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句麗

오녀산성의 축성법에 관한 연구

吾心竹--오심죽-- 2010. 11. 16. 19:08

오녀산성의 축성법에 관한 연구(고구려연구회 2005 춘계학술대회 논문) 역사

2005/06/09 22:58

복사 http://blog.naver.com/gkttgemperor/13757161

오녀산성의 축성법에 관한 연구(고구려연구회 2005 춘계학술대회 논문)
               오녀산성의 축성법에 관한 연구

                                                        서길수(서경대)

Ⅰ. 머리말

이 논문은 고구려 축성법에 대한 다음과 같은 연구의 계속이다.

「고구려 축성법 연구 - 석성의 체성(體城) 축조법을 중심으로-」, ?고구려연구? 제8집, 서울, 1999
「성가퀴와 성벽 위 기둥구덩이」, ?정영호 교수 정년퇴임 기념논문집?, 서울, 2000.
「치성, 적대, 각대」, ?고구려연구? 제12집, 서울, 2001.
「고구려 벽화에 나타난 고구려의 성과 축성술」, ?고구려연구? 제17집, 서울, 2004.
「축성법을 통해서 본 고구려의 정체성」, ?고구려연구? 제18집, 서울, 2004
「오녀산성․국내성․환도산성에 대한 새로운 고고학적 성과」, ?고구려연구회 2004 추계학술대회 발표논문집?, 2004. 11. 27
「고구려 축성법(築城法) 연구 - 성문을 중심으로」, ?하버드 고구려학술대회 발표논문집?, 2005. 4. 5~7

이 논문에서는 고구려 산성 가운데 축성시기가 가장 오래 되었다고 보고 있는 오녀산성의 축성법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한다.
오녀산성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은 요령성문물고고연구소(遼寧省文物古考硏究所), 본계시박물관(本溪市博物館), 환인현문관소(桓仁縣文管所)가 연합하여 1996년 5월부터 1998년 10월까지 30개월(2년 반) 동안 4차례로 나누어 실시하였다. 이 때 오녀산성(五女山城) 전체에 걸쳐 조사, 탐사, 측량 제도(測繪) 및 발굴을 하였는데, 건물 터가 무리로 발견되었고, 1,000 점 남짓한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산성의 범위, 구조, 형국을 밝히는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 1999년 동벽을 보충 측량하고 무너진 곳을 정리하면서 성벽을 해부하였다. 2003년 중국이 이 오녀산성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하기 위해 갑자기 발굴하면서 그 동안 미진했던 부분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졌다.
필자는 그 동안 오녀산성을 십 수차례 답사하였지만 발굴을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녀산성의 축성법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웠다. 2000년, 1996~1998년 발굴 결과를 간단하게 발표한 것이 있었으나 축성법을 파악하기에는 너무 부족한 내용이었다. 2004년 중국에서 완전한 발굴보고서가 출간되므로 해서 오녀산성에 대한 전면적인 연구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 동안 발굴 결과를 간단히 표로 만들어 보면 <표 1> 같다. 1996년 1700㎡, 1997년 1630㎡, 1998년 1015㎡, 2003년 1300㎡, 모두 5645㎡나 되는 대규모 발굴을 하였다. 아울러 큰 건물터 3곳, 집터 72좌, 철기 가마 1곳을 발굴해 고구려는 물론 고구려 전후 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데 결정적인 자료를 제시하게 되었다.
이처럼 성벽 자체를 자세하게 발굴한 것은 요령성에서는 석대자산성(石臺子山城)과 함께 아주 특별한 경우다. 성안을 발굴하면 유물들이 많이 나와 발굴성과가 쉽게 나타나지만 성벽 자체를 발굴하는 것은 발굴하기도 어렵고 눈에 띄는 성과도 크지 않아 발굴한 예가 그리 많지 않다.
이번 오녀산성의 발굴에서는 성벽 자체를 자세하게 발굴해 고구려의 축성법을 연구하는데 큰 자료를 제시해 주고 있다. <표 1>에서 보듯이 1997년 동문과 남문을 조사하고 산성 전체를 측량하였다. 1999년에는 산성 가운데 가장 잘 남아있는 동벽의 측량과 도면을 작성하였으며, 훼손된 부분을 정리하였다. 여기서 가장 큰 작업은 성벽을 일부 절개하여 발굴했다는 것이다. 세계유산 등록을 위해 다시 전면 발굴을 하면서 오녀산성의 서문을 발굴 복원한 것도 고구려 초기 성벽을 연구하는데 큰 성과였다.   

이 논문은 필자가 그 동안 현지를 답사한 결과와 새로 나온 발굴보고서를 바탕으로 오녀산성의 구체적인 축성법을 연구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 논문은 축성법을 효과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보았다.  
먼저 Ⅱ장에서 성벽 몸체 쌓는 법을 다루었다. 이 장에서는 주로 ① 고구려의 특징적 성돌,  ② 성벽(城牆) 쌓는 구조 - 겉쌓기와 속쌓기, ③ 튼튼한 기단부(굽도리) 조성을 위한 공법을 다루겠다. Ⅲ장에서는 성벽과 성안에 설치한 부속시설을 다루었는데, 성벽에 설치한 부속시설로는 ① 성가퀴, ② 성벽 위에 설치한 돌구덩이, ③ 배수시설을 다루고, 성안에 설치한 부속시설로 ① 차단성, ② 샘과 못, ③ 망대 같은 것을 다루었다. 성문은 다른 논문에서 이미 다루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였다.  



























  <표 1>                     오녀산성 발굴 경과
발굴연도발굴구역 편성번호 발굴규모자리 전체규모1996Ⅰ구역96HW
 T1~T195×5m 트렌치(探方) 19개
추가트렌치 30㎡산꼭대기
서부모두 1700㎡
집터 15좌
큰건물터 1곳
재구덩이 11개
Ⅱ구역96HW
 T20~T545×5m 트렌치 35개
추가트렌치(擴方) 8㎡Ⅰ구역의
남쪽초소2곳산꼭대기돌계단산꼭대기차단성 1호, 2호동북쪽 계곡서문한 부분서북쪽 계곡1997Ⅱ구역97HW
 T56~T655×5m 트렌치 10개모두 1638㎡
집터 22좌
큰건물터  1곳Ⅲ구역97HW
 T70~T1365×5m 트렌치 67개
T86~T136(미발굴)장대 서쪽큰건물터 2호기초 발굴동문동벽남문남벽산성 측량산성 전체1998Ⅳ구역98HW
 T401~T4155×5m 트렌치 15개
추가트렌치 45㎡서문 동쪽모두 1015㎡
집터 12좌
편성번호를 다시 붙임옥황각 부근98HW
 G1~G314×1 트렌치(探溝)
22×1 트렌치
6×1 트렌치Ⅱ구역 남쪽1999동벽보충 측량과 제도
훼손된 부분 정리
성벽 절개 발굴2003Ⅱ구역2003HW
 T66~T685×5m 트렌치 3개
추가발굴모두 1300㎡
집터 23좌
큰건물터 1곳
철기가마 1곳Ⅳ구역2003HW
 T416~T4275×5m 트렌치 12개
추가발굴Ⅴ구역2003HW
 T501~T5095×5m 트렌치 9개
추가트렌치 3㎡Ⅰ구역 서쪽
철기가마(窯藏) 발견터Ⅲ구역 보충발굴큰건물터 2호보충발굴큰건물터 3호새로 발굴산꼭대기 동쪽산밑 초소새로 발굴동벽 안쪽저수지정리 발굴산꼭대기 서쪽서문완전 발굴옛길일부 발굴서문 계곡
자료 :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編著, ?五女山城 - 1996~1999, 2003年桓仁五女山城調査發掘報告?, (文物出版社, 2004, 4~10쪽)에서 간추려 작성함(2005-05-12).


<그림 1> 오녀산성 평면도(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編著, 『오녀산성』  14쪽)
Ⅱ. 성벽 몸체 쌓는 법

오녀산성은 산의 생김새에 따라 쌓았기 때문에 아주 불규칙한 꼴이다. 남북 길이가 1,540m쯤 되고, 동서 너비가 350~550m쯤 되며, 면적은 60만㎡쯤 된다.
산성은 산꼭대기와 산 중턱 두 가지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산꼭대기는 해발 800m쯤 되는 오녀산의 주봉인데 산성의 서쪽과 서남쪽을 이루고 있다. 서남부는 지세가 평탄하고 주위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어서 주변 산을 내려다보며 우뚝 솟아 있다. 남북 길이 600m, 동서 너비 110~200m이다. 고대 인류가 생활했던 유적이 대부분 이 꼭대기에서 발견되었다. 절벽 위이기 때문에 성벽을 쌓을 필요가 없어 성벽이 거의 없다. 다만 서쪽 계곡을 통해서 올라올 수 있는 유일한 곳에 쌓은 서문터는 고구려의 성문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산 중턱에는 산성의 동부, 북부, 동남부를 이루고 있는데, 성벽은 주로 동부에 쌓았다. 동벽은 고구려 초기의 축성법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되고, 동문 또한 초기 옹성형태를 보여주고 있어 귀중한 유적이다.
성벽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산의 절벽부분은 성을 쌓지 않고 그 절벽을 그대로 사용하는 천연성벽이고, 두 번째는 사람이 쌓은 인공성벽이다. 인공성벽은 대부분 돌로 쌓은 석벽인데, 일부 단락의 안벽이나 꼭대기에 흙을 사용하였다.
성 전체 길이는 4,754m인데 그 가운데 천연성벽은 4,189m로 대부분을 차지하고, 인공성벽은 565m로 12%를 차지한다. 이 성은 88%를 자연 지세를 이용하고 12%만 인공으로 성을 쌓아 경제적인 축성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표 2> 참조).
<표 2>에서 오녀산성 성벽의 전체적인 구조를 볼 수 있는 수치를 뽑아서 표를 만들어보면 <표 3>과 같다. 대체로 밑너비는 4~6m인데 위너비는 2.2~4.4m로 밑보다 위가 좁은 사다리꼴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성벽을 쌓을 때 성벽 바깥쪽을 조금씩 들여쌓아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다만 동벽의 9구간은 계곡물이 넘쳐 흘러내려가는 둑과 같은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위너비가 15m나 되는 특이한 현상을 보여준다.
현재 남아있는 성벽은 바깥벽이 낮은 것은 1.5m에서 가장 높은 것은 6m까지 아주 잘 남아 있는 곳도 있다. 오녀산성의 동벽과 남벽에서 높이가 5~6m씩 남아 있는 구간들은 고구려 산성의 웅장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의 이른 시기에 쌓은 오녀산성이 아직도 6m씩이나 남아있는 것은 고구려인들이 그만큼 성을 잘 쌓았기 때문이다. 축성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성벽의 몸체를 쌓는 것인데 고구려인들은 몸체를 쌓는데 여러 가지 중요한 공법들은 개발하여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하 몇 가지로 나누어 몸체를 쌓기 위한 공법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성벽(城牆) 쌓는 구조 - 겉쌓기와 속쌓기

겉쌓기란 돌로 성벽을 쌓을 때 바깥면(墻皮)을 쌓는 일을 말한다. 경사가 진 곳을 파내고 바깥쪽만 쌓을 때는(외면쌓기) 한 면만 쌓지만, 평지에 담을 쌓듯이 쌓아올린 성벽은 양면 모두 겉쌓기를 하는 것이 보통이다(양면쌓기). 고구려 석성은 주로 양면쌓기와 외면쌓기로 나누는데 오녀산성은 두 가지가 섞여서 나타난다. 겉쌓기 할 때 쓰는 돌은 여가가지 생김새가 있지만 가장 많이 쓰인 것은 쐐기꼴(楔形) 돌이다. 마치 쐐기처럼 돌을 깎은 것인데 고구려 산성을 쌓는 방법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이러한 쐐기꼴 돌은 고구려 이전이나 이후 시대에는 거의 쓰지 않았다.

