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句麗

[스크랩]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에 실린 광개토대왕비문의 내용에 관하여

吾心竹--오심죽-- 2010. 11. 8. 18:13

  필자는 유절의 《호태왕비고석》이란 논문을 번역 소개한 바 있다. 언제인가 조선말에 편찬된 우리의 《증보문헌비고》에서 백두산과 관련된 자료를 찾아 보다가 거기에서 광개토대왕의 비문이 실려 있는 것을 발견한 바 있었다. 그 내용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도 궁금할 뿐더러 벌써 우리나라에서 조선말에 이 비문의 내용을 입수하였는데 그 출처가 어떤 것인지 밝히지 않고 있으나 모든 것이 궁금하기만 하였다.

 

2. 《증보문헌비고》란 어떤 책인가 

 

   우선 《증보문헌비고》가 어떤 것인지 알아 보기로 하자.

 

   우리나라 조선 왕조 때 중국의 《문헌비고》를 본떠서 우리나라 상고로부터 대한제국 말기에 이르기까지 문물 제도를 분류 정리한 책으로 약칭 《문헌비고》라 하였다. 최초의 편찬은 1770(영조 46) 홍봉한(洪鳳漢) 등이 왕명에 의해 널리 공 · 사의 실기를 참고, 중국 마단림(馬端臨)의 《문헌통고》를 본떠서 상위 · 여지 · 예 · 악 · 병 · 형 · 전부 · 재용 · 호구 · 시적(市糴) · 선거 · 학교 · 직관 등의 13고(考)로 분류하여 100권을 편찬하여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라 하였다. 그러나 이 책은 약 반년간에 급조한 것인 까닭에 사실에 어긋난 점과 빠진 부분이 많을 뿐만 아니라 시대를 내려갈수록 법령과 제도가 많이 변경되었으므로 1782(정조 6)에 이르러 당시 박학다식으로 유명한 이만운(李萬運)에게 명하여 이를 보편하게 하니 이것이 제2차 편찬이었다. 이만운은 자기의 사택에 사자관을 놓고 9년의 세월을 요하여 《동국문헌통고》 13고 중 오류를 정정하고 탈락을 보수하였을 뿐 아니라 새로 물이 궁실 왕계 씨족 조빙 시호 예문 등 7고를 증보하여 146권을 편성하고 이를 《증보동국문헌비고》라고 명명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출판되지 못하고 100여년을 지나 고종 광무년간에 이르러 제3차의 보편을 맞이하게 되었다. 고종 시대에 우리나라는 일본과 서양의 문물을 수입하여 사회의 모든 제도를 근본적으로 혁식하였기 때문에 문헌비고의 각항을 다시 증보하지 아니할 수 없게 되니, 광무 7년(1903)에 특별히 찬집청(撰集廳)을 두고 박용대(朴容大) 등에게 30여 명의 문사에게 명하여 이를 보수하게 하였다. 박용대는 5년의 세월을 요하여 이만운이 편찬한 《증보동국문헌비고》의 20고 중 물이(物異)는 상위(象緯), 궁실(宮室)은 여지(輿地), 시호(諡號)는 직관(職官)에 붙이고, 왕계(王系)는 제계(帝系)로 고쳐서 씨족(氏族)을 붙이고 조빙(朝聘)을 교빙(交聘)으로 고쳐, 상위 · 여지 · 제계 · 예 · 악 · 병 · 형 · 전조 · 재용 · 호구 · 시적(市糴) · 교빙 · 선거 · 학교 · 직관 · 예문 등 16고(考) 250권을 편성하고 이를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라 하고 융희 2년(1909)에 출판하였다.(고전간행회, 《증보문헌비고》, 국학자료원 영인본 상권, 증보문헌비고영인본서문 참조) 

 

   망해가는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되면서 책 이름도 과거의 중국의 번병을 함축하는 동국(東國)이 아니라 그냥 당당한 대한제국의 문헌비고란 뜻으로 그냥 《증보문헌비고》로 탈바꿈하였고, 왕계가 아닌 왕제국의 제계(帝系)를 설정하였고, 옛날 중국에 조공이나 바치던 사대를 뜻하는 조빙(朝聘)이 아니라 대등한 나라끼리의 외교관계를 뜻하는 교빙(交聘)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속된 말로 철들자 망령이라고 조선의 위정자들은 그 동안 받들던 상전을 중국에서 일본으로 바뀌었을 뿐 이 책을 펴낸지 이태 뒤에 나라까지 통째로 이들에게 팔아 넘겨 35년간 그들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명치시대에 쓰여진 《대일본사(大日本史)》를 한번 보니까 우리나라는 고대로 일본의 번병인 번속(藩屬)으로 그들에게 조공을 바쳤던 나라로 덧칠해져 있는 것을 보고 피가 거꾸로 끓어 오르는 분노와 모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라에 힘이 없다보니 주변의 이웃나라들이 걸핏하면 변방의 우리를 저들의 번병이라고 돌아가면서 찢고 까부는 것이 가관이다.

 

   중국에서 동북변강연구 시리즈물로 나온 《호태왕비일천오백팔십년제(好太王碑一千五百八十年祭)》라는 경철화(耿鐵華)의 저술에는 광개토대왕비 연구에 관한 완결판이라 할 정도로 이 비문에 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다.(경철화, 《호태왕비일천오백팔십년제》, 중국사회과학원출판사, 74~96쪽 참조)

 

3. 경철화가 파악한 광개토대왕비문 탁본 소장자 

 

   (1) 중국측 소장자

 

       1) 여요동연증본(呂耀東捐贈本)

   현재 길림성 집안시 박물관 소장. 1928년 전후 탁본.

       2) 장명선탁본(張明善拓本) A

   현재 길림성 집안시 박물관 소장, 1963년 큰 모두지(毛頭紙: 섬유가 거칠고 질감이 부드러운 흰 종이)로 탁본을 완성했다.

       3) 장명선탁본(張明善拓本) B

   현재 길림성 집안시 박물관 소장, 1963년에 탁본하였고, 1991년부터 대외 전시를 시작했다.

       4) 장명선탁본(張明善拓本) C

   현재 중국문물국문박연구소 소장. A · B본과 원래 함께 탁출(拓出)했으며 지묵이 서로 갔다.

       5) 주운태탁본(周雲台拓本) A

   현재 길림성 문물고고연구소 소장. 1981년 7월에 탁본했다.

       6) 주운태탁본(周雲台拓本) B

   현재 길림성 집안시 박물관 소장. 시간은 성문물고고연구소 소장 A와 같은 해인데 이보다 약간 늦게 탁본이 완성됐다.

       7) 왕소잠장본(王少箴藏本)("王氏藏本"으로 간칭됨)

   현재 북경시 왕소잠선생 친척 집에 소장하고 있다.

       8) 북경도서관장본(北京圖書館藏本)("北圖本"으로 간칭됨)

   현재 북경도서관 선본부 소장.

       9) 북경대학도서관장본(北京大學圖書館藏本) A("北大 A本"으로 간칭됨)

   현재 북경대학도서관 선본실.

     10) 북경대학도서관장본(北京大學圖書館藏本) B("北大 B本"으로 간칭됨)

     11) 북경대학도서관장본(北京大學圖書館藏本) C("北大 C本"으로 간칭됨)

     12) 북경대학도서관장본(北京大學圖書館藏本) D("北大 D本"으로 간칭됨)

     13) 부사년도서관장본(傅斯年圖書館藏本) A

   현재 대만 중앙연구원 역사어연연구소 부사년도서관 소장.

     14) 부사년도서관장본(傅斯年圖書館藏本) B

   현재 대만 중앙연구원 역사어언연구소 부사년도서관 소장.

     15) 중앙도서관장본(中央圖書館藏本) A

   현재 대만 국립중앙도서관 특장실.

     16) 중앙도서관장본(中央圖書館藏本) B

   현재 대만 국립중앙도서관 특장실.

     17) 장엄장본(莊嚴藏本)

    

  (2) 국외소장 탁본

 

      1) 주구경신쌍구가묵본(사코오景信雙鉤加墨本)

   현재 일본 동경 국립도서관 소장. 1883년(청광서 9년, 일본 명치 16년) 가을, 일본 육군참모본부 간첩 사코오경신이 회인 통구(懷仁通溝)에 들어가서 호태왕비가 있는 현지에서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 1벌을 사들여서 일본에 가지고 들어갔다.

      2) 수곡제이랑장본(水谷悌二郞藏本)("水谷本"으로 간칭됨)

   현재 일본 수곡제이랑(水谷悌二郞) 고가에 소장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수곡제이랑탁본(水谷悌二郞拓本)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3) 수곡제이랑장전장본(水谷悌二郞剪藏本)

   현재 일본 수곡제이랑 구가에서 소장하고 있다. 수곡 선생은 이를 "수곡구장정탁본(水谷舊藏精拓本)"이라고 한다.

      4) 내등호차랑구장본(內藤虎次郞舊藏本)

   현재 일본 경도대학인문과학연구소에 소장하고 있다.

      5) 동양문화장본(東洋文化藏本)

   현재 일본 동경대학동양문화연구소에서 소장하고 있다.

      6) 금자구정장본(今子鷗亭藏本)

   현재 일본 금자구정 고가에서 소장하고 있다.

     7) 구주대학장본(九州大學藏本)

   현재 일본 구주대학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8) 상전정소장본(上田正昭藏本)

   현재 일본 경도대학교수 상전정소집에 소장하고 있다.

     9) 천리대학장본(天理大學藏本)

   현재 일본 천리대학도서관에 소장하고 있다.

    10) 족립행일장본(足立幸一藏本)

   현재 일본 족립행일 집에 소장하고 있다.  

    11) 목흑구장본(目黑區藏本)

   현재 일본 동경도 목흑구 수옥교육회관 향토자료실에 소장하고 있다.    

    12) 독매전시장본(요미우리텔레비젼藏本)

   현재 일본 요미우리텔레비젼주식회사에서 소장하고 있다.   

    13) 샤반느장본(沙琬藏本)

   현재 프랑스 모 도서관에 소장하고 있는데 과거에 샤반느탁본으로 불려졌다.    

    14) 장명선탁본(張明善拓本) D

   현재 북한 사회과학원에 소장하고 있는데 1963년도에 탁본이 완성되었다. 중국의 장명선탁본 A · B · C와 지질 기법이 똑 같다.    

    15) 임창순장본(任昌淳藏本)

   현재 한국 경기도 남양주군 지곡서당 임창순 집에 소장하고 있다. 이는 전장의 잔본이다.

    16) 국립중앙도서관장본(國立中央圖書館藏本)

  현재 한국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데 장본목록은 고조52-50이다. 원래 조선총독부 도서관에서 1933년 4월 10에 수장한 것으로 그 출처 정황이 불명하다.

    17) 서울대학교도서관장본

   현재 서울대학교 도서관 규장각에 소장하고 있다.

    18) 서울대학교도서관구장본

   현재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다.

    19) 서울대학교도서관신장본 

   현재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는데 편호는 1017이다. 이 탁본은 원래 삼전방부(三田方夫)가 1936년에 수장한 것이다.

  

등등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 자료 중 남 · 북한에 소장된 자료는 해외자료 15부터 19까지이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조선조 말이나 대한제국 시절에 어떤 형식으로든지 이 비문을 입수했었을 것인데 아직 어느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없다.

 

4. 《증보문헌비고》상으로 파악한 이 비의 관한 기술 내용

 

    《증보문헌비고》 권 36 여지고(輿地考) 속(續) 서간도강계(西間島疆界)란 항목에 광개토대왕 비문의 위치, 발견경위, 비문에 새겨진 글자의 수자 등이 아주 정확하게 파악되어 있다.

 

   "성경성 회인현 동구(洞溝: 통구) 등지는 곧 서간도의 지경 안으로 압록강(鴨綠江)과 접해 있거니와 구련성(九連城)과는 150리 떨어져 있는데 지금부터 3백여년 전에 산골짜기에서 비 하나가 발견되었다. 오늘에 이르러 금상(고종) 19년(1882)에 청나라 성경장군 좌종상(左宗裳)이 처음으로 사람을 고용하여 고구려광개토왕비문(高句麗廣開土王碑文)을 발견하였는데 그 비의 높이는 1장 8척, 남북 양면은 5척 6~7촌, 동서는 4척 5촌, 사면에 새겨진 문자는 남면은 11행, 서면은 10행, 북면은 13행, 동면은 9행 41자 도합 43행 1,759자이다. 그 비문은 간결하고 옛스러워 동사(東史)의 결문을 충분히 보완할 수 있는 것으로 황초령정계비문(黃草嶺定界碑文)과 더불어 같은 고적이므로 이에 이 비의 전문을 수록하여 참고의 자료에 대비하려고 한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서 알아야 할 것은 조선에서는 이미 3백여년 전에 그 비의 존재를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압록강 일대는 청나라 발상지라 하여 봉금(封禁)이 되어 아무나 들어가 살 수 없도록 되어 있었으며 우리 조선 사람들이 인삼을 캐기 위해 넘나들던 곳이었으며 그런 과정에서 이미 비의 존재를 알았던 것이 아닌가 한다.

 

5. 비문의 내용

 

   《고구려광개토왕》의 비문은 다음과 같다.

 

   惟昔始祖鄒母王之奠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母河伯女郞剖卵降出生子有聖<五字缺>命駕巡<一字缺>南下路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鄒母王爲木連

[출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에 실린 광개토대왕비문의 내용에 관하여 (만주원류고를 사랑하는 모임) |작성자 봉오선생

 

ぉ   필자는 최근에 중국학자 유절(劉節)(1901~1977) 교수가 1928년도에 《국학논총(國學論叢)》이란 학술지에 발표했던 《호태왕비고석(好太王碑考釋)》이란 제목의 논문을 정독하게 되었다. 사실 이 논문은 이미 Ssreader.com을 통해 진즉 입수했던 유절 선생의 논문집인 《고문고존(古文考存)》에 들어 있었던 여러 논문 중의 한 편이다. 이번에 이 논문을 번역하여 회원들에게 소개하고자 하는데 기히 읽었던 재일교포 학자 이진희씨의 일본군 참모본부의 첩보원 사카와(酒勾)1) 중위의 훈적비 석회도말설이라든가 정인보 선생의 "신묘년래도해파(辛卯年來渡海破)"와 관련 해석과 문제의 부분을 이 분은 어떻게 판독하고 해석하고 있는지 관련하여 매우 궁금하다.

 

1) 사카와(酒勾)는 일본인 사카와 경신(景信)이란 사람의 두자 성씨인데 술 주(酒)자 다음에 쓰는 굽을 구(勾) 비슷하게 생긴 글자는 일본에서 만들어 쓰던 한자이다. 원래 이 글자는 쌀포몸(勹 밑에 비수 비(匕)자를 한 글자로 어지간한 자전에는 잘 나오지도 않는 글자이다. 예전에 민중서관에서 나온 《에센스 일한사전(日韓辭典)》을 찾아보았더니 이 글자는 일본한자로 にぉう로 훈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무슨 냄새가 난다는 뜻이라고 해서 이를 술 주와 연결하면 술냄새, 즉 술의 향기란 뜻일터이지만 일본 사람들이 이 성씨를 과연 어떻게 읽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다시 일본의 속칭 《모로하시사전(諸橋辭典)》을 찾아보았더니 주구(酒勾)란 항목이 올려 있고, サカワ 姓氏.[和爾雅].로 되어 있다. 읽은 방법은 우리말 발음으로 사카와인 듯하고, 《화이아(和爾雅)》라는 책에 이런 성씨가 들어 있는 듯하다.(제교철차 저, 《제교사전(諸橋辭典)》 권11, 356쪽 참조)   

 

   5세기경 오늘날 압록강 대안에 있는 만주 집안현에 세워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훈적비에 대해서는 수많은 국내외의 학자들의 연구대상이 되어 왔었다. 특히 신묘년 기사와 관련하여 그 해석 문제를 두고 한일의 학자들 사이에 첨예한 대립이 있어 왔었다. 조선족 출신의 박진석 선생의 관련 연구도 있었으나 중국학자의 연구논문는 처음 접하는 것이다.

 

   필자는 역사를 전문으로 공부한 사람은 아니지만 역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로부터 괜찮은 책이라고 하면서도 국내에서 아무도 손대지 않은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를 번역하기 위해 국내외의 수많은 많은 자료를 수집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내외의 역사 관련 서적을 읽어 본 적이 있다. 우여곡절 끝에 만 2년여만에 역주를 마쳐 작년 10월에 출간되었다. 그때의 고생이란 필설로 말할 수 없다. 직장 일도 있고 해서 주로 꼭두새벽에 일어나 자료를 다운받고 또 컴퓨터 자판을 두드렸다. 다운받아 책으로 제본한 자료만도 70여 권에 달했다. 혼자 초고를 작성하고 교정도 혼자 했다. 한 마디로 북치고 장구치고 했다고나 할까. 그러는 과정에서 중국어로 된 어지간한 서물을 읽고 번역하는데는 어느 정도 이력이 나 있다.

 

   이번에 입수한 논문 자료는 분량만도 49쪽에 달하는 대작인데 과연 제대로 번역해 낼 수 있는지 걱정이 앞선다. 천학비재하나 최선을 다해 번역해서 회원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번역문의 중간중간에 짙게 한 부분은 원작자 유절 선생이 당시까지(1928년경) 판독한 결과인데 그 부분에 대해서 필자가 우리말로 번역해 본 것이다. 따라서 현재까지 밝혀진 판독 결과와 상당히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음을 미리 양지하시라. 원비문 번역에 있어서는 중국의 왕건군(王健群) 선생의 《광개토왕비연구(廣開土王碑硏究)》를 우리말로 번역한 임동석 교수의 저서를 많이 참고하였다.

 

   이 논문의 특징은 광개토대왕의 훈적비를 고증하기 위해 우리의 《삼국사기(三國史記)》·《고려사(高麗史)》의 《지리지(地理志)》등 우리의 고대 사서는 물론 독자들에게는 낯설은 《조선사략(朝鮮史略)》·《동번기요(東藩紀要)》 등과 같이 저들 나름대로 우리의 역사나 지리를 연구한 결과물을 광범하게 인용하여 고증하였다는 것이다. 이 작자는 우리의 《삼국사기》의 기록에 대하여 일제 때의 일본 식민 사학자들이 흔히 내세웠던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을 무색케 할 정도로 우리의 고대사 관련 기록이나 연대를 사실(史實) 그대로 인정하는 전제하에 논리를 전개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에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지명의 고증에 있어 우리의 고대사 《지리지》에 나오는 지명을 바탕으로 쌍성전변(雙聲轉變)이라는 음운현상으로써 지명의 변천과정을 입증하는 데 있어서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를 주고 있다고 본다.

 

   이 논문에는 일본학자 쓰다사우기찌(津田左右吉)씨가 쓴 《호태왕정복지역고(胡太王征服地域考)》에 나오는 광고토대왕훈적비에 대한 지명 고증 부분이 상당히 인용되어 있으며 또 그가 쓴 《임나고(任那考)》도 인용되었는데 이 책에서 그의 이름을 진전씨(津田氏)로 간칭되어 있다. 또 《일본서기(日本書記)》의 기사가 상당히 인용되어 있다. 우리 고대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서기》는 빼놓을 수 없는 사료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대한 번역서조차 없다가 1987년도에 성은구 선생에 의해 정음사에서 역주서가 나온 적이 있어 1989년도 구입해서 대충 읽어 보았더니 우리가 막연히 알고 있는 한일관계가 아니었다. 즉, 우리는 일본에 왕인 박사가 천자문을 전해주고, 우리의 문화를 일본에 전해 준 스승의 나라로만 알았는데 이건 아니었다. 일본이 우리 한반도를 정벌한 적도 있었고 심지어는 2세기동안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소위 임나일본부설 등 너무도 편향된 역사기술 때문에 덮어 버리고 말았던 일이 있었다. 우리의 남북의 학자들도 이에 질세라 임나일본부설은 허구라고 논박함은 물론 북학의 어떤 학자는 일본의 삼한정벌은 일본내 고구려 · 백제 · 신라의 분국을 정벌이었을 뿐이라는 《삼한 삼국의 일본열도내 분국들에 대하여》라는둥 어떻든 떠올리고 싶지 않는 추억 때문에 한쪽에 처박에 두었던 《일본서기》 역주서를 꺼내어 본문에 나오는 계체천황(繼體天皇) · 흠명천황(欽明天皇) 관련 기사를 확인했더니 도대체 목록에도 없고 겨우 부록으로 나와 있을 뿐 그 부분에 대한 번역이나 주석도 없었다. 이 논문에는 《일본서기》에서 인용하는 용어 중에 이해하기 힘든 공조(貢調) · 관가(官家) 등 단어를 접하게 될 것이다. 또 백제가 일본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하고 그들에게 이런저런 청탁을 하는 것도 접하게 될 것이다. 주지하사시피 《일본서기》는 8세기에 만들어진 책이요, 《삼국사기》는 12세기에 편찬된 책이다. 이 논문에서도 인용되고 있는 왜의 신라 침략기사는 《삼국사기 · 신라본기》에 기록된 대로 자주 있었던 내용이기도 하다. 그리고 정작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바로 광개토왕훈적비에 왜의 침략사실이 철증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는 명백하고도 현존하는 역사적 증거가치에 있다. 얼마나 왜의 침략에 시달렸으면 신라 문무왕은 죽어서 바다의 용왕이 되어 왜의 침략을 막겠다고 바다에 자신을 장사지내게 하였을까. 

 

   전술한 성은구 선생의 역주서에는 권제17~21의 기사가 생략되었다. 그가 저본으로 삼은 정상광정(井上光貞)이 편집한 《일본서기》에도 역시 본문만 부록으로 소개하고 그에 대한 주석은 생략되어 있다고 한다. 《일본서기》의 기술 자체에 어떤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 성씨의 말을 인용하여 보기로 하자.  

 

   "권제17~21에 해당하는 계체기(繼體紀) ~숭준기(崇峻紀)의 기술은 전체적으로 볼 때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기는 하지만 역일(曆日)이 정확하지 않아 개개의 역사적 사건에 관계되는 시 · 년 · 월을 믿을 수가 없으며, 권 26에 해당하는 제명(齊明) · 천지기(天智紀)에서는 년기에 대하여 칭제(稱帝)의 년에서 센 것과 즉위년에서 센 방법 등 두 가지가 있었기 때문에 5~6년 사이에 중복된 기사가 있다. 따라서 이 책의 번역으로 사용한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는 권제17~21과 26을 생략했다. 또한 권제30의 지통기(持統紀)도 실록적이기는 하지만, 타방 《후한서(後漢書)》에 의한 문식이 많고 중국적인 용어가 많으므로 이도 생략했다고 하였다."(성은구 역주, 《일본서기(日本書紀)》, 정음사, 332쪽) 

 

   칭제년과 즉위년의 센 방법이 무슨 말인 줄 잘 모르겠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 논문에서 인용되는 《일본서기》 관련기사는 우리 역대 왕조의 기년과 120년의 차이가 나는데 일본의 학자들은 도리어 우리의 《삼국사기》가 저들의 《일본서기》와 맞지 않아 초기기록을 믿을 수 없다는 해괴한 논리를 펴고 우리네 식민사학자들도 이에 동조한 바 있기는 하나 그들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드리지 말고 문제점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읽어 주었으면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원문에 나오는 서력기원은 길림문사출판사에서 펴낸 고구려역사연구총서 《삼국사기(三國史記)》 교감본(校勘本)의 방식대로 괄호안에 기입하였으며 원문은 일일히 확인하여 원작자가 잘못 인용한 것은 바로잡고 역자주로 처리하였다. 여기서 첨언하고 싶은 것은 중국에서 펴낸 《삼국사기(三國史記)》교감본은 김부식의 원저를 손문범(孫文范) 등이 교감한 것으로 비록 우리에게 익숙치 않은 간제자로 되어 있기는 하지만 현대 중국어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읽기가 매우 편할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 발견된 여러 판본을 비교 · 고증하여 오자 · 탈자 등을 바로잡았음은 물론 원서에서 결락된 글자는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에 의해 보완이 가능한 것은 될 수 있는대로 보완하고 이에 일일이 주석을 하였기 때문에 이 방면의 연구자에게는 필독의 서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 논문 원문에는 우리나라 《삼국사기》 등 사서에서  피휘를 위해 결획된 글자인 경우에는 결획한 그대로 반영시킨다거나 원비에서 일부의 잔획이 있을 경우 이를 반영한 활자를 새로 만들어 반영시켰고, 이체자인 경우에도 이를 반영시켜 활자를 새로 만들어 인쇄한 것인데 본란의 편집기는 지원이 안되는 자체들이므로 현재까지 발견된 다른 탁본 글자에 의해 확인 가능한 글자로 바꾸었다. 원문에는 비교에 동원된 각종 탁본의 글자의 모습을 반영한 상세한 주석이 있는데 역시 본란에서 자체의 지원이 안되므로 대만 교육부에서 만든 이체자사전을 활용하여 가능한 한 원래의 글자를 복원하여 주석 부분까지 모두 번역했다. 처음에는 그런 난제가 있어 주석 부분을 빼려고 하였던 것인데 이것이 없으면 원작자가 어떤 근거로 그런 주장을 하는지 논거를 찾을 수도 없고 검증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정말 힘들여서 주석부분까지 번역해 보았다. 고비 등 금석문을 연구하려는 분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이 논문을 다 번역한 뒤 왕건군 선생의 《광개토대왕연구》라는 책자를 국내에서 임동석씨가 우리말로 번역하여 역민사에서 펴낸 책을 보았더니 유절의 《호태왕비고석》에 대한 서평이 있었다.

 

   이에 따르면, 이 책은 중국에서 나온 호태왕비연구 중엔 비교적 상세한 문장으로 무릇 3만자나 된다. 발견시기, 묘비의 현황, 비의 건립시기, 탁본의 유전, 여러 사람의 눈문 등에 대해 고증한 것 외에도 비문을 단락에 좇아 고석을 하되 그 중에 지명을 연구한 것이 주가 된다. 그러나 유절의 지명 고증에는 음운통가(音韻通假)의 학설을 너무 남용하여 견강부회한 때문에 원의에 어그러짐이 있을 뿐만 아니라, 건륭 · 가경 이후 음운학이 표면상으로 흥성했으나 실제로는 쇠미한 시절인데 그 원인은 음운학 방법을 남용하여 지명 고증에 심한 혼란을 야기하였다면서 유씨의 문장을 읽을 때는 이런 부분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하였다.(관리자)

 

                                                       2009.  12.  6.  

 

 

 

                                          《호태왕비고석(好太王碑考釋)》

 

                                                                                            유 절(劉節)  씀

                                                                                            봉오선생 번역 

 

   이번에 고찰하고자 하는 호태왕비(好太王碑)는 실은 고구려 제17대 광개토경평안호태왕(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묘에 있는 기공비(紀功碑)이다. "그 모든 고고학을 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처음에는 흙 속에 가려져 있다가, 3백년 전에 차츰차츰 흙이 파헤쳐지면서 겉으로 드러나게 되었다."[一]라고 하니 이 비는 명 · 청이 바뀔 때 출토되었으며, "동치(同治: 청 목종의 연호, 재위 1862~1874) 말 처음으로 경사(京師: 북경)에 전입되어 오현(吳縣) 반조음(潘祖蔭)(1830~1890)이 먼저 이것을 얻었다. 해동의 탁공이 탁묵(拓墨: 탁본)을 잘 하지 못했으나 바로 비석이 있는 곳으로 가서 칼같은 것을 사용하여 대체적인 필획의 윤곽을 그려내고 나서 비로소 글자를 식별할 수 있었다. 광서(光緖) 기축년(1899)에, 청나라 종실 성욱(盛昱)이 자금을 모아 창사(廠肆: 저자)의 탁본상인 이운종(李雲從)을 시켜 먹을 양식을 싸 짊어지고 가서 탁본을 해 오게 해서 세상에 조금씩 널리 퍼지게 되었다."[二]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갑오년 청일전쟁 때 출토되었다고 하는데[三] 믿을 수 없다. 서기 1907년(광서 33년, 정미) 4월에, 프랑스 샤반느(沙畹) 교수(Edouard Chavannes, 1865~1918)가 몸소 만주로 가서 고적을 탐방하고, 이 비의 탁본을 얻어 《통보(通報)》라는 잡지에 사진을 게재했다.(Tong Pao Serie Ⅱ Vol. Ⅸ). 이로써 전에 이 비가 조선의 고산성(高山城)과 만포성(滿浦城) 사이에 있다[四]고 한다던가 봉천(鳳天) 봉황청鳳凰廳) 경내에서 출토 되었다는 말한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은[五] 모두 추측의 말이 되고 말았다. 이 비는 실재로 지금의 봉천 집안현<예전에 흥경(興京)에 속했다> 통구진(通溝鎭)에 있다. 통구(通溝)는 압록강 북안 약 100미터<중국의 백수십 보(步)에 해당한다>에 있는데, 그리니치 동경 126도 20분, 북위 41도 5분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이전에 양수경(楊守敬)이 조정걸(趙廷杰)로부터 이에 관한 말을 전해 듣고 말하기를, "이 비가 처음으로 출토 되었을 때, 사람들이 다투어서 탁본을 했다. 현지인들이 그곳에 있는 잡풀을 짓밟고, 비 위에 쇠똥을 발라 불을 질렀기 때문에 이처럼와 박식(剝蝕: 비문 따위가 오래서 벗겨짐)이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숙평(馬叔平) 교수도 이같은 말을 전해 듣고 조선의 경성대학(京城大學: 일제 때의 경성제국대학)의 금서룡(今西龍) 교수에게 물었더니, "이 비가 깎이고 부식이 되어 읽을 수 없게 된 것은 탁공이 가까스로 바로 박식(剝蝕)이 된 곳 위에 진흙을 붙여 일시적으로 글자를 식별하였는데 왕왕 이런 일이 의도적으로 행해졌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비의 여러 탁본에 이동(異同)이 적지 않은 것도 고정(考定)을 어렵게 한다.

 

[一]  정문작(鄭文焯),《고구려영락호태왕비석문찬고(高句麗永樂好太王碑釋文纂考)》.

[二]  유승간(劉承幹),《해동금석원보유(海東金石苑補遺) · 호태왕비발미(好太王碑跋尾)》.

[三]  양수경(楊守敬),《쌍구본호태왕비발(雙鉤本好太王碑跋)》.

