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句麗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

吾心竹--오심죽-- 2009. 10. 30. 22:02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


                                                           編譯  민기(閔基)



역사에 관심이 많은 일반인으로서 1500년 시간의 왜곡을 겪지않은 순수한 역사기록으로서의 광개토왕비를 혼자 공부해봤습니다. 여러분의 역사공부에 작은 도움이 되기를 빕니다. 또한 교정이 필요한 부분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唯昔, 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

剖卵降世生, 而有聖德. □□□□□命駕巡幸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母<河伯女郞><鄒牟王>爲我連葭浮龜. 應聲卽爲連葭浮龜. 然後造渡. 於<沸流谷><忽本>西<城山>上而建都焉


[번역] 

옛날에 시조(始祖) 추모왕(鄒牟王)이 나라의 기초를 세웠다. 추모왕은 북부여(北夫餘)에서 나왔으니 천제(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딸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으니 성(聖)스러운 덕(德)이 있었다. (중간 해독 불능)

거마(車駕)를 타고 순행(巡幸)하여 남쪽으로 내려가다 길이 부여(夫餘)의 엄리대수(奄利大水)에 다다랐다. 왕이 나루에 임하여 말하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어머니가 하백(河伯)의 딸인 추모왕(鄒牟王)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잇고 거북이들을 뜨게 하라."하였다.

그 소리에 응하여 곧 갈대가 이어지고 거북이들이 물위에 떴다. 그런 뒤에 물을 건너가서  비류곡(沸流谷)의 홀본(忽本) 서쪽 성산(城山) 위에다 도읍(都邑)을 세웠다.


[해설]

본 내용은 고구려의 창건설화에 해당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도 이와 동일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의 연대에 의하면 추모왕(姓高氏 諱朱蒙(一云鄒牟 一云衆解) : 삼국사기)의 건국시기는 서기전 37년이며 건국 장소는 홀본(忽本, 혹은 卒本) 서쪽의 성산(城山)이니 이는 현재의 중국 환인현(桓仁縣) 오녀산성(五女山城)에 해당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건국시의 국명은 지명을 따서 졸본부여(卒本扶餘)라 한 듯하다.(立都于卒本州 爲卒本扶餘).

처음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가 홀승골성(訖升骨城)에 내려와 북부여를 세웠다. 이후 해모수의 아들인 해부루(解扶婁)는 천제의 명에 따라서 이곳을 비우고 동쪽의 가섭원(迦葉原)으로 옮겨 동부여(東扶餘)를 세웠다. 북부여가 가섭원으로 옮겨간 뒤 홀승골성에는 천제의 아들을 자칭하는 해모수(解募漱)가 나타났다. 추모의 어머니인 유화부인(柳花夫人)은 이 때 나타난 자칭 해모수에게 유인되어 임신을 하고 한 개의 알을 낳으니 여기에서 곧 추모왕이 태어났다. 해부루가 죽은 뒤 그의 양자(養子)인 금와(金蛙)가 동부여의 왕위를 계승하였으며 추모왕은 금와왕의 아들들과 경쟁하다가 위험을 피해 졸본으로 도망친 뒤 졸본부여왕(卒本扶餘王)의 둘째 딸을 아내로 맞았고 졸본부여왕을 이어 고구려를 건국한  것이다.


중간의 탈락되어 판독되지 않는 부분에는 추측컨데 남행(南行) 이유가 적혀있었을 것이며 그 것은 “어머니 유화부인의 가르침에 따라서 운운”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주석]

1) 天帝, 皇天 : 삼국유사에서는 단군(檀君)이 하백(河伯)녀와의 사이에 주몽을 낳았다고 하며 단군기(檀君記)를 인용하여 天帝의 아들인 해모수(海慕漱)가 하백녀와 친하여 (海夫寠)를 낳았다는 기사가 있으므로 부루와 주몽은 형제라고 하였다. 그러나 하백녀를 취한 해모수는 해부루의 아버지가 아니며 북부여가 동쪽으로 옮긴 뒤 홀승골성에 나타난 자칭 해모수에 불과하므로 해부루와 주몽이 형제일 수는 없다.

      (광개토왕비) 천제(天帝) + 하백녀(河伯女) = 추모(鄒牟)

      (삼국사기) 자칭 해모수(海慕漱) + 하백지녀(河伯之女) 유화(柳花) = 주몽

      (삼국유사,國史高麗本記) 자칭 해모수(海慕漱) + 하백지녀 유화(柳花) = 주몽

      (삼국유사, 단군기)  단군 + 하백녀(河伯女) = 海夫寠

      (후한서) <北夷>의 <索離國> 왕이 출행한 사이에 그의 시녀 몸에 하늘에서 닭만한  기운이 내려와 임신을 시켰고 그 시녀가 알을 낳으니 여기에서 나온이가 주몽이라 했다)  後漢書卷85-東夷列傳第75-夫餘國

2) 鄒牟 : 성은 고(高)며 이름은 주몽(朱蒙), 추몽(鄒蒙), 추모(鄒牟), 중해(衆解) 등으로 불리우나 모두 차음(借音)에 불과하다. 삼국유사에서는 갑신년에 즉위하여 18년간 다스렸다고 함.

3) 女郞 : 여장부, 유화부인 후한서에는 색리국(索離國 : 橐離國)왕의 시녀(侍女, 侍兒)

4) 奄利大水 : 삼국사기에서는 엄사수(淹斯水), 개사수(盖斯水)라 하였으며 삼국유사는 엄수(淹水), 후한서는 엄한수(淹漢水) 위서는 시엄수(施淹水)로 적고 있다. 현재의 압록강 상류라고도 하며 일설은 북부여의 위치를 지금의 농안으로 보고 송화강을 엄리수로 본다. 엄니,엄내 곧 큰 강이라는 의미.

5) 沸流谷 : 지금의 혼강(渾江)

6) 忽本 : 혹은 졸본(卒本), 현재의 환인(桓仁)

7) 城山 : 위서(魏書)에서는 이를 홀승골성(訖升骨城)이라 했다. 현재의 환인현 오녀산성(五女山城)이니 원래 북부여(北扶餘) 해모수(解募漱)가 도읍하던 곳이다. 동 쪽을 제외한 삼면이 100여미터 높이의 자연절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위에 길이 1000미터 너비 300미터의 넓은 평지가 있으니 멀리서 보면 자연 그대로가 높고 거대한 성으로 보인다. 이 산은 그 모습이 성(城)과 같아 성산(城山), 또는 고구려인은 성을 홀(忽)이라 부르니 홀승골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8) 連葭浮龜 : 후한서에서는 활로 물을 쏘니(以弓擊水) 고기와 거북이가 떠올랐다고 한다.



不樂世位, 因遣<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岡>, □(黃,履)龍首昇天. 顧命世子<儒留王>以道興治. <大朱留王>紹承基業.


[번역]

세상의 지위를 싫어하시니 하늘에서 황룡(黃龍)을 내려보내어 왕을 맞이하였다. 왕이 홀본(忽本)의 동쪽 언덕에서 황룡(黃龍)을 밟고 하늘로 올라갔다. 왕은 세자(世子) 유류왕(儒留王)에게 고명(顧命)하여 도(道)로써 나라를 흥성하게 다스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다음으로 대주류왕(大朱留王) 이 기업(基業)을 이어 받았다.


[해설]

삼국유사에서는 동명왕이 갑신년에 즉위하여 18년간 다스렸다고 하니 사망년도는 곧 기원전 20년이 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은 재위 19년(기원전 19년, 壬寅) 9월에 40세를 일기로 사망하여 용산(龍山)에 묻혔다고 적고 있으므로 1년의 시차가 발생한다. 동명왕이 죽은 뒤에 이어 부여에서 낳은 아들 유리(類利)가 왕위에 올랐으며 그 다음으로 유리왕의 셋째아들인 대주류왕(大朱留王, 大解朱留王)이 즉위한다. 유리왕 때 까지도 고구려를 속국(屬國)시하던 부여(夫餘)를 대주류왕이 멸함으로써 비로소 고구려는 온전한 국가의 기틀을 마련한다.


[주석]

1) 黃龍 : 일반적으로 동양에서 황룡은 회오리 바람이나 황토물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장지인 용산(龍山 : 삼국사기)을 의미하거나 혹은 무덤의 현실 입구까지 임시로 쌓은 흙언덕을 연상시킨다.

2) 忽本東岡 : 홀본의 동쪽언덕, 지금의 환인현 동쪽에 장사하였다.

3) 儒留王 :  유류왕은 곧 추모왕과 예씨(禮氏)부인 사이에서 난 유리왕(類利王, 瑠璃明王 類利)이다. 즉위 22년에 국내성(國內 尉那巖城)으로 천도하여 나라의 기틀을 세웠다.

4) 大朱留王 : 대주류왕은 곧 대무신왕(大武神王)이니 곧 유리왕의 셋째아들로서 유리왕의 대를 이어 왕이 되었다. 대무신왕은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이라고도 불리며 이름은 무휼(無恤)이다. 부여국(夫餘國)을 멸하고 낙랑군(樂浪郡)을 공격하여(삼국사기에는 낙랑을 멸하였다고 하나 믿기 어렵다) 고구려의 기초를 다진 왕이다.



遝至十七世孫<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二九登祚號爲<永樂太王>. 恩澤□(洽)于皇天, 威武振被四海. 掃除□□庶, 寧其業, 國富民殷, 五穀豊熟.


[번역]

(북부여의) 대를 이어 내려와 17세 손(孫)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에 이르렀다. 왕은 18세에(서기391년,신묘년) 즉위하여 호를 영락태왕 (永樂太王)이라 일컬었다. 은혜는 하늘에 (미치고) 무위(武威)는 사해(四海)에 떨쳐졌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어 그 왕업(王業)을 평안하게 하니, 나라가 부유해지고 백성들은 번성하였으며 오곡(五穀)은 풍성하게 익었다.


