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句麗

이성산성서 고구려 `욕살' 목간 첫 출토

吾心竹--오심죽-- 2010. 1. 31. 17:38

역사 게시판

   (2002-06-29 20:43:36, Hit : 703
 이성산성서 고구려 `욕살' 목간 첫 출토
이성산성서 고구려 `욕살' 목간 첫 출토


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이성산성은 발굴초기부터 백제 벼루, 신라자 등이 발견되어 건축 주체가 누군가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삼국사기에만 기록되어 있는 고구려 벼슬인 '욕살'이 기록된 목간이 발견되어 다시한번 학계를 흥분시키고 있습니다


서기 553년경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하면서  처음 축조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던 경기 하남시 이성산성에서 신라 점령 이전 고구려가 한동안 사용했음을 명확히 알려주는 욕살(褥薩)이란 지방관  벼슬이름이  적힌 목간과 고구려자가 장고류의 고구려 악기와 함께 발견됐다.

신라와 백제 목간(글자를 새긴 나무)은 간간이 출토되고 있으나 고구려  목간은 이번이 처음이며 고구려가 파견한 최고위 지방관인 욕살의 벼슬 이름이 실제 확인된 것도 최초다.

이는 이성산성 위치가 원래 백제 영토인 한강 이남이라는 점에서 고구려가 정복지를 어떻게 통치했는지 알려주는 가장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되고 있으며 이로써 고구려 지방통치사 연구도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됐다.

    하남시 의뢰로 1986년부터 이곳을 발굴중인 한양대박물관(관장 배기동)은  지난 7월 이후 현재까지 이곳에 대한 제8차 발굴조사를 벌인 결과 이성산 정상 부근 저수지에서 `褥薩'이란 글자가 적힌 목간과 고구려자를 발굴했다고 24일 말했다.

『일본서기』 같은 일본 고대문헌에만 전해오는 고구려자 또한 실물로 확인되기는 이번이 처음으로, 그동안 고구려자 유무를 둘러싼 지리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게 됐다.

저수지에서 `욕살'명 목간과 같은 문화층에서 발견된 이 고구려자는 일부가  파손되기는 했으나 현재 약 35cm 길이가 남아 있다. 고구려자는 일찍이 고구려에서 사용하던 용척(用尺)으로, 길이가 35.6cm로 알려져 있다. 일본학자 아라이(新井 宏)는 《환상(幻想)의 고대사-고려척(高麗尺)은 없다》라는 책에서 고구려자의 존재를  부정했었다.

발굴된 목간에서는 욕살(褥薩)이라는 고구려 관직 이름과 함께 `전고...'(前高...)라는 글자도 확인됐다.

『삼국사기』 등 고대 문헌기록에 따르면 고구려는 지방 통치조직을 대성(大城).성(城).소성(小城)의 3단계로 구분하고 각 성에 중앙관리를 파견하였는데 이 가운데 대성에 파견된 성주(城主)가 바로 욕살이었다.

따라서 이번 발굴은 고구려 지방통치의 실상을 가장 확실히 전해주는  기록으로 평가되고 있다. '전고...'(前 高)라는 묵글씨 중 `前'은 고구려 5부로 조직된  행정구역 중 전부(前部)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며 `高'는 고구려 성씨로 추정된다.

이와 더불어 역시 저수지에서 나온 요고(腰鼓)는 전체 길이 42cm로  양  측면의 지름이 16cm이고, 가운데 잘록한 부분은 7cm로 측정됐다. 요고는 고구려에서 만들어 사용하던 북으로, 왼쪽은 채로 치고 오른쪽은 손바닥으로 쳐서 소리를 내도록  만들어 사용했다고 발굴단은 말했다.

고구려 요고는 오늘날 사용되는 장고의 원형으로 장고처럼 허리가 잘록한  모습이나 그 크기는 현재의 장고보다 작다.

발굴단은 이번 발굴결과 이성산성이 그동안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유하고  신주(新州)를 설치한 553년에 처음 축조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고구려목간과  고구려자가 출토됨으로서 고구려시대에 욕살을 파견하는 대성급(大城級) 산성이었음이 밝혀졌으며, 고구려의 장수왕 이래 한반도 중부의 새로운 정복지를 통치하기 위한 진성(鎭城)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평가했다.


