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句麗

북사열전 - 고구려편

吾心竹--오심죽-- 2010. 9. 2. 15:54

北史 列傳 (북사 열전) - 고구려편
 

(이 역사서는 중국사서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중국중심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보시지 말고, 고구려를 연구하기 위한 역사 원사료로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또  중국 중심으로 서술하긴 하였지만 삼국사기등에 미처 기록되어 지지 않은 부분이나, 고구려사 연구에 중요한 단서등을 재공하는 부분도 있어,  중요한 사료로 생각됩니다.)



 주대(周代)의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당대(唐代)의 영호덕분(令狐德)이 편찬했다. 628년(貞觀 2)에 영호덕분이 최인사(崔仁師)·잠문본(岑文本)과 함께 이 책의 편찬을 맡았으며, 진숙달(陳叔達)·당검(唐儉)도 참가하여 완성했다. 이 책은 북송(北宋) 말기에 손상을 입어 후세 사람이<북사 北史〉에서 보충한 부분이 많으며, 현존하는<주서>는 당대의 원저와는 다르다.

 *** 이해를 돕기 위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이나 부연설명은 파란색 으로 별도 표시하였습니다. ***

北史卷九十四
列傳第八十二
高麗(高句麗)·百濟·新羅·勿吉·奚·契丹·室韋·豆莫婁·地豆干·烏洛侯·流求·倭.


高句麗 (고구려) -이하 고려란 고구려를 가르킨다-

<高句麗>, 其先出<夫餘>. 王嘗得<河伯>女, 因閉於室內, 爲日所照, 引身避之, 日影又逐, 旣而有孕, 生一卵, 大如五升. <夫餘王>棄之與犬, 犬不食; 與豕, 豕不食; 棄於路, 牛馬避之; 棄於野, 衆鳥以毛茹之. 王剖之不能破, 遂還其母. 母以物 置暖處, 有一男破而出. 及長, 字之曰<朱蒙>. 其俗言[朱蒙]者, 善射也.

<夫餘>人以<朱蒙>非人所生, 請除之. 王不聽, 命之養馬. <朱蒙>私試, 知有善惡, 駿者減食令瘦, 駑者善養令肥. <夫餘王>以肥者自乘, 以瘦者給<朱蒙>. 後狩于田, 以<朱蒙>善射, 給之一矢. <朱蒙>雖一矢,  獸甚多. <夫餘>之臣, 又謀殺之, 其母以告<朱蒙>, <朱蒙>乃與<焉違>等二人東南走.

《魏書》卷一  《高句麗傳》[焉違]作[烏引烏違].$/ 中道遇一大水, 欲濟無梁. <夫餘>人追之甚急, <朱蒙>告水曰: [我是日子, <河伯>外孫, 今追兵垂及, 如何得濟?] 於是魚鼈爲之成橋, <朱蒙>得度. 魚鼈乃解, 追騎不度. <朱蒙>遂至<普述水>, 遇見三人, 一著麻衣, 一著衲衣, 一著水藻衣, 與<朱蒙>至<紇升骨城>, 遂居焉. 號曰<高句麗>, 因以<高>爲氏. 其在<夫餘>妻懷孕, <朱蒙>逃後, 生子<始閭諧>. 及長, 知<朱蒙>爲國王, 卽與母亡歸之. 名曰<閭達>, 委之國事.

'고구려'는 먼저 '부여'에서 나왔다. 왕이 일찍이 '하백'의 여자를 얻어, 인하여 집안에 가두어 두었는데, 태양이 비추자, 몸을 피하였으나, 태양이 또 몸은 따라다녔다. 이미 아이를 베고 있었는데 알 하나를 낳았다. 크기가 다섯되나 되었다. '부여왕'이 버려 개에게 주었으나, 개는 먹지 않고, 돼지에게 주었으나 돼지도 먹지 않았다. 길에 버리자 소나 말이 이를 피하고, 들에 버렸으나 새들이 무리지어 털로써 보호하였다. 왕이 이를 쪼갤려고 하였으나 능히 깨뜨릴 수 없어, 다시 그 어미에게 돌려주었다. 어미가 이를 보자기에 싸서 따뜻한 곳에 두니, 한 남자가 깨뜨리고 나왔다. 장성하자 이름을 '주몽'이라 하였다. 그 풍속에 '주몽'이란 말은 활을 잘 쏜다 라는 것이다. '

