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영산강을 정복한 실력자의 무덤

吾心竹--오심죽-- 2009. 3. 29. 17:13

영산강을 정복한 실력자의 무덤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건국해 기원후 660년 신라에게 멸망하기까지 678년간 존속한 나라다. 부여계 이주민이 한강 유역에 세운 나라로서 마한지역을 통합하며 성장했다. 그들은 도읍을 지금의 공주인 ‘옹진’에서 현 부여인 ‘사비’로 옮기면서 독특한 문화를 꽃피웠다.

 

한강 유역에 도읍한 한성기(기원전 18~기원후 475년)를 통해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문화의 기틀이 다지는 한편, 웅진기(475~538년)는 중국 선진문물을 적극 수용하여 문화강국으로 발전했다. 또한 사비기(537~668년)는 참신한 조형 감각과 세련된 공예기술을 발달시켜 문화의 절정기를 이루었다.

 

이러한 백제의 정신세계와 예술적 역량은 다시 일본 ‘왜’에 전달돼 아스카 문화를 형성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현시대 새로 발견된 ‘영산강 유역의 무덤’을 통해 충분히 살펴볼 수 있다.

 

영산강 유역의 지도 ⓒ뉴스한국 
 
독널무덤, 마한 정복한 백제 역사 엿보다


독널무덤은 세계 각지에 널리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등지에서도 선사시대부터 나타난다. 백제가 한서에 도읍할 무렵 이미 영산강 유역에서 큰 독널무덤이 유행했다. 이 독널은 높게 쌓은 흙 속에 주검을 묻는데, 쌓은 흙의 형태는 긴 사다리모양, 네모모양, 긴네모모양, 원모양 등이다. 일종의 무덤 박물관이라 할 만큼 다양하다.

 

또한 독널무덤에는 주로 칼, 화살촉, 창 등의 무기와 단지, 구멍단지, 접시 등의 토기가 발견된다. 이 외에 금동관, 금동신, 목걸이 등의 화려한 꾸미개와 봉황 등을 장식한 화려한 고리자루 칼이 함께 출토된다. 이는 독널무덤이 영산강 유역을 지배한 실력자의 무덤이란 추정을 가능케 한다.

 

영산강 유역은 한반도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백제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특히 무덤에는 그 남다른 양상이 엿보인다. 백제가 한강 유역에 자리 잡고 마한을 잠식해 나가는 과정에서 맨 마지막까지 남았던 세력이 영산강 유역에 최후 보루를 쌓았다. 이들이 바로 마한인이다. 때문에 이 지역은 백제문화 중앙과 여러 면에서 차이를 나타낸다. 마한 전통이 많이 엿보인다.

 

현재 백제문화를 살펴보면, 문화 자체가 중층구조를 이루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신라나 가야와는 달리 백제가 지배문화와 기층문화로 나눠져 있다는 것이다. 기층문화는 마한의 전통문화고, 지배문화는 이주민이 들어와 형성한 상층문화다. 이러한 구조는 기층문화를 토대로 하지 않았기에 상당히 취약한 부분이 많다.

 

그러나 이후 마한을 아우른 백제문화는 매우 개방적으로 발전한다. 영산강 유역의 무덤을 보면 가야나 신라, 고구려 고분처럼 동굴이 크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공주나 부여에 있는 무덤보다 훨씬 대규모며, 대단위 왕릉보다 봉토 규모 역시 훨씬 크다. 백제의 국위가 그만큼 신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에 위치한 독널무덤 ⓒ뉴스한국 
 
고분의 시초, 옹관묘 역사


과거에는 이러한 무덤을 ‘고분’이라 부르지 않고 ‘옹관묘(甕棺墓)’라 불렀다. 특히 봉토가 크기 때문에 ‘대형 옹관묘’라고 불렀다. 하지만 현재 발굴을 계속하면서 ‘옹관고분’이란 용어로 개칭됐다. 이 옹관고분은 마한 지역에서 기원 전후부터 만들어진 주구묘가 그 시조다.


