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句麗

비운의 왕자 호동

吾心竹--오심죽-- 2010. 9. 2. 18:39

비운의 왕자 호동


 대무신왕은 고구려 3대왕으로 戰神(전신)으로까지 추앙받던 왕이었다. 하지만 그의 치적중에서 가장 큰 오점이 있었으니, 바로 好童(호동)왕자와의 불화이다.  사실 국왕과 왕자간의 불화는 고구려가 건국한 이래 이상하리만치 계속 이어져 오고 있었다.

 우선 고구려의 초대왕이었던 추모(동명)성왕의 경우, 부여에 있던 시절 예씨 부인에게서 얻은 유리가 고구려로 옴으로써 비류와 온조를 떠나보내야만 했다. 비류와 온조형제가 주몽이 아들인지 아니면 우태라는 사람의 아들인지 분명하게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그의 어머니 소서노와 주몽이 결혼하면서 그들 역시 왕자의 신분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런 그들이 유리왕자의 고구려 입국이후, 앞으로 있을 정적제거를 우려하여 부득이 남쪽지방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또 유리왕 때에는 태자 해명이 황룡국과 외교적 마찰을 빚었다는 이유로 자살하고 말았다. 당시 황룡국은 해명에게 강궁을 주어,  활시위조차 못 당기는 유약한 해명이 고구려의 태자라고 웃음거리로 만들려고 하였다.
 그런데 해명이 할시위를 당겨 부러뜨려 버렸다.  그리고 여기서 비극이 시작되었다. 유리왕은  불필요하게 외교적 마찰을 빚었다는 이유로 자살을 명령하였고, 결국 해명은 동원의 땅에서 창을 꽂고 말을 달리어 창 끝에 찔려 죽고 말았다. 사람들은 해명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겨 동원의 땅을 槍源(창원)이라고 바꿔 불렀지만, 이미  그 일은 유리왕의 치세에 최악의 오점으로 남은 다음이었다.

 호동왕자의 비극이 시작된 것은 대무신왕 재위 15년, 서기 32년  윤달이 끼어 있었던 듯 벌써 여름으로 접어들기 시작한 음력 4월이었다.
 삼국사기에는 그의 얼굴이 매우 아름다워 이름을 호동(好童- 어린아이의 얼굴같다는 뜻으로 보임)이라고 지어 주었을 만큼 대무신왕의 총애는 남달랐다. 이런 총애를 얻은 호동은 왕자 신분으로 담대한 계획을 세우게 된다.  호동왕자는 왕자신분으로  옥저 지방을 유랑하게 되는데, 이것은 바로  낙랑국을 합병하기 위한 사전 외교활동이었다. 옥저는 고구려의 남쪽에 있으면서, 낙랑국과도 인접해 있기 때문에 두나라의 연합을 막는 것이 목적이엇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낙랑왕 최리역시 옥저를 순행하고 있었다. 그의 목적역시 옥저와의 연합관계를 돈독하게 하여 고구려의 공격으로부터 함께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 최리왕에게 호동은 좋은 인질이었다. 따라서 최리왕은 호동을 보자마자 적극포섭하여 사위로 삼았다.

 그리하여 우리가 익숙하게 잘 알고 있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樂浪公主)의 설화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렇나 이 설화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야말로 호동왕자에겐 정략결혼이며, 낙랑공주에겐 비극적인 짝사랑임을 알 수있다. 당시 낙랑국에는 자명고(自鳴鼓)라는 유명한 큰 북이 있었으며, 무기고에는 멀리까지 소리를 전달할 수 있는 뿔피리가 있었다.
 이들은 적이 오면 저절로 소리가 난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신묘하였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볼 때 저절로 소리가 날리는 없다.

 당시 고구려는 물론 삼국시대에는 낙랑국이 보유하고 있던 북과 뿔피리만큼 성능이 좋은 것이 없었을 것이다.  북은 대체로 성루에 걸려 그것을 치게 되면 성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듣고 대처 할 수 있게 된다. 대형 뿔피리 역시
군사들을 효율적으로 불러  모으고, 잠자던 사람까지 깨우게 하기에 충분하다. 현대로 말하면 조기경보 시스템인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부터 들려 오는 소리로 인하여, 미리 재난과 전쟁에 대비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적이 오면 저절로 소리가 난다는 얘기도 완전 허왕된 얘기만은 아니다.