부여'사람들이 '주몽'이 사람이 태어난 것과 다르다고 해서, 버리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고, 말기지에 명하였다. '주몽'이 사사로이 시험하여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알아 좋은 말은 밥을 적게 주어 여위게 하고, 둔한 말은 잘 길러 살찌게 하였다. '부여왕'이 살찐말을 타고, 여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후에 밭에서 사냥을 하는데, '주몽'이 활을 잘 쏜다 하여 화살 하나를 주었다. '주몽'이 화살 하나로 짐승을 많이 잡았다. '부여'의 신하들이 주몽을 모살할려고 하자 그 어미가 '주몽'에게 고하자, '주몽'이 이에 '언' '위'등 두명과 동남으로 달아났다.

길을 다는 중에 우연히 큰 물을 만나, 건너고자 하나 다리가 없었다. 부여 사람들이 급히 뒤쫓아 오는데, '주몽'이 물에 고하여 말하기를, 나는 태양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이제 병사들이 쫓아 오니 어찌하면 건널수 있겠는가? 이때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서 '주몽'이 건널수 있었다. '주몽'이 '흘승골성'에 이르러 여기에 거하였다. '고구려'라 부르는 것이다. 인하여 '고'씨로 성을 삼았다. '부여'에 남아있던 처가 아이를 베었는데, '주몽'이 달아난 후였다. 아들을 낳으니 '시여해'(유리왕)하여, 장성하여 '주몽'을 알자 나라의 왕이 되었다. 이미 어미는 돌가가신 뒤였다. 이름을 '여달'이라 하니 나라의 일을 맡기었다.

<朱蒙>死, 子<如栗>立./$《魏書》作[<朱蒙>死, <閭達>代立, <閭達>死, 子<如栗>立]. 此脫七字.$/ <如栗>死, 子<莫來>立, 乃幷<夫餘>.

'주몽'이 죽자 아들 '여율'이 서고, '여율'이 죽자 아들 '막래(대무신왕) 섰는데, 이에 '부여'를 병합하였다. (유리왕의 이름을 중국에선 여로 알았던 것 같음)

<漢><武帝><元封>四年, 滅<朝鮮>, 置<玄 郡>, 以<高句麗>爲縣以屬之. <漢>時賜衣 朝服鼓吹,/$諸本[時]作[昭],《三國志》卷三 《東夷傳》·《梁書》卷五四《諸夷傳》作[時]. 按下文云[常從<玄 郡>受之], 知是指漢時, 非指漢昭帝. 此段本之《梁書》,《梁書》又本之《三國志》, 今據改.$/ 常從<玄 郡>受之. 後稍驕, 不復詣郡, 但於東界築小城受之, 遂名此城爲< 溝 >. [溝 ]者, <句麗>[城]名也.

<王莽>初, 發<高句麗>兵以伐胡, 而不欲行, <莽>强迫遣之, 皆出塞爲寇盜. 州郡歸咎於<句麗侯><騶>, <嚴尤>誘而斬之. <莽>大悅, 更名<高句麗>, <高句麗侯>. <光武><建武>八年, <高句麗>遣使朝貢./$諸本誤疊[朝貢]二字, 今刪.《三國志》作[<莽>大悅, 布告天下, 更名<高句麗>爲{下句麗}. 當此時爲侯國. <漢><光武帝>八年, <高句麗王>遺使朝貢, 始見稱王].《梁書》略同《三國志》.《北史》訛脫不可解.$/

한 무제 원봉 사년 '조선'을 멸하고 '현토군'을 두었다. '고구려'를 현으로 삼고, 이를 속하게 하였다. '한나라'때에 옷과 두건 조복과 북과 피리를 하사하니, 항상 '현토군'에 나와 이를 받았다. 후에 점점 교만해 지더니 군에 나와 복속하지 않고, 다만 동쪽경계에 작을 성을 쌓고, 이를 받았다. 그 성을 '책구루'라 부렀다. '구루'라는 것은 '구려'의 성 이름이다. '

