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영산강 유역에 옹관왕국 왜가 있었다

吾心竹--오심죽-- 2009. 3. 29. 17:17

새롭게 밝혀내야 할 옹관왕국 | 잃어 버린 마한 2008.06.13 12:45 먼 발치 매운 눈

 

 

영산강 유역에 옹관왕국 왜가 있었다  
 
고대 영산강 유역에 백제와는 또 다른 정치체제와 문화를 가진 왕국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금동관을 쓰고 영산강 지역을 다스리던 나라, 그 나라는 대형옹관의 나라였다.


나주의 옹관고분 시대는 한국사의 시대 구분을 따르자면 삼국시대에 속하는 시기다. 삼국시대라고 부르는 시기와 동시대이긴 하나 일제 강점기 이후 주욱 이어져온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놓고 보면 삼국 외에 또 다른 나라가 있었다는 추정이 가능할 정도로 풍부한 유물을 보여주고 있다.

 

영산강 유역의 고대사회는 역사적으로 마한(馬韓)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마한은 삼한 중 하나로 진국(辰國)에 뒤이어 한반도 남부지역에 자리 잡았으며 삼한이 형성되기 시작한 시기는 기원전 2세기 경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마한(馬韓)은 경기.충청.전라지방, 진한(辰韓)은 낙동강의 동쪽, 변한(弁韓)은 낙동강의 서쪽으로 비정하고 있으며, 중국측 기록인『삼국지(三國志)』의 동이전(東夷傳) 한조(韓條)를 보면 얼마동안 마한이 삼한의 주도권을 행사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 마한은 새롭게 등장한 북방계의 백제에 의해 점차 밀려나고 있음이『삼국사기』에 나타나고 있다.

 

중국의 사서『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 한전(韓傳)은 마한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韓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왜와 접해 있으며(南與倭接) 면적은 사방 4천리쯤 된다. (한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마한·진한·변진이며 진한은 옛 진국이다. 마한은 (삼한 중에) 서쪽에 있다. 지금 진한 사람은 모두 편두(頭·납작머리)이고, 왜와 가까운 지역(近倭)이므로 역시 문신을 하기도 한다. (변진의) 독로국은 왜와 경계가 접해 있다(與倭接界).”

 

또『晋書』 장화전(張華傳)에 나오는 기록에는 

 

"동이마한 신미제국은 산에 의지하고 바다를 끼고 있으며 유주와는 4천여리였는데, 역대로 내부하지 않던 20여국이 함께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쳐왔다." (東夷馬韓 新彌諸國 依山帶海 去州四千餘里 歷世未附者二十餘國 竝遣使朝獻.)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 나오는 신미국은『삼국지』에 나오는 마한의 54국과는 다른 이름으로 서해안 지대에 분포한 마한제국읍의 하나로 인식되었다. 또한 이를 중부지방에서 이동한 마한의 잔존세력으로 보는 견해도 제시되었으나 신미제국은 ‘신미의 여러 나라’란 의미로 마한조의 마한과는 별개로 영산강 유역에서 성립한 단일 정치세력으로 보기도 한다.

 

위 기사에서 주목할 점은 왜의 위치가 한반도 밖이 아니라 한반도 안쪽, 즉 삼한의 남쪽인 한반도 남부에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지금껏 ‘왜는 일본열도에 있다’는 고정관념 속에서 이 기록을 봐왔으므로 이 기록이 말해 주는 위치 비정을 무시해왔는데 이런 고정관념을 해체하고, ‘(한의)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南與倭接)는 기록을 해석하면 왜는 도저히 일본열도 내에 있을 수 없게 된다. 접’(接)은 육지로 서로 경계할 때 쓰는 낱말이지 바다 건너 있는 지역을 말할 때 쓰는 단어는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바다 건너 왜가 있었다면 ‘바다’(海)로 동쪽과 서쪽의 경계를 표시한 이 기록이 유독 남쪽 경계를 표시할 때만 바다를 생략할 이유가 없다. 또한 진서 한조(韓條)의 ‘근처에 왜가 있다’(近倭)는 구절과 변진 12개국 가운데 하나인 독로국이 ‘왜와 경계가 접해 있다’(與倭接界)는 구절도 왜가 일본열도가 아니라 진한과 독로국 근처의 한반도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한조(韓條)』에서 왜의 위치를 추측해 보면,

