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백제국, 마한의 동북에 자리잡다

吾心竹--오심죽-- 2009. 1. 6. 18:35

백제국, 마한의 동북에 자리 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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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이야기 | 2008/07/07 (월)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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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국(伯濟國), 마한(馬韓)의 동북에 자리 잡다
한강유역에 등장하는 철기는 그 시점이 다소 불분명하지만, 점토대토기의 후신(後身)으로서 대략 기원전 100년 무렵에 출현하는 경질무문토기(硬質無文土器)와 더불어 낙랑(樂浪) 등 중국 군현지역으로부터 들어 온 한(漢)의 단조(鍛造) 철기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무렵부터 고고학적 시대 구분상으로는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라 하는데, 주로 토기의 변화를 기준으로  3시기로 나눌 수 있다.
기원전 100년부터 기원전후까지는 경질무문토기만 사용되는 시기이고,
기원전후~기원후 200년까지는 경질무문토기와 더불어 격자무늬나 승문, 즉 새끼줄무늬로 표면을 두드린
타날 문토기가 함께 하는 시기이다.
마지막 기원후 200년부터 250년까지의 기간에는 낙랑토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새로운 형태의 솥인 장란형토기(長卵形土器)와 보조 취사용기인 심발형토기(深鉢形土器)가 등장한다. 장란형토기와 심발형토기는 풍납토성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있었던 마을의 환호(環壕), 즉 마을의 범위를 나타내는 인공 도랑 속에서 출토되고 있어 풍납토성의 축조시기를 가늠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한(韓)조에는 고고학 시기 구분의 원삼국시대에 존재하였던 여러 정치체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고 마한에 속한 백제국은 그 가운데 하나로서 8번째 등장하고 있다. 국(國)으로 이름 붙인 이들 정치체는 아직 국가(國家) 단계에는 이르지 않았으나 일정한 지역을 토대로 뭉친 크고 작은 마을들의 결합체로서 마을 사이에 위계도 확인되며, 주수(主帥)로 표현된 통솔자도 존재하였다. 삼국지 한전에 거명된 국들의 순서에는 그들의 지리적인 위치가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 북쪽으로부터 남으로 이어지는 차례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백제가 국가로 성장한 공간이 지금의 서울 송파구· 강동구· 강남구 일원임은 틀림없으므로 그 전신이었던 백제국의 위치 역시 이 일대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백제국의 모습은 결국 고고학적으로 드러난 한강유역의 원삼국문화를 통해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강유역의 원삼국문화는 중도유형문화(中島類型文化)라 불리기도 하는데, 1980년대 초반 춘천 중도(中島)유적에서 경질무문토기 등 새로운 고고학자료가 알려지면서 유래된 것이다.
중도유형문화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 토기의 양상과 더불어 출입구 달려 평면형태가 ‘여(呂)’자형 또는‘철(凸)’자형인 특징적인 주거지,
그리고 강변의 자연사구 표면에 냇돌을 얇게 쌓아 올려 만든 즙석식적석묘(葺石式積石墓) 등을 주요 문화요소로 한다. 중도유형문화의 분포는 북한강 및 남한강 중상류지역, 임진강 중상류지역 등이 중심이지만 출입구가 달린 주거지는 강원 영동지역에까지 넓게 펴져 있다.
