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3. 입장에 거봉이 전래된 것은 1968년 입장면 독정리 박문용 선생께서 일본에서 개량된 3배체 거봉묘목을 구입하여 재배 전파되기 시작하였음.
충청남도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경기도와 충청북도 3도경계에 위치한 곳임.
서울 경부고속도로 하행선 평택.안성 I.C에서 평택방향으로 오시면 1번 국도가 나옴.
여기에서 천안방향으로 약 5분이면 성환읍이 나옴.
34번국도 진천방향으로 약 8분정도면 우리지역이 나옴.
경부선 천안 I.C에서 우회전 하시면 단국대병원 방향으로 약 15분 거리에 있음.
1. 우리 지역은 해방전 금이 많이 나던 곳으로 연속극 노다지 인생 배경을 입장지역으로 하여 많은 사금이 나덧 곳으로 토질속에 금의 성분이 함유된 곳임.
2. 한편 차량선맥의 끝자락인 성거산, 위례산, 서운산 기슭에 위치한 준령한 지역으로 땅은 사질토로 되어 있으며 거봉포도 재배에 적합한 최고의 기후조건과 연평균 강우량이 700mm 미만으로 당도가 높고 품질이 좋은 거봉포도 생산에 적합하며 전국 최대의 거봉포도 생산 주산지로 30년의 역사가 되었으며,
4. 또한 기미 독립만세운동이 전국 최초로 시작된 곳이기도 하며 이곳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된 곳임.
5. 이곳은 서울. 대전등 대도시와 인접한 지역으로 지리적 교통의 요충지로 생산된 포도.배등을 도시소비자와 현지직거래 및 관광농업을 겸한 유리한 지역임 (포도 : 1,000 ha · 배 : 100 ha · 미곡 : 560 ha)
천안군 2읍 10개면의 하나로 본래 직산군 이동면(二東面)과 삼동면(三東面) 지역으로, 이동면의 사장동(沙場洞), 기로촌(耆老村), 상장리(上場里), 하장리(下場里), 홍천동(弘泉洞), 동계리(東溪里), 효아촌(孝兒村), 구덕리(九德里), 신대리(新垈里), 양대리(良垈里), 시랑리(侍郞里), 도장리(道壯里), 당곡리(堂谷里), 호계리(虎溪里), 복덕리(福德里)의 15개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지방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해 삼동면(三洞面) 하리(下里), 연봉리(延峯里), 우지곡리(于只谷里), 산정리(山井里), 차중리(次中里), 흑암리(黑岩里), 차상리(次上里), 토산리(土山里), 가좌동(可座洞), 용두리(龍頭里), 강당리(講堂里), 적정리(赤井里), 신두리(新頭里), 독정리(獨井里), 발림리(發林里), 도낭리(道郎里), 가연리(加連里)의 17개리와 경기도 안성군 입장면(笠場面)의 신흥리(新興里) 일부와 간곡면(干谷面)의 구정리(九井里) 일부를 병합하여 안성군에서 편입 된 입장면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천안군 입장면이 되어 도하, 연곡, 산정, 흑암, 가산, 용정, 신두, 독정, 도림, 유리, 기로, 상장, 하장, 홍천, 효계, 양대, 대장, 호당, 신덕리의 19개리를 관할하였다. 그 후 1963년 1월 1일 천안읍과 환성면이 천안시로 승격되므로 천원군 입장면이 되었섰다. 1989년 1월 1일(천안군 조례 1084호 1988.12.31) 도하리를 성환읍에 편입시키고18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동쪽은 경기도 안선군 서운면과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남쪽은 북면과 성거읍, 서쪽은 경기도 미양면과 서운면에 접하고 있다. 입장면의 입(笠)자는 본래 (笠)라는 설도 있다. 그 후 1991년 1월 1일 천안군으로 명칭변경, 1995년 5월 10일 천안시.군 통합으로 천안군을 천안시로 명칭변경하였다.
