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한성시기 풍납토성

吾心竹--오심죽-- 2009. 1. 6. 18:24

한성시기 백제의 도성 풍납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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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도성 | 2008/04/25 (금)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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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에 위치하고 있는 이 성은 몽촌토성과 더불어 백제 한성시기 도성을 구성하였던 대표적인 성이다. 성의 전체적인 평면 형태는 긴 변의 가운데가 팽창한 장방형에 가까운 것으로 마치 한강과 평행하게 놓인 배모양과 흡사하다. 1925년 대홍수로 인해 한강에 면하는 서쪽 성벽이 거의 전부 유실되어 남아 있는 성벽의 길이는 2,200m 가량되나 당초의 전체 길이는 3,470m 정도로 추정된다. 성벽의 기저부의 최대폭은 43m에 달하고 남아 있는 성벽의 최대 높이는 약 11m에 이른다. 성벽을 포함한 성 내부의 면적은 약 759,000㎡(약 230,000坪)이다. 1963년도에 사적(史蹟) 제11호로 지정 보호되어 왔으나 그 대상이 성벽부분만이어서 한국전쟁 이후 급격히 늘어난 서울의 인구 및 도시화의 급진전으로 인해 성내부는 가옥 등의 건물이 포화를 이루고 있는 실정이다.
1925년 대홍수 시에 용수병수제각청동초두 1점, 횡장병수제각청동초두1점, 금동과대금구 등 유물이 수습되어 백제의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으로 비정하는 일본인 아유카이(鮎貝房之進)의 견해가 제기되었으나,『삼국사기(三國史記)』백제본기 책계왕(責稽王) 즉위년(286) 기사에 나타나는 고구려 공격에 대비한 방수성(防戍城)인 “사성(蛇城)”으로 보는 이병도(李丙燾) 주장이 우세를 점하여 왔다. 이런 가운데 1964년 10월 19일~11월 4일(17일간)에 걸쳐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 김원용(金元龍) 교수에 의해 성내부에 대한 탐색갱 조사가 있었다.
김원용의 풍납토성 내부 포함층 조사를 통해 성의 점유와 관련되는 백제 생활층의 존재가 부분적으로 확인되었고, 이를 근거로 그는 당시 유력한 방수성설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防衛用城이라고는 하지만 平時에는 많은 一般民이 살고 있었던 半民半軍的 邑城이었다”는 견해와 함께『삼국사기』개로왕 21년(475)조의 한성(漢城) 함락 과정에 등장하는 왕도(王都)의 북성(北城)으로 비정하였다. 나아가 출토 토기로 보아 그 시기를 당시의 고고학적 편년에서의 “김해시기”와 대비되는 것으로 보는 한편, 토성의 축조 실연대는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그 初築을 제1세기경으로” 추정하게 된다. 풍납토성 포함층 조사에 대한 이러한 견해를 바탕으로 그 때까지 믿지 않는 것을 관행으로 하던 백제나 신라의 건국과 관련한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기사에 대한 신빙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고고학 편년체계 상에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 개념을 주창하게 된다. 삼국사기의 기록상으로는 “백제(百濟)”나 “신라(新羅)”가 건국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아직 완전한 국가에 이르는 도중에 있던 국가 성립의 과도기라는 것이다.
한국고대사 및 고고학에서 중요한 원삼국이라는 시대개념을 도출하게 한 계기를 제공하기도 하였던 풍납토성에 대한 관심은 이후 30년 기간 동안 실종되었다가 1997년도 토성내의 아파트 신축 공사장에서 백제시대 유구면이 남아 있음이 알려지면서 다시 고조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2008년 현재 풍납토성 내부 혹은 인접지점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곳은 모두 11개 지점에 이르는데, 성 내부 전체 면적에 대비할 때 약 10% 가량 된다.
그간의 주요 조사 성과로는 우선, 토성 축조 이전 단계에 존재하였던 환호취락의 확인을 들 수 있다. 3중으로 둘러 진 환호취락 내부에는 한강유역 원삼국시대의 전형적인 주거지 형태인 여(呂)자형 혹은 철(凸)자형 주거지가 확인되었으며, 환호 내부 출토 토기로 보아 그 폐기 시점은 3세기 중엽경까지 올려 볼 수 있다. 환호취락 이전 단계의 청동기시대 유구나 유물은 전혀 확인된 바 없어 인접한 하남 미사리유적의 경우와 달리 풍납동 일원은 앞 선 시기의 취락이 없던 곳에 새롭게 형성된 원삼국시대 후기의 신흥 취락으로 이해된다. 이 취락이 이후 성벽을 두르는 성곽취락으로 발전하였음은 두 말할 필요 없다. 환호의 폐기시점과 성벽 절개조사 시 성벽 축조토 내부에 혼입된 토기 등의 유물을 통해 볼 때 성벽의 초축 시기는 3세기 중·후엽을 더 올라 갈 수는 없음이 분명하지만, 한강유역에서 이처럼 성이 등장하는 정치·사회적 배경은 역시 백제의 국가 성립을 빼고 달리 생각하기 어려움은 물론이다. 성벽 축조에 동원되었을 인력 규모가 연 인원 약 100만명으로 추산되는 점을 감안하면 국가 성립 당시의 백제의 정치적 역량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조사를 통해 다량의 기와가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주거지, 제사 등과 관련될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지, 도로등의 유구와 더불어 중국제 수입 도자기, 오수전, “대부(大夫)” 토기, 지방에서 유입된 토기 등의 유물이 속속 확인됨으로써 풍납토성의 위상이 점차 확립되고 있다.