[四]  정씨(鄭氏),《찬고(纂考)》

[五]  양씨(樣氏),《쌍구본발(雙鉤本跋)》

 

   이 비의 여러 탁본에는 이미 탁본의 글자수에 다소가 있는 것은 바로 기록된 높이 · 너비 및 행수도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대개 모든 사람이 탁본편(拓片)의 크기로써 이를 계산하다 보니 이런 착오가 생기는 것이다. 이제 샤반느씨가 실측한 것을 위주로 하되, 제가와 서로 다른 것은 간간히 덧붙여 언급함으로써 참고에 대비하고자 한다. 샤반느씨는 말하기를, "여행자로서 통화(通化)에 이른 다음, 통구(通溝)<지금의 집안현(輯安縣)에 속한다, 원주>의 목을 넘어가니 작은 골짜기가 있어 압록강 우안에서 통구를 반쯤 둘러 싸고 있는 평원 가운데에 하나의 검은 점을 발견할 수 있었는 바, 바로 커다란 돌덩어리로 된 바로 이 묘비였다. 반시간 쯤 걸어서 도달할 수 있었다. 통구 동강촌(東岡村)의 고지에 자리 잡고 있었고, 암록색의 커다란 돌로 축조된 사각 기둥 모양으로, 높이는 약 6미터 20센티미터였다.[一] 이 비의 모서리는 고르지 않기 때문에 그 네 면의 너비를 재는 것이 몹씨 힘들었다. 그 남쪽 면은 너비가 1미터 46센티미터요[二], 각자(刻字)는 11행이며, 서쪽 면은 너비가 1미터 45센티미터요[三], 각자(刻字)는 10행(《유본(劉本)》에는 11행, 끝의 1행은 겨우 1자만 남아 있다>이며, 북쪽 면은 너비가 1미터 94센티미터요<영조척(營造尺)으로 6척 6푼 남짓 된다>, 각자는 14행[四], 첫머리의 1행은 전부 소실되었으며, 동쪽 면은 너비가 1미터 41센티미터<영조척으로 4척 4치 남짓 된다>요, 각자는 9행인 바, 4면 합계 44행, 매행 41자로 되어 있다. 각도(刻度)는 상당히 깊고 매자의 평균 길이는 10센티미터<약 3치가량>에 너비는 9센티미터로 비문은 빗머리 1미터쯤 뚝 튀어나온 데서부터 바로 비의 아랫 부분까지 써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비의 높이 너비 및 행수는 대체적으로 명확하다. 또 샤반느씨의 글에 덧붙여 언급한 바에 따르면 통구의 서쪽에 옛 작은 성(古堡)가 있는데 산 위에 있으며 현지에서 사용하는 속명으로 산성자(山城子)라 하며, 대대로 전해 오기를 고구려의 요충지로서 이 비에서 북쪽으로 약 2킬로미터<약 2리쯤 된다)> 떨어져 있으며, 형태가 피라미드(金字塔)처럼 축조되어 있는데 현지인들이 하는 말은 장군총(將軍墳)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또 이 비로부터 약간 서쪽에 장군총과 형태가 유사한 구조로 된 규모가 상당히 큰 것이 있는데 지금은 이미 허물어졌고 가끔 가다 얻어진 벽돌에는 "원컨대 대왕의 무덤은 산처럼 안전하고 구릉처럼 굳건 하소서(願大王之墓安如山! 固如丘!)"라는 글이 쓰여 있다고 하는데 대개 호태왕묘(好太王墓)이다. 또한 서쪽에는 아직도 형상과 구조가 왕묘(王墓)와 똑 같은 묘가 여럿이 있는데 상고할 길이 없다. 샤반느씨는 결론에서 이르기를, "내가 얻은 연구결과와 획득한 비문과 묘지로써 서로 고증해 보았더니 이 비문에서 말하는 비류수(沸流水)는 바로 압록강(鴨綠江)이요, 홀본(忽本)은 통구(通溝)를 가리키며, 성산상자(城山上者)는 산성자(山城者)로 생각된다. 그리고 동강(東岡)은 지금 발굴된 묘비의 동강촌(東岡村)이다."라고 하였다. 샤반느씨의 주장은 우리들에게 믿을 만한 상당한 근거를 주고 있으며, 그 기록이 미치는 바는 더욱 본문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라 우선 그 대의를 여기에 초록(抄錄)하여 석문 중에서 그 득실을 자세히 언급할 것이다.

 

[一]  지금 3척 1촌 2푼 5리로써 1미터가 계산이 되고, 중국 영조척(營造尺) 1장 9척 3촌 7푼쯤 된다. 유씨(劉氏)는 높이가 2장 5척 2푼이라고 하고 정씨(鄭氏)는 높이가 18척이라고 하여 모두 실제의 숫자와 맞지 않는다.

[二]  영조척으로 4척 5촌 6푼쯤에 해당하는데, 정씨(鄭氏)는 남 · 북 두 면의 너비가 5척 6촌쯤 된다고 하고, 유씨(劉氏)는 너비가 8척 2촌 5푼이라고 하여 모두 맞지 않는다.

[三]  영조척으로 4척 5촌 3푼쯤에 해당하는데, 정씨는 동서 두 면은 4척 4촌쯤 된다고 하여 맞지 않는다.

[四]  정씨(鄭氏) · 유씨본(劉氏本)은 모두 13행이다. 대개 이 탁본 북면 제1행은 곧 《유본(劉本)》 서면 끝의 1행이다. 생각건대 유본의 이 행은 1자가 더 많다.

 

   이 비의 탁본은 근래 들어 세상에 상당히 널리 알려졌는데 이번 고석(考釋)에서 근거로 한 것은 여섯이다. 하나는 《신주국왕집(神州國光集)》<9권 제3책> 영인《당풍루장본唐風樓藏本)》이요, 둘은 《샤반느영인원탁본(沙畹影印原拓本)》이요, 셋은 《양수경쌍구본(楊守敬雙鉤本)》이요, 넷은 《유정서국석인본(有正書國石印本)》<상주(常州) 오씨장본(吳氏藏本)>이요, 다섯은 《해동금석원보유본(海東金石苑補遺本)》이요, 여섯째는 《정씨대학산방전서본(鄭氏大鶴山房全書本)》이다. 여러 탁본을 비교해서 얻은 바로써 《유씨본(劉氏本)》은 잔존한 글자가 가장 많았으나 《샤반느본》에서는 그 비의 가장 뚜렸한 모습을 얻을 수 있었다. 이 비문은 모두 44행으로 행마다 41자이니 마땅히 얻을 수 있는 글자의 총수는 모두 1,804이다. 지금 《샤반느본》은 빠진 글자 299자, 불완전한 글자(殘字) 7자, 불분명한 글자 2자이며, 《유씨본(劉氏本)》은 빠진 글자 240자, 불완전한 글자 8자이며, 《오씨본(吳氏本)》은 빠진 글자 260자, 불완전한 글자 16자이며, 《신주국광집본(神州國光集本)》은 영인이 정밀하지 못해 원본의 진짜 모습을 담고 있지 않아 그 정확한 숫자를 계산할 수 없다. 정씨(鄭氏)는 말하기를, "이 비에서 얻은 글자의 총수는 1,709자인데 빠진 글자가 197자이다."라고 하였으니, 바로 《정본(鄭本)》은 1행마다 모자란 것에 근거해서 이를 계산하면 응당 1,761자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그 숫자를 자사헤 헤아려 보았더니니, 《정본(鄭本)》에서 실제로 남아 있는 글자는 겨우 1,382자요, 빠진 글자는 177자, 불완전한 글자는 12이니, 합계해 보아도 아직 1,700이란 숫자에 미치지 못한즉 《정본(鄭本)》은 여러 탁본 중에서 글자 수가 가장 적다고 하겠다. 일체의 이동(異同)에 대해서는 비문을 아래와 같이 자세히 비교한다.

 

   이 비문이 출토된 이래 동서학자들이 비교 · 조사하고 해석한 사람은 10여 가(家)이다. 대충 훓어 본 바에 의하면, 정문작(鄭文焯)(1856~1918)의 《고려국영락호태왕비석문찬고(高麗國永樂好太王碑石文纂考)》가 가장 자세하고 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양수경쌍구본(楊守敬雙鉤本)》도 독특한 점이 있다. 상우(上虞) 나진옥(羅振玉)(1866~1940)의 《영풍향인고(永豊鄕人稿)》에 《호태왕비발(好太王碑跋)》이 있는데, 그가 비석을 세운 시대를 고증하기를, 장력(長曆: 만세력)으로 추정하여 진안제 의희 10년(414) 9월 29일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양씨(楊氏)의 주장과도 같으며,  바로 《삼국사기》·《동국통감》에 기록된 호태왕이 죽은 연대와도 엇비슷하여 참으로 합당한 논조로 생각된다. 오흥(吳興) 유승간(劉承幹)이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을 중교(重校)하고, 다시 《보유부록(補遺附錄)》 전부 8권을 편집하면서 《호태왕비(好太王碑)》 뒤의 교자기(校字記) 1편에서 《정본(鄭本)》에는  바로잡을 곳이 많다고 하였는 바, 아마 그가 근거로 한 것은 상우(上虞) 나진옥씨의 석문이었을 것이다. 육심원(陸心源)의 《고구려광개토대왕담덕기공비발(高句麗廣開土大王談德紀功碑跋)》은 《의고당제발(儀顧堂題跋)》<《십만권루총서본(十萬卷樓叢書本)》>에 나와 있다. 그가 고증한 이 비의 건립 연대도 《동국통감》에 근거로 삼았으므로 양 · 라(楊羅) 두 분의 주장보다 나을 수  없다. 정씨는 《육성재고(陸誠齋考)》에서 이 비가 건립된 것은 양태원(凉太元) 16년이라고 하였는데 어느 것에 근거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정씨는 이런 말을 왕의영(王懿榮)으로부터 전해 듣고 말하기를, "그 일가붙이인 소로(少盧)가 일찍이 전석(箋釋)을 한 적이 있는데 확실이 알 수 없다."라고 하였다. 광서 기축년(1889)에 성욱(盛昱)이 탁본을 다시 입수하여 역시 해석을 한 바 있다. 계사년에 일조인(日照人) 소산(小山)정간선(丁艮善)(1829~1823)이 이를 조사하였으나 그 일을 끝내지 못하고 죽었다.[一] 일본에 있는 사람으로  나가통세씨(那珂通世氏)의 《고려고비고(高麗古碑考)》가 있다고 하는데 그 글을 찾아내지 못하여 그 내용이 어떤 것인지 아직 알 수 없다. 만철회사(滿鐵會社)에서 펴낸 《조선역사지리(朝鮮歷史地理)》<제1권>에 진전좌우길(津田左右吉) 박사의 《호태왕정복지역고(好太王征服地域考)》이라는 글 한 편이 있는데 《삼국사기》에 기록된 호태왕의 재위기간 동안 전쟁사(戰爭史)의 각 조목을 가지고 호태왕이 재위기간 동안 고구려가 한반도에서 점령했던 지역을 추정한 것으로 자못 채택할 만하나 애석하게도 지명 고증에 있어서 오늘날의 지명과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이 10 중의 하나일 뿐이다. 우리 학자들이 고증해서 얻은 것보다 더 적다. 프랑스인 샤반느씨의 글은 묘지의 비제(碑制)를 위주로 기록한 것으로 결코 비문을 자세히 고증한 것이 아니라서 이 비문상의 지명 8, 90개 중 확실히 지금의 어느 어느 지역이라고 알 수 있는 것은 몇 개 안된다. 이제 이런 점을 위주로 고찰하려고 한다. 그러나 해동 고사는 결일(缺佚: 유실)된 것이 꽤 오래되어, 구문(舊聞)을 모두 끌어 모아도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매우 적다. 결함을 보충하는 것은 훗날을 기다리고, 바라건대 스승과 벗님네들 이 점을 양지하시라.

 

   옛날 시조인 추모왕이 나라를 세웠다(惟昔始祖牟王之創基也)[二]。

 

[一]  해풍(海灃) 오중희(吳重熹)의《정씨고석발미(鄭氏考釋跋尾)》.

[二]  는 곧 鄒자로, 《동위이중선수공자묘비(東魏李重璇脩孔子廟碑)》·《당증태사공선공비(唐贈泰師孔宣公碑)》에서 鄒는 모두 로 썼다. 《수용장사비(隋龍藏寺碑)》에서는 로 썼다. 《유본(劉本)》에서는 추로 썼다. 

 

   고구려 시조가 나라를 세우게 된 신화는 여러 역사들이 전하는 것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비문과 대략 비슷하다. 《후한서(後漢書)》에서 고구려에 관한 일이 《부여전(夫餘傳)》에 잘못 들어간 뒤로부터[一], 이 때문에 《통전(通典) · 변방전(邊防典)》에는 이 신화를 고구려 · 부여 두 전(傳)으로 나누어 기록하였고, 《통지(通志)》·《통고(通考)》는 모두 이러한 잘못을 그대로 답습하였다. 《북사(北史)》·《주서(周書)》·《수서(隋書)》에서는 또 《백제전(百濟傳)》에 들어가 있다. 동국(東國)의 여러 사기들은 좀 자세해서 볼 만 한데 기실 모두 부여족 전설에서 발전된 것들이다. 이 신화의 주인공은 곧 이 비에서 말하고 있는 추모(鄒牟)이다. 《삼국사기》에서는 혹은 중해(衆解: 원문의 '象解'는 중해의 오기임이 분명하므로 이를 바로잡아 번역했다, 역자주)라고도 한다고 하였다.《삼국유사》에서는 혹은 해추모(解鄒牟)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대개 《고기(古記)》에서 부여족은 해씨(解氏)로 성을 삼았다[二]고 하였다. 그러나 추모는 《위서(魏書) · 고구려전(高句麗傳)》에서는 주몽(朱蒙)으로 썼고, 《삼국지(三國志) · 부여전(夫餘傳)》주석에서는 《위략(魏略)》을 인용하여 동명(東明)으로 썼는 바, <《후한서(後漢書)》도 같다>, 추모(鄒牟)는 주몽(朱蒙)의  쌍성변(雙聲變)이요, 또 옛날에는 설두(舌頭) · 설상(舌上)이 구분이 안되어 주(朱)를 두(兜)처럼 읽는[三] 동후(東侯)의 대전(對轉: 음운학 술어로, 고음학상 모음이 서로 같은 음성 · 양성 · 입성 사이에 서로 전변하는 것을 가리킴, 역자주)이기 때문에 주몽(朱蒙)도 변하여 동명(東明)이 될 수 있다. 《위서(魏書)》에서 주몽(朱蒙)은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라고 하였다. 지금 동국의 여러 사서에 의하면 모두 추모(鄒牟)는 활을 잘 쏘는 사람(善射者)을 말하는 것이라 하고, 부여왕자 대소(帶素)에서 기이한 바 되었으니 주몽(朱蒙)을 이름으로 삼았다고 해서 별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동고문존(東古文存)》[四]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왕망(王莽) 시건국(始建國) 원년(A.D 9)에 부여왕 대소(帶素)가 고구려 유리명왕(琉璃明王)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르기를, "우리 선왕이 그대의 선대 임금 동명왕(東明王)과 서로 사이가 좋은 터에 지금 우리의 신하들을 이곳에 도망하여 오도록 꾀여 성곽을 수선 · 완성하고 백성을 모아 나라를 만들려 하고 있다. 대저 나라란 크고 작은 구분이 있고, 사람이란 어른과 아이의 순서가 있으니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예절이요, 아이가 어른을 섬기는 것은 도리이다. 이제 만일 왕이 예절과 도리로써 우리를 섬긴다면 하늘이 반드시 도와서 나라의 운명이 영원히 보존될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그 나라를 아무리 보존하려 해도 어려울 것이다."라고 하였다.[五] 여러 사서에서는 추모(鄒牟)가 도망해 나올 때 오이(烏伊: 원문은 '麻夷'로 되어 있는 것을 바로 잡았다, 역자주) · 협보(陜父) · 마려(摩離) 등과 함께 동행하였다고 하니 자기들의 신하들을 꾀여 왔다는 것은 믿을 만하다. 상술한 여러 증거들을 미루어 보면, 추모는 실로 부여족의 강자로서 옛 부락을 이탈하여 따로 새로운 부락을 만들었던 것은 대저 대소(帶素)가 유리왕에게 보냈던 서신을 보아 알 수가 있다.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그의 부친은 북부여의 천제의 아들이며, 모친은 하백의 딸로서 알을 깨고 그는 세상에 태어났다. 생자유성□□□□□(出自北夫餘天帝之子, 母河伯女?, 刮卵降出, 生子有聖?□□□□□[六]。)

 

[一]  자세한 것은 인화(仁和) 정겸(丁謙)의 《봉래헌지리학총서(蓬萊軒地理學叢書)》 권7, 《후한서동이전고증(後漢書東夷傳考證)》에 서술되었다.

[二]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인용하였다. 

[三]  여항장(餘杭章) 선생의 《문시(文始)》 권6, 동후류(東侯類).

[四]  조선 김정희(金正喜) 편집, 《천양각총서본(天壤閣叢書本)》.

[五]  서신은 원래 《삼국사기(三國史記)》 유리왕본기 28년에 나와 있다.

[六]  ?자는 郞자이다. 聖자 다음에 획이 떨어져 나간 글자를 《정본(鄭本)》에서는 于로 썼는데 틀렸다. 이는 德자의 잔결(殘缺)이 아닌가 한다. 《샤반느본》과 《석인본(石印本)》은 모두 글자가 빠졌다.

 

   《후한서(後漢書) · 동이전(東夷傳)》에, "부여국은 현도(玄菟)에서 북으로 1천여 리 되는 지역에 있다. 남쪽으로 고구려, 동쪽으로 읍루, 서쪽으로 선비와 경계를 접하고 있으며 북쪽에는 약수(弱水)가 있다. 읍루(揖婁)는 바로 옛날의 숙신국(肅愼國)으로, 부여에서 동북쪽으로 1천여 리떨어져 있으며, 동쪽으로 대해 가까이에 있고, 남으로 북옥저(北沃沮)와 경계를 접하는데 그 북쪽 변계가 어디까지인지 알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삼국지(三國志) ·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1천 리 되는 곳에 있는데, 남으로는 조선 · 예맥, 동으로는 옥저, 북으로는 부여와 접하고 있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동옥저전(東沃沮傳)》에,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는데 대해 가까이에 산다. 그 지형은 동북으로 좁고 서남으로 길며, 북으로는 부여 · 읍루, 남으로는 예맥과 경계를 접한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위와 같이 기록된 여러 나라의 사지(四至)를 참조 · 비교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은 북옥저는 북부여로, 동옥저는 동부여로 자음(字音: 독음)이 점점 바뀐 것이 서로 부합[一]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살았던 지망(地望: 지리위치)도 엇비슷하다. 여러 역사에서 말하는 부여는 곧 북부여요, 《고구려전(高句麗傳)》에서 말하는 동쪽으로 옥저와 접해 있다고 하는 것은 대개 동옥저는 동국(東國: 우리나라를 가리킴, 역주자)의 여러 사서 및 이 비 중에서 말하는 동부여를 가리켜서 말하는 것이다. 한무제 원봉 3년(B.C 108)에 조선을 멸하고 그 지역을 나누어 사군(四郡)을 설치하여 옥저성(沃沮城)을 현도군 수현(首縣)으로 삼았는데 나중에 이맥(夷貊: 고구려를 가리킴, 역자주)의 침략을 받아 현도군이 고구려(高句驪)로 옮겨갔기 때문에 《한서(漢書) · 지리지(地理志)》에는 고구려(高句麗)가 현도군의 수현으로 되었던 것이요, 달리 낙랑군에서는 영동칠현(嶺東七縣)을 나누어 동부도위(東部都尉)로 만들었기 때문에 《속후한서(續後漢書) · 군국지(郡國志)》에는 바로 판적(版籍)에 들어가지 않았다. 7현 중에 있는 부조(夫租)는 곧 옥저로, 그 지역도 이미 영동(嶺東)에 처해 있으니 동옥저(東沃沮)의 고지로 생각된다. 부여 · 옥저라는 이름이 우리나라(중국을 가리킴, 역자주) 사적 중에 전전하여 뒤섞이게 된 것은 이와 같다. 《삼국유사》에서는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북부여(北夫餘)는 전한 선제 신작 3년(B.C 59) 임술 4월 8일에 도읍을 정하고, 왕으로 일컬어 나라 이름을 북부여라 하고, 이름을 해모수(解慕漱)라 스스로 일컬었다.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扶婁)라고 하고 '해씨(解氏)'로써 성을 삼았다. 그후 왕은 상제(上帝: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동부여로 옮기게 되고 동명제(東明帝)가 북부여를 이어 일어나 졸본주(卒本州)에 도읍을 세우고 졸본부여(卒本夫餘)가 되었으니 곧 고구려의 시조이다."라고 하였다. 동국의 여러 사서를 상고해 보면 추모왕(鄒牟王)은 동부여왕 금와(金蛙)의 양아들이라 하고, 금와는 해부루의 양자이니 동부여는 고구려의 가까운 시조요, 그래서 북부여는 그의 먼 조상이 나왔던 곳이기도 하다. 이는 신화라서 근거로 할 믿을 만한 역사적 사실은 아닐지라도 의탁하고 있는 여러 나라의 지망(地望: 지리위치)은 아직도 사실과 부합되는 것이 있다. 《삼국지(三國志) · 동이옥저전(東夷沃沮傳)》에 의하면, 옥저는 다른 이름으로 구루(溝漊)하고 하며 남옥저와는 8백여 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다. 북옥저는 곧 북부여이니 남옥저는 당연히 고구려를 가리키게 된다. 이제 샤반느씨의 설과 여러 사서로서 이를 고증하면 압록강 가까이에 있는 집안현 일대는 옛 고구려의 발상지임에 틀림이 없다. 이곳으로부터 위쪽으로 8백 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북부여의 오늘날 해당하는 지역은 틀림없이 이 범위내에서 나오게 될 것이다. 

 

[一]  본문에 적용된 음변원리(音變原理)는 여항장(餘杭章) 선생 및 스위덴 사람 칼그렌(Karlgren,高本漢으로 음역)의 설에 따른 것이다. 아래에서는 이 원칙에 대해 더는 자세히 거론하지 않겠다.

 

   《신당서(新唐書) · 발해전(渤海傳)》에 의하면, 발해국(渤海國)은 부여의 고지를 부여부(夫餘府)로 삼았다고 하였다. 《요사(遼史) · 지리지(地理志)》에 황룡부(黃龍府)는 원래 발해 부여부라 하였고, 금나라에서는 융안주(隆安州) 이섭군(利涉郡)이라 한 곳으로, 혼동강(混同江) · 내류하(涞流河) 사이에 있다. 《발해국지(渤海國志)》에 부여부(夫餘府) · 막힐부(鄚頡府) · 안녕부(安寗部)는 모두 인접하여 있다고 하였고, 막힐(鄚頡) · 안녕(安寗) 두 군은 모두 옛 고리국(藁離國) 지방이라고 하였다. 고리(藁離)라는 이름은 우리나라(중국을 가리킴, 역자주) 사적에서는 부여국(夫餘國)을 가리키는 것으로 쓰이고 있으니 《삼국지(三國志) · 부여전(夫餘傳)》 주석에서 《위략(魏略)》을 인용하여 이르기를, "《구지(舊志)》에서 또 이르기를 북방에 고리국(藁離國)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一] 그 나라 왕의 시비가 임신하여……"라 하였다. 이는 곧 주몽에 관한 일로서 이 고리국(藁離國)이 곧 북부여라는 증거이다. 《유변기략(柳邊紀略)》에 황룡부는 지금의 석두하(石頭河) · 쌍양하(雙陽河) 사이에 있었던 것이라 여겼고,  길림의 서쪽 · 혼동강의 남쪽에 처해 있다고 하였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서는 지금의 개원(開原) 및 개원변경의 지역으로 인정하였다. 《길림통지(吉林通志)》에서는 지금의 장춘(長春) · 농안(農安) 두 현의 경내로 인정하였다. 《성경통지(盛京通志)》에서는 막힐부(鄚頡府)는 개원현 경내에 있었다고 하였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서는 안녕군(安寗郡)은 막힐(鄚頡)의 지부(支部)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발해국지(渤海國志)》에 이르기를, 지금의 창도성(昌圖城) 북쪽 30리에 고리성(藁離城)이 있다고 하였다. 통구(通溝) 묘지에 산성자(山城子) · 동강촌(東岡村)이 있는 사실로써 이를 미루어 보건대, 북부여는 혹시 지금의 창도(昌圖)의 지역에 해당하는 것은 아닌가 한다. 제가의 설이 딱 들어 맞는 것은 아니지만 옛 부여의 강역도 아주 협소하다고 할 수는 없다. 오늘날 개원(開原) · 창도(昌圖)는 봉천(奉天)의 북쪽에 있고, 장춘(長春) · 농안(農安)은 길림의 서쪽 변두리로 해당되며, 그 사이가 부여의 고지로, 남으로는 고구려와 8백 리 떨어졌다는 말과도 들어 맞는다. 북부여 · 고구려의 오늘날의 지역을 대략적으로 고증할 수 있는 이상, 이로써 미루어 보면, 여러 사서에서 말하는 동옥저는 틀림없이 길림의 동남부에 있었을 것이다. 읍루는 틀림없이 지금의 길림의 중부 및 동북부의 지역임도 대체로 확정할 수 있다. 이것도 이 비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꼭 알아야 하는 지리상의 지식이다.[二]

 

[一] 《후한서(後漢書) · 부여전(夫餘傳)》에는 색리(索離)로 인용하여 썼고, 《양서(梁書)》는 탁리(橐離)로 썼는데 모두 고(藁)자와 모양이 비슷한 데서 온 오기이며, 고리(藁離)는 고려(高麗)의 대음(對音), 다시 말하면 구루(溝漊)의 대음이다.

[二]  인화(仁和) 정겸(丁謙)의 《봉래헌지리학총고(蓬萊軒地理學叢考)》에서 가리킨 동이(東夷)의 현 지리는 아직 적절한 것이 아니다. 대개 북옥저가 곧 북부여임을 몰랐기 때문에 자가당착에 빠진 것이나 역시 참고에 공할 만하다.

 

   부여족(夫餘族)은 고대 조선반도의 북부민족으로, 한 · 진(漢晉) 이후 반도의 남부민족<한예족(韓濊族), 그에 관해서는 아래에 자세히 언급한다>을 병탄하고 반도의 남단에 세력을 뻗치게 되었는데, 이 비는 곧 그 경략의 사적이다. 백제 · 신라는 모두 그 족속이다.<따로 백잔(百殘) · 신라(新羅) 조목 아래에 상술한다> 이제 전술한 여러 사서에 기록된 것을 보건대, 옥저(沃沮) · 고구려(高句麗)가 부여족임은 이미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바로 읍루(揖婁)도 부여족이다. 《후한서(後漢書) · 읍루전(揖婁傳)》에 이르기를, "읍루인은 용모는 부여인과 비슷하나, 언어는 각기 서로 다르다."라고 하였는데 부여의 여러 종족은 원래 모두 읍루로부터 나왔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고, 이는 역사상에 근거가 있을 뿐만 아니라 바로 언음상에서도 명확한 근거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읍루(揖婁)가 변하여 해부루(解夫婁)가 되고, 또 변하여 해모수(解慕漱)가 되었으니 이는 바로 아주 명확하게 들어나는 일이다. 치구루(置溝漊)를 《북사(北史)》에서 책구루(帻溝漊)로 썼는데, 해(解)가 변하여 책(帻)으로 된 것으로, 오늘날 음으로 해(解)자는 조모(照母)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할 것이며, 구루(溝漊)는 바로 루(婁)의 첩운(疊韻)에서 발전한 것이다.<오늘날 한국말로 구루(溝漊)는 성(城)을 일컫는다고 하니 이 역시 구루라는 고유명사로부터 변한 것이며, 읍루(揖婁)가 읍륵(邑勒), 홀본(忽本)이 훼평(喙評)으로 변한 것과 같으니 이러한 원리는 아래에 자세히 언급할 것이다> 여기서 해부루(解夫婁)가 변하여 책구루(帻溝漊))가 될 수 있으니 치구루(置溝漊)가 또 변하여 고구려(高句麗)로 될 수 있다. 읍(揖) · 옥(沃)은 쌍성으로, 우(虞) · 어(魚)와 같은 부(部)이니, 이 명사의 변화는 두 글자가 연칭되었기 때문에 읍루(揖婁)는 옥저(沃沮)로 바뀔 수 있고, 다시 부조(夫租) · 부여(夫餘)로 변할 수 있는 것과 모두 같은 이치이다. 현도(玄菟)라는 이름도 읍루(揖婁)에서 변한 것이라고 특히 중국에서 통용되었다.<육조(六朝)의 뒤에 해동(海東: 우리나라를 가리킴, 역자주)에서도 통용되었고, 《삼국사기》에 동현도(東玄菟)라는 명칭이 있다>  부루(夫婁)라는 이름은 또 해부루(解夫婁)의 발성자(發聲字)가 떨어져 나가 변한 것이지, 결코 부여족이 해씨(解氏)로 성을 삼았던 것은 아니다. 그뒤 또 옥저(沃沮)에서 변하여 물길(勿吉) · 말갈(靺鞨)이 되었다. 《영고탑기략(寧古塔紀略)》에 길림(吉林)에는 크고 작은 우지(烏稽)가 있다고 하였다. 큰 우지는 흑송림(黑松林)을 이르는 것으로, 수목이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아 있고, 가지가 얽히고 설킨 모양이 우뚝하여 모두 수천년 된 물건들이 면면히 이어져 있고 천리에 달하는데 그 끝을 모른다고 하였다. 여름에는 하탕(哈湯)의 위험이 있어 수백 리가 온통 진흙탕으로 그 깊이가 얼마나 되는 지 알 수 없다."라고 하였다. 《길림외기(吉林外紀)》에는 동해와집부(東海窩集部)가 있다. 모두 바닷가 근처 지방에 수풀외 나무들이 뒤섞여 있는 곳으로 모두 와지(窩集)라 하는데 명나라 때 10여 부(部)가 있었고, 청나라 초기에는 악집부(渥集部)가 있었으니 곧 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우지(烏稽) · 와지(窩集) · 워지(渥集)은 모두 옥저(沃沮)의 일성지전(一聲之轉)이다. 인화(仁和) 정씨(丁氏: 정겸을 가리킨다, 역자주)는 말하기를, "우지의 지역에는 꼭 하탕(哈湯)이 있기 마련인데 대개 낙엽이 겹겹이 쌓이고 빗물에 의해 형성되어 결국에는 아주 깊은 진흙탕으로 되어 사람들이 길을 가다가 갑자기 빠지기라도 한다면 절대로 살아 남을 수 없으며 그래서 약수(弱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후한서(後漢書) · 동이전(東夷傳)》에 부여에 약수(弱水)가 있다고 하였는데 대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대무신왕(大武神王) 5년(A.D 22) 기(紀)》에, "봄 2월에, 왕이 부여국 남쪽으로 진군하였는데 그 지방에는 진창(泥塗)가 많다."라고 하였다.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읍루(揖婁) · 옥저(沃沮) · 부여(夫餘)라는 이름은 혹시 산림의 민족을 일컬은 것은 아닐까?