[해설]

광개토왕은 소수림왕 4년(374년)에 왕제(王弟)인 이연(伊連), 즉 고국양왕(故國壤王)의 아들로 태어나 고국양왕(故國壤王) 3년 13세에 태자(太子)로 봉(封)해졌다가 18세의 나이로 즉위(卽位)하였으니 이때가 바로 신묘년(辛卯年, 391년) 여름 5월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왕의 등극(登極) 시기를 임진년(壬辰年, 392년)으로 적고 있으나 이는 광개토왕비의 기년(紀年)과도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즉위 원년(元年)이라는 임진년 기사는 삼국사기 신라조 및 백제조의 신묘년 기사와 일치한다. 따라서 삼국사기 연표에서 광개토왕의 즉위 연도는 한해 끌어올려 신묘년으로 보아야 맞다.


광개토왕은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에게 피살된 고국원왕(故國原王)의 손자이다. 고국원왕 12년 고구려는 연나라의 침입을 받아 수도인 환도성(丸都城)이 함락되고 5만여명이 포로가 됐을 뿐만 아니라 부왕인 미천왕(美川王)의 시신을 탈취당하고 왕모(王母) 마저 연나라에 포로가 된다. 그리고 다시 고국원왕 41년에는 백제의 침공을 받아 싸우던 중 고국원왕이 유시(流矢)에 피살된다.


고국원왕의 아들 소수림왕(小獸林王)은 피폐해진 국력을 회복시키기 위해 불교를 받아들이고 율령을 반포하는 등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힘썼다. 소수림왕에 이어 즉위한 소수림왕의 동생 고국양왕은 북으로 연나라와 싸워 현도(玄菟)를 빼앗고 남으로 백제와 대결하였으나 재위 9년에 아깝게 죽는다.


아버지 고국양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광개토왕은 선대의 기초를 바탕으로 적극적인 팽창정책을 펼쳐 북쪽에 이미 확보된 영토를 공고(鞏固)히 하고 남으로 백제를 쳐서 대대적인 영토 확장을 꾀하는 한 편 신라를 실질적인 지배 아래 두게 된다. 


[주석] 

1) 十七世孫 : 광개토왕은 고구려의 19대(즉, 19번째)왕이다. 형제간의 왕위 계승을 빼면 광개토왕은 동명왕의 13세손에 해당되는 바 17세손이 되려면 추모왕 이전의 북부여 세수가 합산되어야 한다. 이는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에서 확인되는 바 여기에서는 확실하게 광개토왕이 북부여의 17세손(北夫餘國至十七世孫)임을 밝히고 있다.

2) 永樂 : 연호(年號)이자 생시(生時)의 호칭이다. 휘(諱)는 담덕(談德)

3)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 국강상(國岡上)은 왕릉이 있는 곳을 가르키며 광개토경평안(廣開土境平安)은 땅을 넓히고 이를 평안케 했음을 기리는 내용이고 호태왕(好太王)은 시호(諡號)이다. 모두루묘(牟頭婁墓)에는 국강상대개토지호태성왕(國岡上大開土地好太聖王), 경주에서 발견된 호우(壺杅) 밑면에는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으로 기록되어있으며 삼국사기에는 휘호(諡號)가 광개토왕(廣開土王)이라고 적고있다.



昊天不弔, 卅有九宴駕棄國. 以甲寅年九月甘九日乙酉, 遷就山陵. 於是立碑銘記勳績以示後世焉. 其辭曰


[번역]

하늘이 돌보지 아니하시어, 영락(永樂) 22년(서기 412년) 9월 9일 39세에 수레위에서 나라를  버리시었다. 갑인년(甲寅年, 서기414년, 長壽王3년) 9월 29일 을유(乙酉)에 산릉(山陵)을 국내성 동쪽 언덕으로 옮겨 모시고 이에 비명(碑銘)을 세워서 공적(功績)을 기록하여 후세(後世)에 보인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해설]

광개토왕은 서기 412년에 사망하였으며 이 때 나이 39세였다. 광개토왕의 비석은 중국 길림성(吉林城) 집안시(集安市) 태왕향(太王鄕) 대비가(大碑街)에 있다. 높이가 6.39미터에 폭이 1.5 미터 내외이며 1775자가 기록되어있다. 왕의 무덤의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 이론이 많다. 광개토왕비를 중심으로 그 북쪽에는 장군총(將軍塚)이 있고 그 아래에는 태왕릉(太王陵)이 있으며 서쪽으로 각각 무용총과 각저총이 있다. 과거에는 1) 태왕릉이 거리상으로 더 가깝고 2) 태왕능 안에서 태왕이라는 글자(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가 쓰인 벽돌이 발견되었으며 3) 장군총은 장수왕(長壽王)릉의 와전(訛傳)된 이름이라고 보아 태왕릉을 광개토왕릉으로 보아왔다. 그러나 태왕이라는 호칭은 광개토왕에게만 사용된 호칭이 아니고 위대한 왕이라는 보통명사에 불과하며, 일반적으로 묘는 남향으로 만들고 그 앞에 묘비를 세우므로 장군총이 광개토왕의 능묘일 가능성이 있다. 참고로 장군총은  1100개의 잘 다듬어진 돌로 한 변의 길이가 30미터 정도 되도록 쌓은 피라미드형 무덤이고 호태왕릉은 한 변의 길이가 66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적석(積石)무덤이다. 


[주석]

1) 昊天不弔 : 모두루묘지에는 旻天不弔라 적고있는 바 의미는 같다.

2) 卅有九 : 39세, 삼국사기는 413년이니 이 역시 1년 착오. 二十二年冬十月 王薨 號爲廣開土王

3) 宴駕棄國 : 야외에서 연회(宴會) 도중 사망하였다는 의미로 보인다. 왕은 이 때 아직 30대 후반이었고 사망하기 두해 전 까지도 직접 부여 정벌에 나섰던 만큼 급사(急死)한 것 같다.

4) 遷就山陵 : 고구려에서는 생시에 이미 무덤을 만들었지만 광개토왕은 일찍 죽었으므로 가묘(假墓)를 쓴 상태에서 능묘(陵墓)를 완성하고 사후 2년이 지난 때에 이장(移葬)을 한 것으로 보인다.



永樂五年歲在乙未, 王以<□(碑,稗)麗>不□(歸,貢)□(人)□躬率往討. 過<富山><負山>至<鹽水>上破其□(三,丘)部□(族,洛)六七百 營. 牛馬群羊不可稱數. 於是旋駕因過<襄平道><東來□城><力城><北豊>. □(王,五)備□(道,海), 遊觀土境, 田獵而


[번역] 

영락(永樂) 5년 을미년(乙未年, 서기395년)에 비려(碑麗)가 조공을 하지 않으므로 왕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이를 토벌하였다. 부산(富山)과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 위에 이르러, 그곳의 세 부족, 6, 7백 부락을 깨뜨리니 소.말 뭇 양(羊)을 얻은 것이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어가(御駕)를 돌이켜 양평도(襄平道) 동래□성(東來□城), 역성(力城), 북풍성(北豊)을 지나니, 왕은 도로를 닦게 하고 지경(地境)을 돌아보고 사냥을 하면서 돌아왔다.


[해석]

비려(碑麗)는 진서(晉書)에 나타나는 거란의 일족인 비리국(裨離國)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소수림왕 8년에 거란이 침입해서 8개 부락을 함몰시키고 많은 사람을 포로로 잡아갔었다. 광개토왕 원년 9월에 이미 북쪽의 거란을 쳐서 포로 500인을 잡고 함몰되었던 고구려 백성 일만명을 다시 데리고 돌아왔고 을미년에는 거란에 대한 지배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하여 보다 대규모의 출병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회군하는 길에는 국경을 돌아보고 수비를 위해 도로를 정비하는 등 북방 국경을 확고히 하고 안정시키고자 노력한 기사이다.


1) 비려(稗麗) : 패려(稗麗), 비리국(裨離國)


<晉書卷97-列傳第67-裨離等十國>

<裨離國 >在<肅愼>西北, 馬行可二百日, 領戶二萬. <養雲國>去<裨離>馬行又五十日, 領戶二萬. <寇莫汗國>去<養雲國>又百日行, 領戶五萬餘. <一羣國>去<莫汗>又百五十日, 計去<肅愼>五萬餘里. 其風俗土壤並未詳.


<晉書卷97-列傳第67-肅愼氏>

<肅愼氏>一名<挹婁>, 在<不咸山>北, 去<夫餘>可六十日行. 東濱大海, 西接<寇漫汗國>, 北極<弱水>.


2) 부산(富山)

3) 부산(負山)

4) 염수(鹽水)

5) 양평도(襄平道)

6) 북풍(北豊) : 삼국사기 장수왕 26년 북연의 풍홍이 위나라의 공격을 받고 패하자 고구려의 북풍으로 옮겼다고 하며 송서 열전에서는 이를 북풍성이라고 함. 따라서 이는 지명이다.

7) 왕비도(王備道) : 왕이 도로망을 구축케 하였다는 기사. 혹자는 이를 지명으로 봄(五備道 혹은 北豊五備道)



<百殘><新羅>舊是屬民, 由□(未,來)朝貢. 而□(後,倭)以辛卯年, 不□(貢)□(因), 破<百殘>□□<新羅>以爲臣民.


