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7/25 23:03 http://blog.naver.com/12345uuuuu/70033410363
② 철겸(鐵鎌 : 쇠낫)
토성의 아토 층에서 출토되었다. 쇠 낫은 수확용이라고 보기보다는 전쟁의 무기로 이용되었으리라고 본다. 토성 내에서 농사를 지었을 까닭이 없는 것으로 보아 긴 자루에 낫을 꽂아 산성에 기어오르는 적을 무찔렀던 전쟁무기다.
③ 철창(鐵槍 : 쇠창)
순수 전쟁용의 무기다. 역시 아토 층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아 축성 당시의 병사들이 사용하였던 것으로 끝이 뾰족하고 창의 한편이 날카롭다. 초기 철기시대의 창은 양쪽으로 사용하게 되어 있어서 땅에 짚는 쪽도 예리하게 뾰족하며 앞뒤로 사용하게 되었다. 본 토성에서 출토된 것은 어느 쪽의 것인지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뒤의 것에 가깝다.
④승석문토기편(繩蓆文土器片)
중국의 주(周)나라 때에 시작되어 한 대(漢代)의 중기(中期)에 소멸된 토기다. 중국에서는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져 철기시대에 없어졌으나 우리나라에 전래되기는 초기 철기시대에 들어와 AD 4C경에 소멸되었다. 그릇에 표면은 4~5단으로 나누고 노끈이나 새끼의 문양을 그릇의 표면에 박거나 두들겨서 그릇을 단단하게 하였다.
백제가 멸망한 것은 7C이다. 승석문토기가 우리나라에서 자취를 감춘 것은 AD 4C경이라고 볼 때 위례산성은 백제 초기에 쌓여진 성이 분명하고 위례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세워진 산성이다.
⑤성채(城砦)
동국여지승람 직산현조에 위례성의 기록을 살펴보면 위례성의 둘레는 1,690척(자)로 약 460m나 되는 장성이다. ㄱ자나 ㄷ자의 형이 아니고 원형의 성이다. 높이는 8자로 약 2.4m 정도이고 흙으로 쌓은 토성으로 기록은 되었으나 사실은 토성과 석성의 혼성이다. 현재 남아 있는 석성은 두 곳으로 북쪽의 것은 28m 길이에 높이가 약 3m 정도이고 남쪽의 것은 길이가 22m 높이가 3m 정도다. 성채도 두께 20cm 정도의 돌을 포개서 쌓아 올렸고 큰 돌 사이에 작은 돌을 괴어가며 쌓았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성채로는 지극히 원시적인 형태로 되어 있으며 백제초기의 축성임이 수차에 걸쳐서 밝혀졌다.
백제 축성의 대부분이 토성으로 쌓는 예가 많으며 본 위례성도 토성을 길게 쌓아 가다가 갑자기 굽어져 만곡(彎曲)을 이룬 부분은 돌로 곧게 쌓고 돌 뒤를 흙으로 메꾸어 토성을 연결시켰다. 성돌은 자연석 그대로를 사용하였고 인공을 가한 자취는 찾아볼 수 없다. 석질은 대개 화강암이며 두 곳의 석성을 제외하고는 전체가 토성으로 되었으며 이천년이 지난 지금은 나무가 우거지고 토사가 밀려 간혹 허물어진 곳이 있지만 아직도 성곽의 대부분이 뚜렷하게 남아있다. 적의 침입방향인 북서쪽(입장쪽)에서 볼 때 지금도 선명하게 토성임을 짐작할 수 있으나 반대편인 동남쪽(북면쪽)에서는 정상부분까지 경사가 완만하여 확인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현재 토성부분에 무성하게 자란 나무를 제거했을 경우에는 토성의 모습을 뚜렷하게 볼 수 있다. 1983년과 1986년에 국립지도원에서 발행한 1 : 25,000의 지도에 위례성의 성지가 뚜렷하게 항공사진으로 촬영되어 지도상에 성곽의 표식으로 그려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고 토성과 석성은 연결되어 원형을 이루면서 위례산의 정상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성내의 넓이도 약 10만평이나 된다 하니 가히 장성임을 짐작한다. 여지승람의 1,690자는 현재의 지도에 표시된 부분의 1/5만 기록되었을 뿐이다.
이 성채에 대한 연구는 매우 흥미로운데 몇 가지만 살펴보면
첫째는 이제껏 주장한 것과 같이 백제의 첫 서울이며 온조왕에 의하여 축성된 성으로 백제의 건국연대와 그 연대를 함께하는 백제 최고의 성으로 주장하는 설이 있으며
둘째는 백제 20대 개로왕(AD 475) 때 고구려의 장수왕의 침입으로 개로왕이 전사하고 고구려 세력이 한강 이남으로 진출하면서 문주왕(개로왕의 아들)이 웅진으로 천도할 때 백제군의 최북단(最北端)의 성으로 웅천(熊川 : 안성천)을 중심으로 고구려와 백제가 대치하고 있을 때 백제의 요충지(要衝地)로 주장하는 설이 있고
셋째는 삼국의 항쟁시 신라군과 백제군의 전투지역으로 알려진 도살성(道薩城)의 위치가 바로 지금의 위례성의 위치로 현재 천안시 북면 납안리와 도촌(都村) 등을 중심해서 있었던 성지로 주장하고 있다. 즉 도살성이 위례성이라는 주장이다.
위와 같이 세 가지 주장이 있으나 그 중에서 가장 타당성 있는 것은 첫 번째의 주장이다. 그 이유는
▷ 성채 자체가 BC 1C ~ AD 1C의 작품으로 볼 수 있고
▷ 축성 당시부터 위례산성이다. 위례산에 쌓았다고 해서 위례산성이 아니라 당시의 도시 이름이 위례성이며 지금은 도시 이름은 간 곳 없고 산의 이름만이 위례산으로 남았을 뿐이고 위례성의 성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있었던 위례산성이다.
되풀이해서 말하거니와 위례라는 이름은 간데 없고 산의 이름만이 위례산이다. 또 동국여지승람에 사산성(蛇山城 : 직산)은 토성으로 둘레가 2,984자이고 높이는 13자라고 하였다. 이것도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사산성 이전에 위례성이다.
본시 위례성이었던 것이 고구려에게 공취당하고 난 뒤에 사산성이 되었으며 오늘에 이어져 직산이 되었다. 마을(도시)의 이름은 바뀌었어도 산의 이름과 산성의 이름은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전국에 위례라는 낱말이 존재하는 곳은 여기뿐이다. 아주 소중한 이름이다. 최근에 와서 서울의 강동구에 위례성 가는 길이라는 새로운 도로 명칭이 붙었고 위례마을이니 하는 터무니 없는 이름을 마음대로 쓰고 있다. 위례마을 가는 길이 닿는 곳이 어딘가. 아무리 가보아도 위례마을은 없다. 그러나 우리 고장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위례산 가는 길로 가면 분명히 위례산이 있고 위례성 가는 길로 가면 위례산성이 있지 아니한가. 억지로 꾸미고 가꾸지 말았으면 한다.
몽촌토성이 있다고 그 앞의 마을이 위례마을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위례성과 사산성은 같은 것으로 옛날에는 위례마을의 이름이요, 또 그 마을을 둘러쌓았던 성이다. 사산성은 현재의 직산면사무소로 쓰고 있는 관아의 뒷산 즉 성산(城山)의 정상부분을 둘러 마을 둘레에 쌓고 남쪽의 부엉바위(남산바위)까지를 말한다. 백제의 축성이 거의가 토성이며 사산성도 예외는 아니다.