지금까지의 조사 내용으로 볼 때 풍납토성은 인접한 몽촌토성과 더불어 백제의 한성시기 도성을 구성하던 2개의 성 가운데 “북성” 혹은 “대성”에 해당되며, 이 성에는 왕을 비롯한 귀족관료, 사서(士庶), 장인층 등 국가 경영의 핵심계층이 거주하였을 것으로 이해된다. 이에 반해 몽촌토성은 규모는 작으나 방어면에서는 풍납토성에 비해 유리한 점 등으로 미루어 일단 유사시 왕을 비롯한 귀족관료 등이 입보(入保)하였던 성으로 볼 수 있다. 한성 함락 시의 사정을 전하는 삼국사기나 일본서기의 관련 기사의 내용으로 보면 “북성(北城)” 또는 “대성(大城)”인 풍납토성에 대비되는 “남성(南城)” 혹은 “왕성(王城)”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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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례성에 대한 오랜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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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도성 | 2007/11/26 (월)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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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동안 혼동되었던 백제 건국지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인 1989년도 KBS의 모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통해 백제의 첫도읍지가 충청남도 직산일대이라는 내용의 방송이 방영된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당시는 1988년 서울 올림픽 직후로서 그 준비과정에서 본격적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몽촌토성이 백제의 첫 도읍지인 하남위례성으로 떠오르고 있을 무렵이어서 그러한 방송 내용은 뜻밖이었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혼동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며, 그 역사는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시대의 역사를 일러주는 현존 자료는『삼국사기(三國史記)』와『삼국유사(三國遺事)』이다. 이 두 역사서는 모두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 이전의 기록이 전혀 전해오고 있지 않으므로 삼국시대 역사 이해에 있어 이 두 책의 영향력은 매우 크다. 백제의 건국 및 첫 도읍지에 대한 이해함에 있어서도 그러하다.『삼국사기』백제본기 온조왕(溫祚王) 즉위년조를 비롯한 일련의 기사에는 백제의 초도(初都), 즉 첫 도읍지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으로 되어 있고 그 위치에 대한 형상도 설명되어 있지만 그곳이 어디인지에 대한 언급은 없는 반면,『삼국유사』는 왕력표(王曆表)와 기이(紀異) 제2편 등에 위례성(慰禮城)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직산(稷山)으로 밝히고 있어 조선시대 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고증을 통해 그 위치가 확정되기 전까지 오랜 동안 혼동이 있었다.『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비롯한 조선시대에 발간된 지리지에는『삼국유사』의 내용과 동일하게 백제 초도지 위치를 충남 직산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실제로 충남 천안시 북면에는 ‘위례산성’이라는 지명도 아직 남아 있어 그 지역 향토사가를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백제 초도지 직산설을 견지하는 사람들의 근거가 되고 있기도 하다. 지금은 그러한 문헌사료 이외에 그 내용을 검증해 볼 수 있는 고고학자료도 확보할 수 있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으나 그렇지 못하였던 전근대 역사계에서는 백제 첫 도읍지 문제는 오랜 숙제의 하나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다산의 혜안은 바로 그러한 숙제를 명쾌히 풀어 주고 있으며, 그 논리 전개는 지금의 후학들에게 참고될 만한 것이 많아 그 골자를 옮겨 적어 본다. 다산의『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 실린「위례고(慰禮考)」는『삼국사기』백제본기,『북사(北史)』,『수서(隋書)』등의 기사를 종합하여 다음1)과 같이 위례의 위치를 비정하고 있다.

