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한이 무너진 까닭
▶ 기존 통설에 대한 비판
먼저 마한시대에 만들어진 유물을 살펴보자. “지난 97년 광주 광산구 신창동 초기 철기시대 저습지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 중에는 2천여년 전 마차의 부속품으로 추정되는 목제 수레바퀴가 포함(<연합뉴스>의 서기 2003년 1월 10일자 기사인「광주 신창동 유물서 철기시대 수레 부속품 확인」에서)”되어 있다. 이는 지금으로부터 약 2천 1백여년 전인 “당시에도 이미 우마차를 이용했다는 근거로서 큰 의미를 지닌다(「광주 신창동 유물서 철기시대 수레 부속품 확인」에서).” 국립광주박물관의 말에 따르면 "이는 단순한 운반용이 아니라 당시 지배계급이 타고 다녔던 마차로 추정된다(「광주 신창동 유물서 철기시대 수레 부속품 확인」에서).”니 마한은 전차(戰車)도 만들 줄 알았을 것이고, 따라서 마한이 ―『삼국지』「한전」의 기록에 나오는 대로 ― 소나 말을 부릴 줄 몰라서 백제에 졌다는 말은 성립될 수 없다.
대량으로 철기생산을 가능케 하기 위하여 만들었던 주조틀. "용범"이라고도 부른다.
그렇다면 마한은 철기를 만들 줄 몰라서 백제에게 졌을까? 그렇게 볼 수도 없다. 철제 유물을 분석한 결과 “한강유역에서는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까지의 사이에 괴련강(塊鍊鋼 : 뜨겁게 달군 철광석을 식혀서 산소를 뺀 다음 광석 안에 남아있는 불순물을 두드려서 없앤 쇠뭉치를 불에 달군 다음 두드리고 늘이어 더 튼튼하게 만든 강철 - 옮긴이)이나 주철(鑄鐵)을 제조하는 기술이 정립(노태천의 책『한국고대 야금기술사 연구』에서)”되었다는 결론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백제 왕실은 서기전 1세기 말에 마한으로 건너왔으며 마한이 백제에게 내어준 “동북방 1백리”는 경기도에 있었기 때문에, 이 유물들은 백제가 오기 전부터 있었던 것이며 백제가 오기 전부터 경기도 일대를 차지했던 마한이 만든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진한도 경기도에 있지 않았느냐고 되물으시겠지만 진한은 - 신라인의 기록인「신라본기」에도 나오듯이 - 진한과 변한을 속국으로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마한보다 힘이 약한 나라였을 것이며, 따라서 이 유물은 진한이 만든 것이라고 보긴 힘들다는 견해를 밝히는 바이다)
게다가 마한은 백제, 서나벌, 진한, 변한을 속국으로 거느리고 있었는데, 만약 마한이 이들 나라보다 힘이 약하거나 철기를 만들 줄 몰랐다면 과연 이들 위에 군림할 수 있었을지 의문스럽거니와 백제가 마한에게 포로를 보내고 선물을 바치면서 굽힐 까닭도 없이 곧장 점령해 버릴 수도 있었기 때문에 마한이 철기를 쓴 사실 자체는 의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또한 비류/온조를 따라온 졸본부여인들의 수가 많지 않았으니만큼, 이주민의 수가 토착민의 숫자보다 많아서 이길 수 있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그런 사정은 서나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 망명정권의 내부 분열
그렇다면 마한이 무너진 까닭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나는 그 해답 - 마한과 백제 사이에 일어난 일을 냉정하게 적을 수 있는 - 중국 사서의「동이전」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한 왕실의 기원을 다룬『삼국지』「한전」의 기록을 살펴보자.
"준은 …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좌우 사람들과 궁인들을 데리고 바다를 건너 한(韓)땅에 이르러 한왕(韓王)이라 자칭하였으나 그 뒤에 망했다."
보다시피 마한 왕이라고 “자칭”한 세력의 선조는 기자(箕子)의 후손인 '준‘이다. 그가 서기전 2세기에 “연나라 사람(『사기』「조선 열전」)”인 위만에게 속아 나라를 빼앗기고 동쪽의 “한(韓) 땅”에 망명하여 왕이라 칭하였다. 이는 기자족의 한(韓) 정복이다.
