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마한에서 일본으로 간 농업및 철기문화

吾心竹--오심죽-- 2009. 3. 29. 17:21

마한에서 일본으로 간 농업및 철기문화 

 

 

영산강 유역의 마한 지역은 일본 농경의 시작인 죠몬과 야요이 문화를 이끌어 일본 문화가 시작될 수 있도록 했다. 일본과 마한 지역의 관계는 이후 백제와 일본 왕실의 관계까지 이어진다.

 

일본고대의 ‘야요이 시대’(BC3~AD3)를 전후하여  벼농사와 거석, 청동기, 철기 문화 등이 주로 마한(馬韓, BC3~4)에서 일본 큐슈(九州)로 전파되었다. 영산강 유역에서 발전한 조선기술로 고대 한일해협을 건널 수 있었던 마한 사람들이 큐슈 지역에 집단으로 이주했다.

 

“2000년 전 한국에서 ‘야요이인(彌生人)’이며 ‘고분인(古墳人)’들이 새로운 개를 데리고 왔다. 그 이후로 인간이 혼혈(混血)하여 현재의 일본인이 된 것처럼 이 때 혼혈한 개들이 현재 대다수의 일본 견종이 되었다.”. 타나베 유이치 교수(아자후대학 수의학과)가 필자에게 보내준 ‘개로부터 찾아내는 일본인의 수수께끼’란 논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이 건너 갈 때 개도 함께 간 것이다.

 

일본에서 ‘야요이인’은 서기전 3세기(BC.3) 이전부터 한국 남부에서 일본으로 건너 간 한국인을 가리키고 ‘고분인’은 서기 3세기(AD.3) 이후 도래인을 말한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 간 사람들과 일본 선주민(先住民)이 혼혈한 것처럼 한국개도 건너 가서 혼혈했다는 연구는 꽤 실감나는 내용이다. 그러나 고대 한국인은 개만 데리고 일본으로 간 것은 아니다.

 

석기시대부터 철기시대까지 큐슈에 전해진 한국제 괭이, 삽, 낫, 칼 등의 농기구를 일본 북큐슈 요시노가리(吉野ケ里)유적(사가현 동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가야 지역도 부분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큐슈 남부의 사이토바르(石原, 지금의 미야자키현 사이토시) 유적이며 쿠레이시바르(礫石原) 유적, 하라야마(原山) 유적(역시 나가사키현 시마바라반도) 등에서도 그 흔적이 있다.

 

고대 한국의 농기구와 쇠로 만든 생활 도구며 대장간 시설까지 마한(馬韓)을 중심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문화는 큐슈 지역을 일본 농업 문화의 모체로 만들었다.

 

일본 고대의 각종 기구에는 마한 등에서 건너 왔다는 뜻인 한(韓)자들이 잇따라 붙여졌다. 고대일본 문헌에 보면 대장간을 카라카누치(韓鍛冶/한단야)로, 무쇠로 만든 삽을 카라사비(韓?/한조)라고 불렀다. 카라사비의 “사비(?)는 조선어의 ‘삽’과 동계어(同系語)이다”(카나자와 쇼사브로, 國學院大學 교수). 소가 끄는 ‘철제 쟁기’는 ‘카라스키’(韓鋤)라 했고 농작물을 타작할 때의 ‘도리깨’도 역시 ‘한’(韓)자를 머리에 붙여 ‘카라사오’(韓竿)라고 불렀다. 나무로 만든 목제 농기구 역시  ‘한’(韓)자를 붙여 써왔다.

 

한반도로부터 철제 농기구가 건너가기 전, “일본에 살던 사람들은 원시적인 생활을 했다. 논농사도 지었다지만 처음에는 골짜기의 물을 막아서 썼다. 농사는 나무로 만든 괭이나 삽으로 밭을 갈고 벼가 익으면 손이나 돌로 만든 칼로 벼이삭을 땄다”(교토대의 카도와키 테이지 교수, 1957). 목제 농기구며 돌칼 역시 한반도 남부로부터 큐슈 지역으로 옮겨갔다. 그 이전 일본인은 경작 농업 없이 맨손이나 나무 꼬챙이로 바닷가의 조개를 캐거나 나무 열매를 따먹는 채집으로 식생활을 해결했다.

 

“벼농사는 북큐슈에서 시작해 세토내해(瀨戶內海, 일본 열도 서쪽의 길고 큰 내륙 안쪽 바다)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여 야요이 문화를 낳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 무렵 북큐슈와 남한은 매우 밀접한 관계였다. 남한은 최근에도 그렇듯이 쌀농사의 최적지이며, 2천년 전부터 일본과 벼농사가 서로 이어졌다.”(도쿄대의 야와타 이찌로 교수,1953) 여기서 구체적으로 마한 지역 농경 문화의 일본 북큐슈 지역 전파에 관하여 살펴보자.

 

지금부터 약 2300년 전 마한 등 한반도로부터 일본 큐슈 등지로 ‘벼농사법’이 건너 간 것에 대해 카도와키 테이지 교수는 고고학적인 면에서 이렇게 말한다.

 

“남한 특유의 바둑판형 고인돌이 북큐슈의 조몬시대(BC 3세기 이전의 고대) 말부터 야요이 시대(BC3~AD3) 전기(前期)에 만들어진 것과, 남조선의 지석묘에도 들어있는 마제 석기가 북큐슈의 야요이시대 전기 유적에서도 발견되기 때문이다.”(1967).