<표 2>                   오녀산성 성벽의 구성과 특징

벽(길이)구간(段)
(길이)인공, 천연밑너비
위너비
바깥높이
안높이(m)특성비고남벽
(42m)
천연벽-2구간
인공벽-2구간1구간(165m)절벽산의 서남 절벽2구간(16m)인공벽바닥에서 쐐기꼴 성돌 발견계곡 아래 입구
훼손 심하다.3구간(105m)천연벽산등성이와 절벽으로 구성4구간(138m)인공벽5
2.5~3.5
2~4.5
2.2~2.6들여쌓기, 바깥쪽 겉쌓기에는 쐐기꼴성돌 사용, 안쪽에는 판석, 사다리꼴, 쐐기꼴 성돌 사용. 속쌓기에는 마름모꼴 사용 겉쌓기는 떨어져 나갔으나 속쌓기는 잘 남아있다동벽
(1847m)
천연벽-6구간
인공벽-6구간
1구간(54m)천연벽20m 절벽2구간(110m)인공벽4~6
3~4
3~6
2~4들여쌓기, 북단은 대형 기초석 남단은 쐐기꼴 성돌, 안벽은 널돌(板石), 성벽 위에 말길(馬道), 성가퀴, 돌구덩이, 성벽 위에 석판 동문 남쪽, 가장 잘 남아있는 곳3구간(70m)
동서-21m
남북-49m인공벽4.4~5
2.6~4.4
2.5~6
0.5~3들여쌓기. 그랭이공법. 기단 큰돌, 위는 쐐기꼴돌. 기단 큰돌은 들여쌓기를 안하고, 쐐기꼴돌은 들여쌓기. 성가퀴. 돌구덩이. 동문 북쪽. 2구간에서 직각으로 꺾이고 사이에 동문. 성벽 안 북단에서 초소터 발견4구간(18m)천연벽성벽 안 북단에서 초소터 2곳 발견5구간(34m)인공벽3.7(위너비)
3.5(바깥높이)들여쌓기. 기단부 큰돌, 위는 쐐기꼴이 많다. 성벽 위에 널돌. 성가퀴. 돌구덩이. 말길. 안이 높고 밖이 낮은 산골짜기6구간(86m)천연벽두 개의 바위꼭대기로 구성, 아래는 절벽. 바위꼭대기에서  초소 2곳 발견7구간(30m)인공벽3.5(위너비)
2.5(높이)축성법은 5구간과 비슷. 골짜기를 막아 쌓았다.8구간(35m)천연벽바위꼭대기, 아래는 절벽9구간(120m)인공벽15(위너비)
4(높이)외쪽쌓기. 성에서 가장 낮은 곳이고 밖보다 안이 높아 물이 넘쳐가는 곳으로 본다. 많이 훼손되었으나 성벽 겉은 남아있다. 10구간(172m)천연벽절벽 11구간(18m)인공벽4(위너비)
2(바깥)
0.4(안)골짜기 상단에 쌓았다.  외벽 쐐기꼴돌, 성벽 안은 마름모꼴과 길쭉한 돌. 내벽은 지표와 같은 높이.평면은 S자꼴12구간
(1100m)천연벽모두 절벽. 동장의 절반 차지.북벽(475m)천연벽모두 절벽서벽
(2008m)
천연벽-3구간
인공벽-1구간1구간(280m)천연벽천연 절벽 위 산등성이2구간(868m)천연벽봉우리들이 병풍처럼 이어지고, 서쪽은 수직에 가까운 절벽. 서문까지 이어진다.3구간(29m)인공벽남쪽은 훼손이 심하고, 북쪽은 일부 겉쌓기가 남아 있고 속쌓기는 잘 남아 있다. 서문 양쪽4구간(831m)천연벽서문에서 시장하여 남벽 산위 부분의 서남 모서리까지. 깎아지른 듯한 천연 장벽이 가장 험준한 곳 자료 :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編著, 『오녀산성』 , (文物出版社, 2004, 4~10쪽)에서 간추려 작성함(2005-05-12).


 
 <표 3> 오녀산성 성벽의 구조        단위 : m
성벽구간밑너비위너비바깥높이안높이남벽4구간52.5~3.52~4.52.2~2.6동벽2구간4~63~43~62~43구간4.4~52.6~4.42.5~60.5~35구간3.73.57구간3.51.59구간15411구간420.4
자료 : <표 2>에서 뽑아 작성한 것임

1) 오녀산성에서 사용한 성돌

오녀산성에서 성벽을 쌓기 위해 사용한 성돌은 대체로 6가지로 나눌 수 있다. 즉 큰 돌덩어리(大石條), 쐐기꼴돌(楔形石), 북꼴돌(梭形石), 돌맹이(塊石), 널돌(板石), 깨트린 돌(碎石) 인데, 이런 성돌은 대부분 그 용도에 따라 가공을 하였는데 가공 정도는 크게 다르다.

큰 돌덩어리(大石條) : 일반적으로 바깥벽 기단부에 썼다. 성벽 몸체 아래 부분을 이 큰돌덩어리로 쌓은 경우도 가끔 있다. 성벽 꼭대기에 옆으로 눌러놓은 것이 하나 있는데 특별한 경우이다. 가공한 흔적도 분명하지 않고 대부분은 직접 원석을 이용하였다.  
쐐기꼴돌(楔形石) : 모두 겉쌓기에 썼다. 성돌의 질이 단단하다. 어떤 것은 쑥돌(花崗巖)도 있는데, 이런 돌은 오녀산에서 나지 않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가져온 것이다. 정밀하게 가공하였는데 항상 한쪽 머리는 넓고 두터우며 한쪽 머리는 좁고 작아 쐐기(楔)와 꼭 닮았기 때문에 현지 사람들이 쐐기꼴돌(楔形石)이라고 하였고, 고고학계에서 그것을 채용한 것이다.   북꼴돌(梭形石) : 주로 성벽 속에 쓰는 돌인데 현무암이 많다. 오녀산과 주위 산간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석재를 분석해 보면 오녀산이나 가까운 지역에서 가져온 것이다. 북꼴돌은 좁고 긴 꼴을 하고 있는데 가운데 부분은 좀 굵직하고 양쪽 끝은 편편하고 얇게 줄어들어 약간 둥그렇거나 뾰족한 꼴이 된다. 전체적인 생김새가 베를 짤 때 쓰는 북(梭)과 같아서 북꼴돌이라고 한다. 이런 석재는 꽤 거칠게 가공하여 적당히 모양만 낸 것들이다.  
돌맹이(塊石)와 널돌(板石) : 대부분 안벽 겉쌓기와 성벽 꼭대기에 쓴다. 성벽의 속(墻芯)에서도 소량 발견된다. 힘써 가공한 흔적이 없다. 성벽을 쌓을 당시 평면인 것을 찾아 개별 석재에 대해 간단한 현장가공만 하였다.   
깨트린 돌(碎石) : 석재를 가공할 때 떨어져 나온 쓸모없는 암석조각으로 생김새는 모두 다르다. 주로 성벽 속의 북꼴돌 사이의 틈을 채우는데 쓰인다. 간혹 벽면 성돌 층과 층 사이의 틈을 막고 평평하게 하기 위해 쓴다.

오녀산성에서 쓰인 쐐기꼴 돌을 분석해 보면 세모꼴에서 사다리꼴까지 아주 다양하다. 밑변의 길이는 27~60㎝로 다양한데 50㎝ 안팎의 것이 가장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높이는 12~55㎝로 크기가 아주 고르지 않다. 두께는 6~22㎝인데 사실 머리부분과 꼬리부분은 더욱 큰 차이가 날 것으로 보인다.
북꼴돌은 길이가 63~76㎝, 높이 19~26㎝, 두께 12~18㎝로 상대적으로 길이가 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한쪽 끝을 겉쌓기인 쐐기꼴돌 사이에 끼우고 나머지를 성벽 속까지 연결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겉쌓기한 돌이 떨어져 나가도 속쌓기한 북꼴돌이 그대로 남아있을 수 있는 것이다.

 <표 4>      오녀산성 쐐기꼴돌                             단위 : ㎝
번호평면 생김새밑변
길이높이두께비고1두등변세모꼴(二等邊三角形)505513~17밑변 좀 얇고, 꼭지각(頂角) 좀 두껍다2두등변세모꼴384820꼭지각이 뾰족하게 모아진다. 3두등변세모꼴에 가깝다274617네모난 송곳꼴이고 꼭지각이 뾰족하게 모아진다. 4직각세모골(直角三角形)50317~12빗변(斜邊)이 밖으로 활처럼 휘었다.5직각세모꼴에 가깝다.48419~16꼭지각이 없고 꼭지 부분이 편편하고 얇다6사다리꼴(梯形)5014~349~157사다리꼴에 가깝다5015~2719윗변이 뾰족한 편이다.8사다리꼴에 가깝다5012~4013~20앞쪽 끝(前端)이 줄어든다9사다리꼴에 가깝다3620~506~22양쪽 변이 오므라들고 꼭지가 얇은 편10긴네모꼴(長方形)50401011긴네모꼴에 가깝다402015꼭지부분 편편하고 얇다12네모꼴(方形)에 가깝다323213~18 13부체꼴(扇形)454510~1614부체꼴에 가깝다603915아랫변(弧邊)이 밖으로 좀 꺾여 있다.15허리 잘록한 주걱꼴(亞腰鏟形)434216자료 :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編著, 『오녀산성』 , (文物出版社, 2004, 28~29쪽)에서 간추려 작성함(2005-05-15).