 

"마한은 (삼한 중에) 서쪽에 있는데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 진한은 동쪽에 있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왜의 위치는 마한과 진한·변진의 남쪽, 즉 한반도 남부다. 따라서 왜는 적어도 중국의 삼국시대인 3세기까지는 한반도 남부에 위치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송서”(宋書) 왜국전(倭國傳)』은 ‘왜국은 고려(고구려)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중국 남북조 송나라(420∼479년) 때에는 왜가 한반도를 벗어나 일본열도에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이후에 발간된 중국측 문헌들은 모두 왜가 일본열도에 자리잡고 있다고 기록했다. 위의 기록들은 왜의 중심지가 5세기의 어느 시점부터
한반도를 떠나 일본열도로 이동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반도 내의 왜(倭)는 어디에 있었을까? 그것은 영산강 유역이 되는 것이다.

 

왜는 『삼국사기』 등 우리나라 사료에도 빈번히 등장하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사료는 『광개토대왕비문』의 기록이다. 한·일 양국 사이에 수십년에 걸쳐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유명한 신묘년(서기 391년·광개토왕 1년, 백제 진사왕 7년, 신라 내물왕 36년) 기록을 보자.

 

"왜가 신묘년 이래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를 파하고,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 新羅 以爲臣民)."

 

왜가 한반도 내에 있었다는 관점에서 바라볼 때 이 구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다를 건너와’(渡海)라는 구절이다. 이에 대해 일본의 어떤 탁본들은 ‘渡海’라는 글자를 선명히 보여주지만, 광개토대왕비문 조작설 제기 당사자이자 최근 이를 현지 답사한 이진희(李進熙)는 ‘海’(해)자는 ‘皿’의 자획이며 ‘渡’(도)자도 확실치 않았다고 말했다.


일본사 연구자들에 따르면 신묘년 즉, 4세기 후반 일본은 통일된 정권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즉 4세기 후반에 일본열도 내에는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공격할 만한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일본 학계의 연구결과다. 그렇다면 신묘년에 백제와 신라를 공격한 왜는 한반도 내에 있었던 정치세력인 것이다. 당시 왜가 강력한 정치집단이었음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신왕 6년(397)에 "왕이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태자 전지를 인질로 보냈다"는 기사 내용과 신라본기 실성왕 1년(402) 3월에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인질로 보냈다"는 기사는 당시 왜가 백제와 신라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었던 강력한 정치집단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반도에 있었던 왜는 백제와 신라를 영향력 아래 두고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맞서 싸웠던 강력한 정치집단이었다. 그간 일본인들이 왜를 일본열도 내로 비정하면서 생겼던 모든 모순은 왜를 한반도 내의 정치집단으로 이해할 때 풀리게 된다.

 

일본 천황가가 대륙으로부터 한반도를 거쳐 온 기마민족이었다는 ‘기마민족설’을 주장하여 일본 국내외에 큰 충격을 던진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는 이렇게 설명한다.

 

"기마민족이 4세기 초 바다를 건너 북규슈(北九州)에 한.왜 연합왕국을 수립했다가 4세기 말께는 동북 기나이(畿內) 지방에 야마토(大和) 정권을 수립하는데, 그 주인공인 16대 오우진(應神) 천황은 한·왜 연합왕국의 주도자로서 남한지역에 군대를 보내 신라를 제외한 남한 여러 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의 남하에 대항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이 주장은 4세기 말에 일본열도 내에 그런 일을 수행할 만한 정치집단이 없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의해 부정되지만, 고구려의 남하에 저항했던 왜가 한반도 내에 있었다고 발상을 전환한다면 상당부분 역사적 사실에 접근하는 것이다.