[번역]

백제(百濟)와 신라(新羅)는 예전의 속국(屬國)백성이었으므로 와서 조공(朝貢)을 바쳐왔다.  그러나 이후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선왕인 고국양왕은) 신묘년(辛卯年, 서기391년)에 백제를 쳐부수고 신라를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해설]

백제와 신라가 원래 속민(屬民)이었고 조공(朝貢)을 바쳤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백제는 스스로가 고구려에서 나왔음을 인정하고 있으니 속민(屬民)이라는 표현이 일부 맞다고 볼 수도 있으나 계속 조공을 바치기는 커녕 광개토왕의 조부(祖父)를 살해하는 등 고구려에 당당하게 맞서왔던 나라이다. 신라 또한 고구려와 처음 외교관계를 가진 것은 동천왕 22년이며 이 때에도 화친을 맺은데 불과하므로 원래 속국이었다는 표현은 과장이다.(이를 근거로 來朝貢 대신 未朝貢으로 해석하는 이가 있으나 원문은 來자가 분명한 듯하다)


신묘년 기사는 광개토왕비문 중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인 만큼 신묘년 기사의 본질적인 측면을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


1) 본 신묘년 기사에 나타난 전적(戰績)은 광개토왕이 아닌 고국양왕의 치적이다.


신묘년(391년)은 광개토왕이 즉위한 해이다. 비문의 순서가 연대기(年代記)적으로 되어있음을 고려할 때, 만일 당시 신묘년의 신라복속과 백제 격파가 광개토왕의 치적(治績)으로 이해되었다면 이는 당연히 을미년(395년)의 기사보다 앞부분에 기록되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비문상 신묘년 기사가 을미년 기사의 다음 부분에, 병오년 기사의 배경 설명을 위하여 기록된 것을 볼 때 신묘년의 백제 공략과 신라 복속은 광개토왕이 아닌 고국양왕의 치적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삼국사기 백제조를 보면 고국양왕 8년 신묘년(391년)에 이미 고구려가 말갈군을 동원하여 백제 적현성을 공략했으며 이어 계속된 백제 공략으로 임진년(392년) 7월 까지 백제 10성을 탈취하고 10월 관미성을 함락시킴으로서 백제 공략이 일단락되었다. 광개토왕이 그해 5월 18세로 즉위했을 당시에는 이미 백제 공략이 한참 진행중이었던 만큼 비록 광개토왕이 그 마무리 과정에서 상당한 공헌을 했다고 하더라도 백제 공략의 궁극적 성과는 돌아가신 아버지에게로 돌려졌을 것이다.

또한 신라가 고구려에 복속하게 된 경위를 보면 신라에 사신을 보낸 것은 고국양왕이며 그해 7월 고국양왕이 죽은 뒤 실성왕자가 고구려로 옴으로서 신라에 대한 지배권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신묘년의 백제공략과 신라 복속은 고국양왕이 시작하고 광개토왕이 마무리한 일이며 본 비문을 작성할 당시에 이 두가지 공적은 고국양왕의 치적이라 인정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또다른 증거로서 광개토왕의 수묘인 선발을 들수 있겠는데, 광개토왕은 자기가 직접 확장한 영토의 백성들로 수묘인을 삼았으나 유독 매우 어렵게 빼앗은 백제의 관미성(關彌城, 혹은 閣彌城)에서는 수묘인을 선발하지 않았다. 이 것은 관미성 확보등이 광개토왕의 업적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2) 본 신묘년 기사는 삼국사기에 나타난 신묘년 기사와 비교하여 해석하여야 한다.


삼국사기 고구려조에서는 일부 기년상의 혼란이 보인다. 즉, 광개토왕의 즉위년이 임진년(비문에는 신묘년)으로 기록되어 있고 신라가 실성왕자를 인질로 보낸 것도 임진년(신라조는 신묘년)으로 적고 있다. 게다가 고국양왕을 죽은 그 해에 바로 장사지낸 것으로 적고 있는 점도 이상하다. 이는 아마도 고국양광의 사망년도와 장례를 치른 연도간의 혼란 때문인 듯하다. 즉, 고국양왕은 신묘년에 죽고 임진년에 장사를 치렀을 것이나 이후에 장사 지낸 해인 임진년를 사망연도로 그릇 이해하고 고국양왕의 재위 연수를 9년까지로 늘려잡으면서 기년상의 혼란이 온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혼란을 감안하여 신묘년과 임진년의 사건을 시대순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391년 신묘>


1) 봄에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맺고 인질을 요구하니 그해 7월에 내물왕의 조카 실성을 볼모로 보냈고.(신라 : 신묘년 7월, 고구려 : 임진년 봄)

2) 4월에 백제의 북곽을 쳐서 적현성을 빼앗고(백제 : 신묘년 4월 고구려 : 없음)

3) 5월에 고국양왕이 죽고 광개토왕이 즉위하였으며(고구려 : 임진년)


<392년 임진>


5월에 고국양왕을 장례지내고(없음)

7월에 백제 10성을 빼앗았고(백제 : 임진년, 고구려 : 임진년)

9월에 거란을 쳐서 포로 500인을 잡고(고구려 : 임진년)

10월에 백제 관미성을 빼앗았고(백제 : 임진년, 고구려 : 임진년)

11월에 백제 진사왕이 죽다(백제 : 임진년)


비문에 나타난 본 신묘년 기사는 이상의 삼국사기의 역사적 기록과 비교하여 그 내용을 해석해야 한다.


3) 본 기사의 주어는 고구려이며 왜국이 나타날 여지는 전혀 없다.


첫째, 삼국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신묘년에서 임진년에 걸쳐 백제를 치고 신라를 복속시킨 것은 고구려이다. 따라서 신묘년 기사의 내용은 고구려가 주어인 것이 당연하며 왜국과 관련된 기사가 나타날 여지는 없다. 둘째로, 만일 왜가 당시 백제와 신라를 쳐서 복속시킨 일이 있다면 이는 당연히 삼국사기나 일본서기에 나타나야 할 텐데 삼국사기의 경우에는 신묘년을 전후로 해서 왜국의 침입기록이 없고 일본서기의 경우 신묘년(391년)으로 간주되는 응신(應神) 2년 전후에는 그와 비슷한 사건조차 나타나지 않는다. 셋째, 일본과 백제는 교류 초기부터 계속해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일본서기에서 일본이 백제를 쳐부순(破百濟) 기록은 전혀 없다. 따라서 파백제(破百濟)의 주어로 왜국은 맞지 않는다. 넷째, 만일 왜가 신묘년에 백제를 쳐서 굴복시켰다면 고구려는 백제가 아니라 왜병을 쳐야 이치에 맞고 백제 또한 정복자인 일본에 대항해 고구려에 협조하는게 이치에 맞다. 그러나 병신년 기사에서 보듯이 고구려는 왜가 아닌 백제만을 치고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락 9년에 백제는 일본과 화친하여 고구려를 치고있다. 따라서 신묘년 기사의 주어가 왜국이 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본 신묘년 기사의 주어는 고구려이며 그 내용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신묘년과 임진년의 백제 공략과 신라 복속이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본 기사는 다음과 같이 해석되어진다.


而後, 以辛卯年□(不)□(貢)□(因), 破<百殘>□□<新羅>以爲臣民.

<(백제와 신라는 원래 우리의 속민으로 조공을 바쳐왔다.) 그러나 이후 조공을 보내지 않았으므로 신묘년에 백제를 쳐서 깨뜨렸고 신라는 (잘 타일러) 신민을 삼았다>



[주석]

1) 百殘 : 백잔은 곧 백제(百濟)를 낮추어 부르는 말이다. 고구려는 신묘년에 이미 백제를 깨부수었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 잔적이라는 의미로 백잔(百殘)이라 하였다고 본다. 백제는 추모왕이 졸본에 와서 얻은 아들인 온조(溫祚)에 의해 기원전 18년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건국된 나라이다. 국가 다운 형태를 갖춘 것은 고이왕(古爾王)(234년 ~286년) 때이며 근초고왕(近肖古王) 때에 이르러 대외적인 영토 확장이 대규모로 이루어져 남으로는 마한(馬韓)의 잔여세력을 제압하고 북으로는 고구려와 충돌하여 평양성 전투에서 고국원왕을 살해하기에 이른다.

2) 舊是屬民 : 백제는 스스로 고구려에서 나왔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신라의 경우는 그 기원도 다를 뿐만 아니라 고구려에 신속(臣屬)한 기록도 없다.

3) 由□(未,來)朝貢 : 혹자는 이를 “조공을 바쳐왔었다(由來朝貢)”로 해석하고 혹자는 이를 “조공을 하지 않았다(由未朝貢)”로 해석한다. 전후의 사실을 고려하면 미(未)가 맞겠으나 최근의 원문 해독 결과 래(來)자임이 틀림 없다고 주장된다.

4) 而□(後,倭)以辛卯年□(不)□(貢)□(因), 破<百殘>□□<新羅>以爲臣民. : 본 신묘년 기사는 고국양왕이 백제를 깨트리고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즉, 복속을 약속받고 신라왕의 조카가 인질로 왔다)라는 내용이다. 일본은 사카와 가묵탁본(雙鉤加墨本)을 근거로 이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원래는 백제,신라가 고구려의 신하였는데)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임나 신라를 깨트리고 신민으로 삼았다(그래서 왕이 병오년에 백제를 쳤다)(而倭以辛卯年, 來渡海破 百殘□□新羅以爲臣民). 정인보의 해석은 원본에 대한 접근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다만 일본인이 가묵하여 작성한 탁본을 새로이 해석하는데 불과하여 이 또한 바른 해석으로 볼 수 없다.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 百殘□□新羅以爲臣民 - 정인보)



以六年丙申, 王躬率還軍討□(伐,滅,任)殘. 國軍□(至)□首攻取


[번역]

영락 6년 병신년(丙申年, 서기 396년)에 왕이 다시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百濟)의 잔적(殘敵)을 토벌하였다. 왕의 군사가 들이쳐 공격하여 빼앗으니


[해설]

병신년의 백제(百濟) 공략은 신묘년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한 백제의 선제공격에 의해 촉발된 것으로 보인다. 백제 아신왕(阿莘王)은 계사년(393년)에 진무(眞武)를 장수로 삼아 군사 일만명으로 고구려에 빼앗긴 관미성(關彌城, 혹은 閣彌城)을 치다가 실패하고 갑오년(394년) 7월에는 수곡성(水谷城) 아래서 고구려와 싸우다 패했다. 을미년(395년) 8월에는 다시 진무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치게하였으나 광개토왕이 친히 지휘한 고구려 군사 7,000에게 패수(浿水 : 임진강)에서 패하여 죽은자가 8,000이었다. 그 해 11월에 아신왕은 패수에서의 패배를 복수하기 위해 친히 병사 7,000을 거느리고 한수를 건너 청목령에 이르렀으나 대설을 만나 병사들이 얼어죽었다. 이처럼 백제의 침략이 계속되자 광개토왕은 병오년(396년)에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된다.


