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句麗

계루부-소노부-절노부-순노부-관노부

吾心竹--오심죽-- 2010. 1. 29.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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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hnos44 님의 답변

(국사,사학 4위) | 2009-10-16 08:27

5부족은(5부) 부여의 경우와 같이 고구려 형성에 주축이 된 씨족집단이었다. 5부족의 명칭은 소노부(消奴部)·계루부(桂婁部)·절노부(絶奴部)·관노부(灌奴部)·순노부(順奴部)이다.

처음에는 5부족 중 가장 우세한 소노부에서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6대 태조왕(太祖王) 때부터 계루부의 고씨(高氏)가 왕위를 이었으며, 절노부는 왕실과의 혼인을 통하여 왕비족으로 고정화되었다. 전왕족(前王族)인 소노부, 왕족인 계루부·절노부의 대가(大加)에게는 고추가(古雛加)라는 특별 칭호를 주었는데, 이들의 세력도 막강하였다.

가. 계루부

내부(內部)·황부(黃部)라는 별칭이 뜻하는 바와 같이 고구려 5부의 중심을 이루었다. 처음에는 소노부(消奴部)에서 왕위를 차지하다가 AD 53년 즉위한 제6대 태조왕(太祖王) 때부터 왕위교체가 이루어졌다.

태조왕의 왕위계승은, 포악한 군주로 이름난 모본왕(慕本王)이 근신에 의해 살해된 다음 모본왕에 태자가 있었음에도 제쳐두고 방계인 제2대 유리왕의 왕자 재사(再思)의 아들인 7세의 태조왕을 옹립하였다는 점과, 계루부의 초대왕인 그에게 건국의 시조에 해당하는 ‘태조’라는 왕호와 ‘국조(國祖)’라는 별호를 주어, 그로부터 정통왕(正統王)을 이으려 하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정치적 역학관계가 작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부터 왕족인 계루부의 대가(大加)들은 고추가(古鄒加)라는 특별 칭호를 가지게 되었고, 고구려 5부의 중추적인 세력이 되었다.

나. 소노부

부족은 부여의 경우와 같이 고구려 형성에 주축이 된 씨족집단이었다. 5부족의 명칭은 소노부(消奴部)·계루부(桂婁部)·절노부(絶奴部)·관노부(灌奴部)·순노부(順奴部)이다.

처음에는 5부족 중 가장 우세한 소노부에서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6대 태조왕(太祖王) 때부터 계루부의 고씨(高氏)가 왕위를 이었으며, 절노부는 왕실과의 혼인을 통하여 왕비족으로 고정화되었다. 전왕족(前王族)인 소노부, 왕족인 계루부·절노부의 대가(大加)에게는 고추가(古雛加)라는 특별 칭호를 주었는데, 이들의 세력도 막강하였다.

고국천왕(故國川王)은 왕위의 형제상속제를 부자(父子)상속제로 바꾸었으며, 5부족제도를 5부의 행정구역으로 개편하였다. 지방 행정구역 역시 5부로 나누어 각 부의 밑에는 여러 성(城)이 딸려 있었다. 각 부의 장을 욕살(褥薩)이라고 하였으며, 성의 장을 처려근지(處閭近支) 또는 도사(道使)라 하였다.

위지(魏志)에 따르면 소노부는 종묘(宗廟)를 가지고 있고, 따로 영성사직(靈星社稷)을 모시고 있었으며, 197년(산상왕 1) 고국천왕(故國川王)이 죽고 그의 둘째 아들이 산상왕(山上王)으로 즉위하자 산상왕의 형 발기(拔奇)가 불복하고 난(亂)을 일으켰을 때 소노부는 발기편을 돕다가 발기가 패하고 죽자 3만여 구(口)가 고구려 부족연맹에서 이탈하여 공손강(公孫康)에게 신속(臣屬)하였다

다. 절노부

왕위가 세습되었던 계루부(桂婁部)와 대대로 혼인관계를 맺어 부족장인 적통대인(適通大人)은 고추가(古鄒加)라는 귀족의 칭호를 받아 계루부·소노부(消奴部)와 함께 세력이 강한 부족의 하나였다. 후에 5부가 수도의 행정구역으로 변함에 따라 북부 혹은 후부(後部)로 개칭되었다.

라. 순노부

《삼국지》등 중국기록에서만 발견되는 순노부는 《삼국사기》에 보이는 환나부(桓那部)와 동일한 실체로 파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환나부 출신의 인물들이 1세기 무렵인 태조 때부터 패자(沛者)·우태(于台) 등 높은 관계(官階)를 수여받고 활발하게 활동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이 무렵에 이미 고구려 5부의 하나로 편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환나부는 다른 부와 마찬가지로 계루부(桂婁部) 왕권의 통제를 받으면서도 대내적인 자치권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3세기 중엽 이후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를 정비하면서 5부의 명칭도 방위명(方位名)으로 개칭되면서 그 성격도 왕도(王都)의 행정구역으로 변질되었는데, 이때 순노부는 동부(東部)로 변경되었다.