1. 시장리
직산군 이동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시랑리 도장동이 병합하여 시장리의 시자와 도장동의 장자를 따서 시장리라 하고 입장면에 편입 되어 천안군 입장면이 되었다. 천안읍과 환성면이 천안시로 승격될 때 천원군 입장면 시장리가 되었다가 다시 환원되었다. ◎ 두멍골 : 입장 제 2저수지 서남쪽에 있는데 지형이 두멍같이 깊숙이 생겼다고 한다. ◎ 구시랑이 : 구실향. 도장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백제때 시랑(侍郞)아홉이 이곳에 살았다 한다. 백제때 구실향이 있었다고도하며 백제와 관련이 있는 지명인것 같다. ◎ 고래울 : 범우래 뒤에 있는 골짜기. 지형이 고리처럼 생겼다 한다. ◎ 범우래 : 범우리 시랑리라고도 하며 두멍골 옆에 있는 마을. 예전에 이곳에서 범이 울었다 한다.1952년 입장 제 2저수지가 생김으로 시랑리가 저수지 가운데 들게되므로 이곳으로 옮겼다. 철이 단범 하던 곳이다. ◎ 갓골 : 뒷골 위쪽에 있는 골짜기. ◎ 도장골(道場) : 시장리에서 가장 큰 마을 도장을 베풀고 무술을 연마하였다 한다. ◎ 등구제 : 도장골 남쪽에 있는 산. 산 모양이 용의 머리처럼 되었는데 산제당이 있었다. ◎ 두멍골 샘 : 두멍골에 있는 샘. 옛날에 흰여우가 샘을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 동산(東山) : 도장골 뒤에 있는 산. 옛기와 조각이 지금도 나온다고 한다. ◎ 방아다리 : 도장골 앞에 있는 들. 지형이 방아다리처럼 생겼는데 현재 저수지가 되었다. ◎ 백정(白丁)촌 : 구시랑골 밑에 있는 골짜기. 옛날에 백정들이 살았고 형평운동을 벌렸다. ◎ 수리고개 : 보무래에서 성거읍 오목리 가는 고개. ◎ 섬배기 : 잿말 위쪽에 있는 골짜기. ◎ 잿말 : 도장골 왼쪽에 있는 골짜기. ◎ 사창잇돌 : 도장골 오른쪽에 있는 골짜기. ◎ 부처짓골 : 소정이 오른쪽에 있는 골. 옛 절터가 있다. ◎ 술샘 : (전설)수리고개에 있는 샘인데 샘물이 슬기로움이 있어서 목마른 사람이 마시면 갈증이 풀리고 요기가 되는데, 욕심이 많은 사람이 욕심껏 마시기 위하여 우물을 더 팟더니 술기운이 없어 졌다고 한다. ◎ 진절머리고개 : 수리고개 위에 있는 고개. 고개가 너무 높고 험해서 오르자면 진절머리가 난다고 한다. ◎ 장승거리들 : 방아다리 아래쪽에 있는 들. 장승이 있었는데 저수지자리가 된다. ◎ 심산(沈山) : 동구재 밑에 있는 마을. 심(沈)씨가 동네를 개척하여 이루어 놓았다고 한다. ◎ 숯굳이 : 부처지골 옆에 있는 골. 숯을 굽던 곳이 있었다. ◎ 유동골 : 소정이 왼쪽에 있는 골짜기. |
2. 호당리
직산군 이동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당곡리 호계리 복덕리가 병합되어 호계리의 호자와 당곡리의 당자를 따서 호당리라 하고 입장면에 편입 되었다. ◎ 산신제 : 호견 부락에서 지내는데 정월 초 이튿날 생기복덕을 보아 닫는 사람을 선정하여 당주로 정하는데 당주 집에서는 산신제 일체의 준비를 한다. 리장 보조인 축관등이 제를 지내며 각 집에서도 떡을 하여 안택을 빈다. 제를 지낼 때 시루 올려라 하고 소리치면 각집의 떡시루에 불을 때며 각 집에서도 제를 올린다. 당일은 온동네 사람의 출타를 금하고(옛날에도 제삿날을 정하면 출타를 금하기도 하였다.) 제물은 삼색실과와 통돼지(여의치 못할 때는 돼지머리)를 놓고 지내며 제사 참석자는 당집 앞 찬 물샘에서 목욕한 다음에 제사를 지내고 각호의 소지를 올린다.
◎ 금성암(錦城庵) : 호계 동남쪽에 있는 절.
◎ 당골(당곡) : 호계 북서쪽에 있는 마을. 산제당이 있었으며 철의 담범일을 하였다.
◎ 개장짓골 : 고낫골 위에 있는 골짜기.(효계리 위쪽에 있는 골짜기)
◎ 방아골 : 당골 남동쪽에 있는 골짜기.
◎ 호겨니(호계 호계리) : 호당리에서 으뜸되는 마을. 위례성 밑이 되는데 옛날에 호랑이가 자주 나타났다고 한다.
◎ 방밋골 : 호겨니 왼쪽에 있는 골짜기. 쟁이(匠人)들이 모여 살던 곳.
◎ 범박골 : 우물목 아래에 있는 골. 주물을 부어 만든 철의 틀을 만들던 곳.
◎ 사리목 : 범박골 왼쪽에 있는 골짜기.
◎ 우물목 고개 : 정항령이라고도 하며 호당리에서 북면 납안리 도촌으로 넘어가는 고개.
◎ 해산골 : 개강짓골 건너 쪽에 있는 골짜기.
◎ 우렁골 : 우렁속 같이 매우 깊이 들어가 있는 골.
◎ 사기점 펀덕 : 사기를 굽던 사기점이 있었다.
◎ 쇠골 : 산신제 지내는 곳. 철의 일을 하던 곳.
◎ 장터 : 광산이 잘 될적에는 호계니에 장이 섯다고 하며 싸전은 잘 되었다고 한다.
◎ 험난골 : 비탈이 심하여 매우 험난 하다고 한다.
3. 홍천리
직산군 이동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홍천동이 홍천리로 되어 입장면에 편입되었다. 우물가에 붉은 꽃이 많이 피므로 홍천 또는 홍천동(弘泉里)이라 하였다고 한다. ◎ 고래울 : 홍천동 위쪽에 있는 골짜기. (전설) : 옛날에 이곳에 조선 오리나무가 우거져 있었고 삼태미 안 같아서 부자가 난다고 하였으며 샘을 위하던 부락이라 한다. |
4. 유리
직산군 삼동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때 애동 내유리 외유리가 병합하여 유리라 하고 입장면에 편입 되었다.
◎ 유리(柳里) : 버들가지. 유관리라고도 하며 문화 유씨들이 원주민이며 그를 상징하기 위하여 버드나무를 많이 심어 버드나무가 동네 앞에 숲을 이루었다고 한다.