 

수레를 끄는 사람에게 명하여 남쪽으로 내려 가자고 하여, 가는 길에 부여의 엄리대수를 거쳐가게 되었다(命駕巡車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후한서(後漢書) · 동이전(東夷傳)》에서는 엄사수(掩水)라 하였고, 《삼국지(三國志) · 부여전(夫餘傳)》에서는 《위략(魏略)》을 인용하여 시엄수(施掩水)<아마 엄시(掩施)가 실수로 뒤집혔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양서(梁書) · 고구려전(高句麗傳)》·《수서(隋書) · 고구려전(高句麗傳)》·《북사(北史) · 백제전(百濟傳)》에서는 엄체수(淹滯水)<《국각본수서(局刻本隋書)》에는 엄수(掩水)로 썼다>로 썼으며, 《삼국사기》에서는 엄표수(掩淲水)<아마 엄사(掩㴲)의 오기일 것이다>로 썼으며, 《삼국유사》에는 엄수(淹水)로 썼는데 모두 엄리수(奄利水)의 일성지전(一聲之轉)이다. 오로지 《북사(北史) ·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보술수(普述水)라고 하였으며, 그뒤 《통전(通典)》 및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등 여러 책은 바로 이것에 근거하여 보술수로 통칭하고 있다. 보술수(普述水)는 패수(浿水)이다. 보술(普述)은 바로 패(浿)의 절어(切語)<호삼성(胡三省)의 《통감음주(通鑑音注)》에서 보개(普蓋) · 보대(普大)는 방패번(滂沛飜)이라고 하였다. 두우(杜佑)는 방배반(滂拜反)이라고 하였다. 모두 태괴운(泰怪韻)으로 읽는다>로서 패수(浿水)는 지금의 압록강(鴨綠江)이다.[一] 패(貝) · 출(朮)은 고대의 어음이 같은 부(部)이기 때문에 패(浿)는 보술절(普述切)로 읽는 것이다> 《위략(魏略)》에서 말하기를 부여에는 동주(東珠)가 나는데 크기가 멧대추만 하다고 하였으니,<《태평어람(太平御覽)》을 인용하였다> 따라서 이 강은 조개(貝)로 해서 얻어진 이름이요, 대개 중국에서 처음으로 쓰기 시작하였다. 엄체수는 곧 《한서(漢書) · 지리지(地理志)》의 염난수(鹽難水)이다. 염난수(鹽難水)는 지금의 동가강(佟佳江)요, 마자수(馬訾水)는 지금의 압록강(鴨綠江)이다.[二] 《한서(漢書) · 조선전(朝鮮傳)》에서는 패수가 압록강에 해당한다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리지(地理志)》에서는 또 마자수(馬訾水)가 압록강이요, 패수(浿水)는 대동강이라고 하여, 말하는 것이 어찌 자가당착에 빠지는 것은 아닐까? 따라서 일본 사람이 《패수고(浿水考)》에서 곧장 《한서(漢書) · 지리지(地理志)》의 패수도 역시 지금의 압록강이라고 하였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한서(漢書) · 조선전(朝鮮傳)》은 모두가 《사기(史記)》에 근거로 하였고, 《지리지(地理志)》는 반고(班固)가 창작한 것이다. 《수경(水經)》을 상고해 보면, 이미 패수를 대동강 지역으로 여겼으니, 마자수(馬訾水)가 압록강으로 된 것은 아뭏든 후한 이후이다. 한나라 사람들은 동이의 세력이 차츰 북에서 남으로 미쳐 옴에 따라 당시 변강의 지리에 어두었기 때문에 패수(浿水)라고 칭했고 또 염난(鹽難) · 마자(馬訾)라는 이름이 있던 것이 남쪽으로 대동강으로 옮겨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북사(北史)》 이후 여러 사서에서 또 보술수(普述水)를 압록강으로 일컫게 되었으나 패수라는 이름은 육조 이후에 이미 해동에서 이미 통용되었다. 이 신화는 다시 해동에 전래되어 그 절음(切音)을 얻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중국을 가리킴, 역자주) 사가들은 또 보술수가 곧 패수임을 모르게 되었던 것이다. 압록수(鴨綠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에 대하여, 제가들에게 모두 이 강물이 오리 머리처럼 파랗게 보인다는 설이 있는데 역시 합당한 논조가 아니다. 압록(鴨綠)과 엄리(奄利) · 염수(鹽水)는 모두 쌍성이 변한 것이다. 이 비 가운데 염수(鹽水)가 있고<《수서(隋書)》·《삼국유사(三國遺事)》에 엄수(淹水)라고 쓴 것과 같은 이치이다>, 또 아리수(阿利水)가 있는데 모두 같은 음의 전변(轉變)이다. 염수는 아마 엄리수의 지류일지 모르나, 아리수(阿利水)는 결코 엄리수(奄利水)의 또 다른 번역이 아니다. 어떻게 세 강물이 모두 동일한 어근을 가질 수 있겠는가에 근거해서 고구려에서는 필시 큰 강을 엄리(奄利)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고, 혹자는 곧 그 부족명으로 읍루(揖婁) · 압로(鴨盧) · 엄리(奄利)와 같은 것도 동일 어근인 만큼 그래서 압록(鴨綠)은 엄리의 또 다른 번역으로  그 글을 꾸몄던 것이 틀림이 없다고 한다. 

 

[一] 《봉래헌지리총서(蓬萊軒地理叢書)》· 일인 중야안역(重野安繹)의 《지나지리연혁도설(支那地理沿革圖說)》·《만선역사지리(滿鮮歷史地理)》 권 1 《패수고(浿水考)》에 자세히 기술되었다.

[二]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 제소남(齊召南)의 《수도제강(水道提綱)》· 전점(錢坫)의 《신고주한서지리지(新覯注漢書地理志)》· 양수경의 《역대지리연혁도(歷代地理沿革考)》.

 

   압록수(鴨綠水)라는 이름에 관해, 여러 사서에서 이설이 상당히 많아, 《한서(漢書) · 지리지(地理志)》에서는 마자수(馬訾水)로 썼고, 《삼국지(三國志) · 관구검전(毌丘儉傳)》에서는 비류수(沸流水)로 썼다. 《삼국사기》에 "대무신왕(大武神王) 4년(A.D 21) 겨울 12월에 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부여를 치러 가다가 비류수 옆에서 머물렀다."라고 하였다. 현재 이 비는 압록강 북안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에 이 비의 비류곡(沸流谷) 대해, 샤반느씨는 비류수로 인해서 얻어진 이름이라고 하였으니 비류수는 바로 압록강이다. 《삼국유사》에서는 또 졸본천(卒本川)라고도 부른다고 하였는데 지리로 보아 졸본주(卒本州)에서 얻어진 이름으로 생각된다. 《삼국사기 · 동명왕본기》의 엄표수(淹淲水)의 주석에 일렀으되, "다른 이름으로 개사수(蓋斯水)인데 지금의 압록강 동북쪽에 있다"라고 하였다. 《태평어람(太平御覽)》 사이부(四夷部) 781에는 엄사수(掩水)를 인용하여 주석하기를, "사()의 음은 사(斯)이다"라고 하였다. 《책부원구(冊府元龜)》외신부(外臣部) 956에서는 엄사수(掩水)를 인용하여 주석하기를, "지금 조선의 선기수(善期水)가 아닌가 한다."라고 하였다. 생각건대, 선기(善期)는 개사(蓋斯)와 형태가 비슷하여 생긴 오기로 생각되며, 사(㴲)의 음은 사(斯)이니 역시 엄사(掩)가 변하여 엄시(掩施)로 된 것과 같다. 마자수(馬訾水)는 《양수경쌍구본발(楊守敬雙鉤本跋)》에서는 개자수(蓋訾水)라 하였다. 《한서(漢書) · 지리지(地理志)》에 의하면 서개마(西蓋馬) · 마자수(馬訾水)는 연칭되었는데, 혹시 서로 전하여 베껴쓰던 사람이 개(蓋)를 마(馬)로 오기할 수도 있다.<만약 마자수(馬訾水)라고 한다면 음변(音變)의 이치를 헤아려 보아도 들어 맞지 않는다> 《삼국사기》 대무신왕 3년(20) 기록에, "왕이 골구전(骨句川)에서 사냥을 하여 신마(神馬)를 얻었다."라고 하였다. 5년(21) 기록에, "부여왕 대소의 아우가 갈사수(曷斯水) 가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왕이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생각건대 그 지리위치는 모두 압록강 동북 일대에 있었다. 지금 압록강 동북의 수로가 매우 많은데 동가강이 그 중에서 가장 클 따름이다. 이 비에서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거쳐갔다고 말하고 비류곡(沸流谷)에서 조도(造渡: 묶은 갈대나 뜬 거북이 마치 부교처럼 되어 건널 수 있었다는 뜻임)하였다고 했다. 부여족은 원래 동북(東北)을 거쳐서 남쪽으로 왔으니 엄리대수(奄利大水)는 동가강(佟佳江)으로 생각되며 사실과도 부합된다.[一] 《신당서(新唐書) · 동이열전(東夷列傳) 》에 이르기를, "마자수(馬訾水)는 말갈(靺鞨)의 백산(白山)에서 발원하여 국내성(國內城) 서쪽을 거쳐서 흐르다가 염난수(鹽難水)와 만나며, 또 서남으로 흐르다가 안시(安市)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라고 하였다. 이상 여러 설에 근거한 것을 종합하여 미루어 보면, 마자(馬訾)<개자(蓋訾)로 써야 한다>  · 개사(蓋斯) · 갈사(曷斯) · 골구(骨句)는 엄리(奄利) · 엄사(掩㴲) · 엄시(淹施) · 엄체(淹滯) · 염난(鹽難)과 서로 압록강 또는 동가강으로 오래전부터 불려졌을 뿐만 아니라 모두 엄리(奄利)라는 하나의 말에서 변화된 것이라 하겠다. 그것은 중국에서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했고, 뜻으로 일컬을 수 있는 것은 패수(浿水) 이외에 아직도 비류수(沸流水)라는 이름이 있다.

 

[一]  진풍(陳灃)의 《한서지리지수도도설(漢書地理志水道圖說)》에 이르기를, "(서개마에 대한 주에서) 마자수(馬訾水)는 서북으로 염난수(鹽難水)에 흘러들어,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서안평(西安平)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馬訾水西北入鹽難水, 西南至西安平入海)고 했는데, 마자수는 서남으로 염난수에 흘러들고, 염난수는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서안평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는 것으로 여겨지는 만큼 염난수(鹽難水)가 압록강이요, 마자수(馬訾水)는 또 그 동북에 있다."라고 하였다. 여기에 기록하여 일설에 대비한다.

 

왕이 나루터에 이르러 물을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황천(皇天: 하느님)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딸이다. 내가 바로 추모왕(鄒牟王)이다. 나를 위해 갈대를 엮고 거북을 물에 띄워라!" 이런 말이 나오자마자 갈대를 엮고 거북이들을 물에 띄웠다. 그런 뒤에 비류곡(沸流谷)을 건너 홀본 서쪽 산위에 성을 쌓아 거기를 도읍지로 삼았다.(王臨津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 ?牟王, 爲我連?浮龜[一]。應聲卽爲連葭浮龜。然後造渡於沸流谷, 忽本西城山上而建都焉。) 

 

   샤반느는 "비류곡(沸流谷)은 오늘날 통구(通溝)의 작은 골짜기로서 이 비가 있는 곳은 비류수(沸流水)로 인해서 얻어진 이름이며, 비류수는 바로 압록강이다."라고 말했다. 제가 생각건대(원문에 작자 유절이 생각건대란 뜻의 '節案'이라고 한 것을 이렇게 번역하였다, 역자주)  《삼국사기》에서는 다른 이름으로 압록곡(鴨淥谷) 혹은 졸본주(卒本州)라고도 하였으며, 《삼국유사》에는 다른 이름을 졸본부여(卒本夫餘) 혹은 압록부여(鴨綠夫餘)라고도 하였다. 

 

   샤반느는 "서쪽 산성은 바로 현지의 이름으로 산성자(山城子)라는 곳이다."라고 하였다. 제가 생각건대 샤반느씨가 가리킨 지역은 맞지만 서쪽 산성(山城)은 꼭 하나만을 이르는 말이 아니다. 여기서는 홀본(忽本) 서쪽 산에 성을 쌓고 도읍지를 건설했다는 구절로 읽는 것이 마땅하다. 홀본 서성(西城)은 쪽에 있는 성은 홀본 동강(東岡)과 대칭된다. 

 

   홀본(忽本)은 《삼국사기》·《삼국유사》·《동국통감》·《조선사략》에서 모두 졸본(卒本)으로 썼다. 고구려가 발상한 곳이다. 《삼국유사》에서는 다른 이름으로 졸본부여(卒本夫餘), 혹은 압록부여(鴨綠夫餘)로 썼는데 모두 여러 부여(夫餘)에 대한 칭호와는 구별이 된다. 《북사(北史)》·《위서(魏書)》에는 흘승골성(紇升骨城)으로 썼다. 그곳은 하나의 지역이기 때문에 제가의 설이 같아야 함도 사실상 부인할 수 없다. 《발해국지(渤海國志)》에 솔빈부(率賓府)가 있는데 솔빈국(率賓國)의 고지였다. 《금사(金史) · 지리지(地理志)》에서는 휼품로(恤品路)라고 하였다. 《성경통지(盛京通志)》에는 휼품로는 흥경 동남쪽 변두리 밖에 있다고 하였다. 이제 이 비는 통구(通溝)에서 출토되었으니 원래는 흥경 동남 변계에 있었던 것으로, 샤반느씨가 통구는 홀본 지역이었다는 것이 믿을 만하다 할 것이다. 졸본(卒本) · 솔빈(率賓) · 휼품(恤品)은 모두 홀본(忽本) 한 소리에서 변한 것이다. 즉, 흘승골(紇升骨)과 홀본(忽本)도 역시 다시 전음하여 성음이 변한 것이다.<흘승(紇升)과 홀(忽)은 모두 후음(喉音) 몰운자(沒韻字)이다> 여항장(餘杭章) 씨가 말하는 일자중음(一字重音)이다. 《통전(通典) · 신라전(新羅傳)》에 내읍(內邑)을 훼평(喙評)이라고 하였는데 훼평(喙評)이란 것도 홀본(忽本) 한 소리에서 바뀐 것이다. 이제 《삼국사기》 및 《고려사 · 지리지》의 고지명을 조사해 보면, 모두가 홀(忽)을 성(聖)으로 번역된 것과 만나게 되는데 이와 같은 것이 50여 군데에 이른다. 예를 들어, 백성군(白城郡)은 원래 내홀군(柰忽郡)이요, 음성현(陰城縣)은 원래 잉홀현(仍忽縣)이요, 양성(陽城)은 원래 사복홀(沙伏忽)이요, 수성군(水城郡)은 원래 매홀군(買忽郡)이요, 수곡성(水谷城)은 다른 이름으로 매단홀(買旦忽)이며, 차성현(車城縣)은 원래 차홀현(車忽縣)이요, 소성현(邵城縣)은 원래 매소홀(買召忽)이요, 동성현(童城縣)은 원래 동자홀현(童子忽縣)이요, 술성현(戌城縣)은 원래 수이홀현(首爾忽縣)이요, 견성군(堅城郡)은 원래 동비홀(冬比忽)이요, 고성군(高城郡)은 원래 달홀(達忽)이요, 취성(取城)은 원래 동홀(冬忽)이요, 간성(杆城)은 원래 가라홀(加羅忽)인 바, 수십 개의 사례가 있는데 일일이 열거할 수조차 없다. 

 

[一]  아(我)를 《정본(鄭本)》에서는 목(木)으로 썼는데, 바로 아(我)의 잔탈(殘脫)이다. ?은  ?로 썼는데 卽자로 생각된다. 비문의 박락(剝落)으로 인해서 郞자와 비슷하게 되었다. 卽은 원래 卩인데 여기서는 從目으로 되어 있으니 또 다른 별체이다. 《삼국사기부록이체자류(三國史記異體字類)》에서 卽를 바로 即으로 썼다. ?를 《정본(鄭本)》에서는 가(葭)로 쓰고, 蔽자로 풀이하여 나무를 합하여 건너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계림유사(鷄林遺事)》<《집성본(集成本)》이다> 고려언어부(麗言部)에 물은 몰(沒)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여기의 매홀(買忽)을 번역하여 수성(水城)이라 하였다. 골짜기(谷)는 정개(丁蓋)라고 했는데 정개(丁蓋: 안병호의 연구에 의하면 정음자(正音字)가 창제된 뒤 이런 말은 찾기 어렵다고 함, 역자주)는 곧 단(旦)의 절음(切音: 반절로 표기한 음)이므로 수곡성(水谷城)을 번역하여 매단홀(買旦忽)이라 하였다. 고려말로 수레(車)를 이르는 것은 중국과 같기 때문에 차홀(車忽)을 번역하여 차성(車城)이라 하였다. 취(取)는 도라(都囉)이므로 동홀(冬忽)을 번역하여 취성(取城)으로 된 것이다. 높다(高)는 나분(那奔)이므로 달홀(達忽)을 번역하여 고성(古城)으로 것이며, 따라서 다른 예를 들면 그 나머지는 당연히 음으로써 뜻을 취한 것이니 홀(忽)이 성(城)으로 된 것은 이미 두말할 것이 없다. 《삼국사기》 동명성왕 2년(B.C 36)기에, "송양(松讓)이 와서 나라를 바치며 항복하므로 그 지방을 다물도(多勿都)라 개칭하였다. 고구려말에 옛땅을 회복한 것을 '다물(多勿)'이라 하기 때문에 그 지역의 명칭을 삼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홀물(忽物)은 곧 홀본(忽本)이 변하여 그 수음(收音)을 잃었다.[一] 《삼국사기 · 제사지》에서 고구려는 새로운 임금이 서게 되면 반드시 졸본(卒本)으로 가서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고 하였는 바, 졸본이 고구려 발생지였음에 틀림이 없다. 《통전(通典)》에서는 졸본을 내읍(內邑)이라고 하였는데 그 숫자가 16이나 되며, 또 구도(舊都: 고도)의 뜻으로 변했다. 《삼국사기》에 이르러서는 모든 성(城)을 일컫는 것으로 변하게 되었으니 그 변화의 흔적이 차츰 뒤로 갈수록 많아졌음을 충분히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단지 홀본(忽本)이란 하나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분은 인간세계의 임금의 자리가 싫었다. 그리하여 황룡을 인간세계로 내려 보내 왕을 맞이하게 하였다. 추모왕은 홀본 동강에서 황룡을 타고 하늘로 올랐도다. 고명을 받은 세자 유류왕은 도덕으로써 안정된 나라를 일으켰고, 대주류왕은 선대로부터 전해 오는 사업을 이어받았다. 다시 17대를 전하여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에 이르렀다. 그 분은 18세에 즉위하여 존호를 영락태왕이라 하였다. (永樂世位, 因遣黃龍來下連王[二], 王於忽本東岡[三], 黃龍負[四]昇天。顧命世子儒留王, 以道興治。大朱留王紹承基業。?[五]至十七世孫, 國罡[六]上廣開[七]土境好太王, 二九登祚, 號爲永樂太王。) 

 

[一]  고본한(高本漢)의 《중국음자전(中國音字典)》에 몰운자(沒韻字)는 L처럼 수음(收音)이 되나. 인(忍)은 촬구자(撮口字)로 입술에서 수음이 되는 것이 쾌 자연스러우니, 몰운자(沒韻字)가 수음이 되는 것은 모두 혀일 것까지는 없는 것이 아닌가 한다.

[二]  정(鄭)은 ?을 卽의 늑문(泐文)이 아닌가 하였으나 ?은 곧 ?으로 《나본(羅本)》에서 ?으로 썼고 《양본(楊本)》은 ?으로 썼는데, 제가 생각건대 정(鄭)의 주장이 맞다고 본다. 영은 영의 늑문으로 ?은 迎의 별체이며, 한(漢) · 위(魏) · 육조(六朝)의 비지(碑志)에서는 迎을 ?으로 쓰는 일이 많았으며, 《당백학관비(唐白鶴觀碑)》에 "迎建木利疎封"이란 구절이 있다.

[三] 《나씨본(羅氏本)》에는 罡으로 썼다.

[四]  정씨(鄭氏)는 負로 쓴다고 풀이하였고, 여러 탁본에는 頁로 썼는데, 제가 생각건대 負자가 맞다고 본다. 

[五]  業자를 《샤반느본》에서는 ?으로 썼으며 ?는 ?의 늑문이 아닌가 한다. 《정본(鄭本)》은 전부 빠졌고, 《양본(楊本)》은 ?으로 썼다.

[六] 《나씨본(羅氏本)》은 罡으로 썼다.

[七]  정(鄭)은 비서(碑書)에서는 開를 ?로 쓴다고 하였으며, 일본 《이천조상서(二天造象書)》에서는 開를 ?로 쓴 것과 같은 예이다.

 

   《삼국사기》에 "유리명왕(琉璃明王)의 이름은 유리(類利)요, 혹은 유류(孺留)라고 한다고 하였다. 그는 주몽의 맏아들로,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에게 장가들어 태기가 있었고 주몽이 떠난 뒤에 태어났는데 이 분이 유리였다. 주몽왕 19년에, 왕자 유리가 그 어미와 함께 도망하여 돌아오니 왕이 기뻐하여 그를 세워 태자로 삼았다. 가을 9월에 왕이 죽으니 왕위에 올랐다."라고 하였다. 유리(類利)는 《위서(魏書) · 고구려전(高句麗傳)》·《수서(隋書) · 고구려전(高句麗傳)》에 모두 여달(閭達)이라고 하였다. 《북사(北史)》에는 주몽이 죽고 그 아들 여률(如律)이 왕위에 올랐다고 하였다. 《조선사략》에서는 여유(如柔)로 썼다. 《삼국유사》 연표에서는 누리(累利)로 썼다. 이 비문에서는 또 대주류왕(大朱留王)이라고 칭했는데 모두 유류(儒留) 한 소리에서 바뀐 것이다. 유리명왕(琉璃明王)이라고 일컫게 된 것은, 또 후인들이 유리(琉璃)란 이름으로 인해서 명(明)자 하나를 덧붙인 것이지 본명은 아니다.

 

   고구려는 주몽(朱蒙)으로부터 담덕(談德)에 이르기까지, 동국의 여러 사서에 의하면 19임금,  14대를 거쳤다고 한다.[一] 중국의 사례(史例)에 의하면 전국(傳國)의 숫자와 세계(世系)의 숫자와 본래 동일시 할 수 없다.[二] 이 비에서 말하는 17대손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히 세계(世系)를 가리켜서 하는 말이다. 《삼국사기》·《동국통감》·《조선사략》에 기록된 것과 서로 부합되지 않는다. 이제 《삼국유사》 연표(年表: 정확하게는 '王曆'이다, 역자주)[三]를 조사해 보면, 부절(符節)을 맞춘 것처럼 딱 들어맞는데 이로써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 연표는 비록 뒤늦게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四], 마땅히 근거로 삼았던 것이 따로 있었을 것이다. 연표에 기록된 첫번째 동명왕(東明王)은 갑신년에 왕위에 올라 <한원제 건소 2년(B.C 37)>, 18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으며, 성은 고씨(高氏)요, 이름을 주몽(朱蒙)이라 하였는데, 다른 이름으로 추몽(鄒蒙)이라고도 하였으며 고구려 시조이다. 두번째 유리왕(硫璃王)은 다른 이름으로 누리(累利)라고도 하였는데 동명의 아들로 임인년에 왕위에 올라 16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으니 2대손이다. 셋째는 대호신왕(大虎神王)[五]은 이름이 무휼(無恤)이니, 다른 이름으로 미류(味留)라고도 하였으며 유리왕(琉璃王)의 셋째 아들이다. 무인년에 왕위에 올라 2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으니 3대손이다.

 

[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민중왕은 대무신왕의 아우요, 태조왕은 유리왕의 손자요, 차대왕 · 신대왕은 모두 태조왕의 아우요, 미천왕은 봉상왕의 아우요, 산상왕은 고국천왕의의 아우이기 때문에 주몽에서 담덕까지는 마침 14대가 된다.

[二]  오흥(吳興) 육씨(陸氏) · 상우(上虞) 나씨(羅氏) 두 분의 《발(跋)》은 모두 《동국통감(東國通鑑)》에 근거하여 주몽에서 담덕까지 모두 17대를 지났다고 하였으니 세계 및 전국의 수에 있어서 맞을 수가 없다.

[三] 《속장경본(續藏經本)》은 한화제 이전은 자료가 없으므로 지금은 《대정신수장경본(大正新修藏經本)》에 따랐다.

[四]  고려 충렬왕 때 중 일연(一然)이 엮은 것으로, 원나라 지원(至元) · 대덕(大德) 연간에 해당한다.

[五]  곧 대무신왕(大武神王)인데 고려 왕건조의 혜종(惠宗)의 이름을 피하여 호(虎)로 썼으며,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획 하나를 빼고 썼다.

 

네째는 민중왕(閔中王)인데 이름은 읍주(邑朱)요, 대무신왕의 아들로,<《삼국사기》에서는 대무신왕(大武神王)의 아우라고 하였다> 갑진년에 왕위에 올라 4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으니 4대손이다. 다섯째는 모본왕(慕本王)인데 민중(閔中)의 형으로 이름은 애(愛)이니, 다른 이름으로 우(憂)라고도 하였으며,<《삼국사기》에서는 태무신왕(太武神王)의 맏아들이라고 하였다> 무신년에 왕위에 올라 5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으니 5대손이다. 여섯째는 국조왕(國祖王)인데 이름은 궁(宮)이요, 다른 이름으로 태조왕(太祖王)이라고도 하였으며 <《삼국사기》에서는 유리왕(硫璃王)의 아들인 재사(再思)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계축년에 왕위에 올라 93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으니 5대손이다. 일곱째는 차대왕(次大王)인데 이름은 수(遂)요,<동국 여러 사서에서는 모두 수성(遂成)으로 썼다> 국조왕(國祖王)의 동모제로 병술년에 왕위에 올라 19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을사년에 국조왕이 나이 119세로 형제 두 왕이 모두 신왕(新王)에게 시해를 당했다.[一] 수성(遂成)과 궁(宮)은 형제로 동명왕의 5대손이다. 여덟째는 신대왕(新大王)인데 이름은 백고(伯固)요, 다른 이름으로 백구(伯句)라고도 하였으며, 을사년에 왕위에 올라 14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으니[二] 6대손이다. 아홉째는 고국천왕(故國川王)인데 이름은 남호(男虎)요<원래 무(武)로 쓴 것은 고려 왕건조의 혜종(惠宗)의 이름을 피해서 호(虎)로 쓴 것이다> 혹은 이이모(伊夷模)라고도 하였고 기미년에 왕위에 올라 2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으니<어떤 책에서는 20년이라고 하였고, 《삼국사기》에서는 18년이라고 하였는데 어떤 책이 맞다> 7대손이다. 열째는 산상왕(山上王)인데 21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으니<5자는 《삼국사기》에 근거해서 보완했다>, 8대손이다. 열한번째는 동천왕(東川王)인데 22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으니<5자는 《삼국사기》에 근거해서 보완했다> 9대손이다. 열두번째는 중천왕(中川王)인데 23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으니[三] 10대손이다. 열세번째는 서천왕(西川王)인데 이름은 약로(藥盧), 혹은 약우(若友)라고도 하였으며, 경인년에 왕위에 올라 22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으니 11대손이다. 열네번째는 봉상왕(烽上王)인데 다른 이름으로 치갈왕(雉葛王)이라 하였으며 이름은 상부(相夫)요 임자년에 왕위에 올라 8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으며 12대손이다. 열다섯째는 미천왕(美川王)인데 묘양(妙穰)이라고도 하였으며, 이름은 을불(乙弗) 혹은 우불(憂弗)이라고도 하였고, 경신년에 왕위에 올라 31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으니 13대손이다. 열여섯째는 국원왕(國原王)인데 이름은 쇠(釗)요, 다른 이름으로 사유(斯由) 혹은 강상왕(岡上王)이라고도 하였으며 신묘년에 왕위에 올라 4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으니 14대손이다. 열일곱째는 소수림왕(小獸林王)인데 이름은 구부(丘夫)요 신미년에 왕위에 올라 13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으니 15대손이다. 열여덟째는 고국양왕(故國壤王)인데 이름은 이련(伊連)이요, 혹은 어지지(於只支)라고도 하였으며, 갑신년에 왕위에 올라 8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으니 16대손이다.

 

[一]  《삼국지(三國志) · 동이전(東夷傳)》에 궁(宮)이 전쟁에서 죽고 아들 백고(伯固)가 왕위에 올랐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조선사략(朝鮮史略)》에서는 모두 명림답부(明臨答夫, 원문의 臨明答夫는 明臨答夫의 오기이므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역자주)가 그 임금 수성(遂成)을 시해하고 그 아우 백고(伯固)를 세웠다고 하였다.