86년 여름에 충남대학교에 의하여 이 사산성의 일부가 발굴되었으나 신문에서는 이것을 목지국의 관청벽이라고 고증 발표한 사실이 있다. 필자의 소견에는 그렇지 않다. 분명히 사산성이고 그보다 옛날에는 위례성이다. 분명한 성곽과 성채가 있는데도 백제의 첫 서울을 한강변이니 금강변이니 해서야 되겠는가.
⑥ 적석총(赤石冢)
위례산성의 서북쪽으로 약 20m되는 성 아래에 위례성 우물이 있고 그 아래쪽으로 약 20m 지점에 원시의 덤불 속에 장방형의 돌무지가 눈에 띈다. 길이가 5m 20cm 넓이가 3m 80cm 땅 위에서 높이가 1m 10cm의 적석총이다. 한강변 지금의 강동구 석촌동에 있는 대형 적석총의 축소판이다. 마치 침대 형으로 되어 위쪽이 약간 높고 아래쪽이 낮다.
우리나라 역사의 기록으로 보아 적석총이 만들어진 것은 청동기 시대로 되었으나 남부지방에서는 그 후까지도(철기시대의 초기) 나타나고 있다. 원시의 숲속에서 발견된 것이므로 원형은 과히 훼손되지 않았다고 보겠으나 최근에 그 모습이 많이 바뀐 것 같다. 바뀐 이유는 민간신앙(Shamanism)을 하는 부녀자들과 무녀들에 의하여 산신제를 지내는 제단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1986년 문화재관리국에서 본 돌무지를 답사하고 이것이 적석총이라고 분명하게 고증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이 돌무지는 민간신앙의 제단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적석총인 확률이 50%정도라고 하였으니 이 문제는 가까운 시일 내 발굴하여 확인 될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것을 민간신앙의 제단용 돌무지나 성황당의 돌무지로 보기에는 몇 가지 의심스러운 곳이 있다.
첫째 성황당(城隍堂)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가나 고개의 마루턱에 자리잡는 것이 보통의 예이다. 그리고 서낭은 반드시 당의 뒤쪽에 신수(神樹)가 있어야 한다. 헌데 여기의 돌무지는 길가도 아니고 고개도 아니다. 해발 500m나 되는 높은 산의 9부 능선이다. 그리고 길이 없는 계곡의 바로 옆이다. 여기까지 오르면 어느 곳과도 통하는 길이 없다. 나무꾼이나 사냥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난 길이 아닌 길이 있을 뿐이다. 또 최근에 산성 조사 관계로 오르내리는 사람들에 의하여 발자국 정도 남긴 길이다. 이토록 비탈지고 궁벽한 곳에 서낭을 두었을 까닭이 없다.
둘째로 인공적이라는 것이다. 서낭의 돌무지는 던진 돌이어서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것이 그 예이다. 이 돌무지는 그렇지 않다. 떡의 켜를 쌓듯 하였고 사다리꼴로 올린 것이 예사 돌무지와는 다르다. 돌무덤의 머리 부분이 쌓여진 것을 볼 수 있다.
적석총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아도 오늘날까지 잘 보존된 것을 보면 덩굴에 가려서 사람의 눈에 뜨이지 않은 점도 있겠지만 특별한 어느 인물의 무덤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김성호씨는 저서 ‘비류백제의 일본 국가의 기원’에서 백제 초기의 적석총으로 보고 온조의 어머니(동명왕 주몽의 두 번째 부인) 소서노(召西奴)의 무덤인 듯하다고 하였다.
⑦ 석곽적석총(石廓積石塚)의 군락지
위례산성의 뒤쪽 천안시 북면에는 앞서 말한 적석총과는 약 500m 떨어진 산비탈에 규모가 좀 작은 적석총이 수십기 군락(群落)을 이루고 있다. 크고 작은 돌로 지표를 누르고 있으며 거의 타원형으로 되었고 경사가 비교적 완만한 곳에 시신을 땅에 묻고 그 위를 흙으로 덮고 많은 돌로 쌓아놓은 일반적인 적석총 형태다. 숱하게 많은 적석총으로 보아 필시 어느 전화에 피해를 입고 전사한 사람들의 무덤인 듯하다.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BC6년의 여러 가지 사건 노구화위남(老嫗化爲男)이니 오호입성(五虎入城) 등이 그것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고 앞으로의 발굴을 기대하여 본다.
전란에 희생된 군인들이 함께 묻힌 백제의 국군묘지와 같다.
※ 참고적으로 가필하여 둘 것은 지금까지 많은 사서(史書)에 위례성에 대하여 논하였고 논문이나 연구보고서가 나왔으나 적석총이나 돌무지에는 한 마디의 논술이 없었음을 실어 둔다.
⑧ 위례산성 우물
동국여지승람에 위례성내 유일정금양퇴(有一井今羊頹)
위례산성 안에는 우물이 하나 있는데 지금은 반이 무너졌다는 뜻이다.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된 지가 약 500년 전으로 볼 때 그때 이미 반이 허물어졌다는 글로 보아 세월이 흐른 지금쯤은 전폐돼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 사실과도 다르다. 우물가에 잡초가 우거지고 낙엽이 떨어져 물속에서 부패되어 물을 먹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해서 반폐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것은 우거진 풀을 베어버리고 부패된 낙엽을 긁어내면 되는 것이다. 현재도 우물은 완전한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었다. 여지승람을 편찬한 학자들이 위례성에 올라서 우물을 직접 확인하고 쓴 글이 아니고 직산고을 사람들에게 들었거나 아니면 어느 고서(古書)에 있는 그대로를 옮겨 썼을 가능성이 높다.
1985년 여름 필자는 우물을 직접 퍼내고 인부들과 함께 우물 내부에서부터 조사하였으나 반폐도 전폐도 아니다. 최초의 모습 그대로 보존상태도 지극히 양호한 편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우물을 퍼서 밥도 짓고 하였는데 최근에 와서 오염이 심하여 사용하기가 어렵다. 오염의 원인은 산제나 용왕제(우물제)를 지내고 제물을 우물에 던져 부패되기 때문이다.
우물의 넓이는 지름이 2.8m의 원형으로 길이는 약 2.2m정도이나, 퇴적되어 쌓인 흙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어도 밑바닥의 돌을 쌓기 시작한 지점은 찾지 못했지만 대개 약 15cm 정도의 돌을 15~16개 포개서 쌓아 올렸다. 일명 용(龍)샘으로 불리기도 하며 가뭄이 심할 때도 마르지 않는 것이 용샘의 특징이다. 수백 명의 군사들이 취사 용수로 사용할 수 있음은 물론이지만 음료수로 사용을 하여도 그 양이 남을 정도이다. 지금도 깨끗하게 가리고 정수를 해서 사용하면 식수로 사용해도 별다른 지장이 없을 정도이다.