◎ 밤골(방골) : 안버들아지 오른쪽에 있는 골짜기.
◎ 배삼동 : 배삼딩이. 배삼곶이. 배를 매던 자리. 배를 만들었던 자리(造船所)라고도 하며 아산만에서 이곳까지 배가 드나들었다고 전해 온다.
◎ 쑥골 : 애동이라고 하는데 안버들아지 서쪽에 있는 마을. 쑥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 양말건제(梁末巾堤) : 버들아지에 있는 방죽. 양말건이 만들었다고 전하여 온다.
◎ 점말(店村) : 바깥 버들아지 남쪽에 있으며 현재 옹기를 굽는 옹기점이 있다.
◎ 학교말 : 점말 서쪽에 있는 마을. 중학교가 있다.
◎ 마구들 : 옛날에 행암을 돕기 위하여 마굿간을 설치하고 행인의 말과 사람의 숙박시설이 있었다고 하며 서울 다니는 길목이다.
◎ 연방죽 : 연을 심은 연꽃 방죽이 있었는데 없어 졌다.
(전설) : 유리 뒷동산이 솔밭이었는데 나무가 무성하면 부락이 길하고 나무가 없으면 불길하다고 하는 말이 예부터 전해 왔는데 뒷동산을 벌목하여 나무가 없어지므로 부락이 불길한 일만 생기고 사고가 자주 나무로 동네에서 굿을 크게 하고 나무를 다시 심기로 하였다.
5. 효계리
직산군 이동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페합으로 동계리 효아촌이 병합하여 효아촌의 효자와 동계리의 계자를 따서 효계리라 하고 천안군 입장면에 편입되었다. 천안군이 천원군으로 바꾸어지므로 천원군 입장면 효계리가 되었다가 환원되었다. ◎ 나무제 : 새춘이 부락에서 수령 500년 이상된 느티나무에 제를 올리는데 정월 초승 길일을 택하여 날을 정하고 생기복덕을 보아 닫는 사람을 제관으로 삼고 돼지머리 삼색실과를 제물로 놓고 지내며 비용은 부락비용으로 하고 밤 8시경에 지내고 지낸 음식은 부락민이 모여 함께 먹는다. |
6. 기로리
직산군 이동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기로촌 사장동이 병합하여 기로리라 하고 천안군 입장면에 편입 되었다가 군명이 천원군으로 바꾸어져 천원군 입장면 기로리가 되었다가 환원되었다.
◎ 기로촌(耆老村) : 산수가 좋고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오래 삶으로 기로 또는 기로촌이라 불려 내려 왔다고 한다.
◎ 사장골(沙長) : 사기점골 이라고도 하는데 기로 저수지 앞쪽에 있는 마을. 사기조각이 나온다고 하며 격장리라고도 한다.
◎ 호무내 : 기로 저수지 동쪽에 있는 마을. 청나라 사람들이 이곳에 호무를 심었다 한다.
◎ 중앙광산(中央鑛山) : 기로리에 있는 금광. 1919년 영국사람이 개발 하였는데 제2차세계대전 때 일본 사람이 차지 했다가 해방후 한국인이 운영했다고 한다.
◎ 잿들 : 숲거리 밑에 있는 큰 들.
◎ 잔디말 : 원적골 밑에 있는 들. 전에는 집이 있었다고 한다.
◎ 안말(內洞) : 기로촌 안쪽에 있는 마을.
◎ 원적골 : 양달말 동쪽에 있는 골짜기.
◎ 숲거리 : 양달말 내 건너쪽에 있는 마을. 숲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 동산말(東山村) : 기로촌 위 동쪽에 있는 마을.
◎ 데캉(新興) : 신흥이라고도 하며 사장골 밑에 있는 마을. 청국 사람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 기로저수지 : 기로리에 있는 저수지로 입장면에서 제일 먼저 막은 저수지라 한다.
◎ 불무재 : 도림리로 가는 고개로 쇠를 녹이기 위하여 불무질을 하던 곳이기도 하다.
◎ 모래고개 : 모래가 많이 내려와 모래고개라 한다.
◎ 함정고개 : 양대가는 고개로 산짐승을 잡기 위하여 함정을 옛날에 많이 팟다고 한다.
◎ 비렁이들 : 예전에 들에 물을 대기 나빠서 농사를 짓기가 어려우므로 농사 못짓는 해가 많다. 이 들에서 농사를 짓다가는 비렁이가 되기 일쑤였다고 한다.
◎ 청다리 : 청나라 사람들이 놓은 다리가 있었는데 없어졌다.
