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왕대의 외교전쟁
빛나는 외교역량 단적으로 말하면 힘의 균형이 있어야 대등한 수준의 국제관계도 성립할 수 있다. 더구나 형제국의 전멸위기를 그대로 두고보는 것은 의가 아니었다. 따라서 장수왕은 갈로와 맹광 두 장수를 보내어 북연의 왕을 맞도록 하였다. 하지만 두 장수에게 부여된 임무는 위나라와의 정면 대결이 아니라, 고구려의 힘을 과시하면서도 북연의 왕을 안전하게 고구려 영토로 망명시키는 일이었다. 따라서 갈로와 맹광은 북연의 무기고에 있는 군수품만을 챙겨서 최대한 빠르고 안전하게 북연의 왕을 호송하였다. 그리고 북연의 왕은 왕궁을 북위에게 넘기지 않기 위해 스스로 불을 질러 태워 버렸다. 기록에는 10일동안이나 불이 꺼지지 않았다고 나와있을만큼 대형화재였으며 장대한 왕궁이었다. 이렇게 되자 북위는 압송을 요구하였지만, 고구려는 당당히 거부하고 북연왕의 망명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제 북위나 고구려간의 전쟁은 시간문제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북위정권의 유결을 비롯한 주요대신들이 반대에 부딫쳐 결국 고구려와의 전쟁은 이루어 지지 않는다. 그리고 왜 북위가 기병까지 일으킨 상태에서 어떠한 이유로 전쟁중단을 결정하게 되었는지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부분은 당시 국제역학관계에 의해 추론할 수 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크게 두가지이다. 첫째 북위와 고구려와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어서, 이것을 쉽사리 깨기에는 북위의 부담이 너무컸다. 장수왕의 기록을 살펴보면 조공에 대한 기록이 가장많이 차지할만큼 양국의 무역은 활성화되었다. 그러니 전쟁을 하게되면 그 모든 것이 중단될 것이고, 조공무역으로 가장 큰 이익을 볼 수 있는 귀족세력들은 그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이것은 장수왕의 사신교환이나 조공무역을 할 때마다 치밀하게 친고구려파 대신들을 많이 확보하였던 이유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둘째, 고구려와 전면전을 치른다고 하여도 별다른 승산이 없었다. 지난날 얼마나 많은 유목민족과 국가들이 고구려를 넘보다가 패망의 길로 접어들었는가? 모용씨의 선비족이 세운 전연역시 고구려에 대한 무리한 원정을 단행하다가 패망하였고 후연은 광개토대왕에 의해 정벌당하지 않았던가? 선비족을 통일한 북위라지만 이러한 사실을 지나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양국이 치열하게 전쟁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남조세력이 들이닥치면 북위는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북위의 고구려 원정은 성립할 수 없었다. 그런데 망명을 받아들이긴 하엿지만 북연과의 관계역시 원만하지만은 않았다. 지난날 북연이 화북지방의 맹주를 자처하던 시절, 풍홍은 고구려를 자주 멸시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수왕은 이번기회에 동방의 패자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장수왕은 폭력적인 방법대신 풍홍이 총해하던 궁중시인과 아들을 볼모로 잡는방법을 택하였다. 아무튼 풍홍으로서는 지난날 멸시하던 고구려가, 도리어 태자를 볼모로 잡는 처사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따라서 풍홍은 사자를 비밀리에 보내 중국 남방에 있던 송나라와의 연결을 꾀하였다. 송나라는 고구려를 견제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던지 풍홍의 망명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것은 고구려의 입장에서 볼 때 배신행위였다. 북위와의 일전을 각오하면서 까지 망명을 받아들였는데, 이제와서 적대관계에 있던 송과 연결을 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438년 장수왕은 손수와 고구등을 보내어 풍홍일족을 몰살시켜 버렸다. 그런데 마침 송나라에서 풍홍을 맞이하기 위해 보낸 장수 왕백구가 불시에 기습해와 고구는 전사하였고 손수는 포로가 되어 버렸다. 당시 왕백구가 거느린 군사는 7천명이었던 반면, 고구와 손수가 거느린 병사는 풍홍일족을 척살하기 위한 소수의 병력밖에 없었기 때문에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물론 왕백구는 이후 장수왕의 즉각적인 반격으로 전군이 전멸당하고 포로로 잡히는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장수왕은 왕백구를 죽이지 않고 송나라로 압송하여 보냈다. 왜...? 송나라의 반응을 지켜 보기 위해서였다. 차라리 장수왕이 왕백구를 참살시켰다면, 송나라로써는 훨씬 대처하기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7천 명의 송나라 군사를 한순간에 전멸시킨 고구려의 무시무시한 힘을 지켜 본 송나라로써는 살아 돌아온 왕백구를 어떻게 처리해야 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참살한다는 것역시, 고구려에 스스로 허리를 굽히는 꼴이 되고만다. 그리하여 삼국사기에는 당시 송나라 태조가 취한 태도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 먼 곳 나라의 뜻을 어기지 않으려고 백구 등을 감옥에 가두었다가 이윽고 용서하였다.' 송나라로서는 고구려의 힘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의 국가적인 체면을 유지하는 한편 관용의 정신을 배푼 장수왕의 뜻에도 부합되는 최선의 조치였다. 이렇게 하여 장수왕은 북위, 송, 고구려로 대표되는 동아시아 국제관계에 있어 힘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특히 군사적 행동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평화관계를 유지하였다는 오늘날의 국제관계에서도 대단히 시사하는 점이 많다. 진정한 힘은 힘없는 국가를 침범하고 정복하여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평화를 깨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지키고 국제우호관계를 존중하며 국민의 평안과 행복을 유지하는 것에서 오는 것이다. 장수왕은 바로 이러한 것을 실현한 왕이며, 이렇게 정립된 국제관계를 바탕으로 선왕대부터 추진대오던 한민족 통일의 대과업을 수행하여 나갔던 것이다. |
장수왕대의 외교전쟁 2 옆의 이미지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고구려 전성기 시절 영토이다. 중원고구려비 |
'高句麗'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려원정 - 고구려 건국의 발판 (0) | 2010.02.08 |
---|---|
광개토대왕의 왜구 토벌전 (0) | 2010.02.08 |
이성산성서 고구려 `욕살' 목간 첫 출토 (0) | 2010.01.31 |
고구려 초기왕의 기년정리 (0) | 2010.01.30 |
계루부-소노부-절노부-순노부-관노부 (0) | 2010.0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