제시대에 어로를 어떤 방식으로 하였으며, 어떤 종류의 고기를 잡았는지를 알 수 있는 기록은 거의 없다. 다만 東沃沮에서 魚·鹽·海中植物 등을 관리하여 고구려까지 나르게 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일찍부터 물고기류의 포획과 해초류의 채집작업을 실시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외에도 濊에서는 바다에서 바다표범을 잡아 가죽을 사용한다는 기록도있어 근해에서의 어로작업이 활성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어업의 형태를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으로는 魏書 東夷傳의〈倭人傳〉에 잠수하여 어패류를 채취하는 사람들은 물에 들어가기 전에 몸에 문신을 하여 大魚와 水禽으로부터 보호를 받고자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문신의 형태는 결국 주술적인 행위로써 바닷속에 들어가서 작업하는 잠수과정에서 海獸 등으로 부터 해를 당하는 것을 방지하려는 의도를 지닌 것이다.
이외에도 濟州島에서 배를 타고 왕래하며 육지와 물건을 사고 판다는 기록이〈韓條〉에 나타나고 있어 이미 항해술이나 원시적인 선박에서 발달한 어선을 갖고 해안을 다니고 있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
백제시대에 들어와서는《北史》에 중국의 晋·宋·齊·粱에 조공을 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나고 있고,《隋書》에도 여러번 조공을 올린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北魏의 獻文帝는 백제의 조공을 흡족하게 여겨 사신을 백제사신과 함께 백제로 보냈다. 특히 그 기록은 백제에서 해산물을 보냈다는 내용까지도 담고 있어 백제의 해안지방에서도 다양한 해산물이 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백제가 바로 서해를 건너 直路를 개척한 것으로는 보기 어려우며, 해안을 따라서 중국으로 건너갔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 발굴된 부안 죽막동의 제사유적은 그런 점에서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제사유적으로서 주목되는 것이다.
또한 東城王 11年에 '國南海村人獻合 禾'이라는 기록으로 볼 때 백제시대에도 漁村이 형성되어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다만 어촌이라고 하여 고기만을 잡은 것이 아니라, 농사도 병행하였다는 흔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어업보다는 농업에 치중한 흔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생산활동PRODUCTION ACTIVITY

  • 농경생활
  • 어로생활
  • 수렵생활
백제의 수렵생활

《三國史記》 《 百 濟本記》의 기록에 나타난 수렵행위들은 모두 왕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다만 수렵을 금한 것은 법왕 때에만 해당된다는 점에서 불교에의 귀의가 깊었음을 알 수 있다.
수렵에 대한 왕들의 관심은 특히 辰斯王과 東城王 대에 뚜렷한데, 진사왕은 수렵을 나가서 행궁에서 죽었을 정도이다. 이것은 정사를 돌보지 않고 수렵에만 빠져 있다는 점에서 역시 왕위찬탈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초창기에 왕의 수렵은 주로 국가제사에 바칠 제물인 神鹿을 잡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점차 수렵에 빠져들어 毗流王과 阿莘王은 궁 주변에 射臺까지 만들어 사격연습을 할 지경에 이른다.
이외에도 鷹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는 점에서 매사냥이 성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특히 법왕은 매사냥에 필요한 매를 놓아 주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당시의 귀족층들이 매사냥에 탐닉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겠다.

 

 

 

 

전통신앙TRADITION FAITH

개요

무교를 비롯한 전통신앙은 한국 종교사상의 흐름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온 것이라기 보다는 그 저변이나 외곽을 이루어 왔다.
비록 신념체계가 논리적이지 못하고 신비적·주술적이며 현세이익을 위주로 하는 것이지만, 유교나 불교 등 외래 고등종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한국인의 생활 습속 의식구조의 많은 부분을 지배해왔다.백제인의 정신세계를 오랫동안 지배한 전통신앙 중의 하나는 샤머니즘이다. 샤머니즘은 동아시아 세계일대에 널리 퍼진 원시종 교현상이었는데 개인의 일상생활을 규제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형성 초기에 지배이념을 제공해주었다. 샤머니즘의 기원은 신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백제초기에는 그것이 정치 사회면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었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의하면, 마한 (馬韓)은 귀신을 믿어 국읍(國邑)에는 각기 한 사람을 뽑아 천신(天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는데 이를 천군(天君)이라 했다. 이 천군은 샤먼의 계통을 이어받은 제사장의 성격을 띠는 인물로 초기 국가사회에 들어와 그 비중이 커진 사회(社會)의 공동의식을 주재했다. 또한 동이전에는 삼한 (三韓)의 별읍 (別邑)에 소도(蘇塗)신앙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읍락공동체(邑落共同體)를 중심으로 하여 행해지던 부락제(部落祭)에서 기원한 것으로 국가 권력의 커지면서 제천의례(祭天儀禮)로 승화되었다. 또한 삼한사회에 5월과 10월에 각기 계절제(季節祭)가 행해졌는데 이는 농경의례(農耕 儀禮)의 성격이 강한 제천의례(祭天儀禮)였다.
백제는 고구려 신라와 달리 부여계의 유이민 집단이 건국하였다. 따라서 주몽이나 혁거세와 같은 천강난생(天降卵生)설화가 없고 고구려 5 부족 신라의 6부족과 같은 토착민이 없다. 시조 온조왕(溫祚王)은 고구려 시조 주몽의 아들인양 설명되어 왔고 실제 온조왕은 한성(漢城)에서 즉위하자마자 동명왕묘(東明王廟)를 세웠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국왕이 즉위한 이듬해 정월이면 동명왕묘에 참배하였고 큰 가뭄이 들때면 이것을 찾아 기우제(祈雨祭)를 행하였다. 그런데 정작 건국자인 온조왕묘나 비류왕묘에 대한 기록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 백제왕실에 서 주몽이 온조나 비류보다 숭배된 사실을 말해준다.

백제의 전통신앙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정천(井泉)신앙 혹은 용신(龍神)신앙이다. 샘물 혹은 하천(河川)에 대한 신앙은 고대 중근동(中近東)지방이나 중국에서 유행하였는데 이는 수신(水神)을 곡물(穀物)이나 천지(大地)의 창조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사회와 자연을 통합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백제의 설화 중에는 시조 혹은 한인(偉人)의 탄생 및 수태(受胎)가 정천(井泉) 혹은 하천(河川)과 결부됨을 보여준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무왕의 어머니는 도성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못 속의 용(龍)과 관계한 뒤 무왕을 낳았다고 한다. 용은 물과 가장 관련이 깊은 동물이다. 용은 한민족이 만들어낸 상상의 동물인데 일찍부터 용신(龍神) 용왕(龍王)에 대한 신앙이 고려에 전해졌다. 한성시대(漢城時代) 도성의 방어시설로 짐작되는 풍납성(豊納城) 토성의 본래 이름이 사성(蛇城)이고 부여 능산리(陵山里)에서 나온 6세기 후반의 용봉향노(龍鳳香爐)를 볼 때 용신신앙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무왕설화은 백제왕실이 중국의 용사(龍蛇)설화를 수용하여 고구려 시조신화에 의존해 온 종래의 태도를 바꾸어 왕실을 정통성을 부여하고 새로운 국가 신화를 만들어낸 것의 반영이 아닌가 추측된다.
또한 음양이나 무속과 관련된 기록이 후주서(後周書)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인다. 일자(日者)나 일관(日官)은 천체현상의 관찰과 해석 그리고 점후복무(占候卜筮)를 담당하는데 그러한 예가 백제에도 보이는 것이다. 후주서에 의하면 "백제는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술(術)을 풀이하고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참(讖)을 해석한 무당 역시 일관이다. 온조왕 25년(A.D.7) 봄 2월에 왕궁의 우물물이 갑자기 넘치고 한성인(漢城人) 집에 있는 말이 머리 하나에 몸이 둘 달린 소를 낳았다.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우물물이 갑자기 넘친 것은 대왕께서 발흥할 징조이며 소가 머리하나에 몸이 둘 달린 것은 대왕께서 이웃나라를 합친 징조입니다" 하였다. 왕이 그 말을 들고 기뻐하여 마침네 진한 마한을 합칠 생각을 하였다. 또한 백제(百濟)의 망도(亡兆) 예언에서 무속(巫俗)과 관련 된 예언이 나온다. 삼국사기의 의자왕 20년(660) 봄 2월에 한 귀신이 궁중으로 들어와 크게 부르짖기를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 하고 땅속으로 들어갔다. 왕이 괴이히 여겨 사람을 시켜 땅을 파보았더니 깊이 석자쯤 들어가서 한 거북이가 나왔는데, 그 등에 "백제는 둥근 달(月輪)과 같고 신라는 초생달(月新)과 같다"하였다. 왕은 이를 무(巫)에게 물었더니 그의 말이 "달이 둥글면 찬 것이니 달이 차면 이지러지고 달이 새로우면 차지 않은 것이니 차지 않은 것은 점점 차게 되는 것입니다" 하니 왕이 노하여 그를 죽였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월륜(月輪)과 같다는 것은 번성할 것이며,월신과 같다는 것은 미약함이니 우리나라는 성하고 신라는 침미(寢 微)할 것입니다"하니 왕이 기뻐하였다. 이처럼 무(巫)는 왕의 자문에 응하여 신의(神意)를 전하였다. 말하자면 백제시기의 무(巫)는 괴이한 현상을 설명하거나 보이지 않는 사실을 점치는 일을 행하였다.

 

 

 

 