7. 양대리
직산군 이동면 지역으로 산수가 좋으므로 양대라 하였다고 하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양대리 단일리가 병합없이 양대리로 천안군 입장면 양대리가 되었는데 군명이 천원군이 되므로 천원군 입장면 양대리가 되었었다. ◎ 부소문이 고개(扶蘇門嶺) : 양대리에서 북면 운용리로 넘어가는 고개. 백제 때 이곳에 부소문을 달았다고 하며 소나무 고개의 뜻을 지녔다고 한다. ◎ 국사봉(國師峯) : 국수봉(國師峯)이라고도 하며 옛날에 나라에서 제사를 올리던 곳이라 하고 이곳에서 광산을 할 때에도 이 국사봉에 제를 매년 올렸다고 한다. ◎ 한림봉(翰林峯) : 양대 북쪽에 있는 산. 한림 민복(閔福)의 묘가 있다. ◎ 세련이 : 한림봉 밑에 있는 마을. ◎ 양대골 : 양대 뒤에 있는 골짜기. 붉고 흰 사기조각이 많이 나타난다. ◎ 사초골 : 부소문이고개 북쪽에 있는 골짜기. ◎ 유독너덜 : 부소문이 고개 동서쪽에 있는 골짜기. 유독 풀이 많이 있다고 한다. ◎ 점말 : 양대 서쪽에 있는 마을. 사기점이 있었다. ◎ 통점 : 양대골 위쪽에 있는 마을. 옛날에 놋그릇을 생산 하는 놋그릇점이 있었다고 한다. ◎ 직산금광 정련소(稷山金鑛精煉所) : 쇳대봉에 있었는데 금을 제련 하던 제련장이었으며 현재도 그 터와 건물 일부분이 남아 있다. 기계청 이라고도 한다. ◎ 말마골 : 갈마 음수형이라 하며 말안장 같이 생긴 산등이 있는 골이다. ◎ 모이골 : 최씨네의 묘가 있고 인문석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흔적만 남아있다. ◎ 광명학교터 : 남녀공학의 기독교계 학교가 양대 남쪽 위에 있었다. 여학생 3명이 3.1운동 때 만세를 주도 했다. ◎ 주막거리 : 광산이 이곳에 있었을 당시 장이 서고 주막이 있었으며 기생이 많았다. ◎ 헌병대자리 : 일인 헌병대가 있었으며 광부들의 3.1만세 때 광부 여러명을 사살하였다. ◎ 입장 3.1운동 만세비 : 광명학교 여학생이 주도한 만세운동과 광부들이 주도한 시위 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양대부락 중간길 옆에 1990년 4월 기념비를 세웠다. ◎ 미국인주방 : 미국 사람이 광산할 당시 점심식사와 손님 접대하던 집이 현재 보존되어 있는데 중국인 벽돌공이 쌓았다 한다. |
8. 도림리
직산군 삼동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발림리, 도랑리, 가련이, 경기도 안성군 입장면 신흥리 일부를 병합하여 도랑리의 도자와 발림리의 림자를 따서 도림리라 하고 천안군 입장면 도림리가 되었다가 군명이 천원군이 되어 천원군 입장면 도림리가 되었었다.
◎ 미륵제 : 보덕에서 지내는데 미륵 2구가 있어 이 미륵에 제를 올리며 음력 정초에 길일을 택하여 이장이 제관이 되고 삼색실과와 돼지머리를 제물로 놓고 부락의 평안을 빈다. 전에는 미륵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몇해전 장마에 한 구가 더 나와 2구가 되었다. 제를 지낸 음식은 나누어 먹는다.
(전설) : 삼형제 바위가 있는데 소원 성취 해달라고 떡을 해가지고 가서 고요한 밤에 바위에다 치성을 드리면 소원이 성취된다고 하여 부락민 다수와 인근 부락민 까지도 와서 치성을 드린다고 한다.
(전설) : 불당골. 약물탕. 장님이 이 물을 먹고 눈을 떴다고 하며 한해가 심하여도 이 샘은 마르지 않으며 부락민이 신성시 해 왔다고 한다.
(전설) : 우물이 동네에 있는데 동네사람이 이 우물의 물을 다마시거나, 그 위에 묘를 쓰면 물이 안나온다 하여 묘를 못쓰게 하는데 몇해 전에 성거읍 사람이 묘를 몰래 썼다. 동네 사람들이 나서서 묘를 파버려서 다른 곳으로 이장하여 갔다고 한다.
◎ 보덕원(普德院) : 보덕골이라고도 하며 도림리에서 가장 큰 마을. 조선시대 행인의 편의를 도와 주기 위하여 보덕원이라고 하는 원을 설치하여 행인의 도움을 주었다.
◎ 가련리(加連里) : 보덕원 남쪽에 있는 마을.
◎ 바람산 : 풍산. 청다리라고도 하며 새터 뒤에 있는 산. 풀무로 바람을 이르켰다.
◎ 새춧골 : 보통거리 위쪽에 있는 마을. 쇠를 생산 하던 곳이다.
◎ 불무골(재) : 새터에서 기로리로 넘어가는 고개. 철을 녹여 물건을 만들기 위해 불무를 하던 것이다.
◎ 보통거리 : 보덕원 위쪽에 있는 마을. 구들장이 많이 나온다.
◎ 대장간 터 : 부락 앞이 되는데 철일을 하였다고 한다.
◎ 안샘터 : 부락민의 상수도 수원이 되는 샘이다.
◎ 불당골 : 절이 있었는데 빈대가 많아서 없어졌다고 한다.
◎ 매봉재 : (전설) 천지개벽 때에 이곳이 물이 잠기고 매하나 앉을 만치 남아 있었다고 한다.
◎ 용바위 : (전설)용이 누었다 일어 났다고 하며 형상이 바위에 자국지어 있다.
◎ 범박골 : 주물로 물건을 생산 하려면 흙으로 틀을 만들고 쇠물을 부어야 되는데 이 틀을 만들던 곳이다.