본 사건은 삼국에 모두 중대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삼국사기에는 그와 관련된 기사를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일본서기(日本書紀) 응신(應神) 8년(277년 -> 실은 397년)에 백제인이 내조하였다는 기사와 함께 <백제기(百濟紀)>를 인용하여 아신왕이 즉위한 뒤 귀국(貴國 : 왜국)에 예를 잃어 침미다례(忱彌多禮), 현남(峴南), 지침(支侵), 곡나(谷那), 동한(東韓)의 땅을 빼앗겼으며 그래서 (일본의 도움을 받고자) 왕자 직지(直支)를 보내어 선왕의 우호를 다지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응신 8년(397년)은 병신년 다음 해이므로 이 기록이 병신년 기사와 관련된 유일한 자료일 가능성이 높다.


[주석]

1) 討□(伐,滅,任)殘 : 토벌의 대상을 임잔(任殘), 즉 임나(任那)와 백잔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그렇다면 병신년 거병(擧兵)의 대의명분상에 임나가 나타나지 않는 점과 이 때 고구려의 전투 무대가 주로 한강 이북이었다는 점이 설명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때 고구려의 공격 대상은 백제 뿐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를 멸(滅)로 보는 것 또한 이후의 계속된 백제 공략에 비추어 적절하지 않다. 의미상으로는 벌(伐)이 맞는 것 같지만 이 또한 불필요한 단어의 중복인듯하니 원문에 대한 새로운 독법이 있어야 겠다.

2) 討□殘. 國軍□(至)□首攻取 : 혹자는 討□殘國軍, 즉 백제의 군사를 토벌했다고 해석하지만 광개토왕의 출병은 백잔을 토벌(討伐)하는 것이지 백잔의 군사를 파(破)하는 전술적(戰術的)인 것이 아니었다. 또한 이미 백제를 백잔이라 칭하였으니 이 부분에서 굳이 잔국(殘國)이라 할 이유도 없다. 따라서 국군은 다음 부분의 주어라고 본다.


 

<壹八城><臼模盧城><各模盧城><幹氐利城><□□城><閣彌城><牟盧城><彌沙城><古舍蔦城><阿旦城><古利城><□利城><雜珍城><奧利城><勾牟城><古模耶羅城><莫鄒城><□□城><□而耶羅城><瑑城><於利城><農賣城><豆奴城><沸城><比利城><彌鄒城><也利城><大山韓城><掃加城><敦拔城><□□□城><婁賣城><散那城><那旦城><細城><牟婁城><于婁城><蘇灰城><燕婁城><析支利城><巖門□城><林城><□□城><□□城><□利城><就鄒城><□拔城><古牟婁城><閏奴城><貫奴城><彡穰城><□(曾)□(拔)城><□(宗)□(古)盧城><仇天城><□□□><□□>

[번역]

먼저 공격하여 다음의 성을 탈취하였다. 일팔성(壹八城), 구모로성(臼模盧城), 각모로성(各模盧城), 간저리성(幹氐利城), □□성(□□城), 각미성(閣彌城), 모로성(牟盧城), 미사성(彌沙城), 고사조성(古舍蔦城), 아단성(阿旦城), 고리성(古利城), □리성(□利城), 잡진성(雜珍城), 오리성(奧利城), 구모성(句牟城), 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 모추성(莫鄒城), □□성(□□城), □이야라성(□而耶羅城), 탁성(琢城), 어리성(於利城), 농매성(農賣城), 두노성(豆奴城), 비성(沸城), 비리성(比利城), 미추성(彌鄒城), 야리성(也利城), 대산한성(大山韓城), 소가성(掃加城), 돈발성(敦拔城), □□성(□□城), 누매성(婁賣城), 산나성(散那城), 나단성(那旦城), 세성(細城), 모루성(牟婁城), 우루성(于婁城), 소회성(蘇灰城), 연루성(燕婁城), 석지리성(析支利城), 암문□성(巖門□ 城), 임성(林城), □□성(□□城), □□성(□□城), □리성(□利城), 취추성(就鄒城), □발성(□拔城), 고모루성(古牟婁城), 윤노성(閏奴城), 관노성(貫奴城), 삼양성(彡穰城), 증발성(曾拔城), 종고로성(宗古盧城), 구천성(仇天城), □□성(□□城), □성(□城)


[해설]

위에 나열된 56개의 성이 모두 병신년에 광개토왕이 직접 백제를 쳐서 빼앗은 것은 아니다. 이는 신묘년 이래 병오년 까지 고구려가 백제로부터 빼앗은 성(城)을 모두 나열한 것이다. 예를 들어 관미성(關彌城, 혹은 閣彌城)은 이미 임진년 10월에 고구려가 점령했고 이후 계속 확보하고 있었다. 

백제의 멸망 당시 백제의 성이 모두 200여개였다고 하니 병오년에 백제가 잃은 성은 거의 전체의 1/4에 해당한다.  물론 주성 이외에 그에 부속된 변성이 상당수 포함되었을 것이다.

 

[주석]

1) 閣彌城 : 삼국사기에 나타난 관미성(關彌城)과 같은 지명이 아닌가 싶다.

2) 阿旦城 : 현재의 아차산성

3) 彌鄒城 : 현재의 인천 매초홀(買召忽)

4) 其國城 : 이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그나라의 국성, 즉 백제의 국성을 의미한다고 보여진다.



其國城殘不服義, 敢出□(百,迎)戰. 王威赫怒渡<阿利水>遣刺迫城. 橫兵□□□便國城. 而殘王因逼獻□男女生口一千人,細布千匹. □(殘)王自誓從今以後永爲奴客. 太王恩赦先迷之愆錄其後順之誠. 於是□(得,取)五十八城村七百. 將殘王弟幷大臣十人旋師還都.


[번역]

그 도성의 백잔이 의(義)에 굴복하지 아니하고 감히 나와서 싸웠다. 왕께서 혁노(赫怒)하여 아리수(阿利水, 현재의 한강)를 건너서 군사를 보내어 성(城)에 들이닥치게 하였고 일부 군사를 좌우로 보내에 백제의 국성(國城)을 (포위하니), 백제의 임금이 곤핍(困逼)하여 남녀 포로 1천 인과 세포(細布) 1천 필(匹)을 내어서 바치었다. 또한 백제왕 스스로 복종을 맹세하여 “지금부터 이후로는 영원히 왕의 노객(奴客)이 되겠습니다."고 하였다.  태왕(太王)이 앞서의 어리석은 과실을 용서하고, 나중에 귀순(歸順)해온 정성을 녹훈(錄勳)하였다. 이리하여 58성(城)과 촌락(村落) 7백 개를 얻었다. 그리고 백제의 왕제(王弟)와 대신(大臣) 10인을 인질로 보낼 것을 약속 받고  군사를 돌이켜 돌아왔다.


[해설]

백제가 그 국성에서 나와 항전하였다는 것은 한강 이북을 대부분 빼앗긴 백제가 다시 한강을 건너와 고구려를 공격했다는 의미이며 이에 고구려는 한강(아리수)를 건너 백제의 국성을 직접 포위 공략한 것이다. 위기에 몰린 아신왕은 공물을 보내고 항복을 약속하여 겨우 위기를 모면하였다.

백제가 왕제(王弟)를 인질로 보낸 부분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백제의 아신왕에게는 그가 죽은 뒤 섭정(攝政)을 맡았던 둘째 훈해(訓解)와 훈해를 죽이고 왕위를 탈취하려다 실패한 막내동생 설례(碟禮)가 있다. 그러나 이들중 누구도 고구려에 인질로 갔던 흔적이 없고 병신년 이후 백제가 즉시 복수를 꾀한 것으로 보아 실제 인질이 고구려에 잡혀있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이는 아마도 인질을 보냈다는 뜻이 아니라 백제가 인질을 보내기로 약속을 한 것으로 보인다.


[주석]

1) 阿利水 : 현재의 한강

2) 殘王 : 아신왕(阿莘王), 아신왕(阿薪王) 혹은 아방(阿芳), 일본서기에는 아화왕(阿花王)으로 기록되어있다. 어릴적 이름이 아방이나 아마도 아화왕이 맞을 듯하다. 침류왕의 아들이다. 아버지침류왕(枕流王)이 죽었을 때 아직 어려 숙부 진사왕(辰斯王)이 대신 왕위에 올랐다. 진사왕이 재위 8년에 죽자(사냥을 나갔다가 신하의 손에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 이어서 즉위했다.

3) 生口 : 포로 혹은 노예

4) 奴客 : 스스로를 낮추어 부르는 말. 신하가 되겠다는 의미임.



八年戊戌, 敎遣偏師觀<帛愼>土谷. 因便抄得<莫斯羅城><加太羅谷>男女三百餘人. 自此以來朝貢論事


[번역]

영락 8년 무술(戊戌年, 서기398년)에 하교(下敎)하여 소부대를 보내어 백신(帛愼)의 토곡(土谷)을 살피게 하였다. 보낸 군사가 모사라성(莫斯羅城) 가태라곡(加太羅谷)의 남녀 3백여인을 초략(抄略)하여 사로잡으니, 이때 이후로 부터 내조(來朝)하여 조공(朝貢)하고 섬겼다.


