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句麗

고구려와 수나라의 동방대전

吾心竹--오심죽-- 2010. 9. 2. 19:16

고구려와 수나라의 동방대전 1


▶  6세기의 대외관계

 서기 6세기 들어, 유목민족들의 할거에 의해 백년이 넘도록 분열을 격던 중국의 정세는 급견하게 된다.  북방 몽골지역의 드 넓은 지역은 현태 터키계열로 추측되고 있는 돌궐족이 차지하게 되고, 중국 대륙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진출하던 수나라에 의해 점차 통일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고구려의 사정은 여이치 않았다. 고구려는 장수왕 이래로 남북조 왕조를 동시에 견제하는 2중외교 정책으로 중국과는 대체로 평화기조를 유지하면서, 한반도에 대해서는 꾸준한 남진정책으로 통일을 이룩하려 하였다. 하지만 신라와 백제의 연합에 의해 여러번 남진정책이 실패함으로 인해,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절에 확보하였던 한반도 중부 지방을 모두 잃어 버리고 말았다.

 특히 신라에서는 이사부와 같은 명장이 나오면서, 고구려 10성을 빼앗고 현재 함경남도까지 진출하는 등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더구나 신라는 진흥왕대에 들어서 강성해진 무력을 바탕으로, 그동안 견고하게 유지했던 나제동맹을 별안간 깨고 한강유역을 차지하는 등 한반도정세역시 어지럽게 얽히고 있었다.

 이렇게 국제 정세가 고구려에 불리해졌지만, 중국의 동진이나 북제 수 등의 나라와 다각외교를 펼침으로써 평화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끝없이 동진하던 수나라는 고구려 평원왕 32년 서기 589년에 마침내 동진까지 멸망시키고 약 300여년 간 분열되었던 중국을 통일하여 버렸다.
 하지만 수나라의 중국통일은, 그들의 일취월장하는 국력을 볼 때 충분히 예상되어 오던 일이었다. 이미 평원왕은 4년전에 도읍을 장안성으로 옮기는 등 전시체제를 정비하고 있었다.

 여기서 장안성이 어디냐는 고증학적 문제가 나오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볼 때 평양인근 지역일 것으로 생각된다. 즉 도읍을 옮겻다는 표현을 썼긴 하였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전지체제를 갖추기 위해 조정과 주요대신및 귀족들의 거처를 장안성으로 옮겼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무튼 수나라가 동진을 멸망시키고 통일을 달성하자, 고구려는 즉시 전시체제를 확립하고 군량을 확보하는 등 기민하게 대처하였다. 이에 수나라는 이러한 고구려의 행위를 도발로 간주하며, 조공의 예를 갖추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선전포고와 다름없는 강력한 유감표명을 보내왔다.
 
 이제 중국대륙을 통일한 중원의 강자 수나라와, 동북방의 맹주 고구려와의 대 결전은 시간문제였다. 다만 삼국사기에는 평원왕이 사과하려다가 미처 하지 못하고재위 32년 10월에 사망한 것으로 어중간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여기에는 삼국시대의 역사를 정립한 신라와 이를 편찬한 김부식의 입방이 어느정도 반영되었을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만약, 광개토대왕릉비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이러한 생각은 아마도 민족주의나 국수주의로 매도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광개토대왕릉비의 발견으로 인해, 실제 삼국의 역사와 삼국사기에 나와있는 역사 사이에는 상당한 빈공간과 서로다른 부분이 있음이 확인되었다.

 즉 평원왕은 수나라의 일방적인 유감표명과 사과요구를 거부하고, 당당하게 국가의 자존을 지켰던 것이다. 국가의 국방을 강화하는 행위가 어떻게 무력을 동원할 명분이 될 수 있으며, 사과할 성격이 되는 것인가? 그것은 어떻게든 전쟁구실을 만들고, 고구려를 신하국으로 만들 수나라의 속셈에 불과하다. 그렇게 신하국으로 전락해 버린다면, 결국 고구려는 장수왕 이후 유지되어 오던 중국과의 대등한 외교수준도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힘겹고, 불합리하며, 차별적이고, 일방적인 것인지는 한군현의 성립을 통해 충분히 보아왔던 고구려 였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300년이 넘는 투쟁을 통해 이땅에서 힘겹게 한군현의 세력을 모두 몰아내었는데 이제와서 그와같은 일을 다시 반복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제 모든 과제는 평원왕의 장자였던 영양왕에게 넘겨졌다.


 *개인적으로 고구려와 수나라의 경계선은 굵은 검은실선으로 보고있습니다 *  계지역 서편에 있는 강이 난하입니다.

우리민족의 수호왕 영양대왕

 영양왕은 고구려 제26대왕이며, 재위기간은  590∼618년까지 29년이다. 현재 우리는 고구려를 회고하면서  영웅왕으로 칭송되는 광개토대왕을 가장 많이 거론하고 있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영왕왕을 가장 많이 거론하였다. 그는 재위 29년중 무려 20년을 수나라와의 전쟁으로 보냈으며, 네차례 걸친 대 결전에서 모두 승리를 거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호왕이다.  

 영양왕은 풍신이 준수할 뿐 아니라,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겠다는 제세안민(濟世安民)의 뜻을 표방하였다. 

