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句麗

장수왕대의 외교전쟁

吾心竹--오심죽-- 2010. 2. 8. 15:29

 

 

장수왕대의 외교전쟁

■ 394(광개토왕 4)∼491(장수왕 79)
■ 고구려 제20대 왕
■ 재위 413∼491

 전쟁은 반드시 칼과 죽음이 뒤따르는 물리적인 충돌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서로의 힘이 비슷하여 승부를 가늠할 수 없을 때에는, 치열하게 외교전을 전개하기도 한다. 특히 장수왕 시대 때의 외교는 그야말로 전쟁에 버금갈 만큼 치열하게 전개되었으며, 무력을 동원하지 않고서도 국제적인 문제를 풀 수 있음을 증명하였다.

 장수왕의 본명은 거련(巨連) 또는 연(璉)이라고 하며 , 서기 408년 광개토왕 18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부왕이 죽은 뒤 왕위를 계승하였다.


당시 황하강을 중심으로 한 북중국은 여러 이민족의 국가들이 각축을 벌이다가 439년 북위(北魏북위, 386∼534))에 의하여 통일되었다.

 양쯔강을 중심으로 한 남중국에는 한족에 의한 동진(東晉, 317∼420)·송(宋, 420∼479)·남제(南齊, 479∼502)가 차례로 흥망을 되풀이하고 있었는데 이 시기를 흔히 남북조 시대라고 한다.



* 연두색으로 채색된 부분은 개인적인 의견이며, 고구려의 영토에 대해서는 이보다 더 좁게 보는 견해가 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에 장수왕은 즉위하던 해에 동진에 사절을 파견하여 70년 만에 남중국 국가와의 교섭을 재개하였다, 그리고 동진을 이은 송·남제와도 외교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이것은 북위와 백제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북위가 북중국의 강자로 부상됨에 따라 재위 13년에 위에 보내어 조공하는 등 국제관계의 균형을 유지하였다.

 여기서 조공이란 누차 지적되는 것이지만, 동북아의 고대에서는 통상적인 국제무역행위와 우호증진을 목적으로 한 사신파견의 성격이다. 물론 이러한 평등관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대등한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고구려 시대때 행해지던 조공을 서구에서 행해지던 일방적인 조공행위와 비교해서는 안되며, 또 조선과 청국과의 조공관계와도 본질적으로 다르다.
 장수왕이 서로 적대적이었던 동진과 북위에 각각 사신을 파견하고 조공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두 세력을 동시에 견제할만한 충분한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중국을 분할하고 있던 두 세력으로서도 고구려의 이러한 이중외교가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재위 15년에는 도읍을 평양으로 옮겨 본격적으로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삼국시대를 성립하게 되었다. 장수왕의 평양 천도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기 보다는 광개토대왕때부터 꾸준히 준비해오던 남진정책을 시행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북방에서 충분한 영토를 확보한 고구려 였기에 아직 마무리 되지 못한 대통일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 들게 된 것이다.

 그러자면 무엇보다도, 고구려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던 북위와의 친선관계가 절실하였다. 그리하여 서기 435년 장수왕 23년에는 북위에게 재차 사신을 보내어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북연과의 관계였다. 북연은 광개토대왕때에 종족의 예를 나눈 형제국가였다. 비록 북위와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있었긴 하였지만, 북위의 세력학장에 밀려 패망의 길로 접어 든 북연의 처지를 모른체 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북연의 왕 풍흥은 고구려에 비밀사신까지 보내어 망명을 요청할 지경에 이르렀다.
 한편으로 북연은 위나라에 조공관계 체결을 요청하였지만, 위나라는 조공자체를 받아들이지 않고 토벌할 뜻을 밝히게 되었다.

 드디어 436년 위나라는 북연에 대한 원정을 단행하여 백락성을 격파하기에 이른다. 그동안 이중외교로 국제관계의 평화를 추구하였던 장수왕이었지만 이제 결심할 때가 왔다. 만약 고구려의 힘을 보여주지 못한체 이중외교술에만 의존한다면, 결국 북위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되고 고구려는 더 많은 요구조건을 들어주어야 하는 처지로 전락하게 된다.


*덕흥리 고분군 13태수 하례도

 이 고분군은 안학3호분(동수묘)에 이어  피장자의 이름과 연대가 쓰여져 있어 언제 조성되어 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고구려의 무덤이다. 무덤 주인의 이름은 '진'이며 408년 이곳에 묻혔다.