주구묘는 네모지게 도랑을 파서 돌린 것이다. 도랑을 파면서 나온 흙으로 봉토를 쌓았다. 처음 주구묘가 만들어진 삼한의 경우 진한, 변한, 마한으로 분화하며 모두 내용면에 남다른 차이를 보였다. 특히 가야나 신라는 마한의 묘지와 확연히 차이가 난다. 그 단적인 예로 진한과 변한의 묘지는 지하로 깊숙이 들어가며 2m 아래에 목관을 안치한다. 그러나 영산강 유역의 백제문화는 마한의 풍습을 따라 매장시설이 거의 없고, 지면에 있거나 지상(地上)에 목관을 두었다.


또한 이미 진한과 변한에서는 무덤을 만들 때 유물을 비교적 많이 집어넣는데 비해 가야나 신라에서 보이는 후장습속이 백제나 마한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간혹 화려한 미신제가 나오기는 하나 보편적으로 그러한 관례도 없다. 다만 마한의 주구묘는 예외 없이 구술이 대량 출토된다. 주거지역에서 흔히 발견되는 구슬이다.


이러한 주구묘는 영산강 유역에서 독특한 대형 옹관으로 발전했다. 초기에는 목관(木棺)이다가 후에 옹관(甕棺)으로 바뀌었다. 옹관의 역사는 길다. 쓰임은 신석기 때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마한에 와서 비로소 주검을 넣는 정식 무덤이 되었다. 때문에 옹관묘는 마한이 지배하던 영산강 지역 외에는 없다. 현재 마한의 옹관묘는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신천리 금동관도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이다. 그 규모가 매우 컸기에 일제 강점기 때는 2차례에 걸쳐 일본인이 직접 발굴할 정도였다.


현시대 발굴한 독널무덤 원형 ⓒ뉴스한국 
 
일본열도 고분시대 열어준 나주 전방고분


영산강 유역의 무덤은 주구묘 지상식 목관에서 후에 옹관을 쓰는 대형 고분(봉토)으로 발전한다. 그 과정에서 마한이 백제지방 통합과정 중 흡수되지만 그 양상은 여전히 고수한다. 특히 전남 나주 복암리는 ‘아파트 고분’이라 하여 한 마운드에 굉장히 많은 매장시설을 갖추고 있다. 그 고분은 토관도, 목관도, 석곽도, 옹관도, 측실도 외에 42개의 다양한 매장이 한 봉토 안에 꽉 들어있다.

 

또한 나주 반남면 신촌리 고분은 복암리와 같은 중층으로 12개의 옹관이 묻혀 있다. 옹관고분은 대부분 모두 물을 채울 수 있는 도랑으로 둘러있다. 심지어는 깊게 둘러진 경우도 있다. 나주 반남면 신촌리 고분은 그 외 더욱 발단된 장고형(전방후원형)으로 되어 있어 그 마운드가 일본 ‘전방고분’과 비슷하나 더욱 발달된 형태다.

 

일본 쪽으로 가면 이러한 옹관고분에 도랑이 많이 돌려져 있고, 물이 가득 채워져 있다. 이는 단적으로 나주 신촌리 고분과 일본 고분은, 한반도 내 세력이 일본열도로 건너가 그들의 고분시대를 열었음을 말하는 단적 증거다.

 

그러나 일본은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경주, 김해, 평양지역을 시찰하고 난 후 나주 관남쪽 고분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할 만한 유적자료를 찾기 위해서다. 이는 왜가 4세기 중엽에 가야지역을 군사적으로 정벌해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설치하고, 6세기 중엽까지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학설이다.

 

그러나 역시 옹관고분이 가장 두드러진 발전을 보이는 곳은 우리나라 영산강 유역이다. 현대에 와서 활발한 옹관고분이 발굴이 이뤄진 것은 1945년 전남 영암군 내동 초분골에서다. 이곳 주민은 집을 짓기 위해 작업을 하던 중 ‘초분골 고분’을 발견하고 조사를 의뢰했다. 한국 고고학이 발달하지 않던 때라 발굴 주도권은 국립박물관에서 대학 연구단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80년대는 아예 대학이 발굴을 주도해가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다시 광주에 국립박물관이 세워지고, 초분골 고분과 함께 영산강 옹관고분 발굴이 시작돼 그 실체를 여실히 밝히게 되었다. 더욱 특기할 만한 것은 영산강 옹관고분은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간 ‘호형고분’ 형이라는 것이다.

