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백제 왕흥사, 실체를 드러내다

吾心竹--오심죽-- 2009. 1. 6. 18:30

백제 왕흥사, 실체를 드러내다
조회(157)
유적 산책 | 2008/06/09 (월) 13:00
추천하기 | 스크랩하기
 
왕흥사는 수많은 백제의 사찰 가운데 그 이름과 함께 창건 시기, 왕의 행향(行香) 사실 등 관련 문헌기록이 남아 있는 극소수의 예로서 일찍부터 주목되었다. 1934년 부여 규암면 신리에서 「王興」명 기와가 알려져 왕흥사의 실재 가능성과 더불어 그 위치를 추정할 수 있었다. 이 사찰의 중요성을 인식한 국립문화재연구소가 2000년부터 본격적인 발굴조사에 착수한 이후 백제시대의 사찰터가 남아 있음을 확인함에 따라 2001년 사적 제427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2007년까지 모두 8차례의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백제시대 사찰과 관련된 것으로는 목탑지․회랑지․축대․진입로 등이 확인되었는데, 그 가운데 목탑지(14×14m)에서 확인된 심초석 및 사리장치구는 그 시기가 확실한 백제시대의 것으로는 최초일 뿐 아니라 한국의 삼국시대를 통 털어서도 처음이어서 그 역사적 중요성이 매우 높다. 




사리장치는 목탑 심초석(100×110×45㎝)의 남쪽 가장자리 부근에 마련한 장방형의 사리공(16×12×16㎝) 속에 안치되어 있었는데, 명문을 새긴 청동제 외합(外盒) 속에 은제 외호(外壺)을 넣고 그 속에 다시 금제 병(甁)을 넣은 방식으로 되어 있으나 사리는 확인되지 않아 처음부터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리공을 덮은 우진각 지붕 모양의 석제 뚜껑에는 진사(辰砂)(HgS)로 그린 동심원문, 연화문, 당초문계 문양 등이 남아 있다.
 






한 행이 5자씩으로 구성된 모두 6행 29자의 명문은 “정유년(577년) 2월 15일 백제 창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또는 목탑)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두 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丁酉年二月 / 十五日百濟 / 王昌爲亡王 / 子立刹本舍 / 利二枚葬時 / 神化爲三).”는 내용으로 풀이 된다. 이를 통해 왕흥사의 창건연대가『삼국사기(三國史記)』의 법왕(法王) 2년(서력 600)보다 이른 위덕왕(威德王) 24년(서력 577)이었음이 새롭게 드러났으며,『일본서기(日本書紀)』에 597년에 일본에 파견한 아좌태자(阿佐太子) 이외에 먼저 죽은 왕자가 있었던 것도 알았다.
 






사리공 주변에서 금은 세공품, 옥·운모·수정·유리·탄목(炭木) 등 장신구, 북제(北齊)의 상평오수전(常平五銖錢), 양(梁) 오수철전(五銖鐵錢) 등 8000여점의 공헌품이 함께 묻혀 있어 백제 공예기술의 높은 수준과 더불어 당시의 국제 관계 등을 짐작할 수 있다.
 








왕이 배를 타고 백마강을 건너가 향을 올렸다는 문헌기록과 부합되는 접안시설의 일부로 판단되는 유구가 확인된 점도 매우 주목된다. 이어질 조사를 통해 전모가 밝혀질 것으로 기대된다. 왕흥사 조사를 통해 지금까지 드러난 새로운 사실 그 자체도 대단한 것이지만 목탑의 건립과 관련된 심초석의 조영 공정의 변화, 사리장치와 심초석의 일체화 과정의 문제, 심초석의 지상화 과정 등 동아시아 고대 목탑 조영 변천사에 대한 체계적 연구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인쇄 |메일
답글(0) | 관련글(0)
http://blog.empas.com/sbpark58/28988351
 