최근 천안시 공보실의 배려로 우물가에 사적의 표시로 비석을 세워 누구나 보면 알 수 있도록 하였음을 부언한다. 명주실 꾸러미를 몇 개를 풀어도 밑이 닿지 않는다는 전설과 우물 밑의 구멍이 부여 백마강에 통한다는 많은 전설을 지닌 위례산성 우물은 산의 정상부분에 있다는 것이 또 하나의 특징이다.(예부터 산성 속에는 우물이 있는 것이 필수로 되었고 그 우물은 먹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은 상식이다.) 적의 침입이나 포위로부터 장시일간 견디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라 보겠다. 그러나 어느 산성이나 우물은 비교적 낮은 곳이나 산골짜기를 막아 이용하였으나 위례산성의 우물은 산의 정상부분에 그것도 해발 400m나 되는 곳이라면 우리나라의 여러 산성중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것이라고 하겠다.
⑨ 망대(望臺)
토성과 석성으로 섞여 쌓여진 위례성은 길이가 약 2500m로 산의 정상부분을 둘러쌓았고 가다가 우뚝 솟은 봉우리를 만나면 봉우리를 뭉겨서 펑퍼짐하게 만들어 멀리 서북쪽을 바라볼 수 있는 망대를 만들었다. 지금 찾아 볼 수 있는 망대는 여섯 군데다. 망대에서 서북쪽을 바라보면 멀리 아산만이 한눈에 들고 경기평야의 남쪽 끝인 소사평야(素沙平野)가 성환읍에 연결되어 남쪽으로 치닫는다. 눈 아래에는 직산 옛 고을과 입장이 손에 잡힐 듯하며 산 아래 호당리에서 직산의 성산까지는 낮은 구름조차 볼 수 없는 평야지대이며 엽돈령(葉沌嶺 : 입장에서 진천으로 가는 고개)에서 근원이 되어 흐르는 물과 성거산을 수원으로하는 한천(寒川)이 보이고 북쪽으로는 안성천(安城川)의 대하가 도도히 흘러 백석포에 잠긴다. 서북쪽에서 침입하는 적은 이곳 망대 위에 올라서서 바라보면 7~8km 전방에서 식별이 될 수 있을 정도로 높고 전망이 좋은 곳이다. BC 6년(온조왕 13년)에 있었던 오호입성의 사건을 하나의 전쟁으로 볼 때 아마도 그때에 사용되었던 전망대라고 본다. 네 번째까지의 망대는 성보다 약간 높게(2~3m) 대를 쌓았으며 망대겸 전투 지휘소로 사용한 듯 보인다. 망대의 뒤편에는 움집(땅을 파고 거적을 두른 집)을 지었던 자취가 지금도 우묵하게 파여 있다. 망대를 지키던 병사들이 번병제로 교대하기 위하여 쉬었던 곳임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다.
1989년 5월에 실시한 지표조사 당시 앞의 ①~④에서 백제 초기의 와당이 많이 출토되었다.
성문석(구숫돌)
위례성 정상 부분인 해발 524m에 구숫돌이 두 동강이 나서 부러진 반쪽이 남아 있다. 제3의 망대나 움집터 어디에서 옮겨진 것인지는 알 수 없어도 황폐한 모습 그대로 뒹굴고 있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약 5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완전한 구수 모양의 돌이었으나 그 후에 두 개로 갈라져서 그 반쪽만이 남아있고 반쪽은 간 데 없다고 한다. 반쪽도 사용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아 그 근처 땅속에 묻힌 것으로 보이나 찾을 길이 없다. 원형 그대로 있다면 무게가 약 1t 가량의 화강암이다. 일반 농가에서 소나 말의 먹이를 담은 구숫통과 같다하여 근처의 주민들은 구숫돌이라고 부른다. 5백여m나 되는 산의 정상에 인공으로 가해진 돌이 있음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넓은 장방형의 돌을 구수모양의 흠을 정(釘)으로 쪼아냈다. 이 돌에 인공이 가해진 시대는 찾을 길이 없으나 위례성 쌓았던 당시의 작품으로 본다면 약 2000년 전의 작품이다. 1986년 가을에 있었던 문화재관리국의 답사시에 조사된 결과에 의하면 이 돌의 용도가 석문석이라고 하였다. 성문(城門)을 세우기 위하여 문기둥의 아래에 받혔던 돌이다. 성문이 열렸다 닫혔다 하려면 기둥 아래에 홈이 파여져야 하고 그 홈에 기둥의 아랫부분이 박혀서 돌아가면서 성문이 열리고 닫히는 돌이다. 문화재 관리위원의 말에 의하면 돌은 하나가 아니고 몇 개 또 있어야 한다고 하나 아직껏 지상에 노출된 것은 하나뿐이다. 앞으로의 발굴에 기대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성문석은 실제 성문을 열고 닫는 밑받이 돌인지 아니면 용도가 전혀 다른 데 있었던 것인지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후세에 누가 묘지에 쓰기 위하여 만든 것인지...
또 다른 설에 의하면 토성이나 석성을 쌓고 성내에 고인 물을 밖으로 빼내기 위하여 성채 밑에 놓았던 물받이 돌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이 돌이 있는 북쪽으로 약 300m쯤에 입장면 양대리와 북면 운용리를 잇는 부소문(扶蘇門) 고개가 있다. 지금은 고개 이름만이 있을 뿐이고 아무도 이 길을 걷는 사람은 없다. 만약 이것이 분명히 석문석이면 이 부소문이 고개에 있었던 문에 쓰여진 돌이 아닌가 한다. 전설에서 다시 밝히겠지만 오랜 옛날에는 부소문 고개에 성문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이 돌의 주변에는 그리 많지는 않아도 약간의 돌이 있으나 모두 불에 그슬린 검은 흔적이 있다. 아직도 풀 수 없는 몇 가지 의문이 이 돌에 남아 있다. 5백여m나 되는 산정에 이런 돌이 있다는 점, 인공으로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다는 점, 용도가 무엇인지 아직도 완전하게 풀리지 않은 점 등이다.
제원루지(濟源樓址)
직산객관 동쪽에 있다. 서거정(徐居正)이 영남지방에 사신으로 갈 때 직산을 지나게 되었다. 직산객관 동쪽에 한 누각이 있기에 올라가서 좀 쉬다가 주인에게 묻기를 이 누각의 이름이 무어냐고 하였더니 주인은 알지 못한다고 하여 좌우 사람들에게 물으니 고을 사람이 제원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손들은 제원이란 뜻을 알지 못하였다. 이에 서거정이 말하기를 이 고을은 백제의 옛 도읍이니 이 누각을 제원이라고 하는 것은 백제의 근원이 여기에서 시작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백제의 시조 온조는 고구려 동명왕 주몽의 아들로서 난을 피하여 남쪽으로 도망했던 곳인데 사서(史書)에 쓰기를 온조가 부아악에 올라가서 살만한 곳을 찾다가 하남위례성으로 도읍을 정했으니 이곳을 세상에서 직산이라고 한다. 서거정이 지난해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편찬하면서 여러 가지 책을 읽고 상고하여 보니 직산이 백제의 첫 도읍지였던 것은 의심할 바가 전혀 없다고 하면서 제원루에 오르니 감개를 이기지 못하여 시를 한 수 지었다.
백제유허초자평 아래감개일상정
百濟遺墟草自平 我來感慨一傷情
백제의 옛 터에 풀이 절로 우거졌는데 내 여기 오니 감개하여 마음이 상했네
오룡정파천안부 쌍봉명잔위례성
五龍淨罷天安府 雙鳳鳴殘慰禮城
다섯 용이 천안부에서 싸워 파하고 봉황새 한 쌍이 위례성에서 울었네.