 하지만 영양왕도 처음부터 수나라와 적대적으로 나갔던 것은 아니었다. 영양왕은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의 힘을 잘 알고 있었고, 급 성장하고 있는 신라의 힘도 견제해야만 하였다. 사실 고구려는 신라가 근 100년에 걸쳐 신하국이라 하여 지나치게 방치하고 있었지만, 신라는 오랜 세월 굴욕을 참아내며 국력을 신장시켜, 고구려 땅 5백여리를 차지하지 않았는가?

 따라서 영양왕은 약 8년동안 평화정책을 유지하며, 수나라의 동태를 살폈다. 그런데 전쟁은 전혀 엉뚱한 구실로 벌어지고 말았다. 
영양왕은 재위 9년 서기 598년에 말갈족 1만명을 이끌고 요서지방을 순행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수나라에서는 이것을 영토침입으로 간주하여, 영주를 지키고 있던 위충이라는 장군으로 하여금 공격하게 하였다. 이어 그 보고를 들은 수문제는 그의 손자인 한왕  양과 백전노장의 왕세적 장군을 원수로 삼아 , 30만명의 군사를모아 마침내 고구려를 침공하니 드디어 고구려와 수나라간의 20년 전쟁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  1차 동방대전 수나라의 침입

  *당시 고구려 영토는 임유관 우측에 있는 난하를 중심으로 형성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지도는 저의 개인적인 의견과는 다르며,  다만 우리나라 역사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지도입니다. *


 당시 영양왕이 말갈족만을 거느리고 요서지방으로 나아간 것에 대해, 삼국사기에서는 '침범'이라고 규정하였다. 하지만 이런 표현에는 동의할 수 없다. 영양왕이 정말로 무력도발을 시도하였다면,  말갈군사를 충분히 통제할 수 있을 정도의 고구려 군사를 대동해야만 되었을 것이다.

  더구니 당시 요서는 고구려 영토였으며, 오히려 고구려 영토 내에 수나라가 불법적으로 영주를 설치하고 위충으로 하여금 총관을 삼아 영토분쟁을 촉발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러한 입장은 지나치게 고구려의 시각으로 본다는 문제점이 있긴 하지만,  확실하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당시 영양왕은 수나라에 구태어 무력도발을 할 의도도 없었고, 또 영토침범이라고 할 수도 없다는 점이다.

 단지 1만명 그것도 비록 고구려내의 유목민족이긴 하지만, 자치권을 가지고 있는 말갈족만으로 구성된 병력으로 무력도발을 시도하였다고 보는 관점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야말로 국경지대를 순행한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영토침범행위로 선언한 수나라는 무려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요서공격에 나서게 되었다. 대분열의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는, 영토적인 면에서나 인구수에서 1/10 정도에 지나지 않은 고구려를 집어 삼키는 일은 식은 죽 먹는 일 정도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옛 졸본 고려 시절부터 근 800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니고 있는 나라이며 수많은 외적의 침입에도 국가의 독립을 지킨 나라이다. 그러나 중국은 어떠한가?  선비족등의 침입으로 인해 수 없이 분열을 격었으며, 중국에서 성립한 그  어느 나라도 고구려보다 더 오랜 역사를 지킨 나라는 없다.

 한왕 양은 현재 북경의 만리장성이 끝나는 지역인 임유관에서 나오자 마자 장마비를 만났고, 고구려는  그들 주력병을 요택이라는 습지로 몰아 넣었다.  더구나 고구려의 지형을 충분히 파악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성급한 공격은 심각한 보급의 문제를 낳았고,  수군을 담당하였던 주라후는 바다 한복판에서 폭풍을 만나 전쟁한번 못해보고 괴멸당하고 말았다.

 여기에 주력 30만을 이끌던 한왕 양 역시, 고구려의 지구전에 휘말려 요택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못한체 군량보급조차 차단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요택은 거대한 무덤이 되고 말았다. 한왕 양은 제대로 된 전쟁한번 못해보고 퇴각하고 말았지만, 굶주리거나 전염병등에 의해 죽어가는 병사들이 속출하기 시작하였다.

 기록에는 죽은자가 10에 8,9 였다고 하니 살아 돌아간 사람은 3~5만명이 전부였을 것이다. 반면 고구려 군사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물론 때마침 불어닥친 장마나 폭풍의 도움을 받긴 하였지만, 고구려의 굳건한 방어태세가 잇었기에 가능한 승리였다. 또 이것은 이후 벌어지는 수나라와의 기나긴 전쟁에서도 수차에 걸쳐 증명되는 것이다.

 따라서 598년 여름 요서에서 벌어진 1차 동방대전은 고구려의 명백한 승리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와 수나라의 동방대전 2

 -  요수강의 영웅들-

서기 598년 수나라는 영양왕이 말갈병 1만명과 함께 요서지방을 순행한 것을 영토침범으로 규정한 후, 이를 구실로 삼아 수문제의 손자인 한왕 양을 총장으로 삼고 30만의 대군으로 침공하였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고구려의 철저한 방어태세에 막혀 요동지방을 넘지 못하였고, 여기에 장마까지 겁쳐 30만명중 80%~90%가 사망하고 말았다. 이렇게 유리한 조건에서 고구려는 재차 예상괴는 수나라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화친을 요구하였고, 막대한 군사적 피해를 본 수나라 역시 여기에 응하게 되었다.

