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제국(新彌諸國)의 실체 잃어 버린 마한 2008.06.11 13:29
먼 발치 매운 눈
마한연맹왕국을 가리키는 것
영산강유역은 평야를 끼고 있어 마한연맹왕국들의 터전이 되었다.
3세기 후반 영산강유역의 마한사회의 모습은 {진서(晋書)} 장화열전(張華列傳)에 나오는 '신미제국(新彌諸國)' 관련 기사를 통해서 살필 수 있다. 이 기사는 동이 마한의 신미제국 20여국이 282년에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해서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동이 마한의 신미제국 20여국'은 마한지역 안의 신미국(新彌國)을 중심으로 한 20여국인데, 이들 나라들이 산과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고 하므로 서남 해안을 끼고 노령 소백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는 전남지방, 영산강유역의 마한연맹왕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마한사회에서는 토성 안에 거주하는 지배세력이 주변 평야지대의 농경민을 통치하였으며 사후에 거대한 옹관고분의 피장자가 되었던 사회였다.
4세기 이전의 사실을 기술한『삼국지』위지 동이전 한전의 마한 기록에 "마한사람들은 우마를 탈 줄 몰랐으며 우마는 모두 장례에 사용하였다"고 한다. 우마에 대한 마한사람들의 이러한 관념은 대백제(對百濟) 전투력에 있어서 열세에 놓이게 하였다. 백제의 기병은 영산강유역과 같은 평야지대에서 마한의 보병보다 기동성이 높았을 것이며 무력 사용면에 있어서도 그 효과가 뛰어났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한은 한강유역에서 성장한 기마민족 백제에 의해 점차 잠식되는 과정을 겪게 되었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 따르면 백제는 온조왕 26년(AD 7년) 마한을 기습 점령했다. 곧이어 마한 읍성들의 반란이 상당기간 계속되었지만 결국 이를 진압했고 이로써 마한은 완전히 멸망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온조왕대의 마한이란 마한의 왕도에 해당하는 중심지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맹주적 지위에 있던 마한의 중심적인 국읍이 백제에 병합된 이후에도 잔여세력은 반백제적 토착세력으로서 한반도 서남부 일대에 소국을 형성하여 상당 기간 존속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백제는 마한의 잔존 토착세력들을 병합해 가는 과정에서 지역과 시기에 따라 여러 형태의 정치 경제적 관계를 맺고 있었을 것이다. 백제 중앙정부의 통치력이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지역이 있는가 하면, 백제에 복속된 이후에도 상당 기간 토착세력을 통한 간접적인 통치가 행해지던 지역이 함께 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마한지역의 토착세력들은 문헌기록에 나타나는 것 이상으로 복잡한 과정을 거쳐 백제에 통합되어 갔다. 이는 마한 토착세력의 백제에로의 통합과정이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백제의 왕도에서 지리적으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던 영산강유역은 물론 가장 나중에 백제에 편입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나의 고분 안에 여러 사람들을 매장
철기시대와 삼국시대에도 많이 발견되고 있는 움집을 복원한 모습
한반도 서남부 지역에서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각지에 정치적 사회가 탄생되었다. 이 지역에는 위만에게 밀려난 고조선의 준왕이 남하하기(서기전 2세기 초) 이전에 이미 마한이 성립되어 있었다. 진한 변한과 더불어 삼한(三韓)을 이루었던 마한은 54개의 소국을 이룰 정도로 성장하여 마루한으로서 삼한 가운데 으뜸되는 나라로 발돋음하였다.
마한은 처음에는 읍락을 중심으로 한 정치사회로 나뉘어져 지역에 따라서 사회발전의 정도가 달랐는데, 점차 발전하여 마침내 목지국을 맹주로 하는 연맹왕국으로 성장하였다. 마한이 성읍국가로 출발하여 정치적인 결속력을 가진 연맹왕국으로 성장하게 된 데는 북쪽의 한군현과의 잦은 접촉과 충돌에 따른 문화적 유입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영산강유역의 마한세력도 철기문화의 보급에 따라 지석묘사회 이래 발전시켜온 농업생산력과 인구를 기반으로 하여 점차로 정치적 결집력을 키워 마침내 지역적인 정치적 연맹체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지역적 특성을 가진 연맹체사회를 반영하는 문화적 상징물이 옹관묘와 옹관고분이다. 옹관묘는 광주 신창동유적에서 발견된 서력기원 전후 시기의 1m 안팎의 소형 옹관 53기이다. 이것은 소아를 위한 집단적 옹관묘지로서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이 옹관묘는 이후 영산강유역에서 대형 옹관고분이 유행하게 되는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
옹관묘사회를 바탕으로 꾸준히 성장한 마한의 사회상은『삼국지』동이전 한전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그 백성은 움집에 살고 곡식을 심으며 누에치기와 뽕나무를 가꿀줄 알고 면포(綿布)를 만들었다.
(나라마다) 각각 장수가 있어서 세력이 강대한 사람은 스스로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은 읍차(邑借)라 하였다.
산과 바다에 흩어져 살았으며 성곽이 없었다. ...... 모두 50여국이 있었다.
큰 나라는 만여 가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 가로서 총 10만여 호이다.
3세기경의 마한사회는 50여 소국으로 나뉘어 총 10만여 호를 이루었는데, 각각 신지(臣智), 읍차(邑借)가 다스렸다. 또한 성곽은 없고 산과 바다에 흩어져 사는 백성들은 농경생활을 하며 움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마한의 신앙의례 역시 『삼국지』에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해마다 5월이면 씨뿌리기를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떼를 지어 모여서 노래와 춤을 즐기고 술마시고 노는데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그들의 춤은 수십 명이 모두 일어나서 뒤를 따라가며 땅을 밟고 구부렸다 치켜들었다 하면서 손과 발로 서로 장단을 맞추는데 그 가락은 (중국의) 탁무(鐸舞) 와 흡사하다. 10월에 농사일을 마치고 나서도 이렇게 한다.
귀신을 믿기 때문에 국읍에 각각 한 사람씩을 세워서 천신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는데 이를 천군(天君)이라 부른다. 또 여러 나라에는 각각 별읍(別邑)이 있으니 그것을 소도(蘇塗)라 한다.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
전반부의 내용은 선사시대 이래의 풍요를 기원하는 농경의례이며, 후반부의 내용은 제천의식에 관한 것으로 별읍에서 행해진 제천의식은 아직 군장의 절대적인 권력이 확립되지 못한 사회에서 이루어진 사회통합의 한 수단이었다.
마한사회는 3세기에 접어들면서 거대한 고분이 축조되는 등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였다. 대형 고분의 축조 작업은 막대한 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절대권력이 확립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또한 영산강유역의 고분의 특성 중 하나는 하나의 고분 안에 여러 사람들을 매장했다는 점에 있는데 이는 다른 사회에 비해 공동체로서의 의식이 보다 강했음을 반영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3세기 이후 오늘날의 경기지역의 마한세력은 점차 한강유역에서 새로 일어나는 백제에 병합되어 갔다. 4-5세기에 걸쳐 영산강유역에 자리잡은 마한에서는 성곽이 축조되고 거대한 고분을 조성되며 금동관이 옹관고분에 부장되는 등의 사회발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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