<표 5> 오녀산성 북꼴돌(梭形石)       단위 : ㎝
번호평면 생김새밑변
길이높이두께1한끝 뾰족, 한끝 둥그스름한 꼴 8624132한끝 좀 뾰족, 한끝 둥그스름한 꼴 8322133양끝 뾰족한 꼴8422124양끝 좀 뾰족한 꼴7626185양끝 모두 둥그스름한 꼴6319166한끝 뾰족 한끝 가지런한 꼴632215  
자료 :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編著, 『오녀산성』 , 29쪽





<그림 1> 오녀산성에서 사용한 성돌 - 쐐기꼴(『오녀산성』27쪽)

<그림 2> 오녀산성에서 사용한 성돌 - 북꼴(『오녀산성』28쪽)

2) 바깥벽의 겉쌓기와 속쌓기

잘 다듬어진 쐐기꼴 돌을 우선 머리가 큰 부분을 벽 바깥쪽으로, 머리가 작거나 뾰족한 쪽을 벽 안쪽으로 놓이도록 놓는다. 이 때 성벽의 경사에 따라 뒷부분의 두께를 조절한다. 즉 경사가 심한 곳에서는 뒷부분의 두께가 엷어지고 경사가 없는 곳은 앞 뒤 양쪽의 두께가 같아진다. 한편 겉쌓기 한 쐐기꼴 돌을 가지런히 놓았을 때 성돌이 세모꼴이기 때문에 성돌과 성돌 사이 안쪽에 자연히 세모꼴 틈이 생기게 된다. 이 세모꼴 틈에 북꼴돌을 꽉 맞도록 끼우고 그 틈새를 작은 돌맹이와 깨트린 돌(碎石)로 채운다. 쐐기꼴 돌의 꼬리부분을 길게 하여 속에 있는 돌과 서로 꽉 맞물리게 한 것은 성벽 안에 속쌓기한 돌도 성벽 겉의 쐐기꼴돌과 거의 같은 힘을 받게 한 것이다. 이것은 건축역학상으로 볼 때 성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인 것이다. 이렇게 쌓은 성벽은 비록 일부 성벽 돌이 자연히 뽑아지거나 성 밑에서 성돌을 뽑아내도 손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오녀산성에서 겉쌓기한 돌이 일부 또는 모두가 떨어져 나간 상태에서도 속쌓기 한 성벽은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오녀산성의 겉쌓기와 속쌓기도 이러한 고구려 축성법의 특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① 남벽 4구간 - 성벽의 바깥벽은 가공하여 일정한 규격이 있는 쐐기꼴돌을 써서 쌓아 올라갔다.
② 동벽 2구간 - 북단 석벽 외벽 기단부는 무겁고 두꺼운 긴네모꼴 큰돌을 1~5층 쌓고, 그 위에 쐐기꼴 성돌을 쌓아올렸다. … 쐐기꼴 돌은 가지런히 쌓아올렸으며 층마다 틈을 누르고 평탄하게 쌓았는데 층층이 올라가면서 들여쌓았다. … 남단 성벽 기단부는 큰돌덩이가 보이지 않는다. 위아래 모두 쐐기꼴 돌로 쌓았는데 쌓는 방법은 북쪽 쐐기꼴돌과 같다. …
성벽 속은 약간 손질한 길쭉한 돌과(長條石)과 돌덩이(塊石)을 알맞게 섞어 쌓는다. 이렇게 쌓은 성벽 속돌은 서로 눌러 틈새를 메우게 된다. 북꼴돌(梭形石)의 뾰족한 부분을 일반적으로 겉쌓기한 쐐기꼴돌 사이에 생긴 세모꼴 틈새에 딱 맞게 끼워 넣으면 성벽이 밖으로 향한 장력(張力)이 크게 감소한다.
③ 동벽 3구간 - 남단 성벽은 … 바깥벽 기단부의 일부는 큰 돌덩이로 쌓았고 그 위에는 쐐기꼴돌을 쌓았다. 기단부를 큰돌덩이로 쌓지 않은 부분은 쐐기꼴돌로 직접 쌓아올렸다. … 큰 돌덩이는 1~3층으로 들여쌓기는 하지 않았다. 쐐기꼴돌은 층층이 평평하게 쌓았는데 위로 올라갈 수로 들여쌓기를 하였다
북단 성벽은 길이가 49m이고, 바깥벽의 기단부에 큰 돌덩이가 약간 보이지만 쐐기꼴돌로 기단을 쌓은 곳이 많다. 다만 너비가 5m 되는 1단의 성벽이 있는데 기단부터 성벽 절반까지 큰 돌덩이를 쌓았는데 모두 7~8층을 쌓았고 층층이 약간씩 들여쌓기를 했다.
④ 동벽 5구역 - 성벽 양쪽은 잘 보존된 편이다. 가운데 부분은 겉쌓기(壁面)가 거의 떨어져 나갔다. 쌓는 방법이 남벽 4단, 동벽 2단, 3단과 다르다. 성벽은 산골짜기를 이용하였기 위쪽 입구를 이용하였기 때문에 안이 높고 바깥쪽이 낮은 특수한 지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래쪽에 간신히 바깥벽을 쌓았는데, 바깥벽과 산골짜기의 꽤 험한 산비탈 사이에 북꼴돌, 긴 돌덩이, 깨진돌들을 채워넣었기 때문에 산비탈의 경사에 따라 성벽이 아래서 위로 첨차 넓어진다. 성벽 안쪽은 산비탈에 붙여쌓았기 때문에 안벽은 대단히 낮다.
바깥벽은 대부분 쐐기꼴돌로 쌓았는데 기단부와 중간 부분에는 큰 돌덩이와 쐐기꼴돌이 층을 나누어 평평하게 쌓은 곳이 더러 보이는데 들여쌓기가 되어 있다
⑤ 동벽 7구역 - 축성법은 모두 5구역의 인공벽과 닮았다. … 북단 바깥벽은 보존상태가 조금 좋다. 층층이 쌓아올린 쐐기꼴돌 위에 긴네모꼴 큰 돌을 옆으로 눌러놓았다.
⑥ 동벽 9구역 - 바깥벽의 기단부분은 대부분 큰 돌덩이를 깔아서 쌓았고, 위는 쐐기꼴돌로 쌓았다. 쐐기꼴돌은 규격에 맞게 가공하였는데 생김새는 다양하고 규격은 큰 편이다.
⑦ 동벽 11구역 - 바깥벽은 쐐기꼴돌로 쌓았는데 다만 거칠고 엉성하여 보잘 것이 없다. 성벽 속은 북꼴돌, 긴 돌덩이들을 넣어 눌렀다.

그러나 자세하게 살펴보면 오녀산성의 겉쌓기와 속쌓기는 주변의 고검지산성, 흑구산성 그리고 집안지역의 국내성, 환도산성, 패왕조산성에 비해 몇 가지 측면에서 완성도가 많이 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성돌의 생김새와 규격이 너무 다양하다. 이 점은 성돌의 표준화 정도가 낮다는 것을 뜻한다.
둘째, 성돌의 가공기술이 주변 산성에 비해 조잡하다.
셋째, 따라서 고구려 성벽 겉쌓기의 특성 가운데 하나인 육합쌓기가 거의 되지 않았다. 주변의 산성들은 성벽을 쌓아올릴 때 이음선이 가로로 평행선을 이루도록 정연하게 선을 맞추고, 성돌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6합(六合)으로 물리고 뿌리를 성심에 깊이 박아 쌓았다. 6합이란 성벽을 쌓는데 같은 줄 양 옆에 2개를 놓고, 윗줄 2개와 아랫줄 2개는 반씩 물리도록 쌓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하면 성돌 하나에 아래위에 각각 2개, 좌우로 한 개씩 접하게 되므로 6개가 단단히 물리게 된다. 6합으로 물린 성돌은 2합이나 4합으로 쌓은 것보다 훨씬 더 든든하다.
이러한 결과는 주변 산성들이 대부분 다듬기 좋은 쑥돌(화강암)을 사용한 데 비해 오녀산성에서는 쑥돌이 나지 않아 쑥돌의 비율이 낮기 때문에 생긴 것일 수도 있고, 가공기술면에서 주변 산성을 쌓을 때보다 숙련도가 낮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만약 후자의 경우라면 오녀산성의 축성 연대가 주변 산성보다 더 앞선다는 조심스런 결론도 예측도 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림 3> 동벽 2구간 북쪽 바깥벽  겉쌓기(『오녀산성』 17쪽)



     <그림 1> 동벽 2구간 남족 바깥벽 겉쌓기(『오녀산성』17쪽)    

3) 안벽의 겉쌓기와 북주기(培土)

바깥벽의 겉쌓기와 안벽의 겉쌓기는 가공의 정도나 사용한 성돌이 다르고 안벽을 쌓은 뒤는 대부분 북주기(培土)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벽에 대한 보고서의 데이터는 다음과 같다.

① 남벽 - 안벽의 기단은 좀 큰 돌덩이을 많이 사용하여 쌓았고, 그 위에 널돌(板石), 사다리꼴이나 세모꼴, 쐐기꼴을 가지고 틈새를 눌러쌓았는데 가지런하지 않고 매우 거칠다. 기단부에는 북주기를 했는데 일부 구간은 성벽 꼭대기까지 북주기를 하였다.(그림 12, 도판 1-2) 배토는 안쪽에서 밖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어 있고 판축은 하지 않았지만 단단한 편인데 두께는 0.9~1.4m쯤 된다.
② 동벽 2구간 - 안벽(內壁)은 조금만 가공한 돌덩이(砄石)와 널돌(板石)을 가지고 쌓았는데 벽면은 평평하고 들여쌓기를 하지 않았다. 성돌의 층은 그다지 규칙적이지 않다.(그림 16, 채판 2-1). 안벽을 쌓은 뒤 북주기(培土)를 하여 보호하였는데 지세에 따라 높낮이가 하나같지 않고 배토도 두께 같지 않는데 두꺼운 것은 1.6m까지 다다르고 엷은 것은 0.3m 안팎이다. 북주기 위 부분은 평평하게 한 뒤 너비 2m쯤 되는 말길(馬道)를 만들었다.(사진 1, 2).
③ 동벽 3구간 - 남단 안벽은 쐐기꼴돌을 쌓은 곳이 많고, 북단 안벽과 휘어지는 모서리는 약간 가공한 돌덩이와 널돌으로 나누어 쌓았는데 들여쌓기는 하지 않았고 성벽 겉도 가지런하지 않다. 안벽을 쌓은 뒤 북주기(배토)를 하여 보호하였다. 성벽의 높낮이와 북주기의 두께는 하나같지 않아 일부 내벽은 땅거죽에 드러나 있는 곳도 있고, 지하에 묻힌 부분도 조금 있다.
④ 동벽 5구간 - 성벽은 산골짜기 위쪽 입구를 이용하였기 때문에 안이 높고 바깥쪽이 낮은 특수한 지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래쪽에 간신히 바깥벽을 쌓았는데, 바깥벽과 산골짜기의 꽤 험한 산비탈 사이에 북꼴돌, 긴 돌덩이, 깨진 돌들을 채워 넣었기 때문에 산비탈의 경사에 따라 성벽이 아래서 위로 점차 넓어진다. 성벽 안쪽은 산비탈에 붙여쌓았기 때문에 안벽은 대단히 낮다. (그림 23, 24,사진 4-1)


오녀산성 성벽 안벽은 바깥벽에 비해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었다.  