[해설]

본 기사는 왕이 장수를 보내 백신의 토곡을 살피고 모사라성 가태라곡의 남녀 300여인을 초략한 기사이다. 백신에 대해서는 1) 이를 연해주 일대의 숙신(肅愼)으로 보는 견해와 2) 강원도 일대의 예(穢)로 보는 견해 3) 백제의 일부 지역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4) 또한 전반부와 후반부의 기사가 각기 다른 지역에서의 사건으로 보고 전반부의 기사는 강원도 일대의 고구려토경을 관찰한 기사이며, 후반부는 산악을 경계로 하여 이에 인접한 국가,즉 신라에 대한 복속기사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1) 동예(東濊)는 태조왕 이래로 신속했고, 2) 숙신(肅愼)은 서천왕 11년에 고구려가 이미 정복하였으며 3) 국토의 1/4를 잃으면서도 버티던 백제가 겨우 300명을 초략당하고 내조하여 조공하였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4) 본 기사를 두 개의 사건으로 보는 것은 앞의 사건이 단순한 관찰기록이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군대를(편사)를 보낼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뒷 문장의 경우는 주어 없는 이상한 문장이 되어버린다. 따라서 백신은 동예, 숙신, 백제와는 다른 제 3의 집단인 바 어느 산악지역의 일개 소국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듯 싶다.


[주석]

1) 帛愼

2) 莫斯羅城

3) 加太羅谷



九年己亥, <百殘>違誓, 與<倭>□(和)通. 王巡下<平壤>.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太王恩□(慈,後)□(矜,稱)其忠誠, 特遣使還告以□(密)□(計).


[번역]

영락 9년 기해(己亥年, 서기399년)에 백제가 맹세를 어기고 왜(倭)와 화친(和親)하여 내통하였다. 왕이 순행(巡行)하여 평양(平壤)에 이르니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왕에게 아뢰기를, "왜인(倭人)이 나라의 국경에 가득하여 성지(城池)를 파괴하니 노객(奴客)이 백성을 위(爲)하여 왕에게 와서 명(命)을 청합니다." 하였다. 태왕(太王)은 은혜를 베풀어 그 충성(忠誠)을 칭찬하고 특별히 사신을 파견하여 함께 보내어 (곧 출병할 것임을) 알리게 하였다.


[해설]

백제왕이 아들 전지(直支)를 왜국에 인질(人質)로 보내는 등의 외교적 노력을 기울인 결과 백제는 왜국을 동맹군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한다. 광개토왕은 백제와 왜를 견제하기 위해 평양으로 내려왔다. 백제와 동맹을 맺은 왜군은 백제의 사주를 받아 고구려의 동맹국인 신라를 침략하게 되고 신라왕은 다급히 사신을 보내어 구원을 청하게 된다. 이 때 신라에 침입한 군사는 왜군과 가야의 연합군으로 보이며 백제는 당장 북으로부터 고구려의 직접적인 압박을 받고있었으므로 신라에 대병을 보낼 형편이 못되었을 것이다.

일본측은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이라는 구절을 “왜군이 성지(城池)를 파괴하고 노객(奴客)으로 백성을 삼았습니다. 이에 왕께 명을 청합니다.”로 해석하여 왜가 이 때 신라를 신하로 삼았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노객은 곧 신라왕을 의미하므로 왜국이 주어라면 신라왕을 백성으로 삼는(爲民) 것은 이상하며 신하로 삼았다(爲臣)라야 했을 것이다. 또한 이 때 고구려의 사신이 신라에 가서 왕에게 밀계를 전할 정도로 아직은 급박한 상황이 아니었고 그 다음해 고구려군이 신라에 당도했을 때 왜군은 남거성과 신라성 사이에 있었지 이미 신라성을 점령한 상태가 아니었다. 따라서 일본측 해석은 억지에 불과하다. 이는 신라왕(노객)이 신라백성을 위해 청원한다“로 해석해야 한다.


[주석]

1) 與倭和通 : 백제와 왜국의 화친은 각각 군사적 동맹의 필요성과 선진 문물 교역의 필요성 때문에 시작되었으며 일본서기에 의하면 근초고왕 때 탁순국의 중개에 의하여 처음 접촉을 한다. 당시 일본과 백제의 관계는 일본서기에 의하여 심하게 왜곡되어있으나 근초고왕이 왜왕에게 준 칠지도의 명문을 보면 그 실상을 짐작할 수 있다.


      <七支刀 銘文>

      (表) 泰和四年六月 十一日 丙午 正陽. 造百練鐵七支刀(以生出)辟百兵 宜供 侯王 作

      (裏) 先世以來 未有此刀 百濟 王世子 寄生聖音 故爲倭王旨造 傳是後世

      (동진 태화4년(초고왕 24년(369년)) 6월 11일 병오 정양. 철을 백번 단련하여 칠지도를 만드니 나아감에 백병을 깨트릴 수 있다. 후왕(侯王)에게 줄만하다.  모모 만들다. 과거 이래로 이 칼에 비할 만한 물건은 없었도다. 백제 왕세자는 부왕의 명에 의하여 왜왕을 위하여 이를 만들도록 지시(指是) 하였으니 후세에 이를 길이 전하라.)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往救<新羅>. 從<男居城>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번역]

영락 10년 경자(庚子, 서기400년)에 하교(下敎)하여 보병(步兵)과 기병(騎兵) 5만 명을 보내어 가서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男居城)에서 신라성(新羅城) 사이에 왜인이 가득하더니 관병(官兵)이 바야흐로 이르자, 왜적(倭賊)이 물러갔다.


[해설]

전년도에 침입한 왜군이 아직도 신라 지경내에 있었음을 볼 때 이 때의 왜군 침입은 종전에도 반복적으로 있던 단순 노략질의 범위를 벗어난 듯하다. 이렇게 장기적으로 주둔하자면 상당한 양의 지속적인 군수 보급이 필요했을 것이며 이는 아마도 백제와 가야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이다. 고구려가 5만의 대병을 보낸 점으로 볼 때 이 때 신라에 침입한 왜군과 가야군은 상당히 대규모였던 것 같다. 그러나 삼국사기 신라조에는 다만 “신라 내물왕 45년(경자년) 10월에 왕의 말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었다.(四十五年秋八月 星孛于東方 冬十月 王所嘗御內廐馬 跪膝流淚哀鳴)라고 적고 있으니 이는 당시의 수치스러운 상황에 대한 은유적 표현인 듯하다. 일본 서기는 이 때를 전후로 한반도 관련 기사가 없다.


[주석]

1) 남거성(男居城) : 남거성은 금성의 북쪽에 있는 어떤 성일 것이나 미상.

2) 신라성(新羅城) : 당시 내물왕은 신라 금성(金城)에 있었으므로 신라성은 곧 금성.



□□□□□□□自倭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城卽歸服.


[번역]

왜구의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에 이르러 계속 성을 공격하니 성(城)이 곧 항복하였다.


[해설]

왜국은 5세기 까지 자체적으로 철을 생산하지 못했으므로 이를 한반도로부터 공급받았다. 따라서 변진 시대부터 한반도와 잦은 무역거래를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주된 접촉 대상은 한반도 최남단의 금관가야와 낙동강을 거슬러올라가며 접촉하게 되는 가야제국이었다. 나중에 왜국과 백제가 교류하게 된 것도 가야의 탁순국이 중개를 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가야는 인구가 10만도 되지 않는 소국 연맹체로서 신라와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왜국을 적극 이용하였을 뿐 만 아니라 왜구의 약탈에 편승하여 경제적 이익을 얻었을 것이다.  왜구가 당시의 열악한 조선 및 항해기술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빈번하게 바다를 건너 신라를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가야라는 전초기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광개토왕의 신라구원 당시에도 왜구는 가야를 전초기지로 하여 가야군과 연합하여 신라를 쳤을 것이며 따라서 고구려의 대군에 밀려 후퇴한 곳은 바로 가야 지역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군은 왜구의 추격 과정에서 자연스레 가야 제국까지 침입해 들어간 것이다. 이 때 주된 공격 대상은 아마도 가야의 맹주인 금관가야였을 것이다.  

 

여기서 나오는 임나가라라는 명칭은 일본의 임나일본부설과 관련하여 많은 논란이 있는 부분이다. 일본서기에는 임나라는 단어가 자주 나오나 우리나라 기록으로는 본 광개토왕비의 본 기사와 삼국사기 강수 열전에서 강수가 스스로를 소개하면서 “臣本 任那加良人”이라 한 것이 유일하다.

왜국의 경우 송서 왜국 열전에 따르면 “都督<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이라는 칭호를 요구하였다고 하므로 임나와 가야는 별개의 나라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하였으며 일본서기에는 임나 10국을 가라국(加羅國-금관가야), 안라국(安羅國-아라가야), 사이기국(斯二岐國), 다라국(多羅國), 졸마국(卒麻國), 고차국(古嵯國-소가야), 자타국(子他國), 산반하국(散半下國-대가야), 걸손국(乞飡國), 임례국(稔禮國)이라하여 임나가 일개국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연맹체를 지칭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임나라는 말은 가야제국중 일부의 연맹체이고 가야는 가야국중 가장 번성하여 실제적인 지도국가였던 금관가야를 지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를 총칭하는 말로써 임나가야, 혹은 임나가라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서 가야는 5국 혹은 6국으로 나타나는데 6국의 경우

금관가야(金官, 伽落國, 伽耶 : 金海), 아라가야(阿羅伽耶, 阿耶伽耶, 阿尸良國, 阿那加耶 : 咸安) 고령가야(古寧伽耶, 咸寧, 古寧), 대가야(大伽耶, 伴跛國, 高靈, ), 성산가야(星山伽耶, 京山, 碧珍, 一利郡(一云里山郡)), 소가야(小伽耶, 固城,古自) 이며, 5국의 경우에는 금관(金官, 金海府), 아라(阿羅), 고령(古寧, 加利縣), 비화(非火, 比自火, 高靈,昌寧), 성산(星山, 碧珍伽耶)으므로 결국 중간에 소멸된 소가야를 제외하면 양쪽이 일치한다.



