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아산 탕정 용두리 유적...마한과 변진한의 철 무역 실체가...

吾心竹--오심죽-- 2009. 1. 6. 18:28

아산 용두리 유적, 마한과 변진한의 철(鐵)무역 실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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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 산책 | 2008/07/11 (금)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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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용두리 유적, 마한과 변진한의 철(鐵)무역 실체가 드러나다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이 함께 공존하던 시기를 삼한시대(三韓時代)라고도 하는데, 고고학적 시기구분상으로는 원삼국시대에 해당된다.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변진(弁辰)조에는 “나라에는 철이 나는데, 한(韓)·예(濊)·왜(倭)가 와서 얻는다. 물건을 사고 팔  때 철을 쓰니 마치 중국의 돈과 같은 것인데, 또한 낙랑·대방 등 2군에도 철을 공급한다.(國出鐵, 韓濊倭從取之. 諸市買皆用鐵, 如中國用錢, 又以供給二郡.)” 대방군은 후한 건안(建安) 연간(196~220년)에 요동(遼東)의 지역정권인 이른바 공손씨정권(公孫氏政權)의 공손강(公孫康)이 지금의 황해도 남부지역에 새롭게 만들었으므로 변진의 철이 한, 즉 마한에 공급되던 시기는 대략 3세기 전반경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문헌기록에도 불구하고 그간 마한지역에서 변진, 즉 낙동강 하류 및 그 서쪽지역에서 생산된 철이 공급된 실물 증거는 분명하지 않았다.
 


2008년 7월 10일, 충남 )아산시 탕정면 용두리(龍頭里)·명암리(鳴岩里) 일원에 조성되고 있는 지방산업단지 조성 부지에 대한 발굴조사 현장 설명회가 있었다. 아산 탕정의 삼성전자 타운으로 잘 알려진 이곳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는 여러 차례에 걸쳐 있었으며, 이미 소개한 바 있는 아산 갈산리 주구묘군도 그 한 부분이다. 충청문화재연구원이 조사한 이 유적은 갈산리 주구묘군과는 좁은 곡간 평야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어 시기적으로나 지역적으로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이번 발굴조사의 하이라이트는 원삼국시대 분묘 20여기이다. 주구(周溝)가 있는 것은 4기에 지나지 않지만 나머지 16기의 토광묘도 시신을 안치하는 매장주체부는 모두 목곽묘(木槨墓)로서 동일하다. 여기서 바로 영남지역 곳곳에서 성행하던 철기가 부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철기는 철모(鐵鉾)라 부르는 철제 투겁창이다. 긴 창몸의 아래쪽에 자루를 끼우는 공부(銎部), 즉 소켓이 있다. 공부에 비해 창몸이 2배 이상 길고 창몸과 공부의 경계지점이 밖으로 돌출한 모양이 특징적이다.


 
 
철기 뿐 아니라 영남지역 원삼국 후기(2세기 후반~3세기 말)의 특징적인 토기인 둥근 밑의 옹(甕)이나 굽다리가 달리고 목이 곧은 항아리인 대부직구호(臺附直口壺) 등도 함께 나와 영남지역과의 교류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와 닮은 유물은 영남지역에서는 대략 250년을 전후한 3세기 전반~후반 무렵에 해당되므로 용두리의 목곽묘의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연대는 인접한 갈산리 주구토광묘보다 약간 이른 편이다. 결국 동일한 무덤 축조 집단이 처음 용두리 지역에 무덤을 만들다가 시간이 경과하면서 약 500m 가량 동쪽에 위치한 갈산리 지역으로 묘역을 옮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무튼 용두리 유적으로 인해 그간 문헌기록뿐이었던 변진 철의 마한지역으로의 공급 사실을 고고학적으로 실증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철모를 비롯한 영남지역 특유의 철기는 연기군 동면의 응암리(鷹岩里) 유적이나 아산시 신법리(新法里) 등에서 알려진 바 있었으나 영남지역 것과 닮은 토기와 함께 나옴으로써 그간의 짐작을 더욱 분명하게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것으로만 아산 보면 용두리 유적을 필두로 아산만 인근 지역이 변진지역과의 교류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이해되며, 이는 또한 위의 문헌기록에 나오는 마한의 중심이 아산·천안 일대에 위치하였을 가능성을 높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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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북방 세력의 실체 파악의 열쇠, 연천 학곡리 즙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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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 산책 | 2008/07/07 (월)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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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 학곡리(鶴谷里) 즙석식적석묘
 
백제가 국가 성립에 이르는 과정에서 잦은 마찰을 보였던 세력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말갈로 기록되어 있으나 그 실체는 아래에서 보는 것처럼 예계 종족으로 이해된다. 그 실체을 파악하는 데에 중요한 유적이 연천 학곡리 즙석식적석묘이다. 
 