나라 이름을 처음부터 '마한'이라고 짓지 않고 '한(韓)'이라 불리던 땅에 다다른 뒤 스스로를 '조선 왕'이 아닌 "한(韓)왕"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는『삼국사기』「백제본기」에 나오는 마한 왕실이 오래전부터 마한 땅에 자리잡았던 '토착 세력'이 아니라, 원래는 하북성이나 요령성에 있다가 동쪽으로 밀려난 기자족(箕子族)일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
▶보충 설명 :
이덕일/이희근에 따르면 서기 “1973년에 중국의 동쪽이자 만주의 서쪽지역인 요녕성(遼寧省) 객좌현(喀左縣)에서 기후箕侯의 명문이 있는 방정(方鼎. 세 발을 지닌 구리 솥. 청동기 시대에는 통치자의 권력을 나타내는 상징물이었다 - 옮긴이)”이 나왔는데, 이 “유물의 제작 시기는 상(商)나라(:‘은殷’나라의 정식 명칭. ‘은殷’은 서주가 상나라를 무너뜨린 뒤 붙인 이름이다 - 옮긴이) 말기이므로 기자의 생존 연대와 일치”하므로 ‘기자’라고 불린 무리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고 한다.
다만 유물이 나온 곳이 “지하에 구덩이를 파서 임시로 청동예기를 파묻는 임시 저장소”인 “교장갱”이고 중국 기록인『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에는 “기자가 맡아 다스리던 땅으로 전해내린다”는 조선현(朝鮮縣)이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산해관의 서쪽인 영평부(永平府) 인근”으로 나오기 때문에,
요서지방인 대릉하 유역에서 ‘기후’라고 새겨진 구리 솥이 나왔다 하더라도 “이는 기자와 그 집단이 이곳에 왔어도 무덤을 사용하지 않을 정도로 잠시 동안만 거주했다가 곧바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며, 기자족은 처음에는 서주(西周)군을 피해 요서지방으로 달아났다가 나중에 상황이 안정되고 나자 서주 왕실의 권유대로 근거지를 하북성인 영평부 인근으로 옮겼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
그들은 한(韓)을 정복한 뒤 자신들이 ‘남쪽(:순우리말로 “마”임)의 한을 다스리는 사람들’임을 알리려고 성을 한(韓)씨로 바꾸고 나라 이름도 '조선'에서 (자신들이 정복한) '한(韓)'으로 바꾸었을 것이다.
실제로『삼국지』「위지」한전에 인용된 『위략』의 기록은 기준왕의 아들이 아버지를 따라 성씨를 바꾸었고 기준왕은 마한 땅에 머무른 채 '고향'인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하여 이 가설에 힘을 실어준다.
"준왕은 … 스스로 한왕(韓王)이라고 했다.『위략』이 말하기를, 그의 아들과 친척들은 고국(:조선)에 있으면서, (그를)따라 성을 한씨라 했다. 준왕은 해중(海中 : 바다 너머, 바다 건너)에 있으면서 (위만에게 넘어간 - 옮긴이) 조선과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고 한다."
―『삼국지』「위지」<한전>
"(준왕은 - 옮긴이) 무리 수천을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가 마한을 쳐서 깨뜨린 다음 스스로 나라를 세우고 한왕(韓王)이 되었다."
―『후한서』「한(韓)전」
따라서 마한은 원래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삼남, 강원도를 아우르는 토착민의 왕국이었는데, 기자족의 왕국이 진/한 교체기에 "연나라 사람(『사기』「조선 열전」)"인 위만에게 쫓겨나자, 평안도로 쳐들어 온 준왕에게 나라를 빼앗겼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기자족은 평안도에서 잠시 숨을 돌린 듯하나(『제왕운기』에도 평양 일대가 옛 마한 땅이었다고 적혀 있음), 곧 용성국이나 (역시 위만조선에게 쫓긴) 낙랑국, 압록강을 넘어 내려온 가야국과 맞닥뜨리게 된다(나중에 자세히 설명).