<安羅人戍兵>□(拔)<新羅城><□(鹽,農)城>倭□(寇,滿)大潰. 城□(內)

□□□□□□□□□□□□□□□□□□盡□(更)□ 隨來 .

<安羅人戍兵>□(滿)□(羅)□(城)□□其□□□□□□□言

□□□□□□□□□□□□□□□□□□□□□□(倭)□(辭)□(出)□(殘)□(潰)□□(以) 隨 □<安羅人戍兵>


[번역]

고구려의 신라 주둔군(安羅人戍兵)이 신라성(新羅城)인 염성(鹽城)을 공격하니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중간 해독 불능) 모두가 고구려 주둔군을 따라 귀순해왔다.(중간 해독 불능) 이들 또한 고구려주둔군을 따라서 귀순해 왔다.


[해설]

본 기사는 탈락된 글자가 너무 많아서 정상적인 해독은 기대하기 힘들며 다만 부분적인 자구와 고고학적 발굴성과 등을 통하여 사건의 전모를 유추해 볼 수 있을 뿐이다.


본 기사에는 안라인 수병(安羅人戍兵)이라는 단어가 모두 세 번 등장하면서 왜구 토벌 및 가야 정벌 기사의 주연이 된다. 일본 역사계에서는, 일본서기의 임나(任那) 10국 중에 안라국(安羅國)이 있으므로 이를 안라국 병사로 보아왔다. 그러나 이를 안라국으로 보는데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

첫째로 고구려의 가야정벌에 있어서 안라국은 주적이 될 수 없다. 당시의 가야 맹주는 김해평야와 낙동강 하구 해상 교통 요지를 장악하고 있던 금관가야였으며 안라국, 혹은 아라가야는 금관가야에 비해 약소한 국가였다. 실제로 아라가야는 포상 8국(八浦上國)의 공격을 받자 신라 내해왕(奈解王)의 구원을 요청할 정도 였고 법흥왕 때 신라의 공격으로 멸망을 당하는 과정에서도 한줄의 기사가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그 지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낮았다.  그러므로 본 기사에서는 금관가야 혹은 총칭으로서의 임나가야가 고구려의 공격 대상으로 나타나야 하며 실제로 김해 고분 발굴 성과를 보더라도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것은 금관가야이다.

둘째로 고구려가 자기에게 적대적이었던 변방 소국을 표현하면서 안라인 수병이라  지칭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믿기 어렵다. 고구려가 주적인 백제와 왜국을 가리켜 백잔이나 왜구(倭寇)라고 표현하면서 굳이 그에 부회한 소국 안라국 군사만을 수병 운운했을 리는 없다.

셋째, 세번 본문에  나타난 안라인수병이라는 단어중 두번은 수래안라인수병(隨來安羅人戍兵)으로 판독되는데 여기서 수래(隨來)는 영락 20년 동부여 정벌 기사중 고구려에 귀순한 자들을 우기모화수관래자(又其慕化隨官來者)로 표현한 것과 같은 의미로 보아야 한다. 즉, 정복지의 누군가가 “안라인수병을 따라 귀순해 왔다“로 해석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안라인수병은 결코 안라국 군사가 아니며 고구려 군사이거나 적어도 고구려의 지휘를 받는 고구려 신라 연합군이어야 한다.

따라서 안라인(安羅人)은 “신라인을 지켜주는”이라는 의미이고 수병(戍兵)이란 국경 경비를 맡은 주둔군이라는 의미이므로 이는 신라 주둔 고구려군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본다. 충북 중원군 입석리에 있는 중원고구려비에는 신라토내 당주라는 직함이 보인다. 이는 곧 고구려가 신라 영토 내에 주둔군을 두고 있었다는 의미이며 신라토내당주가 거느린 주둔군이 바로 안라군 수병일 것이다.


그러면 이 때 가야에서는 어떤일이 일어났을까? 우선 그 결과부터 살펴보자. 최근의 가야지역의 고분 발굴 성과를 검토해보면 전기가야의 맹주인 금관가야가 있던 김해지역에서 최고 수장급의 묘제인 대형목곽묘는 대성동 고분군에서 보듯이 5세기 전반이후 그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같은 금관가야지역인 부산 복천동 11호분에서는 고구려 군사의 갑주류가 발굴되었다.

반면에 서기 400년을 시작으로 김해지역의 중간급 지배계층이 채택했던 수혈식석곽묘가 5세기 이후 대가야등 경상도 내륙 산간지방쪽으로 이동하여 후기가야의 최고 지배자계층의 중심묘제로 채용되었고 이 무덤에서는 이전까지 전혀 나타나지 않던 철갑옷, 환두대도 등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같은 시기에 일본에서는 가야 철갑옷의 정결기법이 갑자기 도입되고 철갑옷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이는 결국 고구려군의 침입 당시 가야의 맹주로서 주 공격 대상이 되었던 금관가야가 이 때 거의 괴멸되고 그 중간 지배계층이 대가야 지역과 일본열도로 이주하였음을 의미한다고 보여진다. 일본서기에는 고구려의 남정 직후인 14년(283년 -> 403년) 백제 궁월군(弓月君)의 기사가 보인다. 백제의 궁월군이 백제인 120현(縣)과 함께 왜국에 귀화하려고 했으나 신라가 방해하여 가라국에 체류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왜왕은 웅진언(熊津彦)을 보냈으나 3년간 돌아오지 않자 나중에 군대를 보내어 궁월군과 백제인을 데려왔다고 한다. 120현의 인부(人夫)라면 매우 많은 수인데 그 많은 이들이(그 것도 남자만) 왜국으로 귀화했다라거나 신라가 왜국행을 막을 수 있었다는 것, 이 많은 이들이 가야에 3년 간이나 체류하였다는 것은 뭔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추측컨데 고구려와 신라에 의하여 금관가야가 정복되면서 낙동강 상류 가야국의 왜국 항해로가 막힌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 때 왜국으로 가지 못한 120현의 인부는 백제인이 아니라 수래안라인수병(隨來安羅人戍兵)이라고 표현된, 즉 고구려에 의해 멸망한 뒤 해상으로 통하는 교통로가 끊긴 채 고구려와 신라에 복속당한 가야인들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 기사는 일본서기에서 5세기 이후 왜국에 급속도로 전파된 철제 무기류와 가야계 토기(스에키)의 전래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기사로 보인다.


따라서 이 때 가야에서는 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친 결과 그 맹주인 금관가야가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무너지고 가야지역의 남은 백성은 상당수 신라에 끌려가고 나머지는 왜국과 낙동강 상류로 도주하게 된 것이다.

 

[주석]


1) □來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城卽歸服. <安羅>人戍兵□<新羅城><□城>倭滿倭潰城□

사카와1889

自倭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城卽歸服. <安羅>人戍兵拔<新羅城><鹽城>倭寇大潰城內

주운대1981



昔, <新羅><寐錦>未有身來論事. □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新)□(羅)><寐錦>□家僕勾請□□□朝貢.


[번역]

자고 이래로 신라(新羅)의 매금(寐錦)이 몸소 내조(來朝)하여 섬긴 적이 없더니, 국강상광개토경 호태왕(에 이르러), 신라 매금(寐錦)이 가복(家僕)을 (이끌고) 와서 허리 굽혀 조공(朝貢)을 청하였다.


[해설]

광개토왕이 충주에 내려와 신라왕의 내조를 명하니 신라왕이 광개토왕에게로 와서 몸소 조공을 드렸다. 중원 고구려비에는 이 때 두 나라의 왕은 “원하노니 영영무궁토록 형제처럼 위아래가 화합하여 천하를 지키며...”(世世爲願,如兄如弟,上下相和,守天)라고 맹서하였다.

하지만 신라는 이를 크나큰 수치로 여겼으니 이를 은유하여 왕의 말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고 표현했다.


[주석]

1) 寐錦 : 마립간


十四年 甲辰. 而倭□(不)□(軌)侵入帶方界. □(和)□(通)□(殘)□(兵)□<石城>□連船□□□. □(王)□(窮)率□(往)□(討)□(從)<平穰>□□□鋒相遇. 王幢要截盪刺<倭寇>潰敗. 斬殺無數.


[번역]

영락 14년 갑진(甲辰, 서기404년))에 왜(倭)가 불궤(不軌)하여 대방(帶方)의 지경에 침입하였다. 왜는 (백제 군사와 함께) 석성(石城)에 배를 연결하여 ...(해독 불능)

왕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이를 토벌하니 평양(平壤)에 예봉(銳鋒)이 서로 마주쳤다. 왕의 군사가 들이쳐서 무찌르니 왜구(倭寇)가 무너져 패하였는데, 목베고 죽인  적이 헤아릴 수가 없었다.


[해설]

영락 14년의 기사는 왜구(倭寇)가 고구려의 황해도(黃海道) 지방에 침입하였다가 패한 사건으로서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당시에는 항해술(航海術)이 부족하여 배가 연안(沿岸)을 따라서 항해할 수밖에 없었고 대방(帶方)은 왜국에서 너무 멀어 보급이 곤란했을 것이므로 결국 왜국은 백제의 도움 없이는 고구려 까지 침입하지 못했을 것이다. 백제 아신왕은 이미 403년 7월에 군사를 보내어 신라의 변경을 치게하였고 이어 다음해인 404년에 왜구를 사주하여 고구려의 변경을 치게하는 등 국지적인 공세를 펼쳤다. 그럼으로써 백제는 고구려군을 분산시키고 북쪽으로부터의 직접적인 압박을 완화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해 12월에 광개토왕이 연(燕)나라를 친정(親征)한 것으로 볼 때 이 때의 왜구의 침입은 글자 그대로 해적질이었을 뿐 고구려에 대한 근본적인 위협이 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음 해인 405년에 백제의 아신왕이 죽었으며 이후 백제 개로왕(蓋鹵王) 15년(469년)까지 백제는 고구려에 대해 어떠한 군사행동도 하지 못하는 수세적 입장에 놓이게 된다. 일본 또한 응신 16년(405년) 이후 인덕 53년(485년) 까지 한반도에 침입한 사실이 한 번도 없는 것으로 보아 영락 14년의 왜구를 앞세운 대방계 침입은 백제가 고구려에 대하여 취한 마지막 연합 공세였다고 생각된다.