 

시기가 지나면서 바닥이 평저 모양으로 변하게 된다. 그 외에 옹관고분 양끝에 돌기가 있어 원삼국시대 토기 특징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는 우문시대 토기가 평저형태인데, 이곳 영산강 유역의 옹관고분 역시 평저전통을 그대로 잇고 있다는 것이다.

 

백제시대 유행한 독무덤과 유물들 ⓒ뉴스한국 
 
영암 만수리 고분의 옹관고분 실태


1981년 전남 영암군 만수리 부근에서 발굴한 고분은 전혀 손상되지 않은 옹관고분이었다. 진흙을 뜯어보니 그 안에 인골도 들어 있었다. 발굴 연구단은 인골을 수습해 두개골을 열고 나이 약 25세, 신장 156cm 정도 되는 여자임을 밝혀냈다. 당시로서는 비교적 큰 키의 소유자였다.

 

옹관을 이룬 토기의 성질은 부식되지 않아 오래도록 보관이 가능했고, 밀폐 또한 확실해 주검을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었다. 옹관묘의 모양은 계란처럼 생겨 부활과 관련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3.5m의 크기로 가족이 함께 들어갔을 것이라 추정됐다.

 

한 공간에 묻혀 있다는 것은 공동체적 유대감을 오래도록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고, 계급이 발전하며 리더가 지도자로, 다시 지배자로, 그리고 왕으로 변화하는 과정 속에 하층민과 확연히 구별되었음을 알 수 있게 했다. 공동묘지 형태로 대형 옹관에 같이 들어가는 사회적 면을 보인다는 특이점이 있다.

 

이러한 옹관고분은 대체로 강물이 잘 내려다보이는 언덕 쪽에 위치한다. 해남, 무안, 함평에서 많이 발견된다. 그리고 옹관이 출토될 때 도랑을 살펴보면, 수차례 걸쳐 제사 지낸 흔적이 엿보인다. 물론 봉토에 대한 제사는 신라나 가야고분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옹관고분에서는 하나의 토기가 깨져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는 제사를 지낸 후 그것을 깨뜨려 흩뿌린 흔적이다. 영산강 유역 쪽 옹관고분에서 보이는 독특한 문화양상이다.

 

그러나 그 시대 옹관을 어떻게 구워 유통시켰는지는 아직까지 수수께끼다. 옹관을 구웠던 생산 유적지가 밝혀지지 않은 까닭이다. 분명한 것은 옹관 표면에 새겨진 톱날 같은 문양은 태양을 상징하며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옹관의 위쪽 머리 부분이 검게 그을려 있는데, 이는 불길이 가장 적게 닿은 곳이다.

 

옹관은 보통 약 900℃ 정도 내외에서 구워내는데, 한쪽 경도가 높고 다른 한쪽 경도는 낮다. 이는 불이 많이 닿은 쪽은 경도가 높고 불이 닿지 않은 쪽은 경도가 낮다는 것이다. 불길이 많이 닿은 부분이 훨씬 단단하다.

 

백제시대 유행한 움무덤과 유물들 ⓒ뉴스한국 
 
1980년 영남대 강인구 교수가 일본 전방고분과 같은 키월판 고분이 우리나라 압록강 유역과 영산강 유역에 많이 산재해 있음을 학계에 보고했다. 또한 1985년 이른 봄 전남 해남 ‘땅끝마을’ 약 8km 지점의 남창이라는 곳에서 키월판 고분을 발굴했다. 이는 대형고분으로 실측한 결과 일본과 같은 크기와 모양이었다. 이런 내용이 일본에 알려지자 그들은 매우 부러워했다.

 

이후 전라남도 함평에서 그보다 더 발전한 ‘장고형(전방후원형) 고분’ 2구를 발견했다. 우리나라에서 이와 같은 장고형 고분을 발견하면 가장 놀라워하는 쪽은 역시 일본이다. 그들은 ‘장고형(전방후원형) 고분’이 천황의 명으로 인해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영산강 유역뿐만 아니라 광주 월계동 등에서 더욱 발전한 다음 단계 고분이 수십 건 발견된다. 생(生)과 사(死)를 향한 인간의 사유가 백제시대 얼마나 발달한 선진문화를 이룩했는지 충분히 보여주는 유적이다.

 

어은영 기자 · culture@newshanku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