시조사심홍수합 성거산옹벽운횡
始祖祠深紅樹合 聖居山擁碧雲橫
시조의 사당은 깊은 단풍나무에 가리워졌고 성거산이 옹위했는데 푸른 구름 비꼈어라
등루다소추풍사 하처취잔철적성
登樓多少秋風思 何處吹殘鐵笛聲
누각에 올라 가을바람에 나는 생각 어디서 쇠피리 소리만 들려오는가
이상은 제원루에 대한 서거정의 시다. 제원루는 지금의 직산초등학교 교정에 있고 이곳에는 당시 것으로 보이는 장대석(長大石)이 흐트러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온조왕 묘
직산 고을 동북쪽 3리에 있다고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 세조11년(1465년)에 세웠고 봄과 가을에 국가에서 향(香)과 축(祝)을 내력서 제사 지내게 하였다. 온조왕 묘는 조선 선조30년(1597년) 정유재란 때 왜적에게 소실되고 순조18년(1818년)에 현감 이의선(李義先)이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신사년(1881년)에 허물어졌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와 같이 온조 묘나 제원루지가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 초도는 천안시 직산지방임에 틀림없는 것으로 본다.
6. 위례성 주변의 전설
유물이나 유적이 있는 곳에는 그것에 따르는 전설이 있게 마련이다.
원래 전설이란 황당하고 터무니없는 것이라서 전혀 믿기 어려운 내용이 많고 귀담아 듣기 싫은 때도 있으나 할머니 무릎에 누인 손자를 잠재울 때나 깊은 겨울밤 사랑방 노인들이 한담거리로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요건이다. 또 유적이나 유물은 실제 조사함에 있어서 먼저 이루어야 될 것은 현지에 전해오는 전설의 청취다.
현지에서 전설을 듣다 보면 그곳의 유물이 어떻게 해서 그 자리에 있으며 또 유적의 내력은 어떠한가 하는 등 문헌 조사에도 나타나지 않는 내용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어떤 때는 문헌과 유적과 유물 그리고 전설 등이 일치하는 경우가 있어 우리나라 모든 기록의 신빙성을 재평가하게 되고 현지의 유물이나 유적의 고증에 더 크게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전설 1>
옛날 백제군과 고구려군이 싸워 피비린내 나는 큰 싸움이 벌어졌는데 백제의 임금은 용왕의 아들이라 조화를 잘 부려서 고구려 군사를 잘 물리쳤다. 백제 임금은 낮에는 용으로 변신하여 웅진(공주)에서 위례성의 용샘까지 땅 속으로 뚫린 물줄기를 타고 단숨에 달려와 위례성의 백성들을 지키기 위하여 고구려 군사들과 전쟁을 하고 밤에는 용샘으로 들어가 웅진에 있는 왕궁으로 돌아가서 모든 정치를 처리하였다.
그러던 중 임금 자리를 탐내던 처남이 임금이 용왕의 아들임을 알고 제비를 낚시 미끼로 하여 용샘에서 돌아오는 왕을 낚아채어 죽여 없앴다. 백제 임금이 죽은 후 백제군은 전멸 당하였으며 위례성 주변에 있는 모든 산은 위례성을 향하여 울었다고 한다.
<전설 2>
위례산은 백제군이 고구려군에게 패하여 울었다고 해서 위례산이라 하였다. 울다와 위례를 같은 음으로 보았고, 울다가 변해서 위례로 된 것으로 전한다.
위례산 부근에는 지금도 옛날 백제의 서울을 말해 주는 성이 있는데 그 산 위에는 용이 놀았다는 용샘이 있고 이 용샘은 서해까지 이어져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메워져서 바닥이 드러나 보이지만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고 또 비가 많이 와도 넘치는 일이 없다. 명주실을 몇 타래씩 풀어도 끝이 닿지 않고 비가 오는 날에는 용들이 놀아서 이곳에 와서 놀고 많은 조화를 부렸다고 한다. 용들이 놀아서 산 위에는 언제나 오색의 무지개가 떠 있고 위례성 주변을 지나던 역대의 제왕들은 꼭 산신제를 지내고 갔다고 한다.
<전설 3>
옛날 백제의 도읍지 위례성에는 백제라는 이름을 가진 남매가 살았는데 오빠 이름도 백제이고 동생이름도 백제였다. 동생 백제가 위례성에서 “나는 여기서 도읍을 정하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오빠 백제가 여기는 “물이 없어서 안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동생 백제가 말하기를 “여기 참 직산이 금방석”이라고 하는데 만인이 깔고 앉으면 만인이 쓸 수 있는 물, 즉 자연수가 되기 때문에 “여기에 도읍을 정해도 무방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오빠 백제는 “언제든지 용상지지(임금이 앉을 땅)가 앉으면 수만명이 모여 살게 되며 모여 살려면 그 물은 웅수(금강) 뿐이다. 그러므로 부여 백마강을 끼고 도읍을 정하거라” 하고 반대를 하였다. 그러나 동생 백제가 “안됩니다. 나는 여기서 언제고 도읍을 할 것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해야 삼국통일이 됩니다. 왕후지지(王侯之地)가 여기입니다.”라고 간곡히 권했으나 오빠 백제는 물을 끼지 않아서 안 된다고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동생 백제는 하는 수없이 오빠의 말에 따라 부여 백마강을 끼고 부여에 가서 도읍을 정하였다. 그러나 마음은 항상 언짢았다. 그의 마음은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자 하였으나 오빠의 말씀을 거역할 수가 없어 이곳 부여까지 왔으나 낮에는 백마강이 있는 부여에서 지내다가 밤에는 용으로 변하여 백마강에서 위례성의 용샘까지 와서 이곳을 다스렸다고 한다. 그러자 오빠 백제는 부여 사람들이 임금 없는 백성이요 장군 없는 군졸인지라 나라의 백성들이 아우성치는 것을 볼 수가 없어 동생에게 “밤낮 이곳에만 있으라”고 하였으나 동생은 듣지 않고 위례성 도읍을 계속 고집하였으며 듣지 않고 위례성 밖에는 없다고 하면서 부여와 위례성 왕복을 계속하였다. 그러자 오빠는 동생을 죽일 결심을 하고 제비 한 마리를 잡아 구워서 낚시의 미끼로 하여 밤새 굶고 돌아오는 동생을 꼬여 제비고기를 먹도록 하여 낚시로 낚았다. 동생 백제는 낚이어 죽어가면서도 통일천하를 이룰 도읍지는 위례성 밖에는 없다고 하면서 죽었다고 한다.
<전설 4> 도영지와 천석군
옛날 중국 땅에는 농사를 짓고 살다가 추남이라고 해서 쫓겨났던 한 사나이가 있었다. 그는 사람인지 동물인지 모를 정도로 얼굴이 기묘하게 생겼으며 머리는 한쪽이 절벽이며 몸 여기저기에 털이 나서 사람인지 동물인지 모를 정도로 얼굴이 이상하게 생겼었다.