 

한반도 내의 왜로 추정되는 정치세력은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神功) 49년(369년)에도 보이는데, 백제 근초고왕과 함께 가야 7국과 마한 잔존세력을 정복한 사건은 한반도 내의 왜가 수행한 군사정복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한반도 내의 왜는 『광개토대왕비문』의 기록에 의하면, 서기 400년과 404년 두 차례에 걸쳐 고구려와 대규모 전쟁을 벌였다가 패하여 그 세력이 결정적으로 약화된다. 고구려와 더 이상 싸울 여력을 잃은 왜의 상당수 세력은 한반도 남부를 포기한 채 일본 규슈 지방으로 건너가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서기』의 동정(東征) 기사는 이들이 수행한 열도 정복사건을 묘사한 것이다.

 

5세기 이후의 중국 기록들이 이전의 기사와 달리 왜의 중심지를 한반도 남부가 아닌 일본열도로 기록한 것은 이런 변화한 사정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倭 관련 기록은 『삼국사기』에도 수없이 나타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혁거세 8년(서기전 50)부터 소지왕 19년(497년)까지 대략 5백50여년 동안 49회에 걸쳐 왜에 관해 기록하고 있는데, 그중 33회가 왜의 신라 침략 기록이다. 그후 약 1백60여년 동안 왜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다가 백제가 멸망한 후 문무왕 5년(665)에야 다시 나타난다.

 

백제본기에는 왜 관련 기사가 아신왕 6년(397년) 처음 등장해 비유왕 2년(428년)까지 7회에 걸쳐 나온다. 그후 1백80년 동안 보이지 않다가 무왕 9년(508년)에 다시 나타나 의자왕 때 두번 보인다. 백제 비유왕 2년(428년)과 신라 소지왕 19년(497년) 이후 왜 관련기사가 『삼국사기』에서 오랫동안 사라지는 것은 이 무렵, 즉 5세기 무렵 왜의 주도세력이 한반도를 떠나 일본열도로 들어간 사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고고학적 성과가 이미 수차례의 전남지역 고분군 발굴에서 드러나고 있다. 이와같은 성과에 따라 고고학계는 역사학계와는 다른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고분은 옛날에 만들어진 무덤을 뜻하는 말로 역사적인 혹은 고고학적인 자료가 될 수 있는 분묘를 말한다. 3~4세기에 들어서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이 고대국가로서 정치체제를 확립하면서 강력한 통치력을 바탕으로 권위와 위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거대한 분묘를 축조하게 된다. 고구려와 백제의 적석총, 신라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가야의 횡혈식석곽분(橫穴式石槨墳) 등이 축조되는데, 영산강유역에서는 거대한 옹관을 매장한 옹관고분이 만들어진다.

 

고분이 역사적 혹은 고고학적인 자료가 될 수 있는 것은 매장방법을 통하여 그 시대의 제도, 풍습, 신앙 등을 파악할 수 있고, 또한 죽은 자를 위하여 마련한 부장품을 통하여 그 시대의 문화, 미술, 공예의 수준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남지방의 옹관묘는 철기시대 초기인 기원전 1세기 경부터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은 소형의 옹관묘로 일부지역에서만 한정되어 나타나고 있다. 영산강 유역에서 대형 옹관묘가 나타나는 것은 기원 후 3세기 후반 경이다.


