慰禮城 地名由來

용인 마수성, 독산책

吾心竹--오심죽-- 2009. 2. 4. 19:57

백제시대 용인 용인의 유래와 지명

2007/08/14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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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期  百濟와  龍仁


  1. 고대국가의 변천과 용인


  용인은 백제 온조(溫祚)의 위래성(慰禮城) 도읍설을 새로이 규명하거나 수정해야 할지 모르는 고대, 초기백제의 건국을 뒷받침한 고읍일 가능서이 매우 높다.

  온조의 위례성 도읍설을 놓고 다산 정약용 선생은 그 위치를 지금의 직산설(稷山說), 또는 광주설(廣州說)과 한강 부근 설 등으로 비정(比定) 한 바 있는데, 대개의 학자들은 이 중에서 한강 부근설을 대체로 인정 하면서도 하남 위례성을 광주 고읍으로 비정하고 동시 하북 위례성 도읍설을 수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온조의 건국 설화를 토대로 한다면, 온조가 패수와 대수의 두 강을 건너, 미지를 개척하여 입국의 터전을 마련하는데, 바로 그 입국의 디딤돌 구실을 한곳이 용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견해인 것이다.

  온조가 형 비류와 함께 남래(南來)하여 비류는 미추홀(인천)에 건국하였고, 아우 온조는 위례에서 즉위하는데, 이 당시, 즉 삼한시대 말기, 용인 주변 지역의 형세를 살펴보면, 동쪽으로 이천에는 자리모로국(咨離牟盧國)이 있었고, 서쪽으로 수원에는 모수국(牟水國)이, 남쪽에는 양성(陽城)으로 신분활국(新憤活國)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중에서 백제국(伯濟國)은 광주와 용인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 수부지역이 한강 근처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 되어 온 것이 종래의 학설 이였으나, 백제국의 수부지역은 한강 근처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의 용인 즉, 구성읍 동백리, 중리일대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한강 이북지역은 강력한 고구려, 말갈, 대방등이 자리 잡고 있었으므로, 그 예각을 벗어 난 이곳이 가장 안전지대이며, 지리적 여건을 감안해 볼 때, 전략상 비중이 가장 큰 지역을 택하여 수부지역을 삼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동백(東栢), 백현(白峴)등과 같이 栢. 白 등의 지명이 전존하고 있는 것과 , 그 언저리에 지석묘가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 등으로서, 고대 사회로부터 이곳에 강력한 부족이 웅거하여 왔음을 뒷받침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진한, 마한 시대의 54개 부족국가 중 광주 지역이 포함된 용인의 백제국(伯濟國)은 가장 강력한 부족국가로써의 위치를 점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인바, 이 지역은 군사 지리적 측면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몽의 곁을 떠난 “온조는 오간(烏干), 마여(馬黎) 두 신하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떠나 패. 대 양수를 건너 한천에 이르렀다”고 한 ‘삼국사기’의 기사 중에 “살만한 곳을 살펴보기 위하여 부아악(負兒嶽)에 올랐다” 고 한 부아악은 오늘날의 삼가동, 이동면 서리와 지곡동을 접하고 있는 용인의 진산 ‘부아산’ (종래의 학설로서는 삼각산에 비정하였음) 이라는 가정이다.<김성호. 비류백제와 일본서기>

  이곳에 올라가 사방을 살펴보고 미추로 떠나려는 비류에게 십신(十臣)이 간했다는 기사를 풀이해보면, 기막히게 지금의 이곳 지리적 여건과 딱 들어맞는다.

즉, “하남의 땅은 북으로 한수(한강)를 끼고, 동으로 고악(高岳)에 의거하고, 남으로 옥택(沃澤: 平澤?)을 바라보고, 서쪽으로 대해(서해)에 닿았으니, 이 천험의 지리는 다시 얻기 어려운 형세이므로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비류는 “이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나아갔다<삼국사기>라고 하였는데, 이 부아산에서 바라보면, ‘서해바다가 보인다’고 하는 소리는 이곳 사람들이 늘 하는 소리이고, 북쪽으로 직선거리 5~6십리 떨어진 곳에 한강이 가로 놓이고, 고악에 의거 하였다는 동쪽은 안성 경계의 구봉산으로부터, 북쪽으로 산맥 협대를 이루면서 문수산, 태화산, 말악산 등 광주에 이르기까지 고봉준령으로 둘려처져 있다.

