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촌토성
백제의 국가 형성에 대한 고고학적 접근의 계기를 촉발한 유적으로서 학사적 의미가 큰 이 유적은 사적(史蹟) 제297호로 지정되어 있다.『고려사(高麗史)』,『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등 조선 전기의 문헌기록에는 “몽촌(夢村)”이라는 지명과 함께 “고원성(古垣城)”, 즉 옛 토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학계에 소개된 것은 1916~1917년 조선총독부 식산국(殖産局) 산림과에 의해 실시된 바 있는 전국 임야 중 고적에 대한 조사를 통해서였다. 그 후 오랜 동안 학계의 관심 밖에 있다가 1975년 이기백(李基白)에 의해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 후보지로 거론된 것을 계기로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1983년에 이르러 1986년 아시아경기대회 및 1988년 서울 올림픽 등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유적 정비 복원을 위한 지표조사가 실시되고, 이어서 1984년도에는 단국대학교, 서울대학교, 숭실대학교, 한양대학교 등이 연합으로 시굴조사를 하였으며, 1985·1987·1988·1989년도에 각각 서울대학교 박물관이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일련의 조사를 통해 잔구상의 자연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다짐 성토 방식으로 축조한 성벽은 전체 길이가 2,285m, 성벽의 높이 12~17m이며, 성내의 총면적은 216,000㎡(약 67,400坪)으로 알려졌다. 2개소의 성벽 절개조사에 의해 최초 축성 시점은 3세기 후반경으로 추정할 수 있었으며, 5세기 전반경에 부분적인 수축(修築)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초축 시점 비정의 주요한 근거는 1985년도 동북지구 성벽절개 조사 시에 확인된 성내측에 퇴적된 성벽 붕락토(崩落土) 속에서 수습된 중국제 회유(灰釉) 전문도기(錢文陶器)였다. 당시까지 전문도기는 서진(西晉 : 265~316년)대의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최근까지의 자료에 의하면 3세기 중엽경부터 4세기 1/4분기까지 장강(長江) 중하류지역에 분포하던 것으로 이해된다.
연차적인 조사에서 확인된 것으로는 여(呂)자형 대형주거지를 비롯한 일련의 수혈주거지, 투석(投石)용 돌무더기, 다수의 저장공, 저수지 등의 유구와 더불어 백제토기, 중국제 도자기, 기와 및 와당, 고구려토기 등의 유물이 있다. 특히, 고구려토기의 확인은 구의동유적 출토 토기를 비롯한 한강유역 고고학자료 인식에 대한 재검토를 가능하게 하였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몽촌토성의 역사적 성격에 대해서는 최근까지 다양한 견해가 제시된 바 있으나, 풍납토성과 더불어 한성시기 백제의 도성을 구성하였던 2개의 성 가운데 하나임은 틀림없다.『삼국사기(三國史記)』개로왕 21년조 및『일본서기(日本書紀)』웅략기(雄略紀) 20년조 등 문헌사료로 보아 풍납토성에 남쪽에 위치한 “남성(南城)”으로서 한성 함락시점에는 왕이 이 성에 거주하고 있던 “왕성(王城)”으로도 불렸다. 근초고왕 26년(371)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고 돌아 와 옮긴 “한산(漢山)”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