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마한(馬韓)에서 바둑을 살피다

吾心竹--오심죽-- 2009. 3. 29. 17:15

호남지역에서 바둑의 고수가 나오는 까닭은? | 잃어 버린 마한 2008.06.04 10:17 먼 발치 매운 눈

 

 

마한(馬韓)에서 바둑을 살피다.

 

역사는 기록이다. 기록은 문자로 된 정보임은 말 할 것도 없다. 문자는 한 문명의 척도이며 수준의 반영이다.  뿌리가 있는 나라(민족)는 역사도 깊고 문자의 내력도 깊다. 우리는 2천년이란 긴 역사를 갖고 있다. 역사 저편 신화의 시대는 5천년에 이른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는 아쉽게도 2천년에 국한 한다. 기록으로 남은 역사의 상한 연대가 그렇기 때문이다.

 

우리의 고대사는 중국에 있다. 25사로 통칭 되는 중국의 고대 사서에 동이편으로 분류 되어 고구려 부여 삼한등이 단편적으로 수록 되어 있다. 우리의 고대 사서의 최고봉인 삼국사기는 12세기에 편찬된 책이다. 25사와는 3백년에서 5백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삼국시대는 바로 이 25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

 

25사에도 중요한 사서가 있다. 삼국지(유비 조조등이 출현 하는 그 삼국지가 아니다) 위지동이전과 '사기' '주서'다. 위지동이전은 25사의 원 모델로 가치가 있다. 사기는 기자 조선에 대한 언급으로 한서지리지와 기타서의 고조선 부분을 유출 할 수 있다. 주서는 이 두 사서의 재탕 삼탕에 불과한 중국의 대한반도 기록에 비해 좀더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는 당나라의 관찬 사서로 중요시 된다.

 

주서는 백제가 마한의 속국이자 부여의 변종이라 적고 있다. 위지동이전은 마한 54국의 이름을 전부 기록 하고 있고 그 속에 백제(伯濟)가 보인다. 수서에는 백제가 고구려의 별종이며 부여에서 나왔다 기록 한다. 후한서는 삼한은 마한 54국 변한 12국 진한 12국 78국 인데 백제(伯濟)를 그 하나로 특정 하여 유일 하게 기록 하고 있다. 중국의 고대 사서는 백제를 마한설 고구려설 부여설로 혼동 하고 있다.

 

백제는 중국의 선진 시대에는 중국에 알려져 있지 않았다. 4세기 중엽 '진서' 모용황전(345)에 백제는 고구려의 별종이고 구태(九台)의 후손이라는 기록이 등장 한다. 구태는 소서노가 주몽을 만나기전에 살았던 부여의 남자다.  온조 비류의 친자 관계를 놓고 구태와 주몽설이 맞서는 근거다. 25사는 백제의 출자를 마한 고구려 부여로 혼동 하면서도 온조의 아버지를 구태(주서 진서 수서 북사)로 인식 한다.

 

가로·세로 15줄짜리며 크기가 지금과 비슷한 1300년 전 분황사에서 출토된 국내 最古바둑판.

흙벽돌 전(塼)처럼 구워 만들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주몽은 우리의 사서인 삼국사기에 와서야 온조 비류의 아버지로 나타 난다. 주서 수서 북사등은 백제가 국성(사비)에 구태묘를 세우고 1년에 4번 제사를 지낸다 기록 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보이는 동명묘나 제사등은 간곳이 없다. 혼란 스럽기는 하나 이 혼동은 백제가 마한 54국과 불가분의 관계였음을 말해 주는 기록이다. 삼국사기에는 온조가 마한왕에게 땅을 얻어 나라를 건국한 기록이 보인다.  백제가 온조의 다른 색임이니 뭐니 하는 연구들이 얼마나 동떨어진 것인지를 말해 주는 대목이다.

