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정림사, 그리고 농관용

吾心竹--오심죽-- 2009. 1. 6. 18:38

정림사, 그리고 농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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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와 동아시아 | 2008/07/30 (수)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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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림사(定林寺), 그리고 농관용(籠冠俑)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 부여.
대당평제탑(大唐平濟塔)으로 불리기도 하였던 오층석탑이 있다.
백제 멸망을 기념하여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이 “대당평백제국(大唐百濟國)” 비문을 새겨놓았던 까닭으로 그렇게 불렀지만 일제강점기 발굴조사에서 “대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大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어 절 이름이 정림사(定林寺)임을 알게 되었다.


                


백제의 선정지림(禪定之林), 정림사
사실, 정림사라는 절 이름은 중국에도 있다. 최초로 보이는 것은 유송(劉宋 : 420~479년)의 “종산(鍾山) 정림사”이다. 종산은 손권(孫權)의 동오(東吳) 이래 동진(東晋)·유송(劉宋)·남제(南齊)·양(梁)·진(陳) 등 육조(六朝)의 도성이었던 남경(南京)의 진산(鎭山)이다. 이곳에 정림사가 세워졌던 것이다. 이어서 “정림상사(定林上寺)”와 “정림하사(定林下寺)”도 보이는데 정림사가 발전 분화된 것으로 여긴다. 남제와 양대에도 정림사는 존속되었다. 정림사라는 이름은 선정지림, 즉 고승이 머물면서 불경을 강독하는 곳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정림사는 성왕이 추구하였던 백제의 선정지림이었던 셈이다.


                             
                               종산 정림사지로 추정되는 유적 모습

목탑을 장엄하였던 정경조소상(情景彫塑像), 농관용
정림사에서는 1979~1980년의 발굴조사에서 90여점의 소조상(塑造像)이 발견되었다. 중국의 무덤에서 부장용으로 만들어진 도용(陶俑)으로 알려졌던 농관용(籠冠俑) 4점이 포함되어 있어 일찍부터 주목을 받았다.
정림사지 출토 소조상은 목탑(木塔) 내부을 장엄하였던 정경조소상, 즉 주제 장면의 정경(情景)과 관련된 조소(彫塑)상(像) 이라는 사실이 최근 연구 결과 밝혀지면서 오층석탑 이전에 목탑이 있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농관을 쓴 인물상은 황제나 황후의 예불도(禮佛圖)에 등장하는 시종자들인 것이다.
이를 근거로 백제에도 농관을 쓰는 복식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목탑 내부 장엄으로 널리 유행하던 황제 예불도에 채용된 도상(圖像)으로서 농관을 쓴 인물이 포함되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정림사 농관용의 계통
정리사 농관 인물상과 매우 닮은 것이 북위(北魏)의 마지막 수도인 낙양(洛陽)의 국가 사찰인 영녕사(永寧寺) 목탑지에서 출토됨으로써 백제와 북위 사이의 대외 교섭을 통해 그러한 도상이 전해졌을 것으로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농관에 대한 최신 연구에 의하면 정림사 농관은 중국의 남조인 양(梁)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삼국사기(三國史記)』백제본기(百濟本紀) 성왕(聖王) 19년(541)조에 양(梁) 견사(遣使)에서 모시박사(毛詩博士), 열반경(涅槃經) 등의 경의(經義)와 함께 공장(工匠)·화사(畵師) 등 불사(佛事) 관련 문물을 구하였다는 기사는 바로 정림사지 출토 농관용을 비롯한 일련의 정경조소상의 제작을 필요한 기술 고문단의 초청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동위(東魏) 여여 공주묘 출토 농관용
                                             




농관과 금당(金璫)
농관은, 진(秦)의 군사(軍士)들이 착용하였던 변(弁)이 전한대(前漢代)에 책(幘)과 합쳐져 무변(武弁)으로 발전되고, 여기에 평상책(平上幘)이 결합되면서 재질 또한 가볍고 얇은 비단에 옻칠을 올린 혜문관(惠文冠) 형태의 무변대관(武弁大冠)으로 변하게 되었다. 후한(後漢) 만기(晩期) 이후 실전에서 무변이 점차 갑주(甲冑)로 대체되면서 무변대관은 마침내 농관(籠冠) 형태로 완성되어 진대(晉代)에는 무변·대관·농관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역대 관복제 관련 문헌자료를 보면, 농관은 일반적으로 무관(武官)이 착용하지만 황제의 고위 근신(近臣)인 시중(侍中)·산기상시(散騎常侍)를 비롯하여 궁정(宮廷)의 여러 시신(侍臣) 및 근위무사(近衛武士), 황제 승여(乘輿) 시의 어자(馭者 : 말을 모는 사람) 및 대가(大駕)의 가마꾼, 고취악인(鼓吹樂人) 등도 쓰되, 시중과 산기상시는 금당(金璫)을 붙이고 담비 꼬리(貂尾)를 꽂는다. 황제도 강무(講武)·출정(出征)·수렵(蒐獵)·대사(大射)·찬엄(纂嚴) 등 융사(戎事)에서 착용하는데, 이때는 금부선(金附蟬), 즉 매미 문양으로 장식된 금당을 붙였다. 이는 낙신부도(洛神賦圖)나 여사잠도(女史箴圖) 진대(晉代)를 시대배경으로 하는 고개지(顧愷之)의 그림에서도 확인된다.