유교CONFUCIANISM

개요

INTERVIEW - 아래의 인터뷰내용을 일반, 고음질을 선택하여 직접 들어보세요.
    • 이도학박사 56K 300K
realPlayer Download - 본 서비스는 리얼플레이어 8.0이상에서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중국문화를 수용하였고 유학을 받아들였다. 대략 한사군(漢四郡)설치 이래 한문화가 들어오고 유교의 예속이 널리 보급되었다. 교육기관이 있었고 역사서가 편찬되었으며 논어와 같은 주요 경전을 일본에 전하기도 하였다.
원래 漢字는 이미 백제 건국 이전에 전래되었다. B.C.2세기 말경에 진국(辰國)이 漢에 대해 직접 통교(通交)를 희망한 국서(國書)를 보낸 사실로 미루어 당시 외교문서를 작성할 수 있을 만큼 漢字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낙랑부(樂浪部)이 설치된 뒤에도 낙랑군과 인접해 있던 백제는 漢人들과 접촉하고 漢文를 흡수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한문이 사용됨에 따라 漢文學이 발달하게 되었다. 개로왕이 458년 남조의 송, 472년 북조의 북위(北魏)에 보낸 국서(國書)라든지 혹은 7세기 중엽 대좌평(大佐平) 사택지적(砂宅智積)의 발원으로 제작된 당탑(堂塔) 건립 비문(碑文) 등은 한문화의 수준을 대표하는 것이다.
이러한 한문화의 수용은 유교문화의 수용을 가능하게 하였다. 우선 백제는 유교식 예제나 윤리도덕을 수용하였다. 유교식 예제(禮制)인 혼례는 중국과 비슷하였고 상례(喪禮)는 고구려와 같았다. 부모나 남편이 죽으면 3년복을 입고 나머지 친족은 장사를 치르고 바로 복을 벗었다고 한다. 또한 백제에는 효와 충이라는 윤리에 충실한 많은 충신 효자를 배출하였다. 의자왕대 좌평 成忠은 죽음을 무릎쓰고 간언하였다가 옥사하였고, 階伯은 5천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백제의 사직과 함께 장렬히 전사하였다. 의자왕은 백제의 마지막이지만 부왕모후(父王母后)를 성심껏 섬기고 형제끼리 우애가 있어 그를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이러한 유교이념은 정치운영에도 반영되었다. 마한을 통합한 백제는 주례(周禮)에 입각한 통치체제의 정비를 기하였다. 주례(周禮)는 이상적인 유교국가인 주(周)의 정치체제를 정리한 유교 경전의 하나이다. 사비시대 재상을 선출할 때 후보자 3,4명의 이름을 적어 밀봉하여 뒤에 도장이 찍혀 있는 사람을 뽑었다는 금강 대안(對岸)의 바위를 천정대(天政臺)정사암(政事巖)이라고 하는데, 이 천정(天政)이란 주례(周禮)에서 연유한다. 주례 천관총제(天官 宰)조에 의하면 천관(天官)은 360관을 총섭(總攝)하는 최고의 관직이다. 그러므로 천정대(天政臺)란 그같은 천관(天官)의 정사(政事)를 수행하는 관부(官府) 혹은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다. 또한 사비시대에 5,6명의 좌평이 재상으로 내관(內官)과 외관(外官)을 합친 22개의 관청을 지휘 감독했는데 외관(外官) 10部 중에는 사도부(司徒部) 사공부(司空部) 사관부(司寇部) 사군부(司君部) 등 주례(周禮)에서 따온 것이 많다. 실은 좌평이란 명칭 자체가 주례의 하관(夏官) 사마(司馬)의 식장(職掌)을 설명하여 "이좌평(以佐平) 평방국(平邦國)"라 한데서 유래한 것이다. 문무백관의 관등은 좌평이하 16등급으로 정연한 체계를 이루었는데 그 명칭 또한 솔자(率字), 덕자(德字) 계열의 한식(漢式)으로 되어 있다. 이는 토착적 성격의 고구려 신라의 관등 이름과 다른 유교이념의 반영이 아닌가 한다.
주례(周禮)에 의한 백제의 정치사상은 천지에 대한 제사의례에서도 볼 수 있다. 백제에서는 동명왕묘와 더불어 천지에 제사하였다. 온조왕 38년 10월에 왕은 도성 남쪽에 대단(大壇)(일명 남단(南壇))을 쌓고 천지산천에 제사지냈다고 하는데, 역대국왕은 즉위한 정월에 동명왕묘를 참배한 다음 2월에는 천지에 대한 제사를 행하였다. 이때 왕은 친희 희생물(주로 돼지)을 칼로 베었으며 의식때에는 북과 피리를 사용했다. 이 제사를 거행할 때 이상한 새 다섯 마리가 날아들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또한 주서(周書) 백제전(百濟傳)에는 백제왕이 매년 사중(四仲)의 月에 천신(天神)과 오제(五帝)의 神을 제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천신(天神)은 마한시대 천군(天君)이 제사한 것이라기 보다는 중국의 사령(祠令)에 보이는 호천상제(昊天上帝)를 가리킨다. 오제(五帝)의 신은 오방신(五方神)을 가리키는데 이는 오방오행(五方五行)사상에 기원한 것이다. 그런데 천신(天神) 및 오제(五帝)의 신이란 본디 주례(周禮)의 제사 규정에 의거한 것으로, 유교경전에 말하는 국가의례를 실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백제에서는 유교이념의 구체적인 실현인 인정(仁政)이 행해지고 있엇다. 비류왕대 왕이 사람을 보내 백성의 괴로움을 묻어보게 하고 홀아비·과부·고아·자식없는 사람으로 자활할 수 없는 자에게 곡식 3석씩을 주도록 하였는데, 이는 {맹자}에서 말하는 천하에 의지할 곳없는 궁민(窮民)을 우선적으로 보살피라는 인정(仁政)을 받아들인 것이다. 또한 백제에서는 풍년과 흉년에 따라 세금을 차등있게 징수하였다고 하는데, 형벌을 덜고 세금을 적게 거두어들이는 것은 유교사상의 핵심이 된다. 백제에서는 정치이념으로서 유교를 채택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제의 교육제도에 관한 기사는 없다. 그러나 중국의 사서에는 문물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이를 통하여 유교에 입각한 학교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주서(周書)·북사(北史)·수서(隋書)의 백제전에는 "속중기사(俗重騎射)" 또는 "속상기사(俗尙騎射)"라고 쓰고 있다. 이는 고구려 국당( 堂)에서 미혼자제들이 습사(習射)한 것과 마찬가지로 예기에서 15세이상 성동(成童)이 되면 "학사어(學射御)"한다는 것과 부합한다고 하겠다. 중국의 역대사서들이 "겸애분사(兼愛憤史)"라거나 "독서사(讀書史)"라고 백제의 문물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백제에서도 교육제도가 보급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4세기 중엽인 근초고왕(345-375)대 박사 고흥이 {서기(書記)}를 편찬하였다.{구당서(舊唐書)} 백제전(百濟傳)에 의하면 오경(五經)과 제자(諸子)·역사(歷史)가 널리 읽혔다고 하고 표소(表疏)는 모두 중화의 법에 의하여 작성하였다(기서적유오경자사 우표소병의중화지법(其書籍有五經子史 又表疏幷依中華之法))고 한다. 또한 일본서기에 백제기·백제본기·백제신찬 등 백제 사서의 이름이 나오는 보아 사서편찬이 활발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성왕때에는 양(梁)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시경(詩經) 연구의 전문가인 모시박사(毛詩博士)를 보내주도록 요청하였고, 다시 양(梁)에 구례박사(講禮博士)를 청하에 예학에 이름 높은 육호(陸 )가 양(梁) 무제(武帝)의 명에 의하여 백제에 파견되기까지 하였다. 당시 양(梁) 나라에서는 예학이 크게 발달하였는데 육후는 최령은(崔靈恩)이 지은 {삼례의종(三禮義宗)}을 배운 예학의 권위자였다. 한편 근초고왕때 아직기와 박사인 왕인은 일본에 건너가 한문과 유학을 전하였는데 특히 왕인은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했다. 아직기와 왕인의 후예 씨족들은 대화(大和) 조정에서 문필을 업으로 하는 사직(史職)에 오랫동안 종사했다. 그 뒤 6세기초 무녕왕 때에는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와 고안무(高安茂)가 도일한 바 있으며, 성왕때에는 대화조정의 요청에 따라 오경박사인 마정안(馬丁安)과 왕유귀(王柳貴)를 보낸일이 있다.
백제는 중국의 문물을 신라나 일본에 전달하는 매개역할을 하였을것으로 보인다. 고흥이나 왕인이 맡았던 박사는 고대국가의 직능상의 관직으로 오경박사 가운데 하나로서 고구려 백제의 태학박사나 제업박사(諸業博士)와 유사한 것이다. 삼국의 박사제도는 한대 이래 발전되어온 중국의 박사제도를 수용한 것으로 백제에서는 고구려와 같이 율령국가 정비기에 시행한 것이다.
말하자면 백제는 한문학 뿐만 아니라 유교의 경전인 오경(五經)과 제자(諸子)·역사(歷史)가 수용되어 현실절치에 이용하였고 일본에까지 전래하는 유교문화의 성숙함을 보여주었다

 

 

 

 

도교TAOISM

개요

백제문화 또는 백제사상의 연원은 지리적 및 역사적 배경 때문에 독자성보다는 잡다성의 조화에 의하여 이루어 졌고, 여타의 종교사상처럼 도가사상에서도 그 독자성의 추출하기가 극히 곤란하다.

백제는 전신인 마한시대부터 이미 해상을 통해 중국과의 많은 왕래가 있었으며 마한문화의 기반위에 출발하여, 중국 남조(南朝)와의 직접적인 교섭을 가졌고 남조문물사상을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백제는 중국의 사상과 문화를 접할 수 있었고 이 과정에서 도교를 수용하였다.
삼국유사에는 사비시대에 일산(日山)·오산(吳山)·부산(浮山)의 3산(山)이 있어 산 위에 사는 신인(神人)이 조석(朝夕)으로 서로 날아다녔다는 설화가 있다. 또한 삼국사기 백제전에는 근초고왕 24(369) 백제를 침입해온 고구려군을 공격하던 장군 막고해는 승전의 여세를 몰아 북진을 계속하여 수곡성(水谷城)에 이르렀을 때 태자(근구수왕(近仇首王))에게 더 이상 추격하지 말 것을 건의하였다. 막고해는 도가의 말을 인용하여 "일찍이 도가의 말을 들으니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했습니다. 지금 얻은 것이 많은데 어찌 다시 구할 것이 있겠습니까"(상문도가지언 지족불욕 지지불퇴 금소득다의 하필구다(嘗聞道家之言 知足不辱 知止不殆 今所得多矣 何必求多))고 하였다. 전쟁 도중에 이렇게 자연스럽게 도가의 말을 인용할 수 있었던 것은 도가사상이 널리 퍼져있음을 보여준다.
무녕왕릉의 지석에서도 백제의 도교사상을 보여준다. 지석 끝에 음각된 매지문(買地文)에는 "부종율령(不從律令)"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도사들이 주문을 외울 때 마지막 대목에 으레 따라붙는 "극급여율령(急急如律令)"이란 구절을 백제식으로 고친 것이다. 이는 지석과 함께 출토된 두 개의 구리거울에 "의자손수대경(宜子孫獸帶鏡)과 방격규구신수경(方格規矩神獸鏡)의 명문에 "상유선인부지노(上有仙人不知老)"라는 문구와 함께 도교신앙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밖에 부여의 궁남지(宮南池)는 무왕 35년(634)에 물을 20여리나 끌어들여 만든 것이다. 못 언덕에는 사방에 버드나무를 심고 못속에 인공섬을 만들어 이를 신선이 살고 있다는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선산(方丈仙山)에 비겼다고 한다. 뒤에 못가에 망해루(望海樓)를 지어 궁중 연회장소로 이용했다. 당시는 삼국항쟁기로서 도교는 불교와 같이 백성들에게 안심입명(安心立命)의 위안을 주는 효과가 컸다. 더욱 불노장생(不老長生)과 현세(現世)에서의 부귀와 향락을 추구하는 도교는 삼국 중 가장 느긋한 마음으로 생의 여유를 즐긴 백제인의 기질에 잘 맞는 점이 있었다.

한편 1993년 부여 능산리 사지(寺址)에서 발견된 금동용봉래산향로(金銅龍鳳蓬萊山香爐)는 사비시대 도교신앙을잘 보여준다. 향로의 몸체를 덮고 있는 몸체를 덮고 있는 뚜껑부분은 삼산형(三山形)의 문양장식이 주조를 이루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다시 다섯 개의 산을 들리고 산꼭대기에 앉아 있거나 날아가는 새 모양을 조각해 놓았다. 바로 도교의 삼신산을 재현해 놓은 것이다. 이 향로는 사비시대 도교의 풍부한 상상력과 환상적 표현주의가 한껏 발휘된 최고의 명품이다.
더욱 근초고왕때에는 아직기 왕인을 시켜 역경 효경 논어 등을 일본에 보낼 때 산해경과 같은 도가류의 경전이 있었고, 무왕 초에 승려 관륵이 일본에 전해준 것 가운데 둔갑과 방술 같은 도교적인 잡술이 포함되었다. 일본에 전해줄 만큼 백제에는 도가사상이 널리 보급되고 있었던 것이다.
단 중국사서인 주서의 백제전에는 도사가 없다고 하였는데, 이는 독립된 종교로서의 도교를 주관하는 도사 즉 도교가 없었다는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백제는 고구려 신라와 더불어 유교·불교·도교 등이 삼교가 들어왔지만 도교의 종교화는 실현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백제의 도교는 고구려와 같이 뚜렷한 종교의 독립의 자취는 볼 수 없으나 도가의 오천언(五千言)이 널리 읽혀졌을 정도 널리 보급되어 있었다.
백제문화는 강한 전통의 계승이나 토착인 문화의 강고성보다는 외래문화에 대한 적극적인 이해와 기존문화와 신문화의 조화를 꾀하려는데 그 특성을 드러낸다. 이는 백제가 지정학적 위치 즉 북으로 고구려와 대결하고 동으로 신라와 대치해있으며 남으로는 일본과 통하고 서로는 중국과 교류하는 천하의 중앙에 위치했다. 따라서 백제는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에서 선진문화를 중국과 고구려에서 받아들이고 독자적인 문화를 만들며 신라와 일본에 전파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불교BUDDHISM

개요

백제에 불교(佛敎)가 전래된 것은 침류왕(枕流王)때에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東晋)으로부터 들어오게 되면서였다. 이때 왕은 그를 맞이하여 궁중에 두고서 예(禮)로서 공경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서울에 절을 짓고 승려 열명을 두었다. 이로부터 백제에는 왕실의 보호하에 불교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주서(周書)}에 "승려와 절과 탑(塔)이 매우 많다"고 한 것이 그러한 사실을 잘 알려준다.
이러한 까닭에 백제의 불교는 개인의 현세이익(現世利益)을 구제하는 것보다는 나라의 평안과 발전을 비는 국가불교(國家佛敎)로서의 성격이 더욱 강하게 나타났다. 이점은 웅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불사의 조영사실에서 알 수 있다. 35년에 걸쳐 조성되었다는 왕흥사(王興寺)를 하나의 예로 들 수 있다. 다음으로 백제의 불교가 계율(戒律)을 중시하였다는 점에서도 이해될 수 있다. 승려들이 지켜야 할 생활기준으로서의 계율을 강조하는 것은 곧 종교를 통한 인심(人心)의 귀일(歸一)이라는 정치적 의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이상사회(理想社會)를 희구하는 미륵신앙(彌勒信仰)이 유행하게 되는데, 이때의 국왕은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된다. 무왕(武王)이 익산(益山)에 세운 미륵사(彌勒寺)는 그 중심사찰이었다.
이렇듯 국가불교가 널리 성행하였지만 개인의 구제(救濟)를 위한 대중신앙(大衆信仰)도 널리 유행하고 있었다. 중생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때 관음보살(觀音菩薩)의 이름을 부르게 되면 즉시 달려와서 구제해준다는 관음신앙(觀音信仰),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있는 서방정토(西方淨土)에 왕생하고자 하는 미타신앙(彌陀信仰), 중생이 질병으로 인한 고통에 처해 있을때 이를 도와준다는 약사신앙(藥師信仰) 등이 그러한 예이다. 이상과 같은 백제의 불교는 이웃 나라인 일본에 전래되어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것은 현재 일본에 남아 있는 여러 유물들과 문헌에 나타나는 기록으로 미루어 충분히 알 수 있다.

