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句麗

비려원정 - 고구려 건국의 발판

吾心竹--오심죽-- 2010. 2. 8. 15:45

 

 

비려원정  - 고구려 건국의 발판


 고구려를 세운 주몽(주몽(朱蒙) 또는 추모(皺牟)·추몽(皺蒙)BC 37∼BC 19) 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그리고 광개토대왕릉비에 각각 전한다.  하지만 이들 건국신화의 주 내용은 북부여에서 태어난 주몽이 큰강을 건너 고구려를 세웠다는 일관된 내용을 다루고 있어,  고구려 건국의 주요 근거지가 강을 중심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옛적 시조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세웠는데 (왕은) 북부여(北夫餘)에서 태어났으며, 천제(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河伯;水神)의 따님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성스러운 (5자 불명) 이 있었다.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거쳐가게 되었다. 왕이 나룻가에서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며 하백(河伯)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鄒牟王)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 머리를 짓게 하여라"라고 하였다. 말이 끝나자마자 곧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떼가 물위로 떠올랐다. 그리하여 강물을 건너가서,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 산상(山上)에 성(城)을 쌓고 도읍(都邑)을 세웠다.



  그렇다면 광개토 대왕에 언급된 비류곡은 어디일까? 삼국사기에 의하면 주몽은 엄사수를 건넜다고 나오는데, 압록강의 동북쪽에 있다고 하였다.
 압록강의 위치에 대해서는 약간의 의견차이가 있긴 하지만, 김부식 생존당시 압록강은 지금의 압록강을 뜻한다. 따라서 엄사수는 압록강의 한 지류라고 생각된다. 여기서 광개토대왕비문에 엄리대수라고 표현한 것은, 고구려의 입장에서 봤을 때 엄사수는 건국과 관련된 매우 성스럽고 중요한 강이었음으로, 강이름 조차 높여 불렀을 것이다.

 또 건국지도 비류곡 홀본에 위치한다고 나왔는데, 삼국사기에는 위서의 내용을 인용하며 흘승골성이라 표현한 것으로 봐서 현재 환도산성일 가능성이 가장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튼 주몽이 고구려 건국초기에 가장 상세하게 나와있는 기사가 바로 비류국 원정이다. 주몽은 건국초기부터 말갈부를 병합하는 등 적극적인 팽창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비류수에 채소 잎이 흘러내려 오는 것을 보고 비류국의 위치를 알았다고 하였다. 또 비류국이라는 국명을 보더라도 비류수와 깊은 관련이 있는 나라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비류국은 비류수 상류지역에 위치한 나라가 분명한데, 국가의 위치조차 몰랐던 것으로 봐서 상당히 소규모 국가이며 동부여와는 별다른 관계를 맺지 못한 나라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주몽은 이 비류국을 합병함으로 인해 비류수 전체를 장악 할 수 있었고, 그것이 건국초기부터 고구려가 팽창할 수 있었던 주요 원동력이 되었다.  그렇다면 고구려 건국지와 깊은 관련이 있는  비류수는 과연  어디일까?

 고구려 초기 건국지가 졸본지역임을 감안해 볼 때, 비류수는 압록강이거나 혹은 퉁구스강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비류국은 아마도 현재 압록강 상류지역세서 백두산으로부터 뻗어나가는 토문강 사이에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백두산은 옛 부터 우리민족의 성산이었다. 따라서 비류국의 왕 역시 국가는 작지만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다는 자부심은 대단하였다.

 비류국왕 송양은 주몽이 천제의 아들임을 자처함에도 전혀 굴하지 않고, 오히려 주몽에게 자신의 신하가 될 것을 제한하였다.  그로 인하여 양 국가는 심각한 외교적 마찰을 빚게 되었다.
 이후 역사서는 활로써 기예를 시험하였다는 간접적인 표현으로, 양국가간의 무력충돌이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실제 고구려가 비류국을 병합한 것도 1년이 지난 추모성왕 재위 2년 6월(기원전 36년)에 이르러서 인것을 봐도, 상당한 분쟁이 있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추몽은 잘 훈련된 궁수부대를 동원하여 비류국을 압박하였으며, 자신이 직접 신기에 이르는 궁술을 보여줌으로써 천제의 아들이라는 믿음을 주었던  것이다. 또 당시에는 국왕이 갖는 권력보다 천제의 아들이 갖는 권력과 의미가 더 컸기에 외교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 건국역사에 있어 비류국 병합이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는가에 대해선, 시조 추모성왕이 그 땅을 多勿都(다물도)라 하고, 옛땅의 회복을 다물이라고 한 것에도 알 수 있다.
 결국 비류국은 고조선이 멸망함에 따라 파생된 나라였으며, 천제의 아들 즉 단군의 후손임을 강조한 추모성왕의 외교적 결실에 의해 통합된 나라였다.
 이후 추모성왕은 태백산(지금의 백두산) 동남쪽 행인국(荇人國)과 북옥저등 고조선 멸망이후 파생된 여러 나라를 통합해 가면서, 고구려 성장의 원동력을 제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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