그는 중국 땅에서 쫓겨나 동쪽으로 발길을 돌려 우리나라로 우연히 들어와 남쪽으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마침 지금의 직산지방에서 자리를 잡고 들에서 야생식물을 먹고 살다가 넓은 들을 바라보고 무엇을 생각했는지 나무를 깎아 연장을 만들어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는 질퍽거리는 곳에다 논을 만들고 메마른 곳은 밭을 만들었다. 들에는 물이 흔하고 풀이 흔하고 풀이 썩어서 땅이 기름져 있었다. 그는 논과 밭을 만들었지만 그곳에 심을 곡식이 문제였다. 그는 그의 고향인 중국 땅으로 달려가서 고향 사람들로부터 여러 가지 곡식의 씨앗을 얻어 등에 지고는 강과 산을 넘어 직산 땅에 돌아와 정신없이 씨를 뿌렸다.
그는 농사 이외는 아무것도 몰랐다. 생업에만 착실히 종사할 따름이다. 그 넓은 들을 차지하고 착실하게 전답을 일구다 보니 자기 혼자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넓은 경작지가 되어 이곳에 흘러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고 반타작하기로 했었다. 그래서 직산의 이곳저곳에 사람이 모여 살기 시작했고, 들이 거의 농경지로 변하자 도적들이 가끔 몰려 들어와서 괴롭히므로 그들은 마을을 지키는 협동체를 구성하기로 하고 서로가 창과 활을 만들어 도적들을 대적하기로 하였다.
자기 땅을 경작하는 소작인들은 무슨 말이든 잘 들었지만 그에게는 한 가지 풀리지 않는 불행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무도 자기에게 시집을 오겠다는 여자가 없었고 그뿐 아니라 여자들이 자기만 보면 짐승이라고 모두 도망갈 정도였다. 그래서 그는 오십이 넘도록 혼자였고 가장 쓸쓸한 생활을 하는 큰 지주였던 것이다.
그는 많은 재산을 모았지만 나이를 들수록 외로움에 사무치게 되었다. 그가 심한 고통 속에 삶의 의욕을 잃고 있을 때 자기 마을의 북쪽에 많은 군사들이 찾아왔다. 군사들은 그를 보고 말하기를 우리들은 남쪽에 나라를 세웠는데 우리들의 왕은 온조라고 하며 앞으로 많은 협조를 해달라고 하였다. 그는 실의에 빠진 사람처럼 하고 있다가 하는 말이 “나는 도적이 아닌 사람은 누구든 좋습니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아내를 얻어 살고 싶습니다.”고 하소연 비슷한 말을 군사들에게 하였다. 군사들은 그 딱한 사정을 알아차린 듯 머리를 끄덕거리더니 그길로 달려가서 다음날 아침에 한 여인을 데리고 왔다. 그 앞에 나타난 여인은 참으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 여인은 그를 보고 놀라지도 않고 싫다는 표정도 없이 동거하는 것을 좋아하는 듯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모두 주었으며 아내는 그 많은 곡식을 백제의 온조왕에게 헌납을 했다.
산성에 도읍을 정하고 군사를 이끌고 나라를 지켜가던 온조는 그로부터 많은 곡식을 헌납받고는 크게 나라의 세력을 늘릴 수 있어 그에게 벼슬까지 주었다.
그러나 그는 새로 아내를 맞이하여 아내를 쳐다보는 것으로 만족했던 그가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과 온조가 보낸 군사들이 성대하게 장사를 지내 주었다. 그가 묻힐 때부터 비가 오기 시작했다. 비는 점점 세차게 내리고 천둥과 비가 요란하더니 하늘이 쪼개지는 듯하고 땅이 갈라지는 듯하며 마치 천지개벽을 하는 듯하였다.
이틀 동안을 그렇게 큰 비가 오고 무서운 천둥이 치더니 사흘 만에 날이 들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는 동안 꼼짝도 못하던 사람들이 비가 개이자 그를 파묻었던 묘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묘가 있어야 할 그 자리에 묘는 간 데 없고 큰 바위가 섰고 바위 모양이 죽은 그를 닮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죽어서 바위가 되었다고 말하였고 그의 아내는 그 위에 매년 제사를 지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하나 그가 죽은 뒤에는 매년 여기만 비가 오지 않고 흉년이 계속 되었다. 땅이 기름져서 부자 부락으로 통했던 이 부락이 이제는 오랫동안 가난에 허덕이는 마을이 되었다.
그렇던 세월이 흘러 고려 때에 도사 한 분이 이 마을에 들러 말하기를 “흉년이 드는 까닭이 저 바위가 한 해에 4천석의 곡식을 먹어치우니 가난할 수밖에”하였다. 그리고 나선 바위 아래에 못을 파서 바위가 마을을 쳐다보지 못하고 연못에 그 모습이 비치면 다시 부자 마을이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못을 파기 시작하였다. 못을 넓고 깊게 파서 바위의 모습이 연못에 비추게 하였다. 그 해부터 이 마을에도 풍년이 들기 시작하였다. 바위가 못생겨서 부엉바위라고 불렀고, 못생긴 바위가 남산에 있다 해서 ‘남산바위’라고 부르는데 이 바위 아래에 팠던 연못은 바위가 거꾸로 보이게 하는 연못이라고 하여 도영지(倒影池)라고 한다. (천안실록)
<전설 5> 유왕(留王)골과 온조왕(溫祚王)
목천면 덕전리에서 북쪽으로 좀 더 오르면 유왕골이라는 마을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백제의 시조 온조가 남쪽으로 옮겨와 위례성에 도읍을 하였을 때 봄과 여름이 되면 이 마을에 머물면서 농사를 장려하고 백성들을 안위하였다 하여 유왕골이라고 부른다. (韓國地名總覽)
<전설 6> 세성산(細城山)과 온조
천안군 성남면 화성리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약 200m의 낮은 산이다. 산 위에 성터가 있고 성채는 흩어져 있고 동학혁명때 수백 명의 교도들이 이곳에서 죽어 일명 시성산(屍城山)아라고도 한다. 삼한시대에 사람이 살았다는 농성(農城)이 있는 곳이며 산의 동쪽에는 방어책으로 된 바위가 두 개 있는데 이 성에 옛날에 사람이 살 때에는 쌀을 찧던 곳이라고 한다.
백제의 시조 온조가 위례성에 도읍하였을 때 처음 한참 동안은 마한에 속해 있다가 온조가 농경에 세심한 관심을 두면서 새롭게 나라가 형성되어 가는 것을 보고 백제를 따라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백제를 따르게 된 마한의 성이다.
※ AD 396년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공략해서 58개의 성을 공취한 기록이 광개토왕비문에 나타나는 바 그 58개의 성 중에 세성이 들어 있어서 이 지방에 대한 연구가 앞으로 더욱 필요하며 그것이 밝혀지므로 해서 광개토왕비문 연구가 가일층 선명하게 될 것으로 본다.
7. 위례성 주변의 지명
지명은 옛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에서 말해진 언어의 옛 자취를 가장 잘 간직하고 있다고 보며 문자가 정착하기 이전의 사실을 가장 잘 보존하고 옛말 그대로를 대변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현재 천안시 입장면 호당리에 남아있는 위례산성을 중심으로 그 주변의 지명을 조사하여 백제의 첫 서울 하남 위례성이 우리 고장임을 주장하는 뒷받침으로 할까 한다.