첫째, 바깥벽 겉쌓기는 주로 쐐기꼴돌을 사용한데 반해 안벽은 주로 약간만 가공한 돌덩이나 널돌을 사용하여 바깥벽에 비해 공력을 덜 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벽 3구간의 남단 안벽은 쐐기꼴돌을 많이 썼는데, 이것은 바로 성문의 안벽이기 때문에 특별히 바깥벽과 같이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안벽도 기단부는 큰 돌덩이를 사용한 곳도 있었다.
둘째, 안벽은 들여쌓기를 하지 않았다.
셋째, 안벽은 대부분 북주기(배토)를 했다. 북주기는 기단부만 한 지점도 있고 성벽 꼭대기까지 전부 한 곳도 있다. 남벽은 0.3m~1.6m, 동벽 2구간은 0.9~1.4m로 지형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북주기 한 부분은 그 자체가 성벽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힘을 들여 판축은 하지 않았다. 동벽 5구간의 경우는 산골짜기를 이용한 특수한 지세이기 때문에 성벽과 산비탈 사이에 북꼴돌, 긴 돌덩이, 깨진돌들을 채워 넣었다. 사실상 성벽 안벽은 없고 성벽 속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벽 안쪽은 성가퀴 안쪽이 된다.
넷째, 성벽 안쪽에 북주기를 하면 산비탈과 성벽 사이의 위부분이 자연히 편편하게 되는데 이 곳이 말이 달릴 수 있는 길(말길)이 생긴다. 이렇게 해서 성벽 위에는 너비 2m 쯤 되는 말길(馬道)이 놓이게 되는 것이다.
다섯째, 남벽의 성벽 기단부에 북주기를 한 바깥쪽은 위 아래로 도랑이 파져 있는데 너비 2m, 깊이 1m 쯤 된다. 이 도랑은 성벽 기단에 배토할 때 파낸 것인데 비가 올 때는 물이 흘러내려가 성벽을 보호하는 작용을 하였다.   
 <그림 2> 동벽 2구간 안벽의 겉쌓기(『오녀산성』17쪽)

 <그림 4> 동벽 2구간의 속쌓기와 3구간의 안벽 겉쌓기 (『오녀산성』32쪽)
  <그림 5> 남벽 단면도 - 북주기(『오녀산성』16쪽)
      1. 겉흙(表土)  2. 북주기(培土)  3. 성벽
그림 9 남벽의 안벽 - 꼭대기까지 북주기한 곳

<그림 3> 동벽 3구역 단면도 - 북주기(『오녀산성』20쪽)
      1. 겉흙(表土)  2. 북주기(培土)  3. 성벽  

 4) 들여쌓기(퇴물려쌓기, 물려쌓기)

 성벽을 쌓아 올리며 한 단을 쌓을 때마다 조금씩 안으로 들여쌓는 축조방식을 말한다. 이와 같은 공법은 대부분의 고구려 성에서 볼 수 있는데, 오녀산성에서도 그 특징이 아주 뚜렷하게 나타난다.

① 남벽 4구간 - 외벽은 규격에 맞추어 가공된 쐐기꼴 성돌을 쌓아 올라갔는데 위로 올라 갈수록 안으로 기울어지는 들여쌓기 공법을 사용하였다.
② 동벽 2구간 - 쐐기꼴 돌은 가지런히 쌓아올렸으며 층마다 틈을 누르고 평탄하게 쌓았는데 층층이 올라가면서 들여쌓았다. 들여쌓기는 보통 10도 안팎이다.
③ 동벽 3구간 남단 - 쐐기꼴돌은 층층이 평평하게 쌓았는데 위로 올라갈 수로 들여쌓기를 하였다
④ 동벽 5구간 - 바깥벽은 대부분 쐐기꼴돌로 쌓았는데 기단부와 중간 부분에는 큰 돌덩이와 쐐기꼴돌이 층을 나누어 평평하게 쌓은 곳이 더러 보이는데 들여쌓기가 되어 있다.(그림 23, 24,사진 4-1)

오녀산성 성벽은 대부분 들여쌓기를 하였는데 그 기울기가 보통 10도 안팎이며, 기단부의 큰돌덩이와 안벽은 들여쌓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 4> 동벽 2구역 북쪽 단면도 - 들여쌓기(『오녀산성』19쪽)  


5) 성벽 꼭대기의 황토와 널돌 포장

오녀산성의 남벽, 동벽의 2구간, 3구간, 5구간의 성벽 꼭대기에는 황토로 0.2m쯤 포장(鋪裝)되어 있다. 그 가운데 동벽 2구간과 5구간에 성벽 꼭대기에는 널돌(板石)이 평평하게 깔려 있고 황토가 그 널돌 위에 깔려 있다. (사진 4-2)

3. 튼튼한 기단부(굽도리) 조성을 위한 공법

  평지도 아닌 산의 꼭대기나 비탈에 무거운 돌로 쌓아 올린 석성들이 천 수 백년 씩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기초를 튼튼히 했기 때문이다. 기단부(굽도리)를 튼튼하게 하기 위해 간단하지만 아주 중요한 두 가지 공법을 사용하였다.    

 1) 맨 아래 기단은 큰 돌로 받친다.

땅을 파고 기초를 한 뒤 먼저 큰돌을 한 두 층 쌓아 굽도리를 만든 뒤 그 위에 작은 돌을 쌓아 위의 무게를 견딜 수 있도록 하였다.
발굴보고서에 나타난 예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동벽 2구간 - “북단 석벽 외벽 기단부는 무겁고 두꺼운 긴네모꼴 큰 돌을 1~5층 쌓고, 그 위에 쐐기꼴 성돌을 쌓아올렸다. 기단부 돌은 서로 포개서 누르고 있는데 들여쌓기가 일정하지 않다. 아래 부분은 분명한데 위 부분은 분명하지 않고 들여쌓기를 하지 않는 곳도 있다. 그 가운데는 돌덩이 하나가 길이 2.6m, 두께 0.45m된 것도 있는데, 기단부가 안전한 곳에는 기단받침돌이 하중을 견디는 능력을 높였다.
② 동벽 3구간
남단 - 바깥벽 기단부의 일부는 큰 돌덩이로 쌓았고 그 위에는 쐐기꼴돌을 쌓았다. 기단부를 큰 돌덩이로 쌓지 않은 부분은 쐐기꼴돌로 직접 쌓아올렸다. …… 큰 돌덩이는 1~3층으로 들여쌓기는 하지 않았다(그림 20, 시진 3-2).   
  북단 - 바깥벽의 기단부에 큰 돌덩이가 약간 보이지만 쐐기골돌로 기단을 쌓은 곳이 많다. 다만 너비가 5m 되는 한구간은 기단부터 성벽 절반까지 큰 돌덩이를 쌓았는데 모두 7~8층을 쌓았고 층층이 약간씩 들여쌓기를 했다. (사진 3-1)
③ 바깥벽은 대부분 쐐기꼴돌로 쌓았는데 기단부와 중간 부분에는 큰 돌덩이와 쐐기꼴돌이 층을 나누어 평평하게 쌓은 곳이 더러 보이는데 들여쌓기가 되어 있다.(그림 23, 24,사진 4-1)
④ 동벽 9구간 - 외벽의 기단부분은 대부분 큰 돌덩이를 깔아서 쌓았고, 위는 쐐기꼴돌로 쌓았다.

오녀산성 동벽 가운데 잘 남아있는 2구간과 3구간에 기단부를 큰 돌로 쌓은 예가 남아있는데 2구간에는 북단에, 3구간에는 남단에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에 쌓은 쐐기꼴돌보다는 몇 배나 큰 돌을 1~5층까지 쌓아올려 기단부를 단단하게 한 뒤 그 위에 쐐기꼴돌을 정연하게 쌓아 올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쐐기꼴 돌은 일정하게 들여쌓기를 한 데 반해 기단부 큰 돌들은 들여쌓기를 정확하게 하지 않았다.
동벽 5구간 남쪽도 큰 돌덩이로 기단부를 쌓았지만 위쪽도 일부 큰 돌덩이를 사용하여 일정하지 않다. 북쪽은 기단부보다 위쪽에 큰 돌덩이를 쌓은 것 같은데 자세히 보면 그 부분 지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층이 위아래로 나뉘는데 낮은 곳은 작은 돌로 메우고 높은 지층을 중심으로 큰 돌덩이를 사용한 특이한 예이다.
3구간 북단은 기단부터 성벽의 절반까지 7~8층을 큰 돌덩이로 쌓았는데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그림 6> 동벽 2구간 북쪽 바깥벽 <그림 5> 동벽 3구간 남쪽 바깥벽

<그림 6> 동벽 5구간 남쪽 바깥벽    <그림 7> 동벽 5구간 북쪽 바깥벽


2) 그렝이 공법

성벽을 쌓아가다 나타난 울퉁불퉁한 바위를 깎아내지 않고, 쌓아가는 돌들을 그 바위가 생긴 꼴대로 그려 쪼아내고 다듬어서 이빨을 맞추듯 완벽하게 접합시키는 것을 그렝이공법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공법은 장수왕릉이나 태왕릉에서도 볼 수 있다. 원리는 간단하나 이 기법을 구사하는 기능은 고도의 기술을 요한다.
동벽 3구간 남단을 보면 비스듬히 박힌 큰 천연바위가 하나 있는데 이 돌을 그대로 사용하여 그 돌의 생김새에 맞춰 돌을 다듬어 맞추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림 20). 이것이 바로 그렝이공법인데 이러한 공법은 동벽 5구간에서도 볼 수 있다(그림 24).
보통 기단부를 조성할 때 바닥에 튀어나온 울퉁불퉁한 바위들은 바닥이 반반하도록 깎아낸 뒤 쌓아올리는 것인데, 고구려에서는 그렇게 튀어나온 바위들은 그대로 둔 채 그 위에 쌓은 성돌을 울퉁불퉁한 바위에 맞추어 깎아내고 다듬어 결합시켰기 때문에, 천연바위가 성벽의 심 노릇을 해 성벽을 튼튼하게 버틸 수 있게 해 주는 공법이다.