   참고문헌
文東錫, 2006,「梁」 武帝의 佛敎政策에 대하여『東亞考古論壇』, 忠淸文化財硏究院.
朴淳發, 2008,「百濟 籠冠俑 硏究」(近刊).
張弓, 1997,『漢唐佛寺文化史』(上, 下), 中國社會科學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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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지방관의 인장이 최초로 발견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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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와 동아시아 | 2008/06/25 (수)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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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발견 백제 청동 직인(職印), 고창 오호리 유적
  
  2007년 가을 전북 고창군 오호리 “신지매”마을 부근 발굴현장에서 청동 도장 1매가 발견되었다. 사비시기 횡혈식석실묘에서 토기등과 함께 나온 최초의 백제시대 관인(官印)이다.
 






       
 백제 사비시기의 횡혈식석실묘 8기가 조사된 가운데 제 5호묘로 이름 붙여진 무덤에서 나왔다. 인면(印面)에 섬유질이 압착되어 있어 현 상태로는 완전하게 판독되기 어려우나 “○義將軍之印”으로 읽힌다. 인신(印身)은 한 변 2.5㎝ 내외의 정방형이고, 뉴(鈕)의 형태는 단면 방형의 반원형 뉴 가운데 원형의 인수공(印綬孔)이 있는 비뉴(鼻鈕)이다. 출토상태로 보아 천으로 싼 다음 나무로 만든 상자에 넣어 부장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문헌사료 상으로는 아래의 표와 같이 백제에서도 장군호(將軍號)가 사용되고 있었으나 그 직인이 발견된 것은 처음이다. 
  
  왕 이외의 백제의 관료가 중국으로부터 장군호를 받은 경우는 458년 유송으로부터, 490년 남제로부터, 그리고 495년 역시 남제로부터 등 3차례가 확인된다. 백제왕이 지방지배 방식의 일환으로 당시 국제질서였던 중국 왕조로부터의 책봉 절차에 의거 신하들을 중요한 지방에 장군으로 임명하였던 것이다.
  
 중국 정사의 기록에서 파악된 백제의 장군호는 다음과 같다.
 
관군장군(冠軍將軍), 정로장군(征虜將軍), 보국장군(輔國將軍), 용양장군(龍驤將軍), 영삭장군(寧朔將軍), 건무장군(建武將軍), 건위장군(建威將軍), 광무장군(廣武將軍), 안국장군(安國將軍), 무위장군(武威將軍), 광위장군(廣威將軍), 진무장군(振武將軍), 양무장군(揚武將軍) 등 13 호(號). 여기에는 출토 인장의 주인인 “○義將軍”은 보이지 않는다.

  남북조시대의 장군호는 매우 많고 번잡하다. 양(梁)에는 240호가 있었으며, 북주(北周)에도 43개 장군호가 있었다.『위서(魏書)』관씨지(官氏志) 에는 1품상의 대장군(大將軍)을 필두로 9품상의 비장군(裨將軍)에 이르는 장군호의 품계가 열거되어 있어 참고가 된다.
 
정로(征虜)·보국(輔國)·용양(龍驤)장군 등이 3품 상(上), 영삭(寧朔)장군은  4품 상(上), 건위(建威)장군은 4품 중(中), 건무(建武)·진무(振武)·양무(揚武)·광무(廣武)·광위(廣威)장군 등은 4품 하(下)에 각각 해당된다. 관군(冠軍)·무위(武威)·안국(安國)장군은 보이지 않으나, 범(凡) 장군은 3품 이하로서 정동(征東)·정서·정남·정북의 사정(四征) 장군, 진동(鎭東)·진서·진남·진북의 사진(四鎭) 장군, 안동(安東)·안서·안남·안북의 사안(四安) 장군, 그리고 평동(平東)·평서·평남·평북의 사평(四平) 장군의 순으로 품계가 낮아지나 대체로 5품 이상에 해당되는 점으로 미루어 3~4품으로 볼 수 있다. 백제왕들이 받았던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 등 사정·진·안·평에 “대(大)”가 더해지면 2품 이상이 된다.