 


이 문화의 역사적 성격은‘예계(濊系)’종족과 밀접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데, 강원 영서(嶺西)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이들은『삼국사기』백제본기(百濟本紀)에 백제와 적대적인 세력으로서 삼국사기 찬자들이‘말갈(靺鞨)’로 오인한 세력임이 틀림없다. 고고학자료에 종족과 관련된 명문(銘文)이 남아 있지 않는 한 특정 고고학자료를 남긴 종족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는 어려우며, 전술한 삼국사기와 같은 문헌사료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중도유형문화를 예계집단과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게 하는 또 다른 근거는 광개토왕릉비문(廣開土王陵碑文)에서 찾을 수 있다. 거기에는 영락(永樂) 5년(395) 광개토왕에게 빼앗긴 백제 북방의‘58성(城) 700촌(村)’의 이름과 함께 그 출신자들을 왕릉을 지키는 수묘연(守墓烟)으로 뽑아 배치하면서 종족명을 병기하고 있다. 백제의 북방은 대체로 한강유역의 북쪽지역으로 보아도 좋을 것인데, 이곳 출신자의 종족 이름에는‘한(韓)’과‘예(穢)’가 섞여 있어 한강유역 특히 한강 이북 지역은‘예’가 중심이면서 일부‘한’도 함께 있었던 곳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 기록된 온조집단의 정착 시점인 기원전 18년 무렵의 한강유역은 고고학적으로 중도유형문화의 이른 시기에 해당된다. 온조집단이 처음 한강유역에 이르렀을 때의 사정은『삼국사기』백제본기 온조왕 24년(6)의 기사에 잘 나타나 있다.“처음 도하(渡河)해 왔을 때에는 발 디딜 땅조차 없던 것을 (마한왕이) 마한의 동북지역 100리의 땅을 할애하여 자리 잡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백제가 마한에 대한 적대적인 행위를 하는 것을 마한왕이 항의하는 가운데 나온 표현이기는 하지만 처음 백제 건국 세력이 한강유역에 정착하던 때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마한의 동북 변방, 즉 마한지역과 예계 종족 지역 사이의 틈바구니였던 한강유역에 자리 잡은 온조집단은 이후 지속적인 성장을 거듭하면서 마침내『삼국지』동이전 한조에 마한의 여러 정치체 가운데 하나로 열거된 백제국으로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백제국의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는『삼국사기』백제본기 온조왕대의 일련의 대외 관계 기사들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처음 낙랑과 수호하고 평화롭게 지내다가 낙랑이 말갈, 즉 예계 집단을 앞세워 자주 침입해옴에 따라 낙랑 변방에 성책을 쌓는 것을 계기로 낙랑과 불화하게 된다. 낙랑으로 통하는 길을 막는 조치가 뒤 따랐다. 이에 한강 이남으로 천도하면서 마한에게 미리 천도를 알리고 예계 세력의 추장을 사로잡아 마한에게 보내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 간다. 그러나 마한과의 경계에 웅천책을 세우는 등 일련의 대립관계가 조성되고 이어서 마한의 통합이 약화되는 틈을 타 마한의 국읍을 병합한다. 이에 저항하는 마한 잔여세력을 소탕한 다음 그 민호를 한산의 북쪽으로 옮겨 후환을 없애면서 마침내 마한이 멸망하게 된다. 참고로 그 과정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온조왕 4년 : 낙랑에 사신을 보내어 우호관계를 맺다(遣使樂浪修好)
       3년 : 말갈이 북쪽 경계를 침범하다(靺鞨侵北境)
       8년 : 말갈적 삼천이 위례성을 포위하다(靺鞨賊三千來圍慰禮城)
             마수성을 쌓고 병산책을 세움에 낙랑태수가 사신을 보내어 말하기를 “이즈음까지 빙문하여
             우호를 맺임이 일가와 같았는데, 지금 우리 강역에 붙여 성책을 세우는 것은 혹 잠식하려는
             음모가 있는 것이리라. 옛 우호를 깨뜨리지 않으려면 성을 허물고 책을 부수어 의심되는
            바를 없애야 할 것이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일전으로써 승부를 겨루자는 것이리라.”
            이에 왕이 답하기를“설험하여 나라를 지키는 것은 고금의 상도인데, 이로써 어찌 화호를
            깨뜨린다 할 것인가? 그쪽 당국자의 생각일 뿐임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군사를 
            낸다면 소국 역시 그를 기다릴 것이다.”이로써 낙랑과 실화하였다. 
           (築馬首城竪甁山柵.樂浪太守使告曰, 頃者聘問結好意同一家. 今逼我疆造立城柵
            或者其有蠶食之謨乎. 若不渝舊好 隳城破柵則無所猜疑. 苟或不然 請一戰以決勝負.
            王報曰, 設險守國古今常道. 豈敢以此有渝於和好宜若執事之所不疑也. 若執事悖强出師則
            小國亦有以待之耳. 由是與樂浪失和.)
      10년 : 신기한 사슴을 잡아 마한에 보내다(獵獲神鹿 以送馬韓)
      11년 :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책을 습격하고 부수고 100여인을 죽이고 약탈하다...독산· 구산
             두책을 세워 낙랑으로 통하는 길을 막았다.
             (樂浪使靺鞨襲破甁山柵殺掠一百餘人...設禿山狗川兩柵以塞樂浪之路) 
      13년 :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의 축조 시점에 비추어 250년 이후의 어느 무렵으로 비정됨)               
             한산 아래 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호를 옮기다...마한에 사신를 보내어 천도를 알리다
             (就漢山下立柵移慰禮城民戶...遣使馬韓告遷都)
      14년 : 천도하다. 왕이 부락을 순무하여 권농에 힘쓰다...한강 서북에 성을 쌓아 
             한성민을 나누어 옮기다.
