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 반제리(盤諸里) 유적
한반도 중남부지역의 초기철기문화의 시작과 관련하여 등장한 대표적인 고지성(高地性) 취락 유적이다. 점토대토기문화는『삼국지(三國志)』동이전(東夷傳) 한조(韓條)의 기사내용에 보이는 한(韓) 사회의 물질문화로 이해되며, 마한(馬韓)이 삼한 가운데 가장 먼저 등장하였을 것으로 보이므로 이 유적은 마한사회의 시작 무렵에 해당한다. 점토대토기문화는 대략 기원전 300년경을 전후하여 중국동북지역에서 한반도로 유입된 것으로 이해되는데, 초기 유적들은 반제리의 경우와 같이 산 정상부 등 고지에 입지하는 정형성을 보이고 있다.
이 유적은 고속국도 40호선 공사구간에 위치한 표고 98m의 능선 정상부에 해당되는데, 2004년~2005년에 걸친 조사에서 점토대토기 단계의 주거지 72기, 환호 1기, 토광묘 3기 등이 확인되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반제리(동경 127˚ 07´~31´, 북위 36˚ 53´~37˚ 09´)이며, 공사로 인해 원상은 남아 있지 않다.
2007년 현재 남한지역 점토대토기 출토 유적은 대략 160여개소에 달하고 있지만 취락유적은 매우 드물며, 그 가운데 주거지의 수는 가장 많은 편에 속한다. 그리고 주거지에 인접하여 동시기의 무덤이 확인된 것으로는 처음이다.
반제리유적과 동일한 고지 입지 점토대토기 유적으로는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리 유적,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동학산유적, 충남 보령시 오천면 교성리 유적, 충북 음성군 망이산성, 대전시 보문산성, 경남 합천 영천리 등 다수가 있다.
점토대토기 문화를 소지한 이들은 왜 높은 산 위에 마을을 만들었을까? 물을 구하기 어려운 점을 비롯한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많았슴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정착할 무렵의 한반도 남부지역에는 지석묘를 무덤으로 사용하고 논농사를 생업으로 하던 청동기시대인들의 마을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마을 사이의 거리는 그들이 남긴 고인돌 등의 무덤의 분포로 짐작할 때 약 3~4km 정도로 지금의 전통 시골 마을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밀도였다. 아마도 토착 청동기시대 주민들과의 마찰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보문산성이나 망이산성 등 삼국시대 산성이 입지한 곳과 동일한 장소를 선택한 까닭은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점토대토기 관련 유적 현황은 국립김해박물관, 2004, <한국 점토대토기문화 자료집>이 좋은 참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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