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남쪽의 목지국 중심의 마한과는 다른 북마한

吾心竹--오심죽-- 2009. 3. 29. 17:35

북마한(北馬韓) | 잃어 버린 마한 2008.09.26 10:40 먼 발치 매운 눈

 

 

남쪽의 목지국 중심의 마한과는 다른 북마한

 

1931년 일본 학자인 고이즈미 아키오가 조사한 평양 남정리 116호 낙랑고분의 발굴 현장 모습. 
 
북마한은 과연 실제하였던 역사 일까? 그렇다면 그 위치는 어디였으며, 주체는 누구였을까? 한때 북마한을 평양지역으로 보고, 북마한이 낙랑국으로 이어졌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이 합리화 되기 위해서는 낙랑군과 낙랑국을 별개의 존재로 봐야만 했다.
   

즉 한무제가 세운 낙랑군등의 4군이 모두 한반도 밖에 있었으며, 이것은 위만조선역시 한반도 밖에 존재하였다는 설명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낙랑국은 처음부터 독자적으로 존재하였는데, 평양내의 낙랑관련 유물은 단지 교역이나 문화적 영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지, 낙랑군의 설치여부와는 무관하다는 것이었다.

  

확실히 평양일대 발견된 낙랑관련 유물들은 직접적인 물증이 되어주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낙랑태수 임명장이나 낙랑태수의 평양파견기록과 같은 확실한 기록이 추가로 발견 될 가능성은 대단히 희박하다.
  

하지만 한반도 외 한사군 설치설은 고구려의 한사군 정복기사와 여려면에서 맞지 않고,  요동지방에서 전개되었던 수많은 역사내용과도 맞지 않는 면이 있어, 그리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기존의 통설인 마한의 한강이남설과 평양 중심의 낙랑설 역시, 고대 기록에 나타난 마한과 낙랑의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하고 있다.

  

마한에 대한 1차 사료인 삼국유사엔 준왕이 마한을 세우고,  동명성왕 등극 시기를 전후하여 마한을 합병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전에 언급하였듯 이 북마한은 백제 온조왕이 병합한 목지국 중심의 마한과는 별개의 존재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점으로 인해 마한을 낙랑국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동명성왕때에도 낙랑군은 존재하였고, 또 낙랑군은 옛 평양성이란 분명한 기록이 있다. 비록 한나라에 의해 실효적, 행정적 지배가 이루어 지진 않았을지 몰라도, 평양이 옛 낙랑군이었음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그렇다면 낙랑군과 마한은 별개의 존재로 보아야 하는데, 그렇다면 과연 북마한은 어디에, 그리고 누구에 의해 언제까지 존재하느냐는 문제가 남는다.
   

그런데 일연은 회남자의 주에 東夷에는 9종이 있는데 각각 <현도, 낙랑, 고려, 만식, 부유, 소가, 동도, 왜인, 천비>이다.  따라서 현도나 낙랑 고려는 우리민족을 이루는, 여러 종족중 한 부류로 짐작할 수 있다. 
     

한나라가 고조선을 정복하면서, 현도나 낙랑, 임둔, 진번등 그 지역 명칭을 그대로 쓴 것은, 토착세력을 포용하는 중국의 전통적인 이이제의 방책이요 일종의 현지화 전략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고구려 본기에 나오는 마한 역시, 마읍산을 기반으로 하는 작은 종족이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준왕을 추종하는 잔여세력이었는데, 위만이 평양 일대까지 세력을 확장하자,  마읍산지역으로 기반을 옮겼을 것이다.
    

9夷중 하나였던 고려에 병합되었는데, 이 시기는 동명성왕의 왕위 등극과 시기를 거의 같이 한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팽창정책을 실시하고 있던 고려는 주몽을 왕위에 등극시킴으로써, 졸본땅의 강력한 왕국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또 신라 사람을 낙랑이라 부른 것 역시, 중국의 동쪽에서 바다를 접하고 있는 종족을 낙랑이라고 부른데서 유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낙랑이라는 이름이 요동에서 한반도에 이르기 까지 곳곳에서 발견되는 이유가 이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구려 태조대왕 때에 나와있는 마한을 살펴 보자. 고구려 태조 재위 70년에 마한, 예맥의 군사 1만명을 동원하여 요동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하지만 낙랑군 복속 내용은 이보다 늦은 94년에 나온다. 내용은 태조가 요동군 서안평까지 추격하여 낙랑군 태수의 처자를 사로잡는 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한은 이때까지 소국이나 혹은, 지방세력의 형태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또한 고대시대  합병이라는 단어는, 완전히 복속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고구려 본기에는 말갈이나 선비족에 대한 복속기사가 여러 차례 나오지만, 그것이 곧 완전한 복속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이것은 한나라가 임둔군이나 진번군 처럼 단지 일방적이고 형식상으로 봉한 것과 비슷한 예일 것이다.
  

특히 북마한이 남하하지 못한 것은, 남쪽에는 이미 목지국 중심의 마한이 강성하게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상으로 마한에 대한 문헌적 고찰을 마쳤다. 물론 북마한설에도 아직까지 미흡한 점이 많다. 과연 마읍산이 어디냐는 것과, 신라가 삼국통일 하면서, 고구려를 마한으로 격하 시켜 불렀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가능성을 염두해 두고서라도, 준왕이 바다를 건너 세운 마한은 평양이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여기에는 평양일대에서 발굴된 청동시대 유물의 시대적 고찰이, 준왕의 남하시기와 거의 일치 한다는 사실이  뒷받침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