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사료 및 고고학자료에 의하면 사비도성 내부는 오부(五部)로, 그리고 각 부는 다시 5개의 항(巷)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궁남지(宮南池) 출토 목간(木簡)의 “서부후항(西部後巷)”등의 표현으로 보아 5부의 명칭은 전(前)․후(後)․상(上)․중(中)․하(下) 와 같은 위치명과 함께 동(東)·서(西)·남(南)·북(北)·중(中) 등 방위명이 병용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5항의 명칭 역시 그와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비도성 내부의 도시 공간 구획의 구체적인 모습은 아직 분명하지 않는 점이 많으나 최근까지의 발굴조사 결과 동서남북 등의 방위에 따른 기본 축선(軸線)에 의해 일정하게 구획되었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부소산성 남쪽기슭의 추정왕궁지 일대 도로유구, 궁남지 북쪽지점 도로유구, 군수리지점 도로유구 및 가옥배치, 능산리·가탑리 지점 도로유구 및 가옥배치, 쌍북리 북포유적 도로유구, 쌍북리 280-5번지 도로유구 등 지금까지 드러난 다수의 예로 보아 약 9m 노폭(路幅)의 대로(大路)와 약 4m 노폭의 소로 등 적어도 2개 이상의 도로가 남북 및 동서 방향으로 구획한 후 각종 시설물이 배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관북리 추정왕궁지 도로유구에 의해 구획된 공간을 기준으로 하면, 진북(眞北)을 기선(基線)으로 개설된 도로에 의해 구획된 부분은 동서86m, 남북103m의 장방형을 이루고 있는데, 도로의 중심선을 기준으로 하면 세로 113.1m, 가로 95.5m로 계측되고 세로 방향은 현재의 磁北에서 동으로 6.5°편향되어 있다. 이와 같은 구획이 도성내부 전체에 걸쳐 실시되었는지 여부는 장차의 자료를 기다려야 할 것이지만 군수리 지점, 궁남지 북쪽 도로유구, 능산리·가탑리 지점 등에서 드러난 도로유구가 위의 단위 구획을 도상으로 전개한 것과 대체로 일치하고 있어 일관된 구획이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군수리 지점에서 드러난 단위 가옥의 부지 규모인 남북28.2m 동서 25.8m의 구획은 위의 기본 구획의 약 16분의 1에 해당되며, 능산리·가탑리 지점에서 드러난 단위 건물의 부지는 이보다 작은 32분의 1 정도에 해당되어 도성내 민가 배치의 정형성을 엿볼 수 있다.
사비도성의 중심인 왕궁의 위치에 대해서는 일찍이 부소산성 남록의 현 부여연구소일대가 지목되어 왔는데, 최근까지의 발굴조사 결과로 보면 가능성이 높다. 1918년도 발행 지형도상에 관찰되는 구획의 흔적은 이 지역이 왕궁과 같은 특수지역임을 시사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최근 드러난 대형 건물지는 왕궁의 전각(殿閣)에 걸맞는 규모로서 사비기의 궁성으로 볼 수 있는 익산 왕궁유적에서도 그와 동일한 규모의 전각지가 확인되어 그러한 추정을 뒷받침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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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도성은 경역(京域)을 나성(羅城)으로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는 것으로서는 한반도 고대 도성사 상의 최초 예이다. 나성의 축조 시점을 천도 무렵인 538년 이전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므로 593년에 완성된 고구려의 장안성(長安城)보다 약 반세기 이상 이른 것이다. 사비도성의 경관을 구성하는 인공 구조물은 나성과 부소산성(扶蘇山城)을 들 수 있다.
사비나성(泗沘羅城)의 모습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반월성(半月城)은 석축으로 길이는 13,006척(6,086m)인데 곧 옛 백제의 도성이다. 부소산을 안고 축조되어 그 양끝은 백마강에 이른다. 형상이 반월과 같으므로 그렇게 부른다.”고 하였으며,『대동지지(大東地志)』에도 거의 같은 내용이지만 “지금은 토축의 유지(遺址)가 남아 있다.”고 하여 토축성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석축부가 허물어져 토축으로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현지답사 기록도 그와 다르지 않았으나 1978년 백제고도 정비계획의 일환으로 작성된 문건에서 처음으로 기존의 나성 평면이해와 다른 견해가 제시되었다. 종래 상정하지 않았던 서나성을 부소산성 서쪽-유스호스텔-관북리-구교리-유수지-동남리-군수리-성말리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이후 남나성의 존재도 상정하는 견해가 제기되었으나, 1999~2000년에 걸친 국도 4호선 공사에 수반된 이른바 ‘서나성’ 통과 지점에 대한 발굴조사 및 2000년 부여군의 의뢰로 실시된 사비나성 정밀지표조사 결과 서나성과 남나성은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결과적으로 사비나성의 평면구조 및 규모는 부소산성-청산성 구간의 북나성 0.9km, 청산성-석목리-염창리에 이르는 구간의 동나성 5.4km 등 총 6.3km로 밝혀졌는데, 앞의『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도 거의 일치한다. 나성에는 모두 5개의 문지가 확인되는데, 청산성의 문지와 일치되는 북문지, 석목리의 동나성 1문지, 능산리 뒷산의 동나성 2문지, 부여-논산간 국도 4호선이 통과하는 3문지, 염창리의 4문지, 그리고 동나성 끝 부분의 제 5문지 등이 그것이다.