[二]  동국 여러 사서는 모두 백고(伯固)를 태조왕(太祖王)의 아우로 여기고 있으며 연표도 특이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된 즉위교서에 "과인은 외람스럽게도 왕의 근친으로 태어났으나 원래 임금으로서의 덕망이 없었다. 지난날에 형제간에 정권을 잇게 한 것은 자못 자손에게 전하는 계책에 어긋나는 것이다. 나는 죽음을 당하지나 않을까 두렵기도 하고, 마음이 어수선하고 편치 않아 뭇 사람들을 떠나 먼곳으로 몸을 숨겼던 것인데 선왕이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접하게 되매 다만 너무도 가슴이 찢어질듯 아프고 슬플 따름이다. 어찌 백성들이 기꺼이 추대하고, 중신 여러분께서 나에게 왕위에 오르도록 권하리라 어떻게 생각이나 했었겠는가? 그릇되이 보잘것 없는 이 사람(원문은 '眇末'로 고대 제왕의 자신을 낮추는 말임, 역자주)으로써 존엄하고 거룩한 자리를 차지하고 보니 마치 연해(淵海: 깊은 연못과 바다)를 건너는 것 같아서 감히 몸둘 바를 모르겠다. 마땅히 은혜가 먼곳까지 미치도록 해야 할 것이며, 마침내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새 출발을 해야 할 지니 나라 안의 죄수들에게 크게 사면을 실시토록 해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 사용된 우우지정(友于之政, 원문의 政을 典이라 한 것을 《삼국사기》 원전에 의해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역주자)이란 대개 해우(解憂) · 수성(遂成) 모두가 형제로써 왕위를 이어간 것을 가리키는 말이며, 결코 백고(伯固)가 바로 태조왕의 아우임을 증명할 수 없다. 수성(遂成)을 시해한 사건은 원래 명림답부(明臨答夫)에게서 나온 것이요, 다만 연표에 태조 형제가 모두 신왕(新王)에게 살해되었다고 하였으니 명림답부의 난은 혹시 백고의 사주로 저질러졌던 것은 아닐까?
[二]  5자는 《삼국사기》에 근거해서 보완했다. 이상의 세 임금의 입국 연대가 연표의 기록에서 빠지게 된 것은 아무 전사(傳寫)하는 과정에서 탈락되었기 때문에 근거에 의해서 이를 보완하는 것이며, 산상왕의 이름은 연우(延優)요, 동천왕의 이름은 우위거(優位居) 일명 위궁(位宮)이요, 중천왕의 이름은 연비(然沸)이다. 이는 여러 사서에서 똑 같으며 아물러 여기에 부록으로 기록해 둔다. 

 

   열아홉째는 광개토왕(廣開土王)인데 이름은 담덕(談德)이요, 임진년에 왕위에 올라[一], 21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으니[二] 17대손이다. 시조 주몽이 왕위에 오른 전한 원제 건소 2년(B.C 37) 갑신년으로부터 광개토왕 담덕이 죽은 동진 안제 의희 8년(A.D 412) 임자년까지는 모두 449년이 경과하였다. 

 

   이 비문의 여러 조목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영락(永樂)은 광개토왕의 연호(年號)임이 분명하다. 이런 사실이 동국의 사승(史乘: 사서)에서는 발견되지 않을 뿐더러 고구려 여러 왕들에게는 전혀 연호가 없었던 것인데 여러 사서에서 빠진 것을 충분히 보충할 수 있다.

 

그분의 은택은 마치 황천과 같았고, 그의 무공은 사해에 떨쳤다. 그분께서는 밖으로부터 침략을 말끔이 쓸어버렸고, 백성들로 하여금 저마다 생업에 안심하고 종사할 수 있게 하였다.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들은 풍요로웠으며, 오곡은 풍성하게 무르익어 풍년을 구가했다. 하늘은 우리를 애통해 여기지 않으시사 보령 서른아홉에 붕어하셔 나라를 훌쩍 버리셨도다. 갑인년 9월 29일 을유일에, 임금의 무덤 자리에 고이 모셨도다. 이에 이 비를 세워 그 분의 빛나는 업적을 돌에 새겨 후세에 널리 알리고자 하노라. 그분의 업적은 다음과 같다.(恩澤[三][四]于皇天, 威武振被四海[五]; 掃除□□, 庶[六][七]; 國富民殷, 五穀豊熟[八]。昊天不吊, 卅有九, 晏駕棄國[九]甲寅年九月廿九日乙酉, 遷[一〇]就山陵。於是立碑銘, 紀勳績, 㕥永後世焉。

 

[一]  이 비에서 영락(永樂) 5년은 햇수로 을미라고 하였으니 광개토왕은 신묘년에 왕위에 올랐던 것이며 여러 사서의 연표 같으니, 마땅히 이에 따라 바로잡아야 한다.

[二]  이 비에서 나이 열 여덟에 왕위에 올라, 서른아홉에 죽었으니 왕위에 있는 기간은 21년으로 딱 들어 맞는다.

[三] 《샤반느본》은 澤으로 썼다.

[四] 《정본(鄭本)》·《샤반느본》에서는 빠졌다.

[五]  유(劉) · 정본(鄭本)은 橫자로 해석했다. 《후한서(後漢書) · 풍이전(馮異傳)》에 바로 "橫被四表"으로 썼다. 진교종(陳喬縱)의 《금문상서경설고(今文尙書經說考)》에 "橫被爲歐陽尙書"라고 하였다. 피석서(皮錫瑞)의 《한비인경고(漢碑引經考)》에 "《번의복화하민전구산비(樊毅復華下民田口碑)》·《광한태수심자거면죽강언비(廣漢太守沈子琚竹江堰碑)》에 광피사표(廣被四表)를 써서 모두 《요전(堯典)》의 광피사표(廣被四表)의 의미를 사용하였다."라고 하였다. 광(光) · 광(廣) · 횡(橫)은 소리가 비슷하고 의미가 통한다는 것은 이미 《경의술문(經義述聞)》에 자세히 서술되었다. 《간록자서(干祿字書)》·《광운(廣韻)》에 광(礦)은 또 ?과 통한다고 하였다. 《주례(周禮)》의 광인(卝人)에서 광(卝)은 곧 광(礦)자이다. 橫자는 원래 이 비에서 ?로 썼던 것이요, ?는 또 ?의 늑문으로 분명히 오자가 아니다. 정(鄭)의 주장이 옳다.

[六] 《나씨본(羅氏本)》은 ?으로 썼고 여러 탁본은 寧으로 썼는데, 《한부각송(漢郙閣頌)》에 "就安之石道"가 있고, 《북위장맹룡비(北魏張猛龍碑)》에 "異今德" 있으며, 《당용삭삼년상재금강경(唐龍朔三年常在金剛經)》에서 은 동시에 寧으로 썼다.

[七]  《제송매조상(齊宋買造像)》에 業은 동시에 으로 썼다.

[八]  은 穀의 별체로 생각되고, 《간록자서(干祿字書)》에 穀은 과 통하여 썼으며, 또 《정영조상(程榮造像)》에 "五곡불?"이라고 하였다. 豊은 豐의 별체로 한 · 위 · 육조에서 당에 이르기까지 모든 비지(碑志) 중의 豐자는 豊으로 쓰는 것이 많았으며 《한노상사신사공묘주명(漢魯相史農祠孔廟奏銘)》에 "以祈豊穰"이라 하였고, 《서악화산묘비(西嶽華山廟碑)》에 "禋祀豊備"라 하였으며, 《동위소정표명(東魏蕭正表銘)》에 "左眄豊貂"라 하였으며, 《북제서양왕서지재묘지(北齊西陽王徐之才墓志)》에 "豊貂加首"가 있으며, 《수업빈묘지(隋業賓墓誌)”에 "永豊里"가 있으며, 《당주공사령천기(唐周公祠靈泉碑)》에 "必是泰歲豊"이 있으며, 《삼국사기별체자류(三國史記別體字類)》에 豐은 아울러 豊으로 썼다.

[九]  은 棄의 별체로, 《조전비(曹全碑)》에 "遭同産弟憂官"이라는 말이 있고, 《당동방삭화찬(唐東方朔畵贊)》에 ?로 썼다. 

[一〇]  遷의 별체로 《한초상손숙오비(漢楚相孫叔敖碑)》에 "遷長抵太守"라는 말이 있다.

 

其詞[一]曰:

  

   갑인년 9월 29일 을유는 《통감목록(通鑑目錄)》·《유의유장력(劉義臾長曆)》 및 《신회진씨이십사삭윤표(新會陳氏二十四史朔閏表)》의하면 동진 의희 10년(414) 9월 29일에 바로 해당한다. 광개토왕은 의희 8년(412) 임자일에 죽었는데 향년 39세요, 2년 뒤에 산릉(山陵: 임금의 무덤 자리)에 이장을 했다.

 

영락 5년은 햇수로 을미년, 호태왕은 비려(碑麗)가 그곳에 있던 고구려 함몰인들을 돌려 보내주지 않기 때문에 몸소 대군을 거느리고 파부산(叵富山) 토벌에 나서, 산을 등지고 염수(鹽水) 가에 이르러 비려의 3개 부락, 6,7백개의 영을 처부수고, 뇌획한 우마 · 군양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호태왕은 그곳으로부터 돌아오면서 양평도(襄平道)를 거쳐서 동쪽으로 돌아왔다. □성(□城) · 역성(力城) · 북풍(北豊)에 이르러 사냥을 준비시켰다. 경내를 거치면서 순유도 하고 사냥도 하면서 왕도로 돌아왔다.(永樂五年, 歲在乙未, 王以碑麗不息,□又躬率往討[二]叵富山[三], 負山之[四]水上, 破其?[五] 部落[六]六七百, 當牛[七]馬群羊, 不可稱數。於是旋駕, 因過襄[八]平道, 東來□□城[九]力城, 北豐[一〇], 王備[一一][一二], 遊觀土境, 田[一三][一四]。) 

 

[一]  詞자의 늑문으로 생각되며, 《샤반느본》에는 빠졌다.

[二]  정(鄭)은 往자로 해석하였는데 한(漢) · 위(魏) · 육조(六朝) 시대의 비지자체(碑誌字體)가 전에는 두인변(彳)의 글자가 사람인변(亻)으로 간략화 되는 것인데 도리어 亻변자가 彳으로 쓰였다. 이 비 중의 侵자는 으로 썼다. 《북위효문제조비간묘문(北魏孝文帝弔比干墓文)》에 의하면 "住者于弗及兮"라고 하였는데 住는 곧 往이다.

[三] 《정본(鄭本)》에서는 叵를 巨로 썼는데 틀렸다.

[四]  鹽의 별체이다. 《한동해묘비(漢東海墓碑)》에 "濱海口"라는 말이 있고, 《당이관불감기(唐伊關佛龕記)》에 "梅王國이란 말이 있는데 모두 으로 썼다. 《정본(鄭本)》에서는 부산(負山)을 부비(負碑)라 했는데 틀렸다.

[五] 《샤반느본》에서는 乒으로 썼다.

[六]  정(鄭)은 생각건대 洛은 落이라고 하였다.

[七] 《정본(鄭本)》에는 用으로 썼고, 《양본(楊本)》에는 甲으로 썼다.

[八] 《유본(劉本)》에는 ?으로 썼고, 이번에 《샤반느본》에 따랐다. 여러 탁본과 마찬가지로  글자가 중국 자서(字書)에 보이지 않는다.

[九] 《정본(鄭本)》에는 城으로 썼는데 여러 탁본과 모두 다르다.
[一〇]  여기의 豊자는 당연히 豐으로 써서는 안되는 것인데, 한 · 당비지(漢唐碑誌)를 상고해 보면 豊을 따른 것도 있고, 豐을 따른 것도 있고 또한 원래의 글자를 따르는 것도 있으니 예를 들어 《한인영비(漢人瑛碑)》에 "春秋饗"가 있고, 《한동백묘비(漢桐柏墓碑)》에 "處正好"이란 말도 있으며, 《당삼분기(唐三墳記)》에 "立信以示"가 있는데 모두 豐을 따랐다. 또 《한한칙비(漢韓勑碑)》에 "所宜異"가 있으며, 《노준비(魯峻碑)》에 "體純和之德"이란 말이 있고, 《윤주비(尹宙碑)》에 "君體溫良"이란 말이 있으며, 《경명(鏡銘)》에 "渴飮灃泉"이 있는데 모두 豐을 따랐다. 《삼국사기이체자류(三國史記異體字類)》에 豊과 豐은 항상 섞갈렸으며, 《송서(宋書) · 만이전(蠻夷傳)》에 북풍성(北豐城)이 있는데 이는 북풍(北豐)으로 당연히 지명임은 물론이다.

[一一]  이 글자는 의심스럽기는 한데 제가들이 모두 備자로 해석하고 있다.

[一二] 《정본(鄭本)》에서는 ?으로 썼고, 《양본(楊本)》 및 《샤반느본》은 ?으로 썼으며, 정(鄭)은 猶의 별체라고 하였다.

[一三]  정(鄭)은 獵의 별체라고 하였다.

[一四] 《정본(鄭本)》·《유본(劉本)》은 모두 還으로 썼는데 이제 《샤반느본》에 따랐으며, 《수용장사비(隋龍藏寺碑)》에 "還同免角"이 있는데 글자가 각기 서로 비슷하다.

 

   《동국통감》에서 광개토왕이 임진년에 왕위에 올랐고, 계축년 10월에 죽었다고 하였으니 국정을 맡아 다스린 것은 다 합해서 22년이 된다. 이 비에서는 29세에 왕위에 올랐고, 39세에 붕어하여 나라를 버렸다고 했으니 그 기간도 22년이 걸렸다. 생각건대 이 비에서 을미를 영락 5년이라고 하였으니, 호태황은 신묘년에 왕위에 오르고, 임자년에 죽었으며, 그 이태되던 해인 갑인년 9월에 산릉(山陵)으로 이장한 것이다. 《삼국유사 · 연표》에서는 재위를 21년이라고 한 것은 호태왕의 22년은 곧 장수왕의 원년이 되기 때문에 전국(傳國) 햇수를 합하면 마땅히 21년으로 계산이 된다. 여러 사서에서 임진년에 왕위에 오르고 계축년에 죽었다고 한 것은 호태왕은 갑인년에 이장을 했으므로 시간적으로 맞지 않는 22년이란 숫자를 추산해 보면 틀리다. 이제 이 비에 의하여 바로 잡는다.

 

   비려불식, 왕궁솔왕토(碑麗不息, 王躬率往討)라고 하였으니 비려(碑麗)가 종족의 이름이란 것은 틀림이 없다. 비려(碑麗) · 화려(華麗)[一] · 불내(不耐)는 모두 일성지전(一聲之轉)이다. 불내(不耐)는 부여족의 별부(別部)이다. 《후한서(後漢書) · 동이전(東夷傳)》에,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別種)으로 언어에 있어서 같은 것이 많다. 모두 5족으로 소노부(消奴部) · 절노부(絶奴部) · 순노부(順奴部) · 관노부(灌奴部) · 계루부(桂婁部)라 한다. 원래 소노부(消奴部)에서 왕이 되었고, 나중에 차츰 약해져서 계류부(桂婁部)가 이를 대신했다."라고 하였다. 이 비에 윤노성(閏奴城)이 있는데 바로 순노부(順奴部)가 거주하던 지역이다<윤(閏) · 순(順)은 쌍성은 아니지만 똑 같이 진운부(震韻部)에 있다>. 관노성(灌奴城)은 바로 관노부(灌奴部)가 거주하던 곳이다. 또 파노성(巴奴城) · 두노성(豆奴城)이 있는데 그 이름이 비록 《동이전(東夷傳)》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역시 부여에 부속된 것이라 단언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 "고구려 태조왕 20년 2월, 관나부(貫那部)로써 조나부(藻那部)를 쳤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관노(貫奴)도 관나(貫那)로 쓰였다는 증거가 된다. 따라서 《삼국사기》에 기록된 모든 환나(桓那) · 주나(朱那)[二] · 도나성(刀那城)[三] · 비류나(沸流那) · 연나(椽那)[四] 등 《삼국사기》에 일컫는 '某那'라고 하는 것에서 나(那)는 모두 노(奴)의 또 다른 번역(異譯)이다. 이에 따르면 부여족에 부속된 것은 실로 5부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一]  화(華)와 파(葩)는 통하니, 고대의 어음 화(華)는 중순음으로 읽은 것이 아닌가 하는데 지금은 아음(牙音)으로 읽으니 곧 순음의 변이다. 여요장(餘姚章)씨가 말하는 순음이 추렴(遒斂)하여 후아(喉牙)가 된 것이다. 지금 호남 장례(長醴) 일대에서는 경순음(輕脣音)으로 읽으니 곧 옛날의 중순음(重脣音)에서 변한 것이다.

[二]  태조왕 22년기.

[三]  소지마립간 10년기.

[四]  태조왕 본기.

 

   《삼국지(三國志) · 동이전(東夷傳)》에 의하면 마한(馬韓)에는 비리국(卑離國) · 점비리국(占卑離國) <원래 점리비(占離卑)로 써 있으며, 아래의 예로써 이를 미루어 보면, 비리(卑離)의 글자가  꺼꾸로 된 것이라 생각한다> ·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 · 내비리국(內卑離國) · 벽비리국(辟卑離國) ·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 · 노래비리국(奴來卑離國) · 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이 있다. 마한(馬韓)은 원래 예족(濊族)으로 한반도 고대 남부의 토착민들인데 그 지역은 나중에 백제(百濟)가 나라를 세웠던 곳이며, 마한 50여 나라 중에 비리(卑離)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 8개나 있다. 비리(卑麗)는 곧 비려(碑麗)요 다시 말하면 불내(不耐)이다. 불내부(不耐部)는 이미 만주와 조선의 고대 각 지역에 처해 있었으며 대강 훓어 보아도 세 군데 지역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화려(華麗) · 불내(不耐)는 두 지역이지만 실은 같은 부족이 살았기 때문에 같은 이름이 다르게 번역된 것이다. 《한서(漢書) · 지리지(地理志)》에서는 불내(不耐)를 불이(不而)로 썼고, 화려(華麗) · 불래(不耐)는 모두 낙랑군에 속했다. 《후한서(後漢書) · 군국지(郡國志)》에는 빠졌다. 또 《동이전(東夷傳)》에 "원봉 3년(B.C 108)에, 조선을 멸하고 낙랑 · 임둔 · 현도 · 진번 4군을 설치하였다. 소제 시원 5년(82)에, 임둔 · 진번을 없애 낙랑 · 현도에 병합했다. 현도는 다시 고구려로 옮겨갔다. 단단대령 이동의 옥저(沃沮) · 예(濊) · 맥(貊)은 모두 낙랑에 속했다. 나중에 토경이 넓고 멀므로 다시 영동(嶺東)을 7현으로 나누어 낙랑동부도위(樂浪東部都尉)를 두었다."라고 하였다. 7현이란 동이(東暆) · 불내(不耐) · 잠태(蠶台) · 탄열(呑列) · 사두미(邪頭味) · 전막(前莫) · 부조(夫租)이다. 《삼국지(三國志) · 동옥저전(東沃沮傳)》에 "동부도위(東部都尉)는 불내성에 치소를 두고, 따로 영동칠현(嶺東七縣)을 주관했다."라고 하였다. 《전(傳)》에서 또 이르기를, "불내(不耐) · 화려(華麗) · 옥저(沃沮)는 모두 후국(侯國)으로 되었다. 나라는 적고 큰 나라 사이에 끼어 있기 때문에 할 수 없어 드디어 고구려에 신속(臣屬)하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수서(隋書) · 동이전(東夷傳)》에, "신라는 옥저(沃沮) · 불내(不耐) · 한예(韓濊)의 지역을 겸유하였다."라고 하였고, 《조선사략》에, "동이(東暆)는 임둔군의 치소로 지금의 강릉(江陵)이다."라고 하였으니 불내(不耐) 등 칠현은 틀림없이 오늘날의 길림(吉林)의 남쪽과 조선의 동북경내의 지역에 있었을 것이다. 단단대령(單單大嶺)은 《성경통지(盛京通志)》에서 고증한 바에 의하면 장백산맥 이남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산맥이라고 하였으니 오늘날의 함경도 남과 북은 예전에도 불내족(不耐族)이 살았던 곳이었다. 《삼국사기》 고구려 태조왕 66년(118) 기에, "현도(玄菟)를 습격하고,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였다."라고 하였다.[一] 화려(華麗)와 비려(碑麗)는 소리가 서로 통하는 이상, 그 지리위치도 서로 부합한다. 이 비에 이르기를, "왕이 몸소 군대를 거느리고 파부산(叵富山)을 치려고 산을 등지고 염난수(鹽難水)에 이르러 그 군사를 쳐부수었다." 운운하였다. 파부산(叵富山)은 곧 부산(富山)이다.<파부((叵富)는 쌍성에서 변한 것이다> 《삼국지(三國志) · 고구려전(高句麗傳)》에, "희평 년간에 백고(伯固)가 현도에 귀속할 것을 요청하였다. 공손탁(公孫度)이 해동에서 패권을 장악했을 때 백고(伯固)가 군사를 보내어 공손탁을 도와 부산(富山)의 도적을 쳐서 무찔렀다."라고 하였다. 부산(富山)이 현도의 경내에 있는 이상, 염수(鹽水)는 당연히 염난수(鹽難水)로 되고, 아마 그 지류는 지금의 봉천 동북부에 있는 지역으로 생각된다.

 

[一]  이 기사는 《후한서(後漢書) · 고구려전(高句麗傳)》과 똑같다.

 

   또 《한서(漢書) · 지리지(地理志)》에 낙랑군(樂浪郡)은 25현인데, 《후한서 (後漢書) · 군국지(郡國志)》에는 17현이 남아 있고, 탄열(呑列) · 동이(東暆) · 잠태(蠶台) · 사두미(邪頭味) · 전막(前莫) · 부조(夫租) · 화려(華麗) 등 8현이 줄었다.[一] 《후한서(後漢書) · 고려전(高麗傳)》에 의하면, 한(漢)에서 임둔 · 진번을 현도 · 낙랑에 합병하고, 영동칠현(嶺東七縣)을 나누어 동부도위(東部都尉)로 만들었다."라고 했는데 아직 더 있는 현 하나는 틀림없이 현도에 들어 있을 것이다. 이미 태조왕이 현도(玄菟)를 습격하고 화려(華麗)를 공격하였다 했다. 화려(華麗)는 8현 중의 하나였으니 그것이 바로 현도라는 현의 하나로 들어갔던 것은 아닐까? 《삼국사기》 신라 유리니사금(儒理尼師今紀)(원문의 '南海次次雄'은 '儒理尼師今'의 오기이므로 이를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역자주)에, "화려(華麗) · 불내(不耐) (두 현 사람들이) 연모(連謀:공모), (기병을 거느리고 북쪽 국경을 침입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맥국(貊國)과 친교를 맺었다."라고 하였으니 화려(華麗) · 불내(不耐)은 틀림없이 서로 가까이 있었음을 충분히 할 수 있다.[二] 이 비에 이르기를, "因過襄平道東來□□力城北豐五備"[三]라고 하였다. 이제 북풍(北豐)은 비려(碑麗)의 동쪽에 있는 이상, 이에 근거해서 화려(華麗)는 곧 비려요, 북풍(北豐)은 곧 불내(不耐)임을 추론할 수 있는 바, 성음(聲音)이 서로 통할 뿐만 아니라 그 지리위치에서도 서로 드러맞는다. 이제 여러 사서를 상고하여 서로 다르게 기록된 것을 아래와 같이 열거할 수 있다. 《삼국지(三國志) · 관구검전(毌丘儉傳)》에, "환도산(丸都山)에 각석(刊)을 하고,  불내성(不耐城)에 각명(銘)을 했다."라고 하였다.  《진서재기(晉書載記) · 모용황기(慕容皩紀)》에, "함강 7년(341), 모용황(慕容皩)은 용성(龍城)으로 천도를 하고, 정예병 4만 명을 이끌고 남합(南陜)으로부터 들어가 우문(宇文) · 고구려(高句麗)를 쳤다. 또 모용한(慕容翰) 및 아들 모용수(慕容垂)를 선봉으로 삼고, 장사(長史) 왕우(王寓) 등을 보내어 군사 15,000명을 거느리고 북치(北置)로부터 진군케 하였다. 고구려왕 쇠(釗)는 모용황이 북로로 올 것이라 생각하고, 곧장 그 아우를 보내 정예 5만 명을 거느리고 북풍(北豐)에서 이들을 저지토록 하는 한편, 몸소 약한 병졸들을 거느리고 남합(南陜)을 방어했다."라고 하였다. 《송서(宋書) · 만이전(蠻夷傳)》에, "원가 15년(438)<연대흥 7년>에, 모용연(慕容淵)은 다시 색로(索虜)에게 공격을 당하고, 고구려의 북풍성(北豐城)으로 패해 달아났다."라고 하였다. 《통전(通典) · 사예전(四裔典) · 고구려전(高句麗傳)》에, "정관 21년(647), 이적(李勣)이 다시 고구려를 남소(南蘇)에서 크게 이기고, 군사를 돌려 파리성(頗利城)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다. 《신당서(新唐書) · 고종본기(高宗本紀)》에, "건봉 2년(667), 설인귀가 고구려를 쳐부수고, 그 남소(南蘇) · 목저(木底) · 창암(蒼巖) 3성을 파괴하였다."라고 하였다. 남합(南陜) · 목저(木底)를 연칭한 것이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전연록(前燕錄)》에 자주 보인다. 남소(南蘇)와 남합(南陜), 파리(頗利)와 북풍(北)豐은 모두 동성자(同聲字)로서, 같은 곳을 다르게 불렀음이 충분히 증명되었다. 북풍(北豐) · 남소(南蘇)는 모두 고구려의 서북쪽에 있는 요충지이다. 《진서재기(晉書載記)》의 북치(北置)는 사실 북풍(北豊)과 글자의 모양이 비슷한 데서 생긴 착오이다.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에, "후연(後燕) 장락 5년 병신에, 모용성(慕容盛)이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쳤다. 표기대장군 모용희(慕容熙)를 선봉으로 삼아, 그 신성(新城) · 남소(南蘇) 두 성을 습격, 모두 승리하였다."라고 하였다.

 

[一] 《군국지(郡國志)》에는 낙도현(樂都縣)이 하나 더 있는데 《한지(漢志)》에서는 보이지 않으며, 일설은 곧 탄열(呑列)이라고 하는데 미덥지 못하다.

[二] 《한지지(漢地志)》에서 현도의 속현 고구려(高句驪)는 곧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국내성(國內城)으로 다른 이름은 불내성(不耐城)이었다. 아래에서 논하는 불내(不耐)는 동부도위(東部都尉)의 치소인 불내성(不耐城)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三]  양평도(襄平道)는 상고할 수 없다. 《진서(晉書) · 지리지(地理志)》 요동군에 역성(力城)이 있기는 하나 이 비문에서는 위의 두 글자가 빠져 곧 이 역성(力城)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삼국사기》 동천왕 20년(246) 기에, 《괄지지(括地志)》를 인용하여 이르기를, "국내성(國內城)은 곧 불내성(不耐城)으로 돌을 포개서 쌓았는데, 이곳은 바로 환도산(丸都山)으로, 국내성(國內城)과 서로 접해 있다."라고 하였다. 또 《지리지(地理志)》에 이르기를, "국내성(國內城)은 곧 위나함성(尉邦巖城)이다."라고 하였다.[一] 국내성(國內城)이 불내성(不耐城)이라는 것은 제가들이 모두 그렇게 여기는 바이다. 이름을 국내성(國內城)이라 하게 된 것은, 현도가 원래 주사(州司: 주장관과 같다)가 있는 곳이거니와 토착민들이 힘이 세서 주사(州司)를 차지하였기 때문이며, 이는 유리왕이 졸본(卒本)에서 위나암(尉那巖)으로 옮겨간 이유이기도 하였다. 환도산(丸都山)에 각석을 하고, 불내성(不耐城)에 각명을 했으니, 환도(丸都)가 곧 현도(玄莵)요, 불내(不耐) · 현도(玄莵)가 인접해 있었다는 것도 역사적 사실에 의해 입증되었다. 남소(南蘇)와 북풍(北豊)이 서로 가까이 있었던 것은, 이미 《진서(晉書) · 재기(載記)》 및 《통전(通典)》의 기록에 의해 입증되었다. 북풍(北豐)이 불내(不耐)인 이상, 불내(不耐)는 곧 국내성(國內城)이며,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에서는 또 신성(新城) · 남소(南蘇)를 연칭하였기 때문에 신성(新城)도 불내(不耐)의 별명이 아닌가 한다. 《삼국사기》 고구려 서천왕 7년(276) 기에,"여름 4월에 왕이 신성(新城)에 갔다."라 하고, 거기에 주석하기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신성(新城)은 나라 동북쪽에 있는 큰 도시(大鎭)이다."라고 하였다. 《조선사략》 및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가 수도를 정한 것은, 시조 동명왕(東明王)이 졸본(卒本)에 나라를 세운 때부터 비롯해서, 유리왕(琉璃王) 22년(A.D 3)에 국내성(國內城)으로 서울을 옮겼다. 산산왕(山上王) 13년(209)에 환도성(丸都城)으로 옮겼다. 동천왕(東川王) 21년(247)에 환도성이 관구검(毌丘儉)의 전쟁을 겪으면서 더 이상 도읍지로 할 수 없게 되자, 평양성(平壤城)을 쌓아 백성과 묘사(廟社)를 옮겼다. 고국원왕(故國原王) 5년(335) 정월에 나라의 북쪽에 신성(新城)을 쌓았다. 9년(339)에, 연왕(燕王) 모용황(慕容皩)이 침입하여 신성(新城)에 미치니 왕이 맹약을 청하니 돌아 갔다. 12년(342) 8월에 환도로 옮겼다. 12월에 또 모용황에게 격파당했다. 13년(343) 가을 7월에, 비로소 평양 동쪽 황성(黃城)에 거주했다고 했다. 이로써 불내(不耐)는 관구검의 전쟁을 겪으면서 신성(新城)을 개축하게 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다른 이름을 신성(新城)이라 했던 것이라는 증명이 된다. 사가들이 이를 답습해 오다가 시일이 경과하면서 신성(新城)이 곧 불내성(不耐城)임을 모르게 된 것이다. 《삼국사기 · 지리지》에서는 《가탐도리기(賈躭道里記)》<《신당서(新唐書)》 및 《발해국지(渤海國志)》에서 인용한 것과 대략 같다> 에, "압록강 어구에서 배를 타고 1백여 리를 가다가 작은 배를 타고 동북쪽으로 30리를 거슬러 가서 박작진(泊汋鎭)에 이르러 발해의 국경에 도달했다. 또 5백 리를 거슬러 올라가 환도성(丸都城)에 이르렀는데 옛 고구려의 왕도였다. 또 동북쪽으로 2백 리를 거슬러 올라가 신주(神州)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다. 《신당서(新唐書) · 고구려전(高句麗傳)》에 이르기를, "압록수(鴨綠水)는 국내성 서쪽을 거쳐서 염난수(鹽難水)와 만나며, 또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안시(安市)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라고 하였다.[二]

 

[一]  방(邦)은 곧 나(那)의 오기이다. 유리왕 22년, 졸본(卒本)에서 위나암성(尉那巖城)으로 도읍을 옮겼다.(《고구려본기》 당해 연도 기사에 의하면 국내로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고 하였다, 역자주)

[二] 《한서(漢書) · 지리지(地理志)》에 요동군(遼東郡)에는 안평(安平) · 안시(安市) 두 현이 있다. 안평(安平)은 곧 서안평(西安平)으로 지금의 안동(安東)이며,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이다. 여기의 안시(安市)는 곧 안평(安平)의 오기로 생각된다.