 

“야요이 문화는 한국과 중국에서 들어왔다. 벼농사는 한반도 남부로부터 북큐슈로 전파되었다. 일본 열도에 많아 자포니카라 불리우는 벼 품종은 중국 장강 하류 유역을 거쳐 조선 남부로부터 들어 온 것이다.”(교토대의 우에다 마사아키 교수, 1976) 중국을 경유하여 한반도 남부 로부터 큐슈의 야요이 문화는 큰 영향을 받았다.

 

“벼농사를 비롯하여 철기문화며 마제석기에 이르기까지 마한의 문화는 큐슈땅에 넘쳐왔다”(요시노가리 유적 현장에서 큐슈대의 니시타니 타다시(西谷 正)교수의 말, KBS-TV, 2004.9)

 

일본과 마한 땅의 인연은 백제로 이어졌다. “일본 왕실은 5세기 후반부터 완벽한 백제 왕가(百濟王家)”(水野 裕, 1978)로서 백제인 오진왕(應神王, 5C 후반)의4왕자인 닌토쿠왕(仁德王, 5~6C)은 스승이며 왕실의 정무장관(西文首)이었던 왕인(王仁)이 와카(和歌, [難波津歌])를 지어 왕위를 권유해 등극했다. 

 

박사 왕인이 마한땅의 영산강을 떠나 대마도를 거쳐 북큐슈의 사가현 동부로 상륙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현재 이곳에는 왕인천만궁(王仁天滿宮) 사당이 이어져 오며 ‘왕인석이상’(王仁石人像)도 보존되어 있다. 왕인이 공부했다는 전남 영암 월출산(月出山) 석굴 앞의 석인상(石人像)과도 매우 흡사하다.

 

교토시립예대 우메하라 타케시 교수는 “니니기노미코토(일본 역사 신화의 일본 개국신/필자 주)가 이끄는 천손족(天孫族)이 한반도에서 건너와 큐슈 남부에 상륙했다. 벼농사 기술을 가진 이 집단은 차츰 그 세력을 사이토바르(石原)에 까지 펼쳤다”(2002)며 영산강 유역의 마한인이 북큐슈로 상륙한 일본 정복의 ‘신화 민족’이라 말한다.

 

“이 사이토바르 유적지 고분군에서는 선박 모형(길이 101cm)의 ‘하니와’(왕릉 등 큰 무덤 매장자의 사후 호위를 위해 찰흙으로 구워 만든 부장품)가 발굴되었다(도쿄대 오오바야시 타료 교수, 1986).” 10여명이 탈 수 있는 형태의 이 선박의 원형은 마한 등 일찍부터 조선술이 발달한 영산강 일대에서 바다를 왕래했다. 일본에서는 4백 년 후인7세기에도 조선술이 크게 뒤져 당나라로 공부하려 가는 승려 등이 배편을 구할 수 없었다.

 

7세기 일본에서는 사신과 학승을 신라와 당나라로 보낼 때 ‘신라배’의 신세를 져야 했다. “서기 622년에 신라배를 얻어 타고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학생이며 학승이 야마토 조정에다 보고하기를 <지금 당나라에 체류중인 일본 학승과 학생들은 모두 공부가 끝나서 빨리 귀국할 수 있도록 마중하여 달라고들 합니다>라고 진언했다. 당나라로부터 돌아오는 사람들은 모두가 신라의 당나라 사신이 타고 오는 배를 얻어 탔다”(큐슈대의 다무라 엔쵸 교수, 1989).

 

야요이 시대 북큐슈 등 서(西)일본에서는 주로 마한 등 남한 도래인들이 정착해 선주민들과 혼혈을 이루었다. “서일본의 야요이 전기의 인골에는 키가 작은 죠몬인과 평균 신장 163cm의 키가 큰 남성 인골이 있다. 한국 남부로부터 건너 온 도래인의 피를 받아서 비로소 야요이인이 생겼다고 본다”(靑木美智男外, 1993). 키가 작고 왜소한 선주민인 죠몬인들이 살고 있던 곳으로 벼농사와 철기문화를 가진 키가 큰 마한인 등이 건너 가서 야요이 문화를 일으켰다.

 

농사법을 모르는 사람들을 지도하는 몸이 크고 키가 큰 한국인이, 키가 작은 선주민들을 지배하며 부락을 이루고 부락의 수장(首長)들은 이웃 지역 수장들과 손잡고 야요이 문화를 이끌었다. 수장들이 죽으면 마한에서처럼 장엄한 장례식을 거행하고 시신을 항아리 속에 넣어 고인돌에다 장사 지냈다. 항아리를 묻은 묘지를 일컬어 옹관묘(甕棺墓)라고 부른다. 관 속에는 구리거울(銅鏡)이며 구리칼(銅劍) 등을 함께 넣었다. 옹관 대신 돌로 만든 석관도 썼다. 석관은 돌로 만든 지석묘 밑에 모셨다. 북큐슈에서는 그와 같은 옹관묘며 지석묘가 많이 발견되었다.

 

고인돌이 많은 영산강 일대의 고대 마한은 일본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고 죠몬, 야요이 문화는 즉 북큐슈에서 세도 내해를 거쳐 일본 서부 지역으로 널리 퍼져 오늘의 오사카는 물론 나라, 쿄우토 등으로 빠르게 퍼져갔다. 시간이 흘러 야요이 중기에 이르면 야요이 문화는 오늘의 도쿄(東京) 등 동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카나가와(神奈川), 시즈오카(靜岡), 치바(千葉) 등등 태평양 연안 일대로도 펴졌고 야요이 후기에는 일본의 토호쿠(東北) 지방인 아오모리 (靑森), 미야기(宮城), 야마가타(山形), 후쿠시마(福島)까지 널리 전파되었다. 이것이 모두 영산강 유역 마한 문화의 역동성이라고 할 수 있다.

 

홍윤기 한국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