  또, 남쪽으로는 용인에서 안성 경계에 이르기까지 진위천을 끼고 펼쳐진 평야지대는 오산, 평택으로 연이어 나갔음을 조망할 수 있는 산이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기사 내용과 현장성이 일치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기술되어 있다시피 용인은 계거(溪居) 지역으로서, 기호지방에 있어서는 으뜸이며, 청미천과 어비천 일대의 땅은 기름지기가 삼남과 같아서, 난세에나 평시에나 다같이 살기에 알맞은 곳이라고 하였던 사실등도 이곳의 천험적인 지리의 여건을 거증하는 자료가 된다.

  그런데, 온조가 초기 도읍지로 정한 곳이 어디인가 하는 점을 뒷받침하듯 묘하게도 부아산 아래, 즉 지금의 삼가동 일대에 ‘궁촌(宮村), 또는 궁말(궁 마을)이라고 불리우는 지명이 잔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한 것으로 지나쳐 버릴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이곳을 온조 초기도읍설에 대입한다면, 기타 용인지방에 산재된 토성에 관한 연원적인 문제의 실마리가 풀린다.

  즉,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난 온조는 B. C 11년, “그 북쪽에 마수성(馬首城)을 축조하고 병산책(甁山柵)을 세웠다”고 하였는데, 학계에서는 아직 그 위치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나, 온조가 축성했다는 ‘마수성’은 오늘날 용인의 마성, 또는 할미성인 것으로 보인다.

  이는 삼가동 궁촌마을의 정 북쪽에 위치함으로서, 백제본기 온조왕조의 기사 내용과 일치하며, 이 성을 ‘마수성’이라고 한 것은 성의 형태가 꼭 말머리(馬首)의 모양과 같다고 하여 생긴 이름인 것이다.

  필자의 졸저 ‘내고장 용인’ 유물 유적을 집필할 때, 현지답사에서는 물론 5000분지 1 지도에 표시된 성의 형태에서도 이의 모양이 말머리와 같이 축조되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이 성은 B. C 11년 온조에 의하여 축조된 것이며, 포곡면 영문리의 마성(麻城)이나 구성읍의 마북(麻北)이란 지명도 본래 마수성, 또는 마성에서 유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성이 속칭 할미성으로 불리우고 있는 것은 마수성이, 마성으로, 또는 마고선인(麻姑仙人)이 쌓았다고 하여 마고성(麻姑城)으로 불리워지다가, 이것이 의역되어 ‘할미성’이 된 것이다.

  고구려가 이 지역을 강점하고 이를 구성(駒城)으로 하였던 것도 마(麻)를 마(馬)로 보았고 이를 다시 ‘크다’는 의미의 말, 마라, 말아지(駒)로 표기한 것임이 틀림없을 것으로 본다.

  또한 이해에 “병산책을 세웠다” 고한 것은 단순하게 병(甁) 모양의 산책(山柵)을 세운 것으로 해석할 수만은 없다.

  즉. 용인의 궁촌(삼가동)에 자리 잡은 온조는 이곳을 중심으로 하여, 남사, 평택으로 이어지는 곡창지대에 접한 남쪽 관문에 토성(처인성)을 쌓았고, 동쪽 곡창지대에 인접한 관문에 행군이 토성(1984년 6월. 필자와 정양화 발견)을 쌓았고, 동북쪽 관문인 양지면 대대리 무장곡(武將谷)에 토축을 구축함으로서, 수부지역인 궁촌을 보위하기 위한 위수 방어기지를 구축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 후, B.C 8년 독산책(禿山柵: 용인의 서남쪽, 지금의 독산산성?)과 구천책(狗川柵: 용인의 서북쪽?)을 구축하여 주변 국가와의 분쟁에 대비하였던 것이다.

  필자의 졸저 ‘내고장 용인, 유물 유적편’에 기술된 처인성이 백제 때의 토성이라는 설이 있다고 인용한 것은 1979년, 이 성을 복원할 때, 사학자 이선근 박사 일행이 현지를 답사한 후 몽촌토성에 비유하면서 백제 때의 토성임을 시사했던 점으로 확인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특히 1984년 필자 일행이 발견한 행군이 토성에서는 처인성 복원 이전의 형태와 많은 유사성을 나타내 보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어 필자는 이를 “처인성과 견주어 증언할 수 있는 유일한 용인사람일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고 졸저인 ‘유물 유적 편’에 기술한바 있다.

  또한 대대리의 무장골 토축은 양평, 경안, 이천 방면에서 침입할 구 있는 말갈 등 부족국과의 분쟁에 대비한 방위선으로 볼 수 있겠으며, 이러한 일련의 토축, 토성 등은 용인의 궁촌을 중심으로 하여 그 외각지대에 설치되어 있음으로서 토성이 축조된 성격과 효용성 등이 확연하게 규명될 수 있는 것이다.

