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점토대 토기인들 높은 곳에 정착하다

吾心竹--오심죽-- 2009. 1. 6. 18:36

점토대토기인들 높은 곳에 정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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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이야기 | 2008/05/16 (금)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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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반제리(盤諸里) 유적
한반도 중남부지역의 초기철기문화의 시작과 관련하여 등장한 대표적인 고지성(高地性) 취락 유적이다. 점토대토기문화는『삼국지(三國志)』동이전(東夷傳) 한조(韓條)의 기사내용에 보이는 한(韓) 사회의 물질문화로 이해되며, 마한(馬韓)이 삼한 가운데 가장 먼저 등장하였을 것으로 보이므로 이 유적은 마한사회의 시작 무렵에 해당한다. 점토대토기문화는 대략 기원전 300년경을 전후하여 중국동북지역에서 한반도로 유입된 것으로 이해되는데, 초기 유적들은 반제리의 경우와 같이 산 정상부 등 고지에 입지하는 정형성을 보이고 있다.
이 유적은 고속국도 40호선 공사구간에 위치한 표고 98m의 능선 정상부에 해당되는데, 2004년~2005년에 걸친 조사에서 점토대토기 단계의 주거지 72기, 환호 1기, 토광묘 3기 등이 확인되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반제리(동경 127˚ 07´~31´, 북위 36˚ 53´~37˚ 09´)이며, 공사로 인해 원상은 남아 있지 않다.
2007년 현재 남한지역 점토대토기 출토 유적은 대략 160여개소에 달하고 있지만 취락유적은 매우 드물며, 그 가운데 주거지의 수는 가장 많은 편에 속한다. 그리고 주거지에 인접하여 동시기의 무덤이 확인된 것으로는 처음이다. 
 
반제리유적과 동일한 고지 입지 점토대토기 유적으로는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리 유적,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동학산유적, 충남 보령시 오천면 교성리 유적, 충북 음성군 망이산성, 대전시 보문산성, 경남 합천 영천리 등 다수가 있다.
 
점토대토기 문화를 소지한 이들은 왜 높은 산 위에 마을을 만들었을까? 물을 구하기 어려운 점을 비롯한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많았슴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정착할 무렵의 한반도 남부지역에는 지석묘를 무덤으로 사용하고 논농사를 생업으로 하던 청동기시대인들의 마을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마을 사이의 거리는 그들이 남긴 고인돌 등의 무덤의 분포로 짐작할 때 약 3~4km 정도로 지금의 전통 시골 마을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밀도였다. 아마도 토착 청동기시대 주민들과의 마찰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보문산성이나 망이산성 등 삼국시대 산성이 입지한 곳과 동일한 장소를 선택한 까닭은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점토대토기 관련 유적 현황은 국립김해박물관, 2004, <한국 점토대토기문화 자료집>이 좋은 참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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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과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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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이야기 | 2008/05/15 (목)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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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백제(百濟)는 기원전 18년에 건국하였다. 그러나 기원후 3세기 후반 무렵의 중국 기록인『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 동이전 한(韓)조에는 마한 지역 54개 국(國) 가운데 하나인 백제국(伯濟國)이 확인될 뿐 국가 단계의 백제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 두 기록의 내용상의 차이는 그간 모순으로 이해하여 삼국사기의 기록을 불신하기도 하였으나, 오히려 백제 건국 세력이었던 온조(溫祚)와 비류(沸流) 등이 고구려지역에서 남하하여 한강유역에 정착한 후 국가 단계의 정치체로 성장해 가던 과정을 상호 보완해주는 기록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처음 한강유역에 정착한 온조집단이 곧 국가 단계의 정치체였던 것은 아니므로 기원전 18년의 건국(建國)사실은 이후 백제국가로 성장한 건국 주체 세력의 정착 시점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 들여야 할 것이다. 3세기 후반경에 들어오면서 백제국(伯濟國)은 원거리 대외교섭 등에서 마한 지역의 주도세력으로 부상하게 되고 마침내 국가단계의 정치체로 성립하였다. 그러한 과정은『진서(晉書)』동이전 마한(馬韓)조에 잘 나타나고 있다.      
 
국가 단계 이전의 백제국(伯濟國)이 3세기 중후엽에 이르러 백제 국가로 성장한 것이 분명하므로 이들의 고고학적 문화 내용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음이 당연하며, 국가 이전 단계의 백제국을 초기백제라 부른다면 그것은 또한 마한의 일원이기도 하다. 고고학적으로는 이 시기를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라 구분하고 있으므로 결국 마한과 초기백제의 문화는 한강유역 및 중서부지역의 원삼국시대 고고학적 문화라 할 수 있다. 백제의 성장과정은 주변의 마한 혹은 예(濊)지역의 소국들을 병합·복속하여 지방으로 편제하는 과정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한 모습은 원삼국시대 취락, 분묘군, 그리고 생산 유적 등 고고학자료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마한의 시작과 관련되는 고고학자료는 초기철기시대의 점토대토기 문화이다. 점토대토기의 본 고장은 지금의 중국 동북지역의 길림(吉林) 및 요녕(遼寧)인데, 이들이 한반도지역으로 남하 정착하는 계기 가운데 하나는 기원전 300년경에 있었던 전국시대 연(燕)나라와 고조선의 군사적 충돌이다. 점토대토기의 한반도내 분포는 광범위하지만 가장 중심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은 금강유역이며, 수준 높은 주조기술을 자랑하는 세형동검, 다뉴세문경, 각종 청동의기 등이 밀집된 곳이기도 하다.
 
 위만조선의 멸망과 함께 한반도 북부지역에 낙랑등 한의 군현이 설치되면서 마한을 비롯한 진한, 변한 등 삼한지역은  그 영향으로 급격한 변화의 시기를 맞이한다. 기원전 1세기부터 이후 3세기 후반경까지는 마한지역에서 백제가 국가로 발돋음하던 시기임은 앞서 말한 바와 같다.
마한이야기는 점토대토기 문화부터 기원후 3세기 중후엽까지의 기간 동안 발견된 대표적인 고고학적 유적을 소개하면서 전개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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