             (遷都. 王巡撫部落 務勸農事..築城漢江西北 分漢城民)
      15년 : 궁실을 새로 짓다...낙랑이 내침하여 위례성을 불태우다...종묘를 세우고 국모를 제사하다.
             (作新宮室...樂浪來侵焚慰禮城...立廟以祀國母)
      18년 : 말갈이 몰래 들어옴에 왕이 칠중하에서 쳐서 그 추장 소모를 사로잡아 마한에 보내고
             그 밖의 적은 모두 구덩이에 묻었다. 낙랑 우두산성을 치려다 큰 눈을 만나 되돌아 와다.
             (靺鞨掩至. 王帥兵逆戰於七重河 虜獲酋長素牟 送馬韓 其餘賊盡坑之. 王欲樂浪牛頭山城..
              遇大雪內還)
      24년 : 웅천책을 세우다. 마한왕이 견사하여 잘못됨을 꾸짖어 말하길“왕이 처음 건너 왔을 때에는
             발 디딜 땅 조차 없어 내가 동북 일백리를 내어 안착하게 하였다.
             왕이 후의로써 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거늘  지금 나라가 갖추어지고 백성이 모임에 적수가                되지 않는다 여겨 성지를 크게 설하고 우리 강역을 침범하려 하니 무슨 도의가 이와
             같은가?”이에 왕이 부끄러이 여겨 마침내 책을 허물었다.
             (作熊川柵. 馬韓王遣使責讓曰 王初渡河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
              其待王不爲不厚宜思有以報之. 今以國完民聚 謂莫與我敵 大設城池侵犯我封疆 其如義何.
              王慙 遂壞其柵)
     26년 : 마한이 점차 약해지고 위 아래가 서로 마음이 떠남에 그 세가 불능 지경인지라,
            만약 다른 세력에 병탄되면 순망치한의 후회가 될 것임에 먼저 들어가 취함으로써
            후의 어려움을 면하는 것만 못하리라 하고, 겉으로는 전렵을 핑계로 마한을 잠습하여
            마침내 그 국읍을 아울렀다.오직 원산·금현 두 성만이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馬韓漸弱 上下離心 其勢不能 又儻爲他所幷則 脣亡齒寒悔不可及 不如先入而取之 以免後難...
             王出師陽言田獵潛襲馬韓 遂幷其國邑. 唯圓山錦峴二城 固守不下)
     27년 : 두성이 항복함에 그 백성을 한산의 북쪽으로 옮겼다. 마침내 마한이 멸망하였다.
            대두산성을 쌓았다.(二城降. 移其民於漢山之北. 馬韓遂滅. 築大豆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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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의 고유 묘제 주구묘 등장의 수수께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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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이야기 | 2008/05/22 (목)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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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지역의 특징적인 무덤 형태는 주검을 매장한 목관 혹은 목곽 주변에 도랑을 둘러 묻은 곳을 표시하는 것으로 이를 주구묘(周溝墓)라 부른다. 구(溝)는 목관 등의 매장주체부를 덮었던 봉분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무덤위에 흙을 쌓아 표시하는 이러한 묘제(墓制)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지만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 가보면 흥미로운 점이 많다.  
 
중국의 묘제 변천을 살펴보면, <예기(禮記)>단궁(檀弓) 상(上)에서 잘 나타나듯 "은(殷)이전에는 묘위에 봉분하지 않았"으나 이후 봉토분구하는 것으로 변한다. 즉, 묘는 있으나 그것을 표시하지 않는 "묘이불분(墓而不墳)"에서 묘위에 흙을 쌓아 "봉토분구(封土墳丘)"하는 것으로 변하게 되었다. 기록상에 나타나는 최초의 봉토묘는 <묵자(墨子)> 절장(節葬)편에 나오는 하(夏)의 우(禹)왕 무덤 설명에서 보인다. 두께 3촌(寸)의 오동나무 관을 칡으로 묶어 땅을 파고 묻고 파낸 흙을 그 위에 쌓아 분(墳)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 고고자료로 확인된 바 없어 위의 문헌만으로 하대에 과연 분구가 확실히 존재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고고학자료상으로 분구가 확인되는 시점은 역시 은대인데, 그 무렵 묘상에 분이 등장하는 배경에 대해서는 중앙아시아 지역의 봉토묘인 쿠르간문화의 영향설도 제기되나 그보다는 묘에서 행하는 제사의 보편화와 함께 조상 무덤의 확인의 필요성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중국 묘제의 흐름에 비추어 지석묘 등의 한반도지역의 청동기시대 묘제는 지상에서 그곳이 무덤임을 분명히 알 수 있도록 하고 있는 점에서 매우 특징적이다. 거대한 바위로써 표시하는 지석묘는 물론이지만 점차 발견예가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서 무덤 주변에 도랑을 돌린 "위구석관묘(圍溝石棺墓)"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최군 경남 마산시 진동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 봉토묘의 존재는 그러한 봉토묘의 전형적인 예이기도 하다.