 수문제에 이어 왕위에 오른 수양제는 사실상 수나라 건국자라 할 수 있을정도로 군사적 식견도 뛰어난 인물이었으며, 형을 밀어내고 황제의 자리에 오를 정도로 야심찬 인물이기도 하였다.
 수양제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 고구려를 치는 일이었지만, 지난날 화친을 성사시켰기 때문에 이렇다할 명분도 없었고, 또 고구려가 단순한 군사작전만으로 무너뜨릴 수 있는 국가가 아니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수양제는 가장먼저 현재 북경지방인 탁군을 개발하여 고구려 침공의 전진기지로 삼았다. 중화의 변방에 불구하였던 북경비방이 본격적인 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도 수양제가 탁군을 집중 개발하면서 부터이다.
 수양제는 1차 전쟁의 실패 원인이 무엇보다도 충분한 보급과 병력의 충원이 이루어 지지 않았기 때문임을 잘 알고 있었다.

 또 고구려를 침공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  고구려왕이 직접  입조할 것을 요구하는 등, 고구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를 줄기차게 가하였다. 여기에 고구려는 남방전선을 안정시키기 위해 백제와 신라와도 전쟁을 치루는 등, 고구려에 매우 불리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고구려가 이렇게 남방전선에 주력하는 동안 수양제는 모든 준비를 끝냈다. 아마도 역사상 최초의 전국민 총동원 체제였을 것이다. 수양제는 탁군을 임시 행궁으로 삼아, 발해와 갈석의 군중을 회유하고 요서를 침범하였으며, 입조를 하지 않는 다는 내용의 대의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나 현재 만리장성이 끝나는 곳인 갈석산과 발해연안은 엄연히 고구려의 영토로, 전쟁유민을 모으거나, 혹은 중국내의 불안한 정세로 인해 건너온 난민들을 받아들인 것으로 결코 전쟁의 구실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럼에보 불구하고 수양제는 총 24군 113만 3800명이라는 전무후무한 대 군단을 편성하여, 서기 612년 2차 고구려 침공을 개시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군단과 군단사이의 거리는 40리를 유지하게 하여 무려 출정에만 40일이 걸렸으며 24군의 총 행렬 길이는 960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이 규모를 보고 과장이라고 한다. 즉 실제 전투 병력은 살수 대첩에 동원된 30만명이고 나머지 군사들은 머리수만 채운 허장성세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 근거 없는 말이다.
 당시 수양제는 113만의 대군을 일컬어 허장성세로서 200만 대군이라 선전하였다. 또 이 군대가 실질적인 전투 병력임이 분명한 것은, 그 군량을 수송하는 자가 배가 된다는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즉 총 동원 적게 잡아도인원이 200만에 이르는 것이다. 또 이것은 보기병만을 합친 수로 최소 10만여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는 수군의 숫자는 합치지도 않은 것이다.

 따라서 612년 고구려를 침공한 수나라의 병력은 250만 내지 최대 300만까지 육박되는 상상을 초월한 인원이었다.
 이것은 고대시대 어지간한 국가 전체의 인구가 움직이는 것보다 많은 숫자였으며, 약 270만 내외로 추산되는 고구려 전체 인구와도 대등한 수준이었다. 보통의 나라라면 이 엄청난 규모에 압도되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을 것이고, 또 수양제 역시 그것을 노렷을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는 을지문덕이나 강의식 장군같은 명장이 있었으며,  그 보다 더 위대한 천손의 후예라는 자긍심에 가득찬 고구려인이 있었다. 우선 고구려는 요수방면을 1차 저지선으로 삼고  단지 2만 정도의 병력으로 110만 대군을 저지하였다.

 그런데 110만의 대군으로도 불과 2만이 지키고 있던 요수를 건너기는 쉽지 않았다.  우선 임시로 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인 부교설치가 설계의 잘못으로 강건너편까지 미치지 못하였다. 하지만 강 건너 편과 남은 거리는 겨우 사람 한명 키에 해당하는 한길 남짓..충분히 걸어서도 건널 수 있었다.
 이에 능철장,전사옹,맹예등의 수나라 장군들은 앞을 다투어 강언덕을 넘거가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강 기슭에 진을 치고 있던 고구려군은 전혀 흐트러짐 없이 반격을 가하여 무려 이틀동안이나 방어해 냈다. 이로인해 세명의 장수는 모두 사망하였고 수만명의 수나라 군사들 역시 전사하고 말았다.

 하지만 부교가 완성되면서 부터 상황은 반전되었다. 이미 이틀간의 전쟁으로 인해 2만의 결사대는 많이 지쳐 있었고, 또 백만이 넘는 대군을 막아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수나라 군대는 한 부대가 전멸하면 다음 부대를 또 투입하는 형태로 계속하여 강기슭을 올라왔고, 동시에 포위작전도 병행하였다.

 결국 고구려군은 1만명이나 희생되었다. 여기서 전군히 전멸한 것인지 아니면 군사중 절반이상이 전사하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그들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요동성은 완벽한 방어태세를 갖출 수 있었다. 무려 110만의 대군에 맞서 싸운 1~2만 정도의 이름없는 병사들...그들은 패한것이 아니라 고구려가 거둔 거대한 전쟁의 분명한 초석이 되었던 것이다.