왕망' 초에 '고구려'의 병사를 일으켜 호를 쳤는데, 가고자 하지 않아, '망'이 강제로 다그치어 이를 보냈는데, 모두, 요새에서 나가 도적이 되었다. 주군에서 허물을 '구려후' '추'에게 돌리니, '암우'가 꾀어 이를 베었다. '망'이 크게 기뻐하고, 다시 이름을 '고구려', '고구려후'라 하였다. '광무' '건원' 팔년 '고구려'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至< >·<安>之間, <莫來>裔孫<宮>, 數寇<遼東>. <玄 >太守<蔡風>討之, 不能禁.
'상'과 '안' 사이에 이르러, '막래'의 후손 '궁'이 수차례 '요동'을 도적질 하였다. '현토' 태수 '제풍'이 이를 벌하였는데, 능히 금할 수 없었다.

<宮>死, 子<伯固>立. <順>·<和>之間, 復數犯<遼東>, 寇抄. <靈帝><建寧>二年, <玄 >太守<耿臨>討之, 斬首虜數百級, <伯固>乃降, 屬<遼東>. <公孫度>之雄海東也, <伯固>與之通好.

'궁(고구려태조) 죽자 아들 '백고'(신대왕- 태조의 막내아우로 나옴)순'과 '화' 사이에 다시 여러번 '요동'을 범하여, 노략질 하였다. '영제' '건녕' 이년 '현토' 태수 '경임'이 이를 벌하고, 포로 수백을 베었다. '백고'가 이에 항복하여 '요동'에 속하였다. '공손도'가 해동에서 일어나자 '백고'가 통하여 좋아하였다.

<伯固>死, 子<伊夷摸>立. <伊夷摸>自<伯固>時, 已數寇<遼東>, 又受亡胡五百餘戶. <建安>中, <公孫康>出軍擊之, 破其國, 焚燒邑落, 降胡亦叛. <伊夷摸>更作新國. 其後<伊夷摸>復擊<玄 >, <玄 >與<遼東>合擊, 大破之.

'백고'가 죽자 아들 '이이모(고국천왕) 섰다. '이이모'는 스스로 '백고'때에 이미 수차례 '요동'을 침략하였다. 또한 망한 호인 오백호를 얻었다. '건안' 중에 '공손강'이 군사로 공격하여 그 나라를 깨뜨리고, 수도를 불사르자, 항복한 호가 역시 모반하였다. '이이모'가 다시 새로운 나라를 열었다. 그 후에 '이이모'가 다시 '현토'를 공격하였는데, '현토'가 '요동'과 함께 공격하여 크게 이를 깨뜨렸다.

<伊夷摸>死, 子<位宮>立. 始<位宮>曾祖<宮>, 生而目開能視, 國人惡之. 及長凶虐, 國以殘破. 及<位宮>亦生而視人, <高麗>呼相似爲[位], 以爲似其曾祖<宮>, 故名<位宮>. <位宮>亦有勇力, 便鞍馬, 善射獵. <魏><景初>二年, 遣太傅·<司馬宣王>率衆討<公孫文懿>,/$《三國志》·《梁書》作[公孫淵],
《北史》避<唐>諱稱字.$/ <位宮>遣主簿·大加將數千人助軍.

<正始>三年, <位宮>寇<遼><西安平>./$《三國志》及《通典》卷一八六·《通志》卷一九四《高句麗傳》都無[遼]字. 按《後漢書》《郡國志》·《晉書》《地理志》, <遼東郡>有<西安平>, <遼西郡>無[安平]. [遼]字誤衍.$/ 五年, <幽州>刺史< 丘儉>將萬人出<玄 >, 討<位宮>, 大戰於<沸流>. 敗走, <儉>追至<  峴>, 懸車束馬登<丸都山>, 屠其所都. <位宮>單將妻息遠竄. 六年, <儉>復討之, <位宮>輕將諸加奔<沃沮>. <儉>使將軍<王 >追之, 絶<沃沮>千餘里, 到<肅愼>南, 刻石紀功. 又刊<丸都山>·銘<不耐城>而還. 其後, 復通中夏.

