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句麗

고구려 왕가의 무덤

吾心竹--오심죽-- 2010. 9. 2. 16:06

고구려인이 남긴 위대한 유산


국내성은 고구려 두번째 도성으로, 현재 중국 길성 집안시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는 광개토태 호태왕릉과 한 장수왕릉등 무덤주인이 확인된 왕릉에서 부터 사신총
·각저총·무용총 등 벽화가 그려져 있는 무덤등, 확인 된 것만 1만 2천여기에 이른다.
 이것은 그 수량면에서나 조성 면적등을 볼때 세계 최대의 고분군이라고 할 수 있다.

 국내성은 고구려 2대왕 유리왕에서부터 20대왕 장수왕에 이르기까지 400여년 간 고구
려의 도읍이었으며  고구려가 가장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에 함께 부귀와 영화를 누렸다.
유네스코는 이들 고분 중 26기의 왕릉 급 무덤과 귀족무덤을 지난 7월 유네스코, 세계문
화유산’으로 등재했다.

 안시 고분군은 대표적으로 네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국내성 동쪽의 우산하고분군
광개토태왕릉, 장수왕릉 포함), 서쪽의 마선고분군과 칠성산 고분군,
북쪽의 산성하고분군 등이 그것이다.
 

국내성의 북쪽에서부터 동쪽으로 뻗어 나간 우산(禹山), 그 아래에 넓게 분포된
무덤떼를 통칭해 ‘우산하고분군’이라 한다. 우산하고분군은 국내성 인근의 고분군 중
가장 관심을 많이 받는 곳이다.
 이는 사신묘, 말구유무덤, 각저총, 무용총 등 벽화를 갖고 있는 무덤이 많이 있기 때문이
다. 벽화가 주목을 받는 것은 역사서에는 기록되어지지 못한, 당시의 의복과 생활, 문화
를 비롯해 세계관과 철학등을 직접적으로 보여 주기 때문이다.

 ‘우산하고분군’에는 광개토태왕릉과 장수왕을 비롯해‘오회분’, ‘사신묘’, ‘말구유무덤’ 등
이 있는데
‘오회분’이란 “다섯 개의 무덤이 마치 투구를 엎어 놓은 듯한 모양”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특히 오회분 4호와 5호 무덤에서는 사신도 등 다양한 신을 형상화한 벽화와 천문도
등이 발견돼 고구려인들의 철학은 물론이고 뛰어난 천체관측 수준을  알수 있다.
 이것은 중국의 천체관측 기술보다도 정교한 부분이 있어,  고구려는 중국의 변방문화가 아닌, 독자적이고 우숳,ㅏ 문화를 지닌 국가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다만 중국은 벽화 보존등을 이유로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이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
다. 아무런 대책없이 모실 내부를 공개 할 경우, 급격한 산화와 부식작용으로 인해 돌이
킬 수 없는 훼손 이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덤 발굴 과정에서내부의 온도와 외부의 온도 차이로 인해 이슬 맺힘 현상이
생겼고 그 습기로 인해 벽화가 크게 훼손 되었다. 더구나 오회묘 관광안내소에는 무덤
내부에 강한 조명기구를 설치하여 , 외부에서 텔레비젼을 통해 관람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강한 조명에 장시간 노출 될 경우, 자연 염료로 그려진 무덤 벽화는 치명적
인 손상이 갈 수 있다.  

  

오회분에서 동쪽으로 1킬로미터 정도 가다 보면 우산 기슭에 말구유무덤이 있다. 무덤
내부에 말구유(말 먹이통)가 그려진 벽화가 발견돼 말구유무덤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중형무덤 2기가 나란히 붙어 있는 말구유무덤은 가족무덤으로 추정된다. 말구유무덤 벽
화에서는 고구려 장수들이 말을 타고 전투를 벌이는 장면과 포로를 잡아 참형하는 장면
이 나와 고구려 장수의 무덤일 것이라는 추측을 낳고 있다.

마선고분군은 국내성에서 통구하를 건너 서쪽으로 5킬로미터 쯤 떨어진 마선향지역에
있다. 이곳에는 2천여기의 무덤이 산재해 있다. 마선고분군에는 천추묘, 서대묘 등 5기의
왕릉 급 무덤이 위치하고 있어 학자들로부터 크게 주목받고 있다. 이들 왕릉급 무덤은 지
난 7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이곳은 세계문화유산 등재 전까지만 해도 인가와 농
지에 묻혀 방치돼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왕릉 급 무덤만 어느 정도 정비된 상태지 나머
지무덤들은 여전히 인가와 농지에 묻혀 방치된 상태다. 왕릉 급 무덤들도 주변에 옥수수 등 농지에 둘러싸여 있어 초라해 보였다.

 

집안지역의 고구려 무덤 중 가장 큰 규모로 알려진 천추묘(千秋墓)는 마선고분군 초입에
있다. 천추묘의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흐른다. 이 무덤에서 “천추만세영고(千秋万歲永固,
천년만년 길이 견고하여라)”, “보고건곤상필(保固乾坤相畢,하늘 땅이 다할 때 까지 견고
함을 유지하여라)”라는 글이 새겨진 벽돌이 발견돼 ‘천추묘’라 불린다. 중국의 학자들은
천추묘를 광개토태왕의 아버지 고국양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구려 왕의 시호를
보면 고국천, 고국원, 고국양 등의 이름이 있는데 여기서 고국은 마선 지역을 일컫는다.
따라서 학자들은 지명과 릉의 규모와 형태, 위치, 등을 종합해 고국양왕의 무덤으로 추정
하는 것이다. 천추묘의 크기는 가로, 세로 85여미터의 길이에, 현재 남아 있는 높이만
15미터에 이르러 고구려 고분들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천추묘는 광개토태왕릉이나 장수왕릉과 마찬가지로 계단식 적석묘이나 지금은 무너져
겨우 형체만 유지하고 있다. 멀리서 보면 거대한 돌더미에 지나지 않지만 가까이서 보니
군데 군데 계단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특히 남서쪽 모서리 부분은 그 형체가 비교적 잘
보전돼 있다. 남서쪽 모서리 부분 돌들은 쌓은 양식이나 거대 자연석을 사용했다는 점에
서 광개토태왕릉과 흡사하다. 이는 천추묘의 주인이 광개토태왕과 가까운 시기의 왕이
라는 추측이 가능하게 해 준다. 이런 점들이 무덤의 주인이 광개토태왕의 아버지 고국양
왕일 것이라는 추측에 신빙성을 더해준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천추묘 주위에 인가들이 빼곡히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한다. 그 인가들
은 대부분 천추묘에서 나온 돌로 지어졌다고 전해진다. 당국이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
을 하면서 인가들을 걷어내자 잊혀졌던 유적인 제단이 무덤 동쪽에서 발견됐다.
또 천추묘에서는 수많은 기와조각들과 수막새가 발견되기도 해 무덤 정상부에 제사를 지
내던 향당(享堂)이 있었음을 확인시켜주기도 했다. 이는 고구려인들이 사후 세계를 중시
여기고 조상들을 모시는 일에 소홀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천추묘에서는  ‘손끝무늬’ 기와가 발견 되기 도 하였다.  손끝무니 기와란기와를 만든 도
공이 다섯 손가락의 끝 자국을 기와 한쪽 가장자리에 찍어 넣은 것이다.
손끝무늬 기와는 지금까지 발해 유적에서만 발견되어 왔다. 고구려 고분에서 이 기와가
발견된 것은 발해가 고구려 고분을 관리하는 등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임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중국은 고구려는 물론 발해 역시 중국사의 일부로 취급]
하고 있기 때문에,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였ㄷ가는 단편적인 증거만으로는 중국의 동북
아 공정을 막기 부족한 면이 잇다.

 다만 발해 시대 만들어진 기와 조각들이 추가로 이 고구려 왕릉에서 발견됨에 따라, 발
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은 분명한 사실러 보인다.
  적석총, 혹은 돌무지 무덤으로 불리는 이 피라밋 모양의 무덤들은 현재와는 형태가
다소 달랏다. 무덤위에 작은 사댱을 지어 놓고, 제를 올렸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데, 그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 기와 조각들이다. 즉 발해는 그들의 조상인 고구려의 역대 왕 묘
소를 찾아가, 제를 올리고 섬겼던 것이다.

천추묘에서 서쪽으로 1.5킬로미터쯤 가다 보면 북쪽 산 능선에 서대묘가 자리 잡고 있다. 멀리서 보면 검은색을 띄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마치 낙타의 등과 같이 두개의 봉우리를 갖고 있다. 무덤의 가운
데가 완전히 파헤쳐져 있기 때문에 이러한 형태를 띠고 있다..

