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句麗

광개토대왕의 왜구 토벌전

吾心竹--오심죽-- 2010. 2. 8. 15:38

 

 

광개토대왕의 왜구 토벌전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말하다보면, 흔히 그가 벌인 대외정복사업에 치중하곤한다. 물론 광개토대왕은 서쪽방면으로는 거란을 북쪽방면으로는 동부여를, 동쪽방면으로는 숙신(=읍루)족을, 남쪽방면으로는 백제를 공략하여 왕국의 영토를 넓히고 동방의 패권국으로 고구려를 일으켜 세웠다.
 그런데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릉비의 기록이 다소 차이가 있는 부분이 있는데, 두 기록다 백제와 고구려의 전쟁을 가장 집중적으로 다루었다는 점은 공통적이지만, 삼국사기에서는 관미성 전투를 비중있게 다른 반면,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아리수 방면 전투를 더욱 비중있게 다루었다.

  하지만 이에 못지 않게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광개토대왕의 왜구 토벌전쟁이다. 비록 삼국사기에는 나와있지 않고, 오직 대왕릉비문에만 나와있는 왜구와의 전쟁,
그렇다면 서기 5세기 고구려의 세기가 시작되던 400년 한반도에는 어떤일이 벌어지고 있었는가?

 우선 광개토대왕비문에는 백제에 대한 원정을 왜구의 남해안 진출에서 그 대의명분을 찾고 있다.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있다.

백잔(百殘)과 신라(新羅)는 옛적부터 (고구려의) 속민(屬民)으로서 조공(朝貢)을 해왔다. 그런데 왜(倭)가 신묘년(辛卯年, 391)에 건너와 백잔(百殘0을 파하고(2字缺) 신라(新羅) … 하여 신민(臣民하여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영락(永樂) 6년(396) 병신(丙申)에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百殘國)을 토벌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국사학계와 일본사학계간에 오랜 논쟁이 되어 오는 것이 辛卯年, 391 년의 기사이다. 그 원문을 그래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倭人 辛卯年 渡海破百殘 ??新羅 以爲臣民 
 

왜인이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 백잔(백제)를 쳤다. ...?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그런데 중간에 글자가 완전히 파손되어 도저히 해석할 수 없는 글자가 두개있다. 따라서 과연 백제를 치고, 신라를 신민으로 삼은 주체가 일본인지 아니면 또 다른 세력인지 정확하게 단정지을 수 없고 해석도 제각각이다.
 여기에 일부 학자들은 일제시절 일본학자들에의한 의도적인 왜곡을 지적하지만 확인할 길이 없는 실정이어서, 단순히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과장하거나 당시 원정의 대의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이 같은 표현을 썼다는 주장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다음 문장에 광개토 대왕이 직접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토벌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따라서 이 문장은 왜인이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오자(고구려가) 백제를 치고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즉 가장 압줄에 요약적으로 왕의 업적을 기술하고, 그 다음에 상세하게 표현하는 서술 방식을 취하였다는 주장이다. 이 같은 서실 방식은 서기 400년 대왕능비의 비문에서도 확인된다.

 여기에는 백제와 일본이 주종관계라기 보다는, 백제가 외교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우호협력관계였음을 고려해야 한다.
 이같은 주장은 399년 백제와 일본이 화통하였다고 표현한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정말 백제가 일본의 식민국이었다면 굳이 화합하여 통할 필요가 어디에 있겠는가? 


 영락(광개토대왕 9년(399) 기해(己亥)에 백잔(=백제百殘)이 맹서를 어기고 왜(倭)와 화통(和通)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平穰)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 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倭人)이 그 국경에 가득차 성지(城池)를 부수고 노객(奴客)으로 하여금 왜의 민(民)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歸依)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太王)이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고구려측의]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서 고하게 하였다.

 왜인 즉 일본의 신라침입은 항상 있어왔으며, 특히 가야나 백제의 후원 혹은 영향력에 의해서도 신라를 침입하곤 하였다. 신라는 몇번이고 위기를 잘 넘겼지만, 서기 4세기 말엽에는 신라 단독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것은 남방으로는 가야연맹이 강성하였으며, 서쪽전선으로는 백제의 공격이 지속되고 있었는데다가, 일본역시 가야나 백제의 영향을 받아 비교적 체제를 정비하고 고대지역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가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신라에게 알여준 계책은 무엇인가?

