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한의 고도 반남성(潘南城, 가칭), 전설 속에서 현실로
무수히 많은 반남의 고분군 들의 주인은 과연 누구였을까?
어렸을 적 말무덤 또는 조산이라고 불리었던 그곳에서 국보급 금동관과 금동신발이 출토되었다. 역사적 상식으로도 이곳에선 왕이 주거하였으며, 수십 기의 분묘가 있다는 것은 오랜 시간동안 국가가 존재했을 수 있다는 추측을 가능케 해준다.
금동관은 적어도 기원 300-400년대 때 유물로 밝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통일신라시대 이전인 삼국시대에 존재한 마한국이 이곳에 수도로 자리하지 않았을까 하는 가정을 하게 되었으나 1400여년이란 장구한 역사 속에서 몰락한 정권의 유물이나 기록과 같은 구체적인 추가적 물증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기에 우리는 그저 외형만 보고 상상 속에서 전설로만 마한국의 역사는 우리들에게 전해져 내려왔다.
자미산을 둘러 쌓은 자미산성의 흔적. 멀리서 보면 계단식으로 쌓은 토성의 흔적이 보인다. 사진-오창석
그러나 반남의 고대사를 끊임없이 연구해온 여러 고고학자들의 노력의 성과가 하나씩 우리를 놀라게 하고 있다. 자미산을 중심으로 축조된 자미 산성은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목포대학교 고고학 조사 팀에 의해 이미 밝혀졌고, 자미 산성 외에도 또 하나의 본 성이 존재했으며, 이 성이 곧 왕과 그 세력이 이 지역에서 실존했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마한국 실존의 사실을 결정적으로 증명해주는 단서가 되는 소위 “반남성”의 성터가 발굴된 것이다.
반남의 입장에서 대단히 중요한 실마리가 아닐 수 없기에 발굴조사를 담당한 전남대학교 임영진 교수의 하락하에 자료의 일부를 공개하고 이번 발굴결과는 엄청난 진실의 일부분이므로 감춰진 전체의 비밀이 밝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 반남 인의 관심과 애정이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다는 긴박한 심정으로 글을 올린다.
1. 반남성 발굴결과 개요
수년 전부터 여러 학자들은 무수한 고분들의 주인이 거주했을 근거지를 찾기 위해 자미산 주변지역에 대한 탐사를 부단히 해 왔다. 전국 언론에도 몇차례 다큐멘터리로 발표되기도 했지만 증거가 아직은 미약하여 가능성만 더해주었을 뿐 결정적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성내부락 나종성씨 집터 주변에서 작은 실마리가 잡히게 되었고, 이러한 실마리를 근거로 나주시의 지원을 받아 정밀조사를 할 수 있게 되었는데, 바로 그 나종성씨댁 뒤편 대나무밭 주변에서 확실한 성터 근거를 찾아내는 개가를 거두게 되었다. 성터의 진행방향을 따라 마을 앞 논에서 확인 시굴이 있었는데 여기서도 정확하게 성이 연결되었음을 입증해 줄만한 근거를 찾게 되었다.
이번 발굴의 목적은 과연 이곳에 성이라는 존재가 있느냐의 문제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왜냐면 발굴지원예산의 범위가 여기까지였기 때문이다. 일단 성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으니까 이제는 그 성의 범위는 어디까지였으며, 그 성안에 관아라든지 건물들이 어디에 어떤 규모로 존재했을 까라는 주거부분까지 밝혀 내야하는 숙제를 남기게 된 셈이다.
2. 반남성 그 의미가 무엇일까?
우리나라의 고대사 부분은 문헌이나 자료가 매우 빈약한 실정이다. 기껏해야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같은 몇권의 자료밖에 남아있지 않은 안타까운 실정이다.
그런데 역사라는 게 언제나 경쟁관계에서 이긴자 즉 강자의 논리에 의해 강자를 대변해주고 옹호해주는 입장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서 삼국통일-고려-조선시대를 거쳐오면서 이러한 정치적 실세가 아닌 역사는 철저히 매도당하고 무시되었으며, 아예 삭제되거나 멸실
시켜버리는 예가 허다하다.
자미산성 샘터
승자의 입장에서 패자의 역사를 좋게 표현하고 남겨둘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가 많이 왜곡되어있기도 하고 대부분이 삭제되어 흔적조차 없는 경우가 많다.
백제시대 영암의 왕인박사가 일본에 가서 학문을 깨우쳤다고 우리는 교과서에서 배웠지만백제의 수도인 공주에서 영암 까지란 너무도 먼거리고 한나라를 대표하는 학자가 백제의 수도에서 머나먼 곳에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결국 왕인도 반남을 중심으로 국가를 형성했던 마한의 사람이라는 게 입증되고 있다.
이것은 마한의 역사가 백제의 역사 속에 묻히고, 백제역사는 다시 신라의 역사 속에 묻힌 오늘의 우리 역사이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많은 역사가들은 마한의 역사를 부정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본인들의 그간의 논리와 업적이 송두리체 무너져 내리기 때문에 자신이 써온 글들을 방어하기 위해서 아마 부정하는 것이다.
반남의 무수한 고분에 대해서는 백제의 일부세력이 잠시 머물면서 남긴 흔적이라든지, 즉 왕권이 형성된 막강한 국가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억지로 외면하고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백제 무열왕릉의 크기는 대략 무덤의 직경이 30여미터 정도인데 반남의 고분은 40미터가 넘는 것들이 여러 개가 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계급구조가 심화되는데 지방의 호족이 백제국의 왕족보다 무덤을 크게 썼다는 것은 모순이다. 분명 새로운 마한국이 존재했음이 분명한데 지금까지 그 왕국이 어디에 어떻게 존재했는가에 대한 자료가 없었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현실이다.
반남 성의 발견은 이러한 취약점을 보완해주는 결정적 근거가 될 수 있다. 반남성의 경우에 따라 금동관과 함께 국보급 성이 될 수 있는 가치가 충분하다는 임영진 교수의 의견이다. 결국 경주나 부여 못지 않은 왕국이 반남에 실존했다는 것이 정부에서 공식 인정되면 보다 많은 조사를 통해 그 자료를 토대로 자미 산성, 반남성이 복원될 것이고 성내에 관아등도 복원될 것이며 박물관하나 정도 만들어지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반남의 역사가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는 일대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남은 나주에서조차 외면 당하는 설움을 받고 있다는게 사실이다. 우리가 밖으로부터 관심과 에너지를 끌어들일 만한 근거하나 없었다는게 지금까지의 부끄러운 현실이었다고 생각한다면 반남성의 가치에 대해 반남인 모두가 이제는 새로운 희망과 의지를 심고 만들어가야 할 중요한 계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우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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