< 이성산성은 고구려 산성일까 >


이 산성은 1986년 이래 지난해까지 한양대박물관이 모두 6차례에  걸친  발굴한 결과 당초 기대했던 축조 세력이 서기 475년 한성 함락 이전의  한성백제로  보기는 힘들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왜냐하면 신라계 유물이 잔뜩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이에따라 고고학계나 역사학계에서는 이성산성은 대체로 진흥왕 치세를 맞은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령하고 이곳에다가 신주(新州)라는 대규모 행정군사  통치지구를 설치하던 서기 553년 무렵 신라가 처음 쌓았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지난해 실시된 제6차 발굴 이후 꼭 신라로 볼 게 아니라 고구려적인  요소가 강하다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 근거는 돌로 성벽을 쌓아올린 공법 때문이었다.

현재 남아있는 성벽은 확인 결과 원래 돌로 만든 성벽을 있었고 이보다  나중인지, 혹은 동시인지 확실치는 않으나 그 바깥쪽에다가 또다른 돌 성벽을 쌓아  올린, 말하자면 이중 성벽임이 드러났는데 그 축조 방법이 고구려 산성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방식이라는 점이 지적됐다.

그런데 한양대박물관은 지난해 11월 이후 최근까지 실시된 제7차 발굴 결과  이성산성 정상 부근 저수지에서 고구려의 지방장관인 `욕살'(褥薩)이라는 묵글자가 새겨진 목간과 길이 35.6㎝인 고구려자를 발견함으로써 이성산성 첫 축조 주인공이 한성백제를 함락시킨 고구려임이 밝혀지게 됐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런 발표가 너무 성급하지 않느냐는 지적 또한 만만치 않다. 예컨대 이성산성에 대한 1~3차 발굴을 현장지휘했으며 이것으로 석사학위  논문을 쓰기도 한 심광주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학예실장은 '이성산성이  고구려라는 고고학적 증거는 현재까지 아무 데도 없다'면서 '지금까지 발굴결과로 보면  이성산성은 신라적인 요소가 강하다 할 정도를 넘어 신라 유물 일색이며 따라서 신라가 쌓은 성임에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이성산성 축조법에 고구려 기법이 보이고 고구려자가 발견된 대목을 주목하고 있으나 삼국시대 산성 중 고구려 영향을 받지 않은 성이 어디 있으며 고구려자를 사용하지 않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고 반박했다.

또한 발굴단이 저수지에서 발굴한 목간에 적힌 글씨 중 `욕살'이라고 판단한 대목도 적지 않은 문제점을 지닌 것으로 지적된다.

우선 두 글자 중 살(薩)자는 대체로 윤곽이 파악된다. 문제는 褥(욕)자. 이  목간에 대한 문화재연구소의 적외선 촬영 결과를 토대로 이 두 글자를 처음 판독한 이는 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였다.

그러나 우선 이 교수 자신부터 褥자가 확실하다는 자신을 하지 못한 채 '옷 의(衣)자는 확인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을 정도다.

실물과 적외선 촬영 사진을 살펴본 학계 전문가들은 '목간에 적힌 글자가 욕살(褥薩)로 파악하기는 아직은 힘들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글자가 욕살이든 아니든, 한국 출토품으로는 대단히 특이하게  나무 막대기의 앞과 뒤, 오른쪽과 왼쪽 4개면을 모두 깎아 글자를 새긴 이 목간 제  4면에 `前部高...'(전부고)라는 글자가 확인되고 있는 점은 주목을 끌고 있다.

이 중 전부(前部)는 백제나 고구려 금석문이나 목간에서만 확인되고 신라에서는 나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성산성이 백제 혹은 고구려와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강력한 증거가 되고 있다.

신라 또한 수도를 部로 나누기는 했으나 탁부니 사탁부니 하는  이름을  가졌을 뿐 전후좌우(前後左右) 같은 방위를 나타내는 글자로 부(部)를 나눈 것은  고구려와 백제임이 문헌기록이나 다른 금석문에도 명확히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이성산성이 언제 처음 축조됐으며 그 주체는 누구인지 좀 더 면밀한  검토와 추가 발굴을 기다려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이와관련, 현장을 둘러 본 조유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의 지적은 경청할 만하다.

그는 '고고학이 쾌도난마식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만능무기는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면서 '전체 면적 중 10%도 발굴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성산성 축조 시기와 주체를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