익산 왕궁리에서 드러난 백제의 궁원 조경시설
조회(207)
유적 산책 | 2008/05/29 (목) 18:23
추천하기 | 스크랩하기
   익산 왕궁리 유적
왕궁리(王宮里) 유적은 백제 사비시기(538~660년) 궁성(宮城)으로서 석축 성벽으로 둘러진 정남북 방향 약 490m(동벽 492. 80m, 서벽 490.30m), 정동서 방향 약 240m(남벽 234.06m, 북벽 241.39m) 되는 장방형 평면으로 되어 있다. 그 축조 시기는 무왕대(武王 : 서력 600~641년 재위)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나 6세기 후반으로 소급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왕궁유적이 위치한 익산지역의 성격이나 궁성의 조영 배경에 대해서는 아직 일치된 견해가 없으나 적어도 지금의 부여에 위치한 사비도성(泗沘都城) 정궁(正宮)과는 다른 별도의 궁(別宮)이었음은 분명하다. 1989년부터 2007년까지 계속된 발굴조사 결과 백제시대에는 처음의 궁성 단계에서 왕실과 관련된 불교사찰의 단계를 거쳤으며, 백제 멸망 후 사찰 기능이 지속되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2006년도에 그 일부가 처음 확인된 정원 관련 시설은 궁성 단계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왕궁유적의 전체를 양분하여 그 남쪽에 전각이 배치되고 북쪽의 동반부는 후원(後苑), 서반부는 공방(工房) 등으로 활용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원 시설은 바로 남반부의 전각 지역과 북쪽 후원부의 경계지점에 해당된다. 2007년도 조사를 통해 더욱 자세한 내용이 밝혀짐에 따라 백제의 궁원(宮苑) 조영과 관련된 새로운 사실들이 다수 알려지게 되었다.
 


 
물을 끌어 들이는 시설, 수로, 괴석과 자갈 깔린 수조(水槽) 등으로 구성된 조경(造景) 시설, 그리고 수로로 둘러싸인 누정(樓亭)터로 추정되는 건물지 등과 함께 중국의 태호(太湖) 부근 특산으로 알려진 어린석(魚鱗石)과 흡사한 조경석이 확인되었다.
 




당시 중국의 궁원은 수려한 자연 경관을 상징적으로 재연하기 위한 조산(造山)·계류(溪流)·지호(池湖) 등의 조경시설과 함께 기이한 금수(禽獸)를 기르는 원(苑), 화초와 수목을 가꾸는 원(園) 등으로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왕궁유적의 시설은 그러한 궁원의 한 부분을 구성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아직 조사가 진행되지 않은 북반부는 궁원을 구성하는 요소의 하나였던 원림(園林)으로 추정된다.
    인쇄 |메일
답글(0) | 관련글(0)
http://blog.empas.com/sbpark58/28810040
 