즙석식적석묘(葺石式積石墓)는 무기단식적석총(無基壇式積石塚)·즙석묘(葺石墓)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데, 강변 사구(砂丘)를 이용하여 그 표면에 냇돌을 이용하여 쌓은 석곽을 매장주체부로 하고 주체부 및 주변을 역시 냇돌로 몇 겹 쌓아 올린 방식으로 만들어진 무덤이다. 그 분포는 북으로는 경기도 개풍군에서 남쪽으로는 충북 청원군에 이르는데, 지금까지 확인된 것은 모두 24기 가량 된다. 중심 분포지역은 임진강 중상·류 및 한강 중·상류 지역으로『삼국사기(三國史記)』백제본기에 백제와 잦은 군사적 충돌을 빚었던 ‘말갈(靺鞨)’과 백제의 전투가 잦았던 곳이다.  이는 이들 종족과 백제의 경계가 바로 이 지역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물론 말갈은 삼국사기 찬자들이 잘 못 인식한 것으로 그 실체는 예계(濊系) 종족이다. 
 


연천 학곡리 즙석식적석묘는 2002년 홍수 방지를 위한 제방공사 과정에서 구제조사된 것으로 행정구역상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학곡리 20·20-1 번지에 해당된다. 조사를 통해 매장주체부 4기가 확인되었으며, 타날문 호 및 경질무문토기 호를 비롯하여 낙랑토기편도 다수 수습되었다.  예계종족과 낙랑의 밀접한 관계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대 기사에서도 잘 나타나는데, 최근 가평 달전리 유적에서 드러난 낙랑 목곽묘, 가평 대성리 유적에서 출토된 화분형토기, 포천 금주리 유적에서 출토된 철경동촉 등 낙랑계 유물 등을 통해 고고학적으로도 뒷받침 된다. 학곡리에서  출토된 것으로 어깨부분에 거치(鋸齒)형의 누름무늬가 있는 타날문토기호 등은  대략 3세기 중·후엽경에 해당된다. 학곡리를 비롯한 즙석식적석묘는 이 시기 이후 소멸되는 양상을 보이는데, 이는 백제의 국가 성립과 시기적으로 맞물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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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에서 발견된 백제 주거지 2채가 말해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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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 산책 | 2008/06/13 (금)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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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대전 노은 3지구 국민임대주택단지 사업부지내에서 한성시기 백제의 특징적인 주거지 형태인 呂자형 주거지 2채가 발견되었다. 유적은 표고 400~500m의 산지 사이의 작은 계곡을 앞에 둔 산록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는 밭으로 경작될 뿐 이지만 바로 인근에는 자연 취락이 형성되어 있는 곳이다.
呂자형 주거지는 백제의 중심지인 지금의 서울지역 및 경기도, 강원도 등지에 주로 분포하고 있으나 최근 충청남도를 비롯한 중서부지역에서도 그 예가 알려지고 있다. 경기도 화성군 발안, 충남 아산시 배방면 갈매리 등. 대전지역에서 발견되기는 처음이거니와 현재까지 알려진 분포권 가운데서도 최남단에 해당되어 우선 분포 양상에 있어서 새로운 자료가 되고 있다.
 

 

                   

더구나 발견된 주거지 2채는 그 형태에 있어 매우 정교할 뿐 아니라 주변에 다른 주거지가 없어 일반적인 취락으로 보기는 어렵다. 주거지의 본채가 정사각형에 가깝고 네 모서리에 굵은 중심기둥을 하나씩 배치한 후 이들  사이에는 작은 기둥을 촘촘히 배치하는 등의 특징은 웅진시기 이후에 등장하는 이른바 벽주건물(壁株建物)과 매우 유사하여 주목된다. 벽주건물은 백제지역에서 발생하여 이주민들과 함께 일본열도에까지 확산된 건물축조 방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이번에 발견된 대전 노은동 주거지 2채는 그러한 벽주건물의 등장 과정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점에서 자료적 중요성이 크다.
 
                  

주거지 1채에는 실내에서 사용한 물을 바깥으로 배수하기 위한 하수시설이 설치되어 있어 매우 흥미롭다. 이러한 시설은 백제 주거지에서는 처음으로 알려진 것이지만 서울의 아차산 고구려 보류유적에서 확인된 바 있다.  
 
                 

주거지에서 출토된 유물로 보아 대략 5세기 전반~중엽경으로 비정되는데, 주거지 주변에 창고 등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고상가옥이 다수 배치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물품의 보관을 담당하였던 일종의 물류 거점 관련 시설로 추정된다.
대전지역을 비롯한 금강유역의 토착 주거지 형태와 분명히 차이를 보이는 한성시기 백제의 중앙지역 주거지 양식을 따른 것이 존재하는 점으로 보아 물류의 주체는 지방의 세력이 아니라 중앙 정부와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지방의 요소 요소에 설치된 관창(官倉)인 셈이다. 백제의 관창이 지방에서 발견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어서 그 자료적 가치는 매우 크다.
발굴조사 후 보존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그 절차가 진행되고 있으므로 직접 관찰해볼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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