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마한에서도 수레를 사용했다

吾心竹--오심죽-- 2009. 3. 29. 17:12

마한에서도 수레를 사용했다. | 잃어 버린 마한 2008.05.16 10:37 먼 발치 매운 눈

 

 

97년 광주 출토된 유물 "BC1세기 수레바퀴 일부" 확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마한 사람들은 소나 말을 탈 줄 모른다"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97년 이런 설명을 뒤엎을 만한 유물이 발견돼 학계의 관심을 사고 있다. 

 

1997년 발굴된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 출토된 BC1세기경의 목제 유물은 수레바퀴인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당시 국립광주박물관 조현종 학예연구실장은 2003년 1월, “1997년 출토된 목제 유물의 내용을 두고 연구한 결과 수레바퀴의 일부로 결론내렸다”고 말했다.

 

광주박물관측은 “이 유물은 바퀴살 22개가 박힐 수 있도록 홈이 파인 수레바퀴 통으로 현재 5개의 바퀴살이 남아있다”고 밝혔다. 광주박물관에 따르면 바퀴살과 함께 말고삐를 고정시키는 목제 거형(車衡)이 발굴돼 이 수레가 마차로 추정된다는 것.


이 유물이 수레바퀴라면 남한에서 출토된 수레 관련 유물로는 가장 역사가 오래된 것이며 초기 철기시대에 마한에서 수레를 사용했다는 증거가 된다. 비슷한 시기의 유물로는 일제 강점기에 평양 낙랑고분에서 부장품용으로 보이는 수레 부속품이 출토된 적이 있다. 

 

 

 

광주서 기원전 1세기의 수레바퀴 출토 의미
바퀴살에 두꺼운 칠까지…숙련된 기술 입증

 

광주(光州) 신창동 출토 수레바퀴. 왼쪽으로 뻗은 5개의 목제가 바퀴살로 일부는 부식됐다.

가운데 원형을 이룬 것이 바퀴살이 접합되는 바퀴통이다.

 

서기전 1세기 초기 철기 유적인 광주(光州) 신창동에서 출토된 수레바퀴는 당대 마한지역의 문명발달 정도를 가늠케 하는 유물이다.

 

한민족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서기 3세기 기록)은 당시 한반도 남부지역의 문화 발전 정도가 낮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풍속은 기강이 낮고, 제국(諸國)의 도읍에는 통치자가 있지만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며, 가족간에 장유(長幼)와 남녀 구별이 없다고 기록했다.

 

수레바퀴가 출토됐음이 확인된 광주 신창동 초기 철기 시대 유적.

마차로 추정되는 수레와 10줄짜리 현악기 등이 최초로 출토돼 한국 고대사 연구의 보고(寶庫)로 떠올랐다.

사진은 수레가 출토됐던 지난 97년 발굴 모습이다.

 

이건무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바퀴를 포함한 수레 제작에는 여러 공학적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에 수레바퀴를 만들 수 있었던 사회라면 결코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기록처럼 미개한 사회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바퀴살과 바퀴테, 수레축 등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따르며, 날카로운 금속 공구와 숙련된 기술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립광주박물관은 바퀴를 복원하면 바퀴살이 22개 짜리인 지름 120~160㎝의 바퀴가 될 것으로 추정했다. 이같은 바퀴가 지날 수 있으려면 길도 어느 정도는 닦이거나 다져져야 했을 것이다. 진흙탕길이나 요철이 심한 곳에서 수레는 운송 수단으로 큰 의미가 없다.

 

 

신창동 수레바퀴살에는 당시 귀중품에만 사용하던 칠(漆)도 두텁게 돼 있었다. 수레바퀴가 발굴됐던 지난 97년, 신창동에서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이자 최초의 10줄짜리 현악기와 신발을 만드는 나무로 된 골 등이 발굴돼 학계를 흥분시킨 일도 있다.

 

이 유물들을 바탕으로 2000여년전 광주, 더 나아가 마한지역의 사회적 풍경을 그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칠을 해 반짝이는 수레가 잘 다져진 길을 종종 지나가고, 10줄짜리 현악기가 어디선가 울려 퍼지는 사회-.

 

 

조현종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이 같은 발전은 한(漢)과의 직·간접적인 교류로 인해 가능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신창동에서는 동으로 만든 서한대(西漢代·서기전 202~서기 8년)의 화살촉도 나왔다”며 “이는 한사군의 설치(서기전 108년) 등으로 한(漢) 문화가 낙랑 등을 통해 한반도 남부까지 밀려왔음을 말해주는 자료”라고 밝혔다.

 

 

한국 고대사를 다시 쓰게 만든 이 수레바퀴는 그러나 지난 97년 출토 당시 ‘의식(儀式) 때 사용하는 목기’로만 추정돼 학계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수레바퀴가 아니냐는 지적도 일부 있었지만, 바퀴통이 타원형이어서 바퀴로 사용하기에는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우세했던 것. 그러나 발굴조사보고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타원형 부분의 나이테가 찌그러졌다는 것이 확인됐고, 결국 타원형 부분은 원형의 바퀴통이었음이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