□ 입장면(笠場面)
▷ 도하리(都下里)
글자 그대로 도읍 밑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도아리, 돼리, 도야리, 도감말 등으로 불리우고 있으며 본래는 직산현의 이북면(二北面)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지형이 물동이 밑에 바치는 또아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삼동면의 하리(下里)를 합쳐서 도하리라고 하였다. 이곳을 중심으로 인근에는 도(都), 궁(宮), 성(城)자가 붙은 마을이 많은 것은 옛날 부족사회 때 진(辰)국의 수도가 있었던 곳, 즉 사학계에서 말하는 목지국(目支國)의 자리로 관련지어 발표하였으나 다시 한 번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본다. 위례성이 있었던 곳으로 그 성 밑의 마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 구시랑동(九侍郞洞 : 구시랭이)
백제 때 아홉 사람이 살았다고 해서 구시랑동이다. 백제 때에는 구실향(救實鄕)이라고 하였고 향가에도 소개된다고 전한다.
백제는 처음 건국할 때에 아홉 사람의 신하들로부터 보필을 받아 온조가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고 칭한 것도 여기에 기인하는 것이다. 건국공신이 된 아홉 사람의 신하들이 함께 모여 살았다고 해서 구시랭이다. 이로 보아 위례성 내에 있었던 한 개의 마을로 백제 첫 도읍지와 관계를 지어 봄직하다.
▷ 도장골(道場里 : 도장리)
시장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며 위례산성 바로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백제가 건국되는 초기에 여기에서 많은 군사들이 훈련을 하였다는 도장이 있다고 하여 도장골이 되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의 기록에도 온조가 만주의 고구려에서 남하할 때의 기록에 보면 많은 백성이 그를 따랐다고 하였고 군대를 이끌고 온 것으로 되었으니 이곳이 바로 그들이 머물렀던 곳으로 본다.
▷적정(赤井 : 불그물이)
입장면 용정리에 있는 마을로 마을 복판에 큰 우물이 있어 이 우물 이름이 붉은 우물(불그물)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옛날에는 이 우물의 둘레를 구리로 만들어 붉게 보였기 때문에 붉은 우물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백제가 이곳에 처음 나라를 세울 때 물맛이 좋아 나라의 임금이 사용하였기 때문에 구리로 우물의 테를 둘러 보존하고 일반 서민들은 먹지도 못하였으며 임금(온조왕)만이 먹었다고 한다.
▷국수골
입장면 양대리에 있는 골짜기로 국사봉 등으로 불리어지고 있으며 국수(國首)는 나라의 우두머리 즉 임금을 가리키는 말로 백제의 시조 온조가 이곳에서 머물렀고 위례성을 세운데서 그 까닭이 왔다고 한다.
▷ 배삼딩이(배삼고지)
입장면 유리다. 옛날에는 배를 매던 곳 또는 배를 만들던 곳으로 오늘날의 말로 조선소다. 바로 그 조선소가 있었던 곳이다. 조선 말기 때까지도 아산만의 조수가 안성천까지 밀려들어왔다 하니 이곳에 배를 매던 곳이라는 말은 그렇게 틀린 말이 아니다. 배삼고지의 고지는 조(祚)와 같은 뜻으로 포(浦)나 진(津)과 같은 것으로 본다.
□ 북면(北面)
▷ 도촌 소학동(道村 巢鶴洞)
성거산 뒤편(북면쪽)에 있는 마을. 성거산에서는 가장 산 속 깊이 있는 마을로 흔히들 하늘 아래 첫 동리라고 하며 소학동(학이 둥치를 트는 곳)이라고 부른다. 도촌(都村)이 변해서 도촌(道村)이 된 것 같다. 도(都)는 도읍지를 말하는 것으로 백제의 서울이 있었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 삼국이 서로 항쟁을 계속할 때 도살성(道薩城)이 바로 이곳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곡간리(曲干里)
백제 건국 당시에 군량미를 쌓아 두었던 곳이라고 전한다. 창고를 옛날에는 곡간이라고 불렀다. 대평리에 있는 마을로 지금도 양곡을 감추어 두기에는 가장 적당한 곳으로 천안시에서는 가장 깊은 산골인 오지다.
▷양곡리(陽谷里)
벼장골 또는 벼당골로 부르고 있으며 양곡(陽谷)을 양곡(糧穀)으로 바꾸어 쓰면 바로 알 수 있듯이 군량미와 관계를 지어보면 된다. 북쪽으로는 입장으로 동쪽으로는 충북 진천으로 통하는 산간의 교통요지다. 산간계곡으로 비교적 넓은 들이 펼쳐져서 농사 등이 활발한 곳이다.
▷대치동(袋治洞 : 댓골)
대평리 앞 길가에 있는 마을로 큰 대장간이 있었다고 한다. 백제 때에 많은 무기를 제조하던 곳이라고 한다. 이 근방 목천 땅에 철이 생산되었음을 관계 지어 봄직하다.
▷사창(社倉 : 사창골)
명덕리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사창이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사창이란 국가의 곡식을 보관하기 위해서 설치한 창고가 있는 마을을 말하는 것으로 백제 건국 초기에 설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문다라니 고개
한자로 쓰면 문현현(門懸峴)이다. 문다라니 앞에 있는 고개로 목천읍지(木川邑誌)인 대록지(大麓誌)에는 진장자(陣長者) 남매가 이곳에 살면서 이 고개에 문을 달고 행인들이 여닫고 다니게 하였다고 한다.
▷부소문령(扶蘇門嶺 : 부소무니 고개)
북면 운용리에서 입장면 양대리로 넘어가는 높은 고개. 백제 건국 때 온조왕이 위례성에 도읍하였을 때 이곳에 문을 세웠다 하며 현재는 서낭당이 있다.
부소(扶蘇)라는 고어가 무엇을 뜻하는 지는 상세치는 않아도 부(扶)는 부여를 뜻하는 것이며 소(蘇)는 산을 뜻하는 것으로 부여의 산이란 뜻으로 본다.
□ 성거읍(聖居邑)
▷사산(蛇山)
성거읍사무소의 사거리에서 천흥부락쪽으로 약 1km 지점에 있다. 성거산의 줄기가 뻗어 뱀산머리를 만들고 직산 쪽을 바라보고 있다. 위례성을 뒷날 사산성이라고 부르게 된 근거가 여기에 있는 것으로 본다. 이 뱀산은 위례산성의 바로 아래에 있는 산으로 백제의 첫 서울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본다.
▷남창(南倉)
읍사무소가 있는 곳으로 남쪽으로 약 1km 지점에 있다. 위례성이 설치된 남쪽으로 부족국가 때부터 있었던 마을로 백제 초기에는 많은 곡식을 쌓아 두었던 창고가 있는 마을이라 남창이라고 하였다.
동서남북에 각기 한 개씩의 창고가 있어서 곡식을 보관하였다. 이중 남창만 있고 동서북창은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저리(苧里 : 모시울)
행정구역 명칭으로 천안군 성거읍 저리다. 이곳의 토속지명은 모시울로 불리고 있으나 모시는 일반적으로 옷감에 쓰이는 우리나라 한산지방의 특산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동리의 명칭으로 사용된 모시는 저(苧)가 아니다. 모신다, 뫼신다, 뫼시는 울로 쓰여진 것이 최근에 저로 변자된 것으로 본다.