◎ 옆둔재 : 엽둔고개, 엽둔티, 엽전리, 율둔티 라고도 하는데 가련이에서 충청북도 진천으로 넘어가는 고개. 옛날에 도둑이 많아서 엽전을 가지고 가는 사람은 모두 빼앗겼다고 한다. 이곳이 엽전을 생산 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9. 독정리
직산군 삼동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독정리 이동면의 상장리 일부를 병합하여 독정리라 하고 천안군 입장면 독정리가 되었는데 군명이 천원군이 되므로 천원군 입장면 독정리가 되었었다. ◎ 동정이(獨井里) : 우물 하나가 있어 이 우물로 온동네 사람이 다 사용하므로 독정이라 하였다고 전해 온다. (전설) : 새우잡이 고래라고 하고 안성 서운면 가는 고개인데 옛날에 대홍수가 나서 이곳이 물에 잠겼었는데 새우를 잡았다 하며 새우잡이 배가 다니기도 하였다 한다. |
10. 가산리
직산군 삼동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토산리, 가좌동이 병합하여 가산리의 가자와 토산리의 산자를 따서 가산리라 하고 천안군 입장면 가산리가 되었느데 군명이 천원군으로 개칭되어 천원군 입장면 가산리가 되었었다.
◎ 톨미(토산兎山) : 가산리에서 가장 큰 마을. 뒷산이 토끼 모양으로 생겼다고 한다.
◎ 조효자정문 : 톨미 앞에 있는 통정대부 조립(趙砬)의 효자 정문.
◎ 숫골고개 : 가재울 동남쪽에 있는 고개. 가산리에서 유리로 넘어가는 고개.
◎ 가재울(가좌동.可座洞) : 톨미 동쪽에 있는 마을. 가재가 많았다고 한다.
◎ 승적골 : 불여우가 많이 살았다고 하며 이동네서 불여우 같은 짓을 하면 승적골 불여우라고 부른다 한다.
◎ 작수벌 : 옛날에 소나무가 울타리 같이 무성하였다 한다.
◎ 능골 : 임금의 묘로 사용하려다 취소하였다 한다.
(전설) : 가재울 주위의 산이 삼태미 같이 생겨 동네가 길하다고 전해오고 있다.
◎ 신아궁 : 도깨비가 많아 신아궁이라 했다고 한다.
11. 연곡리
직산군 삼동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연봉리, 우지곡리, 경기도 안성군 우곡면 구정리, 일부를 병합하여 연봉리의 연자와 우지곡의 곡자를 따서 연곡리라 하고 천안군 입장면에 편입되었는데 군명이 천원군으로 개칭되어 천원군 입장면 연곡리가 되었었다.◎ 갈산(葛山) : 가리산이라고도 하는데 연봉 동남쪽에 있는 마을. ◎ 쇠골 : 우지곡(于只谷). 우지곡리, 우곡, 가리산이 옆에 있는 마을. ◎ 승불제(承佛堤) : 쇠골 방죽이라고도 하는데 쇠골에 있는 방죽. ◎ 연봉(蓮峯) : 연곡리에서 으뜸 되는 마을. 연화봉 밑이 된다. 뒷산이 연꽃 같아서 연화봉이라고 하였다고 하는데 고속도로로 인하여 잘려 나가서 봉은 없어졌다 한다. ◎ 잼벌 : 항상 물이 마르지 않는 들이라고 한다. ◎ 가장골 : 이곳에서 생산되는 쌀이 좋아서 살이 찌거나 몸무게가 나간면 가장골 쌀얼마나 먹었느냐고 물어보는 것이 이동네 인사였다. ◎ 갈산(전설) : 우지곡 마을이 삼태미 같아서 작은 부자는 있어도 큰 부자는 없다고 한다. 삼태기에 물건이 담기면 넘어서 흐르기 때문에 더 담을 수 가 없기 때문이라 한다. ◎ 감사들 : 어떤 감사가 지나다가 이곳에서 쉬어 갔다고 전하여 온다. ◎ 죽배미 : 예전에 이곳 농가를 짓다가는 죽먹기도 어려웠다 한다. ◎ 장승백이 : 옛날에 이곳에 장승이 있었다 한다. ◎ 말무덤 : 암행어사가 말을 타고 가다가 말이 이곳에서 죽으므로 묻고 갔다고 한다. |
12. 산정리
직산군 삼동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산정리 차중리가 병합하여 산정리라 하고 천안군 입장면 산정리가 되었는데 군명이 천원군으로 개칭되어 천원군 입장면 산정리가 되었었다.
◎ 우물제 : 산정부락에서 지내는데 우물이 네 군데 있었다. 음력 정월 초이튿날 생기 복덕을 보아 닫는 사람을 제관으로 정하고 새벽에 제를 지내며 삼색실과와 포하나 돼지머리(돼지고기)를 제물로 쓰고 제를 지낸 음식은 제사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나누어 먹고 제 지내기 전에 샘을 청소하고 황토를 샘길에 편다. 제사를 지내기 전에는 부락 사람의 출타를 금한다. 또 돼지를 잡아서 돼지의 피를 온 동네 집집마다 대문에 뿌렸다고 한다.
◎ 평장골 : 산 끝 우물 왼쪽에 있는 골짜기. 옛날에 무덤이 있었다고 한다.
◎ 정효자비 : 산우물과 차중리 사이에 있는 효자 정종덕(鄭種德)의 비. 3년 시묘를 살았다고 한다.