 그것은 강원도 지방을 경유하는 우회작전이었다.
 이에 광개토대왕비문에는 서기 400년에 있었던 대왜구 토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10년(400) 경자(庚子)에 왕이 보병(步兵)과 기병(騎兵) 도합 5만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남거성(男居城)을 쳐서 신라성(新羅城;國都)에 이르니, 그 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官軍)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城)이 곧 항복하였다. 안라인술병(安羅人戌兵) … 신라성□성(新羅城□城) … 하였고,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이하 77자 가운데 거의 대부분이 불명. 대체로 고구려군의 원정에 따른 임나가라 지역에서의 전투와 정세변동을 서술하였을 것이다).
옛적에는 신라 매금(寐錦)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보고를 하며 청명(聽命)을 한 일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대에 이르러 (이번의 원정으로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퇴하니) 신라 매금이 … 하여 (스스로 와서) 조공(朝貢)하였다
.


  고구려는 신라 영토를 경유하여 공격하였기 때문에 군사의 진격로를 전혀 예측할 수 없었을 뿐더러, 백제 가야 일본의 3국 연합군대이긴 하였지만 고구려의 5만대군을 감당할 수 있지는 않았다.
 더구나 백제는 아리수 전투에서 이미 고구려에 항복하고 군신관계를 체결하였기 때문에, 쉽사리 군대를 증파 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광개토대왕이 400년에 벌인 대 토벌작전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남해안을 넘보고자 하였던 일본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으며, 일본에게 거점을 제공하였던 가야세력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 때를  중심으로 등장하는 것이 일본의 임라일본수설이긴 한데, 이것은 이미 일본사학계에서 조차 사라져가는 학설로 다시 거론할만한 것이 못된다. 단지 현대적 개념으로 말하자면 가야는 일본에게 군사기지 정도를 제공한 것 이상은 아니라고 보여진다.

 이렇게 남방전선을 안정시키고 북방진출을 꾀할무렵, 고구려는 일본의 급작스런 기습을 받게 된다. 바로 4년후 벌어진 평양성 전투가 그것이다.

14년(404) 갑진(甲辰)에 왜()가 법도(法度)를 지키지 않고 대방(帶方) 지역에 침입하였다. … 석성(石城)(을 공격하고 … ), 연선(連船)(이에 왕이 대군을 끌고) 평양을 거쳐 서로 맞부딪치게 되었다.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를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하였다. (왜구를)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여기에서 연선이란 단어는 여러가지로 해석된다. 우선 직역하면 배가 연결되어 있다는 뜻인데, 당시 일본에서 고구려 평양성까지는 대단히 먼 항해길이었음으로, 수십에서 수백여척의 배를 연결시켜 건너 오기란 불가능하다.
 따라서 흔히 수군을 동원하였다는 뜻으로 생각되지만, 개인적으로는 배의 전투진형에서 유래 된 것으로 보여진다.

 배의 전투 진형중에는 마치 뱀모양같이 S자형의 한줄로 길게 늘어선 형태가 있는데 이것을 사행진이라 한다. 이것을 멀리서 관찰하면 마치 배가 연결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러한 표현을 쓰지 않았나 싶다.
 아무튼 왜구의 기습을 받은 고구려는 수군을 동원할 시간적 여유가 없았고, 수군을 동원한다고 해도 승리를 장담 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광개토대왕은 그들이 육지로 올라오도록 내버려 두었다.

 육지전에서라면 그들은 이미 오랜항해로 지쳐 있었고, 또 광개토대왕에겐 수차례의 전쟁에서 빛나는 승전을 거듭한 노련한 장수들과 병사들로 구성된 정예부대가 있었다.  따라서 평양성 전투에서의 승리는 고구려의 절대적인 승리고 끝나고 말았다.


  이렇게 두차례 걸친 대승리로 인하여, 두번다시는 일본이 고구려를 넘 볼 수 없도록하였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전체적인 정황으로 보아 백제의 요구에 의해서 치루어진 전쟁이었을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다른 나라의 힘을 빌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외교전략이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물론 당시 일본이 백제의 속국과도 같은 처지였다는 주장이 있긴 하지만 아직 확인되지는 않았고, 또 그것이 설령 사실이라 할지라도 일본에게 그 같은 강대한 힘을 갖게 해 준다면 그 이후의 역사를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서기 400년과 404에 광개토대왕이 왜구를 상대로 대승을 거둠으로써, 이땅을 온전하게 지켜 낼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