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대형고분의 비밀
안동권씨 선산이었던 나주 복암리 고분군의 발굴되기 전 모습
대형고분의 의미
직경 30-50m에 달하는 대형고분들은 성곽과 함께 고대국가를 상징하는 중요한 고고학 자료이다.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한 호남지역에는 당시 백제 중심지역과는 전혀 다른 대형고분들이 밀집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이 갖는 역사적 의미에 대한 관련학계의 논의가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대형고분 시기의 호남지역에 대한 통설
일반적으로 경기, 충청, 전라지역은 백제문화권으로 인식되지만 이 지역에서는 백제가 건국되기 훨씬 이전부터 마한이 발전하고 있었다. 마한은 백제 건국 이후 경기 지역에서부터 병합되기 시작하여 충청, 전라지역 순으로 병합됨으로써 소멸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영산강유역을 기반으로 남아있었던 마지막 마한이 백제에 병합되었던 시기에 대해서는 日本書紀 神功紀 49년조의 기록을 토대로 하여 4세기 중엽 백제 근초고왕대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백제 건국 이전의 마한
역사학계의 견해에 따르면 마한의 성립시기는 기원전 2세기 이전이며, 마한의 영역은 경기, 충청, 전라지역에 해당한다. 고고학적으로 보면 기원전 3세기 중엽경부터 정교한 청동기문화가 번창하게 되는데 이는 마한의 성립과 관련되어 있다.
마한은 삼한 가운데 가장 먼저 강력한 세력으로 출범하였고 54개 소국으로 구성되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직까지 개별적인 소국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논의하기 어렵지만 고고학적으로 보면 백제가 건국되기 전까지 몇 개의 권역으로 나뉘어져 발전해 갔다. 한강유역권, 아산만권, 금강유역권, 영산강유역권의 4개 권역으로 구분이 가능한데 이들 권역에서는 상호 공통적인 특징과 함께 지역적인 특징들이 부각되면서 발전해 나갔다.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한 호남지역에서는 지석묘가 성행하다가 기원전후부터는 도랑을 갖춘 분구묘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는 남해안지역에서 패총이 성행하기도 하였는데 기원전후경부터 300년 사이에 해당하는 전세계적인 한랭기에 기온 저하로 인한 농작물 감소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 개척된 유적이었다고 본다. 또한 貨泉, 王莽錢, 五銖錢 등 중국 漢代 화폐들이 발견되고 있는데 이는 해로를 통한 낙랑 혹은 중국과의 교역을 위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백제의 건국과 마한의 변천
백제의 건국세력이 고구려 계통의 유이민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서울 강남지역에 산재되어 있는 고구려식 적석총을 통해 고고학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빠르다고 여겨지는 것은 석촌동 1호분으로서 3세기 중엽경에 해당하므로 이때부터 적석총을 쓰는 고구려계 세력이 한강유역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고대국가로서 백제가 출발하게 되었다고 판단된다.
기원전 3세기부터 발전하고 있었던 마한은 기원후 3세기 중엽경 한강유역에서 건국된 백제의 발전에 따라 점차 그 세력이 축소되는 변화를 겪게 된다. 서울 강남일대에서 건국된 백제는 점차 마한권역으로 영역을 확장해 나가는데 3세기말이 되면 목지국을 중심으로한 충남 아산만일대와 한강중류지역에 백제의 문물이 급속히 확산되면서 기존의 전통이 끊어지는 것은 그 지역이 백제에 편입되었음을 의미한다.
공주,부여와 익산을 포함하는 금강하류지역에는 4-5세기대까지 석곽묘로 대표되는 토착 마한세력이 존재하였지만 석곽묘의 규모로 보아 어느 지역에도 독자적인 정치세력이 존재하였음을 입증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4세기 중엽경 백제에 편입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4-5세기에 걸치는 시기 동안 그 이남 지역은 백제와 지배?피지배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특히 전북 정읍?고창지역과 전남지역에는 대형 고분에 거대한 옹관과 석실을 쓰는 독자적인 세력이 발전하고 있었다.
백제의 발전과 마한의 소멸
마한은 백제의 발전과 함께 점점 쇠락해 나가다가 전남지역을 마지막으로 백제에 병합되고 말았지만 소멸시기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근초고왕 24년(369년) 마지막 마한사회가 해체되었다고 보는 역사학계의 통설과는 달리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한 호남지역에서는 당시 백제 중심지역의 대표적 묘제인 적석총이나 석실묘와는 전혀 다른 묘제이면서 규모에 있어서나 출토유물에 있어 백제에 못지 않은 면모를 보여주는 대형 고분들이 성행하였기 때문에 당시 이 지역에는 백제와는 구분되는 토착문화가 존재하였고, 그 구체적인 실체는 마한이라고 하는 것이 고고학계의 견해였다.