중국학자들은 고국원왕때 연나라의 모용황이 고구려를 침략한 뒤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
쳐 그 시신을 싣고 갔다는 기록에 근거해 이 무덤을 미천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서대묘인근 마을의 특이한 모양의 옥수수 창고에 대해“ 고구려는 집집마다 ‘부경’이라는
식량 창고를 갖고 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바탕으로‘부경’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칠성산 고분군은 국내성에서 통구하를 건너자마자 북서쪽에 위치한 칠성산 능선에 자리
잡고 있다. 칠성산고 분군에 접근하는 길도 무척이나 힘들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수차례
길을 물은 뒤에야 찾을 수 있었다. 칠성산 고분군에만 왕릉 급 무덤이 2기나 세계문화유
산에 등재돼어 있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칠성산 871호’무덤 주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 각변의 길이가
35미터에 이르는 큰 무덤으로 규모로만 봐도 왕릉 급임은 확실하다. ‘칠성산 871호’ 무덤
에서는 통구하와 그 너머로 국내성 성곽, 지안 시내 모습, 오른쪽으로 압록강과 북한땅
등통구평야가 보이는 점을 감안해 볼때,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고 백성들을 보살피려는
왕의 유지가 담겨졌을 가능성이 크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곳을 고구려 왕가의 무덤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곳에 묻힐 수 있는
사람은 왕이거였거나 혹은 왕의 근친, 혹은 왕과 사돈을 맺은 사람등, 어떤 형태로든 왕
과 인연을 맺은 사람에 한정되어 있을 것이다. 
 설령 귀족들이라 하더라도,  왕의 특별한 신임을 받거나 왕권을 능가할 권력을 가진 자
만이 이곳에 묻힐 수 있었으리라.


고구려는 역사속으로 사라진 나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역사와의 단절은 아니다.
 고구려는 발해로 이어졌으며, 고려역시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고 나섰다.  그리고 조선은
고려를 계승한 나라이다.
 즉 우리민족이 고구려를 계승한 것은 어느 누구도 부인 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다.
현재 중국 길림성 집안현에 위치에 있기 때문에, 중국의 이름으로 유산이 등록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을 계승한 주체는 우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중국당국은 이 위대한 유산을 거의 방치하다시피 하고 있으며, 최대한 훼손을 막
고  원형을 보존할 대책이 실급한 실정이다. 우리정부 역시 비록 다른나라의 땅에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 문화 유산이 분명한, 고구려 왕가의 무덤에 대해 하루빨리 정부
차원의 대책을 내 놓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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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수왕릉은 중국 길림성 집안현에 위치한 고구려의 무덤군 중 하나이며, 현재 가장 완벽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무덤 형태는 적석총이다.
 한때 이 무덤은 어떤 장수의 무덤이라고 해서장군총으로도 불이었으나, 추가적인 발굴과 무덤 규모등을 연구하여 왕릉임이 밝혀졌다. 

  다만 장수왕릉에 대해서는 광개토 대왕릉비를 신도비로 간주하고, 장수왕릉을 광개토 대왕릉이라고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현재 광개토 대왕릉으로 알려진 곳은 그의 아버지인 고국양왕이라는 주장이다.
 신도비란 무덤으로  귀신이 통하는 길에 세우는 것인데,  묘를 기준으로 동남쪽에 세우는  것이 일반 적이다. 이렇게 본다면 광개토 대왕릉비는 장수왕릉의 동남쪽 방향에 있게 되어 상당한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과연 광개토 대왕릉비를 신도비로 규정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왜냐하면 광개토 대왕릉비는 신도비가 아닌 공적비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혜이기 때문이다.

 광개토 대왕 무덤에 관한 가장 확실한 증거로는, 그곳에서 발견된 청동 방울이다. 이 청동 방울에는 卯年 好大王 ○造鈴 九十六"이라는 12자가 확인됐다. 그런데 신묘년은 광개토 대왕이 고국양왕에 왕권을 이어 받던 해이다. 또한 호태왕 혹은 호대왕은 선대왕들에 대한 극존칭이지, 결코 고유명사가 아니다. 따라서 이 유물 하나로 현재 광개토 대왕릉의 무덤을 확정지을 수는 없다는 주장이 있다.
 좀 더 확실한 증거가 나오기 위해서는 광개토 대왕을 지칭하는 고유명사인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구체적으로 나와야 할 것이다.

 현재 장수왕릉으로 불리우는 이 무덤의 주인이 누구로 밝혀지던,  이것은 분명 고구려 왕릉형식의 완성을 보여주는 유적임에는 분명 하다.

 무덤은 총 7단으로 이루어져있고, 평면은 장방형으로서 한변의 길이는 31.5 - 33m이며 무덤의 높이는 현재 14미터에 이른다. 묘실은  무덤 옆면에 입구가 있는 횡혈식이며 무덤 내부에는 벽화가 그려졌던 흔적이 발견되었지만, 워낙 심하게 훼손되어 현재 그 원형을 추측하거나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마 무덤안의 벽화가 일부라도 남아잇었다면, 이 무덤의 주인을 확정짖는데 보다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무을 쌓아 올린 석재는 화강암이며,이런 원료는 20km밖의 양차향 고대촌 상록수 다리부근에서 운반하였다. 특히 제일 작은 돌의 무게가 15톤이나 되며 제일 큰 돌은 50톤을 넘는다.
 무덤에 들어간 돌의 수량은 총1100여 개로 세밀하게 다듬은 직육면제 모양이다. 무
덤 둘레로 한 변에 세 개씩 호석이라 하는 적석 밀림 방지석이 총 12개 배치되어있다.
 비록 장수왕릉은 이집트의 피라미드 보다 규모면에서는 작은 면이 있지만, 석재를 다듬은 솜씨와 또 운반된 돌의 무게는 조금도 뒤쳐지지 않은다.
 장수왕릉이 동방의 피라미드라는 찬사를 받는 것도,  세련되고 뛰어난 고구려 인들의 석공기술에 있는 것이다.

 무덤의 가장 윗 단의 돌 윗면에는 난간의 기둥구멍이라고 생각되어지는 구멍들이 파여있고, 그 안쪽에는 향당이라 불리우는 사당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윗면이 평평한 것으로 봐서 그 위에 사당을 지어 놓고 제사를 지냈다고 생각되어 지는데, 이것은 고구려만의 독특한 풍습이었으며, 고유의 무덤 형식이다.

 하지만 최근 무덤 동쪽에 초대형 제단이 발견됨으로써 현재는 불탑이나 비석이 서있었을 것으로 보는주장도 나오고 있다.

 

광개토대왕릉비 - 비문의 가치와 주요내용

2007.03.19 17:48 | 위대한 우리유산 | 말랑말랑스펀지

http://kr.blog.yahoo.com/shim4ro/252 주소복사

광개토 대왕릉비는 그의 아들인 장수왕이 서기 414년, 광개토 대왕의 치적을 기념하기 위해, 현재 길림성 집한현 태왕촌에 건립한 비이다.
 정식 명칭은 국강산 광개토 경평안 호태왕비이며, 높이는 6.39m에 이른다, 이 비문에는 총 1775자가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 훼손되어 판독 할 수 없는 글자가 141자이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초반부에는 고구려를 건국한 3대왕, 즉 고구려 추모 동명성왕, 유리왕, 대무신왕의 제위 계승에 관련된 내용인데, 삼국사기의 내용과 거의 같다.
 중반부는 본론에 해당하는 것으로, 광개토 대왕의 정복사업과 치적등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특히 이 부분은 당시 역사를 직접적으로 저술한 유일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광개토대왕의 교시나 연호에 대한 규정등을 쓰고 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고구려가 멸망하고 발해가 성립될 때 까지도 관리되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러나 발해가 멸망하고 요가 들어 서면서 차츰 잊혀지기 시작하였다. 이후 금나라 시대 때부터는 금의 선대왕 묘비로 여겨지기 시작하여, 명나라 시대 때는 그런 생각들이 굳어졌다. 더욱이 중국의 마지막 황실인 청대에 들어와서는 그곳이 자신들의 발생지라 하며, 잡인의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하였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이러한 통제 때문에, 광개토 대왕릉비는 그 원형은 물론 글자 한자 한자 까지 거의 훼손 없이 보존될 수 있었다.

 또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 비석은 한 때 쓰러져 땅속에 묻힌 적도 있었고, 그 때분에 자연적인 마모로도 피 할 수 있었다. 땅속에 묻혀 있던 비석이 다시 발견된 것은 1880년 경 한 농부가 밭을 갈다가 비석을 발견하여, 관가에 신고하면서 부터였다.
 발견 당시 부터 중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주목을 하며 비문 해독에 전력을 하였다. 그리고 원문의 탁본에 성공하여 먼저 판독한 것은 일본 이었다.
  이것이 쌍구가 목본인데, 이 때 일부 글자가 사꼬오 가케노보 중조작되었다는 설이 유력하게 제기 되고 있다. 