상황은 원래 흑룡강성에 자리잡았던 예(濊)국(『삼국지』나 『후한서』의 부여전에는 부여국의 땅이 “옛 예족의 땅”이며 부여 왕이 “예왕의 도장”을 지니고 있고 “노인들 스스로가 도망쳐온 사람들이라고 말한다”는 구절이 있음. 이로 미루어볼 때 부여족은 예족의 땅에 쳐들어가 예족을 밀어낸 듯하다.『삼국유사』에도 동부여의 재상 아란불의 꿈에 ‘천제의 사자’가 나타나 “장차 천제天帝의 아들 - 북부여를 세운 해모수 - 이 이곳에 올 터이니, 너희는 떠나거라.”는 말을 해서 동부여인이 동쪽으로 옮겨갔다는 구절이 나오거니와, 이는 북부여 때문에 동부여가 밀려나고, 동부여 때문에 예족이 밀려난 증거로 보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과, 원주지에서 쫓겨난 맥국이 강원도로 내려오면서 더 복잡하게 꼬인다.
마한 왕실(:한韓씨족)은 ― 자신도 정복왕조여서 피지배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으므로 ― 밀려드는 유이민을 막지 못했고, 낙랑국과는 적으로 돌아선 듯한데, 이는 백제가 올 때 마한의 중심지는 평양이 아닌 금강 유역(:충청도)이었고(김성호/김상 설), 낙랑국은 고구려의 "남쪽"인 평안남도에 자리잡은 사실(윤내현/일도안사 설)을 볼 때 알 수 있다(또 백제 왕실은 낙랑의 “태수”와 다툰 뒤 마한에 오며 마한은 그들의 망명을 받아준다. 마한이 낙랑과 사이가 좋았다면 낙랑과 싸운 백제의 왕실을 받아줄 리 없었을 것이다).
(「백제본기」에는 마한 왕이 온조왕에게 “왕이 처음 왔을 때 내가 … 동북 1백여리의 땅을 나눠주었다.”고 말하는 구절이 나옴. 물론 마한 왕이 준 땅은 마한의 중심지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 “동북쪽”인 곳에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고, 이 무렵 한성백제의 중심지는 경기도에 있었으므로 마한의 중심지는 경기도의 서남쪽인 충청도였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충청도와 경기도에 '가라'라는 땅 이름이 나타나고(김성호 박사의 책『씨성으로 본 한일민족의 기원』에서) 전북 남원이 '용성군'으로도 불렸다는 사실로 미루어보면 새 마한은 가야나 용성국과는 - (백제나 진한, 서나벌한테 그랬듯이) 그들의 군주를 제후로 삼고 땅을 나눠준 뒤 '자치권'을 인정해주어 - 타협한 듯하다(용성국이 자리잡지 않았다면 남원이 고룡古龍군이나 용성군으로 불릴 리가 없음).
마한은 예/맥족에게는 강원도를, 낙랑국한테는 평안도와 황해도를 빼앗긴 듯하나(기록이건 전설이건 마한이 이들과 접촉한 사실이 안 나옴. 그러나 낙랑은 엄연히 평안도에 자리잡고 있었고 이는 유물로도 확인된다. 또한 예/맥족은 - 강원도 평창군에 전해지는 또다른 태기왕 전설로도 알 수 있듯이 - 강원도를 놓고 치열하게 싸웠으며,『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서나벌의 백성이 밭을 갈다가 “예왕濊王의 도장”을 주워 이를 남해차차웅에게 바쳤다는 기사가 나온다.『삼국지』「예전」에 나오는 예의 위치도 강원도로 보인다),
용성국/가야/서나벌과는 (백제를 제후국으로 삼았듯이) 주종 관계를 맺은 듯하며, 이로써 일단 발등의 불을 끌 수 있었을 것이다. 마한 왕실은 이들을 받아들이는 대신 이들의 군사력을 동원하여 불안한 북쪽 국경지대를 지키고 마한 토착민들의 반발을 억누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는『삼국사기』「신라본기」에 마한 왕이 서나벌에게 "너희는 우리의 속국인데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큰 나라를 대하는 예(禮)가 이런 것이냐?"고 따지는 구절과, 백제가 웅천책(熊川柵)을 쌓기 전까지는 마한 왕실에 신록을 선물하고 사로잡은 말갈 추장 소모(素牟)를 마한 왕실에 보내는 사실로도 입증된다.
그러나 땅을 자꾸 내어주고 침입자들에게 밀린 마한의 왕실은 - 결과적으로 - 마한의 백성들에게 허약함을 드러내고 말았으며 그들은 마한의 왕실과, (왕실과 동맹을 �은) 용성국, 가야국, 서나벌을 못마땅하게 여겼을 것이다.
