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호 '마한'은 '말한'의 이두표기
영암 내동리 출토 옹관
단군조선은 삼경을 두고 그중 "펴라" 지금의 평양에 "말한"을 두었음은 앞에 설명했다. 후에 삼조선으로 갈리면서 말한은 "말조선"의 신한이 되고 국호를 원래 왕호로 쓰던 "말한"이라하고 이두표기로 마한이라 했다. 그리고 왕호는 "신한"의 이두표기인 "진왕"으로 쓰니 이것이 기록에 나오는 "마한국 진왕" 이다.
대대로 "한씨" 성을 가진 자가 세습을 하다가 신조선과 불조선이 차례로 망하며 유민들이 몰려 들자 전란을 염려하여 도읍을 "펴라"에서 "월지국" (지금의 공주 부근) 으로 옮겼다.
불조선의 준왕이 위만에게 망하고 해로로 마한으로 도망을 오니 마한왕이 받아 들여 도읍에 살게 하였더니 준왕이 이를 찬탈하고 마한의 국인들이 분노하자 스스로 성을 마한의 세습성인 한씨로 바꾸어 달래었다. (삼국지와 위략의 기록)
월지국의 위치에 대해 지금의 익산 "금마"라고 하는 설이 있으나 마한 50여 부족국가중 "월지국"과 "건마국"이 있으니 "건마국"이 곧 익산의 금마이며 "월지국"은 공주 부근이 된다고 본다. 이는 후에 백제와 마한의 경계가 "웅천" 곧 공주 부근이 됨으로 마한의 도읍이 그 부근에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말한"이란 비록 국호가 되었으나 신라시대에 왕호로도 계속 쓰여져 신라의 눌지, 자비, 소지, 지증왕 등 4왕은 다 "마립간"이라고 칭한 바 이는 바로 "말한"의 다른 이두표기 임을 알 수 있다.
마한은 신조선과 불조선의 유민을 낙동강의 좌우에 땅을 주어 살게 하고 각각 "진한부"와 "변한부"라고 이름하고 한반도 전역을 다스리다가 월지국으로 천도 후에 옛 도읍지 "펴라"(평양) 에 낙랑국이 "최"씨성을 가진 자에 의해 세워지면서 임진강 이남 지방을 강토로 가지고 있었는데 다시 소서로와 비류, 온조가 북에서 와서 마한왕에게 재물을 바치고 "미추홀"(인천) 과 "위례홀"(서울의 강남 지방) 을 나누어 가지면서 후에 백제가 강성하자 온조왕에게 망하였다.
원래 말조선은 100여 개의 부족국가를 속국으로 두었으나 낙랑이 25개국을 차지하고 진한과 변한이 각각 12개국 씩을 차지하여 백제에 망할 당시에는 마한은 겨우 54개국의 속국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 중 위치가 확인 된 것을 열거 하면 "비리"(현 부여) "감계비리"(현 공주) "월지"(현 공주 부근) "벽비리"(현 동복) "여래비리"(현 능주) "신소도"(신수두가 있던 곳으로 현 태안) "지침"(현 진천) "건마"(현 익산 금마) 등으로 많은 지명에서 "비리" 부리" "불리"등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우리 민족이 "불"로서 개활지를 개척한 증거 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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