 또한 1890년대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만주지역 일대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는데, 광개토 대왕릉비문 연구에 대한 독점권도 일본에 넘어가게 된다.
  따라서 1882년 사카와 중위의 비문 훼손및 변조 외에 추가적인 변조가 있었거나, 일본에게 불리한 내용등은 아예 삭제 하였을 것으로 생각되어 지고 있다.


 그렇다면 광개토 대왕릉비 본문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자, 다만 이 내용은 현재 탁본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것으로, 다른 해석의 여지가 있음을 밝혀 둔다.

 영락 5년(영락은 광개토 대왕의 연호, 서기 395년) 그때는 을미년이다. 왕은 비려가 붙잡아간 사람들을 귀한 시키지 않자 몸소 군대를 인솔하고 토벌에 나섰다. 부산(富山)을 지나, 산을 뒤로 하고 염수의 상류에 이르러 3개 부락 600~700영 ( 1영당 100명 내외)을 격파하고 수없이 많은 소와 말, 그리고 양떼를 노획하였다. 거기서 돌아오면서 양평도를 거쳐 동쪽으로 ?성 역성 북풍(北豊)에 이르렀다. 왕은 사냥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국토를 둘러보며 사냥도 하고 돌아왔다.

  백잔(百殘 -백제를 낮춰 부르는 말)과 신라는 옛날엔 우리 속민이었기에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잔을 치고 신라를 공략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이 부분은 비문 조작으로 의심되는 부분임 - 왜가 바다를 건너오자 백제를 치고 신라를 (고구려의) 신민으로 삼았다로 해석되기도 함)
  6년 병신년에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우리 군사가 백잔의 국경 남쪽에 도착하여 모로성 ~구천성을 공격하여 취했으며 어느덧 백잔의 도성에 근접하였다. ( 약 40여성이 기록되어 있으며, 읽기가 불가능한 성이름도 5~6개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백잔은 의에 항복하지 않고 군사를 동원하여 덤볐다. 왕은 위엄을 떨치며 아리수(한강)를 건너 선두부대를 백잔성으로 진격시켰다.
 백잔의 군주는 방도를 구하지 못하고 남녀 1천명과 세포 1천필을 바치고 왕 앞에 무릎꿇고 맹세 하였다.
 "지금부터 이후로 영원토록 노객이 되겠습니다."
이에 태왕은 은혜를 배풀고 용서하여 후에도 그가 성의를 다하여 순종하는지 지켜 보겠다고 했다. 이번에 모두 백잔의 58개성, 700개 촌을 얻었다. 또한 백반주의 형제와 백잔 대신 10인을 데리고 출정했던 군대를 국도로 돌와왔다.

 9년 기해년에 백잔이 맹세를 위반하고 왜와 화통하였다. 왕은 아래평양(현재 북한 수도)을 순시하였다. 그러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아뢰기를 그나라에는 왜인이 가득하여 성들을 모두 파괴하고, 노객(신라왕)을 천민으로 삼았으니 (고구려)에 의탁하여 왕의 지시를 듣고자 한다고 하였다. 태왕은 인자하여 그 충성심을 칭찬하고 사신을 돌려 보내면서 밀계를 내렸다.

 10년 경자년에 교시를 내려 보병과 기병 5만명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으로부터 신라성에 이르기까지 왜인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그곳에 이르자 왜적은 퇴각하였다. 이에 우리가 왜적을 추적하여 임나가라 종발성에 이르자 그성은 즉시 항복하였다.
 이에 신라인을 안치하여 병사를 두고 지키게 하였다.
 신라성 ?성 등에서 왜구가 크게 함락시켰다. 성안에 있던 열중 아홉의 신라인들이 왜구를 따라가기 거부했다. 이에 신라인을 안치하여 병사를 두게 하였다.
 신라성 ......(내용이 지워짐)....나머지 왜군은 궤멸되어 달아났다. 지금껏 신라 매금(임금)은 스스로 와서 명령을 청하고 조공논사하지 않았다. 광개토경호태왕에 이으러 신라 임금은 명령을 청하여 조공하였다.

 14년 갑진년에 왜가 법도를 어기고 대방 지역을 침략하였다. 백잔국과 연합하여 석성을 공략하였다.  늘어선 배에 많은 적들이 몰려 왔다. 왕은 몸소 군사를 이끌고 토벌하기 위해 평양을 출발하였다. 그리고 ?봉에서 적과 만났다. 왕은 적을 막아서며 대열을 끊고 좌우에서 공격하였다. 왜군은 궤멸되었고 참살된 적은 수없이 많았다.

 17년 정미년에 보병, 기병 5만명을 출병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내용이 지워짐......
왕은 사방 포위작전을 지시했다. 적은 대부분 참살되었다. 개갑 1만여 령과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군자기계를 획득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사구성 ~?성을 격파하였다.

 20년 경술년, 동부여는 옛날 추모(주몽)왕의 속민이었으나 중도에 배반하여 조공하지 않았다. 왕이 몸소 군대를 이끌고 토벌에 나섰다. 군대가 부여성에 이르자 부여는 두려워 하여 굴복했다. 그리고....내용이 지워짐....를 바쳤다. 왕은 은덕이 모든 곳에 미치자 환국하였다. 또 그때에 왕의 교화에 감화되어 관군을 따라 미구루 압로~?압로등이 왔다.
 일생동안 64개성 1400촌을 공격하여 무너뜨렸다.

 이상의 광개토 대왕의 업적에 관한 주요 내용이다. 그러나 이 비문 내용을 읽으면서 너무나 안타까운 면이 있다.
 내용의 일부가 지워져서, 광개토 대왕의 구체적인 정복 내용을 알 수 없음은 둘째치고라도, 왜 그 때 삼국통일을 하지 못하였는 가란 것이다.
 그때 백제는 일본까지 동원하여 신라를 유린하였고, 또 백제는 주몽의 아들이 세운 나라였음으로 통일의 대의 명분이 충분하였다. 더구나 신라는 스스로 나라를 보존할 수 없으니, 역시 병합하는 것이 올았다.
 대의명분과 기회가 모두 충족되었는데도, 다시 말머리를 돌린 것은 너무나 안타깝다.
 백제왕을 참하고, 신라왕을 파하여 신하로 삼았다면 충분히 삼국통일이 고구려에 의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돌이 킬 수도 없고, 가정법도 허용하지 않는다.  광개토 대왕은 삼국통일과 다름없는 대 업적을 이룩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동북아 원정을 단행하여 압로족과 중국을 압도하였지만 삼국통일을 이룩한 것은 아니었다.
 위대한 대륙진출에 비해 삼국통일 사업은 작은 일이었을까? 아니면 약속을 배신한 신라와 백제의 잘못 이었을까?
 그리고 이 모든 논란의 중앙에 광개토 대왕릉비가 서 있다.  그러나 현재 한반도 조차도 분단된 현실에서 과연 우리는 그에게 무엇을 말 할 수 있겠는가?

 

 

  쌍영총은 평안남도 남포직할시 용강군(龍岡郡) 용강읍(龍岡邑)에 있는고구려 벽화고분이다. 앞방[前室(전실)]의 남벽 중앙에 달린 널길[羨道(선도)], 직사각형의 앞방, 앞방과 널방[玄室(현실)] 사이의 통로, 네모반듯한 꼴의 널방(동서 2.77m, 남북 2.85m)으로 된 두방무덤[二室墳(이실분)]이다.
  특히 통로 좌우에 화려한 문양으로 치장된 8각의 기둥이 나란히 서 있어 쌍영총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

   쌍영총은 사신이 전, 현실에 나누어져 청룡과 백호는 전실에 주작과 현무는 현실에 나타나 있다. 앞방 벽화는 청룡·백호도이고, 입구에 수호 역사상(力士像)이 있으며, 널길의 벽화는 우차, 개마무사(鎧馬武士)와 기마상, 여인상 등인데 장례행렬로 보인다. 현실 북벽의 현무는 묘피장자 부인의 실내생활 장면과 함께 그려져 있고, 연도에 차마인물 행렬이, 현실 동벽에는 부인이 승려와 함께 공양 드리러 가는 행렬이 보인다. 즉 벽화의 하단부분에는 현세의 삶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각 벽에는 파형 당초문이 표현된 목조건물 양식이 그려져 있다.
  이러한 쌍영총의 벽화는 회벽 위에 활달한 필치로 묘사되었는데 특히 사신 가운데 청룡과 백호는 후기의 사신도와 흡사한 모습이며, 연도의 벽화는 상당한 수준의 묘사력을 보여주고 있다. 연도의 동벽에는 우차행렬이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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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마차를 끄는 소는 순수한 한우이다. 동벽의 우차가 있는 행렬도에는 기를 든 개마무사(鎧馬武士)와 아래로 세 여인과 남자인물이 보인다. 이 연도의 벽화는 묘주인의 시신이 묘에 도착하는 행렬을 표현한 듯하다. 이들 벽화는 깔끔한 필치의 묵선과 적, 청, 황색의 담채로 되었다. 특히 볼에 연지를 바르고 성장한 세 여인은 수산리 벽화고분의 여인상과 같은 양식이지만 수산리 고분에서 보다 한층 세련된 인물화를 그려내고 있다.