 특히 이 고분에는 고구려에 속하는 유주 13군의 태수등이 그려져 있다. 유쥬 13군의 태수나 내리들이 자사인 진을 찾아 축사를 올리며 보고하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특히 태수나 내리들의 눈빛이 생생하게 그려졌고 진에게 인사를 올리는 동작이 잘 표현되었다. 윗 줄에는 연군, 범양, 어군, 상곡, 광녕, 대군의 6태수가 서있고 아랫줄에는 북평, 요서, 창려,요동, 현도, 낙랑, 태방의 태수들이 줄지어 서있다. 따라서 당시 고구려는 요서는 물론 북경지역까지 진출하였다는 주요 근거가 되기도 한다. *


빛나는 외교역량

 단적으로 말하면 힘의 균형이 있어야 대등한 수준의 국제관계도 성립할 수 있다. 더구나 형제국의 전멸위기를 그대로 두고보는 것은 의가 아니었다. 따라서 장수왕은 갈로와 맹광 두 장수를 보내어 북연의 왕을 맞도록 하였다. 하지만 두 장수에게 부여된 임무는 위나라와의 정면 대결이 아니라, 고구려의 힘을 과시하면서도 북연의 왕을 안전하게 고구려 영토로 망명시키는 일이었다.

 따라서 갈로와 맹광은 북연의 무기고에 있는 군수품만을 챙겨서 최대한 빠르고 안전하게 북연의 왕을 호송하였다.  그리고 북연의 왕은  왕궁을 북위에게 넘기지 않기 위해 스스로 불을 질러 태워 버렸다. 기록에는 10일동안이나 불이 꺼지지 않았다고 나와있을만큼 대형화재였으며 장대한 왕궁이었다.

이렇게 되자 북위는 압송을 요구하였지만, 고구려는 당당히 거부하고 북연왕의 망명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제 북위나 고구려간의 전쟁은 시간문제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북위정권의 유결을 비롯한 주요대신들이 반대에 부딫쳐 결국 고구려와의 전쟁은 이루어 지지 않는다. 그리고 왜 북위가 기병까지 일으킨 상태에서 어떠한 이유로 전쟁중단을 결정하게 되었는지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부분은  당시 국제역학관계에 의해 추론할 수 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크게 두가지이다.
 첫째 북위와 고구려와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어서, 이것을 쉽사리 깨기에는 북위의 부담이 너무컸다.
 장수왕의 기록을 살펴보면 조공에 대한 기록이 가장많이 차지할만큼 양국의 무역은 활성화되었다. 그러니 전쟁을 하게되면 그 모든 것이 중단될 것이고, 조공무역으로 가장 큰 이익을 볼 수 있는 귀족세력들은 그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이것은 장수왕의 사신교환이나 조공무역을 할 때마다 치밀하게 친고구려파 대신들을 많이 확보하였던 이유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둘째, 고구려와 전면전을 치른다고 하여도 별다른 승산이 없었다. 지난날 얼마나 많은 유목민족과 국가들이 고구려를 넘보다가 패망의 길로 접어들었는가? 모용씨의 선비족이 세운 전연역시 고구려에 대한 무리한 원정을 단행하다가 패망하였고 후연은 광개토대왕에 의해 정벌당하지 않았던가? 선비족을 통일한 북위라지만 이러한 사실을 지나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양국이 치열하게 전쟁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남조세력이 들이닥치면 북위는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북위의 고구려 원정은 성립할 수 없었다. 그런데 망명을 받아들이긴 하엿지만 북연과의 관계역시 원만하지만은 않았다.
 지난날 북연이 화북지방의 맹주를 자처하던 시절, 풍홍은 고구려를 자주 멸시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수왕은 이번기회에 동방의 패자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장수왕은 폭력적인 방법대신 풍홍이 총해하던 궁중시인과 아들을 볼모로 잡는방법을 택하였다.
 아무튼 풍홍으로서는 지난날 멸시하던 고구려가, 도리어 태자를 볼모로 잡는 처사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따라서 풍홍은 사자를 비밀리에 보내 중국 남방에 있던 송나라와의 연결을 꾀하였다.