 <그림 8> 동벽 3구간 남쪽 바깥벽의 그랭이공법(『오녀산성』20쪽)  


<그림 7> 동벽  5구간 남쪽 바깥벽의 그렝이공법 (『오녀산성』22쪽)
3) 가파른 비탈에도 수평으로 쌓았다.

남벽 4구간은 남북의 높이가 차이가 나 북쪽으로 갈수록 성벽이 위로 올라간다. 이렇게 되면 성벽의 기단도 산의 기울기에 때라 비스듬하게 되는데 오녀산성 성벽의 기단은 산비탈을 따라서 쌓지 않고 수평방법을 채용하였다. 비탈에 성벽의 기단부를 수평으로 쌓으려면 비탈이 심한 곳은 아래쪽은 더 높이 쌓고 위쪽은 얕게 쌓아 수평을 이루게 쌓아야 한다. 이러한 공법은 성벽 각층이 나란히 평형을 이루도록 쌓아야 하기 때문에 상당히 높은 수준의 기술력을 필요로 한다. 이럴 경우 자연히 성벽 꼭대기에 층이 생기게 되는데 오녀산성 남벽에서는 꼭대기에 계단을 만들어 마무리를 잘 했다. 계단 사이의 거리는 2~3m이며, 아래로 내려가면서 비탈이 심해지면서 계단의 낙차가 0.4~0.6m로 낮아진다.(그림 13)

Ⅲ. 성벽과 성안에 설치한 부속시설
 
1. 성벽에 설치한 부속시설

1) 성가퀴
성가퀴란 성벽 위에 설치한 시설인데 사격할 때 몸을 숨기는 장벽으로 치와 함께 성벽의 기본 방어 시설의 하나다. 화살을 막는 곳이라는 뜻에서 ‘살받이터’라고도 한다. 한문으로는 ‘성가퀴 첩(堞)’, ‘살받이터 타(垜)’자를 써서 첩(堞) 또는 타(垜)라고 하며, 여장(女墻)․여첩(女堞)․여원(女垣)․성첩(城堞)․첩원(堞垣)․희장(姬牆)․치비(寘陴)같은 여러 가지 표현을 쓴다.
성가퀴는 성벽 맨 위쪽 바깥쪽에 성벽보다 더 엷게 쌓기 때문에 거의 훼손되었고 남아있는 곳이 많지 않다. 오녀산성은 고구려 산성 가운데서도 성가퀴가 남아있는 많지 않은 산성 가운데 하나다. 오녀산성에서 인공으로 쌓은 성벽 위에는 대부분 성가퀴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오녀산성을 쌓을 당시 성가퀴는 기본적으로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동벽 9구간의 경우 성벽 위로 계곡물이 넘치게 한 곳은 예외일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시설은 성산산성 남문 옆 계곡에다 쌓은 성벽에서도 볼 수 있다.
성가퀴는 동벽에만 남아있는데 2구간이 제일 많이 남아 있었으나(13m) 성벽을 다시 쌓는 과정에서 원형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현재는 3구간이 제일 잘 남아있는데 3구간은 세계유산 등록을 위해 정식으로 발굴을 했기 때문이다.
성가퀴의 너비는 1~1.5m로 구간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은 높이는 0.2~0.8m로 눈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높이이다.

<표 4>     오녀산성의 성가퀴       단위 : m
길이너비남은 높이비고동벽 2구간131.2~1.50.2~0.6띄엄띄엄 있다.
주로 양쪽 끝부분동벽 3구간1.20.4~0.8북단, 휘는 곳동벽 5구간10.2~0.3동벽 7구간훼손, 상태 불명
자료 :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編著, 『오녀산성』 , 16~22쪽

  <그림 9> 동벽 2구간 성가퀴(『오녀산성』18쪽)
        1. 겉흙  2. 북주기  3. 성벽  4. 성가퀴(女墻)

2) 성벽 위 성가퀴 안쪽의 돌구덩이

이 돌구덩이는 고구려 성만 가지고 있는 독특한 시설이다. 같은 시대인 신라, 백제의 유적에서 이러한 시설이 발견되었다는 보고는 아직 없다. 고구려의 치나 옹성 같은 시설은 후대에 많이 응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돌구덩이는 아직 그 예를 발견하지 못한 것은 그만큼 고구려의 특징적 시설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문헌에도 이러한 시설에 대한 기록은 없기 때문에 이 구덩이가 어떤 구실을 했는지 아직도 수수께끼다.
오녀산에서는 2구간과 5구간에서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모두 19개가 발견되었는데, 2구간은 성벽을 제대로 발굴을 하지 않고 관광용으로 복원해버려 정확한 데이터를 내지 못하고 있다. 1990년대 말 성벽 위를 시멘트로 복원하고 구덩이를 전 구간에 설치하고 그 위에 깃발을 꽂고, 성가퀴에는 목책을 설치하는 등 원형을 심하게 파괴하여 버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2구간과 3구간에서 발견된 돌구덩이의 정확한 위치나 바닥의 구조에 대한 기록이 남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다행히 5구간 11개를 정밀하게 측정해 돌구덩이의 특징을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돌구덩이와 돌구덩이의 사이는 0.8~2m 간격을 두고 설치되어 있다. 돌구덩이의 평면 생김새는 네모꼴인데 가로 세로가 30㎝인 바른네모꼴과 다양한 긴네모꼴이 있다. 긴네모꼴의 길이는 0.23~0.5m, 너비 0.14~0.35m 많은 차이를 두고 있는데 어떤 것은 원래 만들었을 때의 생김새가 그대로 남아있지 않고 오랜 세월이 지나 훼손되는 과정에서 변한 것도 있을 것으로 본다.
깊이는 모두 4~5층으로 쌓았는데 높이는 대개 0.76~0.82m(정확하게 파악한 5구간의 수치)이다. 돌구덩이는 성벽을 쌓기 전 정확하게 설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벽을 돌구덩이 바닥이 되는 높이로 쌓은 뒤 우선 구덩이 바닥이 될 부분에 평평한 널돌을 깔아 밑을 완전하게 막는다. 오녀산성에서 정확하게 조사한 모든 구덩이는 이렇게 평평한 널돌로 바닥을 완전히 막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혹자가 주장하는 “물이 빠져나가는 배수구다”라는 설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다.
평평한 바닥 위에 네모난 구덩이 주위를 쌓아 올라가는데 높이 15~20㎝ 되는 널돌을 잘 다듬어 마치 벽돌로 쌓아 올리듯이 정확한 구덩이를 만들어낸다. 벽의 바깥이 무너져 내려도 안벽은 4각의 일부를 정확하게 보여주며 남아있는 예가 많다(대흑산산성, 고검지산성). 이런 예는 구덩이가 평소에 무너져 메워지지 않도록 아주 철저하게 잘 쌓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성벽을 꼭대기까지 쌓아 올리면 돌구덩이가 완성되는데, 이 때 돌구덩이의 바깥쪽 벽과 성가퀴 안벽이 일직선이 되도록 성가퀴를 더 쌓아올리기 때문에 자연히 돌구덩이는 성가퀴 안벽 바닥에 설치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이번 오녀산성 발굴보고서에서 “평소에 깨진 돌이나 잡물을 떨어져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구덩이 입구를 덮는 널돌이 있다”고 하였다. 평소 필자가 살피지 못했던 부분이라 앞으로 연구에 많은 참고가 될 것으로 본다. 그러니까 구덩이는 평소 널돌 덮개로 덮어놓았다가 필요할 때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앞으로 돌구덩이의 쓰임새를 알아내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표 5>                     오녀산성의 돌구덩이                      단위 : m
    위치  사이편성번호   위치 길이 너비   깊이   바닥동벽 2구간(7개)1.8~20.30.30.3~0.5동벽 3구간(1개)0.50.350.6동벽 5구간
(11개)2m
안팎D2남쪽0.360.240.76(4~5층)바닥-널돌 1장, 평평D3남쪽 휘는 곳0.320.230.82(4~5층)바닥-널돌 1장, 평평D4휘는 곳0.30.220.76(4~5층)바닥-널돌 1장, 평평D9북쪽0.230.140.55(4층)바닥-널돌
 자료 :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編著, 『오녀산성』, 16~22쪽

지금까지 논의된 기둥구덩이의 쓰임새는 네 가지로 간추릴 수 있다.
  1. 굴림통나무(滾木)를 매다는 기둥구덩이(柱洞)
  2. 쇠뇌(弩砲)를 설치하는 기둥구덩이
  3. 성가퀴의 높이와 보호력을 높이는 목책기둥의 구덩이
  4. 깃대자리

발굴보고서에서 지금까지의 설과는 다른 새로운 설을 주장하고 나와 흥미롭다. 우선 그들은 지금까지 가장 유력한 두 가지 학설을 부인한다.