한성시기 백제 왕묘역, 석촌동 고분군
조회(1019)
유적 산책 | 2008/05/14 (수) 15:13
추천하기 | 스크랩하기
 
석촌동 고분군
  이 고분군은 행정구역상 서울특별시 송파구 석촌동․가락동에 걸쳐 있는 것으로서 한성시기 백제의 중심 분묘역이다. 1916년도 발간『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게재된 분포도에 의하면 당시 지상에서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분묘는 “갑총(甲塚)”으로 명명된  봉분이 토축(土築)으로 된 것이 23기, 그리고 “을총(乙塚)”으로 명명된 봉분이 적석으로 된 것이 66기 였다.
발굴조사는 1911년 9월 야츠이(谷井濟一) 등에 의해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봉분의 경사가 완만한 원분(圓墳)으로서 봉분 표면 일면에는 냇 돌을 입혔으며, 매장주체부는 석곽이 없이 지평면 상에 목관만을 안치하고 흙을 덮은 양상으로 토기 파편 등이 발견되었다고 간략히 언급되어 있다. 그 후 1916년도에 조사된 석촌동 “제 1 적석총(積石塚)”은 높이 약 6m, 직경 약 27m의 규모로 기록되어 있을 뿐 그 밖의 자세한 양상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1917년도 조사된 “석촌리 6호분”, “석촌리 칠호분”은 봉분이 서로 연결된 것으로서 6호분은 매장주체부를 적석하고 봉토를 덮은 후에 분구 표면을 할석으로 즙석(葺石)한 방대형(方臺形)이고 7호분은 매장주체부에는 적석이 없으나 분구면에는 역시 할석이 즙석되어 있었다 한다. 이 때 “가락리(可樂里) 2호분”도 함께 조사되었는데, 이 고분은 산사면에 입지한 중앙 연도식의 횡혈식석실묘로서 출토유물은 소개되어 있지 않다. 1975년도 잠실지구유적 발굴조사의 일환으로 조사된 가락동 3, 4, 5, 6호분과 같은 성격의 6세기 중엽 이후의 신라 횡혈식석실묘로 판단된다. 
1969년도에는 봉토분인 가락동 1호분과 2호분이 발굴조사 되어, 석촌동․가락동 고분군의 봉토분의 구조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목관 또는 옹관 등 다수의 매장주체부가 서로 다른 시점에 조영된 후 하나의 봉토를 덮어 씌워 표면을 즙석한 것인데, 이는 1911년 최초로 조사된 것과 같은 구조임을 알 수 있는데, 역시 이와 동일한 봉토분으로는 1976년도에 조사된 석촌동 5호분과 석촌동 파괴분이 있다. 1974년에는 서울대학교박물관·고고학과에 의해 일제강점기부터 그 존재가 잘 알려져 왔던 석촌동 3호 및 4호 적석총에 대한 발굴조사가 있었다. 3호분에 대해서는 정비 복원을 위하여 1983과 1984년에 재조사가 있었다. 그 결과 3호분은 기단부의 폭이 55.5 x 43.7m에 달하는 기단식적석총(基壇式積石塚)으로서 후대의 교란이 심하여 매장주체부는 확인하지 못하였으나, 축조 기반층으로 판단되는 점토 섞인 자갈층에서 동진대(東晋代)의 청자 반구호 구연부편이 출토되어 근초고왕릉(近肖古王陵)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4호분은 제 2기단 위에 평면형이 횡혈식석실묘와 유사한 유구가 남아 있으나 훼손이 심하여 자세하지 않다. 보고자들은 횡혈식석실묘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그 내부에 묘광을 파 석곽을 만들고 그 속에 목관을 안치한 것으로 이해하였으나, 기단면 상에서 출토되는 기와편 등으로 미루어 횡혈식석실이 파괴되고 그 기초만 잔존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출토유물가운데 견부 문양대가 없는 경질의 직구단경호편이 있는 점으로 보아 한성 II기의 비교적 늦은 시기에 해당 비정할 수 있다.
1986년도에는 석촌동 3호분 정비 복원과 관련하여 민가등이 철거된 그 동쪽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토광목관묘, 즙석봉토묘, 옹관, 석관묘, 파괴적석총 등의 다양한 묘제가 확인되었다. 그리고 1987년도에는 4호분과 5호분 사이의 정비 복원지역을 대상으로 조사가 진행되어 석촌동 1, 2호분 등의 적석묘와 함께 여러 유구가 조사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석촌동 고분군에서는 토광묘, 옹관묘, 봉토묘, 기단식적석묘 등 다양한 백제의 묘제가 확인되었다. 현재까지 알려진 것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3세기 이후의 토광목관묘이며, 3세기 중·후엽경에는 여러 개의 매장주체부를 하나의 봉분으로 덮은 목관봉토묘가 등장하고, 4세기 후반경에 고구려 기단식적석총과 동일한 형태의 적석묘가 출현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급격한 도시화에 따른 훼손으로 인해 유구의 파악이 어려운 부분이 많아 묘제의 유형 파악이나 각 묘제의 출현 시점 등을 둘러싼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다.
1986년 아시아경기대회 및 1988년 서울올림픽 준비 과정에서 고분군을 관통하던 도로(“백제고분로”)를 지하화하고 석촌동 3호분, 4호분, 5호분 등을 복원하는 한편 발굴과정에서 새로 발견된 적석총 등을 정비하여 공원화 하여 사적 제 24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인쇄 |메일
답글(0) | 관련글(0)
http://blog.empas.com/sbpark58/28536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