◎ 해산골 : 산 끝 우물 뒤쪽에 있는 골짜기. 옛날 전란때 어떤 여인이 이 골에 피난하다가 아이를 해산 하였는데 그 아이가 커서 장수가 되었다고 한다.
◎ 끝산우물 : 말산정. 꿩말.(사우물 위쪽 구석에 있는 마을)
◎ 하산정(下山井) : 아래 산우물.
◎ 차중리(次中里) : 산우물 남쪽에 있는 마을. 차상리 아래가 된다.
◎ 산우물: (전설) 산밑에 좋은 우물이 있어서 이 물을 먹고 앉은뱅이가 걸어가고 죽게된 사람이 살아났다 하여 산우물이라고 하였다 한다.
◎ 일봉산 : 정월 대보름 날 달보러 이 산에 올라가서 달맞이 한다고 한다.
◎ 도랑미 : 산비탈로 물 똘이 있어서 도랑미라 한다.
(전설) : 차중리 뒤산이 풍채혈이라 재산이 왔다 갔다 한다고 전해 온다. ◎ 금광 : 중앙광산이 이곳에도 있었다고 한다.
◎ 징채산 : 징을 치는 징채같이 생겼다고 한다.
◎ 월보들 : 전에는 타군의 봇물을 대어서 농사를 지어 왔으므로 월보 들이라 하였다.
◎ 정제(井祭) : 차중리(次中里) 정월 초이틀날 지내며 생기복덕을 보아 닫는 사람중 고령자를 선정하여 제관이 되며 검정돼지를 잡는데 흰털이 한 개라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삼색실과와 술과 포로 제물을 하며 새벽에 지내고 전날 샘을 청소하고 황토를 펴서 부정한자는 샘근처의 출입을 금하고 정제 지내기 전에는 동네 사람들의 출타를 금한다.
13. 흑암리
직산군 삼동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흑암리 차상리가 병합하여 흑암리라 하고 천안군 입장면 흑암리라 하였다가 군명이 천원군으로 개칭되어 천원군 입장면 흑암리가 되었다가 환원되었다.◎ 흑암리(검바위) : 바위가 2개 있는데 검어서 검바위라 한다. ◎ 우물제 : 검바위에서 음력 정월 초이틀날 생기복덕을 보아 제관을 선택하여 선택된 제관은 5일간 담배와 여자 부정한 일을 못하며 탈없이 지내야 되고 삼색실과와 검정돼지를 잡으며 머리는 부락 입구의 해나무에 놓고 나무제를 지낸다. 네 다리는 우물 네 개가 있는데 하나씩 놓고 지낸다. 샘은 당일 식전에 청소하여 아침전에 정제를 지낸다. 당일 정제가 끝나야 출타할 수 있다. ◎ 진제 : 검바위 서쪽에 있는 높은산. 예전에 진터가 있었다 한다. ◎ 우엉골 : 검바위 앞에 있는 골짜기. ◎ 행자목골 : 예전에 큰 은행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
14. 용정리
직산군 삼동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용두리 강당리 적정리가 병합하여 용두리의 용자와 적정리의 정자를 따서 용정리라 하고 천안군 입장면 용정리라 하다가 천안군의 명칭이 천원군으로 개칭되어 천원군 입장면 용정리가 되었었다.
◎ 우물제 : 불그머리에서 정제를 지낸다. 샘이 세 개 있는데 정월 초삼일 생기복덕을 보아 닫는 사람으로 제관 축관을 정하고 삼색실과, 술을 제물로 놓고 지낸다. 당일 샘청소를 하고 오전에 우물제를 지낸다. 당일에 한해 정제 전에는 출타를 금한다고 한다. 이 동네는 축문을 한글로 읽는데 (유세차 00년 0월 00삭유학 000감소고우 영천지신 장진소례 가가태안 사사비화 함구백제 점수오복 근이청작 지천 우신상향)이라 읽는다.
◎ 강당 : 강당리(講堂里) 불그머리 아래쪽에 있는 마을. 옛날에 안씨가 강당을 짓고 후진을 가르쳤다고 한다.
◎ 불그머리 : 적적(赤井). 불그물. 불은우물이라고도 하며 용정리에서 가장 큰 마을. 불그머리에 큰 우물이 있는데 물맛이 썩 좋으므로 백제때 나라에서 쓰기 위하여 우물 둘레를 구리로 둘러 만들었다고 한다. 우물 근처의 흙이 붉은 색이므로 붉은 우물이 되었다고도 하고 효자가 떠나지 않는 마을이라 불궤리(不 里)라고도 한다. 서양사람들이 금광할 때 이곳에 살면서 붉은벽돌로 샘주변을 쌓아 적정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 옥녀봉(玉女峯) : 태봉산(胎封山) 불그머리에 있는 산. 산모양이 수려하고 단정하여 옥녀와 같다 하며 옛 임금의 태를 묻었다 한다.
◎ 정문거리 : 불그머리 남쪽에 있는 전주 최씨 정문. 선조 때 효자 최돈(崔墩)과 그 아우 基 아들 극인(克認), 극성(克誠), 극해(克諧), 극량(克良)의 3형제, 극해의 아들 주민(柱旻)과 주민의 아들 황(滉), 찬(燦)의 형제가 모두 효자로써 4대 효자로 벼슬을 받은이가 8사람이 되어 이곳을 지나는 사람마다 크게 감탄하고 정문있는 길을 정문거리라 불러 지금까지 부른다.