   서벽에는 기마인물이 그려져 있고,서벽의 기마인물은 조우관(鳥羽冠)을 쓰고 활과 화살로 무장되었다. 이 기마인물은 무용총 수렵도에서 보다 세련된 필선으로 표현되어 있다. 즉, 간략한 묵선으로 처리된 말의 다리근육 등 정확한 세부 묘사나 인물의 안면 표현은 뛰어난 솜씨이다. 말의 꼬리 모습은 일본이나 가야 등지에서도 유사한 모습이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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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정에는 만개한 연화문과 일월상, 북두칠성을 비롯한 성숙(星宿)도와 기타 운문, 당초문이 장식되어 있다.   이것은 현세의 안정된 삶이 내세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길 기원하는 의미도 닮고 있다. 즉 육신은 지상에 묻히고 영혼은 하늘로 올라간다는 고전적인 내세관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태양의 그림에는 세발달린 성스러운 새 삼족오가, 달 그림에는 뚜꺼비가 그려져 있는 것도, 고구려 고분벽화의 특징이다. 이러한 양식은 중국 한나라 무덤양식에 기본적인 영향을 받긴 하였지만, 이러한 모줄이골 양식의 천장과 전체적인 고분벽화의 완성은 고구려에서 완성되어 가장 아름답게 피어났다.

 고구려 무덤벽화의 제작기법은 벽면에 석회를 바르고 그림을 그리거나 석벽에 바로 그림을 그렸는데, 최근 쌍영총벽화의 경우는 석회를 바른 다음 윤곽선을 그리고 윤곽 내부에 연백을 도포한 뒤 그림을 그렸음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림이 그려져 있는 부분에서 납이 검출되었고, 그림 주변의 여백에서는 납이 검출되지 않은 결과에서  확인된 것이다. 
  1972년 발견된 일본 高松塚(A.D. 7∼8c)의 벽화에서도 최근의 연구 조사 결과 연백이 도포된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벽화는 발견당시부터 고구려 또는 백제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알려져  "연백" 도포라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제작기법이 일본으로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무용총에 그려져 있는 수렵도, 국사 교과서는 수차례 개정되었지만 무용총 내부에 그려진 이 그림은 빠짐없이 등장하였다. 그만큼 미술자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미 아름다움을 세계적으로도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수렵도가 그려져 있는 무용총의 내부로 들어가 보자.

   높이 약 3m, 기저(基底)의 한면이 약 15m인 방추형(方錐形) 분구이다. 널방[墓室(묘실)]은 가로 세로 약 3m의 널방[玄室(현실)]과 가로로 긴 앞방[前室(전실)], 이 사이의 통로 및 널길[羨道(연도)]로 이루어져 있으며, <呂>자형으로 널방천장이 팔각형을 이룬다. 회벽 위에 그려진 널방 내부의 벽화는 선이 힘차고 채색이 전기에 비하여 한층 밝다. 벽화의 내용은 인물풍속화이며, 그 중에서도 널방 벽화가 이 고분을 대표한다. 널방 벽화에는 고구려 회화에서도 손꼽히는 수렵도(狩獵圖)를 비롯하여 고분의 이름을 정하게 한 무용도(舞踊圖), 주방과 묘주인의 실내생활장면, 수목도(樹木圖)가 그려져 있다


 기복이 있는 산악은 어두운 자색 또는 누런 갈색 바탕에 물결 모양의 평행 먹선을 여러 줄 그어서 나타냈고 윗산 뒤에서는 달아나는 두 마리의 사슴을 잡으려고 말 탄 무사가 휜 활에 화살을 끼워 힘껏 당기고 있다. 앞산 근처에서는 호랑이, 사슴, 토끼를 말 탄 무사가 사냥하려고 한다. 활을 겨누며 말을 달리는 기마 인물들이나 사력을 다해 달아나는 산짐승들이 모두 힘찬 운동감에 휘말린 상태로 표현되어 있다.
  굵고 가는 파상선만으로 이뤄진 상징적인 산들조차도 그림 전체의 율동에 맞추듯 그려져 있어 한층 힘찬 느낌을 자아낸다.

 이 그림은 고구려의 귀족이나 왕족들의 중요한 여흥인 수렵도가 어떻게 이루어 졌는지 잘 보여준다. 특히 이 그림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바로 활이었다. 역 방향으로 활을 겨누어 사슴을 겨냥하는 사수의 모습은 이 그림의 백미로 꼽힌다. 그러나 더욱 자세히 활촉을 보라, 활촉이 이상하게 납작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고구려인의 생명존중사상, 즉 살생유택의 사상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유흥을 위해 사냥을 가지만 불필요한 희생을 맞고자 하는 고구려인의 독특한 사상을 볼 수 있다.  아마도 세계 최초의 친환경 사고가 아닐까 싶다.

 또한 고대의 사냥은 전쟁과 기마술 연습의 주요수단으로도 쓰여졌다.  평상시에는 짐승들에게까지 배려를 해주는 고구려인의 따뜻한 면을 보여주지만,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어느 누구보다 용맹한 전사로 변하는 고구려의 역동적인 기상을 함께 보여주는 고대 한국 회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이다.

 무용총은 중국의 통구 평야의 여산 남쪽 기슭에 있다.  이 무덤이 무용총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무용장면은 중앙의 오른쪽에 전개 14인의 무용수와 악사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무용수들이 그려진 그림은 이 무덤이 유일하지는 않다. 그러나 집단가무가 조직적으로 그려져 있다는 점이 특이할만하며, 보존상태도 가장 양호하기 때문에 그러한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중앙에 5인이 뒤로 손을 뻗어 춤추는 동작을 표현하고 그 위에 벽화가 떨어져 나갔으나 악사가 춤에 가락을 넣고 있으며, 그 왼편으로 무용수가 같은 동작으로 춤을 추며 나타나고 있다. 아래로는 역시 가락을 넣는 가수로 보이는 7인이 표정을 달리하여 그려졌는데,  무용과 가창을 겸한 교대조이거나 혹은 합창대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한눈을 팔고 있는 세번째 남자를 보고 있노라면  고구려인의 유머감각까지 느끼게 된다.
  중앙에 춤을 추고 있는 무용수들의 맨 앞에는 새깃모양 관을 쓴 남자 도창이 배치되고, 그 뒤로 두루마기를 입은 두 여인과 바지저고리를 입은 두 무용수가 같은 동작으로 따르고 있다. 무용수들의 소매가 길게 늘어진 무복에는 백색 바탕에 흑점문이나 황색 바탕에 적색점문이 있다. 이 무용 장면은 움직임의 표현에 역점을 두었다



 무용총에서 또 하나 특이한 회화는 음식 접대 장면이다. 현재 우린라를 비롯한 동북아 대부분이 좌식 문화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특이하게 의자에 앉아서 손님을 접대하고 음식을 나눠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다리역시 이러한 입식에 맞게 높게 설치되어 있다.
 음식의 조리는 주로 하녀들에 의해 행해지며 부엌은 따로 떨어져 있다.
 아래 그림을 보면 하녀들이 따로 음식을 해서, 손님을 접해하고 있는 넓은 거실로 날라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상을 준비하고 있는 하녀의 모습을 작게 그려 신분차를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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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덤주인의 실내생활장면은 2명의 손님을 접대하는 장면에서 또 하나 눈여겨 볼 것은,두 손님의 복장과 갈색 얼굴이다.  아마도 이들은  인도의(異國人) 승려이거나 아랍상인등으로 추정하는데 아무튼  당시의 활발했던 문화 교류도 엿볼 수 있다. 

천장 벽화는 일상(日象)과 월상(月象), 북두칠성을 비롯한 별자리 등 천체도(天體圖), 사신도(四神圖)의 일부인 청룡(靑龍)과 백호(白虎)를 비롯한 상서로운 상상의 동물들, 비천(飛天), 주악천인(奏樂天人), 선인(仙人)들의 모습, 역사(力士)의 태권 장면, 그리고 이 그림들 사이를 연화문(蓮華紋)과 운문(雲紋)으로 장식하여 다양한 내용을 담았다. 여타의 그림의 상징적이라면 일월상과 별자리는 현실적이라 할 수 있다. 즉 별자리 역시 영생불사가 존재한다고 믿는 천상의 세계로 올라가고자 하는 욕망을 담은 것은 상징성을 담고 있긴 하다.