 

 

 

 

고구려와 수나라의 동방대전

1차 요동성 전투 - 백만대군을 막아낸요동성


 서기 612년 음력 2월 113만의 정규군과, 군량 수송 등 각종 부역을 담당하는 백만 이상의 예비군등 총 250만 내지 300만에 이르는 대 병력으로 고구려를 집어 삼킬듯이 처들어 오던 수나라의 양제는, 요하강병에서 수만의 결사대에 의해 이틀간이나 진출이 저지당하였다.
  특히 능철장등과 같은 용장을 잃은 수나라는 초반부터 작전과 전력에 큰 차질을 빚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압도적인 병력이 우세를 바탕으로 요하강을 돌파한 수나라는, 고구려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요동성(遼東城:지금의 遼陽)을 순식간에 포위하는데 성공하였다.

 산성이 발달한 고구려였지만, 요동성은 다른성과는 달리 평지성이었음으로 방어측에 결코 유리한 지형이라 할 수 없다. 또한 요동성이 무너지면 고구려의 가장 중요한 곡창지대인 요동반도 일대가 점령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여서, 이 성에 대한 승리의 향방의  곧 전쟁의 승패를 판가름 하게 될 것이었다. 당시 요동성에 얼마만큼의 병력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이 성이 가지고 있는 중요성을 고려 해 볼 때 5~10만 정도의 병력은 보유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적게는 10배에서 많게는 20배... 천연 산성이라면 모를까 평지성에서 그 많은 적들을 상대한다는 일은  기적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2월달부터 시작된 공성전은 3개월이 지난 5월달에 이르기까지 끝나지 않았다.  이렇게 오래동안 시간을 끌면서 요서(= 遼左요좌)에서의 민심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더구나 요서 해안지역은 원래 고구려 영역에 속하였지만,  수나라가 임유관등을 설치해 강탈한 곳이기도 하였다. 비록 인구 구성면에서 볼 때 중국 한족이 많긴 하였지만 이민족 왕조로 취급하고 있던 수나라에 대해 결코 우호적이진 않았다. 또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난을 피해 이곳으로 몰려든 중국 한족들도 상당 수 있었다.

 따라서 수양제는, 천하의 죄수를 사면하고 10년 동안 부역을 면해 준다는 민심수습책을 발표해야만 되었다. 하지만 요동성의 군사들은 수나라가 진영을 정비하도록 그대로 보고만 있지 않았다. 그들은 수차례 기습작전을 감행하여 수나라 진영을 크게 흔들었으며, 군수품 수송을 방해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수성전과 기습작전을 석달간이나 병행하였지만, 역시 수적 열세에 이해 차츰 형세는 불리해 지고 있었다.

 또 단순 부역에 동원된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공성전시에는 인해전술로 전환 될 수 있는 일종의 예비군 성격의 사람들이었다.  앞선 예비군이 소모되면 뒷선 정규군이 공격하는 인해전술로 수나라는 줄기차게 공격하였다. 또한 요동성이 항복하면 받아들일 거라는 회유책을 써서 성안의 민심과 군사들의 사기를 흔들어 놓으려는 시도도 하였다.

 이렇게 백여일에 가까운 공격이 지속되면서 성은 함락의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그리고 뜻밖에도 요동성안의 사람들은 소리높여 항복을 외치게 되었다.  몇달간의 기나긴 공성전 끝에 드디어 항복을 받아내었다고 생각한 수나라 장수들은 즉시 양제에게 알렸다. 그러나 이것은 시간을 끌기 위한 기만전술에 불과하였다.
 수나라가 항복요청을 받아 들인다는 내용의 칙서를 갖고 성에 진입하려 하였을 때는 어김없이 화살비가 쏟아져 내려왔다. 그리고 이런 기만전술을 몇번이고 시도되어, 양제는 고구려의 책략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렇게 요동성의 공략이 지지부진하자, 수양제는 직접 성의 형세를 둘러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눈으로 직접 둘러 보고 나서야 성의 방어 태세가 여전히 건제하며, 수나라의 사기가 크게 떨어져 적극적인 공략을 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았다.

 무려 백만 대군이 백일가까이 단지 하나의 성을 넘지 못하여 그자리에 주저 앉고 있었던 것이다. 수양제는 장수들을 크게 문책한 후 전체적인 책략을 처음부터 다시 세웠다. 즉 요동성을 비롯한 요둥방면의 주요 성들을 봉쇄한 후, 별기군을 구성하여 평양을 직접 공격한다는 계획이었다. 
 그에따라 우문술 우중문 등을 좌우익 대장군으로 삼아 30만 병력을 편성하고, 또 내호아는 수군 10여만을 이끌고 평양을 향해 진격하게 된다.

 그러나 요동성이 여전히 주력 60만 대군을 잡고 있는 상태여서, 그들은 군량 수송과 작전수행과 크나큰 차질을 빚고 있었다. 100만이 넘는 수나라 대군에 대항하여 백일 이상이나 성을 지켜낸 그들....
 현재 그들을 이끈 요동성 성주는 누구인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진주 강씨(晉州姜氏)의 시조분이 되는 강이식 장군이 이 처절한 승리를 이끌었다고 추측될 뿐이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이 기적과도 같은 승리 뒤에는, 그 엄청난 절망적인 상황속에서도 의지를 잃지 않고 일치단결하였던 고구려 민중들의 상무정신일 것이다.


고구려와 수나라의 동방대전 4

고구려의 반격, 역사상 최대의 승리

 612년고구려 영양왕 23년 음력 2월 전투병력 113만명과 비전투원 백만이상, 그리고 10만에 이르는 수군까지 총병력 250~300만을 헤아리는 대병력으로 고구려를 침공하였던 수양제..


