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토기에 반영된 식생활 변화, 접시의 운두에 시간이 묻어 있다.
토기는 식생활의 도구이다. 인류가 처음 토기를 만들어 쓴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2000년.
인류 문명의 중심으로 각광받아 왔던 근동지역에서가 아니다. 놀랍게도 가장 이른 토기는 일본, 연해주 등 한반도 주변의 동북아시아에서 나왔다. 농사짓기보다 먼저 토기가 등장한 까닭은 식량자원의 계절적 편중을 극복하기 위한 저장의 필요성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는 근거가 된다.
아무튼 그 때 이후 인간의 식생활과 토기는 불가분의 관계였다. 문화의 발전과 더불어 식생활은 풍부해졌을 것인데,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점차 토기의 종류가 다양해지는 모습을 통해 뒷받침 된다.
백제토기는 백제인들이 만들어 쓰던 토기이다. 정확히 말하면 백제가 국가 성립을 이룬 기원후 3세기 중·후엽부터 660년 멸망하기까지의 기간 동안 백제지역에서 제작되고 사용되었던 것이다. 토기의 종류는 어림잡아 20여종에 이르지만, 그 가운데 주요한 것들을 보면 아래의 그림과 같다. 시간이 흐르면서 변하지 않는 것이란 없는 법. 토기의 종류나 생김새도 예외는 아니다.
토기의 생김새 변화에서 시간의 변화를 읽어내는 일은 고고학의 기본적인 방법의 하나다. 얼핏 보면 분간이 쉽지 않으나 찬찬히 관찰하고 비교해보면 일정한 변화의 정형이 나타난다.
식탁위에 올라오는 횟수가 가장 많은 그릇 종류의 하나는 접시류일 것이다. 백제인들이 사용하였던 접시로는 얕은 굽다리가 달린 고배(高杯), 바닥에 3개의 다리가 달려 삼족기(三足器)라 부르는 것, 그리고 뚜껑과 함께 사용되는 개배(蓋杯) 등이 있다.
고배는 신라나 가야에도 있지만 백제 것은 굽다리의 높이가 훨씬 낮을 뿐 아니라 굽다리에 투창이라 부르는 구멍 장식이 없어 지금의 눈으로 보면 볼 품이 다소 떨어진다. 그러나 굽다리가 낮은 백제고배는 발달된 반상(盤床) 문화의 소산이다. 신라나 가야지역에 비해 일찍부터 반상문화가 들어 왔던 까닭에 굽다리가 높은 고배는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 삼국 가운데 유독 고구려에만 고배가 없는데, 고분 벽화에 잘 묘사되어 있듯 고구려에는 반상문화가 일찍 발달하였던 때문이다. 신라나 가야도 시간이 지나면서 고배의 굽다리는 점차 낮아져 6세기 후반경에 오면 백제 것과 거의 같은 짧은 굽다리의 단각고배가 유행하고 통일신라시대 8세기 이후에는 고배는 완전히 자취를 감춘다.
한편, 백제토기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것이 삼족기이다. 삼족기가 있는 곳에 백제가 있었다고 하여도 좋을 트레이드 마크다. 그 기원이 아직 분명치 않지만 중국 기원일 가능성이 많다. 백제 국가 성립시기부터 멸망할 때까지 오랜 시간 만들어 쓴 까닭에 백제토기의 시간적 변화를 읽는 데에 매우 유용하다. 아래 그름은 삼족기의 시기적인 변화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자세히 보면 운두가 낮아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삼족기의 변천>
삼족기 이외에도 고배나 개배등의 다른 접시류의 변화도 운두에 잘 나타난다. 운두가 점차 낮아 지는 것이다. 운두가 높으면 담기는 음식물의 양이 많고 낮으면 낮을 수록 그 양이 적을 것이다.
대략 3세기 후반~4세기 경 등장할 무렵의 고배 등의 운두 높이는 구연 직경의 약 3분의 1 정도였으나 5세기 후반~6세기 전반경에는 약 4분의 1이 되었다가 그 이후가 되면 더욱 얕아져 5분의 1이 채 되지 않는다.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음식물을 적게 담는 경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의 먹는 양이 변하지 않았다면 한 접시에 담는 음식물 양이 적어지면 그에 반비례하여 접시의 수가 많아져야 할 것이다. 결국 가지 수 작은 음식물을 많이 담는 데에서 여러 가지 음식물을 조금씩 여러 접시에 나눠 담는 것으로 식생활이 변하였던 것이다. 식탁이 풍요로와졌던 것이며, 이는 음식문화의 발전이라 할 것이다. 상다리가 부러지게 많이 차려 낸 남도 한정식을 연상해보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