불교의 전래와 국가불교(國家佛敎)로의 발전

백제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침류왕(枕流王) 원년(384)이다.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東晋)에서 오자 왕이 그를 맞이하여 궁중에 모시고 예의를 갖추어 공경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서울에 절을 짓고 승려 열명을 두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것은 불교가 전해진지 얼마 안되는 짧은 기간에 절을 짓고 백제인을 출가(出家)시키고 또 성직자까지 배출했다는 것에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침류왕 이전에 백제에 이미 불교가 전래되었을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백제때에 불교가 성행(盛行)한 사실에 대해서는 {주서(周書)}에 "승려와 절과 탑(塔)이 매우 많다"고 한 것과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아신왕(阿莘王)이 백성들에게 "불법(佛法)을 믿어 복(福)을 구하라"라고 하교(下敎)하였다고 한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백제에는 왕실의 보호하에 불교가 널리 퍼지게 되었음을 짐작하겠다.
백제에 전해진 초창기의 불교사상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다. 하지만 초창기인만큼 인과응보(因果應報)와 권선징악적(勸善懲惡的)인 내용과 종교적(宗敎的) 신성(神性)을 강조한 신이적(神異的)이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겠다.
백제불교의 한 특성으로 국가불교(國家佛敎)로서의 발전을 들수 있다. 그것은 대단위 규모의 사찰을 조영(造榮)한다는 것이다.
왕흥사(王興寺)의 경우 법왕(法王) 2년(600)에 일단 준공되었다가 그 뒤 35년간이라는 세월을 걸친 증측공사 끝에 무왕(武王) 35년(634)에 완성었다. 이 절은 무왕의 대외적인 웅략(雄略)의 웅지(雄志)가 어린 호국의 도량(道場)이었던 것이다. 왕이 이를 예불(禮佛)하려고 할 때에는 먼저 인근의 바위에서 부처를 경배할 정도로 신성시하였으며, 국왕의 임석하에 자주 행향의식(行香儀式)이 베풀어졌다.

계율의 성행과 승직제도(僧職制度)

계율(戒律)이란 몸(身)과 입(口)과 뜻(意)에 의해 생겨나게 되는 일체의 악(惡)을 방지하기 위해 불교에 귀의(歸依)한 사람들이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한다. 또한 계율은 성불(成佛)의 길에 들어가는 기본바탕이 되는 것으로 대승불교(大乘佛敎)에 있어서는 자신의 도덕적 자비의 방향을 실천하도록 하는 것이다. 계(戒)는 넓은 의미에서 볼 때 불교도덕이며, 율(律)은 출가자(出家者)만을 위한 통제규칙으로 정의된다.
백제에서 계율이 성행(盛行)하게 된 것에는 불교가 전래되던 초창기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본격적인 전파는 승려 겸익(謙益)의 활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는 인도에 유학하여 율부(律部)를 깊이 연구한 다음 성왕(聖王) 4년(526)에 귀국한 뒤, 왕명에 따라 국내의 승려 18인과 함께 역경사업(譯經事業)에 종사하였다. 이때 번역된 것이 율부 72권으로서 승려 담욱(曇旭)과 혜인(惠仁)은 율소(律疏) 36권을 저술하였다고 한다. 이로서 볼 때 백제에서는 계율학이 일찍부터 발전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성왕 스스로도 {비담신율서(毘曇新律序)}를 지어 계율의 실천을 강조했다.
이같이 전래된 백제의 계율은 중국을 거치지 않고 인도에 가서 경전(經典)을 직접 구해와 번역 보급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것은 백제의 계율이 중국과 고구려 신라에 전래된 것과는 다른 내용이기 떄문이다. 백제가 중국에 전래된 율전(律典)을 쓰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이후 백제불교는 율종(律宗)을 중심으로 커다란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계율의 학문적 발전과 더불어 실천도 강조되었다. 법왕(法王)이 전국에 교지(敎旨)를 내려 살생을 금지하고 고기잡이와 사냥에 사용되는 도구들을 없애게 하고 나아가서는 민가에서 기르는 날짐승까지도 놓아주도록 하였던 것이다. 비록 이것이 어느 정도까지 실천에 이르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당시에는 계율의 실천을 생활화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같은 불교계율의 강조는 백제에서 승직제도(僧職制度)가 일찍부터 발달하게 되었음을 생각케 해준다. 백성들이 계율을 생활화하고 있었으므로, 성직자인 승려들은 더할나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승려들을 감독하는 승직제도가 만들어져 운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백제의 승직제도에 대해서는 명백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나, 일본의 기록을 통해 추정할 수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추고천황(推古天皇)이 백제 승려 관륵(觀勒)을 승정(僧正)으로 삼아 비구(比丘)와 비구니(比丘尼)들을 검교(檢校)토록 했다는 사실에서 미루어 알 수 있다.

 

INTERVIEW - 아래의 인터뷰내용을 일반, 고음질을 선택하여 직접 들어보세요.
    • 윤덕향, 유원재교수 56K 300K
    realPlayer Download - 본 서비스는 리얼플레이어 8.0이상에서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미륵신앙(彌勒信仰)

    경전(經典)에 따르면, 미래의 말법시대(末法時代)에 미륵불(彌勒佛)이 도솔천(兜率天)으로부터 하생(下生)하여 인간세계에 태어난뒤 출가하고 수행하여 성불(成佛)한 뒤에 세 차례의 설법을 통하여 중생들을 교화(敎化)하여 이상사회(理想社會)로 이끌게 된다고 한다. 미륵신앙이란 미륵불이 이끄는 그러한 이상사회에 살 것을 기원하는 신앙이다. 경전에 설명된 미륵이상세계는 "온 세상이 오직 평화로워 도둑의 근심이 없고, 도시나 시골이나 문을 잠글 필요가 없다. 또 늙고 병드는 데 대한 걱정이나 물, 불로 인한 재앙이 없으며 전쟁과 가난이 없고, 짐승이나 식물로 인한 독(毒)과 해(害)가 없느니라. 또 서로 자비스런 마음으로 공경하고 자식이 어버이를 공경하듯, 어미가 아들을 사랑하듯, 언어와 행동이 지극히 겸손하니, 이는 다 미륵 부처님이 자비하신 마음으로 깨우치고 이끌어주시는 까닭이니라. 살생하지 않는 계행(戒行)을 지켜, 고기를 먹지 않으니 저 세상 사람들의 감관은 조용하고 평온하다({미륵대성불경(彌勒大成佛經)})." 라고 한 바와 같이, 중생들에게 있어 모든 걱정이 없는 사회다. 그러므로 이같은 미륵이상사회의 출현은 중생들에게 있어 더 이상 기대할 바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사회에서는 공경효애(恭敬孝愛)가 잘 이루어진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불교의 계율(戒律)이 잘 지켜지고 있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같은 미륵이상사회의 출현은 중생들이 계율을 잘 지켜서 평화로운 세상이 전개될 때에 비로서 가능하게 되는데, 그것은 또한 전륜성왕(轉輪聖王)이라는 훌륭한 왕이 다스리는 사회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따라서 미륵이상사회는 중생들의 계율수지(戒律受持)와 국왕의 통치 모두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백제의 불교에서 계율이 성행하게 된 것이 미륵신앙의 발전과도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겠다.
    백제때에 미륵신앙이 유행한 것은 일찍부터였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자세한 실상은 알 수 없다. 그렇더라도 무왕(武王)의 미륵사(彌勒寺) 창건 설화는 그것이 번성하였던 사실을 잘 알려준다.
    무왕이 부인 선화공주(善花公主)와 함께 용화산(龍華山) 사자사(獅子寺)의 연못가에 이르렀을때, 갑자기 연못 속에서 미륵삼존불(彌勒三尊佛)이 출현하였다. 이에 왕과 왕비는 수레를 멈추고 경배하였고, 이때 왕비가 그 곳에 큰 절을 지을 것을 소원한다. 왕이 이를 들어주기로 하였으나, 연못을 메워야 하는 큰 장애가 있었다. 그래서 그 일을 사자사에 있던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의논한 바, 법사는 신통력으로 하룻 밤사이에 산 한쪽을 허물어 연못을 메워 주었다. 그래서 그곳에 절을 조영하고는 미륵사라고 이름하였던 것이다.
    이상은 미륵사의 창건에 얽힌 설화의 대략이다. 당시에 건립된 미륵사는 지금은 많이 훼손되어 옛날의 모습을 잘 알 수 없지만, 발굴조사를 통해 그 모습을 짐작할 수 있으며, 설화의 내용과 일치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용화산 중턱에는 지금도 사자암이 남아 있어서 미륵사 창건 설화에 얽힌 연기(緣起)를 실감할 수 있다.
    이같은 미륵사 창건 설화에서 용화산은 미륵이 하생하여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한다는 것과 같은 뜻으로 볼 수 있으며, 세 개의 건물을 세웠다는 것 또한 미륵불이 3회에 걸친 설법(說法)을 통하여 중생을 교화한다는 사례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사자사는 미륵이 하생하기 전 도솔천에 있을 때 앉았다는 사자상좌(獅子床座)를 상징한 것으로 보고 있다. 무왕이 용화산 아래를 지나다가 미륵불의 출현을 목도하게 된 것은 전륜성왕이 미륵불의 처소에 나아가 설법을 듣는다고 한 경전의 기록과 같은 맥락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미륵사를 창건한 무왕은 바로 경전에 나오는 전륜성왕에 비길 수 있는 것이다.
    이같은 미륵사창건 설화를 통해 볼 때에 백제인들은 신앙공덕(信仰功德)으로 미륵불이 하생하고, 그래서 머지 않아 미륵이상사회가 도래(到來)할 것이라고 믿어왔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보아 백제인들은 매우 현실적인 신앙을 추구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관음신앙(觀音信仰)과 [법화경(法華經)] 신봉(信奉)

    관음신앙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일심(一心)으로 염불(念佛)하여 그 원력(願力)으로 현세(現世)의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영험(靈驗)을 얻고자 하는 신앙이다.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보살로서 대승불교(大乘佛敎)의 경전(經典)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이다. {법화경}에 따르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마음에 간직하고 염불하면 화재나 홍수의 위험에서도 이를 벗어나며, 칼과 몽둥이는 부서져 없어지고, 또한 중생의 마음 속에 있는 불안과 두려움을 제거할 수 있다고 한다. 여러 사례들을 살펴 볼 때 백제의 관음신앙은 대부분이 {법화경}의 내용에서 비롯되어졌음을 알 수 있다.
    승려 현광(玄光)은 지금의 공주(公州) 사람으로서 중국으로 건너가 불법(佛法)을 구하였다. 혜사(慧思)에게서 {법화경}의 내용을 수업 받고 법화삼매(法華三昧)를 증득(證得)하였으며, 스승으로부터 귀국해서 불법을 베풀으라는 가르침을 받들어 귀국하였다. 귀국도중 용궁(龍宮)에 들어가 설법하였으며, 고향 공주에 들어와 절을 짓고 교화(敎化)를 펼쳤는데, 제자들은 삼매(三昧)의 경지에 들어갔다고 한다.
    승려 혜현(惠現)은 어려서 출가한 뒤 {법화경} 독송을 한결같이 하였는데, 그가 기도함에 영험이 많았다고 한다. 만년에 그가 산 속에서 수도하다가 입적(入寂)하였는데, 그의 시신을 호랑이가 먹어버렸으나, 오직 혀만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승려 발정(發正)은 중국에 유학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관음도량(觀音道場)을 참배하였다고 전한다. 무왕(武王)이 세운 제석사(帝釋寺)에 화재가 나서 법당과 부속 건물들을 불태웠을 때에 그 탑 속에 넣어 두었던 사리(舍利)와 {금강경(金剛經)}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고 전하는데, 이것은 {법화경} 보문품(普門品)에 있는 관세음보살의 신통력으로 불에도 능히 타지 않는다고 한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다. 성덕산(聖德山) 관음사(觀音寺)의 연기설화(緣起說話)에 따르면, 효녀 홍장(洪莊)이 중국의 황후가 되어 많은 불사(佛事)의 공덕(功德)을 지었는데 이로 인해 장님인 아버지의 눈이 뜨이게 되었다. 또 관음상(觀音像)을 조성하여 고국 땅으로 보낸 것이 옥과(玉果) 지방의 처녀 성덕(聖德)을 통하여 성덕산 관음사를 이루게 했다는 것이다. 이 때의 효녀 홍장과 옥과 처녀 성덕을 관세음보살의 화신(化身)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설화의 내용은 {법화경} 보문품에 설명된 내용 즉, 관세음보살이 세상에 출현하여 중생들을 구제하고 해탈케 할 때에는 많은 방편력(方便力)으로 몸을 변화시켜 나타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백제에서 믿어진 관음신앙은 {법화경} 보문품의 내용을 바탕으로 실천을 위주로 하는 현세이익적인 것이었다고 하겠다.