옹관은 2개의 옹기를 마주한 합구식으로 그 크기가 단옹의 경우는 100-200cm, 합구할 경우 200-310cm에 이를 정도의 대규모 옹관이며,
부장품으로는 대부분 토기류, 철기류, 구슬류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옹관고분은 다른 지역과는 판이한 무덤 양식이며, 그 규모면에서도 다른 지역에 결코 뒤지지 않는 영산강 유역의 독특한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나주지역의 옹관고분은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의해 반남면 대안리, 신촌리, 덕산리 고분군이 조사되어 대형 옹관묘가 중심을 이루고 있음이 밝혀졌다. 특히 신촌리 9호분에서는 금동관을 비롯하여 금동신발, 환두대도, 귀고리, 팔찌 등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금동관은 기본적으로 신라관과 동일계통의 것으로 보이나 신라관의 도식화된 출자형(出字形)과는 달리 초화형입식(草花形立飾)으로
구성되어 있어 형식상 古式에 속한다. 이에 따라 신라와 관련을 짓거나 백제와 관련된 것으로 보는 등 해석자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어쨌든 신촌리 9호분 출토 금동관은 같은 시기의 금관 가운데 외관과 내관인 관모가 완벽하게 갖춰진 것으로 같이 출토된 금동신발과 함께 이 지역에 왕을 칭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체제가 존재하였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과 형태가 비슷한 것이 일본 후나야마 고분에서도 출토되었는데, 이 고분은 5세기∼6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단순한 고깔 모양의 내관(內冠)과 복잡한 초화형(草花形)의 장식을 한 외관(外冠)의 이 금동관은 세부적인 면에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그 재질과 형태는 나주 금동관과 동일하다.

 

이런 형태의 관은 한반도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는데, 이 역시 고구려와 전쟁에서 패배한 한반도의 왜 세력이 5세기 이후에 일본열도로 건너갔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한 증거다. 이런 사례는 금동제 신발, 환두대도 등 기타 유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국보 제 295호 나주 신촌리 고분출토 금동관

 

반남 고분군에 대한 첫 조사는 일제의 총독부 고적 조사위원회의 특별 조사사업으로 이루어졌다. 1917년 『조선고적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조사원 다니이 사이이찌(谷井濟一)와 제도사, 사진사 2인 등에 의해 12월 16일부터 27일까지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으며 눈이 계속 내리는 악천후 속이었던 관계로 다음 해에 조사를 계속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 페이지에 불과한 이 보고서는 간단하게 조사 내용을 개설하였으나 마차 11대에 실릴 정도로 많은 유물을 실어갔으며, 이 지역 고분에 대한 첫 시각을 여는 계기가 되었고 고고학계를 흥분시키기에 족한 많은 정보를 제공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많은 고분이 도굴 등의 수난을 당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다니이의 보고서 전문을 보면 "반남면에 있는 자미산 주위 신촌리, 덕산리 및 대안리의 대지 위에 수십기의 고분이 산재하고 있다. 이들 고분의 외형은 원형 또는 방대형이며 봉토내에 1개 또는 수개의 도제옹관을 간직하고 있다. 지금 조사결과를 개설하면 먼저 지반상에 성토를 하고 위에 도제의 큰 독을 가로 놓은 뒤, 이에 성장한 사체를 오늘날도 한반도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처럼 천(布)으로 감아서 판자에 얹은 뒤 머리 쪽부터 큰 독 속에 끼워 넣고 큰 독의 아가리에서 낮거나 또는 아가리를 깨서 낮게 한 작은 단지(小土甘)를 가지고 판자를 아래로부터 받친 뒤 약간 작은 독을 큰 독 속에 끼워 넣어서 사체의 족부를 덮고 대소의 독이 맞닿은 곳을 점토로 발라 옹관 밖의 발이 있는 쪽에 제물을 넣은 단지를 안치하여 흙을 덮는다.


그 발견된 유물 속에는 금동관과 금동신발이 있고, 칼(大刀 및 刀子)과 도끼, 창, 화살, 톱이 있고, 귀고리, 곡옥, 관옥, 다면옥(切子玉), 작은 구슬 등 낱낱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이들 고분은 그 장법과 관계유물 등으로 미루어 아마도 왜인(倭人)의 것일 것이다. 그 考說은 후일 『나주 반남에 있어서의 왜인의 유적』이라 제하여 특별보고서로 제출하게 될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특별보고를 제출하겠다고 했던 다니이는 어떠한 보고서도 공식적으로 제출하지 않았으며 제출하지 않은 이유도 밝혀지지 않았다. 이것은 조사된 내용이 일제가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을 지지하기는 커녕 임나일본부설을 뒤집을 수 있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설명일 것이다. 다시 말해 반남고분군의 출토 유물은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반남고분의 주인공들이 고대 일본열도를 지배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기 때문에 덮어 버린 것이다.