  필자의 연구 결과로써, 궁촌을 중심으로 사방에 축조된 토성, 토축은 모두 백제 때의 것이며, 이를 초기 백제의 고읍에 대입하지 않고는 달리 그 성격과 존재 이유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오늘 날 유존하는 이곳 주변의 정황들이 초기 백제 건국의 터전으로 삼았을 기능성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으며, 또 문헌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는 점 등으로서 이것이 우연만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 다산 정약용선생의 제 3설인 “한강 부근설”이 강력하게 뒷받침 되는  이다.

  또한 백제의 고읍으로서 일련의 족적이랄 수 있는 연질의 삼족토기가 부아산 아래 근처의 전답에서 출토 되었고, 또 초기 삼한시대 말의 것으로 판명되어 간접적으로 백제의 고읍 설에 보충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그 후 B. C 6년 “왕의 어머니가 죽고 말갈 등의 외침과 괴변 등으로 천도할 것을 결심한 온조는 한산 밑으로 나아가 성책을 세우고 마한에 천도의 사실을 알리는 한편, 북은 패하(浿河)에 이르고, 남은 웅천(안성천)에 이르며, 서쪽은 대해(서해)에 닿았고, 동은 주양(춘천)에 이르렀으며, 이듬해 한성으로 옮겨 갔다”고 하였다.

  이상의 기사에서 한산 밑, 한성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볼 때, 용인의 궁촌에서 출발된 것이라야 자연스러워 진다.

  그러나 백제가 고대 식 국가 체제를 갖춘 시기를 제8대 고이왕시대로 보고 있는바, 온조 조의 이 기사는 고이왕 시대의 사실이 온조시대로 소급된 것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견해이나, 백제의 강역이 획정되기 이전까지 최소한, 용인 지역을 도약대로 하여 성장했을 것이며 이러한 토대는 온조가 궁촌에 도읍한 이후 기존의 백제국(伯濟國)에 영향력을 부식하여 그 수장이 된 다음, 때마침 위나라의 영향을 받고 있던 낙랑과 대방이 한강유역을 공략해오자, 이에 중압을 느껴오던 한강 유역의 여러 부족국가들이 이의 대응체제를 갖출 필요성이 긴박해짐에 따라 군사 지리적으로 비중이 가장 큰 위치에 있던 백제국(伯濟國)이동맹국의 맹주 역할을 맡으면서 추종 부족국가를 통합한 후, 온조 당시의 지명이던 백제(伯濟)를 국명으로 하였다가 한성으로 천도하면서 백제(百濟)로 성장한 것은 아닌가?

  어째든, ‘백제’는 초기 부족국가 시대의 지명 이였을 것이라는 점은 공통적인 견해인바, 온조 남래(南來) 이전의 백제(伯濟)는 광주를 포함한 용인이며, 구성면 동배지구가 그 중심지역이였고, 온조가 자리 잡은 최초의 도읍지는 부아산 아래의 궁촌 이였으며, 용인 일원에 산재한 석성, 토성, 토축 등은 대개 이시기를 전후해서 축성 되었을 것 이라는게 필자의 견해이다.

  따라서 용인의 적어도 B. C 18년부터 B. C 6년까지 최소 12년여, 또는 고대식 국가체제를 완성한 고이왕 시대까지, 용인은 백제의 고읍이였을 가능성이 있음을 배제할 수 없을 것 같다.

  이것은 필자의 황당무개한 괴변이라 해도 좋겠지만, 우연치 않은 이지역의 정황들이 그럴 수 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는 점 들이다.



  2. 용인 지명과 행정구역의 변천


  위나라 영향을 받고 있던 낙랑과 대방이 한강 유역을 경략하자 한강 유역의 여러 부족국가들은 이에 대비할 필요성을 느끼고 되었으나, 이들 국가의 맹주 역할을 하고 있던 목지국(目支國)의 지배력이 약화되어 있었으므로, 일선에 위치하고 있던 부족국가들 중에서 백제국(伯制國)이 목지국을 대신하여 그 중심적 역할을 대신하게 된다.

때마침 남래한 온조는 부아산 아래 궁촌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국(伯濟國) 인 광주, 용인 지역을 장악, 즉위하면서 진한의 여러 부족국가를 평정하면서 백제(百濟)를 건국하여 고구려에 이어 두 번째로 삼국의 기원을 이룩한다.

  그 후 백제는 제 8대 고이왕(古爾王)에 이르기까지 3백여 년 동안 고대식 국가체제를 갖추어 나가는 과도기를 거치면서 주변 국가인 말갈, 낙랑, 고구려, 그리고 후발 국가인 신라 등과 끊임없는 분쟁과 쟁탈전을 치루느라 극히 완만한 국가 성장 추세를 유지하게 된다.