    미타신앙(彌陀信仰)

    불교에서 정토(淨土)란 부처나 보살(菩薩)이 머무는 곳을 말한다. 수많은 정토 가운데 아미타불(阿彌陀佛)이 계신 곳을 미타정토(彌陀淨土)라고 부르는데, 서방정토(西方淨土) 혹은 극락(極樂)이라고도 한다. 미타신앙은 아미타불이 계시는 정토에 가서 살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백제시대에 미타신앙이 행해진 사례로, 먼저 27대 위덕왕(威德王)이 "부왕(父王)을 받들기 위해 출가(出家)하여 수도(修道)하기를 원한다."고 하여 이를 신하들이 말리었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이때 위덕왕은 신하들의 간곡한 만류에 따라 백명의 백성들을 출가(出家)시키고 갖가지의 불사공덕(佛事功德)을 지어 그것을 대신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억울하게 전사하여 원혼(寃魂)이 된 부왕을 위해 출가 수도하고자 함은 부왕의 명복(冥福)을 빌고자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것은 부왕의 명복을 빌고자 하는 왕생기원(往生祈願)의 신앙행위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선광사연기(善光寺緣起)}에 따르면, 선광사의 생신아미타여래(生身阿彌陀如來; 일광삼존(一光三尊) 형식의 아미타불상을 가리킴)는 옛날 인도의 월개(月蓋)라는 장자(長者)의 청(請)으로 이 세상에 와서 출현한 본존불(本尊佛)이라고 한다. 부처님이 대림정사(大林精舍)에 계실 때에 인색하고 탐욕스러운 월개장자라는 큰 부자가 살고 있었다. 마침 그 지역에 무서운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고 그의 딸 또한 죽음을 눈 앞에 두게 되었다. 이때를 당하여 월개장자가 부처님을 찾아가 참회하며 자비(慈悲)를 구하였고, 부처님은 그에게 서방(西方)의 극락세계(極樂世界)에 있는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의 명호(名號)를 부르면서 간청하라는 가르침을 주게 된다. 이에 월개장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서방을 향해 온갖 정성을 갖추고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염불하였다. 그의 정성이 감응(感應)되어 월개의 딸은 물론 모든 환자들의 병이 낳게 되었다. 그후 1300년(혹은 500년)이 지난 뒤 월개장자는 환생(還生)하여 백제의 왕이 되었으나 다시 악업(惡業)을 짓고 있었다. 이에 생신미타여래가 다시금 그를 구제하고자 백제에 날아와 출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백제왕은 지난 날을 생각해내고 참회(懺悔)하여 나라 안에 불법을 크게 일으켰다.
    이 설화를 통해 생각해 볼 때 백제인들은 미타정토에 왕생(往生)하고자 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들이 살고 있는 현실세계가 바로 정토임을 믿으려 했다고 하겠다. 이것은 백제인들의 미타신앙이 매우 현세위주로 현실이익적인 신앙 성격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백제 불교의 일본 전수(傳授)

    백제의 문화가 일본에 전파되어 그들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음은 여러가지 문헌에 전하는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백제가 일본에 불교를 전수한 사실에 대해서는 기록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나, 성왕(聖王) 때에 전래한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이후 백제는 일본에 율사(律師) 선사(禪師) 비구니(比丘尼) 등을 파견하면서 여러 경전(經典)과 론소(論疏)들을 보내었고 또한 공장(工匠)들을 보내어 사원건축을 전수(傳授)해 주었던 사실이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전수에 힘입어 추고천황(推古天皇)때에는 사원 46개소 승려 860인 비구니 569인에 이르게 될 정도로 크게 발전하였던 것이다. 백제 승려 혜총(慧聰)도 일본으로 건너가 대신 소아마자(蘇我馬子)에게 계법(戒法)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위덕왕(威德王)때에는 선신니(善神尼) 등 3인의 비구니가 백제에 와서 계학(戒學)을 공부하고 3년만에 돌아갔다고 한다. 이것으로 보아 백제와 일본 사이에서 불교의 전수는 양국이 서로 오가며 이루어졌음도 알겠다.
    그리고 추고천황때에는 한 승려가 조부(祖父)를 때리는 일이 일어났는데, 이를 계기로 승정(僧正)과 승도(僧都)를 두어 사찰과 승려들을 감찰(監察)토록 하고 있다. 이 때의 초대 승정에 임명된 승려가 바로 백제 승려 관륵(觀勒)이었다.
    이상에서 살핀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일본에 있어서 불교는 초기의 전파과정뿐만 아니라 교학(敎學)의 발전 승직제도(僧職制度)의 수립 등에서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겠다. 이외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바 그것은 현존하는 유물들을 통해서 더욱 확실히 자세히 알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각 유물을 통해 설명해야 하므로 여기서는 이를 생하였다.

     

     

     

     

     

    총설GENERAL REMARKS

    개요

    백제의 문화는 대체로 금강을 경계로 하여 남과 북의 두 지역으로 갈라지는데, 이는 자연환경의 차이에서 연유하는 측면도 있으나, 역사적으로 볼 때 부여족(夫餘族) 출신의 백제건국 집단이 처음 자리잡은 한강유역과 옛 마한(馬韓) 문화권 지역과의 지리적 차이 때문이라고 하겠다. 백제는 가장 넓은 평야지대를 끼고 있었으며 또한 남북으로 길게 뻗은 해안선은 중국대륙을 향해 개방되어 있었다. 삼국 가운데 백제가 농업생산력이나 대외교역면에서 선두를 차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것이 백제문화를 꽃피우는 데 매우 큰 자산이 되었다.
    그 동안 충청남도와 전라남북도를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백제시대의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가 꾸준히 진행되어 왔다. 그리하여 현재 비록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백제인이 남긴 문화유산은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실정이다. 문헌자료가 너무나 부족한 백제사의 경우 정치적 연대기를 중심으로 한 흥망사(興亡史) 연구는 이제 그 한계에 부딪친 느낌이 든다. 따라서 백제사의 공백은 문화사를 주축으로 하여 재구성해야 하는 시점에 도달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이런 점에서 백제의 관혼상제(冠婚喪祭)나 세시풍속(歲時風俗)에 대한 이해는 의미있는 일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이와 관련된 역사적 자료는 매우 빈약한 실정이다. 따라서 이 장에서 살려볼 백제의 관혼상제(冠婚喪祭)나 세시풍속(歲時風俗)을 재구성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고 하겠다. 그렇지만 백제 지역의 고고학적 발굴자료, 고구려(高句麗)의 풍속(백제가 기존의 토착민과 고구려의 유민의 결합으로 형성된 국가라는 점을 고려), 최근까지 전승되어 온 민속적인 사실 등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검토한다면, 백제의 관혼상제와 세시풍속은 일정한 정도는 복원이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관혼상제FOUR CEREMONIAL OCCASIONS

    관혼상제는 관례(冠禮)·혼례(婚禮)·상례(喪禮)·제례(祭禮) 등의 사례(四禮)를 통틀어서 일컫는 말이다. 곧 한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치루는 일종의 통과의례이다.

    관례

    관례의 일반적 개념은, 남자가 스무살이 되면 어른이 된다 하여 갓을 쓰게 하던 예식이다. 곧 15∼20세세에 관례를 하는 것이 보통의 의례이었다. 유교(儒敎)에서는 원래 스무살에 관례를 하고, 그 후에 혼례를 하는 것이나 조혼의 풍습이 성행하자, 관례와 혼례를 겸하여 하였다. 곧 남자는 갓을 쓰고 여자는 쪽을 쪄 아이가 어른이 되는 예식이다. 물론 백제의 관례는 이러한 일반적인 개념과는 일정한 차이가 있겠다고 하겠다.
    백제의 관례에 대한 기록은 구체적으로 남아 있지 않지만, 백제에서도 관모가 발달했다는 점에서 성인임을 상징하는 의례(儀禮)와 여기에 사용된 관(冠)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사례가 모정문화(茅亭文化)인데, 이는 호남과 충청지방에서 찾아볼 수 있는 서민층의 남자성년식이다. 이 모정문화는 남성들의 성년식을 치루는 의례를 보여주는 것인데, 그 의례의 구체적인 방식은 전남지방의 '들돌들기'를 통하여 복원할 수 있다.
    들돌들기는 현재 전라도지역의 논농사권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들돌은 평소에는 대개 마을의 입구나 정자 또는 당나무의 아래에 놓여 있는데, 풍요와 제액(除厄) 기능을 하면서 두레와 농사행사에 관련한 대동품앗이 돌이다. 들돌의 모양은 타원이나 원형이며, 무게는 보통 세 단계로 나누어진다. 곧 소돌, 중돌, 대돌로 나누어지는데, 특히 대돌은 삼인력(三人力)이라고 해서 이를 들면 '머리나이(首總角)'이라고 하며 일반 인부들의 두배 품삮을 받았다고 한다.
    들돌들기 행사는 주로 정월에 거행되었으며, 이를 위해 아이들이 들돌을 드는 연습을 하였는데, 이러한 모습은 여천과 벌교 등의 지역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곳에서는 18세가 되면 진쇠라는 성인 품앗이꾼으로 인정하는데, 정월이 아니라 7월 칠석날 들돌놀이를 통해 성인으로 인정을 하는 의례가 진행되었다. 여기서 진쇠가 된 사람은 진쇠술을 내고 온 마을사람들은 흥겨운 놀이를 진행하였다.
    이상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들돌들기는 백제의 관례를 복원할 수 있는 사례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다만 이 들돌들기가 고대의 주술(呪術)적인 신앙과도 일정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는 견해에 대해서도 관심을 소홀히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혼례

    백제의 혼례에 대해서는 비록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周書} 百濟條의 기록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는데, 곧 "아내를 취하는 의례는 중국의 풍속과 거의 흡사하다(婦娶之禮略同華俗"이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 기록에서, 우리는 중국의 문물이 유입되면서 백제의 혼례제도가 변화를 겪었다는 점을 알 수 있겠다.
    한편, 백제의 혼례에 대해서는 고구려의 사례를 통하여서도 일정 부분은 추정할 수 있겠다. 곧 유교적인 혼례 원리와 상치되는 자유혼의 허용이나 고구려의 서옥제(壻屋制)와 같은 토착적 관행 습속은 기층민들 사이에서 전승되었을 것이다. 또한 {隋書}에는 고구려에서는 혼인이 이루어지면 남자 집에서 돼지고기와 술만을 보내며, 재물을 보내는 것은 수치로 여긴다고 하였는데, 이는 서옥제와 관련이 있었다고 보인다.
    서옥제는 한반도 전역에서 전승되어왔던 한국의 전통 혼례의 관행으로서, 이를 백제의 혼례에 한정하여 논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백제적인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는 점은, 전남지역의 경우는 다른 곳과는 달리 시가(媤家)로 돌아가는 시기가 1∼3년까지의 기간이 걸렸는데, 이는 마한(馬韓)의 유제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백제에서는 일부다처제(一夫多妻制)의 풍속이 있었는데, 이는 물론 왕을 중심으로 한 귀족사회에서나 가능한 제도였다. 일반 민간에서는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가 일반적인 풍속이었는데, 이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도미조(都彌條)의 내용이다. 이제 그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도미는 백제 사람이다. 그의 신분이 비록 보잘 것 없는 백싱에 속하였으나 의리에 대단히 밝았으며 그의 아내도 어여쁘고 고울 뿐만아니라 절조가 있어 당시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개루왕이 이 말을 듣고 도미를 불러 말하기를 "대체 부인의 덕은 정조로써 으뜸을 삼지만 만일 으슥하고 컴컴한 사람 없는 곳에서 달콤한 말로써 꾀이면 마음이 쏠리지 않는 여자는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자, 도미는 "사람의 마음이란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저의 아내와 같은 여자는 죽어도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상례