이런 감정은 왕실에 대한 마한 토착민의 반감으로 이어져 마한의 힘을 줄이는 결과를 부러왔을 것이다(「백제본기」온조왕 조에도 온조왕이 "마한이 점점 쇠약해져,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마음이 멀어져 배반하고자 하니, 그 형세가 오래갈 수 없다."고 말하는 구절이 나온다).
▶ 마한의 멸망과 그 이후
한성백제의 왕은 이런 상황과, '이웃'이 된 서나벌의 힘이 세진 것을 보고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마한을 서나벌에게 빼앗기거나, 아니면 백제가 밀려날지도 모른다. 서나벌이 마한까지 빼앗는다면 세운지 얼마 안 되는 우리는 위험해진다.'고 생각했을 것이며, 그래서 선수를 치자고 마음먹은 뒤 마한의 영역을 꾸준히 병합했을 것이다. 마한 왕은 백제가 마한의 왕성과 가까운 곳까지 밀고들어가 웅천책을 세웠기 때문에 위기의식을 피부로 느껴서 항의했지만(『삼국사기』「백제본기」에 마한 왕이 웅천책 설치를 따지는 구절이 나옴), 백제는 그 이전에도 마한의 영역을 빼앗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는 얘기다.
백제는「백제본기」에 나오는 대로 기습전을 펼쳤을 것이며, 피지배층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왕족과 몇몇 '제후국'들(서나벌, 가야, 용성국)의 군사력으로 겨우겨우 지탱하던 마한은 갑작스런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무너졌다고 짚어볼 수 있다.
『가락국기』에 가야가 김해에서 (다시) 세워졌다고 적혀 있고(‘가라’라는 땅 이름은 평안도부터 - 전라도를 제외한 - 전국에 하나씩 위치함. 김성호 박사와 김상 교수는 이 지명들은 ‘가라’라는 이름을 지닌 집단 또는 나라가 옮겨다니면서 자신들의 이름을 남겨놓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보고 있음.
또한 다른 기록에 따르면 “천신天神 이비가”와 가야산의 산신 정견모주가 부부가 되어 ‘뇌실청예’와 ‘뇌실주일’을 낳았는데, 뇌실청에가 훗날의 김수로왕이 되었다고 적혀있어 가라국이 김해가 아닌 다른 곳에서 세워졌다가 누군가에게 밀려나 가야산으로, 다시 가야산의 동남쪽에 있는 김해로 내려와 다시 나라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가야를 세운 사람들이 서기 42년에 김해에 도착한 점으로 미루어볼 때 그들은 마한이 무너진 뒤 세력을 뻗치던 백제를 피해 달아난 듯하다),
용성국의 왕자인 탈해이사금이 경주로 달아나 신라를 세우며(『삼국사기』/『삼국유사』/『수서』), 서나벌이 강원도에서 충청북도로, 충청북도에서 경상북도 상주로 달아난 사실(『삼국사기』「신라본기」)은 세 나라가 마한 왕실의 편을 들어 백제군과 싸웠다가, 져서 동남쪽으로 밀려났다는 증거라고 봐야 할 것이다.
만약 이들이 마한 왕실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나라였다면 굳이 새로 들어선 백제를 피해 달아날 필요가 없으며 백제와 싸울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청주 한씨 족보에도 마한의 세 왕자 가운데 한 사람은 "신라 탈해왕"에게 투항해 청주 한씨의 시조가 되고, 다른 한 사람은 "황룡국(오늘날의 대동강 하구에 있던 나라 - 옮긴이)"으로 달아나 "북원(北原)" 선우씨의 시조가 되고, 마지막 한 명은 백제에 항복해 기(奇)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적혀있어 마한 왕자가 (청주로 밀려난) 서나벌에 투항한 뒤 그들과 함께 싸웠음을 알려 준다(용성국 사람인 탈해는 섬진강을 따라 바다로 내려갔으므로 내륙지방인 청주에서 마한 왕자와 만날 순 없음. 따라서 나는 청주 한씨의 시조는 탈해가 아니라, 탈해와 비슷한 시기에 서나벌을 다스리던 군주에게 투항했다고 본다).