 

주서는 백제가 음양오행에 능하고 도사(道士)가 없으며 탑과 절이 많다고 기록 한다. 놀이로는 투호 저포등과 혁기(奕碁)가 있다고 한다. '수서'는 이 혁기를 위기로 바로 잡고 있다. 중국의 고대 기록에 보이는 박혁이 바둑이 아니란 연구가 나온 이상 구당서에 보이는 고구려 박혁이 바둑 기록에서 빠지며 이 기록은 25사에 전하는 유일한 한반도의 바둑 기록이 된다. 백제는 마한 54국의 하나인 백제(伯濟)가 흥기 하며 고구려 부여에서 내려온 (온조 비류) 세력이 부합하여 마한 54국의 대표가 된 나라다.

 

백제 의자왕이 일본에 하사한 바둑알통. 백제 예술의 세련미와 백제 바둑 문화의 수준이 높았음을 웅변한다.

/일본 나라박물관

 

학자들은 마한이 3세기까지 전남 서남 해안에 기능 했다고 말한다. 나주나 전남 해안에서 발굴 되는 3세기의 고 무덤이 이를 뒷받침 한다. 주서는 마한과 백제를 거의 한 부류로 인식 하고 있다. 이 지역에 여러 놀이중 바둑이 가장 유행 한다는 주서의 기록으로 볼때 바둑은 이미 마한에 들어와 중요 놀이가 되어 있음을 말한다.

 

마한은 서기전 1세기 고조선이 망하자 그 일파가 바다를 건너 부안 익산 지역에 세운 나라다. 고조선은 논어에 은의 3세력중 하나로 주의 무왕에게 홍범을 가르켜 준 기자(箕子)가 세운 나라로 나온다. 홍범은 주역과 더불어 중국 사상의 원형을 제시한 책이다. 기자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알수 있는 대목이다. 기자는  주역에도 등장 한다. 역의 '명이'편은 明夷以難貞 이라고 적고 있다. 태양이땅속에 들어가 은인자중 때를 기다리는 모습이다.

 

주자는 기자가 주의 무왕과의 관계에서 이를 따랐다고 해석 했다. 중국 상나라의 청동기 명문에 불노기후왕기(不老箕侯王其)란 글자가 나온바 있는데 이를 이형구 교수는 기자를 말한것이란 고증을한다. 기자의 영향력을 받은 마한의 시대, 중국에서 발견되는 바둑의 기록들은 논어 맹자와는 다르게 우호적이다(서경잡기, 북사, 위자건의 기록). 그러나 이 기자를 주장 하는 설은 지나친 부회(附會)라 말하는 학자들이 있다. 명이(明夷)가 기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는 꿩'을 뜻하는 것이라 말한다. 夷는 雉의 다른 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명이편 六三은 기자가 우는 꿩을 잡았다고 기록 하고 있다. 주역에 역사적 인물을 거론 하고 있고 그 인물이 고조선과 밀접한 사람이라 우리를 놀라게 한다.

 

이 기자가 왕노릇을 하던 기자 조선이 망한후 그 일단이 바다를 건너 마한으로 들어 간다. 바둑도 고조선에서 마한으로 자연스럽게 들어온다. 기자가 북쪽에서 왔다고 하여 중국인이란 생각은 하지 말자. 그때 중국의 북쪽은 중국이 아니었다. 니편 내편이라는 맹목적 사관(史觀)이 기자를 우리 역사에서 완전히 축출한 것은 유감이다.  기자는 유학자다. 기자의 영향을 받은 마한은 음양오행에 능했고 의학 한자를 알았으며 바둑도 알았다. 당시 중국에 유행 하던 도교가 마한(백제)에 들어 와 있지 않았다는 것이 기자의 도래를 강력 하게 뒷받침 한다. 당시대 유학과 도교는 심각한 대립 관계였다.