돌구덩이의 용도에 대해서는 현재 두 가지 설이 널리 퍼지고 있는데 두 설 모두 구덩이 안에 나무기둥을 설치하였다고 보았다. 한 가지 설은 기둥 위에 쇠뇌를 설치한다고 하였고, 다른 한 가지 설은 굴림통나무(滾木)를 매다는 밧줄을 묶는 기둥 의 구덩이다는 것이다. 돌구덩이는 기둥구덩이라는 설이 상당히 그럴듯하지만 두 가지 설에 대한 신중한 고려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한편 새로운 대안으로 나온 학설은 이 구덩이에 기둥을 세우고 널판을 대 목제 치첩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고구려산성 성벽 꼭대기의 성가퀴는 보편적으로 좁은 편이다. 높이 쌓으면 무너지기 쉽기 때문에 각각 1m 가까이 되면 꼭대기를 봉했다. 이처럼 낮고 작은 성가퀴는 성벽 위에서 군사들이 싸울 때 근본적으로 성가퀴에 의탁하여 몸을 보호할 수 없게 되었다. 이처럼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성벽 꼭대기에 꽤 높은 목책 성가퀴를 덧붙였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돌구덩이 안에 나무기둥을 세우고 나무벽으로 만든 치첩(木墻雉堞)을 추가로 설치할 때 처내(橫搭, 어린아이 업을 때 두르는 끈이 달린 작은 포대기) 같은 널조각(木板)이나 통나무 말뚝을 고정하기 위해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고구려 때 성벽 위에 나무벽을 설치한 예가 확실히 있었다. 『책부원구(冊府元龜)』 장수부(將帥部) 공취(攻取)에 보면 당다라 군사가 요동성을 공격할 때 고구려 군이 포거(抛車)가 쏘는 돌포탄을 막기 위해  “성 위에 나무를 쌓고 널빤지를 엮고 싸웠는데(于是城上積木編板以戰), 그 위에 새끼줄그물(數加繩網于其上)을 더해 나는 돌(飛石)을 막았다.”고 하였고, 당나라 군사가 안시성을 공격할 때 “돌을 쏘고 당거(撞車)로 누각과 치(雉)를 부수니, 성안에서는 무너진 곳에 나무를 새워 울타리를 만들었다(令抛石撞車壞其樓雉 城中隨其崩壞 卽立木爲冊)”고 하였다. “나무를 쌓고 널빤지를 엮었다(積木編板)”던가 “나무를 새워 울타리를 만들었다(立木爲冊)”는 것은 나무담(木墻) 치첩(雉堞)과 비슷하다. 오녀산산성 동벽 부분 돌구덩이 위에 널돌을 덮었는데 기둥을 세우기 전 구덩이 안으로 흙과 돌이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임시 조치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설은 설에 그치지 않고 오녀산성 성벽을 복원할 때(1999년) 동벽 2구간 위를 자신들의 학설대로 설치하였다. 즉 성벽 위에 성가퀴를 설치하고 성가퀴 안 바닥에 2m 간격으로 모두 돌구덩이를 만들어 그 위에 낙엽송 기둥을 세우고 기둥에 나무를 이어서 2~3m되는 방어막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 각종 깃발을 세워놓았다. 이 시설을 위해 돌구덩이가 없는 곳에도 모두 시멘트로 구덩이를 만들고 성가퀴도 시멘트로 만들어 원형을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2003년 오녀산성을 세계유산에 등록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 시설물을 모두 철거하고 시멘트도 벗겨냈지만 한번 훼손한 원형은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발굴팀이 주장하는 논리는 무엇인지 한번 분석해 보기로 한다. 그들이 주장한 논리를 간추려보면 다음 두 가지다. 첫째, 성가퀴가 낮기 때문에 그 성가퀴로는 몸을 숨길 수 없기 때문에 구덩이에 기둥을 새우고 그 기둥에 나무판을 대서 치첩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이러한 목제 치첩을 한 기록이 문헌에 나온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좀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기로 한다. 첫째 성가퀴가 낮다는 것은 어떤 것을 기준으로 했는지 모르지만 오녀산성에서 현재 남아있는 곳 가운데 가장 높은 0.8m는 그다지 낮은 것이 아니다. 성가퀴 가운데 가장 잘 남아 있는 환도산성도 1m 안팎인데 밖의 경사가 급한 곳이기 때문에 성가퀴가 높아도 적을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성가퀴를 전혀 쌓지 않았으면 몰라도 기왕에 쌓았으면 필요할 때 조금 더 쌓으면 되지 그 위에다 나무로 더 높이 쌓는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더구나 이 학설처럼 나무로 성가퀴(사실 고구려 산성에서 치첩은 발견되지 않았다)를 더 높이 쌓아 올린다는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아주 불리해 진다. ① 적이 불로 공격(火攻)할 때 전적으로 불리하다. 이는 마치 적의 공격 앞에 화약을 내민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럴 경우 석성이 갖는 유리한 점이 완전히 사라진다. ② 만일 성가퀴 위에 목재로 1m만 더 쌓아도 높이가 2m가 되어 버리기 때문에 쳐들어오는 적을 볼 수가 없어진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적을 공격할 수 있을 것인가? 성 밖의 비탈이 가파르다는 점, 성가퀴 너비가 1~1.5m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성가퀴는 결코 낮은 것이 아니다. 성위에서 적을 공격할 때 1m 가까운 성가퀴의 높이에 1~1.5m 되는 너비를 넘어서 또 밑을 내려다봐야 하기 때문에 성가퀴가 너무 높아도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발굴팀에서는 치첩(雉堞)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아직까지 고구려 산성에서 치첩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더구나 초기 산성에서는 치첩이 없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기 때문에 치첩이 있는 성벽에서 몸을 숨기고 타구(垜口)를 통해 적을 공격하는 장면을 상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둘째 문헌에 나타난 기사에 대한 해석이다. 책부원구에 나온 기사는 이미 소개를 했으니 똑같은 내용을 더 자세하게 기록한 삼국사기의 기록을 검토해 보기로 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상

이세적이 포차를 벌려놓고 큰 돌을 날리니 300보를 날아가 맞는 것마다 이내 부서졌다. 우리는 나무를 쌓아 다락을 만들고 밧줄로 만든 그물을 쳤으나 막을 수 없었다. 당나라 군사가 충차로 성가퀴를 쳐서 부수었다. (勣列砲車 飛大石過三百步 所當輒潰 吾人積木爲樓 結絙罔 不能拒 以衝車撞陴屋碎之)

강하왕 도종이 무리를 독려하여 성의 동남쪽 모퉁이에  흙으로 산을 쌓고 성을 위협하니, 성안에서도 역시 성을 더욱 높여서 이것을 막았다. 병사들은 번을 나누어 싸웠는데 하루에 예닐곱 차례 맞붙었다. 충차(礮石)와 포석(礮石)으로 그 누각(樓)과 성가퀴(堞)를 무너뜨리면 성안에서도 따라서 목책을 세워 그 무너진 곳을 막았다.
(江夏王道宗 督衆築土山於城東南隅 浸逼其城 城中亦增高其城 以拒之 士卒分番 交戰日六七合 衝車礮石 壞其樓堞 城中隨立木柵 以塞其缺)  

먼저 요동성의 경우를 보자. 『책부원구』에는 “나무를 쌓고 널빤지를 엮고(積木編板), 그 위에 새끼줄그물(數加繩網于其上)”을 쳐서 나는 돌(飛石)을 막았다.”고 했고, 삼국사기에서는 “나무를 쌓아 다락을 만들고 밧줄로 만들 그물을 쳤다(積木爲樓 結絙罔)고 했다. 우선 이런 상황은 아군이 공격할 때 생긴 문제가 아니고 “이세적이 포차를 벌려놓고 큰 돌을 날리니 300보를 날아가 맞는 것마다 이내 부서졌다.”는 극한 상황에서 벌린 골육지책이요 임시변통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적군이 깨트린 부분을 급하게 막는 상황인 것이다. 만일 성을 쌓을 때부터 공을 많이 들인 시설이라면 미리서 대비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돌기둥에 나무기둥을 세우는 작업이 있었다면 나무를 쌓았다(積木)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았을 것이다.
안시성의 경우도 비슷하다. 『책부원구』에는  “돌을 쏘고 당거(撞車)로 누각과 치(雉)를 부수니, 성안에서는 무너진 곳에 나무를 새워 울타리를 만들었다(令抛石撞車壞其樓雉 城中隨其崩壞 卽立木爲冊)”고 하였고, 삼국사기에서는 “나무를 새워 울타리를 만들고(立木爲冊) 충차(礮石)와 포석(礮石)으로 그 누각(樓)과 성가퀴(堞)를 무너뜨리면 성안에서도 따라서 목책을 세워 그 무너진 곳을 막았다.”고 하였다. 여기서도 성이 적에게 파괴되어 무너지면 그 무너진 곳을 틀어막는 수단으로 목책을 사용하였으니 이것도 임시변통인 것이다. 어디에도 성가퀴가 낮아서 성가퀴 위에 나무로 치첩을 만들고 그 치첩을 만들기 위해 돌구덩이에 기둥을 세운 내용을 찾을 수 없다.
이상에서 오녀산성 발굴팀이 제시한 설을 분석해 본 결과 이 설도 돌구덩이의 쓰임새를 정확하게 증명해 준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은 우선 적이 쳐들어올 때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시설들을 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성벽이 무너지면 임시변통으로 막았던 기록을 가지고 증면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고 할 수 있다.   
아쉽게도 이번 오녀산성 발굴에서도 돌구덩이의 쓰임새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 앞으로 발굴을 통해 획기적인 증거가 나와 분명하게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그림 8> 동벽 2구역 남쪽 성벽 단면도(『오녀산성』25쪽)
      1. 겉흙  2. 북주기  3. 성벽  4. 성가퀴  5. 돌구덩이(石洞)

<그림 10> 동벽 2구간 돌구덩이 평․단면도(『오녀산성』18쪽)  
<그림 11> 동벽 5구간 평면도 - 11개 돌구덩이(D1~D11)의 위치(『오녀산성』21쪽)  


  <그림 12> 동벽 5구역 성벽 꼭대기 돌구덩이 평․단면도(『오녀산성』24쪽)
   1. D2 평․단면도  2. D3 평․단면도 3. D4 평․단면도  4. D9 평․단면도





3) 배수시설
산성이나 평지성이나 성안의 물을 밖으로 빼내는 배수시설은 아주 중요한 시설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고구려 산성들은 이 문제에 대해 상당히 많은 시설을 하였다. 성안에 큰 못을 파서 급류가 성벽에 직접 닿지 않고 못에 모였다 넘쳐흐르게 한다거나 수문, 배수구 같은 시설을 설치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오녀산성은 다른 방법을 채택하였다.

수문은 일반적으로 성안에서 물이 모이는 낮은 곳에 자리 잡는다. 이런 곳은 동시에 산성을 드나드는 중요한 통로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녀산산성의 계곡물이 모이는 가장 낮은 곳에 성문과 수문을 설치하지 않고 인공으로 동벽 9구역의 성벽을 쌓았다. 이 성벽 꼭대기 부분은 널돌로 덮어 쌓았고, 성벽 안과 산비탈이 이어져 있기 때문에 밖에서 안으로 층층이 쌓아올려 안이 높고 밖이 낮은 경사를 이루었다. 이처럼 특수한 형태의 성벽은 일거양득의 효과가 있다. 하나는 물이 흘러내리는 곳을 통해 적군이 직접 입성하여 공격하는 것을 방지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산골짜기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이 성벽 꼭대기로 흘러나가는 것이다. 고구려 이른 시기의 흑구산성과 전수호산성에도 비슷한 성벽이 발견되었다.