 그러나 수(隋)양제는 요하강 전투에서 불과 2만정도의 고구려 결사대에 의해 능철장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과 10여만을 헤아리는 군사적 손실을 보았다.

  더구나 요동성(遼東城)에 이르러서는 네달간의 총력전에서 불구하고 성을 함락시키는데 실패하였다. 이렇게 여름 6월이 시작되고, 수양제는 병사의 수만으로는 요동성을 공략하기 어렵다고 판단한다.


 
 이에 수양제는 앞도적은 숫자의 우위를 이용하여 요동성을 포함한 여러성을 포위한 후 평양성을 직접 공격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리하여 내호아로 하여금 해상로를 이용하여 평양성으로 향하게 하였고,우문술(宇文述) 이하 30만 대군은 압록강 서쪽에서 집결한 후 육로를 통해 평양성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당시 내호아가 맡은 임무는 거점을 마련한 후 군사기지를 세우고, 해상을 통한 식량보급로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내호아는 육군보다 먼저 평양을 향하게 되었는데, 초기에는 기세좋게 패수(浿水지금의 대동강으로 생각됨)를 타고 평양에 상륙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런데 내호아는 부총관 주법상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0만 정도의 병력으로도 평양성을 공격하기엔 충분하다고 판단하였다.

 다만 내호아는 병선과 진영을 보호하기 위해 정예병 수만명만을 뽑아 평양성으로 향하였다. 물론 내호아의 판단이 전혀 틀리지는 않았다. 당시 고구려의 주력군은 요동선 전선을 지키기 위해 투입된 상태였음으로, 평양성은 상대적으로 방어태세가 그리 좋은 편이 되지 못하였다.
 아무 생각없이 싸웠다가는 수적인 열세에 밀려 그대로 패할 가능성도 매우 높았다. 이에 고구려는 빈 절터 속에 복병을 숨겨 놓은 후 고이적으로 패하면서 내호아의 군사들을 성안 깊은 곳까지 유인하였다.

 그리고 수나라 군대가 덫에 걸려 들자 총반격, 내호아는 수만명의 군대를 잃어 버리고 후퇴하고 말았다. 그나마 주법상이 진영을 정비하고 있어서 전멸만은 면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내호아는 포구에 주둔한체 육군이 오기만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고구려역시 내호아의 존재가 부담으로 작용할 수 밖에 없었다. 평양성이 함락되면 모든 것이 끝장이기 때문에, 여전히 수만명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는 내호아의 병력을 포구에 묶어 두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병력을 착출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더 적은 수의 병력만으로 주력 30만 대군을 막아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그러나 내호아가 포구에 갖혀 버리면서, 수로를 통한 군량 운송 계획은 큰 차질을 빚기 시작하였다.

 우문술 등이 이끈 군사는 30만 정도의 정예병이었지만, 상대적으로 군량 수송을 담당할 비전투 요원이 없었다. 그들은 장기전을 예상하여 100일치 정도의 식량을 정예병만으로 운송해야 되었는데, 평균 한 사람당  3석 정도였다고 한다. 3석이라면 아무리 가벼워도 120kg이상이다.

 그런 무게에 갑옷과 무기까지 들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넌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에따라 병사들 중에는 식량을 버리는 자가 속출하였는데, 미곡을 버린자는 목을 벤다는 막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군막밑에 구덩이를 판 후 군량을 묻기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수나라 대군은 압록강을 건너가기도 전에 식량이 바닥날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간파한 것이 바로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이었다. 비록 수나라 군대의 식량이 다 떨어져 갔다고 하여도 고구려로서는 그 정보를 입수하기 힘들었다. 고구려 군보다 몇배나 많은 적들과 싸워 승리하기 위해서는, 적에 대한 정보를 알아야만 되었다. 따라서 을지문덕에게는 단 한번의 정찰만으로도, 적의 진영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는 첩보를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였다.

 바로 을지문덕 장군 자신이었다. 그는 거짓으로 항복하면서 수나라 군의 진영을 면밀하게 살펴 보았다. 물론 적장이기 때문에 수나라 군 역시 그들의 허점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을 것이다. 또 수양제는 우중문에게 을지문덕이나 영양왕이 항복하면 반드시 포로로 잡으라는 밀명을 내렸다. 만약 포로로 잡힌다면 을지문덕의 대담무쌍한 골육지책도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그런데 뜻밖에 우문술 우중문 장군등과 동행하여 책사노릇을 하던 유사룡이 중재에 나서 을지문덕을 석방하게 되었다. 이것이 수나라 최대의 실수였지만, 이 실수를 유발시킨 것은 을지문덕 장군의 빈틈없는 자세에 있었다. 수나라 진영에서 을지문덕 장군을 석방한 것을 후회하고 돌아올 것을 회유하였지만, 장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압록강을 건너 고구려 진영으로 가버렸다.

