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백제의 도성-한성 이야기

吾心竹--오심죽-- 2009. 1. 6. 18:09

한성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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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도성 | 2008/05/13 (화)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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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촌토성
 백제의 국가 형성에 대한 고고학적 접근의 계기를 촉발한 유적으로서 학사적 의미가 큰 이 유적은 사적(史蹟) 제297호로 지정되어 있다.『고려사(高麗史)』,『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등 조선 전기의 문헌기록에는 “몽촌(夢村)”이라는 지명과 함께 “고원성(古垣城)”, 즉 옛 토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학계에 소개된 것은 1916~1917년 조선총독부 식산국(殖産局) 산림과에 의해 실시된 바 있는 전국 임야 중 고적에 대한 조사를 통해서였다. 그 후 오랜 동안 학계의 관심 밖에 있다가 1975년 이기백(李基白)에 의해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 후보지로 거론된 것을 계기로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1983년에 이르러 1986년 아시아경기대회 및 1988년 서울 올림픽 등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유적 정비 복원을 위한 지표조사가 실시되고, 이어서 1984년도에는 단국대학교, 서울대학교, 숭실대학교, 한양대학교 등이 연합으로 시굴조사를 하였으며, 1985·1987·1988·1989년도에 각각 서울대학교 박물관이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일련의 조사를 통해 잔구상의 자연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다짐 성토 방식으로 축조한 성벽은 전체 길이가 2,285m, 성벽의 높이 12~17m이며, 성내의 총면적은 216,000㎡(약 67,400坪)으로 알려졌다. 2개소의 성벽 절개조사에 의해 최초 축성 시점은 3세기 후반경으로 추정할 수 있었으며, 5세기 전반경에 부분적인 수축(修築)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초축 시점 비정의 주요한 근거는 1985년도 동북지구 성벽절개 조사 시에 확인된 성내측에 퇴적된 성벽 붕락토(崩落土) 속에서 수습된 중국제 회유(灰釉) 전문도기(錢文陶器)였다. 당시까지 전문도기는 서진(西晉 : 265~316년)대의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최근까지의 자료에 의하면 3세기 중엽경부터 4세기 1/4분기까지 장강(長江) 중하류지역에 분포하던 것으로 이해된다.
연차적인 조사에서 확인된 것으로는 여(呂)자형 대형주거지를 비롯한 일련의 수혈주거지, 투석(投石)용 돌무더기, 다수의 저장공, 저수지 등의 유구와 더불어 백제토기, 중국제 도자기, 기와 및 와당, 고구려토기 등의 유물이 있다. 특히, 고구려토기의 확인은 구의동유적 출토 토기를 비롯한 한강유역 고고학자료 인식에 대한 재검토를 가능하게 하였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몽촌토성의 역사적 성격에 대해서는 최근까지 다양한 견해가 제시된 바 있으나, 풍납토성과 더불어 한성시기 백제의 도성을 구성하였던 2개의 성 가운데 하나임은 틀림없다.『삼국사기(三國史記)』개로왕 21년조 및『일본서기(日本書紀)』웅략기(雄略紀) 20년조 등 문헌사료로 보아 풍납토성에 남쪽에 위치한 “남성(南城)”으로서 한성 함락시점에는 왕이 이 성에 거주하고 있던 “왕성(王城)”으로도 불렸다. 근초고왕 26년(371)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고 돌아 와 옮긴 “한산(漢山)”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사비도성 이야기 5 : 신도시 건설의 주역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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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도성 | 2008/05/13 (화)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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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기 토기에 보이는 고구려적 요소 : 사비기 백제토기에 고구려의 영향이 있다는 지적은 일찍부터 있었으나 최근 능산리·가탑리 지점 등 나성 내부 다수 지점에 대한 조사 결과 나성 축조 이후 최초의 점유면에서 다수의 고구려계 토기가 출토되고 그러한 토기가 이후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모습이 층위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사비기에 유독 고구려토기의 영향이 두드러지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는 장차 자세한 연구가 필요하지만, 청원 남성골이나 대전 월평동 등 최남단의 고구려 점유유적에서 백제토기 제작 기법의 일종인 타날이 채용된 고구려토기가 발견되는 점으로 미루어 사비도성 최초 점유시점에 보이는 고구려계 토기는 한성 함락이후 고구려 치하에 있었던 백제계 주민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사비도성 건설 과정에 수복지역 백제계 주민들이 동원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또한 완성된 신도시에 이주한 인구의 다수 역시  그들이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구 도읍지인 웅진성이 사비로 천도한 이후에도 도시 기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으며, 지방 거점성의 하나인 북방의 중심성으로 남아 있기 위해서는 새로운 인구의 유입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비 천도 이후 일시적으로 나라 이름을 "남부여"로 고쳐  부른 데에는 당시의 그러한 인구 구성상의 사정과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다. 신도읍지 인구의 다수는 약 반세기 이상 고구려 치하에 있었던 백제인들이므로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의 공통 뿌리인 부여를 상기시킬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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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도성 이야기 4 : 죽은자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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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도성 | 2008/05/13 (화)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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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인의 무덤 : 사비도성을 둘러 싼 지금의 부여읍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백제시대 고분군은 모두 48개소에 걸쳐 680여기가 확인되었다. 그 가운데 분강·저석리 고분군을 제외하면 모두 사비시기 이후에 해당된다. 이들은 모두 사비도성의 외곽인 나성 밖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는『수서(隋書)』의례지(儀禮志)의“도성거주자의 무덤은 성으로부터 7리 밖에 두어야 한다(在京師葬者, 去城七里外)”기록과 부합된다. 일부 화장묘로 주장되는 유구가 나성 내부에 있으나 그 성격에 대해서는 재검토의 여지가 있다. 이를 제외하면, 사비도성 내부 거주자의 무덤은 나성 동문 밖의 능산리·염창리 일대에 집중 배치되며, 신분에 따른 분포  정형성이 엿보인다. 왕릉은 능산리(陵山里) 고분군, 왕실 혹은 귀족들은 능산리동고분군(陵山里東古墳群), 고위관리는 능산리 능안골 고분군, 사서인(士庶人) 들은 염창리(鹽倉里) 고분군 등에 배치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묘역의 입지는 북위(北魏) 낙양(洛陽)의 망산(邙山)과 비교된다.

 

 

 사비도성 이야기 4 : 죽은자의 공간 http://blog.empas.com/sbpark58/2851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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