(이 무렵 마한의 왕성은 한(韓)씨였고 "신라"에 투항한 왕자만이 자신의 성씨를 고스란히 지킬 수 있었느니만큼, 이 무렵 두 나라(마한과 서나벌)의 왕족이 서로 동맹을 맺고 백제에 맞서 싸웠다고 짐작하는 것이다)
그런 가정을 받아들인다면「신라본기」에서 "마한의 성주 맹소가 복암성을 바치고 (서나벌에) 항복"한 까닭을 알 수 있다. 새 마한을 무너뜨린 나라는 백제였지 서나벌이 아니었고 자기네 왕자까지 서나벌과 손잡았느니만큼, 항복하지 못할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이제 원래 다루던 주제로 돌아가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백제는 -『후한서』에 준왕의 후손이 망한 뒤 '옛 마한 사람이 다시 진왕이 되었다.'는 구절이 나오므로 ― 마한 왕실을 무너뜨린 뒤 마한 백성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자신들이 마한의 뒤를 잇는다고 선포했을 것이며,
(준왕의 후손인 한씨족이 망한 뒤 일어선 세력은 백제인인데, 외부 관찰자인 중국 사서가 “옛 마한 사람”이 “다시 진왕이 되었다”고 말하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이들은 정식 국호는 백제로 선포하되, 자신들이 ‘마한의 계승자’이기도 하다는 점을 선전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가설이 사실일 경우 백제인은 만주족인 청나라의 지배층이 청나라가 - 한족의 나라인 - 명나라를 이은 ‘중국의 정통 왕조’라고 선언했듯이 자신의 나라를 마한의 뒤를 이은 ‘새로운 마한 왕조’라고 선언한 셈이다)
토착민을 모조리 죽이고 빈 터에 백제인을 옮겨 살게 하는 대신, 적국의 지도자만 죽이고(예컨대 “마한의 옛 장수인 주근”을 죽인 일) 백성들은 자신들의 신민(臣民)으로 받아들이는(마한인들의 항복을 접수하는) 방법으로 빠른 시간 안에 영토를 넓혔을 것이다(백제는 마한을 무너뜨린 뒤 도읍을 한강 유역에서 금강 유역으로 옮겼을 가능성이 크다. 이유는 나중에 다시 설명하겠다).
단, 서기 9년에 무너진 “마한”은 어디까지나 마한 왕실이 자리잡은 마한의 도읍지이며 마한의 나머지 성들은 서기 16년 주근이 죽은 다음에도 꾸준히 저항해 백제는 이들을 하나씩 하나씩 병합하느라 애를 먹었을 것이다.
▶ 백제의 마한 정복에 대한 평가
마한이 내부분열을 일으켰고 서나벌이 마한에 대들 정도로 강해졌다면, 백제의 마한 정복은 합당한가? 백제의 정복은 서나벌이 마한을 호시탐탐 노렸기 때문에 일어난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서나벌은 백제가 세워지기 세 해 전(서기전 20년) 전에 마한을 칠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한을 내버려두었고([삼국사기] <신라본기>), 마한이 망한 다음에도 마한 왕자의 망명을 받아주며 마한의 편을 들기 때문이다([청주 한씨 족보]).
게다가「백제본기」에 적힌 ‘이설(異說)’에 따르면 비류는 유리에게 왕위를 빼앗기자 “남쪽으로 가서 <좋은 땅을 찾아 따로 나라를 세우는 것이 낫겠다>.”고 말했고(< >는 옮긴이) 마한 망명은 그 이후에 이루어진 일이니, 백제인의 망명은 순수한 망명이 아니라 나라를 세우고 싶어하는 욕심을 숨긴 도망이었다고 봐야 한다.
※참고 자료
―『삼국사기』
―『삼국유사』
―『사기』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2』(이덕일/이희근 지음, 김영사 펴냄)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김성호 지음, 지문사 펴냄)
―『고대의 삼조선과 낙랑』(강경구 지음, 기린원 펴냄)
―「광주 신창동 유물서 철기시대 수레 부속품 확인」(<연합뉴스>의 서기 2003년 1월 10일자 기사)
-『한국고대 야금기술사 연구』(노태천 지음, 학연문화사 펴냄)
/김상
'考古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대 한일 관계의 진실은 (0) | 2009.03.29 |
---|---|
마한의 고도 반남성(潘南城, 가칭), 전설 속에서 현실로 (0) | 2009.03.29 |
호남 대형고분의 비밀 (0) | 2009.03.29 |
마한에서 일본으로 간 농업및 철기문화 (0) | 2009.03.29 |
마한연맹왕국을 가리키는 것 / 하나의 고분 안에 여러 사람들을 매장 (0) | 2009.03.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