 이제 을지문덕 장군에게는 승리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원래는 수나라 정예병력이었던 30만 대군이었지만, 처음에는 군량 수송 때문에 나중에는 굶주림과 강행군 때문에 몹시 지쳐 있음을 단한번의 정찰활동을 통해 파악하였다. 시간은 고구려 편이었고, 고구려 군에게 약점을 노출당한 수나라로써는 수의 우외를 앞세워 최대한 빨리 평양성을 점령해야만 되었다.
하지만 을지문덕 장군은 단순한 수나라 군의 약점뿐 아니라, 향후 수나라 군영의 동태까지 완벽하게 예측하고 있었다. 장군은 거짓으로 패하는 척 하며, 적이 더욱더 최종승리를 갈구 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612년 7월의 살수(薩水),  평양성 인근 30리까지 진격하였던 수나라 군사는 아무런 성과없이 단지 을지문덕 장군의 형식적인 거짓 항복만을 받고 돌아가고 있었다. 수나라 진영역시 고구려 국왕이 직접 항복한 것이 아닌 이상, 아무런 효력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군량은 바닥나 있었고 군사들은 많이 지쳐 있었다. 이런 상태로 얼마나 오래 걸릴지도 모를 평양성 공략에 나선다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그들에게는 회군할 명분이 필요하였고, 형식상으로나마 항복을 받아 내었기 때문에 돌아가도 할말은 있었다. 또 수적으로도 몇배나 더 많았기 때문에 고구려 군이 쉽사리 배후를 치지는 못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러나 보살의 덕이 있다하여 붙여진 살수는, 그들에게 죽음의 강이 되고 말았다.  을지문덕은 즉각 추격군을 편성하여 사면에서 포위공격을 시도하였다. 처음부터 그들이 되돌아 갈 것을 예상하고 철저하게 군대를 배치시켜 놓앗던 것이다. 그리고 일시에 사면에서 고구려 군의 공세를 받은 수나라 군대는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죽어갔다.

  우중문 우문술등은 힘겹게 포위망을 뚫고 살수까지 도착하였지만, 을지문덕 장군은 또다시 그들의 후미를 타격하여 적장 신세웅을 참살하였다. 그리고 후미를 지키고 있던 신세웅이 전사하자 수나라 군영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렇게 9군으로 편성된 군사는 전멸이나 다름없는 타격을 입었으며, 압록강을 건너 올 때는 30만 5천의 병력이었지만 건너 갈 때는 불과 2700명 뿐이었다.

 이 위대한 승리에 대해, 고구려와 중국과의 싸움에서 일방적으로 중국에 우호적인 입장으로 삼국사기를 전술하였던 김부식 조차
"고구려는 한 변방의 소국으로서 능히 항거하여 스스로 보전하였을 뿐 아니라 그 적군까지 거의 다 멸하였으니, 오직 문덕 한 사람의 힘이다."
하며 그 승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612년에 있었던 이 완벽하고 거대한 승리, 역사는 이전투를 살수 대첩이라 한다. 그러나 오직 살수대첩 하나만 있었겠는가? 내호아를 상대로 한 승정에서 비롯하여, 요동성에서 벌어진 4개월간의 혈전...그리고 이름이 전해지는 요하강변의 크고 작은 성곽들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인 모두의 힘으로 만들어진 승리이다.
 을지문덕 장군이 30만 대군을 전멸시킨 일은 물론, 세계사에 있어서도 길이 남을 승전이지만, 요동방면의 선전이 없었다면 무려 300만에 이르는 수나라 총병력을 결코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비전투 요원을 뺀다고 하여도, 여전히 60만 정도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던 수양제가 우문술 등을 쇠사슬로 묶은 체 급히 퇴각하였겠는가?
  결국 다가올 겨울철을 고려 해 보았을 때, 전쟁을 강행하다가는 남은 60만 병력마저도 잃어버릴 가능성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구려로서도 손실은 있었다. 그동안 고구려 영토였던 요서땅을 상당부분 잃었다. 삼국사기에는 요수 서쪽 고구려 땅에 무려라를 빼앗고 요동군과 통정진을 두었다는 명백한 기록이 있어, 당시까지만 해도 요서땅은 고구려 땅이었음이 분명하다

 

 

 

고구려와 수나라의 동방대전 5
 - 수나라의 정복욕을 넘어선 고구려의 의지

 

 수나라의 실질적인 건국자였던 수나라의 양제, 그는 선왕이었던 문제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612년 충분한 군량과 보급을 갖춘 총인원 300여 만으로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그러나 2월달에 시작하여 4개월에 걸친 공격에도 불구하고 요동성을 비롯한 고구려의 성중 단 한곳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급기야는 30만의 정예병만으로 편성된 별동대로 평양성을 직접공격하려 하였지만 을지문덕장군에 의해 전멸당하고 말았다.
 
 수나라 병사들의 전사가가 총 몇명인지 알 수는 없지만 5개월간에 걸친 긴 전쟁과, 후반부로 갈수록 여락해진 식량사정을 고려 해 볼 때 최소 절반 이상은 죽음을 면치 못하였을 것이다.

전투인원 50만명을 제외하더라도, 부역으로 동원되었다가 사망한 사람만도 백만이 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주로 부역에 동원되었던 산동반도와 영주 탁군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급격하게 여론이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고구려로 향할경우 죽는다는 내용의 노래까지 유행하며, 민심이반을 부축였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민심은 곧 국가의 운명을 좌우한다.


 
 그러한 민심을 되돌리기 위한 방법은 오직하나, 고구려에 대해 승리로 증명하는 길 뿐이었다.  또 2차 고구려 침공에서 전혀 성과가 없엇던 것만도 아니었다. 그동안 고구려영토였던 요서지방의 비려라에 요동군과 통영군을 설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적어도 요동성까지는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갈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으며, 고구려로 볼 때는 사실상 1차 저지선이 뚫린 상태나 다름없었다.