 

마한의 중심지였던 익산에는 마한왕의 무덤으로 전하는 거대한 두기의 고무덤이 있다. 미륵사지에서는 30여점의 바둑알이 발굴 된바도 있다. 미륵사지 심초석에서 발견된 윳판은 주서의 기록을 고고학적으로 증거 한다.  얼마전 선문대 이형구 교수가 인천에서 발굴한 3세기 백제의 죽간에 논어의 공야장의 한 글귀가 전하는 것으로 보아 이때 마한 백제에는 이미 고급 한문이 들어와 지방에 까지 보급 되어 있음을 말한다. 기자 계열이 마한에 들어온 것은 한무제(서기전 140-7년)때이다. 서한의 망도 17줄 바둑판이 있던 시기기도 하다. 한무제는 북으로 흉노를 남으로 월국을 치고 서역과의 비단길을 개척 하는 한편 동으로 고조선을 공격 하여 동이족의 근본적 도전 욕구를 꺽은 사람이다.

 

한서지리지는 고조선에 8조금법이 있고 은의 도가 쇠하자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고 적고 있다. 일단 고조선이 한무제에 망하자 기자의 세력이 마한으로 내려가  쇠하고 드디어 백제가 흥기 한다. 한문도 바둑도 이때 들어 온다.  그리고 백제에 불교가 들어 온다. 마라난타가 최초의 불교 도래인은 아닐것이다. 그러나 마라난타는 불경과 함께 인도의 시킴식 바둑을 백제에 전한다. 순장식 바둑, 바로 그것 말이다. 백제는 마한을 복속하고 기자 계열의 풍습을 걷어 내고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 하기 위해 노력 했을 것이다. 이 일환으로 불교를 받아 들이고 중국식 바둑과는 다른 시킴식 바둑도 받아 들여 백제화 시킨다. 중국의 역사서가 한사코 말하는 구태설을 채택 하지 않고 주몽설을 택한 이유도 백제의 독자성이다.

 

시킴식 바둑은 한반도에만 들어온 것이 아니다. 시킴식 바둑은 인도에서 중국 베트남 티벳등에 광범위 하게 나타 난다. 조선의 사신단들의 기록인 연행록에 중국에서 순장식 바둑을 둔 기록이 여러편 발굴 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순장식 바둑이 우리의 고유의 것이란 말이 오해라는 것을 알게 한다. 인도에 무슨 바둑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은 하지 말자. 불교의 근본이며 부처의 원음에 가장 충실하다는 장아함경에도 '승려는 바둑 장기 박희등을 금한다'고 기록 하고 있다. 장아함경은 중국의 어떤 바둑 기록 보다도 앞서는 기록이다.

 

주서는 마한인은 키가 크고 거칠다고 기록 한다. 몸에는 문신을 하고 소년들이 성인이 될때는 등가죽에 줄을 꾀어 끌고 다닌다고 한다. 마한인은 신명이 있다고 한다. 수릿날이면 큰 나무를 세우고 남녀노소가 모여 음주가무를 하며 날밤을 세운 다고 했다. 잘 생기고 용감 하고 신명을 즐길줄 알던 사람들이 마한인이다. 전라도 충청도 지역에 지금도 번성한 장승과 솟대 문화는 그 때를 추억 한다.

 

그리고 한문과 음양오행과 의학을 중국에서 받아 들이고 바둑도 받아 들여 온 나라에 두루 퍼트린다. 신명이 있기에 놀이 문화도 꽃을 피우는 것이다.  마한인을 계승한 백제는 중국의 영향력을 벗어나 독자적인 영향력을 고심 하다 인도에서 불교를 받아 들이고 시킴식 바둑을 받아 들여 백제화 시킨다. 순장식 바둑이 고려 조선을 거쳐 구한말까지 우리의 주류 바둑이었음이 그것을 증명 한다.

 

오늘날 호남지역에서 바둑의 고수들이 계속 나오고 있는 것도 다 연원이 있는 것이다. 문화는 하루 이틀 사이에 구성 되지 않는다. 오늘날 세계 바둑의 메카로 등장 하는 부안을 중심으로 한 서해안권이 바둑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