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용두리 유적, 마한과 변진한의 철(鐵)무역 실체가 드러나다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이 함께 공존하던 시기를 삼한시대(三韓時代)라고도 하는데, 고고학적 시기구분상으로는 원삼국시대에 해당된다.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변진(弁辰)조에는 “나라에는 철이 나는데, 한(韓)·예(濊)·왜(倭)가 와서 얻는다. 물건을 사고 팔 때 철을 쓰니 마치 중국의 돈과 같은 것인데, 또한 낙랑·대방 등 2군에도 철을 공급한다.(國出鐵, 韓濊倭從取之. 諸市買皆用鐵, 如中國用錢, 又以供給二郡.)” 대방군은 후한 건안(建安) 연간(196~220년)에 요동(遼東)의 지역정권인 이른바 공손씨정권(公孫氏政權)의 공손강(公孫康)이 지금의 황해도 남부지역에 새롭게 만들었으므로 변진의 철이 한, 즉 마한에 공급되던 시기는 대략 3세기 전반경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문헌기록에도 불구하고 그간 마한지역에서 변진, 즉 낙동강 하류 및 그 서쪽지역에서 생산된 철이 공급된 실물 증거는 분명하지 않았다.
2008년 7월 10일, 충남 )아산시 탕정면 용두리(龍頭里)·명암리(鳴岩里) 일원에 조성되고 있는 지방산업단지 조성 부지에 대한 발굴조사 현장 설명회가 있었다. 아산 탕정의 삼성전자 타운으로 잘 알려진 이곳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는 여러 차례에 걸쳐 있었으며, 이미 소개한 바 있는 아산 갈산리 주구묘군도 그 한 부분이다. 충청문화재연구원이 조사한 이 유적은 갈산리 주구묘군과는 좁은 곡간 평야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어 시기적으로나 지역적으로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이번 발굴조사의 하이라이트는 원삼국시대 분묘 20여기이다. 주구(周溝)가 있는 것은 4기에 지나지 않지만 나머지 16기의 토광묘도 시신을 안치하는 매장주체부는 모두 목곽묘(木槨墓)로서 동일하다. 여기서 바로 영남지역 곳곳에서 성행하던 철기가 부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철기는 철모(鐵鉾)라 부르는 철제 투겁창이다. 긴 창몸의 아래쪽에 자루를 끼우는 공부(銎部), 즉 소켓이 있다. 공부에 비해 창몸이 2배 이상 길고 창몸과 공부의 경계지점이 밖으로 돌출한 모양이 특징적이다.
철기 뿐 아니라 영남지역 원삼국 후기(2세기 후반~3세기 말)의 특징적인 토기인 둥근 밑의 옹(甕)이나 굽다리가 달리고 목이 곧은 항아리인 대부직구호(臺附直口壺) 등도 함께 나와 영남지역과의 교류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와 닮은 유물은 영남지역에서는 대략 250년을 전후한 3세기 전반~후반 무렵에 해당되므로 용두리의 목곽묘의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연대는 인접한 갈산리 주구토광묘보다 약간 이른 편이다. 결국 동일한 무덤 축조 집단이 처음 용두리 지역에 무덤을 만들다가 시간이 경과하면서 약 500m 가량 동쪽에 위치한 갈산리 지역으로 묘역을 옮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무튼 용두리 유적으로 인해 그간 문헌기록뿐이었던 변진 철의 마한지역으로의 공급 사실을 고고학적으로 실증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철모를 비롯한 영남지역 특유의 철기는 연기군 동면의 응암리(鷹岩里) 유적이나 아산시 신법리(新法里) 등에서 알려진 바 있었으나 영남지역 것과 닮은 토기와 함께 나옴으로써 그간의 짐작을 더욱 분명하게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것으로만 아산 보면 용두리 유적을 필두로 아산만 인근 지역이 변진지역과의 교류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이해되며, 이는 또한 위의 문헌기록에 나오는 마한의 중심이 아산·천안 일대에 위치하였을 가능성을 높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