계곡이 아주 커서 한꺼번에 많은 물이 쏟아져 나오는 곳은 수문이나 배수구 가지고 감당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이처럼 낮은 곳에 성벽을 단단하게 쌓아 그 위로 물이 넘쳐흐르게 하는 것이다. 이 경우 계곡을 막은 것이기 때문에 성벽이 물에 휩쓸리기 쉽다. 그런 점을 방지하기 위해 성 꼭대기가 성 안쪽보다 높지 않게 하고 밖으로 비스듬하게 만든 뒤 납작한 널돌을 얹어 물이 쉽게 넘쳐흐르도록 한 것이다. 물론 이 경우 이 성벽 위에는 성가퀴를 설치하지 않는다. 이러한 설치공법은 고구려 후기에도 이어서 사용하였는데 요령성 장하(庄河)에 있는 성산산성 남문 옆 계곡이나, 관전(寬甸) 소성자산성(小城子山城)에서도 볼 수 있다.

2. 성안에 설치한 부속시설

1) 차단성

오녀산성은 800m 높이의 꼭대기에 주요시설이 있으나 그곳은 절벽 위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따로 많은 성벽을 쌓을 필요가 없었다. 오녀산성의 성벽은 주로 산중턱에 쌓아 일차적인 방어를 하였다. 그러나 산중턱의 성벽이 무너졌을 경우 다음 공격의 목표가 되는 정상으로 가는 곳에 대한 방어시설이 필요한데 바로 차단성이 그 구실을 하였다.
오녀산성 꼭대기를 올라갈 수 있는 곳은 두 곳이 있다. 한 곳은 서쪽으로 현재 서문이 있는 골짜기이다. 골짜기의 경사가 심하고 좁기 때문에 성문과 계곡 양쪽의 절벽에서 잘 지키면 되는 천혜의 지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골짜기에 특별한 시설을 하지 않고 대신 성문을 튼튼하게 쌓았다. 다른 한 곳은 바로 서문 동쪽에서 동벽으로 내려오는 골짜기인데 이곳은 서쪽 골짜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사도가 낮고 너비도 넓은 편이다. 바로 이러한 계곡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꼭대기 가까운 곳에 두 개의 차단성을 설치하였다.  

가) 1호 차단성

1호 차단성이 있는 산골짜기는 동서로 오르내리는 길이기 때문에 차단성은 남북으로 쌓았다. 산골짜기 윗부분에 4단계의 흙으로 쌓아올린 대(土臺)가 있는데 인공으로 닦아 가지런히 한 것처럼 보인다. 토대의 높낮이(落差)는 보통 2m 안팎이고 바깥 가장자리에 모두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는 둘레돌(列石)이 있다. 1호 차단성은 4번째 토대 바깥쪽에 쌓았는데 양쪽이 모두 바위절벽이다. 남쪽 끝은 절벽과 맞닿아 있고 북쪽 끝과 절벽 사이에는 1.5m 터진 곳이 있는데 문길이었을 것이다.   
바깥벽은 쐐기꼴돌과 돌덩이로 쌓아올렸고, 북쪽 끝에는 큰 널돌(石板)을 하나 세웠는데, 벽의 겉쌓기는 가지런하지 않다. 성안은 북꼴돌과 긴돌덩이로 쌓아올리고 그 위에 흙을 덮었다. 흙을 덮은 곳과 서부 토대 아래 부분이 서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안벽은 보이지 않는다.
성벽 바깥쪽에 성가퀴를 쌓았는데 너비 0.8~1m, 높이 0.2~0.5m다.
이 성벽의 위너비는 1.3~2.2m, 남은 높이 1.5m(그림 27)다.
1호 차단성 양 옆의 절벽 위에서 각각 초소터 1곳씩이 있었다.  

나) 2호 차단성  

1호 차단성 동쪽 비탈을 따라 밑으로 80m 쯤 내려와 있다. 길이가 18m인데 많이 훼손되었다. 남북으로 이어지는데 북쪽 끝은 절벽과 이어지고 남쪽은 산비탈과 이어진다. 간신히 골짜기의 절반을 막았는데 바깥벽은 쐐기꼴로 쌓았고 꼭대기에는 흙을 덮었다. 너비 2m, 남은 높이 1m이다.



  <그림 13> 동북 골짜기 1호 차단성 평․단면도(『오녀산성』 26쪽)  

2) 샘과 못

가) 산꼭대기의 샘과 못

성안 산꼭대기 중부의 서남쪽 절벽 가까운 곳에 있는데 산꼭대기 지세 가운데 가장 낮은 곳으로 속칭 “천지(天池)”라고 한다. 평면은 긴네모꼴이고 돌구유(石槽)처럼 생겼다. 4면 둘레가 대부분 암벽이고 남북 양면의 벽면은 평평하다. 다만 인공으로 파낸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다.
서벽 아래 부분은 대부분 쐐기꼴 돌로 쌓았는데 기단부 위치가 옮겨져 벽면이 가지런하지 못하다. 위 부분은 쐐기꼴돌, 돌덩어리, 널돌을 섞어서 쌓았는데 벽면의 층위가 분명하지 않은 것을 보면 후대 사람들이 덧쌓은 것으로 보인다. 동벽은 자연 석대인데 못 안쪽으로 계단처럼 3층이 이어져 내려간다.
못 바닥은 평평한 바위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기울어 있고, 북벽 아래쪽 부근에 길게 패인 도랑(溝槽)이 있는데 너비 1.2m, 깊이 0.35m이다. 서남 모서리 아래쪽 우묵하게 파진 곳이 못 안에서 가장 깊은 곳이다. 못 아가리는 너비 3.3~5m, 길이 11.5m이고, 바닥은 3.5~4.8m, 길이 11m, 깊이 1.5m이다. 못의 벽 바깥 가장자리를 빙 둘러 돌담이 이어졌다 끊어졌다 하게 쌓았는데 못의 벽에서 0.5~1m 쯤 떨어져 있고, 동서 길이는 12.7m, 남북 너비 5~6.4m, 높이 0.4~1m이다(컬러사진 9-1, 사진 8-1, 2).
북벽쪽에 도랑을 파고 바닥이 서쪽으로 기울어진 것은 물이 줄어들더라도 남은 물이 한쪽으로 모여 쉽게 퍼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가장 깊은 서남모서리에 우묵하게 파진 곳이 있는 것도 같은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못 동벽 바깥쪽에 우물이 하나 있다. 돌덩이와 쐐기꼴돌로 쌓았는데 우물물과 못물 사이의 담은 속으로 통하고 있다. 평면은 긴네모꼴인데 길이 0.9m, 너비 0.7m, 깊이 1.2m이다.
이 정도의 못에는 대략 76㎥의 물을 저장할 수 있는데 1㎥=1000ℓ이므로 75,000ℓ가 되고 집에서 쓰는 18,9ℓ짜리 큰 생수통 3,968통 정도의 수량이 된다. 만일 한 사람이 하루 18.9ℓ 짜리 1통의 물을 소비한다고 하면 4000명이 쓸 수 있는 양이다. 문제는 이 못에 물이 차는 데 며칠이나 걸리느냐 하는 것인데 샘이 붙어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채워진다고 보아야 한다. 만일 하루 한 사람이 1ℓ만 사용한다면 몇 만 명이 사용할 수 있고, 유사시 합심하여 버틴다면 얼마든지 많은 군사들이 견딜 수 있는 충분한 양의 물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2003년 못의 물을 모두 퍼내고 정리하는 당시 바닥에 쌓인 뻘 속에서 고구려시대(오녀산 제4기 문화)의 유물이 나왔는데, 점토로 만든 두레박(陶罐), 등잔과 나무제품 같은 것들이다.

나) 샘구멍(泉眼)

산허리 동벽 9구간 성벽 안쪽에 천연 샘구멍이 하나 있는데 북쪽에 큰 바위가 하나 가로로 누어있다. 물은 큰 바위 남쪽 틈에서 흘러내려온다. 산 아래 성안의 중요한 수원(水源)이 된다.

   <그림 14> 못과 샘 평․단면도(『오녀산성』 46쪽)  

3) 망대

성 꼭대기 동남쪽 끝에 속칭 “점장대(點將臺)”가 있는데 해발 806.32m 지점으로 산성의 감제고지(瞰制高地)다. 밑에서 올려다보면 높이 우뚝 솟아있고 천야만야한 절벽이다. 위에는 자연히 형성된 석대(石臺)가 있는데 석대 표면은 평평한 편이고 동남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석대 위에 인공으로 파낸 둥그런 작은 구덩이가 하나 있는데 지름 10㎝, 깊이 8㎝이다. 기둥구덩이 가운데 남아있는 것일 가능성이 있다. 석대의 너비는 15m, 길이는 17m이다. 높은 석대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시야가 확 트여 혼강의 물길과 그 양쪽 기슭을 살필 수 있는 가장 좋은 지점이다.     
산꼭대기 주봉에서 사방 둘레의 동정을 살필 수 있는 또 다른 자연 석대들이 많다. “소점장대(小點將臺)”, 서남모서리 석대, 서문 남쪽 절벽 위의 석대와 북쪽 절벽 위의 석대 같은 곳은 모두 산 아래 동정을 살피는데 아주 알맞은 곳이다. 그 가운데 서문 남쪽 절벽 위의 석대 가장자리에는 낮은 담장이 절반 이상 쌓여 있는데 현재 남은 것은 1~3층으로 길이 약 2m, 높이 0.3~0.5m이다. 담 속은 흙으로 메웠는데 아직 발굴하지 않아 구체적인 모양새는 알 수 없다.

4) 성문

오녀산성에는 산꼭대기의 서문, 남벽의 남문, 동벽의 동문처럼 모두 3개의 문이 있다. 성문은 산성을 논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문제이다. 다만 이 성문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논문에서 자세하게 다루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Ⅳ. 맺는말

이상에서 오녀산성의 축성법을 본 결과 다음과 같이 몇 가지 특징을 간추릴 수 있었다.

Ⅱ장에서 본 성벽(城牆) 쌓는 구조(겉쌓기와 속쌓기)에서 나타난 특징.