  그러나 백제는 고이왕 이후에도 고구려와 분쟁을 계속하여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중 백제는 근초고왕(近肖古王) 때인 서기 371년, 고구려의 남진기지인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전사 시키는 전과를 올림으로서 맹렬한 위세를 나타내 보이기도 하였으나,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고구려 백성들은 백제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누적되어 설욕의 기회만을 엿보다가 고구려 20대 장수 왕 63년 을묘년(475), 장수왕은 3만의 대군을 이끌고 남정하여 백제 왕도인 한성을 압박하였다.

  이에 위급을 느끼게 된 백제의 개로왕은 태자(문주왕)를 신라로 급파하여 구원병 1만을 요청 하였으나, 불행이도 원병이 도착하기 전 아단산성(阿旦山城)에서 잡혀 죽임을 당하였으나, 이로써 고구려는 1백여년 전 백제에 의하여 치욕을 당한 고국원왕의 함원을 씻은 셈이 되었지만, 백제 측에서는 치명적인 위축을 당하게 되는 전기가 되었다.

  즉, 개로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문주왕은 즉위 하자마자 국도를 웅진(熊津)으로 옮긴 후 그곳의 천험적 지리와 호남, 호서 평야지대를 근간으로 하여 국력을 회복한 후 부왕에 대한 복수의 기회를 다짐하고 있었으나, 해구(解仇)의 모반으로 시해 당함으로써 고구려의 응징을 실현하지 못하게 된다.

  한편, 아단산성에서 크게 승리한 고구려는 그 여세를 몰아 한강 유역을 유린하고 마수성을 점령한 다음, 백제의 구 도읍지인 용인 깊숙이까지 두려 부신 후, 한수 이남의 백제 강역(안성천 유역, 아산만까지)을 자국의 영토로 예속 시키면서 고구려는 중앙 집권적 군현의 제도에 따라 용인 지역을 구성현(駒城縣)으로 명명함으로서 용인은 비로소 현치 원년을 기록하게 되며, 이의 사실이 삼국사기에 의하여 밝혀지게 된다.

  고구려가 한강 유역과 백제의 구 수도권역에 대하여 강력한 행정구역 체제를 구축해 가고 있는 동안, 백제는 내우외환의 와중에 휩싸이다가, 웅진천도 후 60년만인 서기 538년, 백제 성왕은 국도를 다시 사비로 옮겨 감으로서 용인은 완전히 백제의 영향권역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수도를 옮긴 백제의 성왕은 안으로는 안정을 꾀하면서 밖으로는 신라와 혼교 동맹을 맺는 등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이면서 국력신장의 기반을 다지게 된다. 

  이 무렵 신라의 변장(邊將)이 고구려에 의하여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신라와 고구려는 오랫동안 유지되던 동맹관계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하면서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중압을 느끼게 된다.

  이를 계기로 신라는 백제와 공동 운명체적 연대감이 형성되어 고구려의 위협에 대처해가는 동맹국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던 중 551년 백제 성왕과 신라의 진흥왕은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북벌을 감행하는데, 백제는 용인지역을 위시하여 한강 하류의 남. 북한 성의 6군을 수복하였고, 신라는 죽령(竹嶺) 이북 고현(高峴) 이남의 10군을 차지함으로서 용인지방은 백제 개로왕 이후 실로 76년 만에 백제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백제는 2년여가 흐르는 동안에도 이 지역에 대하여 강력한 통치력을 구축하지 못했음으로 용인의 연혁적 측면에서 참고 될 만한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못한다.

  이때 신라는 이천군에 남천현(지금의 마장면 오천리)를 설치하고 한강 권역에서 영향력을 부식하기에 은근한 힘을 쏟다가 장차의 북벌정책 수행 상 한강 유역을 확보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됨에 따라 백제와의 친교와 우호 동맹을 파기하면서까지 백제가 수복한 한강 유역의 남. 북한 성 6군마저 탈취하고 한성(廣州)을 중심으로 새로운 주(州)를 설치한다.

  이 때가 서기556년, 즉 신라 진흥왕 14(백제 성왕 31)년인데, 백제는 실지를 회복한지 불과 2년여 만에 한강유역의 요지를 다시 신라에게 내어주게 되었고 따라서, 용인지방에도 신라의 통치를 받아야하는 연이 맺어지면서 삼국이 통일 될 때까지 신라의 영토로 지속된다.

  한편 한강유역과 백제의 6군을 자국의 영토로 확장 하게 된 신라는 그 후 당항포(남양만)를 개설하고 중국 육조와의 교류를 확대 하는 한편, 삼국 통일의 발판을 굳히면서 국력의 신장을 거듭하게 된다.

