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왕이 남하하여 세웠던 마한은 평양인근 잃어 버린 마한 2008.10.16 10:35
먼 발치 매운 눈
준왕의 남하와 마한국의 북변에 대한 고찰
고조선(古朝鮮)의 준왕(準王)이 남하하여 익산시 금마면에 도읍을 정하고 쌓았다는 기준성(箕準城),
표고(標高) 430m 미륵산에 있다.
우리나라 고대사에서 고조선의 강역못지 않게, 다양한 의견이 나오는 것이 마한의 영역이다.
현재 정설은 마한의 강역을 한강 이남지역으로 상정하고, 백제의 건국과 함께 예성강 이남지역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고조선의 멸망이 평양에서 이루어 졌다는, 전통적인 평양 고조선설과 맥락을 같이 한다. 즉 위만조선을 평양으로 보는 이상, 마한의 영역은 절대로 경기도에서 북상 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역사서는 유일하게 마한의 건국을 다루고 있는 삼국유사를 보리고 하자.
위지에 말하기를 " 위만이 조선을 치니, 조선의 왕 준이 궁인과 신하들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남쪽의 한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마한이라 불렀다."
".... 최치원이 말하길 "마한은 고구려요, 진한은 신라이다."
이상의 삼국유사 내용을 보면, 기존의 한강 이남설이 얼마나 설득력 없는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우리나라를 한국이라 하는데, 그 이름 자체에 삼한의 후예라는 뜻이 담겨 있다. 신라 시대에도 우리나라를 삼한국 혹은 韓국 등으로 불렀다. 더구나 최치원은 통일 신라 말기의 인물로, 그가 전하는 말은 가장 마한의 역사에 근접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마한을 고구려라 하였다. 그렇다면 마한이란 이름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알아 보도록 하자, 삼국유사에는 동명성왕이 일어나면서 이미 마한을 합병 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런데 마한의 북변을 38도선으로만 고집한다면, 이미 동명성왕때, 고구려는 한반도 중부까지 진출 해야만 한다. 그러나 38도선을 주장하는 어떠한 학자도, 동명성왕이 한반도 중부까지 진출하였다고 보지는 않는다.
삼국유사에는 <고구려 땅에는 본래 마읍산이 있었기 때문에 마한이라고 이름한다. >는 기록이 있고, 삼국사기에는 < 당의 소정방이 고구려 군대를 패강(대동강)에서 격파하고 마읍산을 빼앗아 병영으로 삼고 마침내 평양성을 포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상의 내용으로 보면 마읍산은 평양 인근의 산임에 분명하다. 따라서 준왕이 남하하여 세웠다는 마한은, 아마도 평양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한 땅에 이르러 세웠다고 하였으니, 마한의 영역은 한 때 평양까지 미쳤을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준왕의 남하로, 마한의 영역은 38도선 이남지역으로 축소 되었다. 그리고 후일 고구려가 영토를 확장해 이 지역을 점령 함으로써, 신라의 입장에선 고구려를 마한으로 부르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요약하자면 마한은 준왕의 남하로 인하여, 두 세력으로 나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보지 않는다면 동명성왕의 정복에서부터 시작되는 마한의 기사를 도저히 합리적으로 해석 할 수 없다. 더구나 동명성왕 이전에 이미 병합 했다는 기록으로 봐서는, 주몽이 탈 부여 하기 전부터 마한은 구려국에 복속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구려는 졸본연맹체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추정됨)
한편 중국측 사서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위략에 보면 준의 아들 우친은 자기 나라에 머무르고 있다가 성을 한이라 고치고 준이 바다에서 왕 노를을 한 뒤로 다시 조선에 왕래 하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서 '바다에서'는 '바다 건너에서'라고 해석 한다고 볼때, 평양에서 남하하여 예성강이나 금강등지에서 나라를 세웠다는 주장은 전혀 맞지 않는다.
그리고 한나라 때 그 땅을 낙랑군에게 붙였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준왕이 세웠던 마한은, 기존의 낙랑군설을 그대로 인정한다고 하여도, 평양 인근임이 더욱 확실해 진다.
마한의 영역에 대한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기록은, 진수가 쓴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나와 있다.
한은 대방 남쪽에 있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끝나고, 남쪽은 왜와 연접되어 있는데 지방은 4천리가 된다. 마한은 세 종족이 있는데, 첫째는 마한이요, 둘째는 진한이요, 셋째는 변한이다.
이상의 내용을 볼 때, 당시 마한이란 말은 삼한을 통칭하는 말로도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방4천리라는 영역은, 한반도 전체보다 더 넓은 영토이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우리나라는 최남단에서 최북단까지 대각선으로 그어야만 3천리 정도가 나온다.
물론 진수는 한반도를 실측했을리도 없거니와, 고대의 지리적 개념은 광범위하고 모호하다. 따라서 방 4천리가 어느 정도로 왜곡되었을지는 비교 자료를 통해 검토 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진수의 삼국지에는 이 4천리라는 개념을 추정할 수 있는 또 다른 기록이 있다.
그것은 대마도에 대한 기록이다. 진수는 대마도를 방 4백리로 표현하고 있다. 대마도의 남북 길이가 82km이니까, 4백리를 약 160Km로 볼 때 약 2배 정도로 왜곡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고구려나 부여에 대해서는 방 1천리로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진수가 쓴 지리 개념은 다소 일관성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고구려나 부여는 중국과 인접해 있는 나라일뿐더러, 오랫동안 교류를 하였기 때문에 비교적 정확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반면 부여나 대마도와 교류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매우 드물었기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마한의 영역도 2배 정도의 오류가 있었다보 볼 수 있다. 그런데 4천리의 절반인 2천리라 하여도, 사실상 한반도 전체를 포함하는 넓이 이다. 따라서 진수는 한반도 자체를 마한의 영역으로 간주 하였을 것이다.
진수가 마한의 영역을 한반도 전체로 보았다고 해서, 평양 마한설이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또 평양 마한설을 주장하였던 북학 사학계도, 최근 단군릉 발굴등의 성과에 힘입어, 그간의 주장을 전면 수정 하였다.
그러나 단군릉에 대한 진위여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또 고대 여러가지 기록으로 볼때 마한의 영역은 평양까지 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러한 주장에는 반드시 그것을 입증할 실증적인 유물 연구가 뒷받침 되어햐 한다. 하지만 고인돌과 세형동검의 분포등이 청천강을 기점으로 뚜렸하게 분리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 충분한 실증적 근거로 삼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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