 

  《신당서(新唐書) · 지리지(地理志)》에 따르면, "영주(營州) 남쪽에서 압록강 박작성(泊汋城)까지는 7백 리인데, 옛 안평현(安平縣)이다."라고 하였다. 두 사서에 기록된 것에 의해 고증해 보면, 국내성(國內城)은 틀림없이 압록강 북안 가까이 있는 곳이다. 《요사(遼史) · 지리지(地理志)》에 이르기를, "(녹주 압록군은 원래 고구려의 고국으로 발해에서 불렀던) 서경압록부(西京鴨綠府)에는 정주(正州) · 신주(神州) · 환주(桓州) · 풍주(豊州) 4주가 속했다. 정주(正州)는 압록부 서북쪽 380리에 있는데, 이에 속한 현인 동나현(東那縣)은 원래 한나라의 동내현(東耐縣)[一]의 근거지로, 이 주 서쪽 70리에 있으며 비류왕(沸流王)이 전에 살았던 곳이다. 환주(桓州)는 이 부의 서남쪽 2백 리에 있는데 이에 속한 현은 셋으로, 환도(桓都) · 신향(神鄕) · 기수(淇水)<《발해국지(渤海國志)》에서는 패수(浿水)로 인용해 썼다>이다."라고 하였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 이르기를, "대개 상경(上京)은 영고탑(寧古塔)에 있었고, 중경(中京)은 요양(遼陽)에 있었고, 동경(東京)은 조선의 개주(開州)에 있었고, 남경(南京)은 해성현(海城縣)에 있었으며, 서경(西京)은 압록강에 있었다."라고 하였다. 이에 따르면 기수(淇水)는 패수(浿水)의 오기로 생각된다. 패수(浿水)는 곧 압록강이니 패수현(浿水縣)은 틀림없이 강 가까이에 있었던 곳이리다. 환도(桓都)와 환도(丸都)는 성음이 같고, 환주(桓州) · 정주(正州)는 이 부의 서남과 서북을 차지한 지역이었으니 동내(東耐)와 환도(桓都)는 모두 서로 이웃해 있었을 가능성이 있어, 여러 사서에서 말하는 환도(丸都) · 불내(不耐)의 지리위치와도 서로 합치된다. 또 《한서(漢書) · 지리지(地理志)》의 안사고(顔師古) 주석에, "고구려현에 남소수(南蘇水)가 있는데 서북으로 새외를 거쳐간다."라고 하였으니 남소성(南蘇聖)은 남소수(南蘇水)를 내려다 보고 있는 데서 얻어진 이름이요, 틀림없이 현도군 경내에 있었을 것이다. 호삼성(胡三省)의 《통감음주(通鑑音注)》에, "남소(南蘇)는 요동에 있다."라고 하였다.[二] 《성경통지(盛京通志)》에서는 《가탐군국지(賈躭郡國志)》를 인용하여, "신성(新城)은 요동의 동북쪽에 있다."라고 하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진성제 함강 8년(342), 모용황이 고구려를 쳤다. 고구려로 가는 두 개의 길이 있었는데 그 북쪽에 있는 길은 평평하고 널찍하며, 남쪽에 있는 길은 험준하여 다니기 어렵자, 모든 사람들은 북쪽 길을 이용하려고 하였다. 모용한(慕容翰)이 말하기를, '적들의 인지상정으로 헤아려 보면, 반드시 대군이 북쪽으로 올 것이라 생각하고, 북쪽을 중히 여기고 남쪽을 가볍게 생각할 것은 당연하다. 왕께서 정예군을 거느리고 남쪽 길로 해서 쳐들어가 남이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틈을 타서 행동을 취한다면, 환도를 취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三] 호삼성(胡三省)의 주에서, "북쪽으로 가는 길은 북치(北置)<북풍(北豐)의 오기로 생각된다>에서 진군하고, 남쪽으로 가는 길은 남합(南陜)에서 들어갔다."라고 하였다. 위에서 든 여러 증거에 의하면, 국내성(國內城)은 압록강에 가까이 있는 지역일 뿐만 아니라, 또 남소성(南蘇城)의 북쪽에 있었을 것이다. 정말로 이와 같이 《가탐군국지(賈躭郡國志)》 및 《신당서(新唐書) · 고려전(高麗傳)》에서 국내성은 압록강 가까이에 있었던 것이라고 하니, 필시 지금의 압록강 상류의 동가강이었을 것이요, 흥경(興京)의 남쪽과 지금의 회인(懷仁)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회인(懷仁)의 구명은 환인(桓仁)이니 어찌 환도성(桓都城)의 고지(古址)는 아니겠는가?<인(仁)과 도(都)는 같은 종류의 쌍성이다>  

 

[一] 《한지(漢志)》를 상고해 보면, 낙랑군에 불내현(不耐縣)은 있으나 동내현(東耐縣)은 없으니 여기의 東자는 不자의 오기로 생각된다.

[二]  여러 탁본에는 모두 남합(南陜)의 동쪽으로 써 있다. 다만 《성경통지(盛京通志)》는 요동의 동쪽으로 인용해서 썼다. 남합(南陜)은 곧 남소(南蘇)이니 《성경통지》에서 근거한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된다.

[三]  이 문장은 《진서(晉書) · 재기(載記)》와 대략 같으나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에는 보이지 않는다. 《탕구집본(湯球輯本)》에는 아직 수록되지 않았으므로 그 출처를 모르겠다.

 

《요사(遼史) · 지리지(地理志)》에, "집주(集州)는 고비리국(古陴離國)으로, 한나라의 험독현(險瀆縣)이며, 고구려의 상암현(霜巖縣)이다."라고 하였다. 상암(霜巖)은 곧 창암(蒼巖)으로 목저(木底) · 남소(南蘇)는 모두 비슷하다. 《발해국지(渤海國志)》에, "집주(集州)는 고비리국(古陴離國)으로 혼하(渾河)가 있으며, 관할로 봉집현(奉集縣)이 있다."라고 하였다. 《성경통지(盛京通志)》에 "봉집(奉集)의 유지는 무순성(撫順城) 남쪽 80리에 있다."라고 하였다. 비리(陴離)는 곧 비려(碑麗)요, 무순(撫順)은 회인(懷仁)의 서북쪽에 있으니 이 비에서 말하는 비리(碑離)를 평정한 뒤에 동쪽으로 가서 북풍(北豊)으로 왔다는 것과 사실이 부합된다. 그러한즉 오늘날의 봉천(奉天) 동북쪽의 압록강 이북 지방은 옛날에 불내부(不耐部)가 살았던 곳이다. 《신라진흥왕비(新羅眞興王碑)》에서 말하는 비리성군주(碑利城軍主) 훼구등창(喙口登창) 사척간(沙尺干) · 감문군주(甘文軍主) 훼구맥부창급(喙口麥夫창及) 사척간(沙尺干)이다. 《삼국사기 · 신라본기》에, "진흥왕 17년(556) 7월, 비열홀주(比列忽州)를 설치하고 사찬(沙湌) 성종(成宗)을 군주로 삼았다. 18년(557)에, 감문주(甘文州)를 두어 사찬(沙湌) 기종(起宗)을 군주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이로써 감문군주(甘文軍主)는 곧 감문주군주(甘文州軍主)임을 알 수 있으니 비리성(碑利城)은 곧 비열홀(比列忽)의 군주이다. 《삼국사기 · 지리지》에, "삭주(朔州) 삭정군(朔廷郡)은 곧 비열홀군(比列忽郡)이다." 또 "선덕왕 6년(637)에 우수주(牛首州)로 만들어 군주를 두었고, 경덕왕이 삭주(朔州)로 개칭한 것인데 지금의 춘주(春州)인바, (가탐의 《고금군국지》에서 말하는) 고구려의 동남쪽과 예(濊)의 서쪽으로 옛날 예(濊)의 고지이기도 하다."라고 하였다. 또 《직관지(職官志)》에, "문무왕 13년(673), 비열홀정(比列忽停)을 없애고 우수정(牛首停)을 설치했다."라고 하였다. 또 문무왕 8년(668) 기에, "이찬 인태(仁泰)를 비열도총관(比列道總管)으로 삼고, 잡찬(迊湌: 원문의 '近湌'은 '迊湌'의 오식이므로 이를 바로 잡아 번역했다, 역자주) 군관(軍官) · 대아찬 도유(都儒) · 아찬 용장(龍長: 원문에 빠진 것을 《직관지(職官志)》를 근거로 보완했다, 역자주)으로 한성주행군총관(漢城州行軍總管)으로 삼고, 잡찬 숭신(崇信) · 대아찬 문영(文潁) · 아찬 복세(福世)를 비열성주행군총관(比列城州行軍總管)으로 삼았으며, 파진찬 선광(宣光), 아찬 장순(長順) · 순장(順長)을 하서주총관(河西州總管)으로 삼았다."라고 하였다.[一] 생각건대 비열홀(比列忽)이 비열홀성(比列忽城)이라는 것은 이미 의심할 나위도 없다. 그리고 《진흥왕비(眞興王碑)》 중의 비리성(碑利城)은 다시 말하면 비열성(卑列城)이다. 《삼국사기》 진흥왕 29년(568) 기에, "비열홀주(比列忽州)를 없애고 달홀주(達忽州)를 설치했다."라고 하였다.[二] 이곳의 비열홀(比列忽)이 바로 비열성(比列城)으로, 지금의 춘천(春川) 지방이며, 옛날에 맥국(貊國)이 있어, 불내(不耐)와 더불어 여러 사람들이 뒤섞여 살았다. 또 옛 마한 지역에는 비리(卑離)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것으로 8개국이 있는데, 비열(緋列) · 비리(比列) · 비리(碑利)와 비려(碑麗) · 불내(不耐)는 성음이 같도, 그들이 살았던 지역도 엇비슷하니, 오늘날의 한반도 중부 및 서부의 지역은 예전에도 불내족(不耐族)들이 살았던 곳이다. 이제 위에서 열거한 여러 방증에 근거해서 그 개괄적인 결론은 아래와 같이 내릴 수 있다. 비리는 곧 불내부요, 그 이역(異譯)으로 화려(華麗) · 파리(頗利) · 비리(碑利) · 북풍(北豊) · 비열(比列) · 비열(卑列) · 비리(卑離) · 비리(陴離) 등 이칭(異稱)이 있고, 대체로 이 부가 이르렀던 곳이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바로 이 부의 명칭으로 그들이 살았던 지역을 일컫게 되었으니 이 부는 순노(順奴) · 소노(消奴) · 절노(絶奴) · 관노(灌奴) · 계루부(桂婁部) 등과 함께 부여족의 족속이었으며, 옛 만주 압록강 북부 및 옛 한반도의 남북 각지에서 흩어져 그 명칭의 변화가 많고 지역이 흩어져 있는 것을 널리 고려해 보면, 틀림없이 부여족 중에서 가장 강성한 부(部)였을 것이다. 호태왕 때에 이르러 그 활동의 자취가 틀림없이 이미 오랜 시간의 역사를 거쳤을 것이다.

 

[一] 《조선역사지리(朝鮮歷史地理)》 제1권, 진전좌우길씨의 《진흥왕정복지역고(眞興王征服地域考) 》에서는 곧 이에 근거해서 비열홀(比列忽)을 비열성(卑列城)으로 추정하였다. 

[二]  진전좌우길씨는 이 기록이 미덥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즉, 소지마립간 3년에 왕이 비열성으로 행차한 것도 안변(安邊)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신라 무열왕 5년기에 하슬라(何瑟羅) 지역이 말갈(靺鞨)과 잇닿아 있어 사람들이 편안할 수 없다고 하여 경(京)을 폐지하고 주(州)로 만들고 도독(都督)을 두어 지키게 하였으며, 또 실직(悉直)으로써 북진(北鎭)을 삼았다고 하였다. 소지마립간은 진흥왕보다 3대가 빠르고, 태종무열왕은 진흥왕보다 4대가 늦으니 소지 · 진흥왕 대에는 신라가 아직 하슬라주 이북 지역을 아직 차지하지 못했음을 아는 데 증거로서 충분하다. 기실 진전씨의 주장은 아직 다 믿을 근거는 못 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 지리지(地理志)》에 고성(高城)은 명주에 있는데 옛날 이름은 달홀(達忽)이라고 하였으며, 삭정군(朔庭郡)은 삭주(朔州)에 있는데 옛날 이름은 비열홀(比列忽) 혹은 등주(登州)라 한다고 하였다. 《고려사(高麗史) · 지리지(地理志)》에 춘추(春州)는 곧 우수주(牛首州)로 옛날 삭주의 땅이다. 북청주부(北靑州府)는 또 삭주에 있는데, 동쪽 경계는 옛 고구려 땅인 등주(登州)에 있으니 곧 옛 비홀군(比忽郡)이다. 이에 속한 현은 상음(霜陰)이니 곧 옛 삭정군 고성현으로 옛날 이름은 달홀(達忽)인데 명주 경내에 있다. 상음은 원래 삭정의 속현으로 《삼국사기》에는 삭주에 속했고, 명주는 곧 하슬라주의 별명으로 옛날 예국(濊國) 땅이며, 지금의 강원도 동북 경내에 있었다. 《동번기요(東藩紀要)》에 의하면, 춘천은 강원도에 있는데 서울로부터 250리 떨어져 있으며, 일명 우수(牛首) · 삭주(朔州) · 춘주(春州)라고 하였다. 고성현도 강원도에 속하는데 서울로부터 10리 떨어져 있으며, 일명 천성(淺城) · 삭정(朔庭) · 등주(登州)라 한다고 하였다. 이에 근거해 보면, 달홀이 명주에 있는 이상 안변은 틀림없이 그 보다 더 북쪽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의 동쪽 경계는 결코 해변지역이 아니라 아직도 명주의 서쪽에 있었다. 《고려사》의 등주 삭정군은 당연히 《삼국사기》의 삭주 삭정군임에 틀림이 없다.

 

   5년에 비려(碑麗)를 토벌한 사실은 《삼국사기》 및 《동국통감》에 보이지 않는다. 다만 《삼국사기》 광개토왕 원년 9월에 거란(契丹)을 쳐서 남녀 5백 명을 사로잡았고, 또 본국에서 붙잡혀 갔던 백성 1만여 명을 초유(招諭)하여 데리고 돌아왔다고 하였다. 《당회요(唐會要)》에 의하면, 거란은 황룡(黃龍)의 북쪽과 황수(璜水)의 남쪽에 산다고 하였다. 황룡(黃龍)은 곧 요의 상경(上京)이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는 지금의 영고탑(寧古塔)에 있는 것이라 생각하였고, 황수(璜水)는 지금의 요하의 지역으로 생각하였으니 지금의 봉천(奉天) 서쪽에 있었다. 비려부(碑麗部)가 있던 곳과 비교하여 비록 같은 방향에서 좀 떨어지기는 하였지만, 혹시 이 때 일어났던 일이 5년에 비려(碑麗)를 쳤던 사건은 아닐까? 

 

   불식(不息)이란 불안한 것을 이르는 말이다. 혹시 거란인들에 의해 국경지역이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들을 토벌한 것은 아닐까? 원년 10월에 또 백제(百濟)를 친 일이 있는데 이미 이 비문과 서로 고증을 해 보면 그런 일은 6년기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아래에 자세히 언급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항목의 기록은 모두 바로 5년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같은 해의 기록 중에 9월에 북쪽으로 거란(契丹)을 치고, 10월에 남쪽으로 백제(百濟)를 쳤다고 하는데 역시 이와 같이 동시에 두 개 지역에서 다른 적을 상대로 전쟁을 치를 수 있을까? 사실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또 이 비는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웠다고 하였는데 이와 같은 큰 공적은 결코 기록에서 빠뜨릴 수 없다. 이 비문에서 공적을 기록한 것은 5년부터 시작하였으니, 대개 5년 이전에는 기록할 만한 큰 공적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같은 주장을 세우려면 사실의 증명을 더 기다려야 한다.

 

백잔(백제) · 신라는 과거에 우리 고구려의 속국으로, 전부터 우리에게 조공을 하여 왔었다. 그러나 신묘년 이래로 왜가 바다를 건너 백잔과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기 때문에 영락태왕 6년, 그해는 병신년으로, 호태왕은 몸소 수군을 거느리고 백잔국을 쳤다.(百殘新羅, 舊是[一]民, 由來朝貢。而倭以亲[二]卯[三]年來, 渡海破百殘, □□□新羅, 以爲臣民。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討利殘國; 軍□□ :)

 

   《삼국사기》에 신라 박혁거세(朴赫居世)는 전한 오봉 원년(B.C 57) 갑자일에 건국하니 나라 이름을 서나벌(徐那伐)이었다. 혹은 사로(斯盧), 혹은 사라(斯羅), 혹은 신라(新羅)라고 하였다. 《북사(北史)》에, "신라국은, 그 조상이 원래 진한(辰韓)의 종족이다. 그 지역은 고구려의 동남쪽에 있다."라고 하였다. 《삼국지(三國志) · 변진전(弁辰傳)》에 사로국(斯盧國)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바로 신라(新羅)라고 한다. 건국은 백제(百濟)보다 뒤져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것과 맞지 않는다. 그래서 이상의 기록은 모두 미덥지 못하며, 신라(新羅)는 사실 부여의 족속이다.

 

[一] 《한제요비(漢帝堯碑)》의 "御九州, 統理"는 이와 같다.

[二] 《북위효문제조비간묘문(北魏孝文帝弔比干墓文)》에, "視覈殷"이란 말이 있고, 《수두건저등조상명(隋杜乾赭等造像銘)》에 "十月巳가 있는데 생각건대 친(亲)은 곧 신(辛)이다.정(鄭)은 부씨(傅氏)가 래(來)로 해석했다고 하는데 틀렸다.

[三] 《정본(鄭本)》에는辛卯라 하고, 《양본(楊本)》에서는 來卯라고 했는데 틀렸다.

 

   《당회요(唐會要)》에, "신라는 원래 변한(弁韓)의 지역으로, 그 풍속 · 의복은 고구려 · 백제와 대략 같고, 그 선조는 고구려에서 나왔다. 위나라 장수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쳐부수자 그 무리가 옥저(沃沮)로 달아나 그곳에 의지했다. 나중에 귀국을 하고 거기에 남아 있는 자들을 신라(新羅)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책부원구(冊府元龜)》에 "신라(新羅)는 혹은 사로(斯盧)라 하고, 그 나라 왕은 원래 백제 사람이었다. 바다로부터 신라로 도망쳐 들어가 마침내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여러 사서에는 모두 신라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 뒤에 바로 해씨(解氏)로 성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남해(南解) · 탈해(脫解)와 같은 것은 주몽(朱蒙)의 별명인 중해(衆解)와 같다. 그 나라가 부여족(夫餘族)에 딸렸던 것임은 두말할 것 없다. 《삼국유사》에 이르기를, "처음에 왕이 계정(鷄井)<수풀 림(林)자의 오기로 생각된다>에서 태어 났으므로 혹은 일러서 계림국(鷄林國)이라고도 하니, 그 계룡(鷄龍)은 상서로움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이르기를, "시림(始林)에서 닭에게 기이한 일이 생겨서 시림(始林)을 계림(鷄林)으로 이름을 고쳤다."라고 하였다. 두 설은 모두 미덥지 못하다. 계림(鷄林)은 사실 사로(斯盧) · 신라(新羅)라는 동음어(同音語)에서 변화한 것이다. 신라가 건국하였던 곳은 일본 사람 진전씨(津田氏)의 고증에 따르면, 오늘날의 강원 · 경상 두 도의 사이에 있었는데, 북쪽으로는 예맥(濊貊)<곧 《삼국사기》에서 일컫는 말갈(靺鞨)이다>과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임나와 접하며, 동쪽 경계는 바다요, 서북쪽은 고구려와 접하고, 서쪽으로는 백제와 인접한 곳이라고 하였는 바, 대개 진흥왕(眞興王) 이전의 지역을 근거로 말하는 것이다.

 

   백잔(百殘)은 곧 백제(百濟)인데, 백제(百濟)는 또 백제(伯濟)로도 썼으며, 여러 사서에서 모두 이르기를 처음에 백가(百家)가 바다를 건넜기 때문에 그래서 백제(百濟)라 한다고 하였다. 이제 이 비에서 백잔(百殘)이라고 하였으니 위에서 말한 것은 억지로 갖다 붙인 부회(附會)였음이 충분히 입증되었는 바, 잔(殘) · 제(濟)는 사실 동성자(同聲字)이다. 《삼국지(三國志) · 마한전(馬韓傳)》에 백제국(伯濟國)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바로 이것이 나중에 백제가 나라를 세우는 밑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북사(北史)》에 이르기를, "백제는 동쪽으로 신라에 이르고, 북쪽으로 고구려와 접하며, 서남쪽은 모두 대해를 한계로 하고, 북쪽으로 한강(漢江)에 미친다.(원문에 다른 표현은 대충 맞으나 북으로 한강에 미친다는 표현은 없다, 역자주) "라고 하였다. 《구당서(舊唐書) · 백제전(百濟傳)》에 이르기를, "백제는 부여의 별종이다. 동 · 북쪽으로 신라, 서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월주(越州)에 이르고,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 왜(倭)에 이르며, 북쪽으로 고구려와 거리를 두고 있다."라고 하였다. 백제가 부여족이라는 것은 사실 여러 사서에서 공인하는 바이다. 《삼국사기 · 백제온조왕기》에 이르기를, "주몽(朱蒙)이 왕위를 이어 아들 두 사람을 낳았는데맏아들은 비류(沸流)요, 둘째 아들은 온조(溫祚)이다.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염려되어 드디어 오간(烏干) · 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를 데리고 남쪽 지방으로 떠나니 백성들 중에서 따르는 자가 많았다.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렀다.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살 만한 곳을 살피다가 비류(沸流)는 바닷가에서 살고 싶어했다. 열 명의 신하가 간하기를, '생각건대 이곳 강물 남쪽의 땅은 북으로 한수(漢水)를 띠었고, 동으로 높은 산악에 의거하고 있으며, 남으로 비옥한 들판이 바라 보이고 서로는 큰 바다가 막혔으니 이러한 천험의 요새로 된 좋은 땅이야말로 얻기 어려운 것이니 이 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으나 비류는 듣지 않고 따라온 백성들을 나누어서 미추홀(彌鄒忽)로 가서 살게 되었다. 온조는 하남(河南)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로써 보좌를 삼았다."라고 하였다. 이는 설사 신화일지라도 백제와 부여족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구실이 될 수 있다. 백잔(百殘)은 이 비에서 또 이잔(利殘)으로도 일컬었다. 이잔(利殘)이란 나잔(羅殘)이다. 이(利) · 라(羅)는 쌍성으로 아래에 나오는 여러 곳의 기록에 오늘날 신라의 경내에 있다. 이 비문에서 이르기를, 신묘년 이래 바다를 건너 백잔(百殘)을 파하고, □□□羅을 신민으로 삼았다고 했는데 빠진 글자 라(羅)자의 위에는 틀림없이 새로울 신(新)자이다. 다시 신묘년 전쟁에서 추정할 수 있는 것은 백잔 · 신라가 왜에 함께 붙었으므로 호태왕의 이 전쟁은 사실 신라 · 백잔 두 나라를 동시에 친 것이다. 이 비문에는 동성자(同聲字)가 자주 통용되었으며, 왜(倭)가 신묘년 이래, 바다를 건너 백잔(百殘)을 격파했다는 기사가 《삼국사기》 및 《동국통감》에 보이지 않는다. 생각건대 계사년, 광개토왕 3년(394)[一] 여름 4월에, 왜인이 신라의 금성(金城)을 애워쌌다. 가을 8월에, 고구려가 백제에 의해 공격을 당해 고구려 사람들이 영성(嬰城)에서 고수했다. 병신년에 이잔(利殘)을 쳤다는 기사도 《삼국사기》 및 《동국통감》에 보이지 않지만,  이제 곧 광개토왕 원년기(392) 10월에 백제를 정벌했다는 기사였음이 이미 판명되었으니 아래와 같이 자세하게 설명한다. 

 

首攻取[二]壹八城, 臼[三]模盧城, 各模盧城, 幹□[四]利城, □□城, 閣彌城[五], 牟盧城[毓], 彌沙城[七], □舍蔦城[八], 阿旦城[九], 古利城, □利城, 磼彌城[十〇], 奧利城[十一], 勾牟城, 古模耶羅城[十二], 須[十三]□□□□城[十四], 分而耶羅□[十五], 瑑[十六]城, □ [十七]城, □□□, 豆[十八]奴城, 沸八?利城[十九], 彌鄒城, 也利城, 大山韓城, 掃加城[二〇], 敦拔城[二一], □□□□婁賣城, 散□城[二二], □婁城[二三], 細城, 牟婁城, 于婁城, 蘇灰城, 燕婁城, 析支利城[二四] , 巖門至城, 林城, □□□□□□□利城[二五], 就鄒城, □拔城, 古牟婁城, 閏奴城, 貫奴城[二六], 穰城[二七], □□□□□羅城[二八], 仇天城, □□□□□其國城。 

 

[一]  여러 사서에서는 2년으로 썼는데, 임진년은 광개토왕 원년이므로 마땅히 이 비에 근거해서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二] 《정본(鄭本》에서는 取자가 빠졌다.

[三] 《정본(鄭本)》에서는 ?로 썼다.

[四]  전문(篆文) 상(上)과 같다.

[五]  백제에 관미성(關彌城)이 있었다. 육씨(陸氏)는 각(閣)은 관(關)의 오기라고 했고, 양씨(楊氏) · 정씨(鄭氏)는 모두 이 설을 따랐다. 관(關) · 각(閣)은 원래 쌍성으로 통용되거나 가차할 수 있는 만큼 틀린 것이 아니다.

[六]  나(羅) · 정(鄭) 2본은 城자가 빠졌다.

[七] 《샤반느본》은 절반 정도가 떨어져 나갔다.

[八] 《샤반느본》은 舍자가 빠졌고, 뇨(蔦)를 鳥로 썼다.

[九]  은, 정씨(鄭氏)는 旦으로 써서 풀이했다. 《수룡장사비(隋龍藏寺碑)》에 旦은 모두 으로 썼으나, 육조(六朝)의 별체 旦과 且는 항상 서로 뒤섞였다. 豊과 더불어 어느 때는 豐으로 썼고, 어느 때는 豊으로 쓰는 것과 똑같이 사람들로 하여금 머리를 어지럽게 한다. 전대흔(錢大昕)이 《연잠당금석문자발미(硏潛堂金石文字跋尾)》에서 이르기를, "《당개성석경(唐開成石經)》에서 《좌전(左傳)》 '成公二年, 且辟左右' 이란 구절의 且를 旦으로 썼다. 꿈은 반드시 밤에 있는 것이니 단의(旦義)가 의미 심장하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12권 6쪽에, "그의 공로를 생각하고 또한 늙었기 때문에 은총을 베풀고 표창하였다(念其功且老, 故寵褒之)"라고 하였는데 여기의 旦은 且자로 생각된다. 42권 6쪽에 "結好講和"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도 틀림없이 이 글자는 但자일 것이다. 또 24권 4쪽에 "築阿且城"이라고 하였고, 45권 10쪽에 "阿旦城"이 있다. 이밖에도 본서 및 《조선사략(朝鮮史略)》에서는 어느 때는 아차(阿且)로 쓴 것이 있고, 어느 때는 아단(阿旦)으로 쓴 것이 있다. 그렇다면 아단성(阿旦城)이라는 것은 더욱더 아차성(阿且城)은 아닐까? 제가 생각건대 아차성(阿且城)이라 여겨진다. 《한현유선생루수비(漢玄儒先生婁壽碑)》에 "榮且溺之耦耕"이란 구절이 있다. 차(且)는 곧 저(沮)요, 아차(阿且)란 것은 옥저(沃沮)를 뜻하는 말이다. 옥저(沃沮)는 부여족(夫餘族)의 별명이다.

[十〇]  잡은 雜자이다. 《서위승연조상기(西魏僧演造像記)》에 "經三百"이란 구절이 있다. 雜은 곧 잡이다. 이 비의 아래 문장에서는 잡으로 썼다. 《당?양령우효현비(唐?陽令于孝顯碑)》에 "五方?沓"이란 구절이 있고 이비의 아래 문장에 막신라(莫新羅)의 新자는 변으로 되어 있다.

[十一] 《정본(鄭本)》·《샤반느본》에서는 모두 奧로 썼다.

[十二] 《정본(鄭本)》에서는 古須那羅城으로 썼다. 《양본(楊本)》에서는 ?을 那로 썼다.

[十三] 《샤반느본》·《정본(鄭本)》에서는 모두 頁로 썼다.

[十四]  城자는 각 탁본에 모두 빠졌는데 《정본(鄭本)》만 글자가 남아 있다.

[十五]  分자는 각 탁본에 모두 빠졌는데 《정본(鄭本)》·《샤반느본》에 가까스로 남아 있다.

[十六] 《정본(鄭本)》에는 易으로 썼다. 《샤반느본》은 여기서부터 豆자까지 모두 빠졌다. 이 비의 아래 문장에 ?성이 있다.

[十七] 《정본(鄭本)》은 전체가 빠졌고, 여기서부터 豆자까지 《양본(楊本)》에는 빠졌다.

[十八] 《유본(劉本)》에는 빠졌고, 오직 《정본(鄭本)》에만 남아 있다.

[十九]  八 두 글자는 여러 탁본에서 모두 빠졌고, 오직 《정본(鄭本)》에만 남아 있다.

[二〇]  掃자는 《정본(鄭本)》에서 ?로 썼다.

[二一]  城자는 《정본(鄭本)》에만 남아 있고, 여러 탁본에는 빠졌다.

[二二]  자는 《정본(鄭本)》에 散으로 썼다. 

[二三]  婁자는 여러 탁본에서 빠졌고, 《양씨본(楊氏本)》·《샤반느본》에만 남아 있다.

[二四]  支자는 《샤반느본》에서는 절반이 떨어져 나갔다.

[二五]  利자는 여러 탁본에 빠졌고, 《정본(鄭本)》에서는 利 위쪽으로 7자가 연이어서 빠졌다.

[二六]  貫은 《정본(鄭本)》에서 昌으로 썼다.

[二七]  彡은 《설문(說文)》의 부수이다. 허신(許愼)은 "수염이나 그림을 꾸미는 무늬이다(毛飾之紋也). 상형자이다."라고 하였다. 소형절(所衡切)로 이 음을 썼다.