'이이모'가 죽자 아들 '위궁(산상왕 - 고국천왕의 아우)이 섰다. 궁'은 증조부 '궁'에서 시작하는데, 태어나서부터 눈을 뜨고 능히 볼 수 있어, 나라 사람들이 이를 싫어 하였다. 장성하자 흉폭해지고 사나워져, 나라를 해치고, 깨어졌다. '위궁' 역시 태어나서부터 사람을 보아 '고려'에서 서로 비슷하다를 '위'라 하는데, 증조부 '궁'과 비슷하니 고로 이름이 '위궁'이다. '위궁' 역시 용력이 있고, 말을 잘 타고, 활과 사냥에 능하였다.
'위나라' '경초' 이년 태부 '사마선왕'을 보내어 무리를 이끌고 '공손문의'를 쳤는데, '위궁'이 주부, 대가의 장수 수천을 보내어 군사를 도왔다.

'정시' 삼년 '위궁'이 '요'의 '서안평'을 도적질하고, 오년 '유주자사 관구검'이 만여명으로 '현토'에서 나와 '위궁'을 쳤다. '비류'에서 크게 싸웠다. 패하여 달아나니 '검'이  ??고개에 이르기까지 쫓아가서 '환도선'에 올라 그 도읍을 무찔렀다. '위궁'이 단지 아내와 멀리 숨었다. 육년 '검'이 다시 이를 쳤는데, '위궁'이 재빨리 여러 가들과 '옥저'로 달아났다. '검'이 장군 '왕기'를 보내어 쫓았지만, '옥저' 천여리에서 그만 두었다. '숙신'의 남쪽에 이르러, 돌에 그 공을 새기었다. 또한 '환도산'을 깍아 '불함성'이라 새기고 돌아 왔다. 그 후에 다시 중국과 통하였다.

<晉><永嘉>之亂, <鮮卑><慕容 >據<昌黎><大棘城>, <元帝>授<平州>刺史./$諸本[帝]作[年], [平州]上有[北]字.《梁書》.《諸夷傳》作[帝], 無[北]字. 按《晉書》卷一 八《慕容 載記》, < >逐<平州>刺史<崔毖>, <晉><元帝>因以<平州>刺史授之. 此[年]字訛, [北]字衍, 今據改刪.$/ <位宮>玄孫<乙弗利>頻寇<遼東>, < >不能制.

'진나라' '영가'의 난리때 '선비'의 '모용귀'가  '창려' '대극성'에서 일어났는데, '원제'가 '평주 자사'를 내렸다. '위궁'의 손자 '을불리'가 빈번히 '요동'을 노략질 하니 '귀'가 능히 제도하지 못하였다.

<弗利>死, 子<釗>代立. <魏><建國>四年, <慕容 >子<晃>伐之, 入自<南陜>, 戰於<木底>, 大破<釗>軍, 追至<丸都>. <釗>單馬奔竄, <晃>掘<釗>父墓, 掠其母妻·珍寶·男女五萬餘口, 焚其室, 毁<丸都城>而還. <釗>後爲<百濟>所殺.

'불리'가 죽자 아들 '쇠'(고국원왕, 이름은 사유 혹은 쇠로도 불렸다)가 섰다. '위 건국' 사년에 '모용귀'가 아들 '황'으로 이를 치니, 스스로 '남합'에 들어와 '목저'에서 전쟁을 하였는데, '쇠'의 군사를 크게 깨고, '환도'까지 쫓아갔다. '쇠'가 홀로 말을 타고 달아나 숨으니, '황'이 '쇠'의 아비의 묘를 파해치고, 그 어미와 처 보물과 남녀 오만여명을 노략질 하고 그 궁궐을 불살르며, '환도성'을 허물고 돌아 왔다. '쇠'는 후에 '백제'에 의해 살해 당했다.(삼국사기에는 평양성 전투에서 화살에 맞은 상처가 악화되어 사망하였다고 나왔다. 따라서 직접 살해된 것은 아니다.)

及<晉><孝武><太元>十年, <句麗>攻<遼東>·<玄 郡>. <後燕><慕容垂>遣其弟<農>伐<句麗>,/$按《晉書》卷一二三《慕容垂載記》, <農>是<垂>之中子. 此作[弟], 是承《梁書》之誤.$/ 復二郡. <垂>子<寶>以<句麗王><安>爲<平州>牧, 封<遼東>·<帶方>二國王, 始置長史·司馬·參軍官. 後略有<遼東郡>.