그리하여 수양제는 613년 또다시 군사를 모집하고 고구려에 대한 침공을 단행한다. 이번에도 음력 2월, 역시 음력 9월이면 시작되는 북방의 매서운 겨울이 다가오기 전에 끝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방법은 달랐다. 단순히 병력만으로 밀어부치는 인해전술로는 고구려의 성을 결코 넘을 수 없음을 지난번의 패배를 통해 뼈저리게 느끼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수양제는 그 당시로서는 최첨단이라 할 수 있는 모든 공성 무기를 총동원하였으며, 각 진영의 장군들에게 최대한의 작전권을 부여하는 독특한 방식을 취하였다.
 당시 공성 무기로는 기본적으로 당차라 하여 육중한 쇠망치를 달고, 그것이 움직이는 반동을 이용하여 성벽과 성문을 파괴하는 당차를 비롯하여, 당차와 기능이 비슷하지만 큰 통나무를 매달아 공격하는 충차, 사다리를 펼쳐 성벽을 오를 수 있도록 개발한 운제등이 있다.

 평소에는 사다리를 접었다가, 공성전이 시작되면 사다리를 펴, 성벽을 오를 수 있도록 개발된 운제의 모습.

 최대 30~40m까지 도달할 수 있어 고구려의 어떤 성벽보다 높다.


 물론 이런 무기들은 대체적으로 평지성에 맞추어진 무기라 할 수 있는데, 문제는 바로 요동성이 평지성이기 때문에 이런 무기를 갖춘 상대에게는 취약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줄을 잡아 당겨 돌을 쏘는 석포와 성벽을 뚫는데 사용되는 충차

 하지만 수양제는 이러한 공성 무기를 대폭 보강하는 한편 비루동, 지도, 팔륜누거와 같은 신형 무기들까지 동원하였다. 비루동은 소차의 일종으로 도드레의 원리를 이용하여 사람들이 상대편에서 끌면 올라가는 기구인데, 주로 성안의 동태를 살피는데  사용된다. 지도는 전호피차라고도 불리는데성벽밑으로 땅을 팔패, 성위에서 떨어지는 화살과 돌등을 막을 수 있도록 지붕을 만든 일종의 장갑무기이다.

 그리고 륜누거는 운제와 충차를 결합한 초대형 구조물로 공성탑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공성 무기들은 충분히 물을 먹인 생나무로 만들기 때문에, 비록 운반하기에는 무겁겠지만 화공에는 의외로 강하다.
 그렇다고 기름을 충분히 확보 할 수 없었던 당시 사정을 고려 해 본다면, 이 엄청난 무기들로 중무장한 수나라 군대를 막기란 불가능 해 보였다

 수나라 군대는 수많은 물자를 투입하고자 성벽이 무너지지 않자, 그들이 숨겨두었던 비밀병기는 팔륜누거를 동원하였다. 

   이 팔륜누거는 8개의 바퀴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그 높이도 요동성보다 높을 뿐 아니라 화살이나 사람이 들 수 있는 투석무기로는 파괴하기 불가능하다. 여기에 수나라 군대는 흙을 채운 베주머니 백만개를 쌓았으니 그 너비는 30보이고 높이는 요동성과 나란하여, 팔륜 누거 위에서는 성벽을 내려 보며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 4륜누거의 모습.


 하지만 요동성은 수나라의 집중적인 공격을 15일간이나 막아내었다.  그들은 이미 1년전의 처절한 전투에서 모두들 수성전에 이골이 난 전사들이었다. 하지만 수나라 군인 우수한 장비와 월등한 군사숫자에도 불구하고 과연 저 성을 넘을 수 있을까란 회의감과 살아돌아 고향땅을 밟을 수 있을까란 좌절감이 들었다. 
 불굴의 의지를 가진자와 그렇지 못한자와의 싸움...고구려가 수나라에 비해 앞선 것은 오직 그 하나 뿐이었지만, 그것은 기적적인 승리를 만들어 내고 말았다.


 결국  수양제는 끝내 요동성을 넘어 설 수 없었다. 기록에는 양현감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고, 여기에 병역을 밭고 있던 있던 병부시랑 곡사정이 고구려로 망명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회군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 고구려의 승리이다. 다음 기록에는 수양제가 , 각종 군자와 기계 공구등을 그대로 쌓아둔체 군대를 분산시켜 야음을 틈타 급히 퇴각하였다고 되어있다. 물론 양현감의 반란이 매우 위급한 지경이었고, 어느 누구보다도 수나라 병역의 사정을 잘 알고 있던 곡사정의 고구려 망명은 매우 큰 타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점을 가만한다 하여도, 최소한의 방비책도 마련하지 못하고 퇴각하였음을 볼 때, 수나라군 역시 고구려 군에 의해 상당한 피해를 입었을 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고구려 군도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곧 추격전을 전개하여 수나라 군대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이 패배로 인해 수나라는 돌이킬 수 없는 패망의 길로 접어들었으며, 고구려는 동방의 패자라는 지위를 굳건하게 지킬 수 있었다.

 613년에 벌어진 3차 전쟁은 고구려의 승리임이 분명하다. 이것은 오직 엄청난 장비로 무장한 수나라의 정복욕을 넘어선, 국토를 지키고자 하였던 고구려인들의 강력한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구려와 수나라의 동방대전 6

 최후의 승자와 패자


598년에서부터 시작하여 16년간이나 치루어졌던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은 614년에 이르러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국력을 기울인 양대강국의 전쟁에서 어느 나라도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 하지 못한 탓에, 전쟁은 전면전 양상보다는 국지적인 전술에 의존하는 전쟁으로 양상이 바뀌고 있었다.