왜국이 대규모로 침입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가 이를 왜구라고 칭한 것은 이들의 침입 목적이 영토의 확보가 아니라 일시적인 약탈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왜국이 한반도에서 원한 것은 무역이었다. 6세기 까지 열도 내에서 철의 자급이 되지 않은 왜국에게 있어서 한반도의 철을 얻는 것은 국운이 걸릴만큼 중요한 일이었고 그 밖에도 한반도의 선진적 문물은 왜국 지배층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신공 51년 (251->371년)일본황후는 “내가 친교하고있는 백제국은 하늘이 내리신 것이다.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일본에는 아직 없던 호완진물(玩好珍物)을 세시를 끊이지 않고 항상 가지고 와서 바치고 있다. 나는 이 지성을 생각하면 항상 기쁠 뿐이다. 내가 살아있을 때 뿐만 아니라 나의 사후에도 항상 은혜를 가하라.” 고 말하고 있다. 또한 근초고왕이 왜국을 동맹자로 끌어들이면서 보물창고를 보여주고 “곡나(谷那)의 철(鐵)을 파서 진상” 운운한 것도 왜국의 관심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게해준다.


[주석]

1) 帶方界 : 지금의 황해도 지방

2) 連船 : 배를 잇대었다는 것이니 

4) 石城 : 보장왕(寶臧王) 6년 7월에 당(唐)나라 우진달(牛進達)과 이해안(李海岸)은 누선(樓船)에 군사를 태우고 내주(萊州)에서 출발하여 고구려의 석성(石城)을 함락시키고 적리성(積利城)을 공격한다. 이 때의 석성이 본문 기사의 석성과 같은 곳일 것이다.

5) 平穰 : 과거 평양으로 불린 곳은 현재의 평양 뿐만이 아니었다. 양주 또한 평양으로 불리었다, 漢陽郡 本高句麗北漢山郡(一云平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평양은 지금의 북한 평양이다.

6) 王幢 : 왕의 깃발이니 곧 왕의 친위군, 혹은 친정군을 의미한다.


文武王 11년 六月 遣將軍竹旨等 領兵踐百濟加林城禾 遂與唐兵戰於石城


十七年 丁未, 敎遣步騎五萬□□□□□□□□□(王)師□(四)□(方)合戰斬殺 

蕩盡所. 穫기鉀一萬餘領軍資器械不可稱數. 還破<沙溝城><婁城><□(牛)□(佳)城><□城><□□□□那□城>

 

[번역]

영락 17년 정미(407년)에 하교(下敎)하여 보병(步兵).기병(騎兵) 5만 명을 보내니 (중간 해독 불능) 사방에서 합전(合戰)하여 목베고 죽여서 다 쓸어 없애니, 노획한 투구와 갑옷이 1만여 벌이요, 군사 물자(物資)와 기계(機械)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군사를 돌이켜 다시 사구성(沙溝城), 누성(婁城), □□성(□□城), □□□□나□성(□□□□那□城)을 쳐부수었다.


[해설]

본문에는 공격 대상을 적은 부분이 마모되어 영락 17년 기사가 과연 어느 나라를 공략한 기사인지 명확하지 않다. 일부는 이를 영락 11년에 있었던 후연 숙군성(宿軍城) 공략기사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는 연대가 6년 차이가 나므로 수긍하기 힘들다. 이 때 획득한 사구성(沙溝城)을 백제의 전지왕(腆支王)이 재위 13년에 쌓은 사구성(沙口城)으로 본다면 이는 백제공략 기사일 것다. 삼국사기 신라 실성왕 6년(407년) 때에 왜구가 3월과 6월에 각각 변경을 침입한 기사와 연결지어보면 고구려는 왜구를 격파하고 돌아오면서 백제의 성을 탈취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甘年 庚戌, <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 中叛不貢, 王躬率往討. 軍到<餘城>, 而<餘城>國駭□(服)□(獻)□(出)□□□□□□. 王恩普□(覆)於是旋還. 又其慕化隨官來者<味仇婁鴨盧><卑斯麻鴨盧><□社婁鴨盧><肅斯舍鴨盧><□□□鴨盧>. 凡所攻破城六十四, 村一千四百


[번역]

20년 경술(庚戌年, 서기410년). 동부여(東夫餘)는 옛날에 추모왕(鄒牟王)의 속국(屬國) 백성이였는데 중도에 배반하여 조공(朝貢)하지 않았다. 왕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였다. 군사가 부여성(餘城)에 이르니 부여성(餘城)의 온 나라가 놀라서 나아와 항복하였다.  왕이 은혜를 널리 편 뒤 군사를 돌이켰다. 또한 그 왕의 덕(德化)를 사모(思慕)하여 관군(官軍)을 따라 온 자는 미구루압로(味仇婁鴨盧), 비사마압로(卑斯麻鴨盧). (□)사루압로(□社婁鴨盧), 숙사사압로(肅斯舍鴨盧), □□□압로(□□□鴨盧)였다. 무릇 공격하여 깨뜨린 성이 64곳이요, 촌락(村落)이 1천 4백 군데였다.


[해설]

최초의 동부여(東扶餘)는 북부여(北扶餘) 해부루왕(解夫婁王)이 동해에 접한 가섭원(迦葉原)으로 천도하여 세운 나라이다. 동부여가 추모왕의 속민이라는 것은 과장에 지나지 않으며 오히려 추모가 동부여의 속민이었다. 그러나 이 때의 동부여는 고구려 무휼(無恤)이 금와왕의 아들 대소(帶素)를 죽이고 멸하였다. 광개토왕 당시의 동부여는 4세기 중반 모용(慕容)씨에 쫒긴 북부여의 잔류세력이 이동하여 성립된 것으로서 그 위치는 길림성(吉林省) 일대로 보인다. 이 때 얻은 성이 64곳이요, 촌락(村落)이 1천 4백 군데인데도 불구하고 백제 공략기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비중으로 처리된 이유는 동부여가 원래 고구려의 영토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석]

1) 餘城 : 동부여의 국성. 삼국지는 魏略을 인용하여 부여는 국새에 예왕지인(濊王之印)이라 새기고 국성을 예성(濊城)이라고 한다 하였으니 예(濊)는 곧 여(餘)이다.

2) 鴨盧 : 삼국유사에는 賈耽郡國志를 인용하여 발해국(渤海國)의 4부중에 압록(鴨淥)이 있다고 했다. 또한 요수(遼水)를 일명 압록(鴨淥)이라고 한다 하였으니 압로는 길림성 남쪽 압록강(鴨淥江)에 접한 지역의 부족이라 생각된다.


守墓人煙戶,

<賣勾余>民 國煙二 看煙三, <東海賈>   國煙三 看煙五, <敦城>民 四家盡爲 看煙, <干城> 一家爲 看煙, <碑利城> 二家爲 國煙, <平穰城>民 國煙一 看煙十, <此連> 二家爲看煙, <俳婁>人 國煙一 看煙卅三, <梁谷> 二家爲看煙, <梁城> 二家爲看煙, <安夫連> 甘二家爲看煙, <改谷> 三家爲看煙, <新城> 三家爲看煙, <南蘇城> 一家爲國煙.

新來<韓穢>,

<沙水城> 國煙一 看連一, <牟婁城> 二家爲看煙, <豆比鴨岑韓> 五家爲看煙, <句牟客頭> 二家爲看煙, <求底韓> 一家爲看煙, <舍蔦城>韓穢 國煙三 看煙 甘一, <古模耶羅城> 一家爲看煙, <□(莫)古城> 國煙一看煙三

<客賢韓> 一家爲看煙, <阿旦城><雜珍城> 合十家爲看煙, <巴奴城>韓 九家爲看煙, <臼模廬城> 四家爲看煙, <各模盧城> 二家爲看煙, <牟水城> 三家爲看煙, <幹氐利城> 國煙一 看煙三, <彌鄒城> 國煙一 看煙□(七), <也利城> 三家爲看煙, <豆奴城> 國煙一 看煙二, <奧利城> 國煙二, 看 煙八, <莫鄒城> 國煙二 看煙五, <百殘>南居韓 國煙一看煙五, <大山韓城> 六家爲看煙, <農賣城> 國煙一 看煙七, <閏奴城> 國煙二 看煙甘二, <古牟婁城> 國煙二 看煙八, <瑑城> 國煙一 看煙八, <味城> 六家爲看煙, <就咨城> 五家爲看煙, <彡穰城> 甘四家爲看煙, <散那城> 一家爲 國煙, <那旦城> 一家爲看煙, <勾牟城> 一家爲看煙, <於利城> 八家爲看煙, <比利城> 三家爲看煙, <細城> 三家爲看煙.