'진나라 효무 태원' 십년에 이르러, '구려'가 '요동', '현토군'을 공격하였다. '후연의 모용수'가 동생 '농'을 보내어 '구려'를 쳤서, 다시 이군을 회복하였다. '수'의 아들 '보'가 '구려왕 안'을 '평주 목'에 삼고 '요동', '대방' 이국왕으로 봉하여 장사 사마 참군관을 두었다. 후에 '요동군'을 다스렸다.

<太武>時, <釗>曾孫<璉>始遣使者詣<安東>, 奉表貢方物, 幷請國諱. <太武>嘉其誠款, 詔下帝系名諱於其國. 使員外散騎侍郞<李敖>拜<璉>爲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東夷中郞將·<遼東郡公>·<高句麗王>. <敖>至其所, 居<平壤城>, 訪其方事, 云: 去<遼東>南一千餘里, 東至<柵城>,/$諸本無[東]字,《魏書》有. 按下云[南至]·[北至], 是言<高麗>國境四至, 當有[東]字, 今據補.$/ 南至小海, 北至舊<夫餘>, 人戶參倍於<前魏>時.

後貢使相尋, 歲致黃金二百斤·白銀四百斤. 時<馮弘>率衆奔之, <太武>遣散騎常侍<封撥>詔<璉>, 令送<弘>. <璉>上書稱當與<弘>俱奉王化, 竟不遣. <太武>怒, 將往討之. <樂平王><丕>等議待後擧, <太武>乃止. 而<弘>亦尋爲<璉>所殺.

'태무'때에 '쇠'의 증손 '련'(장수왕의 이름 거련)이 처음 사자를 보내어 '안동'에 이르러 표를 받들어 방물을 받치며, 나라의 휘를 함께 하길 청하였다. 사신 원외산기시랑 '이오'가 '련'에게 절하며 연을 '도독 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동이중랑장 요동군공 고구려왕'으로 삼았다. '오'가 그 처소에 이르렀는데, '평양성'에 거하고 있었다. 찾아가 여러 가지일을 물었는데, 말하길 '요동'에서 남쪽으로 일천여리를 가면 동쪽으로 '책성'에 이르고, 남쪽으로 작은 바다에 이른다. 북쪽으로는 옛날 '부여'이고 호수는 '전위'때의 세배이다.

후에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받쳤는데 해마다 황금 이백근과 은 사백근을 받쳤다. 이때 '풍홍'이 무리를 이끌고 도망갔는데, 태무가 산기상시 '봉발'을 보내어 '련'에게 고하기를 '홍'을 보내달라 하였다. '련'이 상서하여 '홍'이 왕화됨을 받들었다고 하여 끝내 보내주지 않았다. '태무'가 노하여 장군을 보내어 이를 쳤다. '낙평왕 비'등이 의논하여 기다리다가 후에 일어나라고 하니 '태무'가 이에 그치었다. '홍'은 역시 '련'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後<文明太后>以<獻文>六宮未備,  <璉>令薦其女. <璉>奉表云: 女已出, 求以弟女應旨. 朝廷許焉, 乃遣<安樂王><眞>·尙書<李敷>等至境送幣. <璉>惑其左右之說, 云朝廷昔與<馮氏>婚姻, 未幾而滅其國. <殷>鑒不遠, 宜以方便辭之.

<璉>遂上書, 妄稱女死. 朝廷疑其矯拒, 又遣假散騎常侍<程駿>切責之, 若女審死, 聽更選宗淑. <璉>云: [若天子恕其前愆, 謹當奉詔.] 會<獻文>崩, 乃止. 至<孝文>時, <璉>貢獻倍前, 其報賜亦稍加焉. 時<光州>於海中得<璉>遣詣<齊>使<餘奴>等, 送闕.

<孝文>詔責曰: [<道成>親殺其君, 竊號<江>左, 朕方欲興滅國於舊邦, 繼絶世於<劉氏>. 而卿越境外鄕, 交通簒賊, 豈是藩臣守節之義? 今不以一過掩舊款, 卽送還藩. 其感恕思愆, 祗承明憲, 輯寧所部, 動靜以聞.]