아울러 5세기 후반부터 기존의 묘제와는 전혀 다른 석실묘가 사용되면서 점차 옹관묘는 소멸되어 갔는데 새로 들어온 석실묘는 백제의 고분일 것이므로 석실묘의 시작과 함께 전남지역의 마한이 본격적으로 백제의 지배 아래 들어간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 또한 고고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였다.
그러나 이와같은 견해 역시 기존 역사학계의 견해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서, 백제 근초고왕 24년(369년)에 전남지역의 마한사회가 해체되었다는 것을 대전제로 하고, 5세기 후반경부터 기존의 옹관묘를 대체해 나갔던 석실묘가 당시 백제 중심지역에서 성행하기 시작하였던 석실묘와 동일한 것이라는 판단 아래, 5세기대까지 지속되었던 토착 옹관묘의 발전은 백제의 간접지배 아래에서 이루어진 지역적 특징이며, 5세기 후반부터 직접지배로 바뀌면서 백제 중심지역에서 파견된 관리들에 의해 백제의 석실묘가 도입되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백제의 석실묘는 고구려의 남침으로 인해 백제가 공주로 천도한 475년 이후부터 공주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서 공주 천도시부터 660년 부여에서 멸망할 때까지 꾸준히 변화해 나간다. 이 지역에서는 백제와 마찬가지로 5세기 후반부터 석실분이 사용되기 시작하지만 백제 석실묘와는 전혀 다른 영산강식 석실묘가 사용되었다.
이 지역에서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초반까지 사용된 영산강식 석실묘는 입지와 석실의 구조, 출토유물 등 모든 특징들이 백제와는 다르며 앞 단계에 해당하는 옹관묘의 경우와 통하고 있다. 특히 나주 복암리 3호분처럼 석실 안에 옹관이 들어 있는 것은 영산강식 석실묘가 사용되었던 시기는 여전히 기존의 마한 세력이 발전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6세기 중엽경부터 기존의 영산강식 석실묘는 종지부를 찍고, 백제식 석실묘가 보급되기 시작하여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백제 석실묘의 변화가 그대로 반영된다. 이는 6세기 중엽경에 마지막 마한 세력이 백제에 통합되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인 것이다.
일본관의 관계
최근 영산강유역에서는 일본의 前方後圓墳과 같은 長鼓墳들이 발굴되면서 국내외적으로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는데 그 시기는 주로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에 해당한다. 장고분들은 대형옹관묘의 중심지인 나주 반남을 비롯한 영산강 하류지역에서 벗어난 함평,영광,광주,담양,해남 등 영산강 상류지역이거나 주변지역에 분포되어 있는데 이러한 분포상은 장고분의 축조 배경과 피장자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관건이 된다.
영산강유역의 장고분들은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같다는 점에서 그 피장자가 누구이며 어떤 배경에서 영산강유역에서 축조되었는가 하는 점은 마한의 성격을 이해하는데도 중요한 관건이 되고 있는데 이 문제를 풀어가기 위해서는 마한 초기 이래 계속되어 왔던 양 지역의 교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의 야요이문화는 청동기와 쌀농사를 토대로 한 새로운 문화인데 그 성립 배경에는 마한지역 주민들의 집단이주가 숨어 있다. 일본으로 건너간 마한인들은 새로운 세계를 개척해 나가면서 한국의 마한과 교류를 계속하였고 그 과정에서 혼인 등의 인적 교류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와같은 양 지역의 관계는 백제의 건국 이후에도 지속되었을 것이며 백제에 밀린 상당수의 마한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갔을 가능성이 높다.
이와같은 사정을 고려해 보면 일본에서도 고대국가가 태동하는 역동의 시기에 정치적으로 위기에 몰린 일부 세력가들은 백제의 건국 이후에도 유대관계를 지속하여 왔던 영산강유역 마한 세력의 승인 아래 들어와서 망명생활을 하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고 결국 영산강유역에서 일본식의 고분에 묻힐 수 밖에 없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처럼 마한과 일본은 백제의 건국 이후에도 대단히 밀접한 유대관계를 유지하여 왔던 것이므로 앞으로는 전통적인 백제와 일본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백제와 마한, 마한과 일본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나가야 할 것이다.
임영진(전남대교수, 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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