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한일 관계의 진실은
나주 반남고분군
1917년 12월, 조선총독부박물관 고적조사위원인 야쓰이 세이이치(谷井濟一)가 영산강 유역, 나주 반남면의 옛 무덤들을 발굴 조사했다. 그는 이 일대의 고분 31기에 번호를 붙이고, 짤막한 보고문 10여 줄을 남겼다. “그 매장법과 관련 유물로 보건대 아마 왜인(倭人)의 것으로 추측한다”면서. 1935년 5월에는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사가 준이치(澤俊一)와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가 반남면 신촌리, 덕산리 등의 독무덤 5기를 추가로 발굴 조사했다. 이때 아리미쓰 교이치는 덕산리 2호분과 신촌리 6호분이 일본의 고분 양식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을 닮았다고 했다. 그러나 이들 고분 2개는 긴사각형이기는 하지만 앞에 네모지고 뒤는 둥글며 주위에 도랑을 두른 전방후원분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1984년 해남 방산리에서 정말로 전방후원형으로 생긴 무덤(방산리 장고분)이 발견되었다. 이후 영광의 월계고분, 함평의 장고분, 마산리 표산 고분, 신덕 고분, 담양 고성리 월성산 고분, 성월리 고분, 해남의 말무덤 고분, 영암의 자라봉 고분, 전북 고창의 칠암리 고분, 광주 명화동 고분과 월계동 고분(2기)까지, 열세 개에 이르는 전방후원형 무덤이 영산강 유역과 그 남쪽 일대에서 나타났다. 처음에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이것을 고대에 일본이 한반도에 진출했다는 증거로 삼았고, 한국의 역사학계에서는 전방후원형 고분이 한반도에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한반도의 전방후원형 고분이 일본 전방후원분의 원형이라는 주장도 나왔으나,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발견된 전방후원형 고분의 조성 연대(5세기 말~6세기 중엽)는 일본 전방후원분(3~6세기)보다 늦다. 이들 무덤의 주인은 과연 누구일까? 이들 무덤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는 것일까?
임나일본부, 식민지 근대화, 독도 문제 등등, 한일 간의 역사 논쟁은 고대사에서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끊이지 않고 제기된다. 고대사에 대한 두 나라 일반 시민의 의식 차이가 이렇게 큰 것은, 과거 역사책들 거의 모두 국가가 주도해 편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나 『일본서기』를 보면 고구려든 백제든 신라든, 또 왜든, 서로의 존재를 빼고 나면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그만큼 고대 한일 관계를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한국 고대사나 일본 고대사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데도, 흔히들 한국인들은 단순히 일본에 선진 문화를 전해주었다고만 생각하고, 일본 쪽에서는 반대로 자기네가 한반도를 지배했다고 생각한다.
고대 사람들이 문자로, 유물로, 유적으로 남긴 흔적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수수께끼이고 질문이다. 지나간 역사에서 진실을 건져내려면, 문자 기록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유물 하나에 좌지우지되지 말고, 기록의 행간에서 물음표를 찾아내며 유적과 유물의 맥락을 읽어야 한다. 옛 사람들이 남긴 실제 증거인 유적과 유물을 바탕으로 문자 기록의 틈새에서 질문을 찾고, 그 질문의 해답을 찾는 과정이 바로 역사를 배우는 일이다.
『한일고대사유적답사기』는 역사의 현장을 직접 찾아가서 눈으로 보고, 역사책과 학자들의 의견뿐 아니라 주민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옛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여 고대 한일 관계의 진실을 엿보고자 했다. 한국과 일본 곳곳에 남아 있는 두 나라 고대사의 흔적을 다니며 먼저 역사의 질문을 찾는 여행을 하면서 지은이는 비로소 스스로의 모순된 역사의식을 마주했고, 사실과 이성을 바탕으로 일본인들의 역사 왜곡을 비판할 수 있었다.
이키 섬의 가쓰모토(勝本)라는 곳에 가면 과거 조선의 통신사들이 머물렀다는 아미타당(阿?陀堂) 옆에 진구를 제신으로 하는 쇼모(聖母) 궁이라는 신사가 있다. 가쓰모토라는 곳은 진구가 삼한을 정벌한 뒤 돌아와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지명을 승본(勝本)으로 고쳤다는 곳이다. 그런데 신사 안내판에는 진구가 삼한 정벌 때 적군의 목 10만여 개나 가져와 바닷가에 묻었다고 씌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타던 신마(神馬)의 발자국이라는 돌이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있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전승된 이유가 무엇일까?
진구의 말굽석 곁에 또 다른 비석이 있었는데, 그것은 ‘文永之役元軍上陸地’라는 비석이다. 고려 말 여몽연합군이 이키 섬을 공략할 때 상륙했다는 곳이다. 『신원사(新元史)』에는 당시 참담하게 패배한 이키 섬의 상황이 실려 있다. 이 전쟁으로 쓰시마와 이키 사람들이 수없이 죽었고, 살아남은 사람은 화살을 쏘지 못하도록 손에 구멍을 뚫어 쇠사슬로 배에 묶어두었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북부 규슈에 남아 있는 진구에 대한 전설은 여몽연합군의 공격, 백촌강 전투의 패배, 쓰시마 정벌 등으로 인한 반작용이 설화의 형태로 이어진 것이다. 우리나라와 궂은 일이 많았던 탓에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한 통로로 진구 증후군이 급속도로 퍼져나갔을 것이다. 허구가 진실로 만들어진 것은 어쩌면 그들 나름의 고통을 없애기 위한 일종의 보상 콤플렉스는 아니었을까 싶다. (중략)
이처럼 후대의 인식으로 고대를 재단하는 경우가 수없이 많다. 사람들은 흔히 근대와 현대의 인식으로 고대의 사실까지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나가려고 한다. (중략)
우리의 실정도 마찬가지다. 역시 고대사 해석과 설정은 중구난방이다. 임나일본부에 대한 성과는 일본 것을 그대로 베끼면서 근거 없는 마음 속 소망만은 일본을 지배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표출된다. 이런 주장이 판을 친다면 황국사관에 젖어 임나일본부설과 진구의 삼한 정벌을 주장하는 일본의 극우주의자들과 무엇이 다른가? 이제 쇼비니즘을 버리고, 사실과 이성을 근거로 열린 민족주의를 창출할 필요가 있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과도한 갈망이 역사 왜곡을 낳는 현실을 다시 한 번 되새겨야겠다.
홍성화/한일고대사 유적답사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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