 그러나 청룡등이 동물이 순수한 신화적 동물이라면 별자리는 실제 관측에 의해 정확하게 그 위치와 방위가 그려진 것이다. 이것은 고구려인의 뛰어난 천체 관측술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며, 그 수준은 당시 세계 최고의 정밀함을 자랑한다.

 고구려의 풍습과 생활상을 여실이 담은 이들 무용총 벽화는 화면구성·화재(畵材)·묘사방법 등에서 중국적인 양식에서 탈피하여 고구려화된 특징과  나름의 표현이 드러났을 뿐 아니라, 전체적인 회화적 수준에서 중국의 고분벽화를 압도하고 있다.

 

 

 고구려 고분 1 강서대묘
강서대묘에 그려진 무덤을 지키는 사방신

강서대묘는 평안북도 남포특급시(南浦特級市) 강서군(江西區郡) 삼묘리(三墓里)에 있는 고구려 벽화고분중 하나이다.
특히 강서대묘는 높이 8.86m, 기저부의 둘레가 51.6m로 같은 삼묘리에 위치한 중묘(中墓)·소묘(小墓)와 함께 강서삼묘(江西三墓)를 이루며, 이 중 규모가 가장 크다.


7세기 경에 만들어진 고구려 고분으로, 외형적으로는 중국식 묘제가 도입되어 봉분을 이루고 있지만, 그 내부에는 고구려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예술과 신앙세계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강서대묘는 안길과 현실로 된 외간 무덤이다. 현실은 잘 다듬어진 화강암으로 구축되었고 바닥에 두 관대를 설치하였다. 네 벽에는 사신도를 그렸으며, 평행삼각고임부 천장에는 신앙세계를 반영한 다양한 그림과 장식을 배치하였다. 특히 북벽의 현무도, 동벽의 청룡도는 강서중묘의 백호, 주작과 함께 고구려의 사신도 그림중에서도 걸작임이 분명하다.


동방의 수호신 청룡(현실 남벽)

소리치는 큰 입에서 타는 듯한 혀를 내밀고 눈알은 튀어나갈 듯한 쌍뿔 청룡이다. 흘러내리는 S자 형의 목의 곡선은 가슴에 이르러 굵게 확장되고 몸통으로부터 꼬리로 감에 따라 차차로 가늘게 길어져서 탄력성 있게 움직인다.

 중심이 앞부분에 옮겨져서 앞발을 내밀고 사납게 전진하는 모습은 속도감이 넘치고 웅혼하다. 새빨갛게 테두리를 칠한 가슴날개도 날카롭게 하늘을 날고 도약을 강조한다.

 세련된 구도이며 채색도 화려하다. 장식적 요소가 농후한 비늘이지만 푸른색, 녹색, 주색 등의 배색도 적절하여 섬세하고 호탕한 채색으로 입체감과 생동감을 표현하였다.



서방의 수호신 백호(현실 서벽)



얼핏보면 청룡의 모습과 흡사하지만 백호도이다. 이 그림으로 볼 때 고구려 인들을 백호를 현실속에 존재하는 흰 호랑이가 아니라, 용의 모습에 더 가까운 신화속의 동물로 여겼던 것 같다.
 선명치 못한 데가 많아 섬세한 부분은 알아볼 수 없으나 길게 뻗어나간 목과 벌린 아가리는 백호의 용맹을 잘 나타내었고 형식이 중묘와 공통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가슴날개의 색채와 아가리 주변과 몸체 전반의 운동감, 곡선의 흐름이 자아내는 인상이 다르다. 이 백호는 장중한 감이 난다. 이 벽화는 수분이 많은 점도 있어 주홍색의 날개가 아주 선명하다.

북방의 수호신 현무(안길 북벽)



강서대묘의 현무도는 고구려 회화의 조형미가 가장 원숙하고 세련된 사신도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북방위신인 거북이를 마치 미뷔우스의 띠처럼 휘감은 뱀이  곡선이 뿜어내는 역동성과,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있는 두 신물사이에서 생기는 긴장감은 사신도 중에서도 단연 으뜸으로 평가되고 있다.

뱀의 비늘이나 거북의 등 무늬도 섬세하게 그려져 있고 힘찬  묘사와 그윽한 채색로 표현된 입체감은, 전설상의 수호신이긴 하나, 실제  생명을 가진 동물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 .


 훼손이 비교적 덜 된 상태의 현무도, 한눈으로 봐도 위의 그림보다 매우 선명해 보인다. 현재 북한측에서는 이 훼손을 막기 위해 일반인들의 출입을 엄격하게 금지시키고 있다. 물론, 가고 싶다고 해서 갈 수도 없는 곳이긴 하지만....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무덤 내부에서 진행되고 있는 심각한 상태의 색바램 현상등을 막을 수 없다. 따라서 정치문제는 뒤로하고서라도, 남북한 공동의 연구팀과 복원팀을 구성하여서, 고구려 유적들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마련이 시급한 실정이다.

남방의 수호신 주작

(현실 남벽)

힘차게 퍼덕이는 날개와 회오리쳐서 솟을 듯한 꼬리 등, 주작은 곡선의 움직임이 강조되어서 화려하다. 깃털도 타오르는 불길같이 설레이고 있다. 

비록 빗물등이 스셔든 탓에, 원래의 색감이 많이 번지고 퇴색되어 있긴 하지만, 주작 특유의운동감과 함께 색채의 화려함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역시 복원이 절실히 필요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서쪽 천장고임부의 벽화



사신도는 주작을 제외하면 대부분 벽면에 많이 그렸다. 즉 사신은 천상의 세계와 중간의 세계를 연결해 주는 역활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사방 즉 공간을 담당하는 신물인것이다.
 그리고 천정부로 갈 수록 점점 하늘을 나는 동물들이나 신선, 선녀등을 그려 천상세계임을 강조한다.

 이렇게 점점 위로 올라가다보면, 가장 정점에는 대체적으로 해와 달 그림이 등장한다.  이것은 고구려 인이 하늘의 선택을 받았다는 자부심이 있었으며, 무덤주인은  벽화가 이끄는 대로 승천할 기원하고 있는 것이다.

강서대묘의 구조

강서대묘는 남포특급시(南浦特級市) 강서군(江西區郡) 삼묘리(三墓里)에 있는 고구려 벽화고분중 하나이다. 특히 강서대묘는 높이 8.86m, 기저부의 지름 51.6m로 같은 삼묘리에 위치한 중묘(中墓)·소묘(小墓)와 함께 강서삼묘(江西三墓)를 이루며, 이 중 규모가 가장 크다. 

 

고분의 분구는 원형이며 묘실의 구조는 널방[玄室(현실)]과 널길로 이루어진 단실묘이다.

  직사각형의 널방 남벽의 중앙에 달린 널길은 길이 3.05m, 높이 1.69m이며 널방은 동서 3.12m, 남북 3.17m, 높이 3.51m이고 천장은 평행 3각 굄 천장이다.

널방의 4벽과 천장은 각각 큰 화강암 판석 1장으로 축조하였다.



널방의 4벽면에는 돌의 표면을 잘 다듬고, 그 위에 직접 사신도(四神圖)를 그렸으며, 천장의 굄돌에는 인동문(忍冬文)·당초문(唐草文)·연화문(蓮花文)·비천(飛天)·신선(神仙)·산악도(山岳圖)·서조(瑞鳥)·기린(麒麟) 등을 그렸고, 덮개돌에는 황룡(黃龍)을 그렸다. 이들 벽화는 철선묘법(鐵線描法)으로 그려져 섬세하고 화려하며 힘이 깃들어 있다.


특히 강서대묘가 높이 평가되는 것은 사신도를 그린 회화적 수법의 완성도에 있다. 위의 그림은 강서대묘중에서도 백미로 꼽히는 현무도인데 국사교과서에 소개되어 있어 매우 친숙하다.



느린이미지의 일반거북과는 달리 강서대묘의 현무도는 매우 역동적이고 강렬하며,  현무를 감은 뱀은 춤을 추듯 유연하며 또한 역동적이다. 그리고 거북 머리와 뱀의 머리가 대칭을 이루어 하늘로 쳐다 보며 화염을 뿜고 있는 모습은 여러 현무도중 가장 안정적이고 완벽하다는 평가이다.

  널방 동벽의 청룡과 서벽의 백호는 널방 입구를 향하여 포효하고 있는데, 세부묘사가 치밀하고 필치에 생동감이 있으며 채색이 화려하여 환상적이고 신비한 느낌마저 준다. 널방 입구인 남벽의 좌우에는 널방문쪽을 향하여 마주보며 막 날아오르는 순간의 주작 1쌍을 그렸다.
연꽃 봉오리 가지를 입에 물고 있는 두 주작의 좌우로 펼친 양날개와 위로 뻗은 긴 꼬리는 팽팽한 원을 이루고 있다. 두 주작의 발밑에는 여러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들이 묘사되어 있다. 이는 풍수지리설과 관련된 표현으로 보인다.