[二八]  羅자는 《정본(鄭本)》에서 盧로 썼다.

 

   이 50여 성은 모두 나 · 제(羅濟)에 속한 지방으로 3부류로 나누어 말할 수 있다. 첫째 부류는 그 음훈(音訓)에 따른 것으로, 그것이 어디에 있다고 가르키지 못하는 것이요, 두째 부류는 그것이 어디를 가리키는 곳인지는 알 수 있으나 그곳의 현재의 지점을 확정할 수 없는 것이요, 셋째 부류는 현 지점을 명확하게 가리킬 수 있는 것이다. 첫째 부류로는 구모로성(臼模盧城) · 각모로성 (各模盧城) · 모루성(牟婁城) · 모로성(牟盧城) · 고모로성(古牟盧城) 등과 같이 해부루(解夫婁)에서 한 음이 변화발전한 것으로 그곳은 처음 부여족(夫餘族)이 살았던 지방이다. 《통전(通典) · 신라전(新羅傳)》에 가로되, "그 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성(城)을 건모라(健牟羅)라고 한다."라고 하였는데, 건모라(健牟羅)란 모로(模盧)와 같은 또 다른 번역이다. 모로(模盧)와 병칭된 구모로(臼模盧)는 처음에 사실은 그들의 족명(族名)으로써 그들이 살고 있던 성(城)을 대신하였던 것인데, 그뒤 점차 성(城)이라는 보통명사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시일이 오래 되면 오래 될수록 이역(異譯))의 음이 달라지게 되었고, 또 한자인 성(城)이 해동에서 통용됨에 따라 건모라(健牟羅)라 하는 것은 또 보통명사에서 고유명사로 바뀌게 되었다. 《삼국사기》 및 《고려사》의 《지리지》중에서는 사실 건모라와 같은 음의 성명은 확실히 찾을 수 없지만, 생각건대 《삼국사기》내에 있는 설부루성(屑夫婁城)이라는 것이 바로 초리파리성(肖利巴利城)이요, 실재 현지명은 아직 없지만 그것이 건모라(健牟羅) · 모루(模婁)와 같이 똑같은 음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것이 줄어서 모루(牟婁) 혹은 모로(牟盧)가 되는 것은 모두 음변(音變) 후에 그 발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 비문 중에 또 고리성(古利城) · 오리성(奧利城) · 우루성(于婁城) · 연루성(燕婁城) · 야리성(也利城) 및 아래 문장의 어리성(於利城) 등 이상의 여러 성은 모두 동성(同聲)으로 그 어근은 읍루(揖婁)로, 역시 부여족들이 예전에 살았던 곳이며, 족명으로써 그들이 살던 지역을 이른 것이다. 《통전(通典) · 신라전(新羅傳)》에 이르기를, "그 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성(城)을 건모라(健牟羅)라 부르고, 그 중앙에 있는 것을 훼평(喙評), 그 지방에 있는 것을 읍륵(邑勒)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훼평(喙評)이란 말에 대해서는 앞서 상술하였고, 읍륵(邑勒)은 사실 야리(也利)요, 연루(燕婁) · 읍루(揖婁) 등의 또 다른 변역이다. 그것들이 고유명사로 된 이치는 건모라와 같다. 훼평(喙評)과 읍륵(邑勒)은 역시 경성(京省)과 군현(郡縣)의 구분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신라전(新羅傳)》에서 또 이르기를, "그 나라에는 16훼평(喙評)과 52읍륵(邑勒)이 있다."라고 하였다. 읍륵(邑勒)은 훼평(喙評)에 비해서 한 등급이 낮은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삼국사기》 및 《고려사》의 《지리지》중에서 조사해 보면, 읍륵(邑勒)과 동음자로 된 지명으로, 아직도 그 흔적을 상고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삼국사기》에, 무주(武州)<결획된 글자는 호반 '武'자인데, 고려왕씨조의 '惠宗'의 이름을 피하기 위해 줄인 것이다> 반남현(潘南懸)은 《고려사》의 나주목(羅州牧) 반남군(潘南郡) 안로현(安老縣)으로 옛 이름은 아로곡현(阿老谷縣)이요, 다른 이름은 야로현(野老縣)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에 무주 압해군 갈도현의 옛 이름은 아로현(阿老縣)이라 하였고, 《고려사》 나주목(羅州牧) 영광군(靈光郡) 육창현(陸昌縣)이 옛날 아로현(阿老縣)이었다. 아로(阿老)란 사실은 읍륵(邑勒)으로, 읍루(揖婁) · 연루(燕婁) · 야리(也利) 등과 같이 쌍성에서 변한 것이다. 또 백제의 서울 이름 위례성(慰禮城)은 《삼국유사》에 의하면 지금의 직산(稷山)이라고 하였으나 사실은 지금의 광주(廣州) 지방이다. 위례(慰禮)와 아로(阿老) · 야리(也利)는 동성(同聲)에 속하는 이상, 사실 읍루(揖婁)라는 같은 어근에서 변화발전하여 온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나, 읍륵(邑勒)은 외읍(外邑)에 국한시킬 수는 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고려 사람들이 당시 읍륵(邑勒)의 어근이 어떻게 해서 생기게 된 것인지 아직 몰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물며 그 이역(異譯)한 글자에 있어서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한서(漢書) · 동이전(東夷傳)》에 고구려에는 5부(部)가 있다고 하였는데, 순노(順奴) · 관노(灌奴)는 그 중의 2부(部)이다. 윤노성(閏奴城)은 바로 순노부(順奴部)가 살던 지역이요, 관노성(貫奴城)은 곧 관노부(灌奴部)가 살던 지역이다. 동국의 사적에서 조사해 보아도 아직 현 지점을 얻을 수는 없지만 이것과 위에서 열거하여 고증한 여러 성과 같은 부류로서 계속하여 탐구해야 할 것이다.

 

   둘째 부류와 같은 것으로 대산한성(大山韓城)은 《삼국사기 · 지리지》에 웅주(熊州) 가림군 한산현(韓山縣)의 옛 이름은 대산현(大山縣)이다. 간상리성(幹上利城)은 《삼국사기》 강주(康州) 거창군(居昌郡)은, 그 옛 이름이 거열군(居列郡)이요, 다른 이름은 거탈(居陁)<《집운(集韻)》에 丈爾演爾二切이라고 하였다>라고도 하였다. 《고려사 · 지리지》에 안동(安東)의 옛 이름은 고타야군(古陁耶郡)이요, 다른 이름은 거창군(居昌郡)이라고 하였다. 간상리(幹上利)와 고타야(古陁耶)는 동성(同聲)이요[一], 취추성(就鄒城)은 이 비문 아래 문장에서는 또 취자성(就咨城)이라고 하였다. 《북사(北史) · 백제전(百濟傳)》에 이르기를, "그 나라의 서울을 거발성(居拔城)이라 하고, 고마성(固麻城)이라고도 한다. 그 나라의 지방에는 5방(方)이 있는데 중방은 고사성(古沙城)이요, 동방은 득안성(得安城)이요, 남방은 구지성(久知城)이요, 서방은 도선성(刀先城)이요, 북방은 웅진성(熊津城)이다."라고 하였는데 구지성(久知城)은 곧 취추성(就鄒城)이다.

 

[一]  옛날에 간상(幹上) · 고타(古陀)은 모두 같은 종류의 쌍성이요, 리(利) · 야(耶)는 비록 쌍성은 아닐지라도 가야국(伽倻國)이 곧 가락국(駕洛國)인 만큼 리(利) · 야(耶)는 같은 종류로 서로 통용(通用)되거나 가차(假借)하였음을 알 수 있다.

 

   셋째 부류는 모두 10성인데 모두 이미 고증하여 현지명을 얻었다. 그 가운데 2성은 일본 사람 진전씨(津田氏)가 일찍이 내 놓은 정설이다. 제 생각으로 진전씨가 각미성(閣彌城)으로 고증한 것은 맞지만, 아단성(阿旦城)을 아달성(阿達城)이라 한 것은 꼭 그렇다고 믿을 수 없다. 《삼국사기》 진사왕 8년(392) 기에, "10월, 고구려가 관미성(關彌城)을 쳤다."라고 하였는데 그 성은 사면이 아주 험하고 가파르며, 바닷물이 빙 둘러싸고 있다고 했다. 또 3년(387) 기에, "말갈(靺鞨)과 관미령(關彌嶺)에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진전씨는 말하기를, "그곳은 틀림없이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지점으로, 푸른 파도가 넘실대며 끝간 데 없이 넓고 아득한 것이 창해와 같거니와, 또 관미령(關彌嶺)이 있고, 게다가 백제의 북부 요충지이다. 지금 임진강(臨津江) · 한강(漢江)의 동남안은 모두 산지가 험요하니 관미성(關彌城)은 강 어귀의 남방에 해당한다는 것도 상상하여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제 생각으로 진전씨(津田氏)의 주장은 아주 옳다고 본다. 또 백제 개로왕(蓋鹵王) 21년(475) 기에, "왕이 도망하여 나가다가 고구려의 장수 걸루(桀婁) 등에게 사로잡혀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묶어서 보내어 죽임을 당했다."라고 하였다.<《동국통감》은 아단(阿但)으로 인용하여 썼다>  신라 문무왕 15년(675)에, "말갈이 아달성(阿達城)에 들어와 노략질을 하매 성주(城主) 소나(素那)가 맞아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당나라 군사가 거란과 말갈군사와 함께 와서 칠중성(七重城)을 애워쌌다."라고 하였는데 칠중성은 지금의 적성(積城)이다. 진전씨(津田氏)는 말하기를, "만약 아달성(阿達城)이 곧 아단성(阿旦聖)이라고 한다면 아단성은 틀림없이 임진강의 북쪽과 칠중성의 대안에 있는 지점이다."라고 하였다. 제 생각으로 진전씨(津田氏)의 주장은 옳다고 보지 않고, 아단성(阿旦城)은 사실 아차성(阿且城)으로, 아달(阿達)과는 동음이 아니거니와 아차(阿且)는 바로 옥저(沃沮)의 이음(異音)으로 거기서 처음 옥저부(沃沮部)가 살았던 지역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 지리지(地理志)》에 "명주(溟州) 내성군 자춘현(子春縣)은 곧 을아차(乙阿且)인데 영춘(永春)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고려사 · 지리지》에 원주(原州) 영춘현(永春縣)은 옛 이름이 을아단(乙阿旦)이다"라고 하였다. 《동번기》에, "영춘(永春)은 서울로부터 360리 떨어져 있고, 일명 자춘(子春)이요, 을아조(乙阿朝)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이로써 《고려사》에 아단(阿旦)이라 쓴 것은 바로 아차(阿且)의 오기요, 다시 아차(阿且)는 소리가 잘못되어 아조(阿朝)로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아차(阿且)는 왜 또 을아차(乙阿且)로 변했을까? 아(阿) · 을(乙)은 쌍성에서 변화된 것으로 파부산(叵富山)이 곧 부산(富山)이요, 고구려(高句麗)가 곧 고려(高麗)인 것과 같다. 《삼국사기》 상주(尙州) 문소군 안현현(安賢縣)은 옛 이름이 아을혜(阿乙兮)이다. 안현(安賢)은 곧 아을혜(阿乙兮)의 변음이다. 《삼국사기》에, 신라 내해이사금(柰解尼師今) 19년(219), 왕이 이벌찬 이음(利音)에게 명하여 군사 6천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쳐서 사현성(沙峴城)을 쳐부수었다. 소지마립간 11년(489),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습격하여 과현(戈峴: 원문의 才峴의 才자는 戈의 오식이므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역자주)에 이르렀다. 백제 진사왕 7년(391), 말갈이 북쪽 변경지방인 적현성(赤峴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아신왕 2년(393) 기에, 진무(眞武)가 석현(石峴) 등 여러 성을 복구하였다. 아신왕(원문의 구이신왕은 아신왕의 오기이므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역자주) 7년(398) 기에, 쌍현성(雙峴城)을 쌓았다. 비유왕 15년(469) 기에 군사를 보내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습격하였다. 쌍현성(雙峴城)을 수리하였다. 또 《지리지》에 한주(漢州) 양록군 삼령현(三領縣)은 옛 이름이 삼현현(三峴縣)이라고 하였다. 상술한 사현(沙峴) · 재현(才峴) · 석현(石峴) · 쌍현(雙峴) 등 여러 성은 삼현성(三峴城)과 자음(字音: 독음)이 서로 같을 뿐만 아니라 지리위치도 서로 합치된다. 《동번기요》에 의하면, 양록(楊麓)은 곧 지금의 양구(楊口)<양일(楊日)이라고도 한다>로 강원도에 속한다. 제가 생각건대 양록(楊麓)은 원래 한주(漢州)에 속했으며, 신라 · 백제 · 말갈 · 고구려가 접경하는 요충지가 아닌가 한다. 광개토왕 원년, 곧 진사왕 8년(392) 가을 8월에, 고구려왕 담덕(談德)이 군사 4만 명을 이끌고 와서 북쪽 변경지방을 공략하여 석현(石峴)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진사왕은 담덕이 용병을 잘한다는 소문을 듣고 나아가 막지 못하여 한수(漢水) 북쪽의 여러 부락이 점령당한 곳이 많았다.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관미성(關彌城)을 쳐서 함락시켰다다고 하였다. 관미성(關彌城)은 바로 이 비 중에 나오는 각미성(閣彌城)이다. 삼현(三峴)과 삼양(穰)은 동성(同聲)이니 [一]석현성(石峴城)이라는 것은 생각하기에 따라 삼양성(穰城)이 이에 충분히 해당될 수 있다. 각미(閣彌) · 삼양(彡穰)은 모두 백제의 큰 성이다. 광개토왕은 원년에 왕위에 올라, 8월에 백제를 쳤고, 9월에 거란을 쳤으며 10월에 또 남쪽으로 백제를 정벌하여 각미(閣彌) 등 10여 성을 함락시키는 등 몇 달 사이에 남북으로 부지런히 쏘다니면서 이러한 수훈(殊勳)을 세웠으나 기공비(紀功碑)에 보이지를 않는데 이런 일은 이치로 보아 반드시 없을 수는 없다. 이제 이 비 중의 6년 전쟁에서 얻는 주요한 성(城)은 관미(關彌) · 석현(石峴)의 두 성인 이상, 《삼국사기》에서 6년의 기사를 원년에 잘못 기록한 것같은 추정을 할 수 있는데, 이를 이 비로써 역사를 증명해 보면 부절을 맞춘 것처럼 딱 드러 맞는다.

 

[一]  호남(湖南) 증운건(曾運乾) 선생이 최근에 《유모고독고(喩母古讀考)》를 써서, 고대의 어음 갑모(匣母) · 정모(定母)를 증명하여 유모(喩母)에 포함시켰다. 《광운(廣韻)》에 현(峴)은 호전절(胡典切)이라 하고, 양(穰)은 여장절(汝腸切)이라고 하였다. 지금 강남 일대에서는 양(壤)을 양(穰)으로 읽어 유모(喩毛)에 들어가니 현(峴)과 동성이다. 고대의 어음 유모(喩母)는 낭모(娘母)자에서 소리를 얻은 것이니 육(育) · 요(䍃) 육(肉)으로부터, 예(裔가 경(冏)으로부터 온 실례와 같은 것이다. 이는 여요장씨(餘姚章氏)가  설음(舌音)이 추렴(遒斂)하여 후아(喉牙)가 되었다고 말한 것이다. 

 

   미추성(彌鄒城)이 지금의 인천(仁川)이라는 것은 진전씨(津田氏)가 이미 내세운 정설이다. 이제 이를 보완해서 고증함으로써, 그의 주장을 증명할 것이다. 《삼국사기 · 백제기》에 "온조왕 37년, 패 · 대(浿帶) 두 강을 건너 미추홀(彌鄒忽)에 이르렀다.(이런 기사는 37년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백제시조 온조왕과 관련한 모두 기술 부분에 일설로 인용된 부분에 들어 있다. 37년 기에는 '패 · 대 사이가 텅 비어 사는 사람이 없다'는 기술이 있는데 이 부분과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역자주). 신라 소지마립간 3년(481), 고구려가 고명(孤鳴) 등 7성을 빼앗고, 또 미질부(彌秩夫) 등에 군사를 출동시켰다."라고 하였다. 《지리지》에 한주(漢州) 율진군(栗津郡) 소성현(邵城縣)은 옛이름이 매소홀현(買召忽縣)으로 미추(彌鄒)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고려사 · 지리지》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 인주(仁州)는 옛 이름이 소성(邵城)으로 다른 이름은 매소홀(買召忽)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동번기요》에 인주(仁州)는 서울로부터 77리 떨어져 있으며 일명(邵城) · 경원(慶源) · 인주(仁州)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이제 《삼국사기》 및 《고려사》를 상고해 보면, 미추(彌鄒)는 또 미지(彌知)로 바뀌었는데, 미지(彌知)로써 이름을 얻게 된 곳이 모두 7군데나 된다. 《삼국사기》에 상주(尙州) 문소군(聞韶郡) 단밀현(單密縣)은 옛날 이름이 무동미지(武冬彌知)요, 다른 이름으로 역동미지(鬲冬彌知)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고려사》에 상주목(尙州牧) 화녕군(和寧郡) 단밀현(單密縣)은 옛 이름이 무동미지(武冬彌知) · 갈동미지(曷冬彌知)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에 상주(尙州) 화창현(化昌縣)은 옛날 이름이 지내미지(知乃彌知)라고 하였다. 또 양주(良州) 고성군(高城郡) 서기정(西畿停)은 일명 두량미지정(豆良彌知停)이라고  하였다. 또 무주(武州) 보성군(寶城群) 마읍현(馬邑縣)은 옛날 이름이 고마미지(古馬彌知)요, 수녕현(遂寧縣)이라고도 하였다. 《고려사》에 장흥부(長興府) 수녕현(遂寧縣)은 옛날 이름이 고마미지(古馬彌知)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에 무주(武州) 무령군(武靈郡) 무송현(武松縣)은 옛날 이름이 송미지현(松彌知縣)이라고 하였다. 《고려사》에 영광군(靈光郡) 무송현(茂松縣)은 옛날 이름이 송미지현(松彌知縣)이라 하였다. 상술한 미추(彌鄒) · 매소(買召) · 미질(彌秩) · 미지(彌知)라는 것은 모두가 사실 부조(夫租)의 일성지전(一聲之轉)이다. 부조(夫租)는 곧 옥저(沃沮)라는 것은 앞에서 상술했다. 따라서 미추(彌鄒)의 어근은 사실 옥저(沃沮)에서 나온 것이니, 미추(彌鄒) · 매소(買召) · 미질(彌秩) · 미지(彌知)라는 것은 모두 옛날에 틀림없이 옥저부(沃沮部)가 살았던 지역일 것이다.

 

   잡미성(磼彌城)은 곧 잡미성(雜彌城)이다. 《삼국사기》에 한주(漢州) 교하군(交河郡) 봉성현(峰城縣)의 교하(交河)는 일명 선파(宣坡)이다. 《동번기요》에 의하면 서울로부터 80리 떨어져 있고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요충지라고 하였다.

 

   구천성(仇天城)은 곧 구지성(仇知城)으로 지(知) · 천(天)의 고대의 어음은 단뉴(端紐)에 있다. 《삼국사기》에 웅주(熊州) 대록군(大麓郡) 금지현(金池縣)은  옛날 이름이 구지현(仇知縣)으로, 전의(全義)라고도 하였다. 《고려사》에 청주목(淸州牧) 전의현(全義縣)은 옛 구지현(仇知縣)이라 하였으며, 전의(全義)는 오늘날 충청남도의 동부에 있다.

 

   두노성(豆奴城)은 곧 도나성(刀那城)이다. 《삼국사기》에 한주(漢州) 해고군(海皋郡) 구택현(雊澤縣)은 옛날 이름이 도랍(刀臘)으로, 백주(白州)라고도 했다. 도랍(刀臘) · 두노(豆奴) · 도나(刀那)는 모두 쌍성이다. 《동번기요》에 백주(白州)는 황해도에 속하고, 서울로부터 210리 떨어져 있으며, 일명 도랍(刀臘) · 치악성(雉岳城) · 구택(雊澤) · 백주(白州)라 한다고 하였다.

 

   누매성(婁賣城)은 이 비에서 또 농매성(農賣城)으로 썼다. 《삼국사기》에 한주(漢州) 황무현(黃武縣)은 옛날 이름이 남천현(南川縣)으로, 이천(利川)이라고도 했다. 《고려사》에 경주목(慶州牧) 이천군(利川郡)은 옛날 이름이 남천(南川)으로 곧 남매(南買)이다. 《동번기요》에 경기도 이천은 서울로부터 140리 떨어져 있으며, 일명 남천(南川) · 황무(黃武) · 남매(南買) · 영창(永昌)이라고도 했다. 생각건대 농매(農賣) · 누매(婁賣) · 남매(南買)는 모두 쌍성이요, 또 같이 한주(漢州)에 속한 백제국 지역이었다.

 

   이밖에 고모야라(古模耶羅) · 분이야라(分而耶羅)는 틀림없이 가락국(駕洛國)의 지역이였을 것이다. 《조선사략》에 대가락(大駕洛)은 또 가야(伽耶)라고 일컬었으며, 오부(五部)가 있는데 아라가야(阿羅伽耶) · 고령가야(古寧伽耶) · 대가야(大伽耶) · 성산가야(星山伽耶) · 소가야(小伽耶)이다. 《가락국기》<《삼국유사》 권二>에 이르기를, "대가야(大伽耶)는 곧 여섯 가야 중의 하나요, 나머지 다섯 사람은 각각 돌아가서 다섯 가야의 왕이 되었는데 동쪽은 황강산(黃江山)으로, 서쪽은 창해(滄海)로, 서북쪽은 지리산(地理山)으로, 동북쪽은 가야산(伽耶山)으로, 남쪽으로는 국미(國尾)로 하였다고 하였는 바, 그 지역은 틀림없이 신라의 남쪽과 백제의 동남쪽이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상주 고령군은 옛날 함녕군이요, 곧 고녕가야국이라고 하였다. 《고려사》에 상주목 함창군은 곧 고녕가야국이요, 함창은 지금 경상도에 속하며 서울로부터 440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다. 또 《삼국사기》에 강주 함안은 옛날 아시량국(阿尸良國)이요, 다른 이름은 하라(河羅) · 가야(伽耶) · 함주(咸州) · 금라(金羅) · 사라(沙羅) · 파산(巴山)이라고 하였다. 상기 기록에 의하면 설사 고모야라(古模耶羅)를 추정하기는 불가능하지만 사실 나 · 제(羅濟) 두 나라를 거치면서 심지어는 가락국의 국경이 되었다. 그 나머지 여러 성들은 상세히 알 수 없으니 조사검토를 요한다.

 

賊不[一]氣, 敢[二]出百[三][四], 王威赫怒[五], 渡阿利[六]水, 遣刺迫城[七], 橫□□□□便圍城。百殘王困逼, 獻[八][九]生白[一〇]七千人, 細布千匹[一一]歸王, 自誓: 從今以後永爲奴客。太王恩赦□迷之愆[一二], 錄其後順之誠, 於是□五十八城, 村七百, 將殘王弟[一三][一四]大臣十人, 師還都[一五] 

 

   《삼국사기》 백제 개로왕 21년(475) 기에, "나라 사람들을 모두 징발하여 흙을 구워 성을 쌓고 바로 그 안에는 궁실 · 누각 · 정자들을 지으니 모두가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또 욱리하(郁里河)에서 큰 돌을 가져다가 석곽을 만들어 그의 아버지의 유골을 장사지냈다."라고 하였다. 진전씨(津田氏)가 가로되[一六], "욱리하(郁里河)는 곧 아리수(阿利水)로 지금의 한강(漢江)이다. 한수(漢水) · 한산(漢山)이란 이름은 중국과 왕래한 뒤의 칭호이다. 남평양(南平壤)은 곧 북한산(北漢山)으로 지금의 서울 한성(漢城)이다. 위례성(慰禮城)도 한성(漢城)이라고 하였는데 지금의 광주(廣州)이다."라고 하였다. 제 생각으로는 편국성(便國城)은 곧 박국성(迫國城)이요, 편(便) · 박(迫)은 쌍성에서 가차한 것이다. 광주(廣州)는 한수(漢水)의 남쪽에 있으니 이 비문에서 아리수(阿利水)를 건너 국성(國城)에 접근했다는 말과 부합한다. 한 때 백제(伯濟)가 위례성에 도읍을 하였다는 진전씨의 주장은 믿을 만하다.

 

[一] 《샤반느본》에는 으로 썼고, 정씨(鄭氏)는 服자로 해석하였다.

[二]  정(鄭)은 敢자라고 하였다. 《한화엄묘비(漢華嚴廟碑)》에 "用玄牧"이란 구절이 있다. 《당벽락비(唐壁落碑)》에 "忘刊記"란 구절이 있는데 모두 敢자의 별체이다.

[三] 《정본(鄭本)》은 交로 썼고, 《양본(楊本)》은 督으로 썼다.

[四] 《한이흡천정도비(漢李翕天井道碑)》에 "黻黻以爲大愆"라는 구절이 있다. 《예석(隸釋)》에서 불(黻)은 ?자라고 하였다.

[五] 《정본(鄭本)》은 奴로 썼다. 

[六] 《정본(鄭本)》은 被로 썼다.

[七] 《이아석고(爾雅釋詁)》에 "자(刺)는 죽이다는 뜻의 살(殺)이다."라고 하였다. 《설문(說文)》 도부(刀部)에 "자(刺)는 찔러서 상처를 입힌다는 뜻이다(直傷)."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명사로 쓰여 사졸(士卒)을 일컫는 것이 아닌가 한다. 

[八]  양(楊) · 정(鄭) 두 탁본에는 모두 獻으로 썼다.

[九] 《정본(鄭本)》에서는 빠졌다.
[一〇]  정(鄭)은 생백(生白)은 생구(生口)라고 하였다. 여러 탁본에서는 모두 白으로 썼다.

[一一]  정(鄭)은 세포(細布)는 겸속(縑屬)이요, ?은 匹자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이체자류(三國史記異體字類)》에 匹을 로 썼다. 《당하란씨묘지(唐賀蘭氏墓志)》에 "梧桐枝兮鳳凰이란 구절이 있다. 모두 匹의 별체자이다.

[一二] 《정본(鄭本)》는 銜자로 쓰고 御자라고도 하였다. 제가 생각건대 御자의 글씨가 갈라진 것이라 여겨진다.

[一三]  여러 탁본에서 모두 弟로 썼다.

[一四] 《정본(鄭本)》에 我로 썼는데 틀렸다.

[一五]  은 旋자의 별체이다.

[一六] 《위례성고(慰禮城考)》

 

八年戊戌, 敎遣便師觀帛<정(鄭)은 숙(肅)자의 늑문(泐文)이 아닌가 하였다>愼土谷, 因便抄得莫新<《정본(鄭本)》에는 빠졌다>羅城, 加太羅谷, 男女三百餘人。自? <생각건대 차(此)자이다>

來, 朝貢論事。

 

   숙신(肅愼)이라는 이름은 우리나라(중국을 가리킨다, 역자주) 사적에서 아주 이른 시기에 보인다. 《국어(國語) · 노어(魯語)》에, "숙신씨(肅愼氏)의 화살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밖에도 《산해경(山海經)》·《서서(書序)》·《사기(史記) · 주본기(周本紀)》에도 모두 숙신(肅愼)이 있다. 혹은 음전하여 식신(息愼)으로 썼다. 《후한서(後漢書) · 동이전(東夷傳)》에 읍루(揖婁)는 옛 숙신(肅愼)의 지역이라고 하였다. 《삼국지(三國志) · 관구검전(毌丘儉傳)》에 환도산에 각석을 하고, 불내성에 각명을 하였으며, 숙신(肅愼)의 남계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제가 생각건대 읍루(揖婁)는 해동에서 통하는 말이요, 숙신(肅愼)은 중국에서 번역한 말이다. 나중에는 읍루(揖婁) · 숙신(肅愼)은 서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이 비 중에 숙신(肅愼)이란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토곡(土谷)이란 곧 고대 부여민족의 모여 살던 곳이다. 이 비 중에 개곡(改谷) · 양곡(梁谷) · 가태라곡(加太羅谷) · 비류곡(沸流谷)과 같은 것들이 있다. 《삼국사기》에도 상곡(上谷) · 우곡(牛谷) · 실직곡(悉直谷) · 양맥곡(梁貊谷) · 괴곡(槐谷) 등이 있다. 이 비에서 말하는 토곡(土谷)은 흙으로 쌓은 옛날 작은 성(堡) 따위와 같은 것이다. 진전씨의 《호태왕정복지역고(胡太王征服地域考)》에서는 숙신토(肅愼土)를 하나의 이름으로 말하고, 남한 방면에 있는 것으로 여겼는데 미덥지 못하다.  《삼국사기》에, "서천왕 11년(280) 겨울 10월, 숙신(肅愼)이 침략해 와서 변경의 주민을 대학살했다. 왕이 이에 달가(達賈)를 보내어 가서 이들을 치도록 했다. 달가는 기이한 계책을 써서 기습작전으로 단로성(檀盧城)을 함락시켰다."라고 하였다. 단로성(檀盧城)은 곧 가태라곡(加太羅谷) 및 막신라성(莫新羅城)이 있던 곳이 아닌가 한다. 곡(谷)과 성(城)은 항상 연칭되었다. 이 비 중에 양곡(梁谷)이 있고 또 양성(梁城)이 있는 것과 같다. 《삼국사기》에 우곡(牛谷)은 또 우곡성(牛谷城)으로 일컬어졌고, 실직곡(悉直谷)은 또 실직국(悉直國)이 있고, 혹은 실직성(悉直城)으로 일컬었다. 게다가 가태라(加太羅)와 단로(檀虜)는 성음도 서로 비슷하다. 서천왕 11년 전쟁에서는 추장을 죽이고, 600여 가를 부여의 남쪽 오천(烏川)으로 옮겼다고 했으니 우리는 가태라곡은 틀림없이 지금의 봉천 동북에 있는 옛 읍루족(揖婁族)이 살았던 지역으로 더욱 믿을 수 있지만 남한 방면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九年己[一], 百殘違誓, 與倭和通[二]。王巡下平穰[三]。而新羅遣使白王曰: 倭人滿其國境, 遣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一]  亥의 별체로 《정본(鄭本)》에서는 亥로 썼다.

[二]  與자를 《정본(鄭本)》에서는 ?로 썼다.

[三]  지금은 壤으로 쓴다.