  568년, 신라 진흥왕 (29년)은 이천에 남천정을 설치하고 강력한 행정기반을 구축 하였다.

  한편, 백제는 신라를 여러 번 침공하여 응징하려 하였지만, 소기의 성과를 거양치 못하고, 또 신라와 고구려의 침공을 받는 등 시련을 겪다가 의자왕 때인 642년 대병으로써 신라를 공격하여 서변의 40여 성을 함락시키고, 고구려와 더불어 당항성을 공격하여 함락 시켰다.

  이것으로써 백제는 국운이 끝나가는 시기로서 최후 최대의 전과를 거두는 셈이 되지만, 그로부터 16년 후인 의자왕 20년(668년) 신라에게 항복하였고, 668년 라.당 연합군은 고구려의 평양성을 함락시킴으로서 통일 신라를 이룩하게 된다.

  그런데 신라 진흥왕 14년으로부터 제 30대 경덕왕 16년(757)에 이르기까지의 204년여 기간동안 용인은 대개 구성(駒城), 마성(馬城)으로 불려 지다가 경덕왕은 전국의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구성을 다시 거서현(巨黍縣)으로 고치고 한주(광주)의 영현으로 함으로서, 신라의 군현제도에 의한 본격적인 현치(縣治)가 이루어졌다.

  그 후 신라가 망하고 고려태조가 즉위하게 되자, 서기 940년(고려태조 23년. 경자)3월 경주를 대 도독부(大都督府)로 하고 전국의 주. 부. 군, 현의 명칭을 대대적으로 고칠 때 신라 통치시절의 구성을 고쳐 용구현(龍駒縣)이라 하였으며,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태종 13년인 1413년, 용구와 처인 두 현을 합쳐, 용인현이라 하였다가, 갑오경장 이후인 1896년(고종 32년) 충주부로 하였고, 1914년 양지군을 병합하고 용인군이라 하였다.

  이상의 개관을 연표로 정리하면 용인 행정연혁의 변천사를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연혁표. 별표 참조)



  3. 용인의 옛 이름에 대하여


  자. 그러면 이제부터 ‘용문회지’에 특집으로 기고 된 홍순석의 ‘용인의 옛 이름에 대하여’란 장황한 논조를 짚어 보기로 하자.

  홍순석이가 일가견을 피력한 상기 특집은 1984년도에 필자가 향토문화 연구 씨리즈 물을 기획하면서 정리한 < 용인군 행정연혁 및 유래>라는 연구 자료를 보고 착상해 낸 것으로 보인다.

  D대학 국문학과 교수의 직함으로 장식된 타이틀은 예의 학구적인 논리로 전개된 것 같지만, 기실 필자의 연구 자료집을 도마에 올려놓고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요리하기 위한 의도에서 시작된 것임을 밝혀 두고자 싶다.

  왜냐하면, ‘용문회지’에 기고된 내용은 지난 해 ‘용구문화’를 통해서 발표하려다가 여건상 유보되었던 것 이였는데, 금년 3월 필자가 ‘내고장의 얼. 유물유적 편’을 펴내면서, 교수님이 펴낸 ‘내 고장의 얼. 인물편’의 내용 중 묘지 위치가 잘못 되었거나, 용인에 없는 사람이 있는 것 등으로 잘못 기술된 몇 가지를 지적, 정정한 것에 대한 보복적 기고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좌우간 그것이 의도적이든, 또는 보복이건, 처음부터 나는 연구 자료의 서문을 통해서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 하여 “유래”라고 하는 단서를 붙인다고 하였고, 오류가 있다면 누구든 내 뒤에서 그것을 바로잡아 달라는 부탁도 곁들여 놓았으니까 무슨 말을 하더라도 무방하다.

  그러나 향토문화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대학에 몸담고 계신 홍순석 교수님? 의 주장만을 절대적으로 완벽하다고 인정할 수 없음으로  피차의 입장이나마 밝혀 두고자 한다.


  첫째, 답습 론이다.

  홍순석은 ‘용문회지’ P35에 “아무런 논의 없이 답습해 온 향토사”라고 전제하여 ‘무식한 놈이 함부로 글을 쓴다.’는 식의 암시를 던지면서 동 회지 p36에 “기존의 업적을 돌이켜 보자는데 의의가 있다”라고 하여, 필자를 겨냥한다.

  그러나, 필자가 쓴 ‘행정연혁 연구자료 집’이 답습된 것인지에 관해서 알아보려거든, 내가 쓴 것 말고 그 이외에 어떤 자료가 있었는지를 먼저 밝혀 두었어야 할 일이다. 그러나 불행이도 그만큼이나 체계를 갖추어 놓은 자료는 필자에 의해서가 그 최초였음을 어찌하랴.