  송나라는 고구려를 견제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던지 풍홍의 망명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것은 고구려의 입장에서 볼 때 배신행위였다. 북위와의 일전을 각오하면서 까지 망명을 받아들였는데,  이제와서 적대관계에 있던 송과 연결을 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438년 장수왕은 손수와 고구등을 보내어 풍홍일족을 몰살시켜 버렸다.  그런데 마침 송나라에서 풍홍을 맞이하기 위해 보낸 장수 왕백구가 불시에 기습해와 고구는 전사하였고 손수는 포로가 되어 버렸다.
 당시 왕백구가 거느린 군사는 7천명이었던 반면,  고구와 손수가 거느린 병사는 풍홍일족을 척살하기 위한 소수의  병력밖에 없었기 때문에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물론 왕백구는 이후 장수왕의 즉각적인 반격으로 전군이 전멸당하고 포로로 잡히는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장수왕은 왕백구를 죽이지 않고 송나라로 압송하여 보냈다. 왜...?
 송나라의 반응을 지켜 보기 위해서였다.
 차라리 장수왕이 왕백구를 참살시켰다면, 송나라로써는 훨씬 대처하기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7천 명의 송나라 군사를 한순간에 전멸시킨 고구려의 무시무시한 힘을 지켜 본 송나라로써는 살아 돌아온 왕백구를 어떻게 처리해야 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참살한다는 것역시, 고구려에 스스로 허리를 굽히는 꼴이 되고만다.

 그리하여 삼국사기에는 당시 송나라 태조가 취한 태도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 먼 곳 나라의 뜻을 어기지 않으려고 백구 등을 감옥에 가두었다가 이윽고 용서하였다.'

 송나라로서는 고구려의 힘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의 국가적인 체면을 유지하는 한편 관용의 정신을 배푼 장수왕의 뜻에도 부합되는 최선의 조치였다.

 이렇게 하여 장수왕은 북위, 송, 고구려로 대표되는 동아시아 국제관계에 있어 힘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특히 군사적 행동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평화관계를 유지하였다는 오늘날의 국제관계에서도 대단히 시사하는 점이 많다.
 진정한 힘은 힘없는 국가를 침범하고 정복하여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평화를 깨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지키고 국제우호관계를 존중하며 국민의 평안과 행복을 유지하는 것에서 오는 것이다.

 장수왕은 바로 이러한 것을 실현한 왕이며, 이렇게 정립된 국제관계를 바탕으로 선왕대부터 추진대오던 한민족 통일의 대과업을 수행하여 나갔던 것이다.


장수왕대의 외교전쟁 2


5세기 중반들어서 중국은 강북지방의 북위와 강남지방의 송왕조가 성립함으로써 동북아의 국제정세도 안정세로 들어가게 된다. 이렇게 되자 장수왕은 북위나 송왕조를 동시에 견제하면서도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이중외교 정책을 수립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장수왕의 외교정책은 전체적인 3강체제를 구축하여, 전쟁을 치루지 않고서도 북방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장수왕은 서기 440년 재위 28년 신라의 북변침입하여 고구려 장군을 죽인 일을 계기로, 신라원정을 계획하게 되었다. 이에 신라왕은 사신을 보내 사죄를 함으로써 곧바로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이것은 본격적인 삼국통일전쟁의 서막이라고 할 수 있다.


 옆의 이미지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고구려 전성기 시절 영토이다.

 하지만 광개토 대왕시대 때 이미  비려(거란의 일족) 원정을 통해 대싱안링 산맥 서쪽까지 진출하였다.

  또한 광개토 대왕 때 영토가 된 동부여라던가 읍루(숙신의 일족)땅 역시 단지 화살표 정도라만 표시되었고, 영토로는 표시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현재 사용되고 있는 고구려 전성기 시대 때의 지도는, 최소한 대싱안링 산맥 동쪽은 고구려 영토로 표기하여 분명하게 고쳐져야만 한다.


 장수왕이 신라왕의 사죄를 받아들인 것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당시 북연왕의 망명을 받아들인 일로 북위와의 관계도 그리 원만하지 않았을 뿐더러, 북연 왕의 송나라 망명시도와 관련하여 송나라와도 군사적 마찰이 있었기 때문에 쉽사리 전쟁을 결정할만한 상황이 못되었다.