능묘(陵墓)를 지키는 연호(烟戶)는 매구여(賣勾余) 백성으로 국연(國烟)이 2가(家), 간연(看烟)이 3가(家)이고, 동해고(東海賈)는 국연이 3가, 간연이  5가이고, 돈성(敦城)의 백성은 4가(家)가  모두 간연이 되고, 간성(干城)은 1가(家)가 간연이 되며, 비리성(碑利城)은 2가(家)가 국연이 되고, 평양성(平穰城) 백성은 국연이 1가, 간연이 10가이고, 차련(此連)은 2가(家)가 간연이 되고, 배루인(俳婁人)은 국연이 1가, 간연이 33가이고, 양곡(梁谷)은 2가(家)가 간연이  되고, 양성(梁城)은 2가(家)가 간연이 되고, 안부련(安夫連)은  22가(家)가 간연이 되고,

개곡(改谷)은 3가(家)가 간연이 되고, 신성(新城)은 3가(家)가 간연이 되고, 남소성(南蘇城)은 1가(家)가 국연이 되었다.

 새로 들어온 한(韓), 예(穢)로서 사수성(沙水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1가이고, 모루성(牟婁城) 2가(家)가 간연이 되고, 두비압잠(豆比鴨岑)의 한(韓)은 5가(家)가 간연이 되고, 구모객두(句牟客頭)는 2가(家)가 간연이 되고, 구저(求底)의 한(韓)은 1가(家)가 간연이 되고,  사조성(舍蔦城)의 한예(韓穢)는 국연이 3가, 간연이 21가이고, 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은 1가(家)가 간연이 되고, 막고성(莫古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3가이고, 객현(客賢)의 한(韓)은 1가(家)가 간연이 되고, 아단성(阿旦城) 잡진성(雜珍城)은 도합 10가(家)가 간연이 되고, 파노성(巴奴城)의 한(韓)은 9가(家)가 간연이 되고, 구모로성(臼模盧城)은 4가(家)가 간연이 되고, 각모로성(各模盧城)은 2가(家)가 간연이 되고, 모수성(牟水城)은 3가(家)가 간연이 되고, 간저리성(幹氐利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3가이고, 미추성(彌鄒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7가, 야리성(也利城)은 3가(家)가 간연이 되고,  두노성(豆奴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2이고, 오리성(奧利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8가이고, 모추성(莫鄒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5가이고, 백잔(百殘)의 남쪽에 사는 한(韓)은 국연이 1가, 간연이 5가이고, 대산한성(大山韓城)은 6가(家)가 간연이 되고, 농매성(農賣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7가이고,  윤노성(閏奴城)은 국연이 2가, 간연(看烟)이 22가이고, 고모루성(古牟婁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8가이고, 녹성(琭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8가이고, 미성(味城)은 6가(家)가 간연이 되고, 취자성(就咨城)은 5가(家)가 간연이 되고, 삼양성(彡穰城) 24가(家)가 간연이 되고,  산나성(散那城)은 1가(家)가 국연이 되고, 나단성(那旦城)은 1가(家)가 간연이 되고, 구모성(勾牟城)은 1가(家)가 간연이 되고, 어리성(於利城)은 8가(家)가 간연이 되고, 비리성(比利城)은 3가(家)가 간연이 되고, 세성(細城)은  3가(家)가 간연이 된다.


[해석] 

이상은 광개토왕의 능묘를 지킬 수묘인의 명단이다. 이는 광개토왕의 정복지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지만 아직은 위에 나열된 성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앞서 왕이 정복한 백제의 58성과 비교해 보면 서로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상당히 있다.

 

[주석]

1) 韓穢 : 한(韓)은 반도안의 삼한(三韓)민족을 의미하며 예(穢)는 고구려와 그 동류인 동예 등을 의미한다. 비문에서는 한(韓)이라는 단어와 한예(韓穢)라는 단어가 사용되는데 한예는 한과 예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광개토왕은 한예의 백성을 수묘인으로 취하라했으며 여기에는 한이 당연히 포함된 의미였기 때문이다.

      <三國志-魏書-烏丸鮮卑東夷傳>

      桓靈之末, <韓濊>彊盛, 郡縣不能制, 民多流入<韓國>

2) 百殘南居韓 : 글자 그대로 보면 이는 금강 이남에 거주하던 후기 마한을 의미하지만 광개토왕이 이곳을 공략한 기록이 없다. 따라서 가야지역의 변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3) 國烟, 看烟 : 국연(國烟)과 간연(看烟)은 모두 능묘(陵墓)를 수호(守護)하는 관역(官役)이었다. 국연은 관직이고 간연은 그에 딸린 백성이라 하나 아직 그 의미는 불명하다.


<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存時敎言, 祖王先王但敎取遠近舊民守墓灑掃. 吾慮舊民轉當贏劣. 若吾萬年之後, 安守墓者但取吾躬巡所略來<韓穢>令備灑掃. 言敎如此是以如敎令取<韓穢>二百甘家. 慮其不知法則, 復取舊民一百十家, 合新舊守墓. 戶<國煙>卅<看煙>三百, 都合三百卅家. 自上祖先王以來墓上不安石碑. 致使守墓人煙戶差錯. 唯<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盡爲祖先王, 墓上位碑銘其煙戶不令差錯. 又制守墓人自今以後不得更相轉賣. 雖有富足之者亦不得擅買其. 有達令賣者刑之買人制令守墓之


[번역]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살아계실 때 하교(下敎)하시기를, "나의 선조께서는 ‘다만 원근(遠近)의 옛날 백성들만을 취(取)하여 묘(墓)를 지키고 소제(掃除)하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는 이들 옛 백성들이 점차 줄어들까 염려된다. 내가 죽은 뒤에 묘를 지킬 자들은 다만 내가 몸소 돌아다니면서 정복해 온 한(韓), 예(穢)를 취하여 쇄소(灑掃)하는 데에 갖추게 하라."고 하였다. 말씀하신 바가 이와 같았으므로 하교(下敎)하신 대로 한(韓), 예(穢) 2백 20가(家)를 취(取)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예법(禮法)을 알지 못할까  염려하여 다시 옛 백성 1백 10가(家)를 취하니 신구(新舊)의 묘(墓)를 지키는 호(戶)를  합하면 국연(國烟)이 30가(家), 간연(看烟)이  3백가(家) 도합  3백 30가(家)이다.  위로 선조이래로 능묘 위에 비석(碑石)을 세우지 아니하여서, 능묘를 지키는  사람의 연호(烟戶)가 잘못되는 수가 있게 되었다.  오직 국강상 광개토경 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께서 조왕(祖王).선왕(先王)을 극진히 위하여 능묘 위에 비명(碑銘)을 세우고, 그 연호(烟戶)가 잘못되지 않게 하였다. 수묘인에게 명하여 이제부터 이후로는 토지를 수묘인 서로간에 팔지 못하게 하며, 아무리 부유한 자가 있을지라도 또한 마음대로 사지 못한다. 법령을 어기고 파는 자가 있으면 파는 자는 처형하고, 사는 자는 명하여 능묘를 지키게 한다.



<광개토왕비 약사>


1880년 이전

조선시대에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39,註解) 지봉유설(芝峰類說) 등에는 집안지방에 皇城이 있으며 그 북쪽 7리되는 곳에 비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를 여진족의 유적으로 오인하고 있었다.


1880년경 만주지역의 封禁이 풀린 뒤 청나라 농부에 의하여 발견된 비를 關月山이 조사한 뒤 비의 부분적인 탁본이 북경의 금석학계에 소개됨


1882년경에 만주를 정탐여행중이던 일본군 參謀本部의 밀정 포병중위 酒勾景信(사까와 카게노부)에 의하여 쌍구본 제작 일본 유입.


1889년에 어용기관지인{會餘錄} 5집을 통해 비문 내용을 세상에 처음으로 공표.


1899년경부터는 일,청 양국에서 선명한 탁본을 얻고자 비면에 석회칠을 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비면의 마멸과 일부문자가 오독되기에 이르렀다.


1928년 집안현 지사였던 유천성(劉天成)등이 2층 비각을 세움


1976년에 관리소홀로 2층비각이 소실되어 비문 일부도 훼손되었을 뿐만 아니라 능비 자체가 크게 훼손.


1982년 새로 건립된 단층의 대형 비각속에 보존.



탁본의 종류


1) 사까와 쌍구가묵본(酒勾雙鉤加墨本) : 일본 참모본부의 밀정인 사까와가케노부(酒勾景信)중위임의로 문자를 판독한뒤 비문에 종이를 대고 문자의 테두리를 그린 이후 문자의 바같쪽을 먹물로 칠하여 가공한 것으로 묵수곽전본(墨水廓塡本)으로도 불리운다.



2) 원석정탁본(原石精拓本)


천진(天津)이나 북경(北京)에서 전문 탁공이 파견되기 시작한 1882년 이후의 일인 데,지금까지 알려진 초기 원석탁본은 불과 4-5종에 지나지 않아 능비연구의 최대 난관이 되어 왔다.

일본의 미즈다니(水谷悌二郞)씨가 소장하였던 탁본,대만 부사년도서관 소장

탁본,한국의 임창순소장 탁본,최근에 발견된 중국의 북경대학 소장탁본등은

탁출년대에 약간의 異論이 있으나, 능비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자료인 능비 발견

초기의 원석탁본으로 비교적 선본(善本)들이다.



3)석회가공탁본(石灰加工拓本)

능비가 발견되어 얼마 지나지 않은 1900년대부터 청,일(淸日)양국에서 탁본의

고가매매(高價賣買)와 참모본부의 해독을 은폐하기 위한 목적으로 비면에 진흙을

바르거나 석회칠(石灰塗付)을 하기도 하여,'누가 무슨 목적으로 이러한 짓을

하였을까?' 하는 비문변조 문제를 둘러싸고 한일학계의 쟁점이 되어왔다. 오늘날

남아 있는 대부분의 탁본이 석회칠을 한 후의 탁본이며,지금도 비면의 일부에는

석회의 흔적이 남아 있어 비문연구의 장애가 되고 있다.


4) 최근의 대표적 탁본


최근에 들어와 현대적 기법에 의해 새로운 원석탁본이 중국에서 만들어 지기

시작하였는 데 장명선탁본(張明善拓本,1963년)과 주운태탁본(1981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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