  그럼에도 이를 ‘답습’으로 규정한 것부터가 불순하다. 문헌을 참고 한 것도 대학에서는 답습이라고 하며, 논의가 없었다는 말은 , 대학교수가 아니면 향토분야를 연구할 자격이 없다는 소리인가?


  둘째, 선생이 아니, 교수님이 참고 하셨다는 문헌이다,

  교수님이 용인의 옛 이름을 살펴보기 위하여 수고하셨다는 문헌은 대개 (1)삼국사기지리지 (2).고려사지리지 (3)세종실록지리지. (4)동국여지승람. (5)대동지지. (6)동국여지. 등으로 자못 6~7가지나 된다.

  그 가짓수나 종류로서는 다양하고 방대한 것처럼 나열되었지만, ‘삼국사기’ 이후 간행된 ‘고려사 지리지’ 이하 기술된 내용은 거의 같은  것으로써, 시대별로 당시대의 내용이 약간씩 첨삭 되었거나, 글자의 앞 뒤를 바꾼 것 들이며, 처음 ‘삼국사기’의 것을 고려시대 사람이. 조선시대에는 삼국시대의 것과 고려의 것을 참고하는 식의 내용임으로 이중 한 두 가지만 참고 하더라도, 행정연혁 쯤 기술하는 데에는 하등 부족함이 없다.

  그럼에도, 선생은 ‘삼국사기’를 포함, 내가 참고 하였다는 야사 류. 즉, ‘연려실기술’ 정도의 문헌을 “따위”로 규정하는 따위로서, 덜 학구적이며 아주 빈약한 지식의 바탕 위에서 작성된 것처럼 애써 호도하고 있다.


  셋째, 이상 6~7가지의 문헌에 수록된 내용의 해석이다.

  먼저 삼국사기부터 유의해보자.

  ① 巨黍縣 : 本 高句麗 駒城縣, 景德王 改名, 今 龍駒縣. <三國史記>

  ② 龍駒縣 : 本 高句麗 駒城縣, 一名 滅烏縣, 新羅 景德王 改名 巨黍 <高麗史地理誌>

  ③ 龍仁縣 : 龍駒縣, 本 高句麗 駒城縣 . 新羅 景德王 改名 巨黍<世宗地理誌>

  ④ 龍仁縣 : 龍駒縣, 本 高句麗 駒城縣(一名 滅烏) 新羅景德王 改名巨黍<輿地圖書>

  ⑤ 龍 仁 : 本 百濟 滅烏 後 改 駒城. 新羅 景德王 16년 改名 巨黍<大東地志>

  위의 자료에서 볼 수 있듯이, 용인의 옛 이름에 관한 기사는 거의 같은 내용이나, 시대별로 인용되고 첨삭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홍순석이가 가장 큰 이슈로 내걸고 있는 것은 멸오가 백제 때의 지명으로서, 용인의 옛 이름이 “멸오. 구성. 거서”의 순서로 불려졌다는 주장인데,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는 문헌은 최근세 고종 연간(1864)에 간행된 ⑤ 대동지지 하나뿐이다.

  그런데 교수님은 “멸오는 백제 때 지명이 분명한데(필자가) 고구려 점령 당시의 명칭으로 생각한 자체가 큰 오류이다” 라고 목청을 뽑고있다.

  그렇다면, 의 ⑤김정호 보다 훨씬 이전시대에 간행된 ①. ② .③ .④ 문헌의 내용에 없는 것을 후세 사람이 “백제 때의 멸오”라고 한마디 한 것 때문에 기고만장 하였다면, 그리고 그것으로서 필자를 궁지로 몰았다고 쾌재를 불렀다면, 그건 좀 이르다.

  왜냐하면, 이보다 훨씬 앞서 간행된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는 용인 군명(郡名)을 “구성. 멸오. 용구. 용인”의 순서로 분명하게 기록해 놓았기 때문인데, 교수님은 이 부분에 관해서는 어찌 생각 하시는가?

  어쩐 일로 이에 관해서는 언급을 누락 시키셨는가?  이래도 (필자가) 고구려 점령당시의 명칭으로 생각한 자체가 “큰 오류”라고 빈정거릴 수 있으신가 ⑤말이다.