   천장부의 평행고임 제1단은 화려한 연속 인동당초무늬[忍冬唐草紋]로 장식되었다. 제2단에는 산악도와 선인(仙人)과 비천(飛天)들이 묘사되어 있다. 고임돌 동쪽받침과 서쪽받침에는 중앙에 산악도를 그리고, 그 좌우에는 서조(瑞鳥)를 타고 있는 인물들을 표현했다. 남북받침에는 머리를 삭발한 천인(天人)을, 북쪽받침에는 4명의 비천을 그렸다.

   비천의 자태는 남북조시대 석굴사원에 등장하는 비천과 여러모로 유사하여 상호영향관계를 짐작하게 한다. 제2단 고임돌에 그려진 인물과 동물들은 모두 자신의 왼편을 향하고 있다. 선인과 비천 및 상서동물들 사이의 공간에는 3엽연꽃과 구름을 그려넣어 공간배치의 균형을 꾀하고 있다.

  고임돌 동서측의 산악도는 색조의 농담과 필치의 강약으로 토산과 암산을 구분하고 구름과 나무 등으로 산의 원근과 입체감을 나타내려고 하는 등 높은 수준의 회화적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삼각고임 제1단과 제2단 고임돌에는 봉황·기린·영지(靈芝) 등 각종의 상서로운 동식물을 그렸다. 천장뚜껑돌 밑면에는 오행(五行)의 중심에 해당하는 황룡을 묘사하였다. 황룡은 시계 반대방향으로 힘차게 몸을 틀었는데, 주변의 구름으로 인해 신비감을 자아내고 있다.


 
강서대묘는 널방의 축조방식이 정교하고 치밀하며 벽화의 구상이 장대하고 기법이 세련되어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엽에 완성형을 이루는 고구려 고분축조술의 수준과 회화기법상의 발전정도를 잘 드러내는 고분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고구려 4대 고분벽화

안악 3호분의 기본구조와 논란


  악악 3호분의 묘실의 구조가 웅장하며 벽화의 내용이 풍부할 뿐 아니라 기년 묵서가 씌어져 있어 고분의 축조 시기와 벽화의 연대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어, 고구려 고분연구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자료이다. 이 고분은 황해도 안악군 용순면 유순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망이 좋은 구릉 지대의 등마루 위에 자리잡고 있다.

  연실에는 주인공의 거처를 호위하는 위병이 그려져 있고, 전실의 동서 남벽에는 주인에게 복무하는 무인, 의장대, 고취악대 등과 수박도(운동 놀이의 일종)가 그려져 있다. 서쪽 측실의 서·남·동벽 일부에는 무덤의 주인 부부상과 그 측근자의 생활상이 그려져 있다. 동쪽 측실의 사방에는 주인공의 부엌 살림살이와 수레, 말, 소 등이 그려져 있다.


  현실에는 동벽에 주인공을 위한 실내에서의 무악도가 그려져 있고 회랑의 동·북벽에는 주인공의 출행 대행렬도가 그려져 있다. 천장의 뚜껑돌에는 명복을 비는 연꽃 무늬와 해, 달 등을 그렸다. 이 밖에 전실 입구의 팔각 기둥 주두에는 벽사의 뜻을 지닌 귀면을 그렸고, 천장부의 괴임돌에는 초롱무늬를 그려 장식하였다.

  특히 전실 서쪽 측실 입구에 그린 인물 옆에는 붉은 글씨로 장하독이라고 씌여 있고, 장하독 위에는 7행 68자의 묵서가 있다. 이 묵서는 묘지(墓誌)로서 동수가 사망한 연월일과 간지, 관직명, 고향, 자(이름), 연령 등이 씌여 있어 서기 357년(고국원왕 27년)이라는 연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永和十三年十月 (영화 13년 10월 = 서기 357년 음력 10월)
   戊子朔二六日
   癸丑使持節都督諸軍事
   平東將軍護撫夷校尉樂浪
   舊昌黎玄토帶方太守都( 3~6줄 관직명=>현토 대방태수)
   鄕候幽州遼東平郭(고향 =>유주 요동평부)
   都鄕敬上里冬壽字(이름 =>동수)
   ?安年六十九薨官(69세에 안치됨)


 
  이처럼 무덤조성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고분벽화는 대단히 드물며, 고구려 무덤중에는 덕흥리 고분군과 함께 단 두기중 하나이다. 따라서 악학 3호분은 여타의 고구려 고분벽화 연대기를 추측하는 가장 기본적인 자료로 쓰이고 있다
.


   안악 3호분은 황해남도 안악군 용순면 유순리에 위치해 있으며 1949년에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이 무덤은 현무암과 석회암의 큰 판석으로 짜여진 돌방무덤으로 남쪽인 앞으로부터 널길·연실·앞방·뒷방으로 형성되며, 앞방은 좌우에 조그만 옆방이 하나씩 달려 있어 좌우 너비가 커지고 있다.

 한편, 앞방과 뒷방은 4개의 팔각돌기둥으로 구분되어 서로 투시할 수 있고, 주실 즉 뒷방은 동벽과 뒷벽의 안쪽에 판석벽과 돌기둥을 각각 세워 회랑부를 만들고 있다. 그리고 각 방의 천장은 네 귀에 각각 삼각형 돌을 얹어 천장 공간을 좁히기를 두 번 반복하고 그 위에 뚜껑돌을 얹는 모줄임천장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 나라에서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랜 모줄임천장이다.

   벽화는 널길벽에 위병, 앞방의 동쪽 옆방에 부엌·도살실·우사·차고 등,
서쪽 옆방에 주인공 내외의 좌상, 앞방 남벽에 무악의장도와 묵서묘지,
뒷방 동벽·서벽에 각각 무악도, 회랑벽에 대행렬도가 그려져 있다.
   결국 벽화내용은 무악대와 장송대에 둘러싸인 주실 앞에 주인 내외의 초상도를 모신 혼전과 하인들이 있는 부엌·우사·마구고 등을 두고 맨 앞은 위병이 지키는 설계이며, 이것은 왕·귀족·대관들의 생전주택을 재현시키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벽화는 벽의 면적 81㎡ , 천장의 면적 58㎡ 나 되는 넓은 널방에 가득차게 그려져 있다.

이 명문에서 보인 “永和十三年”은 동진의 연호로서 서기 357년이며 낙랑 옛땅의 중국계 주민들이 해상교통을 통하여 강남의 동진과 연락을 가지고 동진의 연호를 쓰고 있음을 말하여주고 있다. 
  이 주인공인 동수는 326년(미천왕 27) 에 요동에서 고구려로 귀순한 무장이며, 357년(고국원왕 27)에 죽어서 안악 유순리에 묻힌 것이다.
  동수묘의 구조는 여러 점에서 당대의 중국묘 형식을 본받고 있다. 즉, 남북일렬로 여러 방을 배열하는 것이나 앞방 좌우에 옆방을 설치하는 것은 한 대의 벽돌무덤의 기본 설계방법이며, 또 옆으로 넓어진 앞방에 사각형의 주실을 달아 T 자형 평면을 만드는 것은 낙랑의 덧널무덤이나 벽돌무덤에서 흔히 보는 형식이다.

  또, 큰 판석으로 묘실을 짜는 것은 요동반도의 한대 묘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동수묘에서 처음 보이는 고구려 고분의 특색처럼 되어 있는 모줄임천장도 산둥성 기남의 후한 대 돌무덤에 나타나 있고 팔각형 돌기둥도 이 기남묘에 있거니와 기둥 꼭대기에 두공을 얹어 천장석을 받들게 하고 있는 점이 똑같다.
  모줄임천장은 원래 근동지방에서 일어난 수법이며, 그것이 중앙아시아를 거쳐 3세기에는 이미 중국본토로 들어와 있던 것이다. 고분벽화 자체도 한대에서 시행한 것이며, 특히 동수묘와 같은 고구려 전기 고분벽화에서 묘주들이 휘장을 친 방 안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도 랴오둥 지방의 고분들과 같다.

 결국, 연대가 확실한 가장 오래된 고구려의 고분벽화인 동수묘는 요동지방에서 넘어온 동수의 무덤이며 그것은 중국의 한.위진대의 벽화고분의 전통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고구려 영토 안에 세워진 최초의 중국계 벽화고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묘실 평면·모줄임천장·돌기둥·벽화내용 등 여러 면에서 그뒤 고구려 벽화고분의 출발점이 되고 있는 것이며 고구려 벽화고분의 발생과정에서 중국 벽화고분과 고구려 벽화고분을 연결하는 과도기적 존재라 할 수 있다.