    백제의 상례(喪禮)에 대한 기록도 {周書}의 百濟條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는데, 곧 "부모나 남편이 죽으면 삼년상을 치루게 하고 나머지 친척의 경우에는 장례가 끝나면 상복을 벗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여기서 백제의 상례는 부모나 남편의 상(喪)을 중시하여 삼년상(三年喪)을 치루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상을 당했을 때 상복을 입었고 곡을 하였는데, 이는 유교식 상례를 따르고 있는 현재와도 큰 차이를 보이고 있지 않다고 하겠다. 또한 장례시에 관(棺)은 사용하였지만, 곽(槨)은 설치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체적으로 북방민족의 영향을 받아서 토광묘(土壙墓)의 사용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산강 유역에서는 옹관묘(甕棺墓)가 성행하였다.
    백제의 묘제(墓制)는 도읍기에 따라 한성(漢城), 웅진(熊津), 사비 등 세 시기와 이전의 마한지역의 토착인 묘제의 시기로 나누어진다.
    마한지역의 묘제로 주목되는 것은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달한 옹관묘(甕棺墓)이다. 현재 옹관묘가 출토되는 지역은 한강, 금강, 동진강, 영산강 등이다. 초기에는 어린아이들에게 사용되었지만, 후기로 오면서 성인의 신전장(伸展葬)과 이차장(二次葬)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부장유물로 볼 때 대개 백성층에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성시대의 묘제는 토광묘(土壙墓) 계열과 적석총(積石塚) 계열로 구분되면, 부분적으로는 복합적인 묘제들이 발굴되고 있다. 토광묘는 석천동 3호분 동쪽에 위치한 집단 토광묘가 대표적인데, 1미터 내외의 깊이를 갖고 있다. 토광 안에는 목관을 넣은 것과 목판을 깐 것, 아무런 시설이 없이 시신만을 안치한 것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적석총은 대개 고구려 계열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석촌동에서 2기가 조사되었는데 규묘가 큰 편에 속한다. 이것은 토착세력과 고구려 유민 간의 세력관계를 보여주는 자료로서 주목된다.
    공주 시대에 와서는 돌무덤은 사라지고 석실묘(石室墓)와 전축분(塼築墳)이 유행하였다. 특히 송산리 6호분과 무령왕릉(武寧王陵)은 대표적인 전축분인데, 후자는 백제의 장제(葬制)와 묘제(墓制)를 밝히는 데에 중요한 유물이다. 부여지방의 묘제는 대체적으로 상자형(箱子型) 석실이 유행하였다. 능산리 고분이 그 대표적인 사례인데 이는 고구려의 계통을 이은 것으로 추정된다.

    제례

    백제의 제례에 대한 기록은 개인적이고 민간의 조상을 위한 제의보다는 국가의 시조(始祖)이거나 천지신(天地神)에 대한 제의 등에 대한 것이 일반적이다.
    민간에서의 제례로서 주목되는 것은 5월의 파종제(播種祭)와 10월의 수확제(收穫祭)인데, 이에 대한 기록은 서기 3세기 중엽까지의 한족(韓族) 사회에 대한 민족지로 널리 알려진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제의는 농사를 담당하는 귀신과 관련된 것으로서 농경의례의 성격이 강한 지신제(地神制)的인 속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백제에서는 국가적인 제사의례가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체제의 안정뿐 아니라 국민정신을 통합하는 사회적 기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한족(韓族) 사회의 제의와 그리고 동명왕묘(東明王廟)와 더불어 행한 천지에 대한 제례 등이다.
    먼저 마한(馬韓)은 귀신을 믿어 국읍(國邑)에는 각기 한 사람을 뽑아 천신(天神)을 주제하게 하였는데, 이를 천군(天君)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 천군은 샤먼의 계통을 이어받은 제사장의 성격을 띠는 인물로, 초기 국가사회에 들어와 그 비중이 커진 사회의 공동의식을 주재하였던 것이다. 역시 동이전에는 삼한 여러 나라의 별읍(別邑)에 소도(蘇塗) 신앙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읍락공동체(邑落共同體)를 중심으로 하여 행해지던 부락제(部落祭)에서 기원한 것으로 짐작되며 국가권력이 성장함에 따라 제천의례(祭天儀禮)로 승화되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주목되는 제사의례는 동명왕묘와 더불어 천지에 대한 제사이다. 온조왕 38년 10월에 왕은 도성 남쪽에 대단(大壇)을 쌓고 천지산천에 제사지냈다고 하는데, 역대 국왕은 즉위한 이듬해 정월에 동명왕묘를 참배한 다음 2월에는 천지에 대한 제사를 행하였다. 이때 왕은 친히 희생물(주로 돼지)을 칼로 베었으며 의식 때에는 북과 피리를 사용했다. 한편 이 제사를 거행할 때 이상한 새 다섯 마리가 날아들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 천지에 대한 제사의례는 동성왕(東城王) 11년 10월 이후에는 기록에 보이지 않는데, 한편 {周書} 백제전에 백제왕이 매년 4중(四仲)의 달에 천신과 오제(五帝)의 신을 제사했다는 기록이 보여 주목된다. 여기서 오제의 신이란 오방신(五方神)을 가리키는 것인데 이는 오행사상(五行思想)에서 기원한 것이다. 이는 백제가 중국의 예속을 수용해나가는 증거로서 주목된다고 하겠다.

     

     

     

     

     

    세시풍속CUSTOMS

    개요

    세시퐁속의 사전적 의미는, 주기적인 자연력에 맞추어 생업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생성된 의례관습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세시풍속이란 해마다 일정한 시기에 되풀이 되는 주기 전승의 의례적 관습적 생활 행위를 말한다고 하겠다.
    천체운행에 따른 자연환경의 질서에 적응하면서 살아온 전통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자연력이 생업력이자 농사력이라고 할 수 있다. 농사력은 1년 12달을 24절기로 나누어 종사짓는 과정과 방법을 알려주는 월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의 원리에 세시를 맞추어 농사를 짓고 그 세시를 기념하는 의례와 관행을 되풀이 해왔던 것이 세시풍속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세시풍속은 생활사인 동시에 생활을 규제하는 전통관습으로 기층민들은 이 속에서 그들의 지혜를 습득하고 행위를 합법화하면서 전통을 창출해 나간다. 곧 세시풍속은 생활, 의식, 사상, 지혜가 반영되는 중요한 문화양식의 하나이다. 세시풍속에 관한 이러한 개념은 백제(百濟)의 세시풍속에도 일정하게는 적용된다고 하겠다.
    마한 시대의 세시풍속은 농경의례적인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곧 5월에 씨를 뿌리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낸다는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의 기록이 그것이다. 이것은 결국 신을 즐겁게 해줌으로써 풍요를 기원하는 제의적인 속성을 보여주는데, 이는 현재의 단오(端午)와 유사한 면이 있다. 10월에 농사가 끝나고 행하는 제천의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마한시대에 5월과 10월의 제의일시가 백제라는 국가로 정비되면서 정월의 제의일로변하는 양상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토착민들과 온조 등의 이주민들이 갖고 있던 제의가 일정하게 조화를 이루어나가는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이러한 모습에서도 백제의 세시풍속의 특징적인 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사실 관련자료의 부족과 함께 앞에서 살펴본 관혼상제(冠婚喪祭)의 내용과의 명확한 경계의 불분명 등의 문제로 인하여, 백제의 세시풍속을 복원하는 데에는 상당한 어려운 점이 있다고 하겠다. 그렇지만 백제에 해당되는 지역에 현재 전승되고 있는 세시풍속을 통하여 백제의 세시풍속을 재구성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백제의 세시풍속은 어느 정도는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여러 방면에서의 노력이 당연히 따라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김삼룡, [마한·백제문화연구의 어제와 오늘-연구활동을 중심으로] ({원광문화}, 원광대, 1975).
    권태원, [백제의 사회풍속사(-)] ({백제연구} 8, 충남대, 1977).
    권태원 ,[백제의 사회풍속사(二)] ({백제연구} 9, 충남대, 1978).
    홍사준, [백제인의 문화활동一考] ({백제문화}. 공주사대, 1979).
    윤무병, [백제문화의 특성] ({백제연구} 13, 충남대, 1983).
    김철준, [백제사회와 그 문화] ({무녕왕릉}, 문화재관리국, 1984).
    권덕원, [들돌신앙고] ({민간신앙}, 교문사, 1994).
    차용걸, [백제의 제천제사와 정치체제의 변화] ({백제사의 이해}, 학연문화사, 1991).
    신형식, {백제사}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92).
    전봉희, [전남의 모정문화] ([건축역사연구} 6, 한국건축역사학회, 1994).
    이기동, {백제사연구} (일조각, 1996).
    김선풍, [백제민속연구] ({백제역사재현단지조성 조사연구 보고서}, 충청남도, 1996).

     

     

     

     

    설화/전설TALES & TRADITION

    제목

    위례성의 우물

    관련국가

    관련인물

    온조왕(溫祚王) 비류, 온조, 소서노

    참고자료

    「충남 전설집」하권, 충청남도 향토 문화 연구소, 1986. 3. 15. 「충남 전설집」하권, 충청남도 향토 문화 연구소, 1986. 3. 15.

    백제건국 초기에 형인 비류와 헤어져서 산 위에 나라를 세운 온조는 동쪽으로 내려가서는 백성들에게 곡식을 키우는 방법도 가르쳐 주기도 하고 사냥을 다녔으나 밤에는 잠자리에 들어가면은 새벽까지 일체 바깥에 몸을 나타내지를 않았다. 위례성 우물은 온조가 잠자는 움막의 바로 옆에 있었다. 밤이 되면 온조는 움막에서 나와서는 샘으로 들어가서 용이 되어 북쪽으로 뚫린 한강으로 나갔다. 위례성 우물을 중심으로 땅속으로는 한강과 금강으로 통하는 강줄기가 있었다. 북쪽에서 떠나올 때 틀림없이 자기가 나라를 세우면 그들이 침범해 올 것을 예상했었다. 그래서 북쪽으로 올라와서 한강가에 나와서는 북쪽하늘을 살피고는 적의 침범이 없을 것 같으면 곧장 물줄기를 타고 위례성 우물로 돌아왔다가 남쪽으로 내려가서는 금강쪽으로 내려갔다. 온조는 매일 같이 이와 같은 일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그가 용이 되어 북쪽으로 남쪽으로 드나드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 하루는 그날 저녁도 일찍 움막으로 들어 온 온조는 평상시대로 용이 되어 북쪽으로 올라갔다. 위례성 우물로 들어가서 물줄기를 타고 땅속으로 한참 올라가는데 평상시 깨끗한 물내음이 나면 맑은 물은 흙탕물로 변해 있었다. 틀림없이 한강변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하고 급히 물줄기를 헤치고 올라가서는 살짝 얼굴을 내밀었을 때 건너편 강변에 많은 군사들이 말을 타고 건너편 쪽을 바라 보고 있었다. 지금 군사들이 쳐들어 오면 큰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놀라게 하기 위해서 파도를 일으키며 물살이 강하게 급류로 흐르게 하여 그들이 돌아가게 하고는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온조가 북쪽 한강변에서 용이 되어 물살을 헤치고 있을 때 때마침 그의 어머니인 소서노가 큰 아들 비류가 고생을 하는 것을 보고 작은 아들 온조와 합작을 권하기 위해서 위례성에 왔다. 소서노가 위례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다. 온조가 있는 움막에 안내를 받았으나 온조는 없었고 아무도 그의 거처를 몰랐다. 소서노는 즉각적으로 반란이 일어나서 자기 아들을 죽인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데리고 온 비류의 부하로 하여금 그들을 쳐부수게 하였다. 위례성 온조의 부하들은 비류가 이 나라를 쳐부수러 온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힘껏 싸워 온조의 어머니 소서노까지 죽이고 말았다. 새벽녘 동이 틀때 위례성 우물을 통해 우물밖으로 나온 온조는 먼저 피비린내 먼저 맡고는 옷을 갈아입고 바깥으로 나와 보았다. 거기엔 많은 시체가 있었으며 시체 가운데에는 자기 어머니의 시체도 있었다. 그는 차분하게 싸우게 된 동기를 듣고는 자기 때문에 어머니 소서노가 죽게 된것이라고 생각하고는 다시는 용이 되지 않겠다고 하늘에 맹세를 했다. 그리고 부하들로 하여금 돌을 날라오게 하고 위례성 우물에 돌을 던져서 아래쪽에 있는 북쪽과 남쪽으로 통하는 물줄기를 막아버렸다 한다. 온조는 그 후 사람으로서 임금이 되어 한강변 광주땅에서 다시 위례성을 세웠다하는데 위례산의 위례성 우물은 그 후부터는 흙탕물만 고인다고 한다.