  이의 표현도  본 백제의 멸오, 또는 ⑥본. 백제지. 등으로 나타나고 있음으로 해석에 따라서는 홍순석이처럼 “백제의 멸오” 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뒤집어 놓으면 “멸오는 백제의 땅” 식으로 풀이할 수 있음으로 행정연혁 적 측면에서 “멸오”를 백제 때의 행정지명으로 규정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말하자면, 필자가 기술한 “행정 연혁”을 지명풀이 쯤으로, 다시 말해서 극문학을 전공하신 분이기에 자칫 그 방면으로만 해석이 가능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넷째. 용구에 관해서다.


  홍순석이는 이병선, 신태현 교수님이 문자 풀이한 <지명연구서>를 인용하면서 “구성은 멸오와 같은 뜻으로 전자는 훈독(訓讀), 후자는 음독(音讀)을 이용 표기한 것이다”라고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바로 백제때의 까마귀를 고구려에서는 망아지라고 했다는 우스운 꼴이 된다.

  어쨌거나, “멸오”를 음운으로 표기하여 망아지(駒)로 하였다고 하는 학자님 들의 논리를 가타부타할 입장은 아니나, 앞에서 살펴보았다 시피 구성(駒城)은 본래 백제 때의 지명인 마성(馬城), 또는 마수성(馬首城)에서 유래된 것이며 고구려에서는 이곳의 본래 지명이던 “마라재”를 음운으로 하여 “말아지(駒)로 하고, 마성, 또는 마수성에서 성(城)자를 인용하여 駒城이라 하였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라면, 매 맞을 소리는 아닐는지 모르겠으나, 어느 것이 사리에 가까운 경해인지 비교해 보기 바란다.




   다섯째, “멱조현”의 유래에 관해서다.

  

  내가 인용한 유래는 “멱조가 멸오로 변한 것 같다. .....그렇다면, 고구려 쪽에 의하여 지칭된 기념비적인 명칭인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라고 하여 소위 ‘가정법’을 써서 견해를 밝힌 것 이였음에도 이를 단정적인 어법으로 ..“지칭하였다”라고 표현해 놓음으로써, ‘가정법’정도는 능히 알만하신 교수님께서 억지 표현으로 남의 글 내용까지 멋대로 변조? 하면서까지 독자의 인식을 오도하고 있는 것은 실로 유감이다.

  변명 같지만 음사 구조로 보아 멸오가 멱조로, 멱조가 메주로 변했으리라는 추정쯤이야 누구나, 얼마든지 떠올릴 수 있게 되어있다.

  더구나 유래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곳 지명의 여건이 그럴만한 가능성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좋다. 그래도 내 표현이 잘못된 것 이라면 홍순석의 표현을 그대로 옮겨 보기로 하자.

  “참고로 멱조현은 가까이 있는 부아산의 설화와 연관시켜 설명하는 것이 납득이 간다. 용인에 널리 알려진 설화 가운데, 아이를 업고 할아버지를 찾아 나섰다가 변을 당한 며느리 얘기가 있음을 밝혀 둔다.....”

  자화자찬도 이정도면 가관이다. 자기가 써놓은 글에 “납득이 간다”라고 하면서 필자가 써놓은 글의 내용을 전면 부정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번에는 예의 “납득이 간다”는  그 전설을 한번 간추려 보자.

  “ 나무하러 간 시아버지가 호랑이한테 물려죽을 지경인데, 며느리가 아이를 업고 찾아 나섰다가 이를 발견, 등에 업은 아이를 호랑이에게 내어주고 시아버지를 살렸다” 는 전설로써, “시아버지를 찾아다녔기 때문에 ‘覓祖峴’ ”이고 “아이를 업고 헤맨 산이라서 ‘負兒山’이 되었다” 라는 것인데, 이것이야 말로 문자 풀이 식 납득 론이 아닌가?

  이와 같이 요즈음 세상 같아서는 젖먹이는 아이들도 수긍하지 못할 황당한 픽션물에는 “납득이” 가면서도 필자가 피력한 “유래 설”에는 어째서 납득이 되지 않는지, 그 생리적 구조까지는 탓할 수 없겠으나, 이상 두개의 유래를 비교하여 어느 것이 논리에 가까운 표현(유래)인지는 독자 여러분이 한번 판단해 주시기 바란다.