  안악 3호분에 대해서는 두가지 상반된 설명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무덤을 묵서명에 의한 동수의 묘로 보고 있으나, 북한에서는 고분벽화의 주요내용이 왕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들어 고구려의 왕릉(고국원왕릉)으로 해석하고 있다.


 고국원왕의 초상으로 추정되는 벽화

북한 학자들이 무덤의 주인을 고구려왕이라고 주장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이 묵서명 때문이다. 우선 묵서명의 위치가 아무래도 묘지명으로 보기에는 뭔가 석연찮다는 것이다.

묵서명이 주인공의 묘지명이라면 무덤의 가장 반듯한 공간에 격식을 갖추어서 쓰는 것이 상식인데, 주인공 가까이에 빈 공간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왜 하필 문밖에 있는 장하독이라는 인물의 머리위에 써두었느냐는 것이다. 그것도 묵서명을 자세히 보면 애써 장하독이라는 인물에 맞추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글자체도 크고 화려한 무덤의 주인을 표시하는 것이라고 하기에는 조잡하다는 것이 북한학자들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주인공의 묘지명이 아니라면 이 묵서명을 대체 무엇이라는 걸까? 북측 학계에서는 이것을 무덤 주인의 묘지명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것의 바로 아래에 그려져 있는 장하독이라는 사람에 대한 설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69세 흉관" 일반적으로는 이것을 "관리를 지내다 죽었다" 로 해석을 하는데, 이것은 한문 어법상 맞지 않는다고 한다. "69세 흉" 만으로 69세에 죽었다는 문장은 끝이 나는데, 이미 완결된 문장의 끝에 어법에 맞지 않게 형용사 "관"이 붙어있는 꼴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관"을 이 밑에 그려져 있는 인물 "장하독"을 꾸미는 말로 본다. 그러면, "69세에 죽은 관리 장하독" 이 돼서 이 묵서명의 동수는 바로 밑에 그려진 장하독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무덤의 주인은 따로 있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바로 고구려의 왕이라는 것이다
.

  동수묘를 부인하는 새로운 증거로 두 차례 추가조사의 결과를 들고 있다. 이 조사에서 맞은  편에 있는 인물 위에서도 20여자의 글자가 확인됐다는 것이다.
주인공이 있는 방 앞에 수문장 격으로 서 있는 두 인물위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 글자, 그것은 각기 그 인물들을 설명하는 글일 뿐 무덤 주인공의 묘지명은 아니라는 것이다
.

고국원왕릉설에 대한 문제점

 우선 고국원왕릉이라면,  고분벽화에 나타난 주거공간이 궁중내여야 하지만,  궁중내의 생활로 볼만한 결정적인 단서도 없고 궁중생활 수준으로 보기에도 다소 미흡한 점이 있다.

  또 이 무덤의 조성위치가 평양 인근이라는 것도 문제점이다. 고국원왕 이후 고구려 영토는 훨씬 남진하였지만 광개토대왕릉이나 장수왕릉도 모두 집안현에 위치해 있지 있지 않은가? 따라서 평양 천도 이후에도 고구려 왕들은 오히려 집안현을 수묘지로 선호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기본적인 문제점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안악 3호분의 묘주도를 고국원왕으로 단정하기엔 아직 성급하다.

 

안학 3호분의 주요 인물들

남주인공(전실 서측실 서벽)



무덤의 주인공인 왕이 장방의 좌상우에 올방자를 들고 앉아서 시종 무관, 문관들에게 보고를 받거나 분부를 주고 받는 정사도이다. 북한에서는 이 그림을 중요하게 평가하여 미천왕릉으로 보고 있다.

여러번 고쳐 그린 흔적을 통해서 화가가 남주인공 그림의 제작에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넓고 길게 생긴 얼굴과 곱게 뻗은 팔자 수염이 위엄있는 풍모를 잘 나타내고 있으며 길죽한 콧마루와 눈알이 사시처럼 약간 안쪽으로 몰려 있는 가느다란 눈매, 납작한 눈 두덩 위의 진한 눈썹 등은 주인공의 특징을 표현하려는 화가의 고심어린 정성이 깃들어 있다.

  주인공은 검은 내관 위에 하얀 덧관을 쓰고 있다. 이것은 왕만이 유독 쓸 수 있었던 백라관이다. 오른쪽에는 자루에 귀면을 새긴 '주미'라고 불리는 털부채를 들고 있다. 장방의 오른쪽에는 반원형의 털을 3중으로 늘어뜨린 의장기가 세워져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에 왕이 행차 때에 쓴 '정절'이라고 불리는 의장기와 매우 비슷하다
.

여주인공(전실 서측실 남벽)


호화로운 장방의 좌상에 앉아 있는 왕비의 그림이다. 3명의 시녀등이 왕비의 시중을 들고 있다. 풍만한 얼굴과 눈초리가 약간 올라간 가느다란 눈매 등 개성적인 표정을 나타내고 있어 왕과 마찬가지로 개성적인 표정을 나타내고 있어 왕과 마찬가지로 부인의 특징을 표현하려는 화가의 노력을 찾아볼 수 있다.

장하독(전실 서벽 왼쪽벽)

  왕의 호위무관인 장하독이다. 앞부분이 평탄하고 윗부분이 뾰족하게 솟은 소위 '책'이라는 머리쓰개를 쓰고 긴 칼을 짚고 서 있다.

  바지롸 저고리를 입었고 저고리에는 띠를 동여 매었다. 이 무관 그림의 윗부분에는 연나라의 망명자인 동수에 관한 묵서가 있다.


   永和十三年十月
   戊子朔二六日
   癸丑使持節都督諸軍事
   平東將軍護撫夷校尉樂浪
   舊昌黎玄토帶方太守都
   鄕候幽州遼東平郭
   都鄕敬上里冬壽字
   ?安年六十九薨官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묵서명에 의해 이 무덤을 동수묘라고 보고있다.

 

부월수(전실 남벽 동쪽 구석 하단)

도끼를 든 무사의 그림인데 전실 동벽 하단에도 그려져 있다. 이들의 옷차림은 긴저고리에 바지를 입고 허리에는 띠를 매었다. 이것은 장하독 그림의 인물과 똑같은 것이다. 다만 옷깃, 옷자락, 소매끝에 붉은 천을 두른 점이 다르다. 또한 긴 옷고름이 달린 저고리를 입은 인물도 있어 조선에서 저고리에 옷고름을 다는 풍습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도끼는 당시 전투를 할 때에 중요한 공격무기였다. 회랑의 대행렬도에도 도끼를 든 대열이 왕의 행차를 호위하면서 행진하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수박(전실 동벽 상단)


수박은 권법의 한 종류로서 주먹으로 상대방을 때려 눕히는 격투기이다. 이 그림은 다른 벽화에 비하여 예술적 과장이 풍부하고 회화적인 해학성이 풍기는 점에서 이채를 띠고 있다. 상무를 중요시하는 고구려에 있어서 수박은 대중들 속에서 널리 성행한 경기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그림이 무용총(집안)에도 있다.


뿔나팔(전실 남벽 서쪽 윗단)

 본래 두 사나이가 마주보면서 뿔나팔을 부는 장면을 그린 것인데 왼쪽의 인물은 윗부분의 뿔나팔을 남길 뿐 거의 소멸되었다.

  뿔나팔은 다른 고구려 무덤 벽화에도 자주 나타나는 악기의 하나로서 왕족이나 귀족의 의식에 없어서는 안 될 악기였을 것으로 본다. 이 벽화의 아랫단에는 북과 소를 가진 고취악대의 그림이 희미하게 보인다.

 이처럼 안학 3호분은, 미술사적으로도 매우 우수할 뿐더러 고구려 의복연구에도 빠져서는 안될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묵서명에 정확하게 연도가 기록되어져 있어, 서기 3세기를 전후한 고구려의 각종 의복생활은 물론 문화생활전반과 군대편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야를  고찰할 수 있다.


 

 

 

안악3호분 3

고구려인의 주거 공간

 안악 3호분에는 묘주도나 대행렬도외에도, 고구려의 주거문화를 볼 수 있는 벽화도 여러점 그려져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동수라는 중국계고구려 귀화 귀족무덤이라고 보고 있고, 북한에서는 고국원왕릉이라 보고 있어, 둘 중 어느 학설을 채택하느냐에 따라 벽화전체를 해석하는 관점도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즉 고국원왕릉이라고 본다면, 벽화전체는 궁실내 국왕의 생활을 다룬 것이 되며, 동수묘라고 본다면 고구려의 상류귀족층의 주거문화를 다룬 것이 된다. 개인적으로도 두 학설중 어느것이 정확히 옳다고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궁중 내 생활모습이라고 보기는 조금 힘들지 않나 싶다.
 동수라는 사람이 죽어서도 국왕을 섬기겠다는 마음에서 고국원왕릉의 초상과 행렬도를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지만 단정하긴 어렵다.