 

太王恩[一]後稱[二]其忠, 寺[三]脫違使還告以□□[五]

 

   9년 백제와 왜가 화통(和通)한 기사는 《삼국사기》에 보이지 않는다. 생각건대 《동국통감》에는 진안제 의희 원년 정유는 백제 아신왕 6년(397), 광개토왕 6년인데 그해 여름 5월에 백제와 왜가 우호관계를 맺어 태자 전지(腆支)를 인질로 삼았다고 하였다. 이 비에서 광개토왕은 진태원 16년 신묘에 왕위에 올랐다고 했으니 정유는 광개토왕 7년으로 백제가 왜와 통호한 것은 6년 전쟁 이후가 된다. 광개토왕이 9년에 평양으로 순행하여 백잔(百殘)이 맹약을 저버린 것은 혹시 이 해에 앞섰던 것은 아닐까. 평양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는 동국 지리상 실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의 하나이다. 지금까지 국내외의 학자들은 모두 자세하고도 명확한 답이 없다. 《사기정의(史記正義)》에서는 《괄지지(括地志)》를 인용하여 이르기를, "고구려는 평양성(平壤城)에 도읍을 했는데 원래 한낙랑군 왕험성(王險城)이다."라고 하였다. 《한서(漢書) · 지리지(地理志)》신찬(臣瓚)[六]의 주에,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浿水)의 동쪽에 있다."라고 하였다. 《사기(史記) · 조선전(朝鮮傳)》에서 패수는 압록강이라는 것이 이미 정설이 되었으니 왕험성은 틀림없이 지금의 평양은 아니다. 1925년 가을 무렵에 조선총독부에서 대동강 남안과 중화현에서 한대에 속한 고분을 발굴하여 영광 3년에 만들어진 효문묘동종(孝文廟銅鐘) 1개 및 반량(半兩) · 오수(五銖) · 대천(大泉)50개, 소천직일(小泉一直) 등 전(錢), 낙랑예관(樂浪禮官) · 대진원강(大晉元康) 등 잔와당(殘瓦當) 등을 얻었다. 또 낙랑태수장(樂浪太守章) · 조선우위(朝鮮右尉) · 염한장인(염한長印) · 왕부인신(王扶印信) 등 봉니도 있었다.[七] 이로써 한낙랑군의 고지는 틀림없이 지금의 대동강 남안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비록 한낙랑군이 대동강 남안에 있는 중화현에 속한 지역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았지만 평양이 곧 왕험(王險)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으며 왕험은 곧 옛 낙랑군의 지역이다.

 

[一] 《정본(鄭本)》에는 빠졌다.

[二] 《유본(劉本)》은 稱으로 썼고, 《정본(鄭本)》은 稱으로 썼으며, 《양본(楊本)》에는 ?으로 썼다.

[三]  이는 特자의 잔(殘)이며, 《정본(鄭本)》에서는 ?으로 썼는데 틀렸다.

[四] 《정본(鄭本)》에 遺으로 썼는데 맞다.

[五] 《정본(鄭本)》은 許로 썼고, 여러 탁본은 빠졌다.

[六]  유효표(劉孝標)의 《유원(類苑)》에서 우찬(于瓚)이라 하고, 역도원(酈道元)의 《수경주(水經注)》에서 설찬(薛瓚)이라 하며, 안사고(顔師古)는 부찬(傅瓚)이라고 하여 아직 정설이 없고, 여전히 그 성씨가 빠졌다.

 

   《사기(史記) · 조선전(朝鮮傳)》에 이르기를, "한나라가 일어나면서 그곳이 멀고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고새(故塞)를 수리하여 패수(浿水)로써 경계를 삼았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동쪽으로 달아나 새(塞)를 나와 패수를 건너, 진고공지(秦故空地) 상하장(上下鄣)에 살면서 왕험(王險)에 도읍을 했다."라고 하였다. 또 "원봉 2년(B.C 109)에, 한나라가 섭하(涉何)를 시켜 우거(右渠)를 꼬였으나 끝내 천자의 명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섭하가 돌아가면서 국경인 패수에 이르러 마부를 시켜 섭하를 전송나온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을 찔러 죽이고 바로 건너 요새 안으로 들어 갔다."라고 하였다. 이에 따르면 새(塞)라고 하는 것은 곧 지금의 산해관(山海關) 밖 옛날 장성(長城)의 유지(遺地)를 가리키는 것으로, 서쪽으로 유관(楡關)에서 시작하여 봉천(奉天) 서북계를 따라 개원(開原)에 이르기까지 두 갈레로 꺾여지는데 한 갈레는 동북끝 이통문(伊通門)에서 길림계에 이르기까지며 다른 한 갈레는 흥경 영청문(永淸門)에 이르러 서남쪽으로 바뀌어 봉황청(鳳凰廳) 고려문(高麗門) 남저(南底)에서 바다에 이른다. 지금의 봉천의 관전(寬甸) · 안동(安東)은 모두 새외(塞外)에 있었고, 이른바 진고공지(秦故空地) 상하장(上下鄣)이란 틀림없이 그 지역에 해당되고, 고새(故塞)를 수리하여 패수에 이르러 이를 국경으로 삼았다는 말과도 부합된다. 만일 왕험이 멀리 대동강 남안에 있었다면, 강을 셋이나 건너고<대동강 · 대녕강 · 압록강> 그런 다음에 새(塞)에 다다르게 된 것이니 이른바 국경인 패수에 이르러 바로 건너서 새(塞)로 들어갔다는 것은 주장을 다 들어 보아도 사실에 부합하지 않게 되니 이것이 그 하나의 의문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국원왕 13년(343) 뒤에 평양에 도읍을 하였고, 장수왕 13년(423)에 또 평양으로 천도하였는데 혹은 장안성(長安城)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또 《지리지》에서는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평양(平壤)에서 장안(長安)으로 옮겨갔다고 하였다. 《통전(通典) · 고구려전(高句麗傳)》에 이르기를, "동진(東晉) 이후에 그 나라 왕은 평양성에 거주하였으며, 또한 장안성이라고 한다. 산을 따라 이리저리 굽어 꺾이고 있으며 남쪽으로 패수를 내려다 보고 있다."라고 하였다. 상기 두 조목의 기록에 의해 미루어 보건대, 동천왕 이후 도읍지로 한 평양은 틀림없이 지금의 평양이 아니다. 국내성은 원래 마자수(馬訾水)의 북쪽에 있기 때문에 호태왕이 비려(碑麗)를 치려고 염난수(鹽難水)를 건너 비로소 그 지역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제 이 비에서 말하는 왕이 하평양(下平壤)으로 순행하였다고 말하는 것으로 호태왕은 국내성에 도읍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지금의 평양에 도읍했던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는 바, 이것이 또 하나의 수상한 점이다. 이런 두 가지 점이 있기 때문에 압록강 남쪽인 의주(義州)로부터 고산성(高山城) · 만포성(滿浦城) 일대에 틀림없이 고구려의 옛 도읍지가 존재했으리라는 것을 굳게 믿는다. 동국 사적에서는 동일한 지명이 남북으로 구분하는 것이 있는데 남한산(南漢山)과 북한산(北漢山), 남대방(南帶方)과 북대방(北帶方)과 같은 것이다. 평양도 남 · 북의 구분이 있었으니 남평양(南平壤)은 곧 북한산으로 지금의 서울인 한성(漢城)이요, 북평양(北平壤)은 곧 지금의 대동강 북안의 지역이다. 평양이란 지명이 남쪽으로 이동한 이상, 지금의 평양이 아닌 그 북쪽에는 예전에 또 다른 평양이 있었다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해동의 고고학을 연구하는 분들이 우리의 학설을 취해 이를 탐구해서 그러한 의혹을 해결하기를 간절히 바란다.[一] 

 

[一]  지금 동국의 사적은 모두 성주(成州)를 비류왕(沸流王) 송양(松讓)의 고도(故都)로 여기고 있다. 《조선사략(朝鮮史略)》에서는 국내성(國內城)이 곧 의주(義州)라고 말하여 모두 미덥지 못하지만 두 지역이 혹시 옛 도읍이었을지도 모른다.

 

十年庚[一]子, 敎遣步騎五萬往救新羅。從男居城至新羅城, 倭滿其中。官兵方至, 倭賊退。□□□□□□□□來背。[二]追至任羅加羅,從拔城,城卽歸[三]。安羅戍[四]兵, 拔新羅城。城[五]倭滿。倭潰, 城六[六]□□□□□□□□□□□□□□□□?[七][八]盡。臣[九][一〇][一一]安羅人戍兵滿[一二]□□□□□□□□□□□□□□□□□□□□□□□□□□□□□□□□□□□□□□□□□□□□□□□□□□□倭潰城大土[一三]□安[一四]羅人戍兵, 昔新羅安[一五]錦未有身來朝貢[一六], □□□□□開[一七]土境好太王[一八]□□□□率[一九]□□□僕勾[二〇]□□□□朝貢。

 

[一] 《샤반느본》은 ?로 썼다.

[二] 《정본(鄭本)은 息자로 썼는데 틀렸다. 이는 恩자이다. 《남당본업사기(南唐本業寺記)》에 "唯?帝祚之"이란 구절이 있다. 생각건대 은 곧 恩이다.

[三]  정(鄭)은 服자라고 하였다.

[四] 《정본(鄭本)》은 戒로 썼다.

[五]  미상이다. 《유본(劉本)》에는 빠졌다.

[六] 《정본(鄭本)》은 위로 4자가 빠졌다. 《양본(楊本)》은 潰자를 漬로 썼다.

[七] 《양본(楊本)》에는 여기에 잔자(殘字)가 있다.

[八]  정(鄭) · 양(楊) 두 탁본은 글자가 있고, 여러 탁본은 잔결(殘缺)이 있다.

[九]  《정본(鄭本)》은 臣으로 썼고, 《유본(劉本)》은 빠졌다.

[一〇] 《양본(楊本)》은 로 썼고, 여러 탁본은 빠졌다.

[一一] 《정본(鄭本)》은 尖자로 썼고, 《나본(羅本)》은 빠졌다.

[一二]  나(羅) · 정(鄭) · 양(楊) 세 탁본 모두가 빠졌다.

[一三]  위로 15자가 《샤반느본》에서는 전부 빠졌고, 《유본(劉本)》에는 한 글자가 남아 있다. 왜(倭) 위에 여러 탁본은 52자가 빠졌고, 《정본(鄭本)》은 10자가 빠졌으며, 《양본(楊本)은 19자가 빠졌다. 정(鄭)은 土는 走자의 잔결(殘缺)이라고 하였다.

[一四]  이 글자를《양본(楊本)》에서는 ?로 썼는데 틀렸다.

[一五] 《정본(鄭本)》에 가까스스로 남아 있고, 여러 탁본에는 모두 빠졌다.

[一六] 《정본(鄭本)》에 남아 있고, 여러 탁본에는 빠졌다.

[一七] 《샤반느본》 및 《유본(劉本)》에 모두 빠졌다.

[一八] 《정본(鄭本)》에 가까스로 남아 있고, 여러 탁본에는 빠졌다.

[一九] 《유본(劉本)》에 가까스로 남아 있고, 여러 탁본에는 빠졌다. 率 위에 《정본》에는 至자가 있다.

[二〇]  僕자를 《정본(鄭本)》에서 潰로 썼는데 《정본》의 이 곳은 아래 문장과 착오가 있다.

 

   10년에 신라를 구한 전쟁은 《삼국사기》·《동국통감》에 보이지 않는다. 진효무제 태원 17년, 신라 나물왕 37년(392), 고구려 광개토왕 2년<3년으로 써야 한다> 봄 정월에, 고구려는 신라에 사신을 보내었다. 신라의 왕은 고구려가 강성하다 하여 이찬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實聖)을 보내어 볼모로 삼았다. 나물왕 46년(401) 가을 7월에,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던 실성(實聖)이 돌아왔다. 그 때가 마침 광개토왕 10년 경자년에 해당한다.<《동국통감》에 9년으로 쓴 것을 이 비에 근거해서 바로잡는다>

 

   남거성(男居城)은 남가라(南加羅)가 아닌가 한다. 《일본서기(日本書記)》에, "추고천황(推古天王) 8년, 신라와 임나와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천왕은 임나를 구하려 생각했다. 천황은 경부신(境部臣)[사가이베노오미]을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수적신(穗積臣)[호쯔미노오미]을 부장군으로 하여<원주(原注)에 이들의 성명이 빠졌다>, 1만여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임나를 위해 신라를 쳐서 5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신라의 왕은 두려워하여 백기를 들고 장군(將軍)의 휘하에 와서 바로 다다라(多多羅) · 소나라(素奈羅) · 불지귀(弗知鬼) · 위타(委陀) · 남가라(南加羅) · 아라(阿羅) 등 6성을 떼어주고 항복을 청했다."라고 하였다.[一] 또 《삼국사기 · 김유신전》에 "남가야(南加耶)의 시조는 수로(首露)이다."라고 하였으니 남가야(南加耶)는 곧 남가라(南加羅)이다. 이 비의 아래 문장에서는 또 남거한(南居韓)으로 썼다. 진전씨(津田氏)의 《임나고(任那考)》에, "남거한(南居韓)은 곧 남가라(南加羅)로, 지금의 구포(龜浦)인바, 부산지의 북쪽과 동래현의 서쪽 경계에 있어 낙동강 어귀에 해당하여 왜인이 신라로 들어가던 해구(海口) 중의 하나였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 비문에서 남거성(男居城)으로부터 신라성(新羅城)에 이르기까지 왜가 그 안에 가득 찼다고 한 것이다. 신라성은(新羅城) 곧 신라 국도이다. 《삼국사기 · 지리지》에 신라의 도성을 금성(金城)이라 하고 또 월성(月城)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또 흘해이사금 37년(346) 기에 왜병이 갑자기 풍도(風島)에 이르러 변방의 민가를 노략하고 또 다시 금성을 애워쌌다고 하였다. 자비마립간 2년(459) 기에, 여름 4월에 왜인이 병선 1백여 척으로 동쪽 변경을 침범하고 나가아 월성(月城)을 애워쌌다고 하였다. 나물왕 38년(393) 여름 5월에, 왜인이 와서 금성(金城)을 애워싸고 닷새가 되도록 포위를 풀지 않자 장병들이 모두 나가서 싸우기를 청했다. 왕이 말하기를, "지금 적이 배를 버리고 육지로 깊이 들어와 사지(死地)에 있으나 그 서슬에 당할 수가 없다."하고 이윽고 성문을 닫고 있으니 적들은 아무런 성과없이 물러갔다고 하였다. 상술한 여러 설을 근거하면 신라의 국성(國城)은 틀림없이 동쪽 변두리 바닷가에 가까운 지역에 있었을 것이니 바로 그곳은 경상도 경주(慶州)이다. 《동번기요》에 경주는 서울에서 760리 떨어져 있고, 일명 진한(辰韓) · 사로(斯盧) · 계림(鷄林) · 월성(月城)이라 한다고 하였다. 왜인이 신라에 군사를 출동시킨 길은 둘이 있으니 하나는 동쪽 변경에서 곧장 금성(金城)에 이르렀고, 다른 하나는 곧 임나가라(任那加羅)로부터 들어왔다. 《삼국사기 · 강수전》에, "강수(强首)는 중원경 사량인(沙梁人)으로, 태종이 불러서 만나보고 그 성명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은 본래 임나가량인(任那加良人)입니다.'"라고 하였다. 임나가량(任那加良)는 곧 가라(加羅)이다. 

 

[一]  반전무향씨(飯田武鄕氏)의 《서기통석(書紀通釋)》에 따랐다.

 

   《일본서기(日本書紀)》 계체천황 6년 임진에, 백제에서 사신을 보내 공조(貢調: 공물을 바치다는 뜻으로, 원문의 '調貢'은 '貢調'의 오기이므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역자주)을 하였다. 따로 표를 올려 임나국의 상다리(上哆唎) · 하다리(下哆唎) · 사타(沙陀) · 모루(牟婁) 4현을 달라고 요청했다. 다리국수(哆唎國守) 수적신압산(穗積臣押山)이 상주하여 아뢰기를, "이 네 현은 백제와 가까이 잇닿아 있고, 일본과는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단시간내에 쉽게 통할 수는 있으나 닭이 우는 소리나 개가 짖는 소리조차 식별하기 곤란합니다. 이제 백제에게 내려 주어 이것과 합쳐나라를 함께 경영해야 할 것입니다.(此四縣, 近連百濟, 遠隔日本, 旦暮易通, 鷄犬難別. 今賜百濟, 合爲同國)"라고 하였다. 또 흠명천황 23년 봄 정월에, 신라가 임나 관가(官家)를 쳐서 멸했다고 하였고 이에 대한 주석에서 다른 책에는 21년에 임나가 멸망한 것으로 썼다고 하였다. 전체적으로 말해서(惣言) 임나(任那)라 했고, 개별적으로 말해서(別言) 가라국(加羅國) · 안라국(安羅國) · 사이기국(斯二歧國) · 다라국(多羅國) · 졸마국(卒麻國) · 고차찬국(古嵯湌國) · 임례국(稔禮國) · 합십국(合十國)이라고 했다. 반전무향(飯田武鄕)의 《서기통석(書紀通釋)》에 의하면, "광개토왕은 인덕천황(仁德天皇)이 재위하던 때에 해당하는데 흠명(欽明)은 위로 인덕(仁德)까지 모두 13대, 120년간의 간격이 있다. 《동국통감》에는 진흥왕 23년(562) 가을 8월에 신라가 대가야를 멸망시켰다고 하였다고 하였으니 광개토왕 당시 임나는 아직껏 일본에 속해 있었음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가야는 곧 가락국이다. 《삼국사기 · 지리지》에 양주(良州) 김해소경은 옛날 금관국(金官國)으로 또한 가락국(伽落國)이라 한다고 했다. 《동번기요》에 김해(金海)는 경상남도에 속하고, 서울로부터 880리 떨어져 있으며 일명 가락(駕洛) · 가야(伽倻) · 임해(臨海) · 금주(金州) 등으로 부른다고 했다. 가라는 임나의 수읍(首邑)이기 때문에 임나가라(任那加羅)라는 이름으로 통했다. 안라(安羅)는 임나의 한 고을로 곧 지금의 함안(咸安)이다. 《동번기요》에 함안은 서울로부터 800리 떨어져 있고 일명 하라(河羅) · 가야(伽倻) · 함주(咸州)라 한다고 하였다. 하라(河羅)는 곧 안라이니 함안은 옛날 안라국 지방으로 생각된다. 임나가라(任那加羅)라는 이름은 우리나라(중국을 가리킨다, 역자주) 고사에서는 모두 따로따로 언급했다. 《남제서(南齊書) · 동남이전(東南夷傳)》에 왜 · 신라 ·임나 · 가라 · 진 · 한육국제군사(倭新羅任羅加羅秦韓六國諸軍事)가 있다. 《통전(通典) · 신라전(新羅傳)》에, "고구려 사람들이 융역(戎役: 병역)을 견디지 못하여 잇달아 귀속해 옴에 따라 강성해지면서 바로 가라 · 임나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라고 하였다.[一] 

 

十四年甲辰, 而倭不軌, [二]入帶方界[三]。□□□□□石城□連船□□□□□率[四]

 

[一] 《삼국사기 · 지리지》에 법흥왕(法興王)이 대군으로써 아시량국(阿尸良國)을 멸했다. (아시랑국의) 주석에서 아나가야(阿那加耶)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임나부(任那府)에는 또 독로(瀆盧) · 구사(狗邪) · 안야(安耶) 등 여러 소국이 있었다. 안야(安耶)는 곧 안라(安羅)이다. 자세한 것은 진전씨의 《임나강역고(任那疆域考)》 및 《삼한강역고(三韓疆域考)》에 상술되었다.

[二]  생각건대 侵의 별체이다. 《동위의교석상비(東魏義橋石像碑)》에 "歸依者塵務奠"이란 구절이 있다.

[三]  帶자를 《정본(鄭本)》에서는 ?으로 썼다.

[四]  유(劉) · 정본(鄭本)에는 있고, 나본(羅本)도 빠졌다.

 

 □□□平穰[一], □□□相遇。王幢, 要截蕩刺[二]。倭[三]潰敗, 斬煞[四]無數。

 

   대방(帶方)은 한나라 때 낙랑군에 속했다. 《한서(漢書) · 지리지(地理志)》에 낙랑 함자현(含資縣)에 대방군(帶方郡)이 있는데 서쪽으로 대방(帶方)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삼국지(三國志) · 동이전(東夷傳)》에 건안 연간에 공손강(公孫康)이 둔유현(屯有縣) 이남의 황무지를 나누어 대방군(帶方郡)으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진서(晉書) · 지리지(地理志)》에 대방(帶方) · 열구(列口) · 장잠(長岑) · 제해(提奚) · 함자(含資) · 해명(海冥) · 남해(南海) 7현을 대방군에 속하게 하였다고 하였으니 대방군은 낙랑군의 남쪽에 있었던 지역이었음을 의심할 것이 없다. 한강(漢江)의 옛 대수(帶水)[五]는 함자(含資)에서 나와 서쪽으로 대방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갔으니 대방은 대수의 입구에 있었다는 것도 필연적인 사실이다. 현재 대동강 남안에서 낙랑군의 유지가 발견되었으니 대방은 한강 이남에 처해 있다는 것도 사실과 상당히 부합된다. 다시 동국의 사적을 조사해 보면, 남대방(南帶方)과 북대방(北帶方)이라고 부른 것이 있다. 《삼국유사》에 이르기를, 북대방(北帶方)은 원래 죽군성(竹軍城)<軍자는 覃으로도 쓴다>이라고 하고, 이에 주석하여 지금의 남원부(南原府)라고 하였다. 남대방(南帶方)은 조조가 창건한 위나라 때 처음으로 설치하였기 때문에 남대방이라 하였고, 대방의 남쪽 1천 리 어간의 바닷물을 한해(澣海)라 한다고 하였다. 이에 스스로 주석하여(自注) 후한 건안 연간에 마한의 남쪽 황무지를 대방으로 삼으니 왜 · 한(倭韓)이 드디어 여기에 속했다고 하였다. 《삼국사기 · 지리지》를 조사해 보면, 대방은 원래 죽군성(竹軍城)이다. 이에 속한 현은 여섯인 바, 지류현(至留縣)은 원래 지류(知留)요, 군나현(軍那縣)은 원래 굴내(屈柰)요, 도산현(徒山縣)은 원래 추(抽)요<중간에 글자가 빠졌다>, 반나현(半那縣)은 원래 반내부리(半柰夫里)요, 죽군현(竹軍縣)은 원래 두비(豆肹)이요, 포현현(布賢縣)은 원래 파로미(巴老彌)이다. 이 《지(志)》 무주(武州)에는 두비현(豆肹縣)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분령군(分嶺郡) 강원현(薑原縣)이요, 다른 하나는 금산군(金山郡) 회진현(會津縣)이다. 또 반남군(潘南郡)은 곧 반내부리(半柰夫里)요, 무안군 함풍현(咸豊縣)은 원래 굴내현(屈乃縣)이요, 분령(分嶺)은 지금의 낙안(樂安)이니 어느 것이 죽군성(竹軍城)인지 추정할 수 없다. 그리고 소위 대방주(帶方州)라는 것은 틀림없이 지금의 전라도 남단의 연안지구에 있었을 것임을 이미 알았을 것이다. 《삼국사기 · 지리지》에 남원 소경은 곧 남원부로 전주에 속한다고 하였다. 《동번기요》에 남원은 전라북도에 속하는데 서울로부터 630리 떨어져 있고 일명 대방(帶方)이라고 하였다. 이제 《삼국유사》에서는 도리어 죽군성(竹軍城)을 북대방이라 하고, 남원부(南原府)를 남대방이라고 하였는바, 이는 필시 《유사(遺事)》가 잘못 인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중국을 가리킨다, 역자주) 고사에서는 한강 유역을 대방(帶方)이라고 하였으니 북대방이란 이름은 마땅히 여기에 속할 것이다. 그뒤 대방이란 지역이 점차 남쪽으로 옮겨가게 되어 현재 이 비에서 말하는 왜인이 대방의 경계로 침입하였다고 말하여, 호태왕 때 대방지역은 이미 한반도의 서남단까지 개척된 것이 틀림없음을 알 수 있다.

 

[一]  《정본(鄭本)》에는 복구(僕句)로 썼는데 아마 위의 문장과 착오가 생길 것이다.

[二]  위쪽으로 3자는 《샤반느본》에서 잔탈(殘脫)되었다.

[三]  截자를 유(劉) · 정본(鄭本)에서는 으로 썼으며, 은 慟의 별체이다. 《한북해상경군명(漢北海相景君銘)》에 "驚傷褢"라는 구절이 있다. 《한북군중후곽중기비(漢北軍中侯郭中奇碑)》에 "悲剝裂"이라는 구절이 있고, 《한집금오승무영비(漢執金吾丞武榮碑)》에 "慼哀悲惡"이란 구절이 있다. 모두 을 慟으로 여겼다. 要는 곧 腰자로, 《구경자양예변(九經字樣隸變)》에서는 腰로 썼다. 湯은 곧 蕩자로, 《한채담송(漢蔡湛頌)》에 "蕩擾有功"이란 구절이 있다. 《북위장흑녀지(北魏張黑女誌)》에 "湯寇將軍"이란 구절이 있다. 모두 湯을 蕩으로 여겼다. 截은 죽이다(戮)는 뜻이다. 

[三] 《북위장흑녀지(北魏張黑女誌)》·《당서평군왕비(唐西平郡王碑)》에서 寇를 모두 로 썼다.

[四]  《유본(劉本)》은 ?로 썼다. 《송내룡안비(宋鼐龍顔碑)》에 "勝殘去煞이라고 하였고, 《당간록자서(唐干祿字書)》에 殺은 세간에서 煞로 쓴다고 하였다. 《수신목묘지(隋申穆墓誌)》에 "淸重其高尙"이라고 하였다. 《당황보?비(唐皇甫?碑)》에 "素秋肅煞"이란 구절에서 로 썼다. 《제고예수사비(齊高叡修寺碑)》에서 이 글자를 로 썼다. 모두 6조의 별체이다. 

[五]  진전씨의 《패수고(浿水考)》.

 

 

十七年丁未, 敎遣步騎五萬□□□□□□□□□師[一]□□合戰, 斬煞蕩[二]盡。所獲鎧鉀一萬餘[三]領, 軍資機棫[四], 不可稱數。還破沙溝[五]城, 婁城。還[六]□□□□□□□□師[七]□城。廿年庚戌, 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 中[八]不貢, 王率往討[九]。軍到餘城, 而餘城[一〇]國騈□□□□□鄒自[一一]□。王恩普處, 於是旋還。又其慕化隨官[一二]來者: 味仇婁鴨盧[一三], 卑斯麻鴨盧,

 

[一] 《정본(鄭本)》에는 평양(平穰)으로 썼는데 아마 착오가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양(楊) · 유본(劉本)에 따랐다. 《샤반느본》은 빠졌다.

[二] 《정본(鄭本)》은 湯으로 썼는데, 생각건대 곧 蕩자이다.

[三]  소는 《정본(鄭本)》에서 所로 썼고, 《한정고비(漢鄭固碑)》에 "大君夫人所共哀也"라고 하였다. 소자를 소로 썼다. 稚에 대해서 정(鄭)은 獲자를 줄여 쓴 글자라고 하였다. 鉀은 甲과 같다.

[四]  械자의 늑문(늑문)으로 여러 탁본에는 械로 썼다.

[五] 《샤반느본》에는 準으로 썼다.

[六]  여러 탁본에 빠졌는데 《정본(鄭本)》에만 있다.

[七]  여러 탁본에 빠졌는데 《정본》에만 있다.

[八] 《삼급부도송(三級浮圖頌)》에 "神怒民"이란 말이 있다. 叛을 바로 으로 쓴 것은 여기서와 같다.

[九]  討를 《정본(鄭本)》에서는 諸로 썼다.

[一〇] 《정본(鄭本)》에서 承으로 썼는데 틀렸다.

[一一]  여러 탁본에 빠졌는데 《정본(鄭本)》에만 있다.

[一二] 《정본(鄭本)》에는 수궁으로 썼다. 수는 곧 隨자로 宮은 官자의 오기이다.

[一三] 《정본》의 3자는 잘못 써서 盧婁鴨이라 하였다.

 

?[一]立婁鴨盧, 肅斯舍□□, □□□□盧。凡[二]所攻破城六十四, 村一千四百。

 

   육심원(陸心源)의 《고려국광개토왕담덕기훈비발(高麗國廣開土王談德紀勳碑跋)》에서 압로(鴨盧)는 압록(鴨綠)이라 하였다. 양수경(楊守敬)의 《쌍구본발(雙鉤本跋)》 및 정문작씨(鄭文焯桌氏)의 고석에서도 모두 그 설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제가 생각건대 육씨(陸氏)가 한 말은 옳지 않다고 본다. 압로(鴨盧)는 읍루의 또 다른 번역이다. 광개토대왕이 동부여를 토벌하였다고 하였는데 동부여는 곧 동옥저라는 것은 이미 기술한 바 있다. 동옥저는 남쪽으로 말갈과 이웃하였고, 북으로는 읍루와 경계를 접하였다. 읍루(揖婁)란 말이 변하여 읍륵(邑勒)이 되었고, 고유명사로 되었다는 그 주장도 이미 야리성(也利城) · 연루성(燕婁城) 여러 성 조목 아래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압로(鴨盧)가 읍루일 뿐만 아니라 읍루는 북쪽 변경에 멀리 처해 있어 읍륵은 곧 지방에 있는 고을이라는 주장과도 서로 부합된다. 《삼국사기》문자왕 13년(504) 본기에 이르기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원문에서 빠진 것을 보완하여 번역하였다, 역자주) 백옥(珂)은 섭라(涉羅)에서 난다고 하였다. 지금 길림의 흑룡강 일대에서 나는 금이 아주 풍부하고 섭라(涉羅)는 압록(鴨綠)과도 음이 같아 백옥은 섭라요 압로의 다른 부가 아닌가 생각이 드는데 모두 읍루족이다. 17년 정미와 20년 경술은 호태왕이 옥저를 동정(東征)한 전쟁으로 모두 동국의 사서에는 보이지 않는다. 사구성(沙溝聖) · 누성(婁城)은 지금 지역이 어디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

 

守墓烟戶: 賣句余[三]民國烟二[], 看烟三; 東海買國烟三, 看烟五; 敦城□四家盡爲看烟; 于城[五]一家爲看烟; 碑利城二家爲國烟[六]; 平穰城民國烟一, 看烟十; 此[七]連二家爲看烟; 住婁人國烟卌二[八], 看烟萨二; 梁[九]谷二家爲看烟; 梁[一〇]城二家爲看烟; 安失[一一]烟廿二家爲看烟; 改谷三家爲看烟; 新城三家爲看烟; 南蘇城一家爲國烟; 新來韓濊沙水城國烟一, 看烟一; 牟婁[一二]城二家爲看烟; 豆[一三]比鴨岑[一四]韓五家爲看烟; 勾牟客頭二家爲看烟; 永底韓一家爲看烟; 舍蔦城韓濊國烟三, 看烟一; 古家[一五]規羅城一家爲看烟; 另炅古城[一六]國烟一, 看烟三; 客縣韓一家爲看烟; 阿旦城 雜珍[一七]城, 合十家爲看烟; 巴奴城韓九家爲看烟; 臼模盧城四家爲看烟; 若模盧城[一八]二家爲看烟; 牟水城三家爲看烟; 幹氐利城國烟二, 看烟?[一九] 彌?城[二〇]國烟六[二一], 看烟[二二]七; □□□□□[二三]利城[二四]三家爲看烟; 豆奴城國烟一, 看烟二; 奧利城國烟二, 看烟八; 須鄒城國烟二, 看烟五; 百殘南居韓國烟一, 看烟五; 大山韓城六家爲看烟; 農賣城國烟一; 閏奴城國烟二, 看烟廿二; 古牟婁城國烟二, 看烟八; 瑑城國烟一; 味城六家爲看烟; 就咨城五家爲看娟; 彡穰城廿四家爲看烟; 散城一家爲國烟; 規城一家爲看烟; 句牟城一家爲看烟; 於利城八家爲看烟; 比利城三家爲看煙; 細城三家爲看烟。

 

[一]  여기서는 《샤반느본》에 따랐다. 《유본(劉本)》은 토(土)변이 남아 있고, 정씨(鄭氏)는 城자로 썼다. 