 

이후 1938년 有光敎一과 澤俊一이 신촌리 6·7호분, 덕산리 2·3·5호분 등 옹관고분 5기와 흥덕리 석실분을 발굴조사하였는데, 이미 도굴의 횡액으로 훼손되어 봉토가 완전한 예는 거의 없고 신촌리 6호분에서만 2개의 옹관이 원상태대로 수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과 금동신발의 존재는 나주 지역에 외부의 영향을 받지않고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한 왕국이
이곳에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고분은 백제왕릉보다 더 크게 만들고 자신들만의 문화를 꾸준히 유지시켜온 영산강 옹관왕국이 존재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나주지역 옹관의 형태                                                                영암 내동리 출토 옹관

 

석실고분은 5세기 후반부터 영산강 유역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6세기 중반 경에는 전남 전지역으로 확산되는 경향을 보인다.

나주지역에서 조사된 석실고분은 반남면 대안리 4호분, 흥덕리 석실분, 세지면 송제리 석실분 등인데, 모두 백제 후기의 고분으로 추정되었다. 과거에는 석실고분은 곧바로 백제세력이 이 지역에 진출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나 최근에는 초기 석실고분을 토착세력이받아들인 무덤양식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높아졌다.


최근에 복암리 3호분이 발굴됨으로써 나주지방뿐만 아니라 전남지방 전체의 고분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이는데, 이곳은 최근까지 안동권씨의 선산으로 관리되어 다행이도 전혀 도굴이 안된 다행스러운 경우였다.

 

복암리 3호분에서는 영산강유역의 옹관고분의 진화를 뚜렷이 보여주는 증거가 다수 발견되었다. 이전까지는 옹관묘와 석실분이 각기 독자적인 영역을 가지고 발굴되었다. 그것이 시대적인 차이를 두고 같은 지역에서 발견되기는 하였으나 역시 백제계의 석실고분과는 다른 양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토착세력의 석실고분으로 인식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복암리 3호분에서는 석실고분 내에서 옹관묘가 발굴됨으로써 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대두되었다.

 

이 고분은 3세기 말에서 7세기 초 무려 400 여 년에 걸처서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 3층짜리 아파트형고분에는 무려 41기의 무덤방을 갖추고 있다. 여기에는 옹관묘,수혈식 석곽,횡혈식 석실,횡구식 석실 등 영산강 유역에서 보이는 모든 형태의 묘들이 망라되어 있다. 즉,1기에는 옹관묘 12기, 2기에는 석실과 석곽 옹관 등 16기, 3기에선 옹관묘 대신 석실이 대거 등장한다.

이 초유의 아파트형 고분은 발굴 과정에서 마구류,은으로된 관 장식,세장의 꽃잎을 조각해 만든 칼,금동 신발 등 3백여 점의 유물도 함께 출토되었다.

 

이렇게 다양한 묘제가 복합된 고분은 국내에서 유일한 것으로 고대 영산강 유역 묘제의 다장 및 복합묘적 성격 연구의 기초자료가 될 것으로 평가되었다.

 

또한 고대국가의 등장과 함께 흔히 1인을 위한 대형고분이 나타나는 신라나 백제의 예와 비교하여 다장이면서도 고총화된 고분을 조영한 이 지역 정치세력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사적 제404호 나주 복암리 3호분 아파트형 고분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대형옹관(甕棺)고분들이 강력한 세력을 가진 고대국가의 존재를 입증하고 있는 상황에서 고고학계는 옹관의 주인과 제작방법에 대해 많은 의문을 갖게 했다.