 이러한 조기경보시스템 덕분에, 고구려는 낙랑국을 공격하기 매우 힘들었다. 어떤 방법을 쓰던 자명고와 뿔피리를 파괴해야 되었지만, 평상시에는 무기고에 철저하게 숨겨져 있어 외부인의 접근은 절대 불가능하였다.
 그런데 호동왕자는 낙랑공주에게 무기고에 들어가 자명고를 찢고 뿔피리를 갈라 버리라고 한다. 그래야만 낙랑공주를 정실부인으로 맞이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낙랑공주에게 국가를 배신하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더구나 그같은 일을 하고서는 살아 남을 수가 없다. 결국 낙랑공주는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자명고와 뿔피리를 파손시키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듣자마자 호동왕자는 고구려군을 이끌고 낙랑국을 기습공격하였다.  하지만  적들의 침입을 알릴 수 있는 북과 뿔피리를 잃어벌니 낙랑국은 고구려 군이 성문으로 임박할 때 까지도 전혀 알 수 없었다.
 삼국사기에는 낙랑국이 그저 항복하였다고 되어 있지만, 적의 기습시에는 무엇보다도 빠른 전달 수단이 필요한데, 과거에는 북과 호각보다 더 빠르게 전달할 방법이 없었다. 따라서 고구려군이 낙랑성에 입성할 때 까지도 총력적인 군사적 대응을 할 방법이 없이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최리왕은 항복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국가를 배신한 자신이 딸은 이미 죽인 후였다. 그런데도 호동왕자는 최리왕에게 어떠한  보복도 한 기록이 없다. 과연 호동왕자는 낙랑공주를 사랑하긴 하였을까? 
반면 낙랑공주는 사적으로는 아버지를 배신하고 공적으로는 국가를 배신하는 엄청난 죄를 감수하고서도 낙랑국의 보배를 파손시켜 버렸다.  그 결과는 국가의 패망과 생명의 상실이었다. 아마 낙랑공주도 그렇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 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겐 호동왕자에 대한 사랑이 그 모든것을 합친 것 보다 더 큰 것이었던 가 보다.

  아무튼 고구려로 볼 때 호동왕자는 최소한의 희생으로 낙랑국을 정복한 엄청난 공을 세운 왕자임에는 분명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지위는 나날이 높아졌다. 급기야 대무신왕의 원비(元妃)는 왕자 호동이 태자의 자리를 넘 볼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사로 잡히기 시작하였다.

 생각끝에 원비는 왕자 호동이 예로써 자신을 대하지 않는다며 '장차 자신에게 음란한 짓을 하려고 한다.'라는 모함을 유리왕에게 하게된다.
하지만 대무신왕은 원비에게 '타인의 아들이기 때문에 미워하느냐?'며 오히려 호동왕자를 여전히 신뢰하고 있음을 밝혓다.
 이렇게  대무신왕이 불신하고 있다는 것을 알자, 원비는 앞날에 대한 걱정이 더욱 심해졌다. 그리하여 원비는 만약 호동왕자에게 죄가 없다면 스스로 죄를 받겠다고 하며 은밀하게 살펴 볼 것을 다시한번 간곡하게 부탁하였다.

 이렇게 까지 원비가 적극적으로 말하자, 결국 대무신왕도 호동왕자에게 죄를 물었다. 이 때 대무신왕이 호동왕자에게 어떤식으로 죄를 주려 하였는지 나와 있지는 않다. 하지만 호동왕자는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았다. 만약 변명을 하게 되면 어머니의 악함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에 효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왕으로부터 신뢰를 잃어버린 호동왕자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의 자살에 대해 어떤 사람은 낙랑공주를 죽음으로 몰고간 것에 대한 죄책감이 작용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또 정치적으로 봐서도 이미 국왕의 신뢰를 잃어버린 상태에서 후처의 소생이었던 그가 설자리는 어디에도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에도 나와있듯이 부모의 그릇된 명령에도 무조건 따르는 것은 효가 아니다. 그것은 결국 부모를 역사에 남을 不義(불의)한 부모로 만들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그럴 경우에는 다른 나라로 망명하거나 도피하여 난을 피해야 된다고 하였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중국 춘추시대 때 진의 문공이었다. 문공역시 후처의 모함에 이해 선대왕으로부터 죄를 받게 되었으나, 자살이나 혹은 저항을 하지 않고 이웃나라로 피신하여 20년의 망명 끝에 결국 왕위에 오른일이 있다.  후세 사람들은 부왕이 잘못된 명령을 내려, 본인의 목숨이 위태로워 지고 나아가 국가와 부왕의 명예가 실추될 위기에 처했을 때 행할 수 있는 합당한 선례로 꼽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호동은 아내에겐 죽음으로 몰고간 무정한 남편이었으며, 자살로 인하여 부모에게 불명예를 안겨준 어리석은 아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삼국사기에서는 앞서 자결한 해명태자는 물론 호동왕자 역시 죽지 않을 곳에서 죽은었으니 작은 고집으로 인해 대의를 저버렸다고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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