 아무튼 분명한 것은 이 무덤이 서기 5세기 초기에 조성되었다는 점과, 고구려 최상류층의 주거생활을 그렸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무덤에 그려진 주거공간을 보며 좀 더 자세하게 살펴 보도록 하자.

부엌에서 일하는 하녀들

 이 그림에서는 떡시루 모양의 큰 솥과 끓는 국을 젖고 있는 하녀의 모습이 보인다.

 이 그림으로 보아도 이 주택에 얼마나 많은 식구가 살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소매를 반쯤 걷어 올린 여인의 모습에서, 뜨거운 열기를 느낄 수 있으며, 아궁이 앞에서는 또 다른 하녀가 정성스럽게 불씨를 보고 있다.

  저 정고의 국을 끓일 정도라면, 최소한으로 잡아도 30인 이상의 분량은 충분히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오른쪽 왕비의 수레그림

 이 수레는 앞만 내다보게 되어 있고 그 밖의 부분은 들여다 보이지 않게 막고 있다. 왕비의 수레 옆에는 '독거'라는 붉은 글이 쓰여 있다.

 또한 아랫단에는 앉는 자리 위에 곡산개를 세운 수레의 위부분이 그려져 있는데 퇴색이 심해서 뚜럿하지 않다.

 왼쪽 왕의 수레그림

이것은 앉는 자리 위에 곡산개를 치고 사방이 트인 수레이다. 
 이 수레들은 소가 끄는 수레로서 이것과 똑같은 것이 약수리 벽화 무덤의 행렬도에도 그려져 있다.



  마구간


 저마다 털빛이 다른 말 세 마리가 여물구유 앞에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가장 밑쪽에 있는 말은 옅은 갈색이고 중간의 말은 붉은 털색이며 가장 위쪽의 말은 흰색으로 채색된 탓인지 퇴색이 가장 심해 형태를  알아 보기 힘들다.

  말갈키 하나하나까지 묘사하여 생태적 특징을 사실주의적으로 그리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여기에도 여러번 소묘를 거듭한 필적도 알아볼 수 있다.



 



 외양간

세 마리의 소의 뿔을 죄다 빨갛게 칠해 놓은 것이 흥미롭다.왕족의 수레를 끄는 소인 것 같다. 소에 코뚜레를 단 것은 당시 이웃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고구려만의 고유한 풍속이었다


 만약 안악 3호분이 동수묘라면, 아마도 동수라는 사람은 고구려에 귀화 한후 왕실행사와 관련한  직책을 맡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것은  동수라는 인물에 관련된 묵서명이 있는, 장하독 인물상에서도 확인된다.  장하독은 왕의 호위무관 직책으로, 평상시에는 물론 각종 왕실행사에서도 경호업무를 맡아 보는 직책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관리하에 있던 마구간이나 외양간 그림을 그리게 되었고, 또 거느린 식솔과 하인들도 많았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대 행렬도를 그린 이유도 어느정도 연관성을 가지고 이해되지만, 문제는 무덤속에 그려진 안주인에 대한 해석이다. 그녀는 과연 고국원왕의 왕비였을지 아니면 동수의 부인이었을지, 그것도 아니라면 고국원왕과 혼례를 치룬 동수 측근중 한명 이를테면 누의와 동생이었을지 단정짖기 힘들기 때문이다.

 또 아무리 귀족 무덤이라지만, 자신의 무덤안에 과연 왕과 왕비의 그림을 그려 넣을 수 있을지도 좀 더 신중하게 살펴봐야 할 문제점이다.





    
    
  
   

우물

지난 시기 조선의 농촌에서는 흔히 볼 수 있었던 전형적인 용두레 우물의 그림이다. 다양한 물항아리와 함께 마소용의 구유도 볼 수 있는데 통나무를 파서 만든 것이다.
 우물가에 서 있는 올림머리의 여성 곁에는 '아광'이라는 붉은 글이 쓰여져 있다. 이 여성의 이름일까? 상상에 맡길 수 밖에 없다.

방앗간

 조선에서 예로부터 내려온 발방아의 역사를 말해주는 벽화이다. 이 발방아는 이웃 나라등에서는 볼 수 없는 세나라의 독특한 방아이다.

  발방아를 찧고 있는 여인과 키질을 하고 있는 여인도 올림머리를 하고 있으나 집주인과 측근 시녀들의 머리와는 약간 다르다. 고구려 여성들의 머리 모양이 매우 다양했음을 시사해 주는 것으로서 매우 흥미롭다


여기에 나와있는 묘주와 그 부인은 왕과 왕비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하지만 이 그림들 어디에도, 저곳이 궁중내의 모습이라고 단정할만한 단서가 없다.  따라서 안학 3호분이 묘주가 누구인지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참조 :http://myhome.hanafos.com/~odorata/index.html

 

 

 

안악 3호분에 그려진 고구려 군단

 아마도 이 고분벽화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막강하였던 고구려 군대편제에 대해 수많은 추측과 가설만이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악악 3호분에 그려진 고구려 군단은 255인으로 된 일개부대의 완벽한 행진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높이 2미터, 길이 10이터에 달하는 회랑의 ㄱ형벽면에 도합 250~60명의 기병, 보병, 악사 등이 꽉 들어차게 그려진 웅장한 대행렬도이다
  이 그림은 군대의 기본편제뿐 아니라, 고구려 전체의 문화수준까지 가늠해 볼 수 있는 학술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하지만 벽화의 남쪽은 비교적 선명한 반면 북쪽으로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으며 북쪽 끝에 이르러서는 인물과 의장구의 형체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 유실되었다. 행렬도는 수레를 탄 왕(을 호위하는 중배와 그 앞을 가는 전배만을 그리고 있다.

  행렬의 구성으로 보아 생략된 후배까지 합하면 500명 규모의 대행렬이었음을 쉬이 가늠할 수 있다. 행렬은 대체로 3줄이지만 주인공의 좌우는 7줄이다. 벽화는 행렬을 높은 곳에서 굽어보는 조감도식으로 그렸기에 인물들이 여러 겹으로 겹쳐 복잡한 화면구성을 이루고 있다. 당대의 회화기법에 비추어 보아도 매우 주목된다. 

  그림을 보면 개마무사는 좌우익의 날개를 담당하고 정면은 보갑병이 호위한다. 그리고 국왕 주위에는 도끼를 든 부월수와 궁수들이 자리 잡았다. 부월수는 곧 국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국왕 주위에 있게 된다.
 그리고 가장 앞은 악대가 분위기를 고취시키며 나갔고,   왕이 탄 수레의 뒤쪽에는 의장 기수, 시녀, 기마문관등이 뒤를 따랐다.

 이 고분벽화는 율동적이면서도 자유롭고 질서 정연하면서도 사람들 표정 하나 하나에 생기가 돌고 있다.


소 수레의 앉는 의자에 몸을 내맡겨서 위엄을 풍기고 있는 주인공의 옷차림은 이 무덤의 주인으로 그려진 주인공 그림의 옷과 같다. 또한 수레를 끄는 황소의 뿔이 전실 동쪽 곁간의 외양간 그림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이 인물은 이곳에 묻힌 사람임이 분명해 보인다.

소 수에의 앞에는 짧은 깃발을 든 기구들을 그렸다. 수레를 끄는 소의 바로 앞을 걸어가는 사람도 깃발을 들었는데 거기에는 검은색 바탕에 '성상변'이라는 붉은 글이 희미하게 보인다. '성왕' 혹은'성상'은 왕에 대한 최상의 존칭이다. '성상변'의 표식을 한 깃발은 무덤 주인공을 고국원왕으로 보게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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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그림을 보다보면 군사들의 복장이 매우 화려하고, 다체로운 무기를 지니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이 행차가 전투에 참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왕의 행차를 보호하고 또 과시의 목적도 아닌 의장행렬임을 뜻한다.
 특히 의장 행렬은 그 시대 쓰였던 무기와 갑옷중 가장 엄선된 것만을 착용하게 됨으로, 여기에 그려진 고구려 군단은 최상의 정예병으로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물론 예술작품은 보는 사람이 관점에 따라 달라지긴 하겠지만, 개인적으로 봐서도 안악 3호분에 있는 대 행렬도는 우리나라 고분벽화의 최고걸작으로 손꼽고 십다. 안타까운 것은 너무나 극심한 훼손과 탈색등으로 인하여, 이 그림에 그려진 255인의 무사들이 하나 둘씩 제 모습을 잃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북한의 유물 보존과 복원기술이 얼마나 진보하였는가에 따라 달라질 문제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남북한 모두의 책임이다.

 언제쯤 정치적인 문제에서 자유롭게 학술활동을 할 수 있는 날이 올까? 통일논의는 뒤로하고라도 이처럼 시급한 문제부터 우선 해결해야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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