후에 '문명태후'가 '헌문'이 육궁을 갖추지 않았다 하여 조서를 내려 '련'이 여자를 천거하게 하였다. '련'이 표를 받들어 말하길, 여자가 없어, 아우의 여자를 구하여 응합니다 하였다. 조정에서 이에 허락하니 '안락왕 진'을 보내었다. 상서에는 '이오'등이 그 곳에 비단을 보냈다 하였다. '련'이 그 좌우의 말에 의심하였는데, 이르기를 조정에서는 옛날 '풍씨'와 혼인하였는데 얼마있지 않아 그 나라가 망하였습니다. 하였다. '은'의 때가 멀지 안음을 생각하십시오. 마땅히 방편을 말해야 합니다.

'련'이 상서하여 거짓으로 여자가 죽었다 하니 조정에서는 이를 거짓이라 의심하고, 또한 가산기상시 '정준'을 보내어 끊고 이를 책하여, 만약 여자가 죽었으면 다시 여자를 가려 뽑아 청하라. 하였다. '련'이 말하길 만일 천자가 앞의 허물을 용서한다면 삼가 조서를 받들겠습니다. '헌문'이 죽자 이내 그치었다. '효문'때에 이르러 '련'이 앞서의 두배의 공물을 받치니 그 하사품 역시 점점 더하였다. 이때 '광주'의 바다에서 '련'이 '제에 보내는 사신 '여노'등을 얻어 대궐에 보내었다.

'효문'이 책하여 고하길, '도성'이 그 임금을 죽이고 '강'의 왼쪽에서 몰래 일어나, 짐이 그 나라를 없애고 옛나라를 세워 '유씨'의 대를 끊고자 한다. 이에 경이 바깥으로 그 경계를 넘어 적들과 통하니, 어찌 이것이 신하로써 지켜야할 의라 할 것인가? 이제 하나의 잘못으로 옛날의 정성을 가리지 말라. 곧 돌려 보낼 것이다. 허물을 생각하여 용서함을 감사히 여기고 밝은 법을 받들어 공경하여 거느리는 바를 화목하고 편하게 하니 동정으로 삼가 받들라. 하였다.

<太和>十五年, <璉>死, 年百餘歲. <孝文>擧哀於東郊, 遣謁者僕射<李安上>策贈車騎大將軍·太傅·<遼東郡公>·<高句麗王>, 諡曰<康>. 又遣大鴻 拜<璉>孫<雲>使持節·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郞將·<遼東郡公>·<高句麗王>. 賜衣冠服物車旗之飾.

又詔<雲>遣世子入朝, 令及郊丘之禮. <雲>上書辭疾, 遣其從叔<升于>隨使詣闕. 嚴責之. 自此, 歲常貢獻. <正始>中, <宣武>於東堂引見其使<芮悉弗>, 進曰: [<高麗>係誠天極, 累葉純誠, 地産土毛, 無愆王貢. 但黃金出<夫餘>, 珂則<涉羅>所産. 今<夫餘>爲<勿吉>所逐, <涉羅>爲<百濟>所幷. 國王臣<雲>惟繼絶之義, 悉遷于境內. 二品所以不登王府, 實兩賊之爲.]

<宣武>曰: [<高麗>世荷上將, 專制海外, 九夷 虜, 實得征之. 昔方貢之愆, 責在連率. 宜宣朕旨於卿主, 務盡威懷之略, 使二邑還復舊墟, 土毛無失常貢也.]

'태화' 십오년 '련'이 죽으니 백여세 였다. '효문'이 동쪽 성밖에서 슬퍼하고, 아뢰는 자로 복사 '이안상'을 보내어, 책을 '거기대장군 태전 요동군공 고구려왕'을 더하여 시호를 '강'이라 하였다. 또 대홍려를 보내어 '련'의 손자 '운(문자명왕: 이름은 나운,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서 왕위를 승계하였다.)'에게 절하며 '사지절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공 고구려왕'으로 삼았다. 옷과 관 복과 물건 수례와 기를 꾸미는 것을 하사하였다.

또한 '운'에게 고하길 세자를 입조하라 하여 성밖에서 예를 차리는 것을 명하였다. '운'이 상서에 병을 핑계삼아 숙부 '승우'를 보내고 사신으로 대궐까지 수행하게 하였다. 이를 엄히 책하니 스스로 이에 세마다 항시 공물을 받쳤다. '정시'중에 '선무'가 사신 '예실불'을 동당에 불러 보니, 나아가 말하길, '고려'는 정성으로 하늘을 잇어 그 정성이 쌓여 땅에는 토모가 산출되어 왕의 공물에는 허물이 없습니다. 다만 황금은 '부여'에서 나오고, 옥이 '섭라'에서 나와, 이제 '부여'가 '물길'을 내 쫓고, '섭라'가 백제와 어울립니다. 나라의 왕인 신하 '운'이 의의 계통을 이어 모두다 경내에 옮기었습니다. 두 물건을 왕의 곳간에 채우지 않고, 양적의 제물을 베풉니다.