◎ 양관터 : 미국사람 양인들이 광산할 때 일본사람 보다 먼저 와 머물던 곳.
◎ 개떡골 : 논이 더러워 흉년에 개떡 몇조각과 논을 바꾼 논이 있어 개떡 바꾼골이라 한다.
◎ 봉바위 : 이 바위에서 부엉이가 자주 울었다 한다.
◎ 용머리 : 용두리 앞에 있는 산등인데 부리 모양이 용의 머리같이 생겼다.
◎ 정 샘 : 불그머리에 있는데 어떤 대감이 지나가다가 이 우물 물을 마시고 물맛이 좋아 정말 좋은 샘이라고 정샘이라고 하였다고 전해 온다.
◎ 목비산 : (전설) 중국사람이 와서 조선에 큰 장수가 날것이라고 산목을 잘라 혈을 끊으므로 장수가 못나게 하였다 하며 끊을 적에는 피가 나왔다 하고, 산목을 잘랐다 하여 목베인 산이라 한다.
(전설) : 안터의 뒷산이 옥녀봉인데 앞산이 송장날이라 부락이 잘 되려면 송장날인 앞산이 없어야 되는데 이 산이 있으므로 부락이 불길하다고 전해온다.
◎ 보샘 : 물이 항상 깨끗이 흘러 나온다.
15. 신두리
직산군 삼동면 지역인데 마을 머리에 섶이 많이 있으므로 섶머리, 또는 신두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당시 다른 리와 병합없이 신두리로 천안군 입장면에 편입되었다가 군명이 개칭되므로 천안군 입장면 신두리가 되었다가 환원되었다.◎ 정제 : 섶머리에서 우물제를 지내는데 정월 초승 길일을 택하여 생기복덕을 보아 닫는 사람을 택하여 제관을 삼고 돼지머리, 삼색실과를 제물로 하고 이장 반장이 참석하여 축은 구두로 하고 우물 청소는 전날에 한다. 제사를 지낸후 동네사람이 모여 나누어 먹는다. ◎ 숲거리 : 섶머리 옆에 있는 뚝 바깥쪽에 여러 가지 나무를 많이 심어서 길게 숲을 이루었다. ◎ 밤나무정이 : 익선원에서 역전까지 밤나무밭이었다고 한다. ◎ 뽕나무정이 : 잠실이 있고 뽕나무가 많이 심어있었다고 한다. ◎ 까치골 : 숲이 우거져 까치가 많이 살었다고 한다. ◎ 우물제 : 신두리 2구에서도 정제를 올리는데 음력 7월 7석에 샘청소하고 샘제사를 지내는데 통돼지, 북어포를 놓고 이장 새마을 지도자가 지낸다. |
16. 신덕리
직산군 이동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구덕리 신대리가 병합하여 신덕리의 신자와 구덕리의 덕자를 따서 신덕리라 하고 천안군 입장면 신덕리가 되었다가 군명 개칭으로 천원군 입장면 신덕리가 되었었다.
◎ 구덕리(九德里) : 신덕리에서 가장 큰 마을. 입장역이 있었다. 신라 때부터 거북놀이가 시작된 곳이라고 전해온다.
◎ 반월리(半月里) : 구덕리 남쪽에 있는 마을. 지형이 반월모양으로 생겼다고 한다.
◎ 우물제 : 반중 부락에서 정제를 지낸다. 음력 정월 십사일 새이복덕을 보아 닫는 사람을 뽑아 제관, 축관 보조인, 3인이 지내고 삼색실과와 돼지머리, 포를 제물로 하고 당일 샘청소를 하여 덮어 놓았다가 저녁에 일찍 지낸다. 음식은 많이 장만하여 부락민이 나누어 먹으며 부락일을 협의 한다.
◎ 밤나무정이 : 구덕리 서쪽 길가에 있는 마을. 밤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 뽕나무재 : 뽕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17. 상장리
옷장터, 상장이라 하며 본래 직산군 이동면의 이동장 위쪽이 되므로 옷장터, 상장이라 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상장이라 하였으며 후에 입장면에 편입되었다.
18. 하장리
직산군 이동면 지역으로 이동장 아래쪽이 되므로 하장, 아래장터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하장리라 하여 입장면에 편입되었다. 싸전거리, 장거리등이 있다.