더욱 그럴만한 사실은 이 지방에는 산이 없다. 다만 낮은 구릉이 있을 뿐인데 저리의 마을 뒤에 약 50mWma 되는 둔삼각형의 산이 있어 옛날 백제가 건국되던 때나 부족사회 때에 있었던 천군(天君)의 치소(治所)였던 소도(蘇塗)의 터가 아닌가 한다.
▷천흥사지(天興寺址)
고려 초기에 세워진 사찰이다. 소실된 연대는 정확치 않으나 조선 초기의 일로 전해지고 있다. 소실된 원인은 알 수 없어도 대단히 큰 거찰로 그 터와 유물이 남아 있다. 남아 있는 유물은 불에 타지 않는 것으로 보물 354호의 오층석탑과 99호의 당간지주가 남아있을 뿐이다. 당간지주는 매우 훌륭한 작품으로 당초문이 양각된 거대한 석물이며 충렬왕 때의 고승 일연국사의 시주품으로 전해지고 있다.
▷송남리(松南里 : 소댕리)
성거읍 송남리를 부르는 별칭으로 소댕리라고 한다. 이것은 소댕리가 아니고 쇠당리의 변음으로 소댕리가 되었다. 이 마을에는 쇠로 만든 당간지주가 섰거나 아니면 쇠로 만든 솟대가 있으므로 이루어진 동명이다.
□ 성환읍(成歡邑)
▷안궁리(安宮里)
성환에서 가장 북쪽인 경기도와의 경계에 위치한 마을이다. 넓은 들 옆으로 안성천이 흐르고 한 개의 도읍이 들어설 만한 자리다.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부족사회, 즉 진(辰)의 도읍지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부터 100년 전만 하더라도 인가가 없는 황무지였다고 한다.
안성천의 제방이 만들어진 것이 40여년 되었고, 그 이전에는 비만 오면 범람하는 지역으로 도시의 성립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물론 이천년 이전에는 안성천의 하상이 낮아서 변화가 있었겠지만 아산만의 조수가 이곳까지 역류되어 들어오니 농지로 사용은 불가했을 것으로 보며 다만 조수를 타고 들어오는 배로 문물의 교환은 있었을 것으로 본다.
▷학정리(鶴井里). 대정리(大井里). 독정리(獨井里). 용정리(龍井里)
직산 북부지역에는 정(井)자가 붙어 있는 마을이 많다. 학정리, 대정리, 용정리 등은 신라의 군사단위였던 정(停)의 변음이라고 생각된다.
▷거먹다리
성환읍 안궁리에서 평택 유천리로 넘어가는 안성천에 놓여있는 다리 부교와 같이 일년에 한번씩 다시 놓아야 된다고 한다. 여름 장마에 쓸려 내려가면 늦은 가을에 다시 놓고 다음해 여름에 장마가 없으면 2년는 쓸 수 있었다고 한다.
거먹다리의 뜻은 나무의 밑둥 즉 기둥의 아래쪽 땅속으로 들어가는 부분을 불에 그슬려 썩지 않게 하였기 때문에 다리의 색깔이 검게 보였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나 지금은 그 다리가 놓아졌던 지방의 마을 이름이 되었다. (고대사회의 다리 놓기와 관계 지어 봄직하다.)
□ 호당리 동제(虎堂里 洞祭)
위례산성 아래에 있는 호당리에서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는 동제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아무도 그 시초를 모른다고 한다.)
동제는 정월에 지내지고 있으며 초하루에서 보름 안에 지내지고 있으며 제일(祭日)은 동리의 축제일이다. 행사도 다채롭고 매우 엄숙하다. 부정한 일을 본 사람이나 당한 사람은 제사에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동리에 부정(不淨)한 일이 생기면 날을 따로 가리고 제주는 삼일 전부터 목욕재계하고 근신하며 그 날을 맞는다.
제수(祭需)도 대단히 풍성하여 통돼지를 쓰고 제순에 따라서 축관(祝官)이 축문을 읽는데 축문의 내용이 백제건국과 시조 온조왕과의 관계 등 더구나 이 지역이 건국하였던 위례성의 옛터임을 알려주는 내용들로 쓰여져 있다. 본시 제문(祭文)이나 제순(祭順)은 한자로 기록된 것이 있었으나 없어지고 한문을 모르는 세대들의 제사라 한자를 한글로 대신 써서 읽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제문 내용을 아래에 적고 이것을 다시 한자로 고쳐 써 본다.
유세차○○ ○월 ○○삭 ○일 ○○유학 ○○○감소고우 산지령왈
온조구국 용천수석 복축우자 세치풍양 예성유허 호계촌려
노소감안 사무간난 소제질위 백상감화 유신소우 제상보세
구수재해 일촌형태 기다차대 근구비의 신기래격 길일양진
상 향
維歲次○○ ○月 ○○朔 ○日 ○○幼學 ○○○敢昭告于
溫祚舊國 龍泉水石 卜築于玆 歲値豐糧 禮城遺墟 虎溪村閭
老小減安 事無艱難 消除疾危 百祥感華 維神所祐 齊詳報歲
駒遂灾害 一村亨泰 旣多且大 僅具非儀 神其來格 吉日良辰
尙 嚮
앞의 축문 속에 보이는 온조구국 예성유허(溫祚舊國 禮城遺墟 : 온조가 세운 옛나라 위례성 옛터)는 이 지방이 백제건국과 첫 도읍지 위례성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8. 역사의 복원
BC 37년 북부여를 탈출한 주몽(朱夢)이 졸본지역에 이르러 고구려를 건국하고 졸본지역의 족장(族長)인 연타발(延陁勃)의 딸 소서노(召西奴)를 비(妃)로 삼아 두 아들을 두었다. 그 큰 아들이 비류(沸流)이고 둘째가 온조(溫祚)다.
졸본지역에 살던 족장 연타발은 재산을 많이 가진 부호(富豪)로 그가 죽은 뒤에 딸 소서노는 많은 재산을 기울여 주몽의 고구려 건국과 국세 확장에 힘썼다.
그러나 북부여를 탈출하기 이전에 어머니 유화부인(柳花夫人)을 모시고 있으면서 부인 예씨(禮氏. 松妃)를 맞았다. 그 후 예씨부인은 아들(유리)을 낳고 남편인 주몽이 부탁대로 북부여 땅을 탈출하여 모자가 졸본지역의 아버지를 찾아온다.
그러나 아버지인 주몽은 이미 재혼하여 소서노와의 사이에 두 아들이 있었으나 첫 부인 예씨는 더 우대하고 송비(松妃)로 하는가 하면 그가 낳은 아들 유리를 태자로 책봉하였다. 이에 불만스러운 졸본가족 즉 소서노와 두 아들은 고구려를 떠나 망명행각인 남유(南遊)의 길을 떠나 남쪽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내려와 대방고지(帶方故地)에서 백제를 건국한다.
여기까지를 잠시 분석해 보면,
지금까지 복원하려는 역사는 삼국사기 백제건국편의 온조왕조에 이설(異說)을 중심으로 하겠음
주몽의 생애는 BC58년에서 BC19년까지 이므로 40세를 살았다고 보면 그가 졸본지역에서 고구려를 건국할 때의 나이는 21세가 되던 해다. 그러므로 북부여 땅에 어머니와 아내를 두고 탈출했을 때의 나이도 그와 같은 21살 때로 보아야겠다. 망명하던 그 해에 졸본지역에 와서 고구려를 건국하고 소서노를 비로 맞아 아들을 두었다 하더라도 그 후 주몽의 통치가 19년간 이었으므로 온조의 나이가 18~19세였다. 그렇다면 비류는 더 많은 나이였을 것으로 보아 이는 주몽이 낳은 생자(生子)로 볼 수 없어 삼국사기 서문에 소서노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본다.