  최근 고창 출토 도장과 매우 닮은 양(梁)대의 장군인이 조윤재 박사 (고려대학교 연구교수)에 의해 학계에 소개된 바 있는데, 그로 보면 고창인장의 미판독 글자는 “복(伏)”임이 틀림없다. “복의장군(伏義將軍)”의 품계는 아직 정확하지 않지만 위에 든 장군호들과 대차 없을 것으로 이해된다.
 
                                              
  

  아래의 표에서 드러나듯 남북조의 말기인 6세기 4/4분기 이후부터는 백제왕의 작호에서 장군호가 소멸되고 있다는 것이다. 전란이 빈번하였던 시기에는 장군의 막부가 곧 행정을 겸하고 있는 있었던 남북조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장군호가 포함된 지방 장관 역시 중국의 남북조 말기 이전이었을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 시기는 중국측 인장의 동일 예에 비추어 양(梁)과 병행하던 6세기 전반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 도장은 형태적 유사성, 장군호 그 자체, 자획 등 여러 면으로 볼 때 중국 현지에서 제작된 것으로서 장군 수작(授爵)과 더불어 받은 인수(印綬)로 보인다. 국제질서를 활용하여 당시까지 장악력이 취약하였던 지방에 대한 지배력를 강화하였던 백제 중앙의 정치력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이로써 그간 문헌기록만으로는 미심(未審)하였던 백제의 지방지배 방식의 하나로서의 왕·후제(王·侯制) 및 그와 결부된 장군호 수여의 실제에 다가 갈 수 있게 되었다.    
  
고창 도장은 5세기 중엽경부터 시작되어 6세기 중엽경에 이르는 약 1세기 가량의 기간 동안의 백제의 지방지배 방식에 있어 당시 중국의 남북조시대의 그것과 매우 닮은 제도가 행해졌음을 실증하는 자료인 셈이다. 군사와 행정이 혼연 일체가 된 장군 막부 체제는 그간 본격적으로 검토된 바 없었던 점에 비추어 이 자료의 중요성은 매우 크다. 

   
연대
책봉국
       책    봉     내   용
372
東晋
近肖古王(餘句):鎭東將軍領樂浪太守
386
東晋
辰斯王(餘暉):使持節都督鎭東將軍百濟王
416
東晋
腆支王(餘映):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將軍百濟王
420
劉宋
腆支王(餘映):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百濟王
430
劉宋
毗有王(餘毗):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百濟王
457
劉宋 
蓋鹵王(餘慶):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
458
劉宋
(餘紀)冠軍將軍, (餘昆)征虜將軍, (餘暈)征虜將軍, (餘都)輔國將軍
(餘乂)輔國將軍, (沐衿)龍驤將軍, (餘爵)龍驤將軍, (餘流)寧朔將軍
(糜貴)寧朔將軍, (于西)建武將軍, (餘婁)建武將軍
480
南齊
東城王(牟都):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
490
南齊
(姐謹)冠軍將軍都將軍都漢王, (餘古)寧朔將軍阿錯王
(餘固)建威將軍弗斯侯, (餘歷)龍驤將軍邁羅王
(高達)龍驤將軍帶方太守, (楊茂)建威將軍廣陵太守
(會邁)廣武將軍淸河太守
東城王(牟大):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百濟王
495
南齊
(沙法名)征虜將軍邁羅王, (贊首流)安國將軍辟中王
(解禮昆)武威將軍弗中侯, (木干那)廣威將軍面中侯
(慕遺)龍驤將軍樂浪太守, (王茂)建武將軍城陽太守
(張塞)振武將軍朝鮮太守, (陳明)揚武將軍
502
東城王(牟大):征東大將軍
521
武寧王(餘隆):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百濟王
524
聖王(餘明):持節都督百濟諸軍事綏東將軍百濟王
562
 陳
聖王(餘明):撫東大將軍
570
北齊
威德王:使持節侍中驃騎大將軍帶方郡公百濟王
571
北齊
威德王: 使持節都督東靑州諸軍事東靑州刺史
581
威德王:上開府儀同三司帶方郡公
624
武王:帶方郡公百濟王
641
唐 
義慈王:柱國帶方郡王百濟王
 <중국 역대 왕조로부터 받은 백제의 관작호 일람표>
(坂元義種, 1978,『古代東アジアの日本と朝鮮』, 吉川弘文館.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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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인들도 차를 마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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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와 동아시아 | 2008/06/16 (월)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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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백제 사람들도 차를 맛보았을 것이다.
 