'선무'가 말하길 '고려'를 어찌 천자를 책망하는가? 오로지 해외를 제도하고 영리한 오랑캐를 벌하여 재물을 얻었다. 지난달 방물을 받친 허물은 꾸짓어서 복종하게 되니, 마땅히 짐이 경에게 말하길, 힘써 위엄으로 다스리고, 두 읍은 옛날로 돌려 보내라. 토모가 잘못된 공물은 아닌 것이다. 하였다.

<神龜>中, <雲>死, <靈太后>爲擧哀於東堂. 遣使策贈車騎大將軍·領護東夷校尉·<遼東郡公>·<高麗王>. 又拜其世子<安>爲鎭東將軍·領護東夷校尉·<遼東郡公>·<高麗王>. <正光>初, <光州>又於海中執得<梁> 所授<安>寧東將軍衣冠劍 , 及使人<江法盛>等, 送京師.

'신귀'중에 '운'이 죽자 '영태후'가 동당에서 슬퍼하였다. 사신을 파견하여 '거기대장군 령호동이교위 요동군공 고려왕'을 더하였다. 또 절하여 그 세자 '안'(안장왕 : 흥안)에게 '진동장군 령오동이교위 요동군공 고려왕'을 삼았다. '정광' 초에 또 '광주'의 바다 가운데에 '양나라'가 '안'에게 내리는 영동장군의 의관과 검 노리게를 얻었다. 이에 사신 '강법성'등을 서울로 보냈다.

<安>死, 子<延>立. <孝武帝>初, 詔加<延>使持節·散騎常侍·車騎大將軍·領護東夷校尉·<遼東郡公>·<高句麗王>. <天平>中, 詔加<延>侍中·驃騎大將軍,/$諸本[驃]作[車],《魏書》作[驃]. 按上文言其已爲車騎大將軍, 則加官當爲驃騎, 今據改.$/ 餘悉如故.

'안'이 죽자 아들 '연'(안원왕: 보연 - 삼국사기에는 안장왕이 아들이 없어 동생이 즉위하였다고 나온다.) 섰다. '효무제' 초에 고하길 '연'에게 '사지절 산기상시 거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공 고구려왕'을 더하였다. '천평' 중에 '연'에게 '시중 표기대장군'을 더하고 나머지는 옛날과 같다. 

<延>死, 子<成>立. 訖於<武定>已來,/$《魏書》[已來]作[末]一字, 是.$/ 其貢使無歲不至. <大統>十二年, 遣使至<西魏>朝貢. 及<齊>受<東魏>禪之歲, 遣使朝貢于<齊>. <齊><文宣>加<成>使持節·侍中·驃騎大將軍, 領東夷校尉·<遼東郡公>·<高麗王>如故. <天保>三年, <文宣>至<營州>, 使<博陵><崔柳>使于<高麗>, 求<魏>末流人.  <柳>曰: [若不從者, 以便宜從事.] 及至, 不見許. <柳>張目叱之, 拳擊<成>墜於牀下, <成>左右雀息不敢動, 乃謝服, <柳>以五千戶反命.

'연'이 죽고 아들 '성'(양원왕: 평성)이 섰다. '무정'에 이르러 왔었는데, 해마다 오지 않음이 없었다. '대통' 십이년 사신이 '서위'에 이르러 조공하였다. '제'가 '동위'를 합병한 해에 사신을 '제'에 보냈다. '제'의 '문선'이 '성'에게 '사지절 시중 표기대장군'을 더하고 '령동이교위 요동군공 고려왕'은 옛날과 같다. '천보' 삼년 '문선'이 '영주'에 이르러 사신'박릉'과 '최유'를 '고려'에 보내어 '위'의 유민을 구하라 하니. 조서에서 '유'가 말하길 만일 좇지 안는다면, 의당 일을 좇아야 한다 하였다. 이르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유'가 눈을 크게 뜨고 꾸짓고, 주먹질을 하자, '성'이 마루아래로 떨어졌다. '성'이 숨을 몰아쉬고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이에 사죄를 하자 '유'가 오천여호를 되돌렸다.