위례산(전설) 입장면 호당리(虎堂里)에는 백제군(百濟軍)이 고구려군에게 패하고 울었다는 위례산(慰禮山)이 있다. 위례산 둘레에는 지금도 옛날을 말해주는듯이 백제의 성터가 남아 있다. 한편 위례산정(慰禮山頂)에는 용(龍)이 놀았다는 용샘이 있는데 이 용샘은 공주(公州)까지 뚫려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고 서해(西海) 까지 이어졌다고도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흙으로 메워져서 샘바닥이 보이고 지름이 5m정도 밖에 안되는 조그마한 샘이지만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아서 신비감을 자아내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산마루에는 전쟁 때 백제 임금의 화살막이를 했던 3m정도의 높은 돌이 꽂혀 있고 동남쪽으로 내려오면 말구유로 쓰였다는 큰 돌이 두쪽으로 깨어진 채 있으며 동쪽으로는 어느 장군이 시험하기 위하여 돌에 주먹질을 하여 주먹모양으로 파진 바위가 있다. 어쨌든 전쟁과 관련이 많은 이 산에 또 하나의 기이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옛날 백제가 공주에 수도를 정하고 있을 무렵 어느 임금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날로 남침해 오는 고구려의 군사를 막기 위하여 왕은 이곳 위례산까지 와서 군사들의 사기를 높여주고 전쟁을 독려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때 백제의 임금은 용왕(龍王)의 아들이 사람으로 변신하여 온갖 재주를 다 지닌 분이었다. 그렇기때문에 왕이 이곳에 올때는 용(龍)으로 화(化)하여 공주에서 위례산 용샘까지 땅속 물줄기를 타고 단숨에 왔다고 한다. 그 때 백제의 국경선은 이곳까지 밀려와 고구려 군대는 틈만 있으면 백제를 공격했다. 백제왕은 산마루에 화살막이를 큰 돌로 만들어 세우고 그곳에서 백제군을 지휘했다. 백제왕은 천연적(天然的)으로 유리한 이곳의 지형을 이용하고 온갖 조화를 부려 고구려 군사들이 침입해 올 때마다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었다. 그야말로 고구려 군사들은 날로 피를 흘리고 쓰러졌다. 수천명이 넘게 죽어간 것이다. 고구려군은 그래도 계속 이 위례산을 쳐들어왔다. 그것은 고구려가 이곳을 점령하면 지금의 천안까지 고구려의 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이곳에서 너무 많은 피를 흘려 그대로 물러 설 수는 없었다. 고구려는 처음에는 500명씩 군사를 보내어 위례산을 공격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군사를 투입시켜도 고구려군은 계속 패하기만 했다. 백제군이 승리를 거듭하는 것은 두말 할것도 없이 백제 임금이 이곳까지 와서 여러가지 조화를 부려 전쟁을 지휘 하였기 때문이었다. 백제(百濟) 임금은 이처럼 날마다 새벽에는 용으로 변하여 공주에서 이곳 용샘으로 나와 전쟁을 지휘하고 밤에는 공주로 가서 낮에하지 못한 정사(政事)를 살폈다. 그렇기 때문에 백제는 날로 강한 나라가 되고 있었다. 그간 두려웠던 고구려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던 어느 날이었다. 이날도 백제왕은 새벽에 위례산(慰禮山)으로 군사를 지휘하러 간 날이었다. 왕실에서는 날마다 낮에는 어디론가 갔다가 밤에만 나타나는 임금을 이상하게 여겼다. 특히 불만이 많던 처남(妻男)은 동생인 왕비에게 임금이 간곳을 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왕비는 자기 오빠에게 임금은 사람이 아니라 용(龍)이라는 말을 했다. 가뜩이나 왕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왕의 처남은 임금을 죽이기로 작정했다. 임금의 처남은 용이 좋아한다는 제비를 잡아 낚시밥으로 만들어 가지고 임금이 용으로 되었다가 사람이 되어 나오는 강가로 갔다. 마침 해가지고 어둠이 강가에 내려앉기 시작했다. 임금이 돌아 올 시간이었다. 왕의 처남은 낚시를 강물에 던져놓고 용이 와서 물기를 기다렸다. 백제의 임금은 용(龍)이 되어 공주(公州)로 되돌아 오고 있었다. 하루종일 산성(山城)에서 소리를 지르며 전쟁을 지휘한 까닭에 그는 피로한데다 시장끼까지 느껴졌다. 그때 마침 용이 가장 좋아하는 제비가 보였다. 그는 너무도 배가 고팠기 때문에 얼른 그것을 물었다. 그러자 왕의 처남(妻男)은 힘껏 낚시대를 당겨 용(龍)을 낚았는데 그 용은 우성면 동대리 마을에 가서 떨어져 죽었다. 그뒤 용이 썩는 냄새가 너무나 지독하여 이곳을 구린내라고 전한다. 한편 용을 낚은 장소를 지금도 조룡대(釣龍臺)라고 전하며 임금이 죽은 이튿날 위례산 전투에서는 백제군이 패하고 말았다. 백제군은 무릎을 꿇고 통곡을 했다. 이처럼 싸움에서 지고 울었다 해서 이 산을 위례산(慰禮山)이라 했다고 전한다. 위례성(慰禮城) 입장면과 북면 경계에 있는 산이며 높이 524m이다. 토석혼축으로 쌓은 둘레 1696척 높이8척의 성채가 현재도 있고 그 안에 큰 우물(용샘)이 있다. 백제시조 온조(溫祚)가 그의 형 비류(沸流)와 함께 유리왕을 피하여 남쪽으로 와서 비류는 미추홀에 온조는 이곳에 각기 도읍하였다. 그때따라 온 신하가 오간(烏干) 마려(馬黎)등 열명의 신하가 되므로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하였다가 비류가 미추홀의 수토가 맞지 아니하여 도읍하지 10년만에 그 신하를 데리고 위례성으로 와서 합하게 되여 지역이 좁으므로 B.C14년에 한산으로 옮겨 백제가 되었다 한다. 1989년 5월 서울대학교 박물관팀이 일부 발굴하여 본 결과 백제 초기의 기와, 토기, 창촉, 철낫류, 노승 무늬토기가 출토 되었다. 이 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조선조 말에 사방 5리를 일인에게 광권을 주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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