순노부는 이 밖에도 좌부(左部)·상부(上部)·청부(靑部)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한편《한원(翰苑)》에 인용된《위략(魏略)》에는 내부(內部:계루부)가 비록 왕족이지만 그 서열은 동부, 즉 순노부의 아래라 하였는데, 그 까닭은 나라에서 동쪽을 으뜸으로 섬기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종래에는 이것을 순노부가 국가적 제의(祭儀) 행사에서 특별한 위치에 있었던 사실과 연관시켜 해석하기도 하였다.

마. 관노부

관노부는 알려진 기록이 극히 드문데 고구려는 원래 5부족이 연합하여 이루어진 나라로, 소노부(消奴部)·절노부(絶奴部)·관노부·계루부(桂婁部)·순노부(順奴部)가 있었다. 이 중 소노부와 계루부가 가장 세력이 강하였고, 관노부는 세력이 가장 약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의 귀족사회

 

 귀 족

고구려는 혈연 및 지연공동체인 那의 연합체를 중심으로 하여 고대국가로 성장해 갔다. 따라서 국가의 중심 那가 어느 것이었느냐 하는 문제는 있지만 적어도 5部를 이룬 5개 나의 족장층이 자연히 국가체의 지배층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加라는 ‘족장’ , ‘왕’의 의미를 갖는 官名을 갖고, 대대로 소속 집단에 대하여 지배권을 행사하면서 그 힘을 바탕으로 중앙정부에서 일정부분의 권력을 향유할 수 있었다. 이들 중에는 중앙정부에서 구체적인 관직을 갖는 이도 있었지만 그의 가계가 갖고 있는 본래의 지배력에 의해 중앙에서도 그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들은 국초에는 ‘兄’이라는 명칭을 띠고 있는 관직을 차지하였는데 점차 보다 전문적인 관직이었을 ‘使者’류의 관직에도 취임하게 되었다.이들 귀족들은 국초에서부터 이미 5부의 귀족층 내에서만 혼인을 하여 배타적인 지배층을 구성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고구려초에 계루부 왕실과 연나부 明臨氏와의 지속적인 혼인관계도2) 이같은 동일신분내 결혼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귀족은 5부 나아가 본래의 5나의 족장층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국가의 영토가 확장되면서 새로 편입된 지역의 대족장층의 일부도 귀족에 편입되었을 것이다.《三國史記》태조대왕본기 22년조에 의하면 藻那를 정벌하고 그 왕자를 포로로 하였는데 그를 古鄒加로 삼았다는 사실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이외에도 안악 3호분과 관련된 선비족 출신의 冬壽와 같은 자는 고구려에 투항하여 상당한 예우를 받는 귀족으로 살아 갔음을 볼 수 있다.

귀족들은 성씨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가계의 출현을 설명해주는 나름의 설화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이는 만큼, 자신들의 존재에 대한 자부심 속에서 동아시아의 왕족이나 지배층들이 가지고 있던 성씨를 갖게 되었다. 성씨는 대개 그들의 출현의 연원과 관련이 있었다. 왕실의 解씨나 高씨, 왕비족이었던 연나부의 于씨는 물론이고, 샘에서 나왔다는 연개소문가의 淵씨를) 위시하여, 많은 밥을 짧은 시간에 할 수 있는 성능좋은 쇠솥을 가지고 있었다는 負鼎씨,그리고 지역의 족장이나 유력자로서 성씨를 갖게 된 克씨 , 仲室씨 , 少室씨 , 大室씨 등이 그것이다.5) 특히 대실씨 , 중실씨 , 소실씨라는 성씨에서는 이들 성씨의 명칭에 상호 대비되는 면이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 3성씨의 성씨 취득과정의 순서나 이들 귀족들의 세력의 정도가 성씨명에 반영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같은 고구려의 귀족은 성씨를 갖는 존재들인 만큼, 그 귀족들의 가계와 연원 등이 적혀있는 일종의 귀족 씨족의 명부인 성씨록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인다.《삼국사기》에 성씨 취득의 연원들이 적지않게 보이고 있는 것은 바로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성씨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귀족들은 소속된 가문의 힘과 자신의 능력에 따라 국가의 주요관직을 독점하였다. 왕족의 경우 좀더 우대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들의 관직 취임에 제한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체로 5부의 중심귀족들은 자기 부의 세력과 본인의 능력에 따라 모든 관직에 취임할 수 있었다. 집안의 권력이 클수록 初任의 관등을 보다 적은 나이에 받은 듯하며 승진에도 유리하였다. 연개소문의 아들 男生은 불과 9세에 先人이라는 최하급 관등을 가진 이래 15세에 中裏小兄, 18세에 中裏大兄을 거쳐 승진을 거듭하여 28세에 莫離支에 올랐다

내용출처 : ] http://goguryeo.history.go.kr/sub1_13.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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