  그리하여 장수왕은 14년후인 454년에서야 신라에 대한 원정을 단행하였으며, 이를 위해 다음해에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고 8년 후엔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는 등 남북조세력을 동시에 견제하였다.  

 하지만 중국에서 남북의 대립양상을 보이고 있던 송나라와 북위는 각기 고구려를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한 또다른 외교전략을 구사하게 된다. 즉 힘이 균형이 이루어 지고 있는 상태에서 고구려만 확실하게 우호세력으로 끌어 들일 수 있다면 중국을 통일할 수도 있었다.
 그에따라 위나라는 장수왕의 딸을 후궁으로 맞고자 한다는 무리한 요구를 하게 된다. 이에 장수왕은 이미 딸이 시집간 상태임으로 동생의 딸을 보내겠다는 답변을 하였다.

 그리하여 양국간의 혼인관계는 성사직전까지 갔다.  하지만 이것은 불평등외교였으며 사실상 위나라의 고구려 침략을 집안의 통합으로 일축시킬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대신들은 다음과 같이 반대하였다.

 "북위가 옛날에 북연과 더불어 혼인하고 얼마 안 가서 깨뜨렸으니, 이것은 오고가는 사이에, 토지의 평탄과 험함을 자세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삼국사기에는 이와같은 간언을 올린사람이 누구인지 나와있지 않지만, 참으로 북위의 계획을 꾀뚫어 보는 탁월한 식견이었다. 따라서 장수왕은 그녀가 죽었다는 이유를 들어 혼인계획을 무산시키려 하였다. 정말 장수왕의 조카가 죽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북위로서는 매번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혼인을 미루는 고구려에 대해 더욱 집요하게 왕족의 딸들 중 혼인하지 않는 여자를 보내오라고 하였다.

 이렇게 양국간에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지만, 송나라의 현조가 사망함으로써 혼인계획은 중지되었다. 만약 북위가 고구려에 대해 압도적인 힘을 지니고 있었다면, 대대적인 원정이 단행되었을 겠지만 장수왕의 유연한 대처능력으로 인해 전쟁상황까지 치닫지는 않았다.
 이와함께 장수왕은 다시한번 사신을 보내어 양국간의 관계를 정상화시키는 한편, 모든 전력을 남진정책에 투입하게 된다.
 
  그리하여 서기 468년 재위 56년에는 말갈병 1만을 동원하여 현재 삼척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는 신라 실직주성을 점령함으로써 고구려의 대통일전쟁이 시작된다. 당황한 신라는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의 공세를 막아보려 하였지만, 전체적인 전력은 턱없이 부족하였다.

 백제역시 최후의 보루인 한강유역까지 위협받게 되자 북위와의 동맹을 추진하려 하였지만, 북위는 고구려와의 관계를고루하여 거절하고 말았다.
장수왕 60년에 이르러서  북위와 고구려의 조공무역이 얼마나 활성화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은 말로도 알 수 있다.

 ..이로부터 바치는 물품이 전보다 배로 늘어났고, 그에 대한 보답도 또한 더하였다.

 즉 조공은 조공국이 上國에게 조공품을 바치면, 상국은 그에 대한 하사품을 내리는 방식으로 행해지던 무역이었던 것이다. 형식적으로 조공품목을 10개를 받았다면, 상국은  체면상 그보다 더 많은 물품을 내려 보내야 됨으로, 조공을 하면 할 수록 고구려에게는 남는 장사가 되는 것이다.
 당시 사정으로 볼 때 형식적인 신하국과 군주국의 의미는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힘의 우위가 국제관계의 실질적인 질서를 좌우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북위는 엄청난 손실을 감당하면서도, 고구려에 대해 막대한 하사품을 내려 줄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장수왕은 막대한 무역흑자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의 왕궁인 안악궁을 창건하고, 475년에는  한강을 돌파하고 경기도와 충청도 일때까지 남하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장수왕이 남진정책을 펼치는 동안, 중국남조에서는 송에서 남제로 왕조교체가 일어났다. 남제의 태조역시 건국하자마자 고구려와의 국교정상화에 힘썼다. 여기에 장수왕역시 여노라는 사신을 보내어 남북조세력과 벌이던 이중외교정책의 기조를 이어가고자 하였다.
 그런데 북위는 여노를 강제로 억류하고, 적대국기었던 남제와 통교를 하려는 고구려에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고구려로써 주체적으로 판단할 일이었다. 장수왕은 위나라에 보랏듯이 다음해에 또다시 사신을 보내어 남제와 국교를 정상화 시켰다.