     

     

     

     

    설화/전설TALES & TRADITION

    제목

    건국설화(2)

    관련국가

    북부여 졸본

    관련인물

    비류왕(比流王) 우태, 온조, 소서노, 유리, 주몽, 연타발, 비류, 해부루

    참고자료

    「백제역사재현단지조성 연구 보고서」, 충청남도 백제문화 개발 사업소, 1996. 7. 「백제역사재현단지조성 연구 보고서」, 충청남도 백제문화 개발 사업소, 1996. 7.

    백제의 시조는 비류왕인데 그의 아버지는 우태로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고 어머니 소서노는 졸본사람 연타발의 딸이었다. 소서노는 우태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은 비류요 차남은 온조라 하였다. 우태가 죽자 소서노는 졸본에서 과부로 지냈다. B.C 37년 2월에 주몽이 부여에서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소서노를 왕비로 삼았다. 소서노가 고구려 건국에 공이 매우 많아 주몽의 총애가 두터웠고 비류 등을 마치 친아들처럼 대우했다. 그러던 중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에게서 낳은 아들 유리가 오니 그를 태자로 삼고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에 비류가 온조에게 말하기를 「처음 대왕이 부여에서 난을 피해 여기로 오자 우리 어머니께서 재산을 팔아 방업을 이룩해 그 노고가 많았다. 이후 대왕이 세상을 떠나고 나라는 유리의 것이 되었으니 우리는 한낮 여기에 빌붙은 혹과 같이 답답할 뿐이니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택하여 따로 나라를 세움만 같지 못하다.」 하고 온조와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의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가서 나라를 세우고 살았다.

     

     

     

     

    설화/전설TALES & TRADITION

    제목

    건국설화(1)

    관련국가

    졸본 부여, 북부여

    관련인물

    주몽, 오간, 온조, 마려, 비류, 유리.

    참고자료

    허문섭,「설화걸작선」, 도서출판 해누리, 1993.11.22, 제5-394호 「백제 역사 재현 단지 조성 연구 보고서」, 충청남도 백제 문화 개발 사업소, 1996.7 허문섭,「설화걸작선」, 도서출판 해누리, 1993.11.22, 제5-394호 「백제 역사 재현 단지 조성 연구 보고서」, 충청남도 백제 문화 개발 사업소, 1996.7

    백제의 시조 온조왕의 아버지는 추모인데 주몽이라고도 한다. 북부여에 있던 주몽은 난을 피하여 졸본 부여로 갔다. 그때 부여왕에게는 아들은 없고 딸만 세명이 있었다. 왕이 주몽을 보고 범상한 사람이 아님을 알고 둘째 딸을 주몽과 결혼시켰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주몽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맏아들을 비류라하고 둘째 아들을 온조라 하였다. 그런데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찾아와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시기를 받고 죽음을 당할 것을 염려하여 오간, 마려 등 열 명의 신하를 데리고 남쪽 지방으로 떠났는데 그들을 따르는 백성이 무리를 지었다. 한산에 이른 그들은 부아악에 올라가 살 만한 곳을 살펴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서 살자고 하니 열 명의 신하들이 말하였다. 「이 강 남쪽 땅을 보면 북으로는 한강을 끼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악이 에워싸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이 펼쳐져 있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가 둘러 있습니다. 이렇듯 천연 요새로 된 지대는 정말 찾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여기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비류는 그 말을 듣지 않고 따라온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그리하여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데리고 온 열 신하에게 자기를 보좌하게 하였고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했다. 비류가 자리잡은 미추홀은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사람들이 살 곳이 못 되어 다시 위례로 돌아왔다. 도읍이 훌륭하게 정해지고 백성들도 태평스럽게 사는 모습을 보고 비류는 부끄럽고 후회스러워하며 병들어 죽었다. 이에 비류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에 귀속되었고 그 후 백성들이 위례로 올 때 즐겁게 따랐다고 한다. 그리하여 국호를 백제로 고치고 그의 조상이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부여"라고 하였다.

     

     

     

     

    설화/전설TALES & TRADITION

    제목

    위례산

    관련국가

    고구려

    관련인물

    참고자료

    천안군수 윤병렬, 「역사의 현장」, 천안군, 1990. 12. 31. 천안군수 윤병렬, 「역사의 현장」, 천안군, 1990. 12. 31.

    백제 웅진시대에 북쪽에선 고구려가 끊임없이 쳐들어 오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의 천안군 입장면 연곡리에 있는 산성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계속 벌어지고 있었다. 백제로서는 북쪽을 지키는 이 산성이 무너지면 큰일이었다. 그러나 하루에 열번이든 백번이든 쳐들어오기만 하면 고구려 군은 싸움에 지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 때의 백제왕은 위례산으로 올 때는 용으로 변하여 웅진에서 위례산 용샘까지 땅속으로 뚫린 물줄기를 타고 단숨에 달려오는 것이었다. 왕이 낮에는 산성에서 나라와 백성을 지키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하고 밤에는 용샘을 통해 땅속 물줄기를 타고 웅진 왕궁에 가서 밀린 정사를 처리하니 조정의 대신들은 별로 할 일이 없었다. 그런데 이들은 왕을 잘 만나서 편안히 사는 줄도 모르고 왕에 대한 불평을 쌓아갔다. 더구나 활달하고 욕심 많은 왕의 처남은 자기도 한번 왕처럼 한 나라를 호령하고 싶었던 차 기회를 엿 보고 있었다. 게다가 왕은 백제 북쪽에서 싸움이 터진 이후부터 낮에는 왕실에서 나오지를 않았다. 그래서 왕의 처남은 왕을 찾아서 왕실을 두드려 봤다. 헌데 이상한 일이었다. 왕실에서 맑은 물이 내려가는 소리와 짙은 안개가 서려 있을 뿐 왕은 없었다. 처남은 왕실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누이동생인 왕비를 찾아갔다. 왕비는 퉁명스럽게 이제서 그것을 알았느냐는 듯이 핀잔을 주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왕은 사람이 아니라 용이 사람으로 변한 용왕의 아들입니다.」 처남은 깜짝 놀랐다. 아니 내 누이동생이 아무리 왕비라 하지만 용과 살다니 하면서 처남은 왕을 죽이기로 작정을 하였다. 처남은 왕이 좋아하는 제비를 잡아 낚싯밥으로 만들어 가지고 왕비가 가르쳐주는 데로 왕이 용으로 되었다가 사람으로 되어 나온다는 왕궁으로 들어갔다. 마침 해가 지고 어둠이 강가에 내려앉기 시작했다. 왕의 처남은 낚시를 강물에 던져놓고 용이 나와서 물기를 기다렸다. 하루종일 고구려 군을 쳐부수기 위해 피곤한 왕이 어두워지자 용샘으로 들어가 땅속 물줄기를 타고 웅진까지 오느라 배도 고팠다. 헌데 여기에 그가 좋아하는 제비가 있으니 그는 단숨에 제비를 먹어 삼켰다. 그러자 왕의 처남은 힘껏 낚싯대를 당겼다. 낚싯대에 걸린 용은 신음하면서 하늘로 치솟았다. 그러더니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꽝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결국 백제의 왕은 죽게된 것이다. 백제의 왕이 죽은 후 위례성의 백제군은 그 이튿날 고구려군에게 크게 패하였다. 백제군이 모두 전사하자 산이 울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놓인 산의 울음소리가 위례성에 집약되어 울고 있었다. 그 후 사람들은 억울하게 죽은 왕을 위해 통곡을 하며 예를 올렸다 해서 이 산을 “위례산”이라 불렀다 한다.

     

     

     

     

    설화/전설TALES & TRADITION

    제목

    백마강의 위어

    관련국가

    신라, 당나라

    관련인물

    당나라 소정방

    참고자료

    「부여군지」, 부여군지 편찬 위원회, 1987. 3. 30 「부여군지」, 부여군지 편찬 위원회, 1987. 3. 30

    백제말기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가 멸망 할때, 사비성에 입성한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며칠동안 예상 밖의 격전과 여름의 무더위에 시달려 입맛이 달아났다. 이에 부하를 불러 의자왕은 어떤 것을 즐겨 먹었냐고 물었다. 부하는 백마강에서만 잡히는 위어의 회라고 말하였다. 이에 소정방은 위어를 잡아 올리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그날의 점심상에도 저녁상에도 위어회는 오르지 않았다. 백제의 진미에 기대가 컸던 소정방은 밥상을 걷어 차버리며 부하에게 화를 냈다. 사색이 된 부하는 벌벌 떨며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많이 잡히던 위어가 오늘따라 단 한마리도 잡히지 않습니다.」라고 말하자 이에 소정방은 부하들을 대동하고 직접 백마강에 나갔다. 그리고 어부란 어부를 총동원해서 강을 막다시피 어망을 쳤다. 그러나 단 한마리의 위어도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악이 치솟은 소정방은 기어이 잡기 위해서 낙화암의 상류부터 장암의 하류까지 겹겹으로 망을 쳤다. 그러나 수없이 망에 걸리는 것은 삼천궁녀의 비참한 시체뿐이었다. 이때 소정방은 「하찮은 물고기까지 이렇게 의로울 줄이야.」라며 가슴속 깊이 느끼면서 「백제를 치기보다는 차라리 백제와 화친했었더라면 …」하고 후회하였다. 아닌게 아니라 당나라군사는 그 뒤 의로운 백제부흥군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렸다. 한편 백마강에서는 그 뒤 백제가 멸망한 여름에는 위어가 절대 나타나지 않으며 다만 봄이 오면 백제의 소생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불과 한달 동안만 산란을 위해서 올라오고는 곧 바다로 돌아가 버린다. 이래서 후세사람들은 이 위어의 의로움에 감탄해서 "의어"란 이름을 붙여주게 된 것이라 한다.

     

     

     

     

     

    설화/전설TALES & TRADITION

    제목

    서동과 선화공주

    관련국가

    신라

    관련인물

    백제 무왕(서동), 지명법사, 신라 진평왕, 선화공주

    참고자료

    허문섭,「설화 걸작선」, 도서출판 해누리, 1993.11.22, 제 5-394호 허문섭,「설화 걸작선」, 도서출판 해누리, 1993.11.22, 제 5-394호

    백제 사비 시대 무왕의 어릴 적 이름은 서동인데 이는 서동이 마를 캐어 팔아서 생활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렇게 이름을 지어 불렀다. 서동은 어려서부터 속이 깊어 남들이 헤아리기 어려웠다.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가 무척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의 서울로 가서 아이들에게 마를 나눠주었다. 그랬더니 아이들은 서동과 친해져 그를 따르게 되었고 서동은 노래를 지어서 아이들에게 부르게 하였는데 그 노래가사는 이러하였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시집가서 밤마다 서동이를 품에 안고 잔다네 온 장안에 퍼진 이 동요는 드디어 대궐에까지 알려졌고 모든 신하들이 떠들고 나서는 바람에 선화공주는 왕후가 준 순금 한 말만을 가지고 먼 지방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공주가 귀양지로 갈 때 서동이 마중 나와 호위하여 가겠다고 하자 공주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서동이 곧 마음에 들어 함께 가기를 허락하였다. 백제에 도착한 그들은 왕후가 준 금을 내놓고 살림을 차리기 위해 의논을 하는데 서동이 웃으며 물었다. 「이게 무엇이오?" "황금이에요. 이만하면 한평생 부자로 살 수 있지요.」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캐던 곳에 이런 것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다오.」 「이것은 천하에 다시 없는 보물이랍니다. 당신이 금이 있는 곳을 아신다면 그 보물을 우리 부모님께 보내 드리면 어떨까요?」 라고 공주가 말하자 서동이 쾌히 응하였다. 그리하여 금을 모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에게 가서 금을 보낼 방법을 물어보았다. 「내가 신력으로 보낼테니 금을 가져오시오.」 선화공주가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법사 앞에 가져다 놓았더니 법사는 도술을 부려 하룻밤 새에 신라궁중에 그것을 옮겨 놓았다. 서동은 이때부터 인심을 얻어 마침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하루는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로 가는 길에 용화산 아래에 있는 큰못에 이르렀는데 미륵불 셋이 못 속에서 나타나 니왕과 부인이 수레를 멈추고 치성을 드렸다. 그때 부인이 왕에게 아뢰기를, 「여기에다 큰 집을 짓는 것이 소원입니다.」 하니 왕은 이를 허락하고 지명법사를 찾아가 못을 매울 방법을 물었다. 법사는 신력으로 하룻밤 새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워 평지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미륵불상 셋을 모실 불전과 탑,행랑채를 각각 세곳에 따로 짓고 "미륵사"라 하였다. 그 절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설화/전설TALES & TRADITION

    제목

    도미의 처

    관련국가

    고구려

    관련인물

    개로왕, 도미, 도미의 처.