소서노는 처음 우태(優台)라는 사람에게 출가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고 우태가 죽어 과부가 되어 친정에 돌아와 있다가 주몽을 만나게 되었다. 그 후 주몽은 북부여에서 온 초취(初娶)인 송비(松妃)와 아들 유리를 더욱 중히 여겨 각각 비(妃)와 태자(太子)로 하니 이에 불만스러웠던 소서노의 가족은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대방땅에서 처음으로 백제를 건국하였다.
대방고지에서 백제를 건국한 그들은 낙랑과 말갈의 공격에 견딜 수 없고 국가의 보위가 어려워 더욱 남쪽으로 내려온다. 그들은 대방고지를 떠나 예성강과 임진강을 건너고 여기서 해로(海路)로 경기만을 거쳐 아산만의 밀두리에 이른다. 그들은 조수를 타고 안성천을 거슬러 올라 배를 대고 이곳에서부터 내를 타고 도보로 아홉 명의 신하와 더불어 용인 부아산(負兒山)에 오른다.
부아산에 오른 이들은 주변의 지형과 지세를 살펴보고 그곳에서 얼마 덜어지지 않은 직산지방을 도읍지로 적당하다고 정한다. 이곳이 바로 오늘날의 성환, 입장, 성거, 직산과 안성의 외곽과 평택의 남부지역이다. 그들이 이 지역에 자리 잡은 것이 바로 위례성이다. 중심지역인 직산은 넓은 평야가 펼쳐 있고 안성천이 대하가 흘러 낮은 구릉조차 없다. 인간 활동에는 편리해도 전쟁과 내란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할 자연의 방패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읍성(邑城)인 위례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북면 위례산에 산성을 쌓고 국가와 백성을 보위하게 된다. 이 산성이 바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위례산성이다.
그 후 온조는 십신(十臣)의 보필을 받으면서 위례성에서 시정(施政)을 하다가 BC 6년에 뜻하지 않은 전란을 맞아 산성으로 백성들을 옮겨 항전하고 어머니 소서노를 잃고 많은 전사자를 내면서 전란이 멎자 BC 5년 정월에 한산(漢山)지방으로 서울을 천도한다.
이상이 직산 위례성의 역사를 간추려 본 내용이다.
□ 백제의 천도 과정
▷직산 위례성(BC18~BC5 : 온조왕). 직산지방(13년간)
▷한산(BC5~AD371 : 온조왕~근초고왕). 광주지방(376년간)
▷북한산(AD371~AD475 : 근초고왕~개로왕). 서울지방(104년간)
▷웅진(AD475~AD538 : 문무왕~성왕). 공주지방(65년간)
▷사비성(AD538~AD661 : 성왕~의자왕). 부여지방(123년간)
9. 결 론
이상에서 밝힌 바와 같이 백제의 첫 서울은 우리 고장 북부의 직산, 입장, 성환, 성거지방으로 보며 더 확대하여 안성의 남단과 평택의 남쪽까지로 본다. 아직은 위례성의 옛터에서 건국 당시의 유물이 나오지 않았으나 이것은 이곳에 대한 집중적인 발굴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당연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현재 노출되어 있는 유적이나 유물로도 밝혀낼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앞으로의 연구는 발굴과 자료채집에 전력을 다하여야겠다.
문헌에 다시 몇 군데를 찾아보면 동국여지승람 광책목(廣冊牧)의 건치연혁(建治沿革)에 시조(始祖) 온조왕(溫祚王) 십삼년 자 위례성 이도지(十三年 自慰禮城 移都之)라고 했다. 다시 풀이하면 온조왕 13년에 위례성으로부터 이곳으로 서울을 옮겼다는 뜻이다. 그 위례성 즉 광주로 옮기기 전의 위례성 그곳이 바로 우리 고장이다.
일인(日人)학자인 금서(今西 : 이니마시)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초기에서 계왕(契王 BC18 ~ AD346)까지는 전혀 믿을 수 없는 글이라고 하였다. 이때의 기록은 모두 꾸미고 가꾸어진 것이며 억지로 역사의 체제를 기록한 듯 하다고 하였다. 그 까닭은 AD 346~375의 근초고왕 때 와서야 백제의 이름이 일본서기에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실로 어처구니 없는 말이다. 일본의 역사기록에 없다고 그 역사를 부정한다면 한국사는 일본의 주변(周邊)국사(國史)란 말인가.
또 문헌은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이 우리나라의 기록을 믿으려 하지 않고 고고학적(考古學的)인 입장만 내세워 고기(古記)를 믿지 않고 신화화하고 전설화하는 것도 금서(이니마시)의 주장과 다를게 없다고 본다.
물론 삼국사기라고 전폭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만 터무니없이 배타적으로만 나가면 우리나라 초기역사는 어디로 가란 말인가. 믿을 수 있는 부분은 듬뿍 믿어주고 믿을 수 없는 부분은 더욱 연구하여 받아들여 보았으면 한다.
이제 간단한 지표조사도 끝났다. 여기에서 많은 소득도 얻었다. 승석문토기나 초기 철기시대의 쇠낫이나 쇠창도 얻었다. 이제까지 문헌에만 의지하던 위례성 연구가 고고학의 뒷받침을 받았다. 다시 말해서 문헌과 유물이 일치한 셈이다.
이웃 중국에서는 삼황오제(三皇五帝)를 실사(實史) 속에 편입하고 요순(堯舜)의 고사(古事)를 역사 속에 삽입하고 있다. 우리도 믿는 쪽으로 기울여보자.
삼국유사에 밝힌 바와 같이 위례금직산(慰禮今稷山)이다. 고로 백제의 첫 서울은 우리 고장이다.
후 기
우리는 오늘 이 시점에서 지나간 과거를 돌이켜 살펴보고 먼 훗날을 바라보는 역사의식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또 향토사 연구에 디딤돌이 될까 하여 여기 위례성에 대한 글을 썼다.
학술적인 논문도 아니고 탐구보고서도 아니며 다만 향토역사에 관심을 가졌을 뿐이고 동학(同學)을 위하여 눈에 뜨인 그대로 귀에 들린 그대로 모아 썼을 뿐이다.
인용된 책자
삼국사기(1145.김부식), 삼국유사(일연), 동국여지승람(1432), 문헌비고(1770.홍봉한), 역사지리(1961.우락기), 아방강역고(정약용), 위례고(1974.이병도), 직산현지, 목천현지(안정복), 삼국시대 개시에 대한 일고할(김원룡), 백제구도직산산고(1974.김재붕), 한국사(1965), 국사대사전(1962.이홍직), 천안군지(1984), 비류백제와 일본고대국가 건국(김성호), 광개토왕비문, 진단학보(1934)
'慰禮城 地名由來'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용인,양지현.... (0) | 2009.02.04 |
---|---|
용인 마수성, 독산책 (0) | 2009.02.04 |
위례성...마고 (0) | 2009.02.04 |
입장면---지명유래 (0) | 2009.01.12 |
북면 운용리...위례성 지명유래 (0) | 2009.0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