*장수왕릉, 혹은 광개토대왕릉으로도 보고 있는 고구려 왕릉. 최근의 연구로는 이 계단식 무덤 정상부에는 목조로된 사당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정상부가 평평하다는 것과, 정상부에서 기와조각등이 발견되었다는 점 등을 고려 할 때 설득력있는 주장으로 보인다. 

  그러자  위 역시 고구려의 강력한 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남제에 이어 제 2의 외교국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렇게 때로는 반목하기도 하고 때로는 친밀하기도 하였지만, 장수왕의 꾸준한 평등외교정책은 시간이 갈수록 빛을 발하게 된다.
 그리하여 장수왕이  재위 79년  서기  향년 98세에 사망하자, 북위의 효문제는 사신을 보내 조문하는 한편,  직접 위모관과 베옷을 입고 애도식을 거행하였다. 이것은 상국의 왕이  절대로 하국의 왕에게 할 수 없는 행위였다.

 아니 오히려 상국의 왕이 사망하였을 때, 신하국의 왕이 행하던 의식이다. 또 이런 이유를 들어, 오히려 처음에는 대등관계였다가 나중에는 오히려 고구려가 상국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고, 고구려가 상국을 차지한 이후의 조공기록에 대해서는 김부식의 의도적인 왜곡으로 해석하는 경향도 있다.
 물론 이러한 역사해석은 당시의 국제적 힘의 역학관계를 생각해 볼 때 다소 과장된 면이 없지는 않지만, 최소한 북위와 고구려의 관계가 매우 친밀하게 발전하였으며 고구려왕 부고의 애도식을 거행하여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만큼, 고구려의 힘이 강대하였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중원고구려비

중원= 현재  충주
고구려에서는 국원성,
신라의 중원경이라고 하였다.

 북방진출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광개토대왕 이후 고구려가 이 지방을 장악한 것은 장수왕 때인 475년에서 492년 경으로 생각된다. 당시 충주를 장악한 고구려는 이곳을 '국원성(國原城)'이라 했다.

 국원이란 '처음 개척한 땅의 근원이 되는 땅' 내지는 '나라의 중심이  되는 땅'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곳을 장악한 고구려는 국원성을남방진출의 전진기지로 삼으며 역사상 최대의 판도를 구축하게 된다. 

 다만 이 중원고구려비는 한 때 민가에서 빨래판으로 이용된 탓에 전체 700여자 중 200여자 정도만이 해석되고 있는 실정이다.


 수많은 나라의 장구한 역사에 있어서, 전성기라면 예외없이 침략적인 대외원정과 방대한 영토확보를 내세운다. 물론 장수왕 대의 79년 역사에 있어서, 대외원정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먼저 선제공격을 한 신라가 자초한 일이며 통일전쟁이란 큰 맥락에서 볼 때 침략전쟁과는 차원이 틀린 것이다.

 혹 장수왕이 한반도내 평양으로 천도하였기 때문에, 고구려의 대륙지향적 문화가 축소되고 한반도로 삼국이 고착되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히려 되묻고 싶다.  남의것을 빼앗고 수많은 인명을 살상해야지만   훌륭한 왕으로서의 조건을 갖추는 것인가?
전쟁은 어느시대 어느역사를 막론하고 인류가 지양해야만 할 재앙인 것이다. 장수왕은 탁월한 외교정책으로 아시아의 평화시대를 열었으며, 그 영향력은 전 중국까지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또 우리민족이 하나된 터전과 문화를 누리기 위해 통일전쟁을 단행하였다. 고대시대에서 통일은 사실상 외교만으로 불가능하고, 그만큼의 고도한 정치도 발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통일전쟁은 필요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장수왕대의 역사를 다시한번 살펴보면, 백제와 신라를 동시에 제압할만한 충분한 힘을 가졌으면서도, 오히려 고구려가 주도하는 삼국정립의 평화적 세계를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장수왕은 평화를 추구한 제왕이라 할 수 있다.


 
* 녹색선 포함해 주시기 바라며,  위 지도는 개인적인 의견으로 이와 다른 견해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