    참고자료

    「백제 역사 재현 단지 조성 연구 보고서」, 충청남도 백제 문화 개발 사업소, 1996.7 「백제 역사 재현 단지 조성 연구 보고서」, 충청남도 백제 문화 개발 사업소, 1996.7

    백제 개로왕때 도미는 벽촌에 사는 일개 소민이었지만 자못 의리를 알고 있었으며 그의 아내는 아름답고 절행이 있어 당시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 개로왕이 소문을 듣고 도미를 불러 말하였다. 「무릇 부인?nbsp;덕은 정절이 제일이지만, 만일 어둡고 사람이 없는 곳에서 좋은 말로 꾀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사람이 드물 것이다.」 도미가 대답하기를 「사람의 정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 아내는 죽더라도 마음을 고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왕이 그 처를 시험하려고 도미를 궐에 머물게 하고 한 신하에게 왕의 의복과 말 종자를 빌려주어 밤에 그 집에 가게 했고 그 전에 사람을 시켜 왕이 온다고 일러두게 했다. 왕으로 변장한 신하가 와서 도미의 처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래 전부터 너의 아름다움을 듣고 도미와 장기내기를 하여 이겼다. 내일은 너를 궐로 데려가 궁녀로 삼을 것이니 지금부터 네 몸은 나의 것이다.」라 하면서 난행하려 했다. 부인이 말하기를 「국왕에겐 망령된 말이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어찌 감히 순종하지 않겠습니까. 청컨데 대왕께서는 먼저 방으로 들어가 계십시오. 전 옷을 고쳐 입고 들어가겠나이다.」하고 물러나 한 여종을 단장시켜 들어가 수청을 들게 하였다. 후에 왕이 속은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도미에게 죄를 뒤집어 씌어 두 눈동자를 빼고 작은 배에 싣어 물위에 띄어보냈다. 그리고 나서 도미의 아내를 강제로 데려와 수청들게 하려는데 부인이 왕에게 말하기를 「지금 남편을 잃었으니 이제 혼자 살아갈 수 없습니다. 더구나 대왕을 모시게 되었으니 어찌 감히 그 명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마침 월경으로 온 몸이 더러우니 다른 날 몸을 정갈히 하고 오겠습니다.」하니 왕이 믿고 허락하였으나 도미의 아내는 그대로 도망하여 강어귀에 이르렀다. 그러나 강을 건널 수 없어 하늘을 부르며 통곡하던 중, 홀연히 한 척의 배가 물결을 따라 오는 것을 보고 그 배를 타고 천성도에 이르러 마침내 남편인 도미를 만나 도미 부부는 풀뿌리를 캐어 먹으며 드디어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에 이르렀다. 고구려 사람들은 이들을 불쌍히 여겨 의식을 주었고 이들은 이곳에서 구차스럽게 살며 일생을 마쳤다 한다.

     

     

     

     

    왕족ROYAL FAMILY

    인물명

    온조왕(溫祚王)

    관련국가

    온조왕(溫祚王) [연대 : ?∼28년 ]

    출전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의 건국시조인 온조는 한강유역인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를 건국했다. 당시 그곳은 드넓은 평야와 주변에 험준한 산들로 둘러쌓여 주변국들의 침입에 대해 방어가 용이했으며 한반도 서북지 방에 설치된 중국과 인접해 있었던 까닭으로 중국세력과 접촉하면서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성장할 수 있었다. 온조왕은 건국초기에 마한의 맹주에게 신록 및 전쟁포로를 바치거나 천도(遷都)를 알리는 등 우대의 격식을 취하였으나 점차 세력이 커지면서 주변국들을 흡수·통합해 마한세력과 대등한 지위에 서게 되자 BC 6년에 사신을 보내 마한과 경계를 정했는데 북으로는 패하, 남으로는 웅천, 동으로는 주양, 서쪽으로는 대해에 이르는 영역을 확보했다. 또한 전국을 동·서·남·북·중으로 나누는 5부체제를 확립했다. 이는 중앙의 집권력을 강화시키는 반면 주변국의 정치적 결속을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말갈의 침입에 대비해 석두성·고목성을 쌓았으며 원산성과 금현성을 수리하였다.

     

     

     

    왕족ROYAL FAMILY

    인물명

    다루왕(多婁王)

    관련국가

    다루왕(多婁王) [연대 : (?∼77년) ]

    출전

    다루왕은 온조왕 28년에 태자가 되었다가 온조왕이 죽자 즉위 하였다. 도량이 넓고 후덕하며 위망이 있었다. 다루왕 3년 10월에 동부의 흘우가 마수성 서쪽에서, 4년 8월에는 고목성의 곤우가 말갈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11년에는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워지자 음주하는 것을 금지시켰고 동·서 양부를 순시하면서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말갈의 침입이 계속되자 동부에 우곡성을 쌓아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며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하기를 청했으나 신라가 거절하자 이후 충돌이 잦아졌다. (출전:삼국사기(三國史記))

     

     

     

    왕족ROYAL FAMILY

    인물명

    개로왕(蓋鹵王)

    관련국가

    개로왕(蓋鹵王) [연대 : ?∼475년 ]

    출전

    삼국사기(三國史記)

    개로왕은 비유왕의 장자로 비유왕이 재위29년에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469년에 개로왕은 고구려의 남부지역을 선제공격하는 한편 쌍현성을 수리하고 고구려와의 사이에 요충지인 청목령에 대책(大柵)을 설치하였으며 북한산성의 병사를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18년(472)에는 북위에 구원병파견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내 북위(北魏)가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협공할 필요성과 성공 가능성을 설득하려 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개로왕 21년(475) 9년에 고구려의 장수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와서 한성을 포위하자 개로왕은 성문을 닫고 나가 싸우지 못했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군사를 네길로 나누어 협공하였고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질러 성문을 태우자 방어전선이 무너졌다. 왕은 어쩔줄을 몰라 수십기를 거느리고 성문을 나와 서쪽으로 달아났지만 백제에서 고구려로 망명한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에게 잡혀 아차성 아래에서 피살되었다.

     

     

     

     

    왕족ROYAL FAMILY

    인물명

    문주왕(文周王)

    관련국가

    문주왕(文周王) [연대 : ?∼477년) ]

    출전

    삼국사기(三國史記)

    문주왕은 제 21대 개로왕의 아들이고, 제 23대 삼근왕의 아버지이다. 왕자로 있을 때에는 부왕을 보좌하여, 최고관직인 상좌평을 역임하였다. 475년(개로왕 21) 9월에는 고구려에게 한성이 포위되는 위기를 맞아, 동맹국인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러 파견되었다. 그러나 구원병 1만명을 얻어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도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은 살해된 뒤였다. 문주왕은 이러한 상황에서 즉위하였다. 그해 10월 피난지인 웅진을 새 도성으로 정하고, 참담한 패전 뒤의 수습에 임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 대루산성을 수리하고 한강이북의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또한 구귀족들과 금강유역의 신진귀족들과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귀족들의 통제에 실패한 문주왕은 재위3년 만에 당시 정권을 장악한 병관좌평 해구의 자객에 의해서 피살되었다

     

     

     

     

    왕족ROYAL FAMILY

    인물명

    무왕(武王)

    관련국가

    무왕(武王) [연대 : ?∼641년 ]

    출전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 30대왕 무왕은 법왕의 아들로 무왕이 즉위하기전 백제는 국내외의 정세가 악화되고 귀족간의 내분 이나 왕실권위의 약화에 직면하고 있었는데, 거듭되는 왕의 단명은 그러한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문제들은 무왕의 즉위로 어느 정도 완화되었던 것 같다. 이같은 왕권의 안정은 무왕이 재위기간 동안 집요하게 추진해온 신라 침공과 같은 정복전쟁의 승리에 힘입은 것이다. 무왕의 신라 서쪽 변방에 대한 빈번한 침공은 백제군의 낙동강 방면으로의 진출을 가져와, 신라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한층 가중시켰다. 국내의 정치적 안정과 정복전쟁의 승리에 힘입어 무왕대의 백제는 국제문제에 보다 적극적인 입장을 보였다. 동아시아의 양대 세력인 고구려와 수나라가 각축전을 벌일 때의 대결을 이용하여 어부지리를 취하려고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무왕은 강화된 왕권의 존엄을 과시하려는 목적에서 대규모 역사를 단행하였다. 630년에는 사비궁을 중수하였으며, 634년에는 왕궁의 남쪽에 인공호수와 그안에 인공섬이 조영 되었다. 그리고 같은해에 왕흥사의 완성을 보았다. 왕흥사는 그 이름에서도 알수 있듯이 왕이 건립을 주도 하였고 몸소 불공을 드리는 곳이어서, 왕실의 원찰(願刹) 또는 왕과 특별히 밀착된 사원으로 보인다. 이같은 역사는 왕권의 안정을 반영하는 것이기에 귀족내부의 분쟁 요인이 근본적으로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갈등이 표면화되는 것은 어느 정도 억제되었음을 뜻한다. 대왕포(大王浦: 충청남도 부여 백마강에 지금도 그 지명이 전한다)라는 지명과 함께 전하는 무왕과 그 신하들이 그곳에서 흥겹게 어우러져 즐겼다는 고사는 표면적으로는 태평한 백제지배층의 상황을 보여준다. 강화된 왕권에 힘입어 무왕은 재위 후반기에는 익산지역을 중시하여 이곳에 별도를 경영하고, 나아가 장차 천도(遷都)할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그리하여 궁성이 될 왕궁평성을 이곳에 축조하는 동시에, 궁성 안에 제석사를 창건하기도 하였다. 무왕은 익산천도를 통하여 귀족세력의 재편성을 기도한 것이다. 비록 익산천도는 이루어지지 못하였지만, 동요된 백제왕권은 무왕 때에 와서 급속히 회복되었다. 그리하여 아들인 의자왕이 즉위 초기에 정치적 개혁을 통해 전제왕권을 구축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왕족ROYAL FAMILY

    인물명

    성왕(聖王)

    관련국가

    성왕(聖王) [연대 : ?∼554년 ]

    출전

    삼국사기(三國史記)

    성왕은 무령왕의 아들로 지식이 영매하고 결단력이 있어 백성들이 성왕이라고 칭하였다고 한다. 성왕은 선대인 동성왕과 무령왕이 웅진 초기의 정치적 불안을 수습하면서 추진해 온 왕권강화책을 계승하여 538년(성왕 16년)에 도읍을 사비성으로 옮겼다. 사비는 그 동안 백제왕실이 취해 온 왕권과 국력강화책의 마무리 작업이었다. 성왕 사비천도 결심에는 사비지역의 토착세력이었던 사씨의 정치적 지지가 크게 작용하였다. 그는 중국과의 외교에도 힘을 쏟아 양나라와 빈번한 교류를 가졌다. 또한 인도로부터 범어로된 불경을 가지고 온 겸익을 환대하고 고승들을 모아 불경 번역작업을 시켰으며 이런 불교사상을 일본에 전파하였다. 성왕은 이와 더불어 사비천도를 전후하여 웅진시대 이래 행해졌던 내외관제(內外官制)를 대폭 정비하여 지배체제와 통치질서를 확립하였다. 또 지방통치조직으로 종래의 담로제를 개편하여 전국을 동방 서방 남방 북방 중방의 5방으로 나누고 그 밑에 7∼10개의 군을 두었다. 이와 같이 성왕은 중앙관제와 지방통치조직을 정비함으로써 귀족회의제의 정치 발언권을 약화시켜 왕권중심의 정치운영체제를 확립하였다. 성왕은 동맹관계를 강화하여 고구려의 남진(南進) 압력에 대항하여 중국 양(梁)나라 및 왜와의 외교관계를 긴밀히하여 무역과 문화교류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백제의 국제적인 지위를 높였다. 이런 바탕 위에 551년(즉위 29년) 성왕은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신라와 가야의 도움을 받아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그 결과 백제는 한강 하류의 6군을 회복하였고 신라는 한강 상류의 10군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진흥왕이 나제동맹을 무시한 채 백제의 한강 하류지역을 빼앗아가자 성왕은 다음해인 554년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공격했다. 가야군의 도움까지 받은 백제군은 관산성에서 신라와 일전을 벌였으나, 신라 복병의 기습을 받아 성왕을 비롯한 3만여의 전사자를 내고 대패했다. 이후 나제동맹의 결렬과 함께 삼국의 관계구도는 급변하게 되었다.