[二] 《정본(鄭本)》은 仇로 썼는데 틀렸다. 범(凡)의 별체이다.

[三] 《정본(鄭本)》은 餘로 썼다.

[四] 《양본(楊本)》은 一로 썼다.

[五]  ?는 곧 于자인데 《정본(鄭本)》에는 干으로 썼다.

[六] 《정본(鄭本)》은 看烟으로 썼다.

[七] 《설문(說文)》은 모두 從口此聲으로 된 將此切이다.

[八] 《정본(鄭本)》은 三으로 썼다.

[九] 《정본(鄭本)》은 梁으로 썼다.

[一〇] 《정본(鄭本)》은 梁으로 썼다.

[一一] 《유본(劉本)》은 夫로 썼다.

[一二] 《정본(鄭本)》은 盧로 썼다.

[一三] 《정본(鄭本)》에 남아 있는 것은 려로 썼다.

[一四] 《정본(鄭本)》은 本으로 썼다.

[一五] 《정본(鄭本)》은 빠졌고, 각 탁본는 모두 家로 썼는데 寧의 늑문이 아닌가 한다. 가야국(伽倻國)에 고령가야(古寧伽倻)가 있다. 나라(那羅)는 곧 가야(伽倻)이다.

[一六]  炅은 《광운(廣韻)》에서 古惠切이다.

[一七] 《정본(鄭本)》은 彌로 썼다.

[一八] 《정본(鄭本)》은 盧模로 오기했다.

[一九] 《정본(鄭本)》에는 완전히 빠졌다.

[〇]  정(鄭)은 이곳은 미추성(彌鄒城)이라고 했다.

[二一] 《정본(鄭本)》은 七로 썼다.

[二二]  3자가 《양본(楊本)》에서는 모두 빠졌고, 각 탁본에는 7자가 빠졌다.

[二三]  이 위에 각 탁본은 5가 빠졌고, 《정본(鄭本)》은 7자 아래로 1자가 빠졌으며, 《양본(楊本)》에서는 連아래로 모두 10자가 빠졌다.

[二四]  利자는 《유본(劉本)》에서 빠졌고, 《샤반느본》·《양본(楊本)》 모두 빠졌으나, 《정본(鄭本)》에만 가까스로 남아 있다.

 

   이상을 다 합하면 모두 50성이다. 전에 보았던 여러 성을 종합해 보면, 중복된 것을 빼고 대략 100개를 얻을 수 있다. 비문이 떨어져 나가서 실제 숫자를 확정할 수 없다. 그러나 상기 문장에서 58성, 700촌을 쳐부수었다고 하였다. 또 공파(攻破)한 성이 모두 64개요, 촌이 1,400이라고도 말하여 호태왕이 경략한 지역은 이 비 중에 그 주요한 성만을 기록하였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제 고찰해 본 50성 중에 비리(碑利) · 평양(平穰) · 신성(新城) · 남소(南蘇) · 아단(阿旦) · 잡미(雜彌) · 파노(巴奴) · 약모로(若模盧) · 미추(彌鄒) · 두노(豆奴) · 오리(奧利) · 남거성(南居城) · 대산한(大山韓) · 농매(農賣) · 윤노(閏奴) · 취자(就咨) · 삼양(穰) · 어리(於利) · 비리(比利) · 나단(那旦) 등 20여 성은 이미 상술한 글에서 나누어서 별도로 설명한 바 있다.

 

   이 밖에도 현지명을 상고할 수 있는 것으로는 매구여성(賣句餘城)인데, 《삼국사기》에 대무신왕 13년(A.D 30) 가을 7월에, 매구곡(買溝谷) 사람 상수(尙須)가 그 아우 위수(尉須)와 함께 와서 투항하였다고 하였다. 매구곡(買溝谷)은 곧 매구여(賣句餘)가 아닌가 한다. 《삼국사기 · 지리지》에 삭주 내령군 선곡현은 바로 매곡현이이라고 하였다. 《고려사 · 지리지》에 안동부 예안군은 곧 매곡현(買谷縣)으로 또한 선곡(善谷)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동번기요》에 예안(禮安)은 경상도에 속하는데 서울로부터 530리 떨어져 있으며 일명 매곡(買谷) · 선곡(善谷) · 선성(宣城)이라 한다고 하였다. 《삼국사기 · 지리지》에 신성주(新城州)는 원래 구차홀(仇次忽)인데 돈성(敦城)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고려사 · 지리지》에 곡주(谷州)은 일명 덕돈홀(德敦忽)로서 속현에 신은현(新恩縣)이 있는데 일명 신성(新城)이라고 하며, 협계현(俠溪縣)은 일명 단계(檀溪)라고 한다고 하였다. 단계현은 《삼국사기 · 지리지》에서는 영풍군(永豊郡)에 속하고 한주(漢州)에 딸렸다. 《동번기요》에 황해도 신계(新溪)는 서울로부터 340리 떨어져 있으며 일명 신은(新恩) · 신성(新城) · 단계(丹溪) · 단계(檀溪) · 담주(覃州)라 한다고 하였다. 음의 이치로 헤아려 보면, 덕(德) · 돈(頓)과 돈(敦), 단(檀) · 담(覃)과 돈(敦)은 모두 쌍성에 속한다. 담주(覃州)가 곧 돈성(敦城)인 것과 같이, 이 비 중의 돈성(敦城)은 어쩌면 바로 지금의 신은(新恩)이요, 우성(于城)은 곧 우현(于縣)이다. 《고려사 · 지리지》에 안동부 순안현은 일명 우현(于縣)으로 또한 내이군(柰已郡) · 구화현(仇火縣) · 고구현(高丘縣)이라고도 한다 하였다. 《삼국사기》를 상고해 보면, 삭주 내령군(柰靈郡)은 곧 내이군(柰已郡)이요, 또한 강주(剛州)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동번기요》에 경상도 영천(榮川)은 서울로부터 660리 떨어져 있으며 일명 내령(柰靈) · 강주(剛州) · 순안(順安) · 구성(龜城)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차련(此連)은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여러 탁본에서 차(此)자는 모두 뚜렷하지 않는데 각각의 글자가 갈라졌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삼국사기》에 삭주 연성군(連城郡)은 원래 각련성군(各連城郡)이라고 하였다. 《고려사》에는 교주도에 속했다. 《동번기요》에 강원도 회양(淮陽)은 서울로부터 380리 떨어져 있으며 일명 각련성(各連城) · 연성(連城) · 이물성(伊勿城) · 회양(淮陽)이라고 한다 하였다. 양곡(梁谷) · 양성(梁城)은 원래 연칭(連稱)되는 지역으로, 그 실례를 이미 앞에 자세하게 기술하였다. 《삼국사기》 및 《고려사》에 의하면 양주(良州)도 그 이름을 양주(梁州)라 하였고 광주목(廣州牧)에도 양주(梁州)가 있었다. 《삼국사기》에 고구려 유리왕(琉璃王: 원문의 신라 경순왕은 오기임이 명백하므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역자주)33년, 군사를 출동시켜 양맥(梁貊)을 쳤으며, (한의) 고구려현(高句麗縣)을 빼앗았다고 하였다. 또 동천왕 20년(246), 관구검과 양맥(梁貊)이라는 골짜기에서 싸웠다고 하였다. 양맥족도 한반도 남쪽에 토착한 것은 아니었다. 《후한서(後漢書) · 동이전(東夷傳)》에 이르기를, "달리 맥이(貊夷)라고도 불렸고, 달리 한 갈래 종족(별종)이 있었는데 그들은 작은 물가(小水)에 의지해서 생활했기 때문에 소수맥(小水貊)으로 일컬어졌다. 고구려에서는 좋은 활이 나며, 맥궁(貊弓)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에 삭주(朔州)를 옛날 맥(貊) 의 지역이라고 하였으니, 양맥부(梁貊部)가 옛날에 살았던 지역이 꽤나 광범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삼국사기 · 지리지》에 한주(漢州) 견성군 동음현(洞陰縣)은 곧 양골현(梁骨縣)인데 《고려사 · 지리지》에서는 동주(東州)에 속한다고 하였다. 《동번기요》에 경기도 영평(永平)은 서울로부터 140리 떨어져 있으며 일명 동음(洞陰) · 양골(梁骨) · 영흥(永興)이라 한다고 하였다. 양골(梁骨)은 곧 양곡(梁谷)인가 하는 생각이 드니 양성(梁城)은 틀림없이 영평(永平) 일대에 있었을 것이다. 진전좌우길씨의 《임나강역고(任那疆域考)》에  "하서량(河西良)은 곧 안실량(安失良)의 음전(音轉)이다."라고 했다. 《삼국사기》에 명주(溟州)는 곧 하서량(河西良)으로, 다른 이름은 하슬라(何瑟羅)라고 한다. 나중에 신라에 속했고, 그 지역이 말갈(靺鞨)과 잇닿아 있으며 대체로 예(穢)의 고국이라고 하였다. 《동번기요》에 강원도 강릉(江陵)은 서울로부터 530리 떨어져 있는데 일명 예국(濊國) · 임둔(臨屯) · 명주 (溟州) · 동원(東原) 등이라 한다고 하였다. 하슬라(何瑟羅)가 명주(溟州)의 별명임을 고려하면 명주의 지역은 아주 넓었다고 생각되지만 강릉이 지금 강원도 동해 연안지역이었던 것인지 아니면 옛날 명주의 속현이었던 것인지 아직까지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안실련(安失連)은 곧 명주이니 아무런 의심할 바가 없다고 생각된다.

 

   고령나라(古寧那羅)는 곧 고령가야(古寧伽倻)이다. 《삼국사기 · 지리지》에 상주 고령군(古寧郡)은 곧 함녕군(咸寧郡)으로 원래 고령가야국(古寧伽倻國)이라고 하였다. 《동번기요》에 경상도 함창(咸昌)은 서울로부터 440리 떨어졌으며, 일명 고령(古寧) · 함령(咸寧) · 고릉(古陵)이라 한다고 하였다.

 

   미성(味城)은 혹시 《삼국사기》 웅천주 연산군(燕山郡) 미곡(未谷) 곧 미곡현(未谷縣)이 아닌가 하며, 다른 이름은 회인(懷仁)으로 《고려사》에서는 청주목에 속했다. 《동번기요》에 충청도 회인(懷仁)은 서울로부터 350리 떨어져 있으며 일명 미곡(未谷) · 미곡(味谷)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상의 8성 모두는 현재 어느 지역인지 틀림없이 확실하게 직접 증명하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이 비에 대해 연구 토론하는 사람들에게 미묘한 곳을 명백히 해서 의문을 도려 내는 데 충분히 일조할 수 있도록 제공한 따름이다.

 

   《삼국사기》 고구려 태조왕 55년(107), 동해곡(東海谷)의 수령이 붉은 표범을 바쳤다. 왕은 질산(質山)에서 사냥을 하였다고 하였다. 동해곡(東海谷)은 동해매(東海買)가 아닌가 한다. 주루(住婁)는 곧 읍루(揖婁)이다. 주(住) · 읍(揖)은 옛날에 같은 종류의 쌍성이니 주루인(住婁人)은 곧 읍루인(揖婁人)이다. 이상에서 서술한 모두 33곳은 대략 고핵(考覈)할 수 있다. 이외에 17성은 모두 상고할 만한 고실(故實: 전고)가 없는데 훗날 다시 정밀하고 자세하게 검토할 것이다.

 

   연호(煙戶)는 곧 인연(人煙: 주호) · 호구(戶口)를 이르는 말이다. 정문작(鄭文焯)씨가 말하기를, "국연(國煙)이란 말은 대개 모두가 원근의 구민(舊民)들을 데려다가 채운 것으로 원래 그 나라 사람이다. 간연(看煙)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가 빼앗아 온 한예인(韓濊人)들로서 그들로 하여금 구민들에게 보살피는 방법을 가르키도록 하였다. 이 비에서 그 사람들이 방법을 모를까 걱정이 되어 다시 구민 110가를 데려왔다고 하였으므로 간연(看煙)의 숫자가 국연(國煙)보다 몇 배나 더 많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제가 생각건대, 이 비의 아래 문장에서 신 · 구 수묘호(守墓戶)는 국연 30, 간연 300 합하여 총 330가라고 하였는 바, 이제 숫자를 합계한 바에 따르면 국연(國煙) 36, 도연(都煙) 22, 간연(看煙) 268이니 이 비에서 말하는 국연 30은 우수리가 없이 딱 떨어지는 수를 말하는 것이요, 간연 300이라고 하는 것은 도연(都煙)과 합한 것을 말하며, 총 합계가 326으로 된다고 본다. 따라서 간상리성(幹上利城)의 강연  자는 틀림없이 넉 사(四)자가 이그러진 글자요 합계하면 마침 330이란 숫자가 된다. 330호 내에는 구민 110가가 있는데 그 구민 모두가 국연(國煙)이 아니요, 간연(看煙)도 한예(韓濊)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330가 안에서 혹시 어떤 성의 연호(煙戶)가 110가의 구민인가를 확실하게 가리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도연(都煙)은 한예가 아님은 알 수 있다.

 

   매구여민(賣句餘民) · 평양성민(平穰城民) · 주루인(住婁人)은 한예가 아님도 알 수 있다. 어떻게 아는냐고요? 이 비에 백잔(百殘)의 왕이 스스로 맹세하기를 앞으로 영원히 노객(奴客)이 되겠다. 또 왜인이 성지(城池)를 파괴하여 노객(奴客)을 백성으로 삼았다는 말이 있다. 이제 노객(奴客)과 백성(百姓)은 양립할 수 없음을 알았고, 한예(韓濊)는 새로 약취해 온 노객인 만큼 백성이란 한예가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국연(國煙) · 도연(都煙) 및 매구여(賣句餘) · 평양(平穰) · 주루(住婁)를 합하고, 여러 곳의 간연(看煙)을 여기에 더하면 총 130가가 되니, 이로써 110가도 성수(成數: 우수리 없이 딱 떨어지는 수)에 근거했음을 알 수 있다.

 

國罡[一]廣開土境好太王存時敎言: 祖王[二]先王,但敎取遠近舊民守墓灑掃。吾慮舊民轉當赢劣, 若五萬年之後, 安守墓者, 但取吾躬率所略來韓濊, 令備灑掃[三]。敎言如[四]。是以如敎令, 取韓穢二百廿家, 慮其不知法則, 復取舊民一百十家, 合新舊守墓戶國煙卅, 看煙三百, 都合三百卅家。自上祖先王以來, 墓上不安石碑, 致使守墓人煙戶羌錯。惟國罡上廣開土境好太王盡爲祖先王墓上立碑銘, 其煙好不令羌錯。

 

[一]  정(鄭) · 양본(楊本)에서는 으로 썼는데 罡을 岡으로 여겼다. 육조(六朝) · 수 · 당의 별체이다. 《당장부묘지(唐張浮墓志》에 "晨復斷"이 있다. 《석벽사철미륵송(石壁寺鐵彌勒頌)》에 "物之塵"이란 말이 있다. 또 《단지현비(段志玄碑)》에서 剛을 모두 으로 썼으니, 岡은 으로 쓸 수 있다.

[二] 《정본(鄭本)》에는 빠졌다.

[三]  穢는 《정본(鄭本)》에는 薉로 썼는데 기록할 때 《후한서(後漢書)》의 글자를 그대로 답습해 썼다.

[四] 《유본(劉本)》에서는 此로 썼고, 여기서는 《샤반느본》에 따랐다.

 

又制守墓人[一], 自今以後, 不得更相轉賣。雖[二]有富足之者, 亦不得擅買。其有違令賣者, 刑之, 買人制令守墓之。

 

   이 비에서 수묘자는 광개토대왕이 몸소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약탈해 온 한예(韓穢)만을 대상으로 묘를 청소하게 할 것이라도 하였다. 여기서 한예(韓穢)는 연칭되어 있기도 하고 혹은 한(韓)으로 생략하여 일컫기도 하였으니 대산한(大山韓) · 영저한(永底韓) · 두비압잠한(豆比鴨岑韓)과 같은 것이다. 《후한서(後漢書)》·《삼국지(三國志)》는 모두 한(韓) · 예(濊)를 두개의 전기로 나누었으나 사실 한 · 예는 같은 종족이다.  《일주서(逸周書) · 왕회해(王會解)》에 성왕이 성주(成周)에서 제후들의 모임을 크게 열었는데 예인(穢人)이 와서 공물을 바쳤다고 했다. 이에 대한 주에서 예(穢)는 한예(寒穢)로 동이의 별종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한예(寒穢)가 곧 한예(韓穢)임을 알 수 있다. 이 비로써 역사를 증명하면 확실히 같은 종족이다. 《일주서(逸周書)》가 쓰여진 시대는 문제가 되기는 하나 《한서(漢書) · 무제본기(武帝本紀)》에 원삭 원년(B.C 128) 가을에 동이 예군(穢君) 남려(南閭) 등이 28만을 거느리고 투항하여 창해군(蒼海郡)을 만들었다고 하였으니 예(穢)라는 이름은 늦어도 틀림없이 한초에 생겼을 것이다. 진표(晉灼)의 주에 이르기를, "薉"는 옛날 예(穢)자라고 하였다. 안사고(顔師古)는 주석에서 남려(南閭)란 예군(穢君)의 성씨라고 하였다, 《후한서(後漢書)》·《삼국지(三國志)》에서 예(穢)는 모두 예(濊)로 썼으며, 동성자이다. 남려(南閭)는 안라(安羅)의 변음이다. 고대의 어음에서는 후아음(喉牙音)가 퍼지면서 설음(舌音)으로 되는 것이 대단히 많으니 요성(堯聲)에 뇨(嬈)가 있고, 구성(九聲)에 유(禸)가 있으며, 동성(董聲)에 난(難)이 있고, 이성(以聲)에 능(能)이 있는 것과 같다. 현대 음으로 산동 일대에 안(安)을 남(南)으로 읽는 것이 있으므로 안라(安羅) · 가라(加羅) · 가야(加耶)는 모두 한예 씨족의 통칭임을 알 수 있다. 앞에서 한예는 한반도 남쪽의 토착민이라고 말했는데 바로 여기서 그 증거의 하나를 얻게 된 것이다. 한예족이 살았던 지역은 《후한서(後漢書) · 동이전(東夷傳)》에 따르면 예는 북으로는 고구려 · 옥저와 접하고, 남쪽으로는 진한(辰韓)과 접하며, 동으로 대해에 막혔고, 서로는 낙랑에 이른다고 하였다. 《삼국지(三國志) · 동이전(東夷傳)》에 한(韓)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동 · 서는 바닷가를 경계로 하고, 남으로 왜와 서로 접하며, 사방이 대략 4천 리쯤 된다. 세 종족이 있는데 하나는 마한(馬韓)이요, 둘은 진한(辰韓)이요, 셋은 변한(弁韓)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공손모(公孫模) · 장창(張敞) 등이 (이곳으로 유랑하던 한나라 백성을 거둬들이고, 군사를 일으켜 한예(韓濊)를 치자 유랑하던 백성(구민)들이 점차 되돌아 오게 되었고 이후로 왜(倭) · 한(韓)은 바로 대방에 귀속되었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중국을 가리킴, 역자주) 사적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한반도 남단<옛날 임나 구역>에 거주하던 자들을 한(韓)이라 하고, 한반도의 동북부<지금의 함경도 경내>자들을 예(濊)라고 하였으니 한예는 원래가 토착민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여족이 남침하였다가 물러간 지역이 두 곳이 되었으며,그뒤로 한(韓)과 예(濊)으로 나뉘게 된 것이다. 다시 동국의 사적을 상고해 보면, 역시 똑 같은 기록이 있는데 예(濊)를 말갈(靺鞨)로 여기고 있다.

 

 

《삼국사기》 태조왕 50년 기에 예맥은 원래 조선의 땅으로, 남으로 진한(辰韓)과 북으로 고구려 · 옥저와 접해 있고, 동으로 대해에 막혔고, 서로 낙랑에 이른다고 하였다.(《삼국사기 · 태조왕기》에는 이런 이런 기록이 없고, 《후한서 ˙ 동이예전》에 그와 비슷한 기록이 있기는 하다, 역자주) 《삼국유사》에는 말갈의 땅은 아슬라주(阿瑟羅州)와 접하였다고 하였고, 또 《동명기(東明記)》를 인용하여 졸본성(卒本城)은 땅이 말갈에 연접하고 있다고 있다고 하였다. 또 온조왕 33년 기에,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서 변강을 침공하매 편안한 나날이 없다…….'"라고 하였는 바, 이 글 속에 나오는 말갈은 대체로 예(濊)를 가리키며 게다가 상당히 강성하였다. 그런데 이 비에서 나오는 한예는 아주 미약한데 어떻게 이와 같이 강력하게 대항하는 말갈일 수 있겠는가? 말갈은 신라 건국 초기부터 진흥왕 때 쇄락하기 시작할 때까지 그간에 5~6백년 동안의 역사에서 우리나라(중국을 가리킴, 역자주) 사적에서 보이지를 않는다. 오랑캐 말갈의 일어난 것을 고찰해 보면, 제일 먼저 물길로 칭한 것은 북위 때부터 비롯되었다. 당 예종(睿宗) 이후로는 다시 발해로 부르다가 차츰차츰 강성해졌는데 《삼국사기》의 기록과는 상반된다. 《삼국사기》가 근거로 했던 사료는 틀림없이 당 이후에 나온 것이라는 의문을 떨쳐 버릴 수 없으니 그 당시 말갈은 강성하고 그가 차지하고 있던 지역과도 서로 같기 때문에 예국(濊國)과 관한 사건은 모두 말갈(靺鞨)이라고 했던 것이다.[일] 이제 우선 말갈이 일어났던 역사사실을 대략 고구해 보면 틀림없이 우리의 주장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될 것이다. 《북위서(北魏書) · 물길전(勿吉傳)》에 물길국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는데 옛날 숙신국으로 낙양에서 5천 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다. 《북사(北史) · 물길전(勿吉傳)》에는 이 나라는 고구려의 북쪽에 있으며 다른 이름으로 말갈이라고 하며, 읍락마다 따로 주인이 있어 서로 통일이 안되었다. 그 나라 사람은 사납고 용감하여 동이(東夷) 가운데 가장 힘이 세고, 언어는 독특하고 다르며, 항상 두막루국(豆莫婁國) 등을 얏잡아 보았으며, 여러 나라가 모두 이 나라를 두려워 한다. 그 나라의 부는 7종인데 하나는 속말부(粟末部)라 하고, 고구려와 접하며, 강병이 수천 명으로 용맹스러운 사람이 많아 늘 고구려를 침략했다. 그 둘은 백돌부(伯咄部)라 하고, 속말의 북쪽에 있으며 승병은 7천이다. 그 셋은 안차골부(安車骨部)라 하고, 백돌의 동북에 있다. 그 넷은 불렬부(不涅部)라 하고, 백돌부 동쪽에 있다. 그 다섯은 호실부(號室部)라 하고, 불렬부 동쪽에 있다. 그 여섯은 흑수부(黑水部)라 하고, 안차골부 서북에 있다. 그 일곱은 백산부(白山部)라 하고, 속말의 동남에 있는데 승병은 3천에 불과하나, 흑수부가 가장 용맹스럽다. 불렬 이동은 모두 화살을 석촉으로 사용하는데 곧 옛 숙신씨(肅愼氏)라고 하였다.

 

 

  《통전(通典) · 변방전(邊防典)》에 "물길(勿吉)은 후위(後魏) 때 통했다. 수문제 초에 말갈국(靺鞨國)에서 방물을 바치러 온 사자가 말하기를 물길(勿吉)이라고 하였다. 서북은 거란과 접하고 항상 서로 약탈을 일삼았으며, 중국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오직 속말(粟末) · 백산(白山)만 가깝다. 수양제 초에 그 추장 돌지계(突地稽)가 그 부하들을 거느리고 투항하여 왔으므로 이들에게 유성(柳城)에서 살도록 하였다. 요동의 전쟁에서 돌지계는 그 무리를 거느리고 종군하여 항상 전공이 있었다. 황제가 강도(江都)로 순행할 때 거기까지 따라왔던 것을 잠시 후에 유성으로 보내버렸다. 대당 황제의 교화가 먼 곳까지 미쳐 말갈국에서 사신이 자주 와서 공물을 바쳤다."라고 하였다. 전의 기록들을 자세히 고찰해 보면 읍루(揖婁) · 물길(勿吉) · 말갈(靺鞨)은 모두 숙신(肅愼)의 후예이다. 《신당서(新唐書) · 흑수말갈전(黑水靺鞨傳)》에, "동쪽으로 큰 바다에 인접해 있고, 서쪽으로 고려에 이르고, 남쪽으로 실위에 이른다. 몇 십 부로 나뉘어 각자 다스리는 수령이 있다. 흑수말갈에서 가장 중요한 나라는 속말부가 있는데 가장 남쪽에 위치해 있다."라고 하였다. 또 《발해본전(渤海本傳)》에 "(발해는) 원래 속말(粟末) · 말갈(靺鞨) 중에서 고구려에 의부했던 부(部)의 하나로, 성씨가 대(大)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 부중을 거느리고 읍루(揖婁)의 동모산(東牟山)에서 의지해서 지켰다. 그 지역은 영주(營州)의 동쪽 2천 리에 처해 있고, 남으로 신라와 바로 이웃하여 이하(泥河)를 경계로 하고 있으며[一], 동으로는 큰 바다에 이르기까지요 서쪽으로는 거란이다. 성곽을 쌓아 거주하고 있으며, 고려로 도망하였던 나머지 무리들이 점차 발해로 돌아왔다."라고 하였다. 이상의 여러 조목에 따르면 말갈은 부락이 매우 많았고, 흑수말갈(黑水靺鞨)이 가장 강성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뒤에 속말부(粟末部)가 점차 강성하여 그들이 살고 있던 지역이 곧 전술한 한예(韓濊) 및 동옥저가 나라를 이뤘던 경내이다. 남으로 신라와 이하(泥河)를 경계로 하였다는 것은 중국과 동국의 사적이 똑 같다. 그러나 말갈은 사실 부여족으로 그들이 살았던 지역이 동옥저와 같을 뿐만 아니라 그 부족 명칭도 옥저에서 왔다.[二] 그러나 호태왕 때의 동옥저는 사실 아주 미약해서 고구려에 신속(臣屬)하였던 것이요, 그들이 흥성하게 된 것은 당 중종(中宗) 이후이다. 《발해본전(渤海本傳)》에, "발해 통천 연간에 측천무후가 거란 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를 허국공(許國公)으로, 걸걸중상(乞乞仲象)을 진국공(震國公)으로 봉했는데 걸사비우가 명령을 받기를 거부하자 나중에 옥금위대장군 이해고(李楷固) 등에게 걸사비우를 치도록 명하여 그를 목베었다. 걸걸중상의 아들 대조영(大祚榮)을 끝까지 추격하였으나 대조영은 고려 · 말갈병에 의지해서 해고를 막아 해고는 대패했다. 대조영은 자립하여 진국왕(震國王)으로 칭했다. 예종 선천 연간에 사신을 보내 대조영을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渤海君王)으로 임명하고, 그가 통할하는 지역에 홀한주(忽汗州)를 설치하여 대조영을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말갈이라는 칭호를 버리고 발해로 전칭하였으며 마침내 해동의 성국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이 나라에는 5경 · 15부 · 62주였는데 5대에 이르러 거란에 병합되었음은 모두 《발해국지(渤海國志)》에 보인다. 이제 고명한 바에 의하면, 말갈은 처음 북위에서 시작되어 당초에 강성하였는데 《삼국사기》는 도리어 말갈인이 양나라에 들어와서 쇠약해졌다고 하였으며, 게다가 맥국(貊國)은 신라의 북쪽과 동옥저의 남쪽에 있다고 하고, 해동의 사적에서는 이와 똑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라는 비록 미약하였으나 때로는 고구려에 의부하여 이웃 나라를 침략하여 소란을 피웠으나 양한(兩漢: 전한과 후한) 때에는 소멸되지 않았다. 그들이 망한 것은 동옥저가 남침한 뒤이다. 이번에 이 비 중에서 말갈은 언급되지 않았으나 사실을 조사해 보면, 말갈은 또 한 · 위(漢魏) 말기에는 아직 강성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 비로써 역사를 고증함에 있어서는 최소한 단언컨대 지금의 함경도 지역은 호태왕비 이전에는 틀림없이 말갈이라는 그 나라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1928년 8월 청화연구소(淸華硏究所)에서 쓰다

(《국학논총(國學論叢)》 제2권 제1호에 실려 있다)

 <끝>  

출처 : 진실되게 살자
글쓴이 : 한겨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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