1. 오녀산성의 겉쌓기와 속쌓기는 ① 성돌의 생김새와 규격이 너무 다양하다. 성돌의 표준화 정도가 낮다는 것이다. ② 성돌이 가공기술이 주변 산성에 비해 조잡하다. ③ 따라서 고구려 성벽 겉쌓기의 특성 가운데 하나인 육합쌓기가 거의 되지 않았다. 이것은 오녀산성 성돌이 다듬기 좋은 쑥돌(화강암)이 많지 않아 그럴 수도 있고, 가공기술면에서 숙련도가 낮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만약 후자의 경우라면 오녀산성의 축성 연대가 주변 산성보다 더 앞선다는 조심스런 결론도 예측도 해 볼 수 있는 것이다.
2. 오녀산성 성벽 안벽은 ① 주로 약간만 가공한 돌덩이나 널돌을 사용하여 바깥벽에 비해 공력을 덜 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② 안벽은 들여쌓기를 하지 않았다. ③ 안벽은 대부분 북주기(培土)를 했다. ④ 성벽 안쪽에 북주기를 하여 생긴 평평한 곳에 너비 2m 쯤 되는 말길(馬道)이 놓여 있다. ⑤ 기단부 옆 흙을 파서 북주기를 하기 때문에 판 곳에 너비 2m, 깊이 1m 쯤 되는 도랑이 생기고 비가 올 때는 물이 흘러내려가 성벽을 보호하는 작용을 하였다.   
3. 오녀산성 성벽은 대부분 들여쌓기를 했는데 그 기울기가 보통 10도 안팎이며, 기단부의 큰돌덩이와 안벽은 들여쌓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성벽 꼭대기에는 황토로 0.2m쯤 포장(鋪裝)되어 있다. 동벽 2구간과 5구간에 성벽 꼭대기에는 널돌(板石)이 평평하게 깔려 있고 황토가 그 널돌 위에 깔려 있다.
5. 튼튼한 기단부(굽도리)를 조성하기 위해 맨 아래 기단은 큰 돌로 받쳤다. 큰 돌을 1~5층까지 쌓아올려 기단부를 단단하게 한 뒤 그 위에 쐐기꼴돌을 정연하게 쌓아 올렸다. 기단부를 튼튼하기 위해 그렝이 공법도 사용하였다.
6. 가파른 비탈에도 수평으로 쌓았다. 비탈에 성벽의 기단부를 수평으로 쌓으려면 비탈이 심한 곳은 아래쪽은 더 높이 쌓고 위쪽은 얕게 쌓아 수평을 이루게 쌓아야 한다. 이럴 경우 자연히 성벽 꼭대기에 층이 생기게 되는데 오녀산성 남벽에서는 꼭대기에 계단을 만들어 마무리를 잘 했다. 계단 사이의 거리는 2~3m이며, 아래로 내려가며 비탈이 심해지면 계단의 낙차가 0.4~0.6m로 낮아진다.

Ⅲ장에서 본 성벽과 성안에 설치한 부속시설의 특징

1. 성가퀴는 현재는 3구간이 제일 잘 남아있다. 성가퀴의 너비는 1~1.5m로 구간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은 높이는 0.2~0.8m로 눈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높이이다.
2. 성벽 위 성가퀴 안쪽의 돌구덩이는 2구간과 5구간에서 대량으로 발견되었는데, 모두 19개가 발견되었다. 돌구덩이와 돌구덩이의 사이는 0.8~2m 간격을 두고 설치되어 있다. 돌구덩이는 가로 세로가 30㎝인 바른네모꼴과 길이 0.23~0.5m, 너비 0.14~0.35m인 다양한 긴네모꼴이 있다. 깊이는 모두 4~5층으로 쌓았는데 높이는 대개 0.76~0.82m(정확하게 파악한 5구간의 수치)이다. “평소에 깨진 돌이나 잡물을 떨어져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구덩이 입구를 덮는 널돌이 있다”는 것을 밝힌 것도 새로운 성과이다.
한편 돌구덩이의 쓰임새에 대해 ‘구덩이에 기둥을 세우고 널판을 대 목제 치첩을 만들었다“는 새로운 설을 주장하였는데, 분석 결과 이 설도 다른 설에 비해 더 높은 설득력을 갖지 못했다. 결국 이번 발굴에서도 돌구덩이의 쓰임새를 결정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은 것이다.
3. 차단성은 서문 동쪽에서 동벽으로 내려오는 골짜기에 있는데, 이곳은 서쪽 골짜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사도가 낮고 너비도 넓은 편이다. 바로 이러한 계곡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꼭대기에 가까운 곳에 두 개의 차단성을 설치하였다.
4. 샘과 못이 있는데 못 아가리는 너비 3.3~5m, 길이 11.5m이고, 바닥은 3.5~4.8m, 길이 11m, 깊이 1.5m이다. 이 정도의 못에는 대략 76㎥의 물을 저장할 수 있고, 많은 군사들이 견딜 수 있는 충분한 양의 물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5. 산성의 감제고지(瞰制高地)인 해발 806.32m 지점에 있는 “점장대(點將臺)”와 “소점장대(小點將臺)”, 서남모서리 석대, 서문 남쪽 절벽 위의 석대와 북쪽 절벽 위의 석대 같은 곳은 모두 산 아래 동정을 살피는데 망대들이 있다. 특히 서문 남쪽 절벽 위의 석대 가장자리에는 낮은 담장이 남아 있어 앞으로 연구의 대상이 된다.

끝으로 발굴보고서에서 주장한 두 가지 사항에 대한 필자의 의견을 밝히고자 한다.

1. 발굴보고서에서는 석성의 유래를 하가점하층문화에서 찾았다.

일찍이 지금부터 3000~4000년 전 요하 상류 하가점하층에 살던 북방민족이 이미 산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이 산성은 대부분 낮고 경사가 완만한 산지 위에 분포되어 있고, 높은 산꼭대기에 쌓은 것도 있다. 다만 성벽 몸체는 빈약하고 낮았으며, 석재는 대부분 약간의 가공을 거친 얇은 널돌이나 돌덩이었다. 북표시(北票市)의 강가둔(康家屯)과 부신현(阜新縣)의 평정산(平頂山) 따위다. 오녀산산성은 북방민족의 산성 축조 전통을 이어받았지만 성터를 잡거나 축성법 같은 것은 자신만의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필자도 이 문제에 대해 상당히 많이 생각해 보았고 현장답사도 해 보았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첫째, 하가점하층문화에서 발견된 석성들의 정확한 축성연대를 밝히는 것이다. 당시의 유물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성벽도 그 때 쌓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사실 하가점하층문화의 석성에 대한 논문을 몇 편 섭렵해 보았으나 당시의 축성법을 정확하게 알고, 그 석성의 축성연대를 명확하게 알 수 있기에는 아직 연구성과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둘째, 하가점하층문화에서 고구려까지는 적어도 1000년에서 2000년에 가까운 시차가 있는데 그 오랜 기간 동안 돌로 성을 쌓는 문화가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만일 고구려 석성의 원류가 하가점하층문화라면 1000~2000년을 뛰어넘어 어떻게 그 산성 축조의 전통을 이어받았는지를 밝혀야 할 것이다.
이 문제는 앞으로도 매우 중요한 연구 주제이다. 중국의 중원지역에는 전혀 없는 석성이 어떻게 고구려에서 꽃을 피우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연구하는 데는 언제나 하가점하층문화의 석성이 등장할 것이다. 그러나 그 문제는 위에서 든 두 가지 연구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2. 발굴보고서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고구려 초기 왕도의 탐구와 토론”이란 제목으로 “오녀산성은 고구려의 첫 수도인가”하는 매우 본질적인 문제를 다룬다. 사실 중국에서도 80년대까지도 ‘오녀산성이 고구려의 첫 수도가 아니다’는 주장이 있었다. 오녀산성이 고구려 수도라는 결정적인 고고학적 성과가 없다는 것이 이유다. 발굴보고서에서는 “오녀산산성을 발굴한 결과 이 성이 고구려 초기 도성이라는 관점이 비교적 그 이유가 충분하고 믿을만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 증거를 다음과 같은 5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1. 고구려 건국 도읍의 물질 유적
2. 성벽 축조형태의 원시성
3. 건도 전과 천도 후의 문화 유적 분석
4. 오녀산 주위 고구려 조기 유적에 대한 분석
5. 문헌에 기재된 실증

이 논문의 주제가 오녀산성이 고구려의 첫 수도인가 아닌가 하는 점을 논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5가지 모두를 다루지는 않겠다. 다만 두 번째 성벽의 축조형식이 원시적이라는 점을 가지고 그 논리를 뒷밭침하고 있는데 과연 충분한 증거가 되는지만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보고서는 현존하는 일련의 고구려 초기 산성 가운데 오녀산산성의 성벽 축조형태는 상대적으로 시초(原始)인 편이라고 주장하고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점을 들고 있다.

① 고구려 초기 산성의 성벽 위에는 일반적으로 왜소한 성가퀴를 설치하고 성가퀴 안쪽 바닥에 돌구덩이를 설치하는데 집안 환도산성, 패왕조산성, 환인 고검지산성, 신빈 흑구산성 같은 성들이 그렇다. 오녀산산성은 이러한 특징을 갖추는 동시에 성벽을 쌓는 돌구덩이나 축조방법을 보면 위에서 본 산성과 구별이 된다.
② 고구려 초기산성 안팎 겉쌓기는 절대 부분이 바닥에서 꼭대기까지 일률적으로 쐐기꼴돌을 채용한다. 이러한 축조방법은 고구려 중후기 석축산성인 요양의 암주성산성, 심양 석대자산성 등에서도 그대로 사용하였다. 오녀산산성 성벽 겉쌓기에 사용한 석재는 쐐기꼴돌 이외에 큰 돌덩이, 돌멩이, 널돌 같은 것을 사용하였다. 석재가 다르고 축조방법도 차이가 있다.
③ 오녀산성 성벽 바깥벽을 쌓을 때 1~5층의 큰돌덩이로 기단부를 쌓는 방법은 다른 고구려 초기산성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④ 안벽 겉쌓기를 돌덩이와 널돌로 쌓는 특징은 다른 고구려 초기 산성에서 발견된 예가 아주 적다.
⑤ 안팎 겉쌓기를 모두 쐐기꼴돌로 하는 성벽은 바깥벽이나 바깥벽꼭대기만 쐐기꼴돌로 쌓은 성벽보다 시기가 늦다. 이런 점을 통해서 본다면 오녀산산성은 다른 고구려산성보다 이르다고 할 수 있다.
이상 5가지의 특성이 주변의 초기 산성에 비해 시기가 빠르다는 점에 대해서는 필자도 동의한다. 그러나 이 산성이 서기전 37년부터 서기 3년까지 40년 동안 고구려의 수도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는 아주 불충분한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다른 논문에서 이미 보았지만 많지는 않지만 성벽에서 나온 유물들은 모두 4~5세기에 해당하는 오녀산성 제4기문화인 것이다. 축성법을 통해서 본 연대도 3세기 이전으로 올려 잡기가 어려운 실정이며 적어도 1세기에 쌓았다고 주장하기에는 너무 다양하고 과학적인 축성법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축성법을 통해서 오녀산성이 고구려의 첫 수도라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은 적어도 현재까지의 발굴과 연구 성과로는 무리라고 생각한다. 이 문제에 관해서도 앞으로 좀 더 진전된 성과가 나타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