     

     

     

     

    왕족ROYAL FAMILY

    인물명

    위덕왕(威德王)

    관련국가

    위덕왕(威德王) [연대 : 525∼598년 ]

    출전

    삼국사기(三國史記)

    위덕왕은 성왕의 맏아들이다. 성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관산성 패전에 대한 귀족들의 책임추궁으로 정치적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그 결과 백제의 정치체제는 왕권중심체제에서 점차 귀족중심의 정치운영체제로 바뀌게 되었다. 즉위 후 신라와 고구려에 대하여 적대적인 정책을 추구 하였다. 그리하여 웅천성을 공격하여 온 고구려군을 물리치고 598년(위덕왕 45)에 수나라가 고구려를 공격 하려 하자 자진하여 군도(軍導)가 되기를 청하는 등 고구려 대하여 첨예한 대립관계를 보였다. 그리고 신라에 대해서도 관산성 패전을 설욕하기 위하여 빈번히 국경을 침범하였다. 반면에, 중국의 남북조와 외교관계를 가짐으로써 국제적 고립을 면함과 동시에 고구려를 견제하려고 하였다. 그 결과 북제로부터 570년에는 사지절시중거기대장군 대방군공 백제왕에 책봉되고, 570년에는 사지절도독청주제군동청주자사에 책봉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경축사절을 보냈고, 또 수나라로 하여금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충동하기도 하였다.

     

     

     

     

    왕족ROYAL FAMILY

    인물명

    무령왕(武寧王)

    관련국가

    무령왕(武寧王) [연대 : ?∼523년 ]

    출전

    삼국사기(三國史記), 일본서기(日本書記)

    무령왕은 즉위 당시 나이가 40세였다. 즉위하자마자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백가의 진영이 있는 가림성으로 향했다. 군대가 우성에 이르자 왕은 한솔 해명에게 명하여 진격하도록 했다. 왕의 단호한 태도에 놀란 백가는 가림성을 나와 항복을 청했다. 이에 왕은 그를 베어 백강(白江)에 던지도록 했다. 당시 백제가 당면한 가장 큰 과제는 무엇보다도 고구려의 침략을 막고 나아가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유역의 옛 땅을 되찾는 일이었다. 왕은 즉위초부터 고구려에 대해 선제(先制)공격에 나섰다. 501년 11월 달솔 우영에게 5천 군사를 주어 수곡성을 치게 했으며, 507년 10월에는 고구려가 말갈(춘천 지방의 맥국으로 짐작됨)과 한성을 치고자 황악아래 주둔하고 있을때 왕은 군대를 보내어 이를 격퇴했다. 또한 512년 9월 고구려가 가불성과 원산성을 잇따라 함락하여 승승장구하고 있을 때 왕은 몸소 날랜 기병 3천을 거느리고 위천 북쪽으로 출진, 계책을 써서 크게 이겼다. 한편 무령왕은 신라 및 중국 남조의 양(梁)나라와의 화친에도 힘썼다. 512년 4월과 521년 11월 두 차례에 걸쳐 왕은 양에 사신을 보내어 우호관계를 맺었는데, 두번째의 사행(史行)때 양(梁)의 고조(高祖) 무제(武帝)는 왕에게 영동대장군이란 관작을 주었다. 또한 신라와의 화친정책은 고구려의 남침에 공동으로 대처한다는 실제적인 면이 강했다. 그리고 경제적 기반 확충과 민생문제에도 힘을 쏟았다. 왕은 510년 정월에 영을 내려서 제방을 쌓고 동시에 내외의 유리자(遊離者)들을 귀농케하는 조치를 취杉? 금강유역을 중심으로 하여 호남의 넓은 평야를 확보하고 있던 백제로서는 수리시설을 더욱 완비할 필요가 있었고 보다 많은 농업 노동력을 확보해야 했다. 사실 유리자(遊離者)의 귀농 조치는 조세 징수와 역역(力役)징발에서 배제되어 있던 무리에게 공민군을 부여한 것으로, 이는 국가의 인적자원 확보를 위해서 긴요한 것이었다. 523년 5월 7일 6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2년뒤인 525년(성왕 3) 8월 12일에 공주 송산리에 안장되었다.

     

     

     

     

    왕족ROYAL FAMILY

    인물명

    의자왕(義慈王)

    관련국가

    의자왕(義慈王) [연대 : ?∼600년 ]

    출전

    삼국사기(三國史記)

    대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로, 태자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의 우애가 깊어 '해동증자'로 칭송받았고, 아들들의 이름을 '효'로 지을 정도로 효도의 미덕을 강조한 왕이었다. 의자왕은 즉위 하자마자 왕권을 더욱 강화하였다. 그러기 위해 손아래 왕자의 아들을 비롯하여 친인척 4명과 내좌평 기미 등 40여명을 섬으로 추방하여 귀족들의 기세를 꺾었다. 그 결과 귀족들에 대한 왕권의 통제력을 훨씬 강화되었다. 또한 대외관계에서도 변화를 시도했다. 그는 지금까지 고구려와 중국에 대하여 취해온 양면적인 외교노선을 수정하여 친고구려 정책으로 돌아섰다. 고구려와 화친을 맺은 뒤 의자왕은 신라에 대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압력을 가했다. 그는 642년(의자왕2년) 몸소 군대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여 미후성 등 40여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또한 장군 윤충으로 하여금 군사 1만여 명을 이끌고 신라의 대야성(지금의 합천)을 공격하여 성을 함락시키고 대야성주 김품석(김춘추의 사위)과 그의 처자를 죽였다. 여세를 몰아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의 당항상(지금의 경기도 화성군 서신면)을 공격하여 신라의 대당(對唐)교통로를 차단하려고 하였고, 645년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여 신라군이 당나라를 구원하는 틈을 타서 신라 서쪽 방면의 7개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의자왕은 이러한 의욕적인 국가경영에도 불구하고 즉위 말년에 이르러서는 사치와 방종으로 국력을 소모했다. 귀족들은 내부분열로 권력투쟁을 일삼았고, 국가의 통치질서는 붕괴 직전에 이르렀다. 한편으로는 고구려와 연합한 신라 압박은 신라와 당나라와의 연합을 촉진시켰다. 마침내 660년(의자왕 20년) 나당연합군은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공격을 개시했다.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군사는 백강(白江. 지금의 금강)을 건너오고,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은 탄현(炭峴. 지금의 대전 동쪽)을 넘어 총공격을 개시 했다. 의자왕은 계백장군으로 하여금 5천 결사대를 이끌고 신라군을 막게 했으나 황산벌전투에서 계백장군이 전사하고 사비성은 나당연합군에게 포위되었다. 이에 의자왕은 사비성을 버리고 태자와 함께 웅진성으로 도망갔다. 7월 18일에 사비성이 함락되자 웅진으로 도망갔던 의자왕과 태자 효는 이 소식을 듣고 사비로와 항복하였다. 의자왕은 태자 효, 왕자 융 및 대좌평 사택천복 등 대신, 장사 88명, 백성 1만 2천여 명과 함께 당나라로 압송되어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왕족ROYAL FAMILY

    인물명

    부여융(扶餘隆)

    관련국가

    부여융(扶餘隆) [연대 : 615∼682년 ]

    출전

    삼국사기(三國史記)

    의자왕 4년(644)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660년 7월 백제의 왕성이 나당연합군에 함락될 때 웅진성으로 도피하여 있다가 결국 신라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해 9월 당나라 장수 소정방을 따라 의자왕 및 왕족·귀족들과 함께 당의 수도인 낙양(洛陽)으로 끌려갔다. 663년 손인사와 함께 백촌강전투에 참전하였다. 이때 당은 그에게 광록대부태상원외경을 제수하는 동시에 웅진 도독대방군왕에 임명하였다. 웅진 도독의 자격으로 664년 2월 당나라 장수 유인원이 주재한 가운데 웅령에서 신라의 김인문과 서맹(誓盟)을 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8월에도 유인원 주재로 신라의 문무왕과 웅진 취리산에서 화친을 서명한 뒤, 백제고지에 대한 웅진 도독부의 지배권을 신라로부터 인정받았다. 그뒤 신라가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성에 소부리주를 설치함으로써 백제고지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자 웅진 도독부는 677년 2월 만주의 건안고성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백제유민들을 안집하였다. 죽은 뒤 당조정으로부터 보국 대장군을 추증받았다. 묘지는 중국 허난성 낙양의 북망산에 있다.

     

     

     

     

    왕족ROYAL FAMILY

    인물명

    근초고왕(近肖古王)

    관련국가

    근초고왕(近肖古王) [연대 : ?∼375년) ]

    출전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 비류왕의 아들로 즉위한뒤 왕권 강화에 주력하여 왕위계승에 있어서 초고왕계의 계승권을 확고히 하였다. 또, 진씨가문에서 왕비를 맞아들여 왕실을 지지하는 배경세력으로 삼았다. 그리고 지방에 대한 통제를 보다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영역을 분할하여 지방 통치조직을 만들고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한편, 근초고왕은 왕권확립을 바탕으로 하여 사방으로 정복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남으로는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백제의 세력권에서 이탈해 있던 마한의 잔여세력을 경략, 복속시킴으로써 전라도지역 모두를 지배영역으로 확보하였다. 그리고 낙동강 서쪽에 위치한 가야세력을 영향권내에 넣었다. 이렇게 남방지 역의 평정이 일단락 된 후 북방으로의 진출을 도모하였다. 이것은 고구려와의 대립을 불가피하게 하였다. 양국의 군사적 충돌은 369년 치양성(雉壤城:황해도 백천) 싸움에서부터 371년에 벌어진 평양성싸움이었다. 이 싸움에서 태자와 더불어 3만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하여 마침내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대방고지까지 차지하는 개가를 올렸다. 이리하여 백제는 사상최대의 영역을 확보하게 되었다. 또 근초고왕은 정복활동과 더불어 대외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우선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신라와 동맹관계를 강화함으로써 한반도에서의 힘의 균형을 이룩하였으며, 중국의 동진(東晉)과도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동진으로부터 영동장군영낙랑태수에 책봉되기도 하였다. 이와 더불어 일본열도 방면으로도 활발히 진출하여 백제계통의 세력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이에 왕인과 아직기 등을 왜에 보내어 『천자문』과 『논어』를 전해주었다. 이처럼 지방영역의 확대와 통치조직의 정비를 통하여 왕권이 확립되고 문화가 발전하게 되자, 박사 고흥으로 하여금 『서기 書記』라는 국사책을 편찬하게 하였다. 『서기』의 편찬은 왕실중심의 계보정리와 더불어 왕실전통의 유구성·신성성을 과시하고 위엄을 돋보이게 하려는 데서 취해진 조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같이 근초고왕대에는 백제의 최대 전성기를 이룰 수 있었다.

     

     

     

     

    '百 濟'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제와 동아시아---대백제 자료관  (0) 2009.04.02
    백제 예술---대백제 자료관  (0) 2009.04.02
    백제 역사---대백제 자료관  (0) 2009.04.02
    삼국사기 백제본기  (0) 2009.03.29
    삼국사기 백제본기--원문  (0) 2009.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