  그 밖에도 많다. 솔직히 말해서 분풀이를 하려면 끝이 없겠다. 그러나, 홍순석이는 대학에 몸담고 있으면서 칭하여 ‘교수’라는 사람이고, 그럴만한 식견과 덕망이 있으신 분으로서, 하찮은 내 글 좀 나무라고 책망? 하신 것 쯤 달게 받아야 할 처지이며, 나 같은 문외한. 더구나 그 흔한 학위 하나 없는 백두의 미관말직이 언감생심 교수님을 상대로 글줄을 논할 입장이 못 된다는 것 쯤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필자의 졸고를 거론삼아 주신 교수님의 노고에 대하여 감사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 일줄 생각하지만, 오로지 고향에 묻혀 온갖 희생을 감내하면서까지 이 방면의 연구에 오로지하고 있는, 우리네 아마추어의 약점이나 들춰내려는 추잡한 작태에 대하여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기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더 있을 수 있겠지만, 지면상 유보 하겠거니와 교수님 말씀처럼 “향토문화의 정립”을 위해서 필요 하다면 언제든 주저 없이 필을 잡겠다.<終>








[출처] 백제시대 용인|작성자 청호당

 

 

 

 

노고산(老姑山)과 할미산
용인의 옛땅이름(88)
[402호] 2007년 07월 26일 (목) 용인시민신문 webmaster@yongin21.co.kr

   
  ▲ 정양화 용인문화원 부설 용인향토문화연구소장  
노고산은 노고봉으로 불리기도 하며 용인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분포하는 이름이다. 각 지방의 등산로로 이름난 산들 가운데 적지 않은 곳이 노고산이나 노고봉 등으로 불리고 있다.

용인관내에도 처인구 모현면 왕산리에 노고봉이 있으며 남동에 있는 태성고등학교의 뒷산도 노고봉이다.
포곡면 마성리 마성인테인지 위에 있는 할미성산도 노고성산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또 용인지역에서 노고봉이 노구봉으로 발음되는 것도 흔히 볼 수 있는데, 이러한 발음상의 변화는 왕왕 새로운 지명풀이를 낳기도 한다.

즉 노고봉(老姑峰)이 노구봉(老龜峰)으로 표기되면서 마고할미의 전설이 거북과 관련된 유래도 바뀌기도 하는 것이다.

할미성은 산이지만 위에 산성이 있어서 일반적으로 할미성으로만 부르기도 한다. 한자로는 노고성(老姑城)으로 쓰는데 마고(麻姑)할미가 하룻밤에 치마폭에 돌을 담아다 쌓아다는 전설이 있다. 마고는 중국의 신선인데 우리나라에서도 도처에 노고산과 관련된 유래를 남기고 있다.

지리산 노고단의 ‘노고(老姑)’ 라는 말도 할머니라는 뜻이며 제주도 설화에 나오는 선문 대할망 역시 같은 의미라고 한다. 또 마고는 도교(道敎)의 여선(女仙)인 서왕모의 전설과 혼합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노고산이나 노고봉으로 표기된 많은 산들의 본래 이름은 할미(산)이나 할미(봉)이다. 물론 할머니와 직접 관련된 유래를 지니는 산도 있겠으나 대부분은 ‘큰 산’의 뜻을 가지는 이름이다.

아직도 남아있는 우리말가운데 지명에서 그 흔적을 찾아보기 쉬운 것이 ‘한’이다. ‘한’은 주로 접두사로 쓰이며 ‘크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대전(大田)의 본 이름이 한 밭에서 유래된 것임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용인관내에도 양지면 대대리에 ‘한터’가 있는데 한자로는 대대(大垈)로 쓰니 ‘큰 터’라는 뜻이다. 또한 백암에서 죽산으로 넘어가면 곧바로 ‘한다리’라고 하는 마을이 있는데 ‘큰 들’의 뜻이라는 것을 전에 말한 적이 있다.

이 크다는 뜻을 가진 ‘한’이 산과 만나면 ‘한뫼’가 되는데 차츰 변음이 되어 ‘할매’가 되고 다시 ‘할미’로 변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 할미는 할머니(祖母의) 준말인 할미와 발음이 같으므로 한자로 표기하면서 ‘큰 산’의 뜻이 아니라 ‘할머니 산’의 의미로 옮겨가서 노고(老姑)가 되니, 바로 우리들이 자주 만나게 되는 산 이름인 것이다. 즉 한뫼가 변해서 할미가 되고 다시 한자로 적으면서 노고로 변화된 것이다.

실제로 할머니의 본디말도 한어머니인데 이는 앞서 말한 ‘한’이 앞에 붙어 큰어머니의 뜻을 가지는 말이다. 이는 작은아버지, 큰아버지, 작은어머니, 큰어머니와 같은 뜻이 아니라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이다. ‘한(어)머니’가 줄어서 할머니가 되고 다시 줄어서 할미가 된 것이니 산 이름의 변화와 형태를 같이하는 말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남동과 모현면의 노고봉은 본래 할미를 한자로 옮긴 이름이 되는 것이다. 이는 포곡면의 할미성산과 같은 뜻으로 할미는 우리말 이름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 예라고 하겠다.

[출처] 노고산과 할미산|작성자 청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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