나성의 성벽 축조는 먼저 퇴축(堆築)으로 내탁(內托) 성토부를 마련한 다음 성벽의 바깥부분은 폭 약 2m 가량의 석축 성벽으로 마감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이를 호성석축(護城石築)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었으나 석축부분이 성벽의 주체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이와 동일한 기법은 501년에 축조된 성흥산성(聖興山城)이나 사비기에 축조된 대전의 월평동산성(月坪洞山城) 등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성벽이 지나는 구간의 지반 특성에 따라 저지대에는 압밀침하배수공법(壓密沈下排水工法)의 일종인 지엽부설(枝葉敷設) 등의 특수공법이 적용된 곳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공법은 한성시기의 풍납토성의 성벽 내측 상면에서 확인된 일종의 배수시설로 추정되는 유구에서도 확인된 바 있으며, 일본 큐슈(九州) 미즈키(水城) 등 백제의 축성기술의 영향을 받은 유적에서도 적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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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진성(熊津城)은 금강 이남의 지금의 공주시 중심부에 있었음은 분명하지만 그 흔적은 극히 미미하여 왕궁의 위치를 비롯한 도성의 구조에 대한 이해는 깊지 못하다. 왕궁의 소재지로 유력시되는 곳은 공산성(公山城)인데, 이곳에서는 한성기의 늦은 단계의 한성양식 토기가 출토된 바 있어 천도 이전에도 지방지배의 거점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지금 남아 있는 성벽은 석축으로 되어 있으나 백제 당시의 성벽은 토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토축성의 일부는 공산성 가운데 가장 높은 지점에 해당되는 이른바 외성(外城) 지역에서 확인된 바 있다. 추정왕궁지로 이름 붙여진 곳에서 확인된 유구는 굴립주건물(掘立柱建物)과 초석건물(礎石建物) 등이 있으나 초석건물이 과연 웅진기의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으며, 굴립주건물 역시 평면형 등에 규격성이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중복이 심하여 왕궁으로 비정하기는 주저된다. 한성기에도 상대적으로 방어력이 높은 몽촌토성에 별궁을 두고 일단 유사시에 이어(移御)하였던 것처럼 공산성 내에 별궁을 두고 정궁은 성 밖에 두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추정왕궁지 그 자체를 공산성 안의 궁전지로 비정하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
공산성 밖은 지금의 시내를 관통하는 제민천(濟民川)에 의해 동서로 양분될 뿐 아니라 금강 합류지점에는 홍시 시에는 침수(浸水)의 위험이 있는 저습지였을 것으로 판단되므로 도시 공간이 매우 협소하다. 실제로『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동성왕(東城王) 대에 잦은 홍수로 도성내의 민가가 표몰(漂沒)하였던 사실과 제민천에 의해 동서로 나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로 볼 수 있는 웅진교(熊津橋)를 놓았던 일을 전하고 있다. 제민천 서쪽지역에는 성왕(聖王)대에 들어 대통사(大通寺)를 창건하게 되지만, 이점은 또한 동쪽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개발이 늦었던 것을 반영하는 지도 모른다.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공산성 외부에 왕궁의 후보지를 물색한다면 제민천 동쪽지역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지만 현재까지의 고고학적 조사에서는 아직 단서를 찾지 못하고 있다.
웅진성의 공간 범위와 관련해서는 일찍이 나성(羅城)이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적 있으나 이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며, 웅진기에 나성이 있을 가능성은 없다. 이 경우 경역(京域), 즉 도성의 범위를 추정하는 데에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이 분묘역의 분포이다. 분묘역과 도성 범위 사이의 관계가 잘 나타나는 것은 사비도성이지만 무덤을 도성 내부에 두지 않는 다는 인식은 웅진기에도 이미 존재하였을 것이다. 현재의 금강이남 공주시가지 주변의 고분군은 동쪽으로는 금학동(金鶴洞) 고분군, 서쪽으로는 송산리(宋山里) 고분군 및 인근 고분군 등이 배치되어 있다. 따라서 이들 고분군 안쪽의 공간 범위를 당시의 경역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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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도성 이야기1 : 나성 http://blog.empas.com/sbpark58/283937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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