 
초기철기시대 점토대토기와 청동기가 부장된 무덤은 목관 주변에 돌을 채운 것인데, 그 주변에 주구가 있는 예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이들이 점토대토기인들과 함께 들어온 새로운 묘제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기원전 2세기 경에 이르러 매장주체부 주변에 도랑을 두른 주구묘가 등장하고 있어 얼핏 초기철기시대의 무덤과 차이를 보이고 있어 그 기원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지상에 무덤임을 표시하는 방식으로서 봉분이나 도랑이 만들어진 예는 이미 청동기시대에도 있었음을 상기하면 그 기원의 문제는 쉽게 풀린다. 주구묘는 청동기시대 이래의 토착 묘제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주구묘의 정확한 출현시기에 대해서는 아직 규명해야 할 점이 남아 있으나 현재까지 알려진 것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로 추정되는 것이 여기에 소개하는 영광 군동리 주구묘이다. 주구묘는 기원후 3세기 후반경~4세기 전반경까지 지속되지만 영산강유역과 같은 일부 지역에서는 5세기대까지도 지속된다. 지속기간이 긴 만큼 얼마간의 변화도 수반되는데, 이른 시기의 것은 매장주체부가 목관이 하나인 단독장의 형태이나 점차 2사람 이상을 함께 묻는 집단장의 형태로 변화하며, 금강이남지역에서는 3세기 후반 이후가 되면 성인들도 옹관(瓮棺)에 묻는 옹관묘가 목관묘를 대신한다.
 
최초의 주구묘   영광 군동 주구묘
한반도 원삼국시대 마한 지역의 특징적인 묘제인 주구묘의 기원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한 유적이다. 1998~1999년, 서해안고속도로 신설 공사 구간에 포함된 전남 영광군 대마면 원흥리 군동마을 276-46·46번지 일대의 표고 35m의 저평한 구릉 사면에서 발견되어 목포대학교 박물관이 조사하였다. 주구묘가 분포한 구릉의 능선부에는 청동기시대 송국리유형 단계의 주거지 및 원삼국시대 주거지 등이 함께 분포하고 있지만, 원삼국시대 주거지들은 주구묘들과 중복되지 않는다.
주구묘는 모두 20기가 조사되었는데, 그 가운데 관심을 끄는 것은 A-18호 주구묘이다. 이 무덤은 대부분의 주구묘들과 달리 구릉 사면의 아래쪽에 떨어져 있으면서 주구의 평면 형태 역시 사변이 모두 연결된 장방형으로 되어 있어 한쪽 변이 터진 말발굽형(馬蹄形)으로 된 나머지와 구분된다. 매장주체부에는 흑색마연호 1점이 부장되어 있는데, 이 토기는 형태상으로는 청동기시대의 적색마연토기호(紅陶)와 거의 같으나 재질이 흑색마연으로 된 것이어서 점토대토기로 대표되는 초기철기시대로 소급해 볼 가능성이 높다. 이와 비교될 수 있는 흑색마연호는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 다수 찾아 볼 수 있어 대략 기원전 2세기대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로써 이 주구묘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 가운데 가장 이른 것이 된다.
조사 완료 후 공사로 인해 유적은 없어져 서해안고속도로 영광 IC와 국도 23호선을 연결하는 진입로의 일부로 되었다. 




군동리 주구묘와 더불어 중요한 학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는 보령 관창리 주구묘군이 있다. 