 1차 대전이 일어나던 598년에만 해도 고구려는 수나라의 30만 대군을 거의 군사적 손실없이 괴멸시킬 수 있었지만, 양국간의 전쟁이 그 절정에 이르렀던 2차 대전당시에는 고구려의 손실도 만만치 않았다.
 물론 을지문덕 장군은 수나라 30만 별동대를 살수에서 전멸시키는 기적의 승리를 이루어 내기는 하였지만, 적병이 고구려 최후의 저지선인 살수에 이르렀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고구려로서는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야만 되었다.

 우선 수나라 군대의 현지 식량약탈행위등을 방지하기 위해, 논밭을 모두 태우는 청야전술을 써야 했을 것이며, 민가의 집들도 대부분 헐렸을 것이다.
 그런데 요동에서부터 시작하여 평안도에 이르는 지역은 고구려 최대의 곡창지대이자 인구밀집지역이다. 따라서 적군을 전방에서 막지못하고 후방으로 끌어들여 역습하는 방식은, 그 결과가 승리로 끝난다고 하여도 결코 바람직한 전쟁양상이라고 볼 수는 없다.

  607년에 있었던 2차 대접전을 힘겹게 막았던 고구려는 613년 요동성에서 다시한번 분전함으로써, 수나라 군대의 후방 진출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요서지역에 있었던 무려라를 수나라에게 넘겨 주고 말았다. 비록 수나라의 양제는 전쟁에서 승리하지는 못하였지만 요서지방의 무려라를 차지함으로써 전술상 매우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제 적어도 요서지방까지는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군대를 파견시킬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1차 저지선이 붕괴된 것으로, 고구려로서는 국방상에 대단히 중대한 위 협이 될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불리한 여건속에서 치뤄진것이 614년에 있었던 최후의 접전이었다.

 그런데 불안정한 것은 수나라로서도 마찬가지였다. 개인적인 추정치이긴 하지만, 수나라의 무리한 고구려 원정으로 인한 직접적인 전사자 수만 해도 백여만명 이상에 르렀을 것으로 보인다. 1차 원정 당시 25만, 2차 원정당시 30만 + 수십만, 3차 원정 당시 약 10만여명정도로 추산되는데, 이것은 전투병력만을 고려한 것으로, 부역에 동원되었다가 질병이나 부상 굶주림등으로 죽어갔을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그 배수 이상이 사망하였을것이다.

 이처럼 막대한 사망자가 발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수양제는 고구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나머지 대신들의 반대를 뿌리치고 병력 모집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미 사람들 사이에서는 고구려로 가면 목만 나두고 몸만 온다는 내용의 노래가 유행할 정도로, 두려움이 퍼져 있었다.
 또 동시에 수양제를 타도하기위한 중국내 반란군의 움직임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따라서 수양제의 군사징발 명령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응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더구나 징발된 군사의 사기도 크게 떨어져 있었다. 고구려역시 사정이 여이치 못하였던 것은 마찬가지였는데, 수군을 이끈 내호아는 그런 틈새를 노려 고구려의 비사성을 점령해 버렸다.
 그리고 내호아는 승세를 타 평양성까지 육박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고구려는 3차 접전당시 망명한 곡사정이란 인물을 다시 수나라에 인도하여 주었다.  망명인사에 대한 인도조치는 논란의 여지가 있었지만, 위급한 상황에 있었던 고구려로서는 별다른 수단이 없었다.

 그리고 수양제 역시 고구려를 점령하고는 싶었지만 고구려 왕으로부터 형식상의 항복을 받은데다가, 중국 내에서 일어나는 대규모 반란사태를 진압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군대를 돌려야만 했다.
 비록 곡사정 개인에게는 가혹한 처사였지만, 그 한명을 희생시킴으로인해 고구려로서는 상당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해 10월 수양제의 입조명령을 영양왕이 거부한 것으로 보아도, 중국내 사정을 간파한 고구려의 시간벌기 작전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수양제는 다시한번 고구려를 치고자 논의하였지만, 결국 그는 내부 쿠테타에 의해 처참하게 교살당하고 말았다.

 수나라와 고구려의 16년간에 걸친 대 전쟁, 이 엄청난 전쟁은 1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세계 역사상 최대 규모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냉정하게 보앗을 때, 수나라의 영토내로 진입하여 수도를 점령하거나 수양제를 처단하지 않았으므로 고구려의 명백한 승리라고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나라의 내부 반란과 민심이반현상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역시 수양제의 거듭되는 고구려 원정 실패에서 기인하였다. 또한 네차례에 이르는 대접전 중 마지막 4차전을 제외하면 고구려가 압도적으로 승리한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4차전 역시 곡사정 이란 인물을 넘겨주긴 하였지만, 그렇다고 수나라의 승리라고 볼 수도 없다. 또한 수나라 역시 고구려 정복이라는 원래 목적과는 전혀무관한 수나라의 반체제 인사만을 인도받은 성과만을 가지고 회군하였으니, 사실상 그것은 후퇴나 다름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고구려는 최후까지 살아남았지만, 수나라는 그렇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고구려와 수나라의 동방대전.... 그것은 고구려의 최종승리라고 선언할 수 있는 위대한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