 

그런데 2001년 이 옹관고분의 실체를 밝혀줄 중요한 단서가 발굴되었다. 국내에서 최초로 옹관묘에 사용된 대형전용옹관 가마터가 한 곳에 집중된 상태로 1천5백여 년이 지나 나주시 오량동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 가마터는 전남지역 고대사회의 숨겨진 비밀을 밝혀줄 열쇠로 학계 안팎의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특히 그 동안 고고학계는 옹관을 구운 가마는 지금까지 남아있을 수 없다는 게 일반적인 정설이었다. 따라서 오량동 가마터는 한국 고대문화사를 새로 쓰는 결정적인 단서가 됨을 의미한다.

 

대형옹관을 직접 구워낸 대규모 가마터 유적이 확임됨으로써 옹관을 한 지역에 토굴형 가마를 짓고 옹기처럼 구워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또한 인근 영산강 수계를 따라 분포한 옹관고분 지역의 수요에 따라 대량생산을 통해 분배, 공급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특히 가마의 성격뿐만 아니라 점토 채취와 옹관을 빚은 공방터, 운송로인 나룻터 등도 인근에 묻혀 있을 가능성이 높아 옹관 제작과정과 영산강 수로를 통한 유통경로까지 새롭게 드러날 경우 당시의 지배세력의 상업 생산 및 경제활동 범위와 내용도 추정 가능해진다.

 

특히 오량동 가마터는 영산강을 사이에 두고 복암리 고분과 직선거리로 2㎞에 인접해 있고 양 지역 옹관이 시기와 제작방법, 문양, 제작자가 동일한 것으로 확인돼 4∼5세기 호남 서남부지방의 고대사회의 베일을 벗겨줄 결정적 유적으로 부각되고 있다.

 

복암리 고분의 주인공이었던 당시의 지배세력이 영산강 인근의 나주와 영암, 함평, 영광, 해남 등지에 옹관을 배분·판매하는 강력한 경제권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해 볼 때 오량동 가마단지는 그 지배력의 원동력이 됐던 첨단 산업단지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1990년대 후반 발굴한 광주의 월계동 고분군에서는 일본의 천황릉에서 다수 출토되는 장식용 토기인 하니와(埴輪)가 출토됐다. 광주와 나주는 같은 문화권이라는 점에서 이 또한 이 지역의 정치세력과 일본 천황가의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유력한 물증의 하나다. 이러한 고고학의 연구 성과들은 나주지역에 고대의 삼한이나 삼국 및 가야와는 별개의 정치세력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고구려에 결정적 타격을 입고 일본열도로 이주한 왜는 과거 한반도에서 차지했던 위상을 근거로 한반도 남부의 연고권을 주장했다. 중국 “송사”(宋史)에 따르면 왜왕(倭王)은 남송(南宋·420∼479년)에 보낸 외교문서에서 스스로 ‘도독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 육국 제군사’
(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六國諸軍事)라 칭했다. 당시 남송은 백제와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으므로, 백제에 대해서는 연고권을 인정해 줄 수 없었다. 그래서 남송은 비록 형식적이지만 왜왕에게 "도독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육국 제군사"라는 작호(爵號)를 내려 한반도에서 지녔던 과거의 위상을 인정해 주었다. 그리고 남송을 계승한 남제(南齊·479∼502년)도 이 왜왕의 작호를 인정해 왜는 비록 형식적이나마 고구려를 제외한 한반도 남부의 주도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삼국사기』는 이 영산강 옹관왕국을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중국의 『史書』와 『일본서기』 등의 기록으로 유추해 볼 때 땅속에서 나온 이 거대한 옹관은 고대 한반도 남부지역을 지배했던 왜라는 정치세력이 존재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잃어버린 옹관왕국 이것을 우리 역사로 편입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는 비단 우리 사학계 뿐만 아니라 일본 사학계에도 던지는 심각한 과제일 것이다. 금동관을 쓰고 전남 영산강유역을 다스리던 잃어 버린 왕국 倭, 이 거대옹관은 우리가 그 역사를 새롭게 밝혀내야 함을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