<成>死, 子<湯>立. <乾明>元年, <齊><廢帝>以<湯>爲使持節·領東夷校尉·<遼東郡公>·<高麗王>. <周><建德>六年, <湯>遣使至<周>, <武帝>以<湯>爲上開府儀同大將軍·<遼東郡公>·<遼東王>. <隋><文帝>受禪, <湯>遣使詣闕, 進授大將軍, 改封<高麗王>. 自是, 歲遣使朝貢不絶.

'성'이 죽고 아들 '탕(평원양 : 양성)'이 섰다. '건명' 원년에 '제'의 '폐제'가 탕을 '사지절 령동이교위 요동군공 고려왕'을 삼았다. '주 건덕' 육년 '탕이 사신을 보내어 '주'에 이르르니, '무제'가 '탕'을 '상개부의동대장군 요동군공 요동왕'을 삼았다. '수' '문제'가 선양 받자 '탕'이 사신을 보내어 궐에 이르렀다. 나아가 대장군을 받고 고쳐 '고려왕'을 봉함 받고 이때부터 해마다 사신을 보내어 조공이 끊이질 않았다.

其國, 東至<新羅>, 西度<遼>, 二千里; 南接<百濟>, 北隣<靺鞨>, 一千餘里. 人皆土著, 隨山谷而居, 衣布帛及皮. 土田薄瘠, 蠶農不足以自供, 故其人節飮食.

其王好修宮室, 都<平壤城>, 亦曰<長安城>, 東西六里,/$諸本脫[西]字, 據《周書》卷四九·《隋書》卷八一《高麗傳》補.$/ 隨山屈曲, 南臨<浿水>. 城內唯積倉儲器備, 寇賊至日, 方入固守. 王別爲宅於其側, 不常居之. 其外復有<國內城>及<漢城>, 亦別都也. 其國中呼爲三京. 復有<遼東>·<玄 >等數十城, 皆置官司以統攝. 與<新羅>每相侵奪, 戰爭不息.

그나라는 동쪽이 '신라'이고 서쪽은 '요'를 넘어 이천리이다. 남쪽은 '백제'와 접하고, 북쪽은 '말갈'과 이웃하니, 일천여리이다. 사람들은 토착하고, 산과 계곡에 의지하여 거쳐한다. 옷은 베와 비단과 가죽으로 하고, 땅이 척박하여 양잠하고 농사지어도 족하지 않다. 고로 사람들은 음식을 절약한다.

그 왕은 좋은 궁실을 닦아 도읍을 '평양성'이라 하고 또 말하길 '장안성'이라고 한다. 동서가 육리이고 산의 굴곡에 있어 남쪽은 '패수'에 임한다. 성내에 오직 창고에 쌓아두고 대비하는데, 적이 이르르면 들어와 지킨다. 왕은 따로 그 곁에 집을 짓는데 항상 거기에 거하지는 않는다. 그 밖에 '국내성'과 '한성'이 있는데 역시 다른 도읍지이다. 그 나라에서 삼경이라 부른다. 다시 '요동' '현토'등 십여성이 있는데 모두 관리를 두어 다스렸다. '신라'가 매양 침범하니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북사열전에서는 광개토 대왕을 뛰어넘어 갑자기 장수왕이 등장한다. 물론 삼국사기에 나와있는 장수왕의 기록을 보아도, 고구려 역사상 가장 다양하고 풍부한 조공무역 기록이 있다. 아니 고구려 뿐 아니라 삼국시대전체를 보아도 단연 최다이며 또 최대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것은 곧 중국에서도 장수왕에 대한 자료가 그만큼 풍부하였을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의문점이 든다. 왜 광개토 대왕때의 기록은 통채로 기록하지 않은 것일까? 분명 의도적인 삭제나 왜곡으로 보인다. 단 한 줄의 기록조차 남길 수 없을 만큼 태왕 광개토의 기록은 중국에 있어 치욕적인 것이었을까? 그것은 여전히 각자의 판단에 맡길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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