보령 관창리(寬倉里) 주구묘
한반도지역에 주구묘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계기를 제공한 유적이다. 주구묘는 그간 일본열도에서만 확인되었는데, 야요이(彌生) 전기 무렵 킨키(近畿)지역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후 일본 전역으로 확산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관창리 주구묘 발견이전에도 매장주체부 외곽 일부를 주구로 두른 예는 천안 청당동(淸堂洞) 등에서 확인된 바 있었으나 그 시기가 일본열도에 비해 훨씬 늦은 3세기대여서 일본열도 주구묘와 관련성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관창리 유적은 1994~1995년에 걸쳐 충남 보령시 주교면 관창리 일원에 공단이 조성되면서 그 예정부지에 포함되어 고려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에 의해 발굴조사되었다. 유적의 대부분은 송국리유형 단계의 주거지 및 지석묘로 구성되어 있으나, 표고 22~16m의 저평한 구릉지에는 송국리유형 단계의 취락이 폐기된 후 주구묘가 조성되어 있었다. 조사된 주구묘는 모두 99기에 달하지만 매장주체부가 온전히 남아 있는 경우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주구 출토품의 대부분은 기원후 3세기대에 해당되지만 437호에서는 점토대토기 단계의 유물이 부장된 토광위석(목관)묘가 주구 내부에 남아 있어 만약 이것이 주구묘의 매장주체부라면 기원전 2세기대까지 올려 볼 수 있다. 발굴조사 후 공단이 조성됨에 따라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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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하한 고조선 사람들 정착에 성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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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이야기 | 2008/05/19 (월)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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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과 전국시대 중국 동북지역의 강자로 부상한 연나라 사이의 전쟁은 고조선의 패배로 끝나고 그 결과 서쪽 영역 2000여리를 상실하게 된다. 새로운 국경은 지금의 요녕성 동부 산악지대인 천산(千山)산지로 옮겨지고, 고조선이 잃은 땅에는 연의 장성이 축조되고 곳곳에 그들의 지배거점이 들어 선다. 그 때의 사정은 지금은 남아 있지 않으나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에 <위략(魏略)>이라는 기록을 인용한 주석에 전하고 있다.
고조선의 한 지역에 해당되었던 점토대토기 문화인들이 대거 남하하여 한반도 지역으로 내려 왔던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다. 처음 토착 청동기시대 사람들과 마찰도 있었으나 머지 않아 이들은 새로운 문물을 바탕으로 정착에 성공하였다. 각 지역의 지배자 집단의 무덤에 점토대토기와 더불어 다종 다양한 청동기가 다량으로 부장되고 있는 모습에서 그러한 사정이 짐작된다. 1967년도 대전시 괴정동의 한 과수원에서 우연히 발견된 무덤은 그 즈음 진행되고 있던 토착사회의 변화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서 종전 토착 청동기시대에는 중심지가 아니었던 곳에서 유력한 지배자의 무덤이 들어 서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점토대토기와 더불어 다량의 청동기가 나왔지만 아직 주조철기는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 소개하는  전북 완주군 갈동 유적은 괴정동단계에 이어지는 바로 다음 시기의 모습을 보여주는 고고학자료이다.      
완주 갈동(葛洞) 
황해도 봉산군 송산리, 충남 당진군 소소리, 충남 부여군 합송리, 전북 장수군 남양리 등과 더불어 한반도 남부지역 초기철기시대 분묘유적을 대표한다. 점토대토기가 부장된 토광묘는 철기의 공반여부에 의해 전·후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는데, 본 유적은 앞의 유적들과 함께 주조철기가 함께 부장된 후기에 해당된다. 주조 철부 및 철겸(쇠낫)은 요녕성 무순(撫順)의 연화보(蓮花堡) 유적, 평북 위원군 용연동(龍淵洞) 유적, 평북 영변군 세죽리(細竹里) 등에서 확인된 바 있있는데, 점토대토기와 함께 전국 연(燕)의 주조철기문화와 관련된 철기 및 타날문토기 등이 문화 내용으로 구성된 이른바 "세죽리-연화보유형문화"에 해당되며, 그 시기는 대략 기원전 2세기대로 추정된다.
갈동 유적은 전주시의 서남부에 위치한 완주군 이서면 반교리(盤橋里) 산 49-1번지, 표고 약 40m의 구릉 사면에 위치하는데, 전주시 관내 국도대체 우회도로 개설 공사 구간에 포함되어 2003년에 발견 조사되었다. 초기철기시대 토광목관묘 4기 등 유구와 함께 세형동검 거푸집, 동모 거푸집, 점토대토기 및 장경호, 동촉, 유리환, 주조철부, 주조철겸 등 다수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유적의 중요성을 인정하여 현장 보존되었다. 유적 인근 약 2km 범위 내에는 전주 반교리 유적, 완주 상림리(上林里) 유적 등 비슷한 시기의 중요 유적들이 밀집되어 있어  일대가 초기철기시대 혹은 마한 초기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임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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