“○ 이때[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8년]에 말갈과 낙랑이 해마다 침략했는데, 이는 위례성이 한수(漢水) 북쪽에 있어서 두 적과 가까이 인접해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말한 말갈은 함흥(咸興)의 예인(濊人)이요, 낙랑은 춘천(春川)의 토착 지배자다. 위례는 한양 동북쪽에 있음이 분명하다. 위례(慰禮)라 함은 우리말에 광곽(匡郭)의 둘레를 울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위례와 발음이 비슷하다. 성책(城柵)을 세우고 흙을 쌓아 광곽을 만들었기 때문에 위례라고 한 것이다.
○ 온조왕 13년에 한수 남쪽으로 옮겼다. 바로 옛 광주읍(廣州邑)인데, 당시에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이라고 했다.
○ 온조왕 당시에 분명히 한수 북쪽에서 한수 남쪽으로 옮겼으니, 위례성은 본래 한수 북쪽에 있었음이 확실해 의심의 여지가 없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원년조에] 부아악(負兒岳)에 올랐다는 말 이하의 사실은 온조왕 13년의 일인데, 역사가가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운 것의 근본을 나중에 기록했기 때문에 원년(元年)에 기록된 것이다.
○ 정인지(鄭麟趾)의 지지(地志)에는 직산현(稷山縣)을 위례성이라고 했으니, 여지서(輿地書)를 이어받아 드디어 없어지지 않는 모범을 만들었다.
○ 가난한 선비가 높은 벼슬아치의 책이 틀렸다고 일일이 나무라는 셈이지만, 사실이 그렇다. .... 온조왕이 패수(浿水)·대수(帶水) 두 물을 건너 위례에 도읍했다는데, 직산 북쪽이 진실로 패수와 대수의 두물인가? 또한 온조왕이 한수 동북쪽 백성을 뽑아 위례성을 수리했는데, 직산이 한수 동북쪽에 있는가? 온조왕이 말갈과 낙랑을 피하야 한수 남쪽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그렇다면 직산이 말갈과 낙랑의 이웃이던가?『북사』와『수서』에 보면 백제의 시조가 옛 대방 땅에 나라를 세웠다고 분명히 말했으니, 이것[직산]이 어찌 또한 옛 대방 땅이겠는가? 만일 직산설을 따른다면 고금(古今)의 역사책에 기록된 것이 모두 틀렸을 것이니, 하나[직산설]를 고집하려고 백을 버릴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 정인지와 서거정의 기록이 진실로 잘못이라 하더라도, 그 옛 늙은 정승들의 말에는 반드시 근거가 있을 터이니, 그저 허망하다고만은 말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백제의 역사를 보면 개로왕(蓋鹵王)이 고구려의 침입을 예견하고 태자 문주(文周)를 먼저 남쪽으로 보내 도망치게 했는데, 개로왕이 해를 입자 문주가 웅진(熊津)으로 도읍을 옮겼다. 직산은 문주가 잠시 살았던 곳인 듯하다. 직산이 한성에서 남쪽으로 웅진까지 가는 도중에 있기 때문에, 여기서 잠시 머무르면서 북쪽으로 옛 도읍의 소식을 듣고, 남쪽으로 새 도읍의 일을 처리했음이 이치에 맞을 것이다.”

백제의 건국지, 즉 첫 도읍지가 어디였는가를 둘러싸고 고려시대 13세기 무렵『삼국유사』로부터 비롯된 혼동은 이처럼 다산의 고증에 이르는 약 600여년 동안 이어져 왔다. 고고학자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지금에는 백제의 건국지가 한강 하류의 옛 경기도 광주(廣州) 즉, 현재의 서울시 송파구·강동구 일원임은 분명하게 되었다. 고려~조선시대에 걸쳐 지식계의 다수 지지를 받았던 직산 위례성설은 고고학적 조사를 통해 사실과 다름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충남 천안 북면에 실재하고 있는 위례산성(慰禮山城)에서는 5세기 무렵의 백제토기편과 더불어 7세기 무렵의 사비시기 백제 삼족기 등이 출토되고 있어 한 때 백제의 산성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백제의 초도지와는 거리가 먼 것임이 드러났다2). 한성 함락 후 문주에 의해 잠시 활용되었을 것이라는 다산의 견해는 그러한 고고학자료와도 부합되는 탁견임을 새삼 알 수 있다. 


1) 丁若鏞(張志淵編1903),「慰禮考」,『我邦疆域考』(이민수 옮김1995, 범우사, 178~186).

2)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편) 2003,『위례산성』, 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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