Camellia sinensis O. Kuztze, 차(茶)의 학명이다.
전세계의 차과 식물은 23속(屬) 380여종,
그 가운데 중국의 윈난(雲南), 꿰이조우(貴州), 스촨(四川) 등지에 15속 260여종이 분포하고 있다.
중국의 서남부 지역은 차의 원산지이자 고향이다. 이곳에는 수령 1700년된 자연산 차나무가 남아 있어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오늘날 전세계 160개국의 약 30억 인구가 차를 마시고 있으며,
차를 생산하는 나라는 50여개국에 이른다.
그렇다면, 인간은 언제부터 차를 마셨을 까?
중국의 전설상 농업신인 신농(神農)이 여러 식물들의 독성 여부를 시험하다
하루에 72가지의 독을 만나 차를 얻어 해독하였다는 내용이 전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신석기시대부터 인간이 이용하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차는 일년에 3차례 새싹이 돋는다. 봄, 여름, 가을에 각각 춘차, 하차, 추차를 딸 수 있다.
가을에 흰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섭시 5도 이하의 겨울철에는 생육이 정지된다.
이듬해 가울에 열매가 떨어져 다음해 봄에 발아한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차는 사계절의 변화가 있는 곳에서 생육한다.
 


신석기시대 말까지 차는 장강유역 이남에서만 생장하였으나, 상주(商周)시대에 와서 황하유역으로 전파되었다.
청(淸) 고염무(顧炎武)의 <일지록(日知錄)>에는 "전국시대 말기에 비로소 차마시는 풍습이 황하유역에 들어 왔다."고 한다.
그러나 위진남북조시대까지만 해도 음차(飮茶) 습속은 남방에만 유행하였을 뿐 북방에까지 보급되지는 않았다.
당시의 기호 음료 습속은 "남차북락(南茶北酪)", 즉 남방지역은 차를 마시고 북위 등 북방지역에서는 유(乳)제품을 즐겼다.  
당(唐)대에 들어 마침내 음차는 중국의 전역에서 유행하게 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흥덕왕(興德王) 4년(829)
"당에 조공하고 돌아온 김대렴(金大廉)이 차의 씨앗을 회사(廻使)받아 오자 왕이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는 기록이 전하므로 이 때가 바로 국산차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은 805년 최증선사가 중국 절강 천태산 국청사에 유학하고 돌아 오면서 차 열매를 가지고 와
오오미(近江 : 지금의 滋賀縣) 지역에 심은 것이 차 재배의 시작이다. 
 
그러나 일찍이 불교의 전래와 더불어 차가 한반도지역으로 전파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백제는 384년에 처음으로 불교를 받아 들인다.
중국의 장강이남 지역 역대 정권과 밀접한 교류를 가졌던 백제가 당시 유행하던 음차 습속을 놓쳤을 리 없기 때문이다.
백제가 중국의 위진남북조시대 각 정권과 교섭한 횟수는 평균 4년에 한번 꼴이니, 그야 말로 중국의 문물에 정통하였다.
백제지역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는 중국제 자기들에서 그러한 추정이 가능하다.
삼국 가운데 중국제 도자기를 가장 많이 수입하여 사용하였던 것이 바로 백제이다.
그 가운데 "앵(罌)"이라 불렀던 특이한 주자(注子)와 완(碗)은 음차용 그릇으로 볼 수 있다.
도자기의 수입에는 그 음식문화도 함께 따라 오는 법이므로
백제인들이 이미 한성시기(3세기 중후반~475년)
중국의 동진이나 남조의 음차습속을 받아 들였을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당시의 차마시는 풍습은 어떠했을 까?
당대 이전까지의 음차 습속은 지금의 그것과는 달랐다.
찻잎을 그대로 말리거나 볶아서 뜨거운 물에 불려 차즙을 우려내는 방식이 아니었다.
차잎을 분말로 간 다음 쌀가루로 쑨 풀과 섞어 차병(茶餠)을 만들어 말려 두었다가
차를 마실 때는 차병을 찧어 차관(茶罐)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갱(羹)으로 만들고 
거기에 파, 생강, 산수유, 소금 등을 더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음차 습속은 한대이후 지속되어 당에까지도 일부 이어지고 있었다.
차에 다른 향신료나 염분을 가하는 방식에 대해  
당 육우(陸羽)의 <차경(茶經)>에서는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반대하였지만
전통적인 음차 습속에서는 소금을 타서 마시는 것이었다.
 
그러한 연유로 <광지(廣志)>에는
"생차잎을 달여 마시는 것을 명(茗)이라 하고, 산수유 등 다른 재료를 더하여 먹는 것을 차(茶)라 한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명(茗)은 늦게 딴 찻잎을 일컫는다는 설도 있다.
육우의 <차경>에는 차를 따는 시기의 이름과 늦음에 따라
 "첫번 째는 차(一曰茶),
두번 째는 가(二曰),
세번 째는 설(三曰 ),
네번 째는 명(四曰茗),
다섯번 째는 천(五曰荈)"이라 하였다. 
 
참고문헌 : 陳文華, 2004, <長江流域茶文化>, 湖